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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궁정 관기 정장 사진(1900년대)
기생을 부르는 별칭 '해어화'는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뜻으로 '미인'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당나라 현종이 비빈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연꽃을 구경하다가 양귀비를 가리켜 "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이해하는 이 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해어지화(解語之花)'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생(妓生, a gisaeng girl; a singing and dancing girl)은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호칭이다. 지난날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 노래·춤 등으로 흥을 돕는 일을 직업으로 삼던 여자를 일컫는 말로 '예기(藝妓)'와 함께 쓰였다.
특히 '기생'의 한자어는 우리나라 문헌에서 조선시대 와서야 비로소 출전을 찾을 수 있다. '기생'의 '생'은 일부 명사 뒤에 붙어 '학생'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다. 또한 성씨 뒤에 붙어 '젊은이' 또는 '홀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임을 나타낸다. 예컨대 교생, 서생, 선생, 학생, 이생, 허생 등과 같은 경우이다.
기생의 원류는 신라 24대 진흥왕 때에 여자 무당 직능의 유녀화에 따른 화랑의 '원화(源花)'에서 찾는다. 무당의 유녀화는 인류의 매춘 역사를 논의하는 일반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정약용과 이익은 기녀의 문헌 기록을 들어 고려 때에 그 기원을 찾았다.
백제 유기장의 후예인 양수척이 수초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이 남자는 노예로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다.
고려 때에는 관기(官妓)를 기첩(妓妾)으로 맞고 사대부들이 집마다 둔 기록이 있어 공물이면서 사물로도 여긴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관기제도를 한층 정비하였으나, 표면상으로만 '관원은 기녀를 간奸할 수 없다'는 『경국대전』의 명문이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는 관기는 공물이라는 관념이 불문율로 되어 있어 지방의 수령이나 막료의 수청기(守廳妓) 구실로 삼았다. 관비(官婢)와 관기(官妓)는 엄연히 구별되었지만, 세종 때는 관기가 모자라 관비로 충당하기도 했다. 관기제도는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였으며, 수모법(隨母法)에 따라 어머니가 관기이면 딸도 관기가 되었다.
이것은 비인간적이면서도 고약한 경우이다.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한 지방 수령관이 관기 모녀와 관계를 맺고, 모녀가 번갈아 가면서 수청을 드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처럼 세습되는 기생이 아닌 때는 고아거나 빈곤하여 팔리는 것처럼 외적 환경에 의했다.
그밖에 자발적 의지에 의한 것은 허영심에 본인이 희망하거나, 과부가 되어 자원하거나, 양반의 부녀로서 음행하여 자녀안(恣女案)에 기록된 경우가 있었다.1)
『고려사』의 기(妓) 출전(제129권 열전 제42 반역3 최충헌)
조선시대의 교방은 기생을 관장하고 교육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가무 등 기생이 갖추어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 행의(行儀)·시·서화 등을 가르쳐 상류 고관이나 유생들의 접대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
혜원 신윤복의 '전모를 쓴 여인'(국립중앙박물관 소장)
8, 9살이 된 기생은 동기(童妓)라 하는데, 교방에서는 12세부터 교육을 시켰다. 춤을 잘 추는 기생은 무기(舞妓), 노래를 잘 하는 기생은 성기(聲妓) 또는 가기(歌妓)라 불렀다. 또한 악기를 잘 다루는 기생은 현기(弦妓) 또는 예기라 하였다.
외모가 뛰어난 기생은 미기(美妓), 가기(佳妓), 염기(艶妓) 등으로 불렀다. 특히 사랑하는 기생은 애기(愛妓), 귀엽게 여기어 돌보아 주는 기생은 압기(狎妓)라 하였다. 나이가 지긋한 기생은 장기(壯妓)라 했고, 의로운 일을 한 기생은 의기(義妓)로 칭송받기도 하였다. 물론 기생의 우두머리는 행수 기생으로 도기(都妓)다.
어두운 호칭으로 노래와 춤과 몸을 파는 기생인 창기(娼妓), 천한 기생이라는 천기(賤妓), 퇴물기생이라는 뜻의 퇴기(退妓) 등이 있다. 조선 후기에 두드러지는 기부(妓夫), 즉 기생서방으로 종8품 벼슬인 액례·별감·승정원 사령·의금부 나장·포교·궁가·외척의 겸인 청지기·무사 등이 등장하여 후대에 오랫동안 지속된다.
대원군 시절에는 금부나장과 정원사령은 오직 창녀의 서방이 되는 것으로 허락하였을 뿐 관기의 서방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기생을 첩으로 삼으려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기생서방에게 돈을 주고 그 몸을 속량(贖良)해야 한다. 이는 그동안 먹여 살린 비용을 갚는 것으로, 사회적 합의였다.
조선시대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났던 곳은 서울·평양·성천·해주·강계·함흥·진주·전주·경주 등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권번(券番)이 이 지역에서 이러한 역할을 이어갔다. 권번은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요릿집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花代)를 받아주었다.
비로소 일반인도 요릿집에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된 기생은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바쳤으며, 이들 권번 기생은 다른 기녀들과는 엄격히 구분되었다. 그 당시 기생에 대해서는 호감과 배척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함께 있었다. 한쪽에서 보면 기생들은 봉건적인 유물로서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으나, 실상은 현대적인 대중문화의 스타이기도 하였다.
주1). 1 현문자, 「기녀고」, 동아대학교 대학원, 1967.
2] 중국의 기생
기생에서의 '기(妓)'는 형성문자로 '계집 녀(女)'의 뜻과 '가를 지(支)'에서 바뀐 음이 합하여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한·중·일 기생 호칭의 변별이 필요하다. 중국에서는 기생이라는 호칭 대신에 '기' 또는 '기녀' '창기' 등을 널리 사용하였다.
기생이라는 호칭의 용례를 찾을 수 없을뿐더러 인용조차도 않았다. 중국의 문헌 기록을 보면 우리와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기(妓)'와 '기(伎)'의 차이다. '기녀(伎女)'는 고대의 여자 가무예인을 가리키는데, '기녀(妓女)'는 여자 가무예인이지만 매음을 위해 영업하는 여자로도 그 용례가 보인다.
중국의 옛 문헌에는 '기(妓)'보다는 '창(娼)'으로 불리었다. 특히 옛 시대 창녀는 음악에서 기원한다. 이런 까닭으로 후세에 창녀가 비록 살기 위해 매음을 하지만 음악과 가무가 그들의 주요 기술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창(娼)'은 남녀로 구분되지 않았다.
중국 한나라 이래로는 창(倡), 기(伎), 여창(女倡), 여기(女妓), 어기(御妓) 등으로 불리었다. 당나라 이후에 관기(官妓), 가기(歌妓), 영기(營妓), 음기(飮妓), 교방여기(敎坊女妓), 성기(聲妓), 가기(家妓)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여악(女樂)의 연희가 전제되고 있다.
창(娼)은 은나라 시대에는 종교매음의 '무창(巫娼)'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서주 시대에 노예 '창기'와 '관기'가 처음으로 생겨나고, 춘추전국 시대 이후 '여악'과 '창기' 발달이 이루어졌다. 한무제 때 군영에 설치되었던 창기를 '영기'라 하였다.
『서언고사 書言故事』의 기록을 보면 '옛날에는 기(妓)가 없었는데, 한무제가 처음으로 영기를 설치하여 아내 없는 군사들을 위로했다'고 하여 위만조선 땅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면서 함께 들여온 것이 '영기'였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사노예처럼 집안에 둔 '가기'와 '성기'의 전성기였다. 당나라 시대에는 그 유명한 '진사'와 '창기'의 관계가 두드러진다. 당나라에서는 관원들이 창기와 함께 있는 것이 법에 저촉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대부들이 창기와 함께 연희를 즐기는 풍조가 생겼다.
송나라 시대에는 '태학생'과 '창기' 관계가 많이 회자된다. 그 후 청나라 시대에는 예전 왕조처럼 교방을 두고 국가에서 관리하였다. 나중에 개인이 창기를 경영하는 식으로 유지되다가 폐창(廢娼)으로 진행되어간다.
청나라 말기 상해 10대 명기 사진
3] 일본의 기생
일본에서는 기생이라고 하지 않고 유녀(遊女)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예기(藝妓)'는 일본 기생을 일컫는 말로, 예자(藝者, げいしゃ, 게이샤)로 통용된다. 게이샤는 일본에서 1688 ~1704년경부터 생긴 제도로서 본래 예능에 관한 일만 하였다.
하지만 유녀가 갖추지 못한 예능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 게이샤와 춤을 추는 것을 구실로 손님에게 몸을 파는 게이샤의 두 종류로 나뉘었다. 전문적으로 질 높은 접대를 제공해야 했던 그들은 높은 수준으로 일본 전통예술의 훈련을 받았다. 기품 있는 게이샤는 매력적이면서 우아했다
일본 게이샤 사진엽서
또한 흥미로운 것은 예전에 게이샤는 남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18세기에 여자로 바뀌었으며 젊은 소녀들이 사춘기에 이르기 전에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게이샤는 아름다운 사람, 예술로 사는 사람, 예술을 행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들은 예술분야 즉, 음악·서예·다도·시·대화 그리고 샤미센이라 부르는 악기를 배운다.
그들은 화려하고 우아한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입고 하얀 얼굴에 아주 빨간 입술로 화장을 한다. 풍기를 문란하게 한다 하여 여러 차례 금지령을 내린 일도 있으나 메이지 시대 이후 일반 게이샤의 수는 크게 증가하여 지방도시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근대에 와서는 예능의 정도에 관계없이 매춘만을 전문으로 하는 여성이 게이샤의 이름으로 술자리에 나가는 일이 많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권번은 예기 중심의 기생권번이 아니라 유곽의 공창(公娼)인 예창기(藝娼妓)라고 볼 수 있다.
1900년대 초 일본인 예창기가 수입되어 당시 남대문과 태평로에 5, 6호의 애미옥(曖昧屋)이 있어서 '어요리(御料理)'의 간판을 붙이고 10여 명의 매춘부가 비밀 영업을 하였다.
러일전쟁 때 일본인이 격증하여 예창기가 증가하면서 예기의 권번도 생기고 창녀의 유곽도 생겼다. 일본의 유곽제도는 집창제(集娼制)로 매음업자를 일정한 곳에 모아 사창(私娼)이 일반주거지역으로 침투·난립하는 것을 단속한다는 취지에서 생겨난 것이다. 1924년 당시 일본에 생겨난 유곽은 544개소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 서울에는 중구 묵정동 일부 지역이 '신마치' 유곽의 소재지가 되어 여기에서만 매음업이 허용되었다. 신마치 유곽지대는 동·서로 나누어져 동쪽은 조선인이 경영하여 창기들도 주로 조선인이었으며, '한성대좌부조합'을 결성하였다.
서쪽은 '다이와신치'라고 해서 주인·창기가 주로 일본인이었으며, '신마치유곽조합'을 결성하였다. 그 뒤 유곽은 개항지에 예외 없이 먼저 생겼고, 이어 내륙 도시들로 번져갔다. 당시 유곽에서 여자를 사는 사람은 큰 홀의 벽에 기대어 늘어앉은 여자를 직접 고르거나 번호가 붙은 사진첩 또는 벽에 걸린 사진들을 보고 번호를 지정하였다. 유곽이 설치되자 임질·매독 등의 성병도 번져 대개의 유곽에는 그 구내에 성병진료소를 설치하였다.
서울에 있던 일본인의 예기권번은 욱정 1정목 28번지에 있던 혼권번, 신정 12번지의 히가시권번, 원정 2-1번지의 난권번, 그리고 츄우나가권번이 있었는데 1924년 기준으로 혼권번의 예기 숫자가 268명이었다.
묵정동의 신마치권번은 창기 권번으로 일본인 창기가 340명이었으며, 또 용산에 야오이마치 유곽이 있었다. 지방의 일본인 권번은 거의 몸을 파는 창기 중심의 유곽들이었다.1)
일제 과거사 청산의 대상으로 '집창촌(集娼村)'도 예외가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들어온 '유곽'이 집장촌의 유래이면서 당시 전국에 설치된 지역이 대부분 현재 집장촌 지역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부산의 속칭 '완월동' 집창촌은 일제에 의해 소화통(昭和通)으로 불리던 충무동의 완월동 지역에 1907년 '미도리마치 유곽'을 조성하면서 형성되었다. 이곳에서부터 일제에 의해 생겨난 유곽이 전국으로 확산된 것이다. 광복 후 미군정 시대에 '공창제도'가 폐지되자 '완월동' 집창촌은 사창화된다
일제강점기의 부산 미도리마치(綠町) 유곽 사진
각주 : 1 . "京城의 花柳界", 『개벽』 제48호, 192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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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제시대의 대중스타
기생 이야기.
옛날은 남자들의 천국
이였을것 같습니다.
남자들의 좋은 시절 다 지난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