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니(요8:12 바리새인들이 대듭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않다(요8:13)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8:15-16) 대답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주님과 함께 계시므로 그 증언이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같은 원리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육체로나 외모로나
아무도 판단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판단하시는 이는 누구신가 하면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신령한 자는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는다(고전2:15)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3장 4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고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의롭다 함을 당당하게 받아야 합니다.
말씀에 의해 옳다 인정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귀가 판단하거나
참소할 때나 세상이 여러분의 육체나 외모를 판단할 때 그 심판을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말씀으로 의로움을 받고 있으면 사람이 어떤 심판을 해도
그 심판을 이깁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되어져야 합니다.
빛 가운데 있으면 아무도 나를 심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두움에
있으면 다른 사람이 심판하고 정죄하면 내게로 그대로 스며들어옵니다.
그렇지만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누가 아무리 나를 정죄하고
찧고 빻고 떠들어도 “웃기고 있네”하고 못 들은 체 하고 맙니다.
왜요? 내 안에 있는 주님의 빛이 나를 보증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두움에 있는 사람은 영의 근육이 약해서 한 마디에 넘어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서 있는 자리 자체가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남이 시시한 판단을 하면
속으로 쓸데없는 소리하고 있네 이렇게 치부해 버리고 맙니다.
사도바울이 담대한 이유는 바로 이것 하납니다.
“너희들이 뭐라고 해도 나는 빛 가운데 있다”는 배짱입니다.
삼층천을 봤다는 걸로 바울이 그렇게 담대한 게 아닙니다.
바울은 너희가 나를 사도라 안 불러줘도 나는 빛 가운데 있고,
나를 보고 연보 떼먹는 도둑이라고 해도 나는 빛 가운데 있고, 나를
이단삼단 해도 나는 빛 가운데 있으니 아무려면 어떠하리 하고 나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가 다 달아날지라도 상 얻는 자는 하나인데,
그 상을 얻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달리기 때문입니다.(고전9:24)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외모나 육체를 보고 판단받기 때문에 헛된 영광을 구하고,
쓸데없는 사람을 만나 교제를 하고 자신의 울타리를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내 속에 나타내기를 기뻐하실 때에
나는 유명한 자를 만나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갈1:16-17)
자기 자신이 빛 가운데 있지 아니하므로 사람으로부터 판단을 받으면
그만 움츠러들어 자신이 없어지니 유명한 사람들을 자꾸 끌어들입니다.
그 유명한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하는 것처럼 하는 말로 자기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정죄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사망의 그늘 아래 있는 사람이죠.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에 정죄는 할 수 없습니다.
교계 안에서도 인간적인 뒷거래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게 바로 어두움이며 어두움에 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자신이 넘어져도 빛 가운데 넘어지고, 자빠져도
빛 가운데 자빠지는 것을 압니다. 망해도 빛 안에서 망한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아니 죽어도 내가 빛 안에서 죽고, 살아도 내가 빛 안에서 산다,
찌그러져도 빛 안에서 찌그러진다는 것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의 배짱입니다.
오직 자신을 판단하실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강력한 주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고전4:3)
그런 배짱이 있어야 가난한 선교사가 벤츠나 BMW 같은 고급차를
보고도 편안하게 봐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도
한번 해보고 저렇게도 한번 해보고 삶의 지평이 자꾸 변형이 됩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많은 시간과 물질이 낭비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요8:23-24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누가 구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Heaven" 곧 궁창 위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거기에 하나님과 언제나 마주보고 관계성을 맺던
하나님과 같은 ‘호 로고스’가 그 하늘에서 땅에 오셔서 인간이 지은 죄를
인간의 모습으로 몽땅 대속하시고 이런 인간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자기 생명을
주셔서 다시 Heaven, 그 하늘로 끄집어 올리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다고 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일서 2장에서도 너희는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니
이는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 왔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이런 것은 영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은 영원하다(요일2:15-17)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 '그분이 땅으로 내려오셨구나,
우리는 땅에서 나서 땅으로 가고 영원한 불 못에 갈 존재지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그 분이 사람의 모양으로 내려오셔서
우리가 믿도록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구나' 하는 이 사실을
믿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희망이 없다는 이 말입니다.
그 말씀이 지금 진리의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임하셨는데 만일
이를 믿지 않고 죽으면 두말 할 것 없이 불 못입니다.
그래서 땅에 있는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땅에 있는 것들은 결코 스스로 하늘로 올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에 다다르지 못합니다.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요8:25) 무슨 말인지 이해되십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바로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라는 말입니다.
“처음부터”란 태초부터 가라사대 하고 말씀하시던 분이라는 말입니다.
반드시 그를 믿어야 됩니다. 아니 우리 주님이 그분이심을 믿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존재하면서 모든 만물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 분이 지금 우리 안에 진리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십니다.
그분을 믿음으로 붙들면 그분이 가는 곳에 나도 가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이 사실을 붙드는 것,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이 언제 일어나는가?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 인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8:28)
인자가 들린 후에라야 되어 집니다. 이와 같은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일어납니다. 요한복음은
인자이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들린 이후에 열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때'란 말씀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볼 수 있는 말씀이 아니고,
오직 십자가를 건너온 사람들만 볼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좋은 신앙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