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어살 때이던가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 일기엔 분명히 커서 돈벌어 고향에 가고 싶다고 했다. 한 마흔 넘어서....
중학교, 고등학교, 전문대학을 다닐 때도 고향을 종종 방문하여 고향을 지키시는 작은 아버님댁과 조상들의 산소를 찾기도 하였다.
하여 결혼할 때는 도시보다는 시골여자가 좋아 강원도 산골사람과 결혼을 하였다. 젊은 신혼부부가 만나 맨주먹 맨발로 시작하여 아이도 낳고 학부모도 되고 이젠 아이가 커서 대학2학년을 마치더니 군에 간다고 휴학계를 냈다.
(제 1차 관문)
1984년 22살에 사회에 첫발을 내딪고 군3년을 마치고 결혼자금 마련한다고 버둥대다 1989년에 드디어 결혼했다. 한해가 지나고 아이 백일잔치 하자마자 나는 직장에서 사고를 당했다. 멀쩡해도 진급이 어려운 판에 몸에 불편이 따르니 일은 일대로 직장은 직장대로 힘들고 괴롭기만 했다. 그렇다고 이 직장을 그만두면 달리 살아갈 방책이 없는지라 그냥저냥 다니다가 1995년에 11년의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였다. 그 때가 내 나이 35세! 기는 많이 꺾이었지만 혈기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아이가 커서 초등학교를 들어갈 때 쯤이니 귀농 귀촌이야 생각은 했지마는 아이의 교육문제, 장래문제로 감히 실행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 때만해도 내 머리속엔 직업의 귀천이 있었으며 빈부와 상하직급의 차이가 행복과 만족의 잣대로 있던 때였다.
도시 속에서 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 말을 이해할 사람은 이해할 것이고 이해못 할 사람은 영원히 이해 못 할 것 같다.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못하랴마는 그 시대의 상황이나 개인적인 인생관 나이에 따른 가치관 등이 뒤엉킨 나만의 아집인지도 모른다. 허구헌날 기원에 갔다. 바둑판 옆에 소주한병을 두고 안방처럼 드나드시던 할아버지뻘 사람들과 소주내기 바둑을 두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암담이니, 절망이니 그런 말은 나한테 과분한 것이었다. 마치 폐인이 되기 위해 흔들리는 줄 끈어진 연이랄까?
1년하고도 6개월을 그리하니 집에서 성화도 성화지만 더럭 겁이났다. 가슴 깊숙히서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또는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준 부모에 대한 죄책감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어느날 툭툭 자리를 털고 공무원은 아니지만 송충이 솔잎먹고 산다고 하던 일을 또 하게됐다.
(제 2차 관문)
1997년 37세 때에는 우리나라가 온통 시끌시끌 죽겠다고 아우성치던 해였다. 딱 입사를 해서 아침회의를 하는데 "지금 우리는 일할 수 있는 직장이라도 있는게 행복한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이 늘 시작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고 1년 반을 놀다 온 나였으니 당연하고 실감나는 말이었지만 썩 좋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일 자체가 나의 적성에 좀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주 싫은 건 아니었기에 가족도 먹여 살리고 세월도 보내고 애도 키우고 어머님 용돈도 줄 수 있고 나의 조그만 희생으로 이리 많은 효과가 있으니 열심으로 직장에 다니고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직장이란게 건설감리업이다 보니 일따라 전국을 누비게되었다. 길어야 삼년 짧은 건 1~2년, 공사가 끝나면 보따리 싸고 또 다음 현장으로 가야 한다. 가족품이야 그립기도 하지만 객지서 보내는 허황한 심정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술과 노래를 좋아한 탓에 노래를 부르면 타향살이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러다가 사무실도 없이 낙찰만 받고 일할 생각도 없는 악덕업자를 만나 고생고생하다가
제 풀에 지쳐 겹치고 겹친 삶의 무게에 눌려서 다시 사표를 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하고 준비해 둔 것이 있느냐고 묻길래 "농촌으로 가렵니다." 한마디로 대답하고 해준다는 고용보험료 지급도 마다하고 훌훌 나와 버렸다.
2003년이니 아이가 중2였던 때였다. 이제는 강태공처럼 세월이나 낚는 바둑은 두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귀농준비를 하였다. 어떤 이는 귀농준비는 직장다니면서 한 5년정도 준비를 해야 좋다고 하는데 사실 나도 직장 다니면서 맘은 있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바쁘기도 하고 객지의 고단함에 준비할 여력이 없었다. 몸도 쉴겸 강원도 원주,횡성,평창,영월,단양으로 돌구 돌며 지리며 마을 생김새며 그 고장의 특징과 농작물들을 둘러보았다. 주된 목적은 일단 땅을 찾는 거였다. 방법은 틀렸지마는 일단 마음의 결정에 따라 무엇인가 형상화하고자 하는 조급함이 앞선 때였다. 그리하여 평창에 조그만 900여평의 산골짜기 땅을 사게 되었다.
모든 토지거래를 하고나니 어딘지 이상하였다. "나는 이미 틀렸다고 치더라도 아이만큼은 틀리게 할 수 없지 않는가!"하는 부모로서의 욕심인지 의무감인가가 나를 짓누르기 시작하였다. 아내두 덩달아 아이만큼은 학교를 마치고 귀촌합시다 하며 회유하기 시작하고 때론 갈 테면 혼자가오 하는 협박아닌 협박을 하곤 했다. 그래 이건 좀 모양이 아닌가 싶다하여 마침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재입사 권유가 와서 못이기는 척 가슴에 눈물인지 설움인지를 삮히며 다시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제 3차 관문)
2005년 42세에 오로지 귀농자금 확보와 아이 교육목표 완성에 모든 걸 걸고 나의 희생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고 일터로 나갔다. 거긴 마침 경산,영천,건천,경주,울산까지 펼쳐진 현장이었기에 시골을 마음대로 다니고 구경할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이미 타향살이에 찌들고 농촌으로 향한 마음은 더욱 깊어가는 골짜기처럼 되어 버렸다. 그 사이에 아내는 2년인가 공부해서 공인중개사를 취득하였고 아이는 턱에 털이 송송 돋아나는 청년이되어 서울로 대학을 다녔다. 어느새인가 벌써 건설현장을 떠돈지 26년! 머리는 반백이되고 가뜩이나 나쁜 근시와 난시에 노안이 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책 글씨도 보기 힘들어지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더 이상 갈 수가 없노라고.... 아내는 답을 하였다. 그동안 수고하였으니 얼른 집으로 돌아오세요 한다.
자가용에 이블과 요와 베개와 신발, 화장품, 면도기, 칫솔, 비누, 샴푸 등을 싣고 집으로 향하던 나는 고속도로에서 갓길추차하고 말았다. 도저히 앞이 안보여 갈 수가 없었다. 인생의 낙오자요 전쟁에서의 패배자 같은 느낌이 불현듯 치밀었기 때문이다.
한번 주어진 목숨, 살고 싶은대로 살아보고픈 이 순수한 심정, 드디어 농촌으로 간다는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아내와 함께 처갓집을 찾았다. 원주 소초에서 한 30분 가면 내가 사논 평창땅이 보인다. 평창 산골에 도착하여 5년전에 귀농하신 어른을 만나 인사드리고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생초보요 하니 "여긴, 부농들만 있지요. 결정하기가 힘들지 결정하고 여기 들어오시면 맘도 편하고 살만합니다.
농사 짓고 싶으면 농사 배우고 소 키우고 싶으면 소키우는 방법을 배워보지요." 하신다. 바로 아래에 사시는 분( 제 땅을 부치시는 분)을 만나니 방으로 안내하며 커피를 내주신다. 작년에 고추농사가 잘되었다면 커다란 푸대로 한포대를 주셨다. 이리이리 하여 저리저리하고 싶습니다 하니 어르신, 잘 돼었네. 마침 나도 일손이 달리니 나도 돕고 구경도 하고 집은 조아래 빈집이 있으니 거기 살면되지 하며 집까지 소개해 주신다. 아 이제 이사만 남았구나 하며 나만의 안도의 심호흡하며 헤어졌다.
장모님과 처와 함께 처갓집에 오니 상황이 돌변한다. 거긴 너무 외딴 곳이라 못가겠소. 거기가 귀향살이지 사람사는 곳인가! 하는게 아닌가!
(현재와 미래의 문)
무엇이 인간을 다르게 하였는가? 시골처녀라서 시골좋아하는 줄 알고 결혼했더니 시골을 기피아닌 증오일 줄이야!
사랑한다며 수고했다며 마지막에 날 따라오지 못함은 무엇인가?
아직도 도시에서 할 일(중개업)을 하고 싶다며 나는 농촌, 아내는 도시의 일터라는 절충안은 무엇인가?
장모와 아내가 합심하여 2:1로 열세를 당하니 나는 절충안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시내 자가용으로 30분이내 거리, 나는 농촌이며 주변에서 농삿일을 배우고 연습할 수 있는 텃밭 100평이상!
이리하여 3인이 2박3일 꼬박 원주 소초면을 돌아다녔다. 때론 횡성까지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말이 없어도 땡볕에서 밀짚모자쓰고 묵묵히 괭이질(멀칭작업)하는 농부를 보았다. 부러웠다.
말로 표현한다는 것이 부족하고 행여 잘못 말할까 걱정이 된다. 멀리 시내가 보이고 저기 농촌이 보인다. 이 갈림길에서 나를 찾고 싶다. 굳이 항우 초패왕의 배수진이 아니드래도 실패하였을 때, 본능처럼 두려움과 절망감이 급습한다.
어찌하오리까?......................................(저는 약간의 연금이 있기에 경제적 논급은 제외했읍니다.)
첫댓글 귀농길 최대 급경사 고비길에 다다르셨네요^^*
급히 오르다 보면 넘어지거나 쉬 지칩니다.
어차피 넘기로 작정한 고갯길이라면 천천히 쉬엄쉬엄 가시는 것도 좋습니다.
가끔씩 뒤돌아서서 올라온 길 돌아보면서..
삼박골님, 아무래도 사랑방이 어울릴듯 해서 옮겨 놓습니다. 괘않지요?
나무지기님 관심과 조언 감사합니다. 오두막의 글 들은 내용이 깊고 진실합니다. 며칠 처각집에서 농촌체험했는데 온몸이 욱신거리고 뼈마디가 아직도 쑤십니다. 결코 미화나 미학적으로 농촌을 접근하지 안겠읍니다.
저와 비슷한 여정을 살아 오셨군요. 5년 동안의 공무원 생활 끝에 미련없이 사표를 던지고 인천에 올라가 백수 생활을 전전하다 우연히 배우게 된 8비트 애플 컴퓨터.. 너무 재미나고 적성에 맞아 올인을 하게되고 나중엔 프리랜서 생활을 하다가 맞이한 IMF. 몽땅 거덜나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휴양림의 매점 운영에 홀려 내려 왔다가 근처의 마을에 주저 앉았지요. 가진것도 없이 시작한 시골살이. 돈벌이를 위해 포장마차, 장똘뱅이, 호도과자 장수를 전전하다 민박을 시작했습지요. 시작하자 마자 매스컴에 소개되는 바람에 잘나가는 민박집이 되었고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떤일이건 마가 따르는 법
주변의 시셈과 텃세에 못이겨 잘되던 민박집도 팔아버리고 지금은 닭 200 마리와 채소 농사로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살아가지요. 하지만 빚없이 살아왔고 아직은 건강하니 그럭 저럭 살아 가겠지요. 삼박골님 시간이 되시면 '오두막 품앗이'방에 올려진 '시골로~! 참가 신청서' 내시고 며칠 다녀가시지요. 제가 보기엔 그리 어렵지 않게 님의 소박한 꿈을 이룰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처갓집에 다녀왔읍니다. 시골인데요. 전세로 집을 계약하고 왔읍니다. 언제 시간내서 꼬옥 귀댁을 방문하고 싶습니다.
너무 기대도 하지 마시고 자그마하게 소박하게 시작 하십시오. 미리 연락을 주시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그래도 한걸음 전진하셨잖아요. 마음속에만 담고 머뭇거리는 사람많아요.저도 그 중의 일인. 산적님도 대단한 분이고요
여기 오두막마을 가족들도 훌륭해요
산적님의 삶은 존경스럽고 위대하십니다(그간의 글들을 통해 읽고). 귀농해서 자립한다는 거 힘들지만 아름답습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눈물도 웃음도 아닌 봅날에 언땅을 뚫고 튀어나오는 새싹같은 힘이 보입니다. 귀농(촌)자 화이팅!!!
한국인의 자랑, 은근과 끈기로 부인을 철저하게, 아니 처절하게 세뇌하소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아내는 중소도시로 저는 밭으로 가기로 하고 집은 둘다 해결되는 곳으로 정했읍니다. 막상 날짜를 정하니 두렵기도 합니다. 아무리 돈이 대수냐 해도 가장의 무게를 조급이나마 덜어주겠다는 아내가 고맙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전 84년도에 귀촌했습니다,글을 첨부터 끝까지 또박 또박 읽다보니 오타까지 눈에 들어옵니다^^84년도에22살 95년도에 35살!ㅎ~뒷글과 연결해보니 아무래도 84년도의 나이가 잘못된듯..
제가 82학번 현역입니다. 글구 63년생 토끼입지요. 그건 겉만 그리하구요 아내는 지금도 48짜리 애키운다고 성홥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물었지요. 내가 그리도 순수하냐고 욕심없냐구. 그 뒤로 아내는 아무말도 아니합니다. ㅎㅎㅎㅎㅎㅎㅎ
잘 아는 사람들이 힘들듯,부인께서도 시골삶을 잘아시니 그,러시겠죠.그러나 원군임에는 틀림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