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840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 : 충청도 살 제 진천, 죽어 용인
진천의 고구려 때 이름은 금물노군(今勿奴郡)이다. 고려 때는 강주(降州)라 불리다가 조선 태종 13년에 진천으로 고쳤다. 예로부터 진천지방에 내려오는 말로 “진천에서 살다가 죽어서는 용인으로 간다”라는 말이 있다. 중국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항주에서 태어나 광동에서 살다가 소주에서 죽는다”라는 말은, 경치가 좋은 항주에서 태어나 음식물이 풍부한 광동에서 살다가 소주의 질이 좋은 관속에 몸을 누인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살기는 산천이 아름다운 진천이 좋고 죽은 뒤는 땅이 좋은 용인이 좋다’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은 다음의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묘봉리에 한 젊은 남자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낮잠을 자다가 산꼭대기로부터 굴러 내려온 수천 근 되는 바위에 깔려 죽었다. 그 남자의 혼령이 저승에 있는 염라대왕에게 갔는데, 염라대왕이 그를 보더니 “아직 천수(天壽)가 다 되지 않았는데 왜 그리 빨리 왔는가?” 하고서 그를 돌려보냈다. 다시 이승으로 돌아왔지만 시신이 바위덩이에 눌린 채 이미 흙으로 덮여 있었으므로 접신을 할 수가 없어 혼령이 떠돌아다녀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충청도 진천의 어느 부잣집의 죽은 지 얼마 안 된 외아들의 몸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살아난 그는 진천의 아내와 함께 용인군 묘봉리의 아내도 거느려 각각 아들을 삼형제씩 두고 천수를 누렸다고 한다. 그런데 후일 그가 죽자 용인과 진천의 아들들 사이에서 혼백 다툼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아들들은 관청에 송사를 냈고 그 송사를 맡은 진천군수는, “그가 살아서는 진천에 있었으니 죽어서는 용인으로 가라”라는 판결을 내려서 결국 용인의 아들들이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청주와 비교해볼 때 산이 많지만 진천평야 같은 넓은 평야도 있다. 산이 겹겹이 있고 또 큰 내가 많지만 모두 화창한 기운이 있고 땅이 제법 기름지다.
『택리지』에 “그 맥이 진천(鎭川)에서는 대문령(大門嶺) 1) 이 되고, 목천(木川)에서는 마일령(磨日嶺)이 되었다”라고 실려 있는 대문령은 조선시대에 충청도와 경기도를 잇는 큰 고개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문령 고을 서쪽 35리에 있으니 이곳이 경기도 안성군의 경계다”라고 실려 있다.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청학동 서쪽에서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로 가는 고개인 대문령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그런 연유로 배테 서남쪽 길가에 있는 넓은 바위를 길손들이 많이 쉬어갔다고 해서 ‘앉은 바위’라고 부른다.
진천에서 대문령 가는 길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나오는 큰 고개인 대문령 길이다. 고개를 넘어 가면 안성시 칠장사에 이른다.
대문령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백곡면 갈월리의 큰 고개는 엽둔재라고 불린 협탄령(脇呑嶺)이다. 진천읍에서 천안시 입장면으로 넘어가는 이 고개 길목에 고려 때 협탄소(脇呑所)가 있었다.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에는 조선시대에 한양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던 잣고개가 있다.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의 육판산(六判山)은 판서 여섯 사람이 태어날 명당이 있다는 산이고, 이월면 송두리의 일산자리는 조선 세종과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초정으로 가던 길에 진천의 북들(北坪)에서 자고 갔는데 그때마다 이곳에 해를 가리는 우산(日傘)을 꽂았었다고 한다. 덕성산ㆍ무제산ㆍ장군산ㆍ두타산 등이 솟구친 아래에 펼쳐진 진천군 문백면 봉추리에는 송강 정철의 묘가 있다.
진천군 만승면 광혜원(廣惠院)에 조선시대의 원집인 광혜원이 있었고 그 옆에는 정자가 있었다. 그곳에서 새로 부임하는 충청감사와 퇴임하는 감사가 서로 관인(官印)을 주고받으며 임무를 인수인계했다고 한다. 한편 이곳 진천뿐만이 아니라 이 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큰 저수지인 초평저수지는 미호저수지라고도 부르는데, 1945년에 착공하여 1958년에 준공되었다. 이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생팔리, 소도평, 화암, 오경동의 네 개 마을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곳 진천의 명물이 문백면 구곡리 세금천에 가로질러 놓은 돌다리로 농교(籠橋)라고 부르는 농다리이다. 고려시대에 축조되었다고 전해지며 원래는 100미터가 넘었다고 하지만 현재의 길이는 93.6미터 정도이다. 이 다리의 특징은 교각의 모양과 축조방법에 있다. 작은 낙석을 가지고 돌의 뿌리가 서로 물려지도록 물고기 비늘 모양으로 쌓았는데, 속을 채우는 석회물의 보충 없이 돌만 가지고 한 것이다. 아무리 큰 장마 때에도 다리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축조한 기술이 전국적으로 유례가 없다고 한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에 속한다. 옛날에는 하상이 낮아 어른이 서서 다리 밑을 지날 수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복개로 하상이 높아졌다. 상판석의 돌은 아름다운 무늬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전해오는 말로 이 다리를 놓은 사람은 고려 때의 권신인 임연(林衍)이라고 한다.
임연이 이곳에 있을 때의 일이다. 몹시 추운 어느 겨울날, 냇가에서 세수를 하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젊은 부인이 내를 건너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다. 소리를 질러 이유를 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친정에 가는 길인데 강물이 세차게 흐르므로 건너갈 수가 없어서 그러고 있다는 것이었다. 딱한 사정을 듣자마자 임연은 용마를 타고 돌을 실러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그 당시 다리를 놓은 용마는 기운이 다 빠져서 죽었다고 하며, 용마에 실었던 마지막 돌이 떨어져 그대로 둔 것이 마을의 용바위라고 한다. 이 다리는 나라에 변고가 생길 때마다 며칠씩 울었다고 하는데, 한일합방 때와 한국전쟁 당시에 며칠씩 울어서 마을 사람들이 잠을 못 이루었다고 한다.
이곳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만뢰산 자락 옛 절터에 삼국시대 목탑형식을 따서 지은 보탑사가 있고,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 장군 김유신(金庾信)이 태어났다는 곳이다.
바로 부근에 있는 연곡리 보련골은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 화전을 일구며 살았던 곳이며, 그곳에 비면에 글씨가 새져져 있지 않은 백비가 있다. 보물 제 404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비는 전체 높이가 3.6미터에 비신의 높이가 2.13미터로 귀부와 이수를 갖추었으며 전반적인 조성수법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비석이다. 누구의 것인지, 처음부터 비문을 새기지 않았는지 아니면 어느 세월에 비문을 갈아냈는지 알 길이 없는 비가 바로 연곡리의 아홉 마리의 용을 새긴 백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