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 2: 4 교만하고 불의하다 ( 2 )
2]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1) 의인
의인(창 6: 9)의 원어 '이쉬 차디크'는 차닥'(곧다, 올바르게 행하다)에서 나온 말로 전혀 무죄하거나 흠이 없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시대적 상황에서도 경건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 전 7: 20 -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노아의 이 같은 노력을 높이 평가하사 '의'(義)로 인정해 주셨다.
예수님도 아벨을 '의인'이라 하셨다.
* 마 23: 35 -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이사야 선지자는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사 26: 7)라고 했다.
시편 기자도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시 37: 29)라고 하였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 17)고 했으나 롬 3: 10에서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히브리서에서는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 10: 38)하였다.
엄격한 의미에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있을 수 없으나 오직 믿음으로 '의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는 있음을 보여준다.
이 용어는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사용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취하신 행위를 의미한다.
이 행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 종교개혁자들과 천주교 신학자들 사이의 주요한 논쟁점이었다.
천주교에서 의인은 문자적으로 죄인을 의롭게 만드는 것을 의미했다. 즉, 의인은 초자연적인 은혜의 주입으로 죄를 씻어버리고 영혼을 중생시켜 창조자에게 만족하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도움의 은혜의 은사로 영혼을 준비하고 영세식을 통하여 성화의 은혜로 전달되어 완성된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의인은 중생시키는 은혜의 주입이 영혼을 용서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 자체가 하나님의 용서의 행위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기치없는 인간이 죄없음을 인정받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믿음으로 용서를 받으면 무가치한 인간의 마음이 새롭게 된다. 칼빈은 자기 자신과 "건전한 신학교수들"(sounder schoolmen) 사이에 의인의 시작에 관해서는 노쟁할 것이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천주교의 신앙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화해된 인간이 선행(good works)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의롭게 될 수 있고, 선행의 공로는 열납(acceptance)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칼빈은 믿음을 주장하며 믿음만이 의롭게 만들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천주교 신학자들은 개신교의 견해를 순수한 율법적이고 변론적인 것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의인은 죄를 용서해 주는 단순한 행위인것 같고 의인화된 인격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신교 신학자들은 천주교의 견해를 공로의 개념과 성례전의 마술적 견해에 기초를 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 두 비평은 어느 정도까지 정당한 것 같다. 그러나 양편의 몇몇 신학자들은 때때로 극단적인 표현을 하였다. 예를 들면 개혁주의와 루터교 신학자들은 의인을 인간 내부의 변화를 포함하지 않은 단순한 법적 행위인 것처럼 표현했고, 다른 한편 어떤 천주교 신학자들은 의인을 도움의 은혜에 의한 공로의 보상인 것처럼 표현했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은 의인을 죄의 용서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은사이며 새로운 의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그들은 주입과 같은 말은 사용하면서 의인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 두 종교개혁자들은 신자의 변화가 의인의 조건이 아니며 그 변화는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생활은 계속해서 용서를 간구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추가하였다.
다른 한편 어떤 천주교 신학자들은 그들이 공로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사이며 의인은 전적으로 무상(ugratuitous)이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와 개신교의 두 견해 사이에는 강조점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루터와 칼빈은 천주교의 은혜에 관한 견해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죄인의 영접을 포함하지 않으며,복음과 믿음의 설교를 강조하지 않고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성례전을 집행한다고 믿었다.
한편 천주교에서는 개신교의 견해가 반율법주의(antinomianism)를 따르며, 선행의 공로로 구원을 얻으라고 인간생활에 명령하신 하나님의 정의를 손상시키며, 성례전의 본질적인 중요성을 파괴해 버렸다고 믿는다.
현대의 신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의의 개념으로 이 두 견해 사이의 진정한 차이점을 보려는 경향이 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자비와 동일시 함으로써 그리고 인간들을 최초의 어떤 가치성을 성취할 필요가 없는 인격자로 용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제할 수 있었다고 확신했다.
인간이 자기의 죄에 대한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근본적인 영접이다. 다른 한편 천주교에서는 하나님의 의는 정의이며 인간이 성례전에서 초자연적인 은혜를 영접하여 가치있게 되는 것이 첫째로 요구된다고 주장했다.(신학용어 사전에서 인용)
악인은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지만, 의인은 겸손히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에 순종하여 신실하고 정직하게 사는 자들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그는 현세에서도 믿음으로 평안의 삶을 살 것이며 장차 천국에서 영광스럽고 복된 영생을 누릴 것이다.
이 말씀은 신약시대에 구원과 영생의 복음에 적용되었다.
* 롬 1: 17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2) 믿음
한국컴퓨터선교회 자료를 인용함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어떠한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이라고 설명했다.
성경에서의 믿음은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바꾸는 태도를 말한다. 믿음을 지닌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진리를 확실하고 신뢰할 만한 것으로 여기고 신뢰, 사랑, 그리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반응한다. 특히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믿는 믿음을 말한다.
구약에 나타난 믿음
창세기 15: 6에 나타난 ‘믿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들과 같이 많은 자손들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을 때(창 15: 5)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었고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 6). 창세기 15:6과 구약 전체를 통하여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아만’(’aman)이다.
이 단어의 어근은 견고하고, 믿을 수 있고, 확실하고, 그리고 진실된 것을 의미하며, 담대함을 가지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아멘’(’amen)은 이 어근에서 유래한다. 무엇인가를 믿는 사람은 그것의 신뢰성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민수기 14장에 나타난 불신앙:
민수기 14장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후에 모세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게 하실 때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서 내가 너희에게 준 땅을 얻으라 하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믿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나니”라고 말했다(신 9: 23).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것은 그를 믿을 만한 분으로 여겨 그의 약속을 중요시 하며 그의 말씀대로 행동함으로 하나님께 우리 자신들을 위탁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의 도덕적인 성품을 계시하시고 신자에게 믿음의 삶을 안내하여 주는 율법을 주셨다(신 4: 5-8).
신약에 나타난 믿음
신약에서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이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을 완전히 계시해 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믿음: 신약은 ‘믿다’란 의미로 헬라어‘피스튜오’(pisteuo)를 사용한다. 우리들은 그 단어가 두 개의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요한복음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 중 몇 사람들은 피상적인 믿음으로 반응을 보였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좀더 어려운 말씀들을 말씀하셨을 때 의심으로 바뀌어졌다 (요 2:22 23; 6: 60을 대조해 보라).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전적인 위탁을 가지고 예수님께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이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였던 것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였다. 이들은 예수님을 신뢰함으로 그들 자신과 그들의 현재적 삶과 그들의 영원한 삶을 그분의 손에 위임하였다.
히브리서 기자는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 1-3) 고 했다.
'믿음'의 히브리어 '에무나토'는 '공평', '견고', '확실', '영원' 등의 의미와 '에무나'는 ‘믿음, 신실함, 정직함’이라는 뜻이 있다.
특별히 신뢰성에 기초하여 증명되는 개인의 품성이나 행위의 '공평함'을 뜻한다.
본 구절에서 믿음의 속성은 '그의'라는 소유격 앞에 위치한 '의로운'에 의해 잘 설명된다.
믿음은 의를 실천하려는 그의 태도가 확고한 것을 의미하는 바, '믿음'은 의의 개념과 동일하게 사용되곤 한다.
* 삼상 26: 23 -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 시 33: 4-5 - 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5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 시 40: 10 - 내가 주의 공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
* 시 96: 13 -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 시 119: 75, 138 - 75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138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
* 시 143: 1 -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바울은 이를 인용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 청의의 교리를 가르쳤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이라는 아름다운 공간에 행복을 담아 나의 인연 모든 분에게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미소와 함께 전해 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 하십시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