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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시니
삿 6:1-10
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2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3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치러 올라와서
4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5 이는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6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7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9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10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삿 6:1-10 / [이스라엘을 미디안에 넘기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 여호와께서 지켜보고 계시는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못된 짓만 일삼았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7년 동안 이스라엘을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 넘겨 고통당하게 하셨다. 2) 미디안 사람들이 어찌나 이스라엘 사람들을 억압하였던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속에다 굴을 파거나 산성을 만들어 미디안 사람들을 피해 살기도 하였다. 3) 이스라엘 사람들이 밭에다 씨를 뿌리는 때가 되면 미디안 사람이 아말렉 사람이나 동쪽의 사막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올라와서 4) 진을 치고는 가사에 이르기까지 온 들판을 못쓰게 망쳐 놓았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먹거리뿐만 아니라 양 떼나 소 떼나 나귀 떼까지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빼앗아 가곤 하였다. 5) 이들은 자기들이 기르는 가축 떼와 천막까지 가지고 메뚜기 떼가 새까맣게 밀려오는 것처럼 몰려들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건 낙타건 할 것 없이 엄청나게 밀려 들어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을 모조리 황폐하게 만들었다. 6) 이렇게 미디안 사람들이 몰려와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약탈하였다. 어찌나 그 약탈 행각이 심했던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다시 여호와께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다. 7) 이스라엘이 이렇게 여호와께 울부짖자 8) 여호와께서도 마음 아파하시면서 예언자 한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이르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었고, 또 지긋지긋하게 고생하며 노예살이하던 그 땅에서 너희를 해방시켰다. 9) 다시 말해서 나는 너희를 못살게 굴던 애굽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또 너희들을 입도 벙긋하지 못하게 짓누르며 착취하던 못된 것들의 손아귀에서 온전히 해방시켰다. 뿐만 아니라 너희 앞에서 그 못된 것들을 몰아내고 너희에게 그 땅을 주었다. 10) 그리고 너희에게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아모리 사람들이 사는 땅에서 함께 산다고 해서 아모리 사람들이 섬기는 신을 그들과 함께 섬겨서는 안 된다고 똑똑히 말해 두었다. 그러나 너희는 내 말을 아예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온갖 죄악을 행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고통을 당하게 하시는 내용입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게 하십니다.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1-2) 하나님께서 무려 7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십니다. 그래서 온갖 고통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앞에서 또다시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1). “또”는 히브리어 아싸(עָשָׂה)로 꾸미다, 만들다라는 뜻입니다. 계획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우발적인 범죄가 아니라 악한 일들을 계획한 것입니다(시 52:1). 성경의 교훈은 악의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살전 5:22). 그런데 악을 계획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입니다.
대적들이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치러 올라와서(3-6) 진을 치고 농작물을 해치며 양과 소 등을 약탈해 갔습니다(4). 그들은 메뚜기 떼처럼 몰려와서 모든 땅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자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란 조직을 이끄는 사람입니다. 헨리 블랙커비는 「영적 리더십」책에서 영적 리더십은 “사람들을 움직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영적 리더는 자신이 이끄는 조직이나 사람들의 목표를 이루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7-1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지자를 보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7-8). 백성들이 미디안의 압제 아래 살아간 지 7년이 지났습니다. 고통이 갈수록 심해지니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와 회개했습니다(6).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그들에게 미디안에게 압제를 당하는 것은 우상 숭배 때문이라고 책망하시고 구원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8). 백성들이 회개하게 된 이유는 미디안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들은 고난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고난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고난당하는 것도 유익입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적용: 당신은 최근에 고난당한 적이 있나요? 고난의 원인을 생각해 보았나요? 본문의 말씀처럼 고난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를 하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7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유목 민족이었던 미디안은 추수 때가 되면 메뚜기 떼처럼 밀려와서 식물과 가축을 남겨두지 않고 쓸어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미디안의 약탈을 피해 산으로 도망가 굴에 숨어 지냈습니다. 이렇게 고통 중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한 선지자를 보내어 미디안에게 고초를 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왜 그런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지 이유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뒤를 돌아보고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설 교 >
기드온
삿 6장 1~18절 / 이동휘목사
1. ‘기드온’ 하면, 미디안 대군 13만 5천명을 단 300명 용사만으로 정복한, 전쟁사에 길이 남을 영광스러운 승리를 떠올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기드온 300명 용사’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유대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영예스러운 승리로 결코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국가적 위기를 맞았을 때, 과거 기드온 당시 미디안 전투에서처럼 승리할 수 있도록 이렇게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시83:9-18) 주는 미디안인에게 행하신 것 같이,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소서. 그들은 엔돌에서 패망하여 땅에 거름이 되었나이다. 그들의 귀인들이 오렙과 스엡 같게 하시며 그들의 모든 고관들은 세바와 살문나와 같게 하소서.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 하였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그들이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 삼림을 사르는 불과 산에 붙는 불길 같이 주의 광풍으로 그들을 쫓으시며 주의 폭풍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소서. 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그들로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낭패와 멸망을 당하게 하사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이스라엘 백성이 앗수르에 패배하고 잔혹한 지배를 받게 되었을 때도,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멸하시도록 이렇게 기도하며 앗수르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사10:24-27)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오래지 아니하여 네게는 분을 그치고 그들은 내 진노로 멸하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 오렙 바위에서 미디안을 쳐 죽이신 것 같이 하실 것이며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서 하신 것 같이 하실 것이라.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참으로 ‘기드온’은 하나님의 사자가 “(삿6:12)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라고 부른 것처럼, 사사기 6-8장에 걸쳐 언급할 만큼 ‘큰 용사’로 불러 사무엘과 다윗과 같은 위대한 영웅들과 함께 믿음의 선진으로(히11:2) 여겨지고 있습니다.
(히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2. 그러나 기드온은 처음부터 ‘큰 용사’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가정이 최소한 열 명의 하인을 두고 있었을 만큼(삿6:27) 재정적으로 상당히 풍족했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은 가정에서 가장 약하고, 당시 막내로서 천시받은 자였습니다(삿6:15). 그의 아버지는 그 지역 우상인 바알 종교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과거에 하셨던 일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가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6:12) 고 말씀하시자 이렇게 말한 것으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삿6: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우상숭배하는 아버지 밑에서 가장 약하고 천대받은 말째(삿6:15) 기드온을 하나님께서 ‘큰 용사’로 부르셨습니다. 다시 말해 ‘큰 용사’로 만들어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삿6:14)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이에 기드온이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삿6:15) 며 사양하자, 하나님께서 거듭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삿6: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곧 ‘큰 용사’로 변화시켜 쓰임받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큰 용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께서 기드온이 해야 할 특별한 일을 계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리라고 확신을 갖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세상의 미련한 사람들이라도 가장 지혜롭게 변화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이라도 가장 강하게 변화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세상의 천한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이라도 가장 존귀하게 변화됩니다.”(고전1:25-29) 예수께서도 요한의 아들 시몬, 곧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를 부르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4:18-19)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리고 그 ‘베드로’를 장차 ‘게바’ 즉 반석이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이렇게 해서 베드로는 결국 믿음의 반석같이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 고백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6:17-1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모세도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여러 가지 이유로 사양하자, “함께 하리라.”는 말씀으로 결국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쓰임받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4:12-16을 보겠습니다.
(출4:12-16)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모세는 결국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에 복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나가는 위대한 지도자로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큰 용사’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한 철저한 인사와 능력에 대한 검증이 필요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태어나기 오래전부터 우리가 어떻게 조성되고, 어떤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지, 그리고 언제 모태에 착상될지를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그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를 살피셨으니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주께서는 내가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며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내가 일하고 쉬는 것을 다 보고 계시며 나의 모든 행동을 잘 알고 계십니다. 여호와여, 주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내가 할 말을 다 아십니다. 주는 나를 사방에서 포위하시며 주의 손으로 나를 붙들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주의 지식은 너무 깊어서 내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주를 떠나 어디로 갈 수 있으며 주 앞에서 어디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하늘에 올라가도 주는 거기 계시며 내가 하계에 가서 누워도 주는 거기 계십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타고 바다 저편 가장 먼 곳에 가서 살지라도 주는 거기서도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오른손으로 나를 붙드실 것입니다. 내가 만일 ‘흑암이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이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는 흑암이 어둡지 않을 것이며 밤도 대낮처럼 밝을 것입니다.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내 몸의 모든 기관을 만드시고 어머니의 태에서 나를 베 짜듯이 지으셨습니다. 내가 이처럼 놀랍고 신기하게 만들어졌으니 주를 찬양합니다. 주의 솜씨가 얼마나 훌륭한지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보이지 않는 어머니 태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그 때에도 주는 내 형체를 보고 계셨습니다. 주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를 보셨으며 나를 위해 작정된 날이 하루도 시작되기 전에 그 모든 날이 주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시139:1-16) 여기 “내가 만일 ‘흑암이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이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는 흑암이 어둡지 않을 것이며 밤도 대낮처럼 밝을 것입니다.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라는 고백은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말씀하신 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방법대로 하실 수 있도록 믿음으로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고 가진 자들을 폐하게 하시기 위해 성도 여러분을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굳세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사사기 6:16-7:14)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셨을 때, “여호와여,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출할 수 있겠습니까? 내 집안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 가장 약하고 나는 내 가족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입니다.” 며 하나님의 뜻을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기드온을 향해 처음부터 부르실 때, “큰 용사여,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기드온의 믿음을 강하게 하여 ‘큰 용사’로 만들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사기 6장과 7장에서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적어도 열두 번 이상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참 믿음은 “믿음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롬 10:8, 17).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참 믿음의 큰 용사가 되도록 하기 위해 그의 표징을 요구하는 대로 보여주시었습니다. 기드온이 가져온 제물을 바위 위에 올려놓도록 하시고, 여호와의 천사가 손에 든 지팡이 끝을 그 제물에 대자, 바위에서 불이 나와 그 제물이 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서 그 사자는 간데온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삿6:18-21) 이러한 광경을 보고 기드온이 “(삿6:22-24)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고 하자, 여호와께서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고 했습니다. 불로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보여주시고 믿음을 견고히 가지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단계는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그의 아버지가 세운 우상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버리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도록 명하셨습니다.(삿6:25-26) 기드온은 그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이 두려워, 감히 대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수행했습니다. 믿음은 한 순간에 성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드온이 사람들이 두려워 한 밤중에 하나님 말씀대로 행했다고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다음날 아침 성읍 사람들이 기드온이 한 일 때문에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성읍 사람들이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에게 아들을 끌어내라면서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삿6:31) 당신들이 바알의 편을 들어 싸우겠다는 것이오? 당신들이 바알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이오? 누구든지 그의 편을 들어 싸우는 사람은 내일 아침에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오. 만일 바알이 신이면, 자기의 제단을 헌 사람과 직접 싸우도록 놓아 두시오.
요아스는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신을 숭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며, 아들의 행위를 꾸짖기는커녕 도리어 아들 기드온을 강하게 변호한 것입니다. 요아스는 참 신과 거짓 우상, 진리과 허상을 구별하는 방법을 마을 사람들에게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기드온의 심령을 비추었던 하나님의 영, 성령이 그 아버지의 마음을 감화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기드온은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는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은 허구의 산물이며 헛된 우상임을 밝혀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집에서 기드온을 시험하셨는데 그것은 가정에서 믿음 생활이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큰 용사’로 세워 쓰시기 전에 그 가정부터 우상숭배로부터 정화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기드온을 채우셔서 그의 믿음을 굳세게 해주셨습니다.
(삿6:34)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4. 참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의 경험이나 재능과 자원 등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삶에는 모략이나 계략이 없습니다. 아니 필요치가 않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성령이 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시고 므낫세 지파(기드온이 속한 지파)의 아비에셀 족속뿐 아니라, 아셀과 스불른과 납달리 지파에서 자원한 32,000명의 군대를 모으셨습니다.
(삿6:34-35)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기드온이 또 사자들을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따르고 또 사자들을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 그를 영접하더라
그러나 메뚜기 떼처럼 보이는 수많은 미디안 군사와 해변의 모래처럼 많은 약대로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는 적군을 32,000명으로 어떻게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삿7:12)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적군 미디안의 13만 5천명 군사와 비교할 때, 3만 2천명은 그야말로 중과부적(衆寡不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그 증거로 자신이 더욱 더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한 표징을 구합니다.
(삿6:36-37)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나님은 연약한 기드온의 믿음을 강하게 하고자 그가 요구하는 대로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삿6:40)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하나님이 그렇게 기드온이 요구하는대로 모두 행하시는 것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시103: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5. 이제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믿음을 시험하기 시작하십니다. 미디안 군대와 마주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삿7:2-3)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하나님 말씀대로 두려워 떠는 자를 모두 돌려 보내고 남은 자가 1만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많다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삿7:4-8) 아직도 너무 많다. 너는 그들을 강가로 데리고 가거라. 내가 거기서 너와 함께 싸우러 갈 사람과 가지 않을 사람을 구별하여 너에게 보여 주겠노라. 그래서 기드온은 그들을 물가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개처럼 혀로 물을 핥아 먹는 사람과 무릎을 꿇어 마시는 사람을 따로따로 세워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손으로 물을 움켜서 핥아 먹은 사람은 300명이었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물을 마셨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물을 핥아 먹은 300명으로 너희를 구원하고 미디안 사람들을 너희 손에 넘겨 주겠노라. 너는 그 나머지 사람들을 다 집으로 돌려보내라.’ 그래서 기드온은 300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으며, 남은 300명은 돌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식량과 나팔을 인수했습니다. 그때 미디안군은 이스라엘 군이 있는 골짜기 아래쪽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군대 13만 5천명과 싸울 이스라엘 군사를 단 300명만을 구별하여 세우셨습니다. 그 날 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일어나 미디안군의 진지를 공격하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겠노라. 그러나 만일 네가 공격하는 것이 두려우면 네 부하 부라를 데리고 그 진지로 가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라. 그러면 공격할 용기가 생길 것이다' 그래서 기드온이 부라를 데리고 적군의 진지 끝으로 내려가 보니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그 골짜기에 메뚜기 떼처럼 수없이 누워있었고 그들의 낙타는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았습니다. 기드온이 그 곳에 도착했을 때, 한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꿈꾼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보게, 내가 꿈을 꾸었는데 보리 떡 하나가 우리 진지 안으로 굴러들어오더니 천막에 부딪치자 그만 천막이 쓰러지지 않겠나!’ 그때 그 친구가 대답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야. 하나님이 미디안과 우리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넘기셨다는 뜻일세’ 하나님께서 기드온으로 하여금 자신의 꿈을 해몽하고 있는 미디안 보초들의 이야기를 듣게 하심으로 마지막으로 그를 한 번 더 격려해 주신 것입니다. 기드온이 그들이 나눈 꿈 이야기와 해몽을 듣고 하나님께 경배한 후, 이스라엘 진지로 돌아와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외칩니다. ‘일어나시오! 여호와께서 미디안군을 다 여러분에게 넘겨 주셨습니다!’ 그리고서 그는 300명의 병력을 새 부대로 나누고 각 병사에게 횃불이 든 항아리와 나팔을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적 진지 외곽에 도착하면 여러분은 나를 잘 보고 내가 하는 대로 따라 하시오. 내가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과 나팔을 불면 여러분도 적 진지 사방에서 나팔을 불고 여호와를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여! 하고 외치시오.’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100명의 병력이 미디안군의 진지 외곽에 도착했을 때는, 그들이 막 보초 교대를 끝낸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갑자기 그들이 나팔을 불며 들고 있던 항아리를 깨뜨리자 다른 두 부대도 그들을 따라 일제히 왼손에 든 항아리를 부수어 횃불을 높이 들고 오른손에 든 나팔을 불며 ‘여호와와 기드온을 위한 칼이다’ 하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들 300명이 각자 자기 위치에 서서 그 진지를 포위하자, 적군은 놀라 아우성치며 허둥지둥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기드온의 300명 용사가 나팔을 부는 동안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혼란 가운데 빠뜨려 자기들끼리 서로 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멀리 도망하자, 끝까지 추격하여 모조리 전멸시켜 버렸습니다.(삿7:9-25) 사실 당시 보리는 값싼 곡물이었고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을 보리떡 한 덩어리로 보는 것은 그리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비록 ‘보리 떡 한 덩어리’와 같을지라도 그 ‘보리 떡 한 덩어리’로 승리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했어야 했습니다. 적군의 보초들마저 기드온이 이길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기드온이 의심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가장 약하고 미천한 말째를 부르셔서 ‘큰 용사’로 만들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위대한 일을 행하셨다는 것과, 기드온이 믿음으로 행했다는 사실입니다.
6.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기드온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훨씬 더 좋았을 것입니다. 기드온은 전투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앤드류 보나르(Andrew Bonar)는 ‘싸우기 전에 조심하는 것처럼 승리를 거둔 후에도 경계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 전투에서 승리한 후, 기도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삿8:22)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왕위를 거부하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리라”(삿8:23)고 말합니다. 그것은 매우 영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지는 않았지만, 남은 생애를 왕처럼 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로 야기된 억압에서 그들을 구원한 후, 곧바로 그들이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우상 숭배로 되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기드온은 왕위를 거부하고 대신에 백성들로부터 자신의 몫으로 금귀고리 20kg을 받아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대제사장의 의복인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삿8:24-26)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요청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지니라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마엘 사람들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가 즐거이 드리리이다 하고 겉옷을 펴고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그 가운데에 던지니 기드온이 요청한 금 귀고리의 무게가 금 천칠백 세겔이요 그 외에 또 초승달 장식들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색 의복과 또 그 외에 그들의 낙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더라
기드온은 만들어 성읍에 둔 이 ‘에봇’은 점차 이스라엘에 대한 기드온의 지도력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기드온에 대한 존경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봇’을 경배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떤 대상물에 대한 경배는 우상숭배처럼 맹목적인 신뢰와 충성을 나타내기 마련입니다.(참조1-왕하18:1-4,민21:4-5) 그래서 결국 기드온이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은 바알 우상을 섬기고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사방의 모든 원수들에게서 자기들을 구해 주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지 않았고, 또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한 일에 대해서 그 가족을 후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기드온이 백성들을 하나님과 모세의 율법으로 인도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잃었다는 뜻입니다. 적을 무찌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가르쳐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완전한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무대에서 사라지자마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 숭배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들의 몸은 억압에서 벗어났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우상의 노예로 매여 있었습니다. ‘큰 용사’는 믿음으로 이스라엘을 승리의 길로 이끌었지만, 기드온의 교만과 탐심으로 그들이 다시 패배의 길을 걷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적군의 꿈을 통해 보여 주신대로 자신은 “보리 떡 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끝까지 겸손하지 못하고 왕처럼 군림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기드온은 미디안 전투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자신의 삶에 참된 승리자는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다윗 왕의 겸손을 기억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시132:1)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
그래서 지혜서 잠언은 이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잠 11: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 15: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잠 16:19)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잠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마11:29-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야고보는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기드온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자신은 “보리 떡 한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겸손함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겸손함으로 기억되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겸손한 믿음으로 생활하여, 재물과 영광과 생명, 그리고 존귀함이 함께 하시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항상 기억해야 할 일들
삿 6장 1~10절 / 양인국목사(서신교회)
1. 사사기에서 계속 반복되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죄 가운데 살고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고, 이스라엘이 고통을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워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사시대 삼백년의 역사를 통하여 이와 같은 사실들을 반복하여 말씀하시므로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이 항상 기억하고 살아야 할 진리들을 말씀해 주셨다.
2. 믿음의 사람들이 언제나 기억하여야 할 진리들 가운데 하나는 죄 가운데 살면서 형통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사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고통의 원인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사사기는 사사시대 이스라엘이 받고 있는 고통의 원인들에 대하여 말해 줄 때는 언제나 동일한 것을 말해 주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받고 있는 고통의 원인은 죄 가운데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도 동일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57;21)” 이와 같은 사실은 어떤 사람도 죄 가운데 살면서 형통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죄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미디안의 손에 팔려서 칠 년 동안 그들의 지배를 받으며 고통 가운데 살았을 뿐만 아니라(창25:2),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까지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주었다. 당시 대적들의 세력이 얼마나 컸는지 본문은 그들을 메뚜기 떼에 비유하였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6:5)” 그들은 이스라엘의 땅에 들어와서 모든 것을 먹어 치웠다(6: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대적들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피하여 산에 올라가 구멍을 파고 굴을 찾아 그곳에 숨는 것뿐이었다. 이스라엘은 미디안 앞에서 심히 미약할 뿐이었다(6:6). 이스라엘이 이와 같은 고통을 받게 된 이유는 그들이 죄 가운데 거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은 죄로 인하여 가나안 왕 야빈의 지배를 받으며 고통 가운데 살았었고, 또한 하나님께 돌이킴으로 인하여 야빈의 손으로부터 구원받아 사십 년 동안 평안을 누린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5:31), 어째서 또 다시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살았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스라엘은 평안을 누리는 동안 다음의 사실들을 잊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잊은 것들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그들은 스스로 자율적인 존재가 되려고 했지만 그렇게 할수록 더욱 연약해져서 결국은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만일 이스라엘이 스스로에 대하여 연약한 존재인지 알았다면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 것이다.
이스라엘이 평안을 누리는 동안 잊은 것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자신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평안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잊었기 때문에 착각 속에 살게 되었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복을 누리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능력으로 얻은 것으로 착각하여 더 큰 복을 누리기 위하여 탐욕에 이끌려 살게 되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그들이 우상숭배에 빠졌다는 것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상은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생산된 것으로서 인간의 탐욕을 만족시켜 주는 모든 사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잊을수록 더욱 세속화 되어 결국은 넘어진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이 한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자신의 연약함과 베풀어 주시는 은혜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코 죄를 범함으로는 복된 삶에 이를 수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할 진리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들으신다는 것이다. 사사기에 언급된 구원의 역사는 언제나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사사기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반복되어 나온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6:6)” 여기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는 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고 오랜 시간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을 때 이루어진 일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믿의 표현이 바로 기도였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떠난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허용하신 것은 고통만이 그들의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시켜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이 회복되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까지 고통을 허용하신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부르짖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는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는 것은 종교적인 의식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었고,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몇 번 하는 기도도 아니었다.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구원해 주실 분으로 믿는 믿음을 가지고 하는 기도였다. 우리는 복음서에 언급된 가나안 여인을 통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라는 말로 표현된 믿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주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가셨을 때 가나안 여인이 주님께 와서 귀신들려 고통당하고 있는 자신의 딸을 치유해 주시기를 구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여인에게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시며 여인의 간청을 듣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했다. 즉 여인은 주님께서 자신의 청을 거절하셨지만 아이를 치유해 주실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간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마15:21-28)”. 이 여인의 행위야 말로 이스라엘이 “여호와게 부르짖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할 진리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은 말씀으로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8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 주셨다고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부르짖는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보내 주신 것은 그들에게 말씀을 대언해 주도록 해 주시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말씀으로 응답해 주신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은 죄를 회개하고 말씀에 따라 정로(正路)로 행할 때 해결된다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시편에서도 동일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시107:6,7)” 이와 같은 사실은 사사시대 300년의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사사시대 이스라엘이 죄 가운데 거하여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들 가운데 사사를 세워 주심을 그 고통에서 구원해 주셨는데 사사가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도의 말씀에 따라 백성들을 이끌고 대적들과 싸우는 일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할 때 사사 또는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힘의 크기와 관계 없이 언제나 승리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인도의 말씀에 따라 정로로 행하는 것임을 말해 준다.
사사기가 주는 특별한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사사시대 300년의 역사를 통하여 동일한 사실을 반복하여 계시해 주심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는 교훈의 말씀이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오늘 들은 말씀처럼 죄 가운데 거하며 형통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이고,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은 말씀으로 하신다는 것이다. 사사기를 통해 주신 이와 같은 말씀들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말씀해 주고 있으며 또한 고통 중에 있을 때 그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교훈해 준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은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의 장(場)인 세상을 살아가는 여정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복된 삶을 누리며 살기 위하여 언제나 기억해야 할 말씀이고 또한 삶의 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기억해야 할 말씀들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주신 말씀을 언제나 기억하고 삶의 여정에서 필요할 때마다 적용함으로 항상 주의 은혜 가운데 살게 해 주시고 삶의 여정에서 위기에 직면했을 때에도 이 말씀으로 인하여 주의 구원을 체험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기드온을 부르시는 하나님
삿 6장 1절 ~ 절 / 서명성목사
다음 주일은 저희 교회 창립 주일입니다. 1995년에 창립되었으니 벌써 27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참 빨리 흘렀습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분들 중에는 창립 멤버도 있고 오신 지 20년, 10년, 5년, 그리고 최근에 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창립주일을 맞이하는 감회가 어떠십니까? 정말 후회없이 섬겼다고 생각하십니까? 앞으로 잘 섬겨보려고 결단하십니까? 발등의 불을 끄는데 신경을 쓰다 보니 제대로 섬기지 못했습니까?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여기까지 도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현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느라 애쓰시는 교우들, 그리고 함께 신앙생활 하다가 사정상 다른 곳으로 떠나신 분들까지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드온 하면 ‘기드온과 300용사’가 먼저 떠오릅니다. 주일학교 시절부터 신나는 무용담으로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6장부터 8장에 나오는 기드온 스토리를 살펴보면 ‘기드온과 300용사’는 일부일 뿐입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주제들을 다룹니다. 기드온이 부름 받을 때 이스라엘의 상황이 어땠습니까? 왜 기드온이 선택되었습니까? 그가 그 부르심에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기드온의 반응을 보시며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비전을 받은 기드온이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는지 앞으로 몇 주에 걸쳐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시 압제를 당하는 이스라엘(1-6절)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영적 침체기에 해당합니다. 350년 동안 ‘백성의 범죄 -> 이방인의 억압 -> 백성의 부르짖음 -> 사사를 통한 구원 -> 또 다시 범죄’라는 패턴이 반복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를 싫어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함으로써 점점 깊은 침체를 경험합니다. 드보라가 강력한 철병거를 소유한 가나안 왕 야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후 40년 동안 평화를 누렸지만 이스라엘은 ‘또’‘여호와의 목전에’악을 행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 7년 동안 붙이시며 징계하셨습니다. 미디안 족속은 아브라함의 후처인 그두라의 자손으로 에돔의 남쪽에 살던 유목 민족이었습니다. 미디안은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패한 적이 있으나(민 31:1-12), 200여 년이 지난 기드온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압제자로 등장했습니다. 미디안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특히 4장의 내용을 생각할 때 아이러니합니다. 시스라를 죽인 야엘은 겐 사람 헤벨의 아내였는데, 4:11에 의하면 헤벨은 미디안 사람이었던 모세의 처남의 자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통해 구원을 받았는데 이제는 미디안에 의해 압제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디안 족속을 피해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만들어 살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씨를 뿌려 놓으면 추수 때가 되었을 때 미디안 사람들이 아멜렉 사람과 동방 사람과 연합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와 토지소산만이 아니라 양과 소와 나귀도 빼앗아 갔습니다. 4절에는 ‘진을 쳤다’고 하고, 5절에는 ‘장막을 가지고 올라왔다’고 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미디안의 침입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땅의 모든 소산이 없어질 때까지 장막을 치고 거주하면서 약탈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아예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작정이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몰려오는 모습은 마치 메뚜기 떼와 같았습니다. 메뚜기 떼가 한 번 지나가면 들판에 남는 것이 없듯이 미디안이 이스라엘 땅을 한 번 지나가면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대적이 “메뚜기 떼 같이”왔다고 묘사하는 것은 선지서에서 ‘여호와의 심판의 날’을 연상시킵니다(사 2:19; 욜 1:4). 멸망의 분위기를 더합니다. 이런 일이 7년 동안 연례행사처럼 계속되었습니다. 미디안의 장기적이고 철저한 약탈로 인해 이스라엘은 심히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궁핍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단순한 굶주림이 아니라 극심한 결핍으로 인해 비참해진 상태를 묘사합니다. 그제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다시 부르짖습니다. 사사기 전체의 맥락으로 미루어 이 부르짖음은 진정한 회개라기보다 압제로 인한 괴로움을 토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부르짖음에 대한 여호와의 반응(7-10절)
6절과 7절에서 ‘부르짖다’라는 동사를 두 번 사용해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상황이 절박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 부르짖음에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이번 반응은 이전의 것과 다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바로 사사를 구원자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먼저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한 메시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출애굽부터 가나안 정복까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을 설명합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지칭합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여기에 사용된 동사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어인 1인칭 동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해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음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존재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를 그들이 분명히 알기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모리 사람은 가나안 사람을 가리킵니다. 가나안 땅의 신들은 대표적으로 바알, 아스다롯, 그모스, 몰록, 다곤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하셨는데, 이스라엘은 흉년에 대한 두려움, 주변 민족들로부터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방 우상들에게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이스라엘은 이방의 압제와 착취에 시달리며 고통당해야 했습니다. 선지자는 마지막으로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며 그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과 억압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나타나는 언약의 저주의 내용으로 그들이 ‘언약의 파기’의 대가를 치르고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의 책망은 회복으로 이끄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책망하실 때 속히 깨닫고 그분의 은혜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기드온을 부르시는 하나님(11-16)
선지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호와의 사자’가 등장합니다. 그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았습니다. 드보라는 ‘자신의 종려나무 아래’(4:5)서 예언한 반면에 여호와의 사자는 가나안 신들을 예배하는 장소로 쓰인 ‘상수리 나무 아래’에 옴으로써 여호와의 사자가 가나안 신의 영역을 침범한 셈이 됩니다. 이미 가나안 신과 영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브라는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의 땅이었습니다. 아비에셀은 므낫세 지파에 속했으며, ‘요아스’라는 이름은 ‘나의 아버지는 도움이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는 이름을 가진 요아스가 그의 집에 바알 제단이 있었다는 사실이 큰 문제입니다. 그때 기드온은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밀 타작은 넓은 마당에서 소가 끄는 타작기를 이용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좁은 포도주 틀에서 타작합니다. 더욱이 ‘타작하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일반적으로 하는 타작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과실이나 곡식의 알갱이를 막대기 같은 것으로 떠는 행동을 묘사합니다. 사사기 저자는 기드온의 행동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 줍니다. 그런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큰 용사’라고 부릅니다. 개역개정에는 ‘큰 용사여’라는 호격이 먼저 나오지만, 히브리어 본문의 순서는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는 선언이후에 ‘큰 용사’가 나옵니다. 이 어순이 중요합니다. 기드온이 큰 용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포도주 틀에 숨어서 작업하는 기드온에게 ‘큰 용사’라는 타이틀이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하나님은 부족한 기드온의 현재를 보신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보셨습니다. 그를 ‘큰 용사’로 부르시는 것이 기드온에게 주신 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름을 받은 기드온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요? 그러면 왜 우리가 이 모양 이 꼴로 살아갑니까? 우리의 조상들이 걸핏하면 출애굽 사건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권능을 이야기했는데 만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그때와 같은 기적이 왜 지금은 나타나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미디안에게 이토록 시달려야 합니까? 기드온의 불평은 그 당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을 반영합니다. 기드온이나 이스라엘이 알지 못한 것은 이스라엘이 압제를 당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그들을 버려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기드온의 항의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이미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 이유를 대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원망 섞인 투정을 받아줍니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6:14) 기드온은 이 어려운 상황에 전과 같이 어떤 사사가 나타나서 해결해주지 않을 까 생각하였을 텐데 하나님은 미디안과 싸울 사람은 바로 기드온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이 너의 힘’이란 기드온이 현재 가진 힘이 아닙니다. 34절에서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말씀을 고려한다면, ‘그 힘’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그분이 주시는 힘을 의지하여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으면서 기드온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을 선택하셨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자기 집안은 미약하고 자신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에 부족하다고 하면서 부르심에 시큰둥합니다. 오브라가 요아스의 소유였다는 사실은 그의 아버지가 부유하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기드온이 자신의 집안을 극히 약하다고 한 것은 과장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세상적인 조건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믿음으로 순종의 첫발을 내디디기만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는 말입니다.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17-24절)
하나님은 기드온과 함께하시겠다고 거듭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말씀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보기 원합니다.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라는 개역개정의 번역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주’라는 단어는 여호와를 지칭하거나 상대방을 높이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기드온은 아직 자기 앞에 선 자가 여호와의 사자인지 모릅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너’라는 2인칭 대명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7절은 ‘당신이 말한 것과 관련된 표징을 보이소서’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자가 말한 것이 확실하다는 표징을 요구한 것입니다. 기드온이 표징을 구하는 모습은 이후에도 계속 나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사자에게 예물을 가지고 돌아와 주 앞에 드릴 때까지 떠나지 말라고 요청하자, 하나님의 사자는 그러겠다고 대답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 기드온의 믿음 없는 행동을 용납하십니까? 하나님의 비전을 수행할 사람으로 기드온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택하신 자를 끝까지 붙드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급히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서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립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사자가 지시한 대로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와 바위 위에 놓고 그 위에 국을 부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드온의 예물을 받으셨음을 의미합니다. 우상을 섬기던 장소가 여호와를 섬기는 장소로 바뀐 것입니다. 기드온이 놀라는 동안 여호와의 사자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제야 기드온이 자기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고 위로하십니다. 이에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해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여호와는 평강이시다’라는 뜻의 이름에서 기드온이 얼마나 큰 두려움 가운데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바위에서 음식물이 불 탄 흔적과 자기가 쌓은 단을 보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당신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 사랑 안에서 담대함을 얻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크고 놀라운 사랑이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우리의 예배 또한 두려움의 예배가 아니라 믿음과 확신에 찬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속적으로 쓰임 받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광야에서 보호하시며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할 때까지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체험한 그 하나님을 이스라엘은 잊어버렸습니다. 가나안의 풍요로움에 젖다보니 신앙의 열정도 잃어버렸습니다. 가나안의 풍요로움은 가나안의 신들이 준 것으로 착각하고 도리어 그 신들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전에 이스라엘에게 패했던 미디안을 강하게 하셔서 이스라엘에게 괴로움을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파종하고 농작물을 수확할 때가 되면 미디안 사람들이 쳐들어와 농작물은 물론이고 소나 나귀까지 탈취해 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미디안 사람들을 피해 산에 올라가 굴을 파고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7년의 혹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교만과 영적 둔감함으로 죄악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때로 고난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 가운데 있다면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우상들이 있다면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받은 은혜에 감사하지 않고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리거나 주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원하노라”(요삼 1:2). 받은 복이 우리에게 신앙 여정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가운데 받은 복이 더 큰 하나님의 복을 받는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세어 보면서 주님께 감사와 헌신의 자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 말씀을 듣고 돌이켜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셔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새로운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옛적부터 이미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말씀해 주신 내용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은혜의 말씀을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나 얼마나 멀리까지 왔는지 듣게 되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회개하게 하고 심령을 새롭게 합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우리의 묵은 밭과 같은 마음을 기경하십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의 문제점을 지적하신 것처럼 말씀의 거울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를 깨닫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바로 나아가야 합니다.
-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평범한 농부였던 기드온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자기의 형편을 들어 사양을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말씀으로 확신을 주시고, 제물을 불사르는 표징을 보여 주시고, 또 위로하심으로 기드온에게 사명감을 갖도록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양했으나 끝까지 그를 붙들어 사용하셨듯이, 하나님은 기드온을 끝까지 붙들어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별 볼일 없는 농부 하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부르시고 붙드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오늘 기드온처럼 나약한 우리도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부르심을 확신하며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찾아와 그를 ‘큰 용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에게 타작한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던, 소심하고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기드온을 용사로 부르셨습니까? 기드온과 함께하셔서 그를 용사와 같이 강하게 만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요셉이 형통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다윗은 점점 강성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들을 빚으셔서 놀라운 작품으로 만드십니다. 자신의 부족한 모습이나 약함 때문에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멀리해도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많은 능력과 기적을 경험하게 하시고 우리가 믿음 안에서 당신의 일을 감당하도록 이끄십니다. 우리는 그저 믿고 따르면 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라고 하시며 임마누엘을 약속하셨습니다.
나가면서
하나님은 의심 많고 소심한 기드온을 사사로 세워 미디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르시며 주저하는 기드온을 위로하시고 사명감을 심어주셨습니다. 미디안 연합군이 메뚜기와 같이 몰려왔을지라도 기드온은 한 사람을 치듯 그들을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큰 용사’라고 불러 주십니다. 임마누엘을 약속하십니다. 자기의 형편이나 가진 능력을 인하여 주저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드온을 불러 사명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사용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에 견고해서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 열매 맺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키고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고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맡기신 사명을 주님의 능력으로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성도 여러분들과 함께 하십니다. 부르심의 감격 속에 사명을 감당하며 기드온과 같이 하나님이 기뻐 사용하시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드온의 이김 이야기
삿 06장 01~16절, 히 11:32-33 / 김명혁목사
주일 아침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건짐 이야기”에 이어서 지난 주일에는 “기생 라합의 놀람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기생 라합 다음에 나오는 사람인 기드온의 믿음과 이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히브리서는 기드온을 소개하면서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라고 아주 간단하게 기록했습니다. 기드온은 사사였는데 침략자 미디안을 이긴 사람입니다. 사사라는 말은 심판자(judge) 또는 구원자(deliverer, savior)라는 말인데, 기드온은 믿음으로 침략자 미디안을 이기고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였습니다.
기드온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전에 사사시대에 대한 설명을 간단하게 합니다. 사사시대란 여호수아가 죽은 다음부터 사무엘이 일어나기 까지 주전 14세기부터 주전 11세기까지 300여년 동안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사사시대의 특징 다섯 가지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첫째 태평 세월이 계속되었습니다. 둘째 이스라엘의 범죄가 있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습니다. 넷째 이스라엘의 회개가 있었습니다. 다섯째 사사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있었습니다. 태평 세월, 이스라엘의 범죄, 하나님의 심판, 이스라엘의 회개, 사사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일들이 사사시대에 일곱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그 땅이 사십년 동안 태평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너는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삿5:31-6:14). 사사시대의 다섯 가지 특징은 사실은 이스라엘 전 역사의 특징이었고 기독교 전 역사의 특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십 여년 동안 (또는 팔십 여년 동안) 평화가 계속될 때에 교회는 타락하여 범죄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과 환란이 임했습니다. 그러면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회개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손을 사용하여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전 역사의 모습이었고 기독교 전 역사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남북한이 당하고 있는 환난의 위기도 사사시대의 한 싸이클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환난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는 진정한 회개의 기도가 있어야 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사사가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제 믿음으로 미디안을 이기고 이스라엘의 구원한 사사 “기드온의 이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믿음의 색깔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기드온이 지녔던 믿음의 색깔에는 겸손과 순종과 모험의 색깔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너무나 귀중한 믿음의 색깔들이었습니다. 사실 믿음은 겸손이고, 믿음은 순종이고, 믿음은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사탄 마귀를 이기는 믿음은 겸손과 순종과 모험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기드온이 어떻게 미디안을 이기고 이스라엘을 구원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기드온은 겸손으로 이겼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김은 겸손에서 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나타나서 구원자의 사명을 주실 때 이미 이 사실을 암시하셨습니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삿6:14). 여기 ‘네 힘’이란 말은 기드온의 ‘미약한’ 손과 ‘미약한’ 힘을 가리켰습니다. 기드온의 손은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상수리 나무 아래 숨어서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던 미약한 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미약한 손과 미약한 힘을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한 하나님입니다. 약함을 통해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모세에게 나타나서 “[네] 지팡이를 들고 [네] 손을 바다 위로 내 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출14:16)고 말씀했을 때도 모세의 ‘미약한’ 지팡이와 ‘미약한’ 손을 가리켰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미약한’ 마른 막대기에 불과했고 모세의 손은 80세 노인의 ‘미약한’ 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하게도 약함을 통해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오랜 후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약한 것들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기드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즉시 자기의 ‘미약함’을 고백했습니다. 자기는 극히 미약하고 제일 작은 자라고 즉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수6:14,15).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내신 첫 번째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아더 핑크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쏘신 첫 번째 화살이 적중되었다.” 모세도 오래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비슷한 대답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본래 말이 능치 못한 자입니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입니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시옵소서”(출4:10-13).
기드온이 자기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솔직하게 고백했을 때 하나님은 즉시 기드온과 반드시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삿6:16). 자기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고백하는 종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네가 반드시 원수를 쳐서 이기리라.” 교만하고 자만한 사람에게는 이김과 구원의 은혜가 임하지 않고 겸손하고 낮아지는 사람에게만 이김과 구원의 은혜가 임합니다. 기드온은 겸손으로 이긴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기드온은 순종으로 이겼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김은 또한 순종에서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겸손을 확인하신 다음 기드온에게 순종을 명하셨습니다. 밤에 나타나서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의 상을 찍으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비의 수소 곧 칠년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찌니라”(삿6:25).
그 명령은 실행하기가 매우 힘든 명령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분노를 살 수도 있고 성읍 사람들의 분노를 살 수도 있고 특히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던 미디안 사람들의 분노를 살 수도 있는 위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신은 미디안 사람들의 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자의든 타의든 자기 집에 바알의 단을 세워놓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놓았었습니다. 그 당시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의 상을 찍는 일은 아버지와 성읍 사람들과 미디안 사람들의 종교와 권위에 반항하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마치 일본 시대에 집집마다 만들어 놓았던 신사와 남산에 세워놓았던 신사를 도끼로 찍는 일과도 같은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즉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즉시 그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이에 기드온이 종 열을 데리고 여호와의 말씀 하신대로 행하되 아비의 가족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삿6:27). 낮에 수행하지 못하고 밤에 수행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즉시 수행했습니다.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 바알의 단이 훼파되고 아세라 상이 찍혔고 새로 쌓은 단위에 수소가 제물로 드려져 있는 것을 보고 요아스에게 달려와서 아들을 끌어내어 죽이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미디안 사람들이 군대를 몰고 쳐들어왔습니다. “때에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다 모여 요단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삿6:33).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기드온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사방에서 기드온을 죽이라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위기에 처한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신이 강림했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삿6:34).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신이 강림하십니다. 전도자들과 선교사들이 위기에 처했을 대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는 체험을 많이 합니다. 그러므로 위기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위기는 오히려 하나님이 함께 하고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는 축복의 기회가 됩니다. 스데반이 위기에 처했을 때 성부 성자 성령께서 스데반과 함께 하신 사실을 우리는 행7장에서 발견합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드온은 순종으로 미디안을 이기고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셋째 기드온은 모험으로 이겼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김은 또한 모험에서 옵니다. 믿음은 모험입니다. 기드온은 처음에 나팔을 불어 수만 명의 군대를 소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수만 명의 군대의 수가 너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군대의 많은 숫자를 믿지 않고 하나님만을 믿는 모험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 남기라고 분부했습니다. 해변의 모래같이 무수하게 많이 몰려 온 미디안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하고 떠는 사람들은 다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명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떠나 돌아가라 하라”(삿7:3). 이만 이천 명이 돌아가고 남은 사람들이 일만 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개가 핥는 것 같이 허둥지둥 물을 핥는 자들은 다시 돌려보내라고 명하셨고 침착하게 손으로 물을 담아서 마시는 자만 남게 했습니다. 결국 다 돌아가고 300명만 남게 되었습니다. 300명의 사람들을 가지고 수십 만 명의 적군을 쳐 부신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단한 모험이었습니다.
믿음은 계산이 아닙니다. 계산에 익숙한 사람은 항상 불안하고 항상 두려워합니다. 믿음은 계산이 아니고 모험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간 것도 모험적인 믿음으로 된 것이었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로 들어간 것도 모험적인 믿음으로 된 것이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단3:16,17).
기드온이 300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수십만 명의 미디안 군대를 쳐 부신 것은 현대적인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뛰어난 군사적인 전략도 아니었습니다.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뿐이었습니다. 군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을 가지고 수십만의 군대와 싸운다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이고 너무나 모험적인 일이었습니다. 마치 골리앗과 싸우려고 지팡이 하나와 돌멩이 몇 개를 들고 나온 소년 다윗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믿음은 계산이 아닙니다. 믿음은 모험입니다. 현실을 무시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모험입니다. “기드온이 삼백명을 세 대로 나누고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나의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 가에 이르러서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나와 나를 좇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그 진 사면에서 또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기드온과 그들을 좇은 일백 명이 이경 초에 진 가에 이른즉 번병의 체번할 때라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각기 당처에 서서 그 진을 사면으로 에워싸매 그 온 적군이 달음질하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므낫세에서부터 모여서 미디안 사람을 쫓았더라”(삿7:16-23).
항아리는 연약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가리켜 질그릇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횃불은 질그릇에 담은 보배인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항아리를 부수고 항아리 속에 숨겼던 횃불을 높이 든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수고 예수님만은 높이 들어 세상에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항아리를 부수고 항아리 속에 숨겼던 횃불을 높이 든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수고 죽여서 순교의 제물로 드리면서 오직 예수님만은 높이 들어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팔을 들어 불며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라고 외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능력만을 소리쳐 세상에 알린다는 뜻입니다.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무수한 군대의 칼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칼의 힘을 나타내 보인다는 말입니다.
기드온은 이겼습니다. 겸손의 믿음과 순종의 믿음과 모험의 믿음으로 미디안을 이기고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위기와 환난을 당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도 회개의 기도와 함께 겸손의 믿음과 순종의 믿음과 모험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군사적인 현실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핵무기가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절대 겸손과 절대 순종과 절대 모험의 믿음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세상을 이기고 환난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사탄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면서 벌벌 떨고 있는 핵 무기를 바라보면서 벌벌 떨고 있는 부끄러운 우리들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절대 겸손과 절대 순종과 절대 모험의 믿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기드온과 같은 사사를 보내주시옵소서! 환난에 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며 회개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가슴을 찢는 참된 회개를 주시옵소서! 그리고 기드온에게 주셨던 절대 겸손의 믿음과 절대 순종의 믿음과 절대 모험의 믿음을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체사상과 세속주의의 죄악의 늪 속에 깊이 빠져있는 우리 북한과 남한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한번 이 민족을 동방의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 남북한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순교자들의 피를 보시고 우리 민족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큰 용사여!
삿 6장 1~16절 / 류영모목사
I. 약속의 땅에서 약속을 버렸을 때
오늘의 가치관은 한 미치광이가 주인없는 백화점에 들어가서 정가표시를 뒤죽박죽 해 놓은 것과 같다고 누군가 얘기했습니다. 1억짜리 골동품이나 보석에 있는 정가표시를 1만원짜리 티셔츠에 갖다 붙이고, 1백만원짜리 양복에 있는 정가표시를 수천만원 짜리 상품에 갖다 붙이고, 그것을 떼어다가 100원 200원 짜리 학용품에 갖다 붙인 꼴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의 위기가 바로 가치관의 혼란이었습니다.
유목민 생활이라는게 젖 짜서 데워서 먹으면 그만이고 광야생활이란게 매일같이 만나를 먹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옷 한 벌을 입고 살았지만 40년동안 그 옷이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았더니 가나안 사람들은 비단옷을 입고 사는 겁니다. 패션이 다릅니다. 먹고 사는 모양이 다릅니다. 양을 잡아 포도주를 곁들여서 먹는가 하면 곡식으로 떡을 만들어서 올리브에 찍어 먹습니다. 저녁이 되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산당에 올라가 마음껏 쾌락을 즐깁니다. 눈이 뒤집혀 질만도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본받거나 부러워하지 말고 부수고 좇아내고 물리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 말고 그들과 싸워서 좇아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들은 우리가 친하게 지내야될 친구들이 아니고 무당이고 창기요 마귀 사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이 왕되신 약속의 땅이 될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 약속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사사시대 이스라엘이 민족적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픔과 위기를 치료하시기 위해 따로 준비된 영웅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로 준비된 영웅이 있는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들을 불러서 당신의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오히려 기대하지 못했던 약자를 불러 세상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자신은 아무래도 적임자가 아니라고 항의하는 인간들을 당신의 사역자로 쓰셔서 당신의 사역을 감당토록 하신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토록 연약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고 쓰임받을 때에 이토록 멋진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이 온전히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돌아올 때에 이 가나안 땅에서 얼마나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중에서 중병든 이스라엘을 살려내기 위해 다섯 번째 사사로 등장하는 인물은 유명한 기드온입니다. 기드온하면 주일학교때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들은 선생님으로부터 신나게 들었던 이야기, 삼백명의 군사로 그 어마어마한 미디안을 물리쳤던 용장 중에 용장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어떤 집안에 아이들의 이름을 기드온이라고 짓는 집안이 있더라구요. 뭐냐고 물었더니 기드온을 한자로 쓰면 기돈이 된다고 그럽니다. 사실 기드온이란 이름의 뜻은 “나무 베는 자” “곡식 자르는 자”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드온을 성경 무대에 등장시키는 오늘 본문은 기드온이 영웅도 용장도 아님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시킵니다.
본문의 문이 열려지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약속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을 섬겼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번에는 미디안과 아말렉의 손에 넘겼습니다.
미디안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오늘 본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5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 이 구절을 통해서 이런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대장격인 사람이 낙타 등에 앉아서 진두 지휘를 하고 진격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면 낙타떼가 엄청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마을로 진격해 들어옵니다. 겁에 질린 이스라엘 백성은 들에서 일을 하다 말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해 보지만 약대 낙타 발굽에 수 없는 양민들이 짓밟혀 죽어갑니다. 그 뒤에 짐승 양과 소떼를 몰고 뒤따라 오는 수십만 메뚜기떼 같은 미디안 족속들이 대이동을 시작합니다. 추수된 곡식들은 낙타등에 실어지고 덜익은 곡식과 야채들은 짐승들이 다 뜯어먹고 짓밟아 순식간에 한마을이 토초로 변하는 그림이 그려집니다.
미디안이 어떤 족속인가? 성경속에서 우리는 미디안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에 그의 후처로 그두라라는 여인을 맞이합니다. 후처에게서 얻은 아들이 미디안입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과 후처에게서 얻은 아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요단 동편으로 그두라와 미디안을 좇아냅니다. 그들이 바로 미디안 족속입니다.
창세기 38장에 보면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갈 때에 미디안 장사꾼에게 팔려가지요. 모세가 광야로 도망하여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집에서 양을 칩니다. 그리고 이두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을 하게 되지요. 미디안 족속 가운데 이스라엘 족속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많이 있었고 심지어는 이스라엘로 귀화한 미디안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미디안은 베두인과 같은 말입니다. 유목민, 유랑민이란 뜻입니다. 낙타는 물을 먹지 않고도 4일을 여행할 수 있는 짐승인지라 미디안 사람들은 낙타를 이용해 가나안 이마을 저마을을 휘젖고 다녔습니다. 때문에 도시에서 자리를 잘 잡고 정착한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곳에는 가까이 가지 못했고 뒤늦게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새롭게 정착해서 촌락을 이루고 농사를 짓고 살던 이스라엘 몇몇 지파에게 큰위협이 되었던 족속이지요.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살던 지파가 이스르엘 세겜평원에 살던 므낫세 지파였습니다. 오늘 기드온이 바로 므낫세 지파의 사람으로 사사의 부름을 받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미디안과 함께 이 당시 이스라엘을 괴롭힌 족속이 또 하나 등장합니다. 3절에 보면 아말렉 족속입니다. 아말렉은 누구인가? 이삭의 아들 가운데 에서와 야곱이 있습니다. 야곱이 약속의 아들입니다. 이 에서가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밖에 나가서 이방여인과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엘리바스입니다. 이 엘리바스가 결혼을 한 다음에 또 후처를 얻어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아말렉입니다. 출애굽하는 과정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방해합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여호수아 사령관이 전쟁터에 나가서 진두지휘합니다. 모세와 아론과 훌이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하는데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이 내려오면 적군이 이기잖아요. 바로 그때 이 적군이 아말렉 족속들입니다. 아말렉 역시 유랑민 베두인들이었습니다. 주변 부족들과 힘을 합쳐서 심심찮게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왕궁이 건설된 다음에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왕에게 아말렉을 완전히 진멸시켜라. 이 아말렉을 진멸시키지 않으면 두고두고 이스라엘에게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사울 임금이 불순종하여 아말렉의 씨를 남겨둡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힌 족속이 아말렉족속입니다.
6장 1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또 악을 행했다. 다시 악을 행했다. 야샵. 상투적인 문구입니다. 2절에 보면 상투적인 문구 다음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한 설명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고양이를 보고 겁에 질린 생쥐새끼들이 굴속에 숨어들 듯이 미디안과 아말렉을 보고 놀라고 또 놀라서 쫓기고 쫓겨서 깊은 산속 토굴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숨어서 살던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성민이 가장 초라한 꼴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모습입니다.
추수 때가 되면 거둔 곡식을 다 빼앗아 가더니 이젠 3절에 아예 파종을 못하도록, 파종을 해 놓고 나면 싹이 파릇파릇 올라올 때 짐승떼를 몰고 들어와서 그 싹을 다 뜯어먹게 해 버리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사라지라는 겁니다. 지구를 떠나라는 겁니다. 마귀는 우리가 저들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도망가면 물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막다른 골목으로 우리를 몰아 죽이겠다고 덤빕니다.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만나고 어려움을 겪을 때에 그것을 헤쳐나가고 문제를 짓밟고 일어서야지 문제에 짓눌리고 파묻혀 살아갈 때에 우리를 막다른 골목, 저 산속으로 몰아서 지구 밖으로 몰아내려고 하는게 마귀의 전략입니다. 믿음과 성령의 능력을 우리가 발휘하지 못하면 우리를 아예 이 땅에서 몰아내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회가 조금 위축되는가 싶으면 온갖 잡귀들이 덤벼들어 교회를 박멸하겠다고 덤벼듭니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세상이 우리를 변질시키기 위해서 온갖 것들이 다 일어나 교회를 짓밟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곳 저곳, 이산 저산으로 쫓겨다니라고 가나안 땅에 보낸 것이 아닙니다. 산도 정복하고 들도 정복하기 위해서 보냈습니다. 가나안의 주인 패권자가 되라고 보낸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버렸더니 정복자가 정복을 당하는 꼴입니다. 적을 쫓아내야 할 주인이 쫓겨다니는 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주님의 교회가 권세와 능력을 잃어버리면 이꼴 된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세상을 복음의 능력으로 감동시키지 못하면 저들은 우리는 격력하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지구촌에서 몰아내려 합니다. 우리의 영향력을 소멸시키고 박멸시키려 덤벼듭니다. 오늘 이 현장의 모습은 오늘 우리시대 한국교회의 모습이요, 우리교회의 모습이요, 우리 가정의 모습이요, 나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II. 애처로운 부르짖음
이 엄청난 위기속에서 이스라엘은 이 문제를 어덯게 돌파했습니까? 자신의 힘으로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중병환자가 된 이스라엘은 이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더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부르짖었다는 말이 두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고통이 심했다는 뜻이고 부르짖음이 처절하고 애처롭게 들렸다는 얘기이지요.
이곳저곳에서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100년전 두배나 악한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서 이 백성을 구원한 옷니엘 같은 사사를 우리에게 보내주십시오. 거구 에글론을 단칼에 죽인 왼손잡이 사사 에훗이라도 우리에게 보내주십시오.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철기군 600명을 때려죽인 삼갈같은 사사를 이 땅에 보내주십시오. 그들은 부르짖었습니다. 철병거 구백대를 기손 강에 수장시키고 시스라 대장의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아버린 드보라와 바락과 야엘이 다시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그들은 부르짖었습니다. 그날은 하늘의 별들이 일어나 우리를 대신하여 싸웠고 강물이 벌떡 일어나 적군을 무찔렀습니다. 하나님이여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여 주소서. 애처롭게 처절하게 부르짖었습니다.
이 애처로운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지금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한 자루의 칼이지요. 힘쎈 장수가 필요합니다. 한 됫박 쌀이 그립습니다.
7절 “부르짖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쌀을 가정마다 말로 가마니로 갖다 주었다 이런 말이 기록된 곳이 없습니다. 8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이름없는 무명의 선지자를 이스라엘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돈을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무기를 싸 짊어지고 온 것도 아니고 군사를 모아준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책망하기 위해서 이름없는 한 사람의 설교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설교자를 보내서 애굽에서 너희들을 건져내면서 얼마나 엄청난 기적으로 함께 하지 않았느냐. 다 잊어버렸느냐. 수많은 적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몰아내지 아니했느냐. 그런데 너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아니했다. 하나님을 버렸다. 약속의 땅에 와서 약속을 잊어버렸으니 하나님의 약속을 너희들이 먹고 살수 없게 된 것이 아니더냐. 이 메시지입니다.
왜 더 열심히 일하지 않았느냐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왜 무기를 다듬고 국방을 소홀히 했느냐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악과 싸우라고 가나안 땅에 들여보냈더니 악과 한통속이 되어버렸고 우상을 파괴하라고 가나안 땅에 들여보냈더니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했고 가나안의 가치관을 몰아내고 하나님 나라 가치관으로 그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라 했더니 아예 그들을 부러워하고 그들이 먹고 사는 것을 너희들이 먹고 사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III. 큰 용사여!
이토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선포한 다음에 여호와의 사자가 말라흐 야훼입니다. 출애굽할 때 함께 하셨던, 광야 여행에 함께 하셨던,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으로 백성들을 인도하셨던 말라흐 야훼가 기드온을 찾아왔습니다. 말라흐 야훼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찾아왔을 때 기드온은 포도주틀 속에서 나락을 까고 있었습니다.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부지갱이로 밀 한 다발을 들고 톡톡톡 두드리며 타작이라고 하고 있는 꼴을 하고 있습니다. 밀 타작은 타작마당에서 하는 것이지요. 왜 조그마한 포도주 틀에 들어가서 타작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보라는 듯 타작마당에서 타작을 하고 싶지만 미디안 군대가 와서 다 빼앗아 가니까, 그러다가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우니까, 이 얼마나 비참하고 어이없는 꼴입니까? 포도주 틀은 밀 타작장이 아니지요. 굴욕감을 느끼는 이 꼬락서니. 이게 이스라엘의 모습이요 기드온의 모습이요 한국교회의 모습이요 너의 모습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평화로울 때면 이곳에서 포도를 떨며 노래를 부르고 기쁨의 환호를 지르며 포도주를 담그는 그릇이었습니다. 지금 그 행복 어디 가고, 기쁨은 어디 사라지고 이꼴을 하고 있냐는 것이지요.
여호와의 사자가 이 초라한 꼴을 하고 있는 기드온을 찾아와서 뭐라고 부릅니까? 야 이놈아 이게 무슨 꼴이냐? 이러구 머리를 쓰다듬어야 되는데 하나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가슴을 좍 펴더니 “큰 용사여!” 그럽니다. 놀리는 얘기이지요. 비꼬는 얘기 이지요.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큰 용사 - 깁보르 헤 하일. 능한 용사여.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약 오르라고 이렇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가장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장 영광스런 이름으로 그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큰 용사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에게 타고난 용사기질이 있어서 이렇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큰 용사로 쓰시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큰 칼을 휘두를 때 큰 용사여~ 이렇게 불러주셨으면 얼마나 폼이 났겠어요. 부지갱이 들고 항아리 속에 들어가서 나락단 톡톡톡 두드리고 면도날로 밀알 까고 있을 때에 큰 용사여! 얼마나 창피했을까요. 얼마나 자기 꼬락서니가 우스웠을까요?
큰 용사여! 이 말씀은 듣기 좋으라고 한 덕담 정도로 한 얘기가 아닙니다. 아마 기드온은 이 어르신이 시국을 몰라도 한참을 모르고 세상물정을 몰라도 이렇게 모를 수 있을까? 우리 민족이 당한 위기를 몰라도 이렇게 모를 수 있을까? 지금 덕담할 때냐? 가슴속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 겁니다.
하나님이 큰 용사로 지금 기드온을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를 들어서 큰 일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기드온이 본문 15절에 보면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겸손떨기 위해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당신이 나를 찾아왔는데 나는 희망을 가질만한 인물이 못됩니다. 나는 비천하고 보잘 것 없고 초라한 존재입니다.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기드온을 놀리기 위해서 큰 용사라 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기드온의 모습은 작은 자입니다. 초라합니다. 비천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꼬락서니를 하고 있지만 내가 너와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이 민족을 구원하는 큰 용사로서 너는 쓰임받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큰 바위 앞에서 춤을 덩실덩실 추고 있었습니다. 이보게 친구 지금 뭐하고 있는가? 보게나 지금 저 바위안에서 춤추고 있는 다윗왕이 보이지 않는가? 법궤가 도착했을 때 바지가랭이가 내려가도 모를 만큼 너무 기뻐서 춤추고 있는 다윗 왕이 보이지 않는가? 아니 바위속에 무엇이 보이는가? 나는 이 바위를 다듬어서 춤추는 다윗 왕을 만들 것일세. 길바닥에 버려진 바윗덩어리 하나에서 춤추는 다윗을 미리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춤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
큰 용사여! 이 초라한 기드온을 들어서 하나님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하실 것인가 미리 보았기 때문에 큰 용사여!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고기잡이를 하던 시몬이란 젊은이를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너를 반석이라 부르겠다. 베드로라고 부르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배운게 많은 사람이 아니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 정치적인 영향력이 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헌신과 눈물과 땀과 피흘림을 통해서 앞으로 교회에 엄청난 반석의 역할을 할 것을 우리 주님은 미리 보시고 그 이름을 반석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그는 걸핏하면 넘어졌고 걸핏하면 변덕을 부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베드로, 반석이라고, 게바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간음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이 남자 품에서 내일은 저 남자 품에서 밤을 지새우는 여인이었습니다. 그에게 돌을 던지려 했던 뭇 남성들이 떠나고 난 다음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자기를 창녀라 생각하고 살아가던 여인에게 아니다. 너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면 성녀가 될 수 있다고 주님께서 그를 보아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을 쓸때마다 하나님 앞에 그 교회를 바라보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려고 하니까 감사 제목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단에 오염되어 있질 않나? 교회는 갈기갈기 분열되어 있질 않나? 우상숭배에 물들어 있는가 하면 음란이 교회 깊숙이 파고 들어와 있었습니다. 감사할 조건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고린도 교회가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광스런 모습을 할 그날을 바라보며 그날에 이미 이루어 진 줄로 믿고 끌어다가 감사를 가불해 다가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의 눈이라 하는 것입니다.
큰 용사여! 라고 불러주셨다면 기드온이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아버지에게 달려옵니다. 아빠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어요. 어머니 드디어 하나님이 나를 불러 쓰시겠대요. 친구들아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셨다. 우리 함께 가세 달려나가세. 저 미디안을 물리치세. 이래야 될텐데 오랫동안 가슴속에 담겨있던 불평을 하나님께 털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지금 항아리 속에 들어가서 면도날로 밀알 떨고 있으니까 부지갱이로 타작하고 있으니까 우습습니까? 나라고 이꼴 하고 싶겠습니까? 보란 듯이 타작마당에서 태산처럼 쌓아놓고 타락하고 싶습니다. 나락가마를 어깨에 걸머지며 콧노래를 부르며 내 창고에 알곡을 쌓고 싶습니다. 어지간하면 이꼴을 하고 살고 있겠습니까? 나를 놀리니 좋습니까? 아니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이 꼴을 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출애굽하고 광야를 여행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며 수많은 이적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 조상으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기적이 왜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이 꼴을 하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제가 하나님 같으면 알았다 이놈아. 나도 너 같은 놈 쓰기 지긋지긋하다. 어지간해야 너를 쓰지. 이쯤되면 기드온을 하나님께서 버리실 만도 한데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IV. 이 너의 힘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이토록 비참한 일이 우리에게 왜 일어났느냐고 항변하는 기드온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출애굽할 때 있었던 이적이 당신이 살아 계시다면 오늘은 왜 이런 이적이 일어나지 않느냐고 반항하는 기드온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14절에서 하나님은 기드온의 항변에 아랑곳하지 아니하시고 말씀하십니다. “이 너의 힘으로 가라. 그리고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건져내라”
포도주 틀속에 숨어 밀알이나 까고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자에게 오셨다면 그리고 그를 큰 용사로 불러주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 약속하셨으면 - 아멘! 감격해 하며 울며 일어났어야 옳았지요. 그런데 기드온은 지금 여호와의 사자에게 덤벼들고 있습니다. 미디안에게 당한 고통을 분노를 하나님께 터뜨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기드온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미디안을 무찌르는 일을, 저 고통가운데 백성을 일으켜 세워서 구원하는 일 - 네가 해라” “제게 그런 힘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너와 함께 하는 것 이것이 너의 힘이니라” 네 힘이 무엇이냐구?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힘 말고 무슨 힘이 필요하느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능력 말고 무슨 능력이 너에게 더 있겠느냐? 이적이 어디 있느냐고?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는 이것이 이적이니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는 이적을 네가 보면 네가 가는 곳곳마다 이적과 기사가 나타나리라.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16절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삼갈이 육백명을 죽였다고, 에훗이 악한 왕을 단번에 칼로 찔러 죽였다고, 드보라가 1만명으로 싸워 이겼다고, 너는 한명을 무찌르듯이 메뚜기떼 같은 저 미디안을 물리치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여기 기드온은 당시에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항아리 속에 들어가서 부지갱이로 낱알를 떨고 있는 이 꼴이 이스라엘의 꼴이요 큰 용사가 되어 단 300명의 군사로 수십만의 미디안을 무찌르는 이 모습도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초라한 꼴을 하고 오늘은 여기서 짓밟히고 내일은 저기에서 깨지고 모래는 저기에서 조롱받는 이 초라한 꼴이 한국교회의 모습이 기드온의 모습이요 민족을 구원하고 북녘의 동포를 살려내며 실크로드를 지나서 예루살렘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여 아멘 주 예수여 어서오시옵소서. 이 지구촌을 송두리째 구원하는 그 날의 영광스런 모습도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초라한 모습 오늘도 실패하고 내일도 빛은 꺼져가고 있고 소금은 맛을 잃어가고 있고 영광스런 빛을 잃어버린 이 초라한 모습도 나의 모습이요 큰 용사여! 분연히 일어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에 연약한 나도 약점 많은 나도 큰 용사로 쓰임받는 그 빛나는 황홀한 모습도 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큰 용사여 일어나라.
큰 용사여
삿 6장 1~24절 / 박정식목사
가난을 미덕으로 삼던 뿌레몽뜨라는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수도원에 정말 어려움이 많이 있었습니다. 재정이 고갈이 되는 바람에 지붕은 다 벗겨지고 비가 오면 비가 새기 일수였습니다. 게다가 종탑에 종마저 깨어져 버려서 예배시간을 알리는 예배타이밍을 나무 딱딱이로 대신 하는 그런 처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수도원에 고세라는 수도사가 한사람 있었는데 이 사람은 젖소를 먹이는 그런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젖소를 먹이면서도 항상 기도하며 이 수도원의 어려운 재정문제를 주께서 돌아보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가슴속에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어릴 때 양부모 밑에서 자라났는데 그 양부모 님이 불로장생주를 만드는 비법을 가지고 있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고세는 수도원장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간곡하게 부탁을 합니다. "수도원장님, 제가 이런 비법을 어깨너머로 배웠는데 기회만 주시면 제가 그 비법을 어떻게든 복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비법을 가지고 불로장생주를 만들어 팔면 우리 수도원은 부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원장은 허락을 했습니다.
6개월 동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불로장생주가 개발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 불로장생주는 정말 날개돋친 듯이 전세계로 팔려나갔습니다. 금방 수도원은 재정이 차고 넘쳤습니다. 얼마가지 않아서 멋진 새로운 수도원 건물이 세워졌고 수도사들은 더 이상 가난과 싸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식탁에 앉아서 감자 하나 가지고 씨름하지 않아도 되었고 풍성한 식탁을 누리게 됐었습니다.
그런데 얼마간 시간이 지난 다음에 경건한 미사시간에 다 찬양을 부르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뛰어들어오더니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함께 찬양을 하는 겁니다. 보니까 고세였습니다. 술에 취한 것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그 사람을 쫓아 내버리고 다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고세는 매일 마다 술을 시음하기 위해서 술을 마신 것이 그만 화근이 되어서 알콜 중독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수도원장은 엄하게 명령을 내려서 이 고세가 다시는 양조장 바깥을 나오지 못하도록 그렇게 명령을 했습니다.
얼마 있다가 수도원장이 양조장을 방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고세가 수도원장을 만난 다음에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원장님, 저를 예전에 그 자리로 보내주십시오. 저는 다시 젖소를 먹이면서 묵상하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수도원장은 "주께서 다 도와주실 것이다. 염려하지 마라." 그러면서 그에게 계속해서 불로장생주를 만들 것을 명령했습니다.
사람들은 미사시간마다 고세를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그 영혼과 육체를 강건하게 도와주옵소서," 그런데 정작 고세는 영혼과 육체가 병들어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유명한 '고세신부의 불로장생주' 라는 이야기인데 지은 사람이 유명한 알퐁스 도데라는 작가입니다. 하나의 유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중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가끔 우리의 신앙에도 그런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중적인 삶의 모습,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인도하시고 우리를 부요케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하나님은 철저하게 무시해 버린 채 우리의 이기심과 우리의 목적만을 추구하는 그런 약한 면이 참 많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추구했던 목적은 수단이 되어버리고 수단이 목적의 위치에 자리잡아버리는 이런 아이러니한 모습들을 자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분 없이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 없이는 나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요해지고 우리가 구원받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경험하면서 정작 그분은 수단화 되어버리고 마는 이런 약한 면이 많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복이나 주시는 분, 하나님은 구원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것을 덤 하여 주시는 분, 이 정도로 전락해 버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세상 적인 아름다움, 세상 적인 부유함으로 그저 왜곡될 때가 자주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전의 신앙은 어디로 가버리고 구원의 감격은 어디로 다 사라져 버리고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하나님이 주시는 부유함을 우리가 누리면서도 정작 하나님은 망각해 버린 채 세상에 도취되어버린 이런 나약한 현장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중적인 삶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사랑 다 망각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이기적인 모습으로 전락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황폐해졌고 그들의 삶은 철저하게 유린당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6장 2절에서 4절까지 말씀 보겠습니다.
(삿 6:2)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산에서 구멍과 굴과 산성을 자기를 위하여 만들었으며
(삿 6:3)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이 치러 올라와서
(삿 6:4)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식물을 남겨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미디안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약탈당해버리는 이스라엘의 현실에 대해서 본문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추수할 곡식이 없습니다. 추수할 때만 되면 쳐들어 와서 다 약탈해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급기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서 동굴을 파고 생활해야 하는 이런 처참한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더 이상의 약탈과 더 이상의 유린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이렇게 처참한 삶을 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과거 하나님은 그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그 모든 이방민족들은 그들에게 정복당했고 가나안 땅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주권을 항상 선포하는 삶을 살아왔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스러운 과거는 다 사라져 버리고 초라한 현실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던 과거는 다 단절되어 버리고 이제는 이방민족들에게 유린당하고 철저하게 짓밟히는 이스라엘의 연약한 모습, 초라한 모습들이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껏 하나님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풍요로웠을 때, 부유했을 때 정말 하나님의 은혜 앞에 그들이 무릎꿇고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고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고백하고 감격하기보다는 이제는 그 땅이 주는 안락함과 그 땅이 주는 부유함을 더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하나님은 복이나 주는 하나님, 자신의 수단이 되어버린 이런 모습으로 그들이 철저하게 주저 앉아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위기였습니다. 그것은 방종이었습니다. 더 복을 누릴 수 있다면, 더 잘 살수 있다면 이것이 그들에게는 삶의 가장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하나님, 망각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이 지금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더 많은 부유함, 더 많은 안락함, 더 많은 세상 적인 탐닉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실이 어떻게 되어버렸습니까?
하나님을 등졌을 때, 하나님을 외면했을 때,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아버렸을 때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기회, 하나님이 주신 모든 풍요로운 현실조차도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1절 말씀 보겠습니다.
(삿 6: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범죄였습니다. 범죄가 윤리 도덕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범죄는 우리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게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범죄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하나님께 민감하게 반응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심을 경험하는 삶이 참 필요한 것입니다.
은혜가 풍성할 때는 그런 고백이 쉽게 나옵니다. '주 없이는 나는 안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건 정말 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조금 오만해 지면 '주님이 도와주지 않아도 이제는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은 패역함입니다. 한때는 '난 주님 없이는 안 됩니다. 난 주님 없이는 못 삽니다. 주님이 앞에 인도하시지 않으면 난 갈 수 없습니다.' 했던 사람들이 조금 나아지면 이제 저 혼자 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바뀌어져버리고 맙니다. 그것은 패역함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강할 때 무릎꿇을 자세가 필요합니다. 아직도 부유할 때 무릎 꿇는 현장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모든 면이 형통할 때 무릎꿇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복된 것입니다.
약해져서 무릎꿇는 것은 나쁘지는 않습니다. 병들어서 무릎꿇는 것은 그렇게 큰 저주받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큰 복 된 것은 여전히 건강할 때 무릎꿇는 것이고 여전히 형통할 때 무릎꿇는 현장일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 앞에 무릎꿇고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현실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런 신앙인이 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철저하게 갈 데까지 다 가버리는 무지함이었습니다.
본문 3절부터 4절 읽습니다.
(삿 6:3)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이 치러 올라와서
(삿 6:4)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식물을 남겨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동네북이 되어 버렸습니다. 만만하게 이스라엘입니다. 미디안만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 온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던 다른 모든 이방민족들이 기회만 되면 철저하게 그들을 유린했습니다. 추수할 때가 되면 거둘 것이 없습니다. 옆에 있던 미디안이 훑어가고 아멜렉이 훑어가고 동방 사람들이 다 훑어버렸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입니다. 이리저리 유린당하는 것은 이스라에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살기 어려운 현실이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매일 마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현실이 그들 앞에 대두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죽을 수도 없는 현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그 풍요로운 가나안 땅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이 지었던 집들 다 소용없었습니다. 생명을 연명하기 위해서, 처자식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산 속에 올라가 동굴을 파고 사는 그들의 삶은 정말 짐승 같은 삶이었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가나안 땅을 주도했던 그들이 어떻게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까?
그렇게 풍요로움을 누리던 그들이 이렇게 몰락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간단명료하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범죄했다.' 범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현장들, 하나님이 주셨던 모든 은혜를 다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약함이었습니다.
6절 말씀 보겠습니다. 그들에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읽습니다.
(삿 6:6)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무엇무엇으로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는 말이 본문에 나옵니다. 그냥 기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무엇무엇으로 인하여 그들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누구 때문에 기도합니까? 미디안 때문에 기도합니다. 어쩌면 미디안이 그들을 유린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릎꿇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미디안은 그들에게 어쩌면 악한 도구였습니다. 하나님을 찾도록,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아이들을 보면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에서 가끔은 약간의 약함 들을 봅니다. 부모 말을 거역하는 것도 그렇지만 아이들이 웬만큼 걸으면 부모 손을 뿌리치는 것이 제일먼저입니다. 누가 가르쳐 주었나요? 우리의 죄성이 그들에게 그대로 전이 된 것 같습니다. 잡고 가면 뿌리치죠. 뿌리치고 혼자 걸어가다 그 다음은 넘어집니다. 그러면 엄마, 아빠를 찾아요. 넘어져야 찾아요. 안 넘어지면 안 찾아요. 그것이 아이들의 약함입니다.
이스라엘의 약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약함도 여기에 있습니다. 미디안으로 인하여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평탄할 때 기도하는 크리스챤이 되도록 힘쓰십시오. 형통할 때 더욱더 우리는 기도의 현장에 있어야 합니다. 형통할 때 자만에 빠지거나 모든 것이 부유할 때 세상 적인 가치관을 더 앞세우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더 하나님께 민감하게 기도하십시오. 더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도하십시오. 더 하나님께 바짝 다가서기를 결단하십시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 주님을 찾는 것도 나쁘지 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부유하고 여전히 건강할 때,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 더 하나님을 위해 바로 살려는 몸부림치는 삶, 얼마나 멋진 삶입니까?
은혜의 공동체 안에 그런 분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 '천부여 의지 없어서~~~'하는 그런 약한 모습만이 아닌 나는 아직도 부유하고 나는 아직도 건강하지만 아직도 모든 것에 형통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럴수록 더 주님을 의지한다. 난 그럴수록 더 주님 없이는 안돼. 라는 고백을 갖는 것 이것이 크리스챤들의 정말 지혜로운 고백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인해서 기도합니다. 그 미디안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을 찾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무릎꿇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시작합니다.
간혹 우리 자매들 보면 남편이 너무 잘해 주면 그분이 안 믿는 남편이라도 긴장을 탁 풀어버리는 자매들 있어요. "뭐 남편이 나한테 잘해주는데...남편이 나 혼자 잘 가라고 집도 봐주는데..." 그래서 완전히 안심하는 분들이 있어요. 모르겠어요. 오늘도 남편이 아기 봐주어서 홀로 편안하게 오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그럴 때는 바짝 긴장하지 않아요. "우리 남편 뭐 나 교회 가는 것 반대하지 않고요. 나 잘 도와주고요. 괜찮은 사람이에요." 그 영혼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아요. 그 영혼에 대해서 아파하지 않아요. 그러다가 문제가 터져요. 남편이 뭔가 다른데 눈을 돌린다든지 조금 다른 곳에 한눈을 팔면 그때부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어요. 세상에. 그 인간 좀 고쳐주세요." 합니다.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 욕심꾸러기입니까?
아이들이 뭔가 문제가 발생해야만 기도하는 약한 부분들이 있어요. "내 자식은 워낙 똑똑해요. 워낙 괜찮은 놈이에요." 그때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때 무릎꿇어야 합니다. 그럴수록 더 하나님 앞에 민감하게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하게도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7절 말씀 보겠습니다.
(삿 6:7) ○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은 고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8절 말씀 보십시오.
(삿 6: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응답의 타이밍이 어떻습니까? 지체되지 않습니다. 금방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속이 있는지 없지는 모르겠어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고 부르면 하나님이 즉각 응답하기 원하십니다. 즉각 그들에게 관심 갖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을 항상 찾으면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우리에게 복된 삶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시키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짓밟지 마십시오.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 앞에 우리는 민감하게 반응하여야 하고 하나님 앞에 더더욱 엎드리는 삶의 모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11절에서 12절 말씀까지 보겠습니다.
(삿 6:11) ○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삿 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현실과 비전이 대비되어 나타납니다. 현실의 모순, 비전에 대한 아름다움이 본문에 잘 드러납니다. 요아스의 아들이라고 나옵니다. 이 요아스라는 말은 '절망적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부름 받은 기드온의 아버지의 이름이 요아스입니다. 어쩌면 그런 이름이 붙여진 그 자체가 아마 힘들고 어려운 그런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사람을 부르시는데 그는 몹시 심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첫눈에 감이 옵니다. 하나님이 부르는 용사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무예를 연마한다든지 아니면 적어도 하나님 이 민족을 구원해 달라고 뭔가 부르짖으며 기도한다든지 이런 스타일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지금 지명하여 부르는 그 현장을 보니까 이 사람이 어떡하고 있습니까? 고작 자기 목구멍을 풀칠하기 위해서 타작을 하는데 타작 마당에서 도리깨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 틀에 넣고 뜯고 앉아 있습니다. 얼마나 옹졸한 모습입니까? 얼마나 이기적인 모습입니까?
아주 평범하고 심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부르시는데 뭐라고 부르십니까?
'큰 용사여' 하나님이 그를 바라보시는 가치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가치관은 세상이 보는 가치관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안목입니다. 그분이 보시는 것은 우리의 약한 모습만이 아닙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난 다음에 그분과 더불어 이룰 미래를 보신다는 말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사들이 그렇게 대단한 인물들이 아닙니다. 강한 용사들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탁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약한 사람입니다. 너무나 간이 적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살폈던 발악이라는 사람, 하나님께서 드보라를 통해서 그에게 당신의 명령을 전함에도 불구하고 드보라에게 "당신이 함께 하지 않으면 난 안가겠습니다." 얼마나 쫀쫀한 남자입니까? 얼마나 간이 작은 남자입니까?
기드온도 마찬가지입니다. 입다라는 사람을 하나님이 쓰시는데 그는 위대한 용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부르시기까지 마치 임꺽정 같은 산적 두목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지명하여 부르십니다. 그리고 역사의 무대에 세우십니다.
여러분, 영웅들은 다 어디에 갔습니까? 호걸들은 다 어디에 갔습니까? 위대하고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은 다 어디에 가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서 반응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자기를 위해서 남용할 뿐 하나님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약한 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약한 부분을 지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저 보다 나을텐데... 나는 저 이상 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많은 경우는 너무나 탁월하기 때문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현장에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현장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불꽃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초라할지 모르지만, 세상 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는 모자랄지 모르지만 그들은 탁월한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에 용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영웅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 사라졌습니다. 아무도 하나님께 응답하지 않습니다. 비록 심약한 사람이긴 하지만, 초라한 사람이긴 하지만 기드온만 하나님께 민감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 부분을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에게,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 부르시네..." 그러나 이 사람밖에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전히 주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또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반복되는 주님의 탄식입니다.
그러나 작지만 큰 사람입니다. 자기는 약하지만 대신에 하나님을 충분히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자기는 텅 비어 있지만 하나님을 충분히 채울 수 있는 그런 마음의 공간이 많은 사람입니다.
1996년에 타계했던 엔도 슈사꾸라는 일본의 유명한 작가가 있습니다. 이분이 탁월한 것은 일본에 크리스챤들이 1%밖에 안되거든요. 그 작은 크리스챤 인구가운데서도 아주 탁월한 크리스챤 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소설을 쓰는 소설은 대부분 기독교적인 배경에서 소설을 씁니다. 그래서 자기 소설을 통해서 기독교를 변증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그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소설이 무려 9번이나 영문으로 번역이 되어서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3번 정도 노벨 문학상 후보로 올라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책 운데 가장 유명한 책이 뭔 줄 아십니까? '예수의 생애'라는 책인데 이것은 그의 자전적인 신앙 경험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이 엔도 슈사꾸의 책을 읽다보면 이 사람이 주로 어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약한 면입니다. 엔도 슈사꾸가 정말 감격하는 현장,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하는 현장들은 대부분 예수의 약한 면들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다루고 있다. 고통을 당하신 하나님을 다루고 있다.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을 다루고 있다. 바로 그 하나님을 죽였다는 것을 기독교만이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은 거기에 감격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에 신이 인간이 되고 어떤 종교에 신이 그렇게 나약해 지고 어떤 종교에 신이 그렇게 나 위해 죽임을 당하고 그렇게 처참한 고난을 당할 수 있었습니까? 기독교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의 승리, 예수의 부활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존경도 하지만 정말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약한 면입니다. 그는 우리의 질곡을 지고 모든 고통을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것은 그분의 약함이 아닙니다. 그분의 진정한 강함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 때문에 지금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사용하는 사람들, 처음부터 강한 사람들 아닙니다. 약한 사람들입니다. 충분히 무릎 꿇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삶의 여백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그 가운데 채우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더욱더 의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곧 강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의 고백도 동일하지 않습니까?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라...역설적입니다.
자신의 잘남, 자신의 위대함 하나님이 그걸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을 배척하는 도구였고 도리어 하나님께 대항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를 사용하는 현장은 그의 약함이었습니다. 눈이 멀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임재 해주셨고 그가 정말 하나님께 불꽃같은 삶을 살 때에는 그는 육체의 가시 때문에 일생동안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남들이 비난하고 비웃었습니다. "저거 남은 고치는데 자기는 고칠 수 없는가?" 그도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 눈물겹게 호소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 약함을 도말 하여 주십시오." 그때 주신 응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네게 넘친다. 이는 네가 약한데서 내 능력이 온전해짐이라." 바울이 그 놀라운 확신을 가지고 부터 무엇을 고백합니까? "이러므로 내가 모든 약한 것과 모든 무능한 것을 도리어 기뻐하고 자랑한다." 왜냐하면 자기 속에 그런 여백과 공간이 있기 때문에 주님이 내 속에서 충분히 임재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나이다움은 순종함에 있습니다. 사나이다움은 주님으로 철저하게 채워짐으로 있습니다.
여러분, 사나이다움이 과용하고 터프하고 사람들 앞에서 뭔가 기분파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고 드릴 때에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사나이다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우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그 가슴을 채움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무릎꿇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2절 말씀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삿 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세상은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비전은 큰 용사입니다. 그의 미래를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는 쫀쫀한 사람일지 모르지만 네 약함이 내가 채워지고 네 인생 여백에 내가 충만히 임재 할 때 너는 위대한 용사가 된다." 하나님의 비전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잘남 때문이 아니잖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헌신하는 것도 어떤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잘남이 아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요새 제가 연보 드린 분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정말 주께 드린 동역자들을 가슴에 담고 기도해야되겠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근데 예전에는 제가 십일조 드리는 분을 당연시했습니다.
당연하다. 아니,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소득의 십의 일을 드리면서 주님,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정말 주께서 내게 주신 것을 다시금 돌려 드릴뿐입니다. 이런 원숙한 믿음을 다 갖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저는 당연시했습니다. 기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제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그 이름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감격이 있습니다. 참 힘들었겠다. 참 아팠겠구나. 작으면 작아서 아팠겠고 크면 커서 아팠을 것입니다. 작은 것은 그 작은 살림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을 떼어내느라고 얼마나 아팠을까. 큰 경우는 이 만큼 안 떼어내면 훨씬 더 잘 먹을 텐데 얼마나 힘겨웠을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도 은혜입니다. 보통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 의지로 됩니까? 우리 결단만 갖고 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더 감격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요새는 그 명단을 갖고 기도할 때 참 하나님께 감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느끼는 은혜가 있습니다. 또 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기본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니 구원받은 사람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생명도 주셨는데 헌신도 안 해..이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마는 제 마음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충분히 쓸 수 있는 시간에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자신의 삶의 틈을 내서 봉사하는 사람들 보면 가슴이 뻐근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들을 볼 때 느끼는 포만감이 있습니다. 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응답할 수 없습니다. 순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작은 모습이지만 또 작은 몸짓이지만 작은 결단이지만 주님 앞에 그런 몸부림을 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입니다. 우리들이 볼 때는 별볼일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당신은 큰 용사이십니다. 주님의 시각에서는 그렇습니다.
세상속에서 그래도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 당신은 큰 용사이십니다.
다음세대를 위해서 자기 시간을 쪼개고 열정을 쏟아 붓는 당신은 믿음의 용사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면서 멸시천대 받아도 그들을 가슴에 품고 복음 앞에 날마다 순복하는 당신 큰 용사이십니다. 이모저모 다양한 헌신 속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 그들을 세우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바로 당신도 큰 용사이십니다. 지금 하나님이 나를 정말 바라보시는 그런 아름다운 현장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약합니다. 무능합니다. 초라합니다. 때로는 과거의 아름다움 다 잃어버리고 비로소 초라한 모습으로 주님께 와서 무릎꿇은 현장도 있습니다. 건강했던 현장 다 잃어버리고 병들고 나약한 모습으로 주님께 무릎꿇은 현장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감은 다 사라져 버리고 초췌한 모습으로 주님께 무릎꿇은 현장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무릎꿇고 하나님 없이는 안돼. 하는 고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작은 몸짓과 몸부림을 치는 그 현장, 당신은 결코 작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하나님의 비전들이 날마다 완성되어 가는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때로는 너무나 작은 몸짓으로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나 약한 몸짓으로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주께 무릎꿇게 도와주시고 하나님께 다가서는 삶이 되도록 저희들을 강권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 문제가 다가와야 비로소 기도하는 모습이 아닌 항상 주께 민감하게 반응하고 평안할 때 기도하고 부유할 때 기도해서 더 많은 주의 영광과 주의 목적을 성취하는 신앙되도록 도우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비록 약하고 부족하지만 주님으로 채움 받고 하나님을 향해 몸부림치는 삶을 살아가는 저희들, 세상에서 어떻게 보든지 우리는 위대한 용사라는 것을 선언하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삶이 항상 견고하게 세워져가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동역자들을 축복하시고 우리의 다음세대를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