시간 잘 갑니다. 백수가 이렇게 잡념이 없어서 미안할 만큼 몸과 육체가 편안합니다. 꿈에 암벽을 탔는데 발이 잘 떼지지 않아서 답답했지만 낙상 하지 않고 소심하게 꽉 붙들고 있었어요. 옷가지를 정리해 구제 숍에 기증하러 갔더니 국화 차를 타 줍디다. 안흥 찐빵이 당겨서 숍에 들어갔는데 장사를 하지 않았어요. 연료비 때문에 감가 상가가 맞지 않은 걸까요? 그나저나 여기도 상인들만 죽어라 죽어라 하고 있는 것 같아 불쌍하네요. 요즘 같아서는 장사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이 남는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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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백수 찬양 하는 건 아니니 오해는 마시라. 예주가 답글을 달아줘서 고맙네요. 시간 내서 아비를 한 번 찾아오면 고기를 사줄 생각입니다. '고통과 권태'의 반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해탈과 예술'이라는 대안이 나왔는데 왜 그럴까 궁금해졌어요. 살아있는 모든 생태계는 의지 작용을 합니다. 당근 시공간과 인과율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고통 문제의 해결책은 없어요. 죽어야 끝납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서 '무의지/무사심 상태'로 진입하는 것이 유일합니다. 그것도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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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죽음은 몸의 열-호흡-의식이 사라진 상태인데 열반이나 깊은 삼매는 감각-열-호흡은 있는 채로 무의식 상태를 말해요, 고통도 기쁨도 꺼진 니르바나 상태를 말한다고 합니다. 무서버라. '종교적 명상'을 통해 해탈과 예술 세계의 진입으로 '무사심'에 이룰 수 있다는 말이 믿어지시나요? 그래서 '예술'이 모든 학문 위에 최고봉이라는 것 아닙니까? 쇼펜하우어 계열인 니체도 '의지'는 실존적 고통도 긍정하라며 '긍정적 의지'를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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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긍정되면 고통이 아니겠으나 실존에서 인간은 결핍으로부터 욕망의 글레에서 허덕이겠지요. 물론 이 어쩔 수 없음을 긍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때 주색잡기 보다는 예술과 종교의 순기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내 욕망의 전모를 보고 지독한 수도를 할 때 평상심(무의지, 해탈)을 얻게 된다는 건가. 예술을 통해 '무사심'한 관조, 무심한 거리 두기를 할 수 있다는 뜻 같기도 하고. 이러든지 저러든지 사물의 본질에 접근했을 때 욕망(의지)의 충동, 인과적, 무의식적 의지 작용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2024.11.23.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