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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스의 아들 기드온
삿 6:11-18
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14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15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17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18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 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너 돌아올 때까지 머무르리라 하니라
삿 6:11-18 /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시다] 여호와의 심부름꾼이 오브라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오브라는 아비에셀의 후손인 요아스라는 사람이 소유하고 있던 마을이다. 마침 요아스의 아들인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포도주 짜는 틀에서 몰래 밀이삭을 떨고 있었는데, 12 여호와의 심부름꾼이 기드온 앞에 나타나 `용감하고 씩씩한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하고 말을 건넸다. 13) 그러자 기드온이 말을 받았다. `내 주여, 만일 여호와께서 전정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어찌하여 우리가 이토록 고통을 당해야만 합니까? 일찍이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실 때 놀라운 이적을 행하셨다는 말을 우리 조상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들었습니다만 그때 여호와께서 베푸셨던 그 놀라운 이적은 지금 다 어디로 갔습니까?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 넘기신 것이 아닙니까?' 14)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기드온아, 너는 힘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라. 아무 걱정 말고 어서 가서 너의 동족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라. 내가 너를 지금 보낸다.' 15) 기드온이 `하지만 제가 감히 어떻게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까? 저희 가문은 므낫세 지파 가운데에서도 가장 힘없는 가문인데다가 저 역시 우리 집안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립니다.' 하고 대답하자 16)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꼭 함께 하겠다. 아무 걱정 말아라. 너는 미디안 사람을 단숨에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17) 기드온이 대답하였다. `주께서 그토록 저를 잘 보셨다면 지금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증거를 제게 보여주십시오. 18) 제가 주께 드릴 예물을 가지러 갔다오겠습니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이곳을 떠나지 마시고 꼭 저를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마 어서 다녀오거라.'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때마다 일마다 필요한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려 7년 동안 미디안 사람들에게 고통을 당할 때 기드온을 들어 쓰셨습니다.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11-12) 여호와의 사자는 상수리나무 아래서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들 몰래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는 것을 보고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은 5대 사사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사사란 평시에는 백성 중에 거하며 살지만 유사시 백성들의 지도자로 등장하여 나라를 통치하던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인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이유는 모두들 밀을 타작해야 빼앗길 것이라고 낙심하고 있을 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숨어서라도 타작을 했기 때문입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13-15)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드온은 한탄하며 질문합니다(1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민족을 구하라는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14). 하지만 기드온은 작고 힘없는 자기와 자기 집안을 보며 자신 없어합니다. 기드온은 민족과 자신의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내 힘과 능력으로 민족을 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모세와 다윗은 힘들고 어려운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예수님께 엎드릴 때 예수님께서는 죽은 딸을 살려주셨습니다(막 5:35-43).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16-18) 자신 없어 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이 용기를 주십니다.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이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표징을 구합니다(17). 표징인 오트(אוֹת)를 우리말 구약성경에서는 증거, 이적, 표징으로 번역했고, 신약성경에서는 표적, 징조로 번역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믿음과 확신이 부족할수록 표징을 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하셨습니다. 또한 표적을 보지 못해도 믿는 자들이 훌륭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표징을 구하는 믿음도 좋지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이 더 훌륭한 신앙입니다.
적용: 당신은 표적을 구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표적이 없어도 하나님을 믿나요?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과 이적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초라하게 농사일을 하고 있는 기드온을 ‘큰 용사’로 호칭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큰 용사로 활동하게 될 것을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 중 가장 약하고 그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였으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실 때 큰 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내세울 것이 없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 용맹과 지략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가능합니다.
< 설 교 >
큰 용사여
삿 6장 16~ 절 / 문기태목사
오늘 우리는 여러가지로 어려운 상황에 둘러싸여 위축되고 점점 더 작아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살아갑니다. 그로 인해 무력감에 시달리고 패배감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과 환경적인 상황속에서 신음하는 현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말슴을 들려주고 계실까요?
본문은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식어진채 미디안 족속에게 시달리고 있는 상황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하고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긴채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 온 것은 비참한 현실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전을 위해 동굴속에 숨어 지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애써 씨를 뿌리면 적들이 쳐들어와서 밭과 농작물을 다 망쳐 놓는 것이었습니다. 기껏 키워 놓은 가축도 다 약탈당해 남아 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위기속에서 그나마 믿음의 불씨가 남아 있어 백성들이 하나님께 살려달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불행한 이스라엘에 찾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이라는 젊은이를 만나 말씀하십니다.
" 큰 용사여!" 하고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기드온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를 향해 "큰 용사여!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 하시는 말씀을 들었으나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시 미약한 군대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나라를 구할만한 용맹스런 장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상황이 좋아지리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미디안 사람들이 무서워 몰래 숨어서 그 날 먹을 양식을 위해 포도주틀에서 밀이삭을 조금씩 타작하고 있는 겁장이 소년을 향해 하나님이 큰 용사여! 하고 부르시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혹시 모세나 여호수아같은 특별한 사람을 보내신다면 모를까... 나같은 겁많고 평범한 사람을 설마 하나님이 보내셔서 그런 큰 일을 이루실까? 하며 기드온은 반신반의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누군가 특별한 사람이 나타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지 모르지만 난 아니야. 어림도 없지.' 하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큰 용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큰 승리를 가져올 큰 용사가 나타나야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큰 능력을 갖춘 사람, 크게 헌신하여 많은 사람을 위기에서 건져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탁월한 지도력을 갖추고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축복된 길로 이끌고 갈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겠지만 그 사람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여기에 찾아 오셔서 여러분을 향해 "큰 용사여!" 하며 부르십니다. 여러분도 옆 사람에게 같은 말로 불러 봅시다. "큰 용사여 당신은 큰 승리를 이룰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이 기드온처럼 하나님에 의해 큰 사람으로 선택받고 크고 중요한 일에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는 증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큰 용사의 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제일 작은 자가 큰 용사로 쓰임받습니다. (15)
기드온은 약한 가문인 므낫세 지파중에서 가장 약한 집안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집에서 가장 어린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작은 자가 어떻게 그렇게 어렵고 중요한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하고 큰 용사란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기드온을 택한 것입니다. 과거에 기드온이 세운 큰 공로를 보고 택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기드온의 성공과 열매를 보고 너는 싹이 있구나! 하여 택한 것도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의 기드온은 아무런 특별한 점도 없고 오히려 겁장이고 약한자이며 침체된 사람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은 아직 겉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을 보시고 "큰 용사여!" 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다시말해 "너는 결코 작지 않다. 너는 시시하게 끝날 인생이 아니다. 반드시 큰 일을 낼 인물이다." 하고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다윗도 너무 어리고 작은 자라 아버지조차도 그 가능성을 제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찾아왔을때 형들은 다 보여주면서도 다윗은 들로 나가 양이나 지키고 있도록 쫓아 보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어리고 작은 자 다윗의 가능성을 보시고 그를 불러다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십니다. 그러자 다윗은 골리앗이 버티고 잇는 전쟁터에서 전혀 기죽지 않았습니다. 큰 일을 내지 않습니까? 더이상 작은자가 아닙니다.
조각가 미켈란 젤로가 어느날 돌을 하나 발견하더니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 다윗이 걸어나온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현재의 모습 그대로 보며 평범하고 흔한 돌로 보았지만 유명한 조각가는 돌을 보면서 장차 조각하여 만들어질 작품을 미리 내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흥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처럼 지금은 부족하고 불완전한 사람들을 보시며 미래의 가능성을 보십니다. 장차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다듬고 성숙케 하였을 때 변화되어 헌신할 모습을 미리 보시고 감격하십니다. 그래서 큰 용사라 부르시며 은사와 사명과 비젼을 주십니다.
고전 1:27에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세상의 약한 이들을 택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나타내려 하십니다.
그런 원리를 알고 있는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약함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 여러분도 질병이 있거나, 실패했거나, 가난하거나, 시련을 겪고 있거나, 하여 가장 약할 때 그 때 가장 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강하신 주님이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껏 여러분 자신이 약하고, 부족하고, 다듬어지지 않았고, 단점이 많기 때문에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고 간주하고 좌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멸시하고 천대하고 무시하며 "너같은 것이 무엇을 할 수 있겠어?" 하며 깔보고 있습니까? 또는 아무도 여러분을 주목해 주지 않습니까? 그러면 참으로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렇게 여러분이 약하고 작은 자이기 때문에 여러분을 큰 용사로 만들어 쓰시고 싶어 하십니다. 단 주님이 "큰 용사여!" 하고 부를 때 여러분의 미래를 의심치 말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과거나 현재의 모습과 억지로 연관시키지 말고 주님의 선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능성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큰 용사로 쓰임받습니다. (12)
기드온이 작고 미약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큰 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삿 6:16) 그토록 강하고 무서운 미디안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기드온과 함께 계시니 한 족속을 한 사람을 쳐부수듯 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대신 싸워 주시는데 누가 당해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 함께 싸워 주시면 적수가 없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 이웃하는 부대와 축구를 한적이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졌습니다. 한 선수가 기가 막히게 잘 합니다. 그 선수는 뛰지도 않습니다. 공격도 안합니다. 수비만 합니다. 그런데 누구도 뚫을 수가 없습니다. 드리불도 걸리고 패스도 걸립니다. 공이 오는 길목을 정확하게 잡아 공을 뺏어서 공격수에게 패스하면 정확합니다. 도무지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끝나고 알아보니 그 선수가 청소년대표인가 국가대표를 했던 선수가 였습니다. 부상을 당해 더 이상 선수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어 군에서도 체육부대로 갈 수 없어 이웃부대로 왔습니다. 우리교회에 국가대표출신 하나만 들어오면 창원시에서 교회대항 축구를 하면 다 이길 것입니다.
국가대표 출신 그것도 부상당한 사람 하나만 있어도 당할 팀이 없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신다면 누가 적수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약한 너를 보고 겁먹지 말라. 내가 대신 싸워주마. 너는 내가 시키는대로만 해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께. 너는 앞에서 싸우는 흉내만 내라. 내가 뒤에서 진짜로 힘든 싸움은 다 하여 승리를 안겨 줄께.' 하십니다.
그래도 여러분이 두려워하니까 말슴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
여호수아가 처음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얼마나 불안하고 당황해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만나 말슴하십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수 1:5)'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으면 평생에 당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큰 용사가 되는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체에 큰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 큰 능력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슴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예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 일하실 수 있도록 끌어 들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반드시 큰 사람, 큰 용사, 큰 일군이 되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큰 역사, 큰 승리, 큰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감당하는 모든 일들이 크게 성취될 것입니다.
3. 자신의 사명을 알고 있는 자가 큰 용사로 쓰임받습니다.(14,16)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고민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으로 보내서 오늘까지 살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 도 모르고 그냥 살아갑니다. 그렇게 평생 살다 간다면 무엇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많은 것을 이룬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살다 간다면 칭찬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복된 인생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사명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맡겨 주신 일을 알고 그것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자기의 소명을 알고 은사를 알아 그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명확한 그림을 가지고 살 수 있다면 인생을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드온도 그런 사명감이나 인생의 목적도 없이 살았습니다. 미디안사람 눈치나 보며 눈속임할 궁리나 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어느날 천사가 나타나 기드온의 소명을 말해 줍니다. "내가 너를 보내니 너는 가서 미디안에게서 이스라엘을 구해내라." 하나님은 농사꾼 기드온을 부르셔서 어마어마한 사명을 주십니다. "대적의 손에서 민족을 구해내라. 이스라엘민족에게 자유를 주고 주권을 회복시켜라."
소명을 받고 보니 포도주틀에서 밀 이삭을 몰래 타작하던 일들이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자기에게 중요한 사명이 있음을 알게 되니 진지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즉각 열납하시는 생생한 제사를 그 자리에서 드립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과감하게 하나님을 위한 일을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바알을 숭배하고 아세라상에 절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확신을 갖고 우상들을 다 깨뜨려 버립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우유부단하고 겁많던 기드온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그렇게 변화되고 멋있게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사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2차대전중에 필리핀의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로 잡힌 미군들이 열악한 환경속에서 날마다 수 십명씩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새 한마리가 날개를 다쳐 수용소안으로 떨어졌습니다. 포로들은 어렵게 약품을 구하고 정성을 다해 새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새는 아주 조금씩 회복되어 갔습니다. 새의 회복에 수용소의 모든 포로들이 관심과 사랑을 쏟게 되엇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새가 날라들어오고 난 후 수용소안의 포로 사망자가 60%가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죽음까지도 극복하는 힘이 되었을까요? 삶의 목표와 목적을 상실한 이들에게 아주 작은 의미가 생기자 살 의욕이 생기고 어렵고 힘든 환경도 질병도 극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살 수 있다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더 놀랍게 달라지겠습니까? 곤경과 위기속에서도 살아갈 가치와 의미를 붙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명을 다하기까지는 죽을 수 없습니다. 사명을 위해서라면 어떤 값도 지불하기를 아까와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명을 받은 기드온은 달라졌습니다. 바알의 신전에 들어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우상을 다 때려 부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나팔을 불고 전령을 각 지파에 보내어 군인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삼만 이천명이 나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다 돌려보내고 300명만 데리고 공격을 합니다. 그래서 승리했습니다. 미디안사람들을 다 몰아내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로 회복하였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무엇을 위하여 부르셨는지 깨닫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도록 어떤 은사를 주셨는지도 발견할 수 있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과 연합하여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을 기뻐하시는지도 깨닫기를 바랍니다. 자기 사명을 알고 그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사명을 아는 사람이 큰 용사가 되어 큰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투자하여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여러분의 사명을 확실히 알고 계십니까? 아직 모른다면 주님께 가르쳐달라고 부르짖기를 시작하십시오. "내가 구해내야 할 이스라엘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싸워야 할 대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어떤 방법으로 사명을 감당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다시한번 자신을 불러보십시오 " 큰 용사여!" "큰 사명을 받은 큰 용사여!" "큰 사명을 크게 성취할 큰 용사여!“
하나님은 평강을 주십니다
삿 6장 14~24절 / 조상호목사
지난주 목요일은 6.25 한국전쟁이 있은 지 54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우리가 한국을 떠나 뉴질랜드에 살고 있고, 더구나 직접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분들이 많기 때문에 6.25 전쟁을 말해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6.25 전쟁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같은 땅에서 같은 피를 가진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한 문화를 형성하며 살아온 남과 북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싸웠다는 것은 엄청난 비극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전쟁의 규모나 참가국 수나 피해의 규모면에서 인류 역사상 5대 전쟁에 속하는 전쟁이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1949년 6월, 미국이 주한 미군을 철수시킨데 이어 한국과 대만을 일명 ‘애치슨 라인’이라고 부르는 극동 방어선에서 제외시키자 한국을 공산화하기 위해 소련 스탈린의 승인을 받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 남침을 감행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전쟁이 37개월 동안 계속되는 가운데 엄청난 피해가 있었습니다. 군인들과 민간인 모두 540여만 명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또 전쟁미망인이 30여만 명, 전쟁고아가 10여만 명, 이산가족이 1,000만 명이 발생하여 거의 모든 가정에 불행과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그 외에도 공업시설의 43%, 발전시설 41%, 탄광시설 50%가 파괴되는 등, 한국의 산업시설의 80%가 파괴되었습니다. 농업 부문의 피해도 극심하여 폭격으로 4분의 1 이상의 농토가 피해를 입어 전쟁기간 농업생산율이 76%로 떨어져서 먹을 것이 없어 굶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나라 안에는 온통 거지들 천지였고, 행복하고 단란했던 수많은 가정들이 깨어지고, 수많은 젊은이들의 꿈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5,000년 동안 영위하고 있던 모든 것이 깨어지고 파괴되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6.25 전쟁이 발발한 지 54년이 지났지만, 한반도에 전쟁의 위협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한반도에 평화가 올지, 언제 남과 북이 통일이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계속해서 남과 북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긴장상태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무장공비 침투, 북한 잠수정 침투, 서해교전, 미사일 발사와 같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국민들은 마음을 졸여야 했습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는 북한에서 어떤 사건을 일으켰다 하면 사재기를 하는 바람에 슈퍼마켓에 라면, 쌀, 밀가루, 등 생활필수품들이 동이 나곤 했습니다. 지난 54년 동안 국민들은 전쟁의 위협 때문에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비단 전쟁의 위협 때문만은 아닙니다. 영국의 시인 오우든이 현대를 가리켜 ‘불안의 시대’라고 주장한 것처럼, 현대인들은 모든 면에서 불안해합니다. 자살폭탄 테러, 핵전쟁의 위협 등으로 불안해하고, 교통사고, 멜라민 파동, 사스, 요즘에는 신종 인플루엔자 독감 때문에 불안해합니다. 부모님은 자녀들의 학업 때문에, 직장인은 직장에서 명퇴 당할까봐, 사업가는 경쟁업체와의 과도한 경쟁 때문에, 학생은 대학입시의 압박감 때문에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다. 현대에서 신경 안정제 계통의 약이 가장 많이 팔리는 약이라는 통계에 비추어볼 때, 현대인들이 얼마나 불안해하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불안과 염려와 근심이 팽배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평강’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불안과 염려와 근심에 쌓인 사람들에게 희소식을 주는 말씀입니다. 제가 2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기드온이 야훼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야훼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여기 ‘야훼 살롬’에서 ‘샬롬(shalom)’이라는 말은 단순한 평화나 평강이 아니라, 평안가운데서 복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NIV 영어성경에 보면 ‘샬롬’을 단순히 peace로 번역하고 있지만, 사실은 번성, 번창, 번영이라는 의미의 prosperity라는 단어가 ‘샬롬’의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샬롬의 복’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과거 이 ‘샬롬’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지금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고, 헤어질 때도 ‘샬롬’이라고 인사를 합니다. 이 시간 옆에 계신 분들과 이스라엘 말로 인사하겠습니다. ‘살롬!’ 이번에는 한국말로 인사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저는 지난주 ‘야훼 삼마’ ‘거기 계시는 하나님‘에 이어, 오늘은 <야훼의 이름 시리즈> 두 번째로 ’야훼 샬롬‘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200년 전인 주전 1,200년 경을 사사시대라고 부릅니다. 사사시대 때 이스라엘은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의 침략을 받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특별히 씨앗을 심을 때나 추수할 때가 되면, 미디안 사람들이 몰려와서 먹을 양식을 빼앗아가고 양이나 소나 나귀 등의 가축들도 노략질해 갔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의 끊임없는 약탈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어느 곳에서도 평강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7년 동안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기드온을 사사로 세워 미디안을 쫓아버릴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사자를 기드온에게 보내어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사는 위기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군사적 지도자로서, 요즘으로 말하면 혁명군 사령관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밀 타작마당에서 일하는 가난한 농부로서, 자기가 사사가 된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15절을 보면 당황하는 그의 반응이 잘 나와 있습니다. 다같이 15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무슨 말입니까?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사람 잘 못 보셨습니다. 저 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그런 어마아마한 일을 감당하란 말입니까?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기드온
그 때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통해 기드온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비록 메뚜기 떼 같이 많은 미디안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너는 한 사람을 치듯이 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주십니다. 그럼에도 기드온은 여전히 두려워합니다. 자기를 사사로 부르신 분이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그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간단한 방법으로 당신을 계시해주십니다. 기드온이 고기와 무교병을 바위 위에 올려놓자, 야훼의 사자는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었습니다. 그 순간 불이 바위틈에서 나와 기드온이 바위 위에 올려놓은 것들을 다 불살라 버렸습니다. 기드온은 두려워하며 “슬프도소이다. 주 야훼여 내가 야훼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22절)라고 말합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아무도 하나님이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를 볼 수 없고, 설사 본다 할지라도 보는 즉시 죽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기드온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다는 이유 때문에 크게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23절) 하나님은 떨고 있는 기드온에게 책망 대신에 위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고 있는 기드온에게 징계하는 대신에 평강을 주셨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시며, 자기에게 평강을 베푸셨음을 알게 된 기드온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다같이 24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기드온이 야훼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야훼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이처럼 우리의 하나님은 야훼 샬롬, 즉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평강의 야훼 하나님
매주 주일예배 마지막 축도하기 전에 제가 낭독하는 민수기 6장 22절부터 26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야훼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야훼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야훼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야훼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기를 원하신다고 합니까? 평강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또 시편 29편 1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야훼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무슨 복을 주신다고 합니까? ‘평강의 복’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진짜 평강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보면 돈으로 평강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원하는 만큼의 돈을 번다고 진정한 평강을 누릴 수 있을까요? 물론 돈을 많이 벌면 기쁘고 즐겁고 마음이 평안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입니다. 돈이 평강을 보장해주지 않고 오히려 돈 때문에 불행하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글에서 로토에 당첨된 사람을 추적 조사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멧칼프. 메리다 부부는 6540만 달러(약 654억 원)의 파워볼 로또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당첨된 뒤 인터뷰에서 자신은 종이 박스에 주름을 내는 일을 그만두고 집을 한 채 살 계획이며, 지게차 기사였던 남편도 호주로 가서 새 삶을 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두 부부는 이혼을 하고 부인은 오하이오 강이 내려다보이는 저택에서 지내다 숨진 채 발견되었고, 남편은 호주 이민 꿈을 실현하기도 전 45살의 나이로 삶을 마쳤습니다. 머스웨이건 씨는 90억 원의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거액을 손에 쥔 그는 무분별한 소비생활과 잇단 사업 실패, 술과 마약으로 인해 범죄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당첨금을 모두 탕진한 이후에는 농장에서 일을 하는 등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부모 집 차고에서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또 1997년 76만 유로(약 9억 3,000만원)에 달하는 복권에 당첨되면서 벼락부자가 된 독일의 한 남성은 2003년 재산을 모두 탕진한 후 총 60여 차례의 절도행각을 벌이다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복권 때문에 갈라선 어머니와 아들도 있습니다. 미국 뉴저지주에 사는 마이클 클린지비엘씨는 97년 복권에 당첨된 뒤 어머니와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당첨 직후 “복권을 사는 데 매달 20달러씩을 보탠 만큼 당첨금 220만 달러 중 내 몫을 달라”는 어머니와 다투다가 나중에는 법정싸움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2년 만에 아들이 어머니에게 50만 달러를 지급하기로 합의하면서 소송은 끝났지만, 그 이후로 수년 동안 대화 한마디도 없을 정도로 모자관계는 완전히 깨져버렸다고 합니다. 1990년대 초 4530만 달러의 복권에 당첨됐던 톰 티히씨 가족은 당첨 직후부터 가까운 쇼핑센터에 나갈 때도 경호원을 대동하였습니다. 그와 가족들의 신원이 알려지면서 얼굴도 모르는 친척을 비롯한 낯모르는 사람들이 줄지어 집을 찾아왔고, “돈을 주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 전화도 수시로 걸려왔기 때문입니다. 티히씨는 이후 무기를 소지한 채 생활하고 있으며, 배달돼 오는 우편물도 폭발물이 있는지 경호원들이 일일이 검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영국 버밍엄 시에서 목수 일을 하던 필 키천 씨는 복권으로 180만 파운드의 복권에 당첨되면서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의 시신이 자택 소파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조사에 의하면 99년 복권에 당첨된 이후 거의 집밖에 나오지 않은 채 술을 마시는 바람에 알콜 중독자가 되었고, 기관지성 폐렴으로 홀로 숨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로토나 복권에 당첨되어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었다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평강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돈 때문에 마약에 손을 대고, 가정이 깨어지고, 자살하고, 알콜에 중독되고, 파산하여 감옥에 들어가는 등, 불행한 삶을 사람들이 많습니다.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한국의 대통령들은 회의를 할 때 소위 안가(安家)라는 곳을 이용했습니다. 오늘은 이 안가, 다음 주에는 저 안가 이동해가면서 회의를 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한 줄 아십니까?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불완전합니다. 권력의 자리에 않았을 때는 세상을 흔들며 살다가도,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오면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을 우리는 수도 없이 보고 있습니다. 약 1개월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현 정부로부터 하도 많은 어려움을 당하니까 고향에 있는 높은 바위에서 뛰어 내려 자살한 사건을 모르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권력이 우리에게 진정한 평강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인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최모, 이모, 유모, 김모 등 많은 탤랜트와 가수와 영화배우가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억울하게 누명을 섰다고, 우울증에 걸렸다고 자살한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인기도 우리에게 진정한 평강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평강을 누릴 수 있는 방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진정한 평강을 누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 주님 안에 거하라
첫째로,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에 의하면 세상이 주는 평안이 있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다른 평안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진정한 평안이 아닙니다. 세상의 평안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평안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만이 진정한 평안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진짜 평강인 줄로 믿습니다. 1968년 1월 북한 무장 게릴라들이 대통령이 머무는 청와대에 침투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31명의 무장공비들이 모두 사살당하고 유일하게 김신조 한 사람만 사로 잡혔습니다. 나중에 그는 전향을 해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어 자유를 누리면서 평안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진정한 평안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는 방황하기 시작했고, 허구헛날 술을 마셨습니다. 교회 다니는 아내를 교회까지 찾아가서 끌고 나오는 등 핍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내의 간절한 기도와 끈질긴 전도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평안을 얻었습니다. 지금은 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가 되어 자신에게 참 평안을 주신 예수그리스도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참 평안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때때로 놀이동산이나 유원지 같은 곳에 갔다가 어린아이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이 신기한 것들이 많아서 그것들을 쫓아다니다가 부모를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놀이공원에 아무리 좋은 것이 많아도 엄마, 아빠가 안보이면 그때부터 불안해하고 울면서 부모를 찾습니다. 그러다가 부모를 찾은 후 부모 품에 안기면 울음을 뚝 그치고 평안해하고 행복해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나무는 땅에 뿌리를 박고 있을 때 든든히 설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참된 평안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2) 주님께 기도하라
둘째로,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참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1912년 4월 어느 주일 밤이었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 부인이 초저녁부터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그 때 그녀의 남편은 사업 때문에 출장차 영국에 가 있었습니다. 부인은 마음이 불안하고 잠도 오지 않아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는데 남편의 기도가 자꾸 나왔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안전을 위해서 1시간, 2시간, 3시간 계속 기도했습니다. 저녁 12시까지 남편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부인은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이제는 하나님께 “남편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며 새벽 5시까지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새벽 5시가 되니까 불안이 사라지고 마음속에 평안이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멈추고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날 밤 남편이 타고오던 타이타닉 호는 대서양을 건너는 중 커다란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 직전에 처해 있었습니다. 결국 타이타닉호는 침몰하게 되어 남편은 배와 함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그 때 바다 속에서 어떤 큰 힘이 남편을 바다 위로 힘껏 밀어 올려서 물 밖으로 나왔는데, 마침 바로 옆에 있는 고무보트가 있더랍니다. 그래서 그 배에 올라타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남편이 고무보트에 올라탄 후 차고 있던 시계를 보니까 그때가 새벽 5시 정각이었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성령께서 그 부인으로 하여금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안전하게 되었을 때, 그녀의 마음 가운데 평안을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심령 속에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면 우리의 심령과 삶속에 성령께서 주시는 평강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3) 주님을 신뢰하라
셋째로,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사야 26장 3절을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때의 일입니다. 독일군의 연이은 폭격으로 불안하여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영국 런던 시에서 평안히 잠을 자는 할머니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비결을 묻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매일 밤 기도한답니다. 그리고 나면 하나님께서 항상 지켜주신다는 확신이 들어 평안하게 잠자리에 들게 되지요. 사실 하나님과 내가 둘이 다 깨어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할머니와 같은 믿음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지켜주시되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출입을 지켜주시는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미국 시카고에 유명한 변호사며 대학교수였던 스패포드라는 신실한 크리스챤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와 사랑스런 네 딸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와 네 딸이 함께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났는데, 안타깝게도 가족들이 타고 있던 여객선이 충돌하는 바람에 배에 타고 있던 2백26명이 물에 빠져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네 딸은 모두 익사하고 아내만 겨우 생명을 구했습니다. 사고 소식을 듣고 현장에 도착한 스패포드는 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절규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 이제 사랑하는 나의 딸들이 하나님께서 계신 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한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 늘 잔잔한 강 같든지 /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 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이것이 바로 찬송가 470장 가사입니다.
여러분, 물질문제로, 건강문제로 인한 두려움이 있습니까? 자녀문제, 부부문제, 비자문제 때문에 근심하고 있습니까? 샬롬의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참된 평강을 주시는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평강의 주님 안에 거하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평강의 주님께 아뢰고,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평강의 주님을 신뢰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삿 6장 12~16절 / 김경호목사
사사기 6-8장에는 가장 찬란한 공을 세운 사사 기드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이 주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한 일을 저질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7년간 미디안의 손에 맡기십니다. 미디안 족은 마치 메뚜기 떼와 같이 쳐들어 왔는데 사람과 낙타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온 땅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산 속 동굴이나 요새에 도피처를 마련해서 연명하는 정도였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은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 때문에 전혀 기를 펴지 못하게 되자”(삿6,6) 라고 합니다. 사람이 한번 기가 꺽이면 구실을 못하게 됩니다. 대 사사 기드온 마저도 숨어서 생활하다가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포도주 틀에서 몰래 밀이삭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께 울부짖었습니다(6,7). 기가 꺾여 있는 사람이 그 상태를 벗어나는 길은 주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울부짖는 것이지만 이것은 내 영혼 깊은 곳에 막혀있는 하수구를 뚫는 길입니다. 여기 울부짖는 것은 그냥 울고 부르짖는 것이 아니고 “주께” 울부짖는 것입니다. 그냥 내 슬픔에 잠겨 막연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울부짖는 다는 것은 목표가 있는 슬픔이고 아뢰고 고하는 대상이 있는 울부짖음입니다. 이것은 고통이지만 그 고통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그분에게 나의 고통, 나의 억울함, 그것을 일러바치는 것입니다. 그분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형성되어 있을 때, 그 일러바침은 이미 고통이 아니고 큰 환희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나의 억울한 고통으로 인해 측은히 여기시고 더욱 가깝게 나를 이해하시고 나의 편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때 울부짖음은 이미 고통의 차원을 벗어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나의 어리광이고, 나의 푸념이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개선되기 위한 씨앗입니다. 이 때 믿음직한 그분은 나의 억울함에 같이 분을 느끼고 즉시 나와 동질성을 가지고 나의 문제 속으로 개입해 오십니다
주의 천사가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에게 말을 전합니다. 주의 천사가 그에게 “힘센 장사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12절)라고 하니 기드온이 되묻습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어째서 우리가 이 모든 어려움을 겪습니까? 주께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어 우리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우리 조상이 우리에게 말하였는데, 그 모든 기적들이 다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지금은 주께서 우리를 버리시기까지 하셔서, 우리가 미디안 사람들의 손아귀에 넘어 가고 말았습니다.?
대 사사 기드온의 말인데 어쩌면 우리들의 투정과 이렇게 같을 수가 있습니까? 천사는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고 선언하는데 기드온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 정황을 열거하며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하나님의 선언에 대해서 부정합니다. 우리들의 정황을 들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리가 없다”는 것을 항변하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나 자신을 깊이 없는 수렁으로 몰고가는 주장임을 알면서도 감정적으로 그분과 맡서려고 하고 자기를 한번 내세워 하나님을 꺽어보려고 합니다. 그것이 죽는 길인데....‘ 우리는 볼 메인 소리로 묻습니다. “아니잖아요, 당신이 저와 함께 하신다니요? 이래서 아니고, 저래서 아니고, 만약 당신이 함께 하신다면 어째서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거지요?”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도저히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없어요. 이것이 우리가 항상 내리는 결론입니다. 우리는 이런 결론이 내게 아주 비관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계속 항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번 그분과 맞서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의 말씀은 아니라고, 내가 옳다고 맞서기를 원하는 것 아닐까요
15절에 기드온은 또 둘러댑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습니까? 보시는 바와 같이 나의 가문은 므낫세 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약하고, 또 나는 아버지의 집에서도 가장 어린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맞서기, 그분과의 힘겨루기, 그 분 없이 홀로 서기, 그래서 스스로 고아 같이 떨어져 자학하기 이런 독소적인 주장들 뒤에는 깊은 열등감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습니까? 보시는 바와 같이 나의 가문은 가장 약하고, 또 나는 가장 어린 사람입니다. 자기 내면의 깊은 열등감은 항상 “나는 열등해요. 그러니 나를 구해주세요!”라고 순하게 고백하지 않습니다. 항상 공격하고 뒤틀고 꼬집고 할큅니다. 거짓 부풀리기로 자기를 위장해 보이고, 자기를 허풍선 처럼 꾸며대기 위해서 공격합니다. 정말 실력있고 자신있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은, 끊임없이 이해하고, 끌어앉고, 도닥거리고, 감싸줍니다.
기드온은 자기의 약함을 보지만 그 약함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즐기시는 조건입니다. 왜? 공을 세우고 제 힘으로 했다고 교만하여 우쭐대는 인간은 본래의 악보다 몇 배 더한 더 큰 악을 낳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히려 조건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들어 쓰십니다.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다시한번 확인해 주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네가 미디안 사람들을 마치 한사람을 쳐부수듯이 쳐부술 것이다”(16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끄셨다고 합니다. 그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이끄는 길이 정말 좋은 길이라고 인정되는 길이었을까요? 직선거리로 한달 이내에 갈 거리를 40년간 방황하였으니 그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길은 꼭 지리적으로 거리상으로 훌륭한 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할 때, 더러 지리에 밝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저 길은 우리가 온 길로 되돌아 가는 길입니다.”라거나 “저리로 가면 공연히 높고 험산 산을 넘어야 합니다. 저것은 죽음의 길입니다”라고 외쳤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직하게 그 인도함을 받아 들인 사람들 만이 그 광야의 길을 지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돌로 만든 탁자 위에 걸터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 높이에 떠있는 양탄자 위에는 우리 주님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그 탁자는 단단합니다. 그 다리도 튼튼합니다. 양탄자는 탁자 높이에서 날고 있지만 그 밑에 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공중에 떠있다는 것이 매우 불안해 보입니다. 주님은 양탄자 위에서 “오너라”하고 부르십니다. 탁자는 안전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안정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니, 이 쪽으로 오너라”라고 하십니다.
“그 위로요?” 그것이 저를 바쳐줄지 어떻게 압니까??
“다시 말한다 이쪽으로 오너라?
“그러나 주님, 양탄자를 지탱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떨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너를 불렀고 내가 너를 바쳐준다. 너를 바쳐주는 이는 바로 나다?
결국, 마지못해 “알겠습니다. 주님, 당신이 그렇게 말씀 하신다면요.....?
용기를 내어 양탄자를 눌러보며 시험해 봅니다. 약간 내려앉는 느낌이지만 바닥까지는 내려앉지 않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양탄자 위로 올라갑니다. 갑자기, 당신은 둥둥 떠 있게 됩니다. 생동감을 느낍니다. 안전한 탁자에 의지해서 보다는 주님께 의지해서 이렇게 떨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쁘고 뿌듯합니다. 나는 지금 주님과 동행하고 있고 그분의 사랑으로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굉장한 희열이었습니다. “와우, 주님 왜 당신을 의심하고 믿지 못했을까요? 당신의 말씀을 더 일찍 들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저는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 동안 저는 너무 확실히 제 눈에 보이는 것에만 의존하여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불안하여 소리칩니다. “주님 멈추어 주세요! 바람은 점점 게세지고 양탄자가 심하게 흔들립니다. 당신은 매우 불안해져 주님을 봅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하나! 주님이 돌아앉아서 양탄자의 실을 풀고 계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당신은 깜짝 놀라 돌탁자 위로 뛰어 내립니다. 당신은 비로소 ”휴 살았다!“라며 안도감을 갖습니다. 주님께서 물어보십니다.
“너,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나는 네가 나를 믿는 줄 알았다. 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날 따른다고 하지 않았느냐??
“예, 그렇지만....?
“나를 믿어라 나는 너를 새로 창조한다. 네가 경험해 보지 못한 삶, 참 자유를 네게 준다. 너는 나를 믿어야 한다. 너는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주님 그런데 “제발 부탁이 있는데요, 실 뽑는 일은 중단해 주십시오...?
머뭇거리며 양탄자에 올라갔는데 다시 한번 환희에 가득차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주님께서는 실을 뽑고 계십니다. 양탄자는 점점 엉성해지고, 바람은 더 거세지고 그럴수록 돌 탁자는 더욱 믿음직스럽고 안전해 보입니다. 당신은 흥정을 해봅니다. “주님 왜 돌탁자 위에서는 안됩니까? 저는 거기서도 훌륭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습니다. 매주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제 힘껏 이웃을 위해 자선하겠습니다, 여긴 너무 무섭습니다
‘나만 믿어라 그곳은 의미가 없다. 여기에 삶이 있다?
‘주님은 당신 외에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실을 뽑았습니다. 그러나 신비하게도 당신은 밑으로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에게 꼭 필요한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까지 당신을 지탱해 주고 있는 힘은 양탄자가 아니고 주님이셨던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떤 물질을 매개로 하여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그 자체보다도 양탄자를 하나님 이상, 하나님처럼 신뢰해 버리는 주객전도 현상이 생겨납니다. 그가 내게 주실 어떤 물질적인 조건들, 나의 주변에 드러나는 결과물들을 우리는 하나님 자신 보다 더 신뢰합니다. 이럴 때, 사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물질이고, 우리 손에 주어진 결과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무런 떡고물을 수반하지 않는 당신은 거부합니다.”는 선언입니다
이렇게 자신 없었던 기드온은 실로 기상천외 하리만큼 아주 신념에 찬 전투로 미디안을 격파합니다. 군대를 모았는데 하나님께서 “네가 거느린 군대의 수가 너무 많다. 이대로는 내가 미디안 사람들을 네가 거느린 군대의 손에 넘겨주지 않겠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제쳐놓고서, 제가 힘이 세어서 이긴 줄 알고 스스로 자랑할까 염려된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군대는 고작해야 삼만 이 천명입니다. 적군에 비하면 한 줌도 안되는 병력입니다. 게다가 기드온은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나마 만명만 남고 모두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많다고 하시며 냇가에서 손으로 물을 핥는 사람만을 구별하고, 무릎을 꿇고 마시는 사람은 모두 돌려보내니 삼백명 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겠다.”고 하십니다
한명이 아쉬운데 무슨 소리입니까? 지금 적들은 메뚜기 떼처럼 골짜기에 수없이 널려있고 그들이 타고 온 낙타는 사막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취하라고 하신 무기들은 가관입니다. 나팔, 빈 항아리, 횃불-이런 무기로 어떻게 전투를 한다는 말입니까? 얘들 장난도 아니고... 이들은 적군이 머무는 벌판의 사방에서 나타나 기드온의 신호에 따라서, 나팔을 불고, 일제히 항아리를 깹니다. 그들의 왼손엔 횃불이 들려있고, 오른손엔 나팔을 불면서 “야훼 만세! 기드온 만세!”를 외칩니다. 항아리 밟는 소리는 마치 기마병의 말발굽 소리와 같고, 한 소대의 군대에는 횃불하나와 나팔 수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기드온의 용사 삼백은 삼백개나 되는 길 위로 팔을 한바퀴 돌려 횃불하나가 넘어가면 한 소대의 병력이 넘어가는 것이고 오른손에 나팔을 한번 불면 또 한 소대의 병력이 넘어가는 것이니 밤 중에 수많은 군사가 삼백 방향에서 동시에 넘어오는 것으로 보여 적들은 자중지난이 일어나고, 혼비백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과정이 어찌 되었든지 간에 이들의 승전은 무기를 가진 사람들을 앞세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승리를 한 것입니다. 나팔을 가진 사람들을 앞장세워 승전한 것입니다.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도, 나팔수를 앞세우고 찬양하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성을 일곱바퀴 도니 그대로 성이 무너져 내렸다고 합니다
칼과 창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싸우러 나가는 군대가 잇습니다. 그들이 찬양대와 나팔을 가지고 앞장서서 나갈 때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당당한 믿음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이 앞장서신다고 할 때 무슨 창과 칼을 가진 군대의 힘, 무기의 힘이 무슨 우열을 가리는 기준이겠습니까? 그분을 찬양하는 찬양만이, 그분을 신뢰하는 신뢰만이, 그들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싸움입니다. 위대한 싸움입니다. 자기를 변명하던 기드온은 하나님 안에서 나팔과 횃불로, 찬양으로 적을 제압하는 강한 믿음의 사람, 신념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고후10,4 “싸움에서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강한 무기입니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무기는 육체가 아니오, 그러나 강하오, 참으로 강하오,
우리들의 무기는 육체가 아니오, 그러나 강하오, 성령안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요 강한 힘이요 참으로 강하?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요 강한 힘이요 성령안에서?
나중에 공을 세운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에게 왔습니다. “장군께서 우리를 다스리고, 대를 이어 당신의 아들과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기드온은 답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아들도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실 것입니다”(8,23)
작은 자를 크게 쓰시는 하나님
삿 6장 12~16절 / 서정호목사
어려움에 처한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자
우리나라 지도자인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12일 국회에서 가결되는 충격적인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국역사에 있어서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한국 교회와 교인들이 한마음이 되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왔듯이 특별히 함께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국민을 볼모로 한 정쟁의 극치를 지켜보며 서글픈 생각이 들고 정치인들이 국민과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정치상황을 탄핵 정국으로 몰아감으로써 국민에게 극도의 불안감을 주고 국가경제에 심각한 위기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때에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힘을 모아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함으로써 위기 상황을 극복해야 합니다. 정치권과 정부 당국은 허탈감에 빠져있는 국민을 위로하고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조치들을 신속하게 마련해야 할 것이며 한국 교회는 나라와 민족의 위기 앞에서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겸허히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아울러 노무현 대통령과 정치권, 국회의원들은 국민에게 심려를 끼친데 대해 깊이 사과해야 합니다. 사순절 기간에 발생한 작금의 상황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국가를 위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사람은 배가 고프면 무엇을 먹어야하는 식욕과 더불어 배가 부르면 무엇인가 보람된 일을 하고 싶어 하고 단 한번 뿐인 생을 보람되게 살다가 명예롭게 죽어야하겠다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그 일생을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일만을 위해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일생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일생을 바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도 이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본능적인 차원이 아니라 무엇이 과연 보람된 삶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일까? 하는 일에 보다 더 많은 관심을 쏟고 그 일을 위해 남은 생애를 드려야 하겠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볼 때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고 사방을 둘러보면 자기보다 더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자신감을 상실한 사람이 바로 오늘 나라면 비록 그러한 나일지라도 남은 생애를 보람되게 살고 싶은데 과연 그 같은 열등감이나 죄의식을 훌훌 떨쳐버리고 자신감을 갖고 남은 생을 보람되고 명예롭게 살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사람들은 하찮은 일을 시키는 직원 한 사람을 채용하면서도 까다로운 시험과 면접을 절차를 통해서 유능한 사람을 고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과 내가 약할 때 강하신 하나님이 약한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결코 문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오랜 동안의 역사 속에 나타난 구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함으로 이방인의 침략을 받아 위기를 만나게 될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사를 세우시는 중에 어느 때는 평범한 가정주부 드보라를 세워 가나안 왕 야빈을 물리쳐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로 인해 40년간 태평성대를 누리면 서도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시 우상 숭배의 죄악에 빠져 징계를 자초하였습니다.
(삿 6:1-2)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산에서 구멍과 굴과 산성을 자기를 위하여 만들었으며
벌써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이 같은 일을 네 번이나 경험하였다면 그 원인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40년이라면 한 세대가 지났음을 뜻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를 하면 반드시 징계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하였으면서도 그 사실을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태평성대가 계속되는 동안 신앙교육을 등한히 하였습니다.
미디안의 침략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있는 미디안 족속은 원래부터 강대국은 아니었습니다. 지난 날 역사를 돌이켜보면 미디안 족은 출애굽 시에 모압 족속과 동맹을 맺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자 했으나 이스라엘에게 대패를 당한 족속이었습니다(민31:1-12). 그 같은 미디안이 이스라엘이 무사 안일주의에 빠져 있는 동안 다시 힘을 키워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7년간 압제를 하였는데 그 고난이 얼마나 극심하였든지 토굴 속으로 피신할 정도였습니다. 미디안과 연합군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파종을 하면 토지소산과 식물과 소와 나귀를 남기지 아니하고 다 빼앗아 갔기 때문에 당장 생계 문제로 극심한 고통을 7년 동안이나 겪어야만 하였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이탈할 때 과거의 승리와는 상관없이 오늘 사면에서 에워싸는 원수들로 말미암아 미디안처럼 괴롭히는 고통을 경험하게 될 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Matthew Henry) 오늘의 승리가 영원하리라고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의 성공을 앞세워 현실에 안주하고 방탕한 삶을 살지 말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삿 6:6)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는 말씀처럼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자신들의 힘으로 그 고난을 극복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미약하다' '와이달'은 '쇠하게 되다'(be brought low)란 뜻 외에도 어원적으로 '가난하게 되다'(be impoverished)란 의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침입자들로 인해 모든 곡식과 짐승을 빼앗겼으므로 그들은 더욱 나약하게 되고 물질적으로도 가난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비로소 과거 그들의 조상들처럼 다시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압제 하에 심히 곤궁하자 구원자 '하나님'을 애타게 찾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과 가나안 땅에 그들이 거주할 수 있게 된 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했었음과 더불어 모세를 통해 주셨던 약속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계명에 순종하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갈 때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출6:7;19:5,6)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은 구별된 삶이 아니라 이방에 완전히 동화된 구별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신령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령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우상을 흠모하고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모방하며 살아갈 때 그들의 신앙은 변질되고 이방인들과 다름이 없는 타락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구한 그 이방 세계를 통해서 고통을 당하게 하셨고 그들이 추구하였던 물질의 고통을 맛보게 하심으로 그들의 잘못된 삶을 깨우쳐주시고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려움을 만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무조건 부르짖는다고 해서 그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기도는 비록 하나님께 크게 범죄 하였을지라도 잘못된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잘못된 삶을 바르게 고쳐나가는 것이 우선되어야만 합니다.
기드온을 부르심과 순종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셨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 (삿 6: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근동에서는 땅에 큰 구덩이를 파서 포도주 틀을 만들었는데(사 5:2) 기드온이 미디안을 피하여 몰래 숨어서 밀 타작을 하고 있을 때 부르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농사를 지어도 미디안 사람들이 다 빼앗아 가기 때문에 소용이 없다고 핑계하면서 굴속에 숨겨논 양식으로 겨우 연명만 하고 있을 때 기드온은 숨어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지혜롭게 포도주 틀에 보이지 않게 숨어서 열심히 타작을 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실 때 공통점이 바로 일하는 자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 부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신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기 때문이며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을 향해 (삿 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라고 하신 말씀처럼 큰 용사라고 부르셨습니다.
큰 용사를 룻 2:1에서는 '유력한자'곧 '재산과 덕망 그리고 세력을 겸비한 사람'으로도 번역되었는데 이는 기드온은 본래 미디안을 두려워하며 포도주 틀 안에서 타작을 할 정도로 연약하였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주의 능력으로 큰 용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영광스럽게도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은 (삿 6:15)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기드온이 메뚜기 떼 같은 미디안 사람과 대적하기에는 자신이 역부족이며 또한 자신의 가문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지도적 위치에 있기는커녕 극히 약하여 보잘 것 없는 므낫세 지파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담하면 선악과, 아브라함 하면 독자, 모세 하면 홍해, 여호수아 하면 여리고 성이 떠오르는 것처럼 성경이나 역사 속에 위대한 사람은 그 이름만 들어도 머리속에 떠오르는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 기드온은 무엇이 떠오릅니까? 아마도 300명으로 미디안 대군을 무찌른 매우 용감한 장군 상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을 보면 기드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그렇게 용감한 사람은 아니라 이처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같은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 왜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셨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자기를 찾아오신 여호와의 사자를 아브라함이 대접한 것처럼 극진히 대접하기 위해 염소 새끼를 준비하고 무교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담고 국을 담아 대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는 그 것을 먹는 대신 제단의 불로 응답하였으며 그 날 밤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나타나셔서 중대한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하는 것은 기드온이 우상을 박살낸 사실을 후에 동네 사람들이 알고서 기드온을 죽이려고 한 것만 보아도 잘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 위험을 알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밤중에 바알 제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고 그 위에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는 일을 다 마쳤습니다.
기드온이 바알과 아세라를 훼파한 일 때문에 성읍 백성들이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기드온의 부친 요아스는 참 신은 징계하나 거짓 우상은 벌하지 못한다는 참신과 거짓 우상, 진리와 오류를 구별하는 길을 마을 사람들에게 제시하였을 때 기드온에게 아무런 저주도 임하지 아니하자 사람들은 기드온을 가리켜 '바알에게 대항하다'는 뜻으로 '여룹바알'이라는 이름하였습니다. 기드온은 마침내 승리한 것입니다.
기드온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을 때 (삿 6:33)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다 모여 요단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는 말씀처럼 미디안이 쳐들어오는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기드온은 이 소식을 듣고 큰 용사처럼 자리를 떨고 일어나서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는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 같은 기드온의 모습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자신은 제일 작은 자라고 하였던 옛날의 기죽은 모습이 아니라 큰 용사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 비결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삿 6:34)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신 성령이 기드온에게 강력하게 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강림하시니'로 번역된 원어 '라바쉬'는 '옷을 입히다'라는 말로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에게 갑옷을 입히시듯 온통 감싸심으로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셨습니다. (11:29;13:25;14:6;사 11:2;요 20:22;행 13:2;고전 12:4).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므로서 그가 때마침 침략한 대적들로부터(33절) 이스라엘을 구원할 위대한 지도자로 세움 받게된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도 (삿 6:35) 기드온이 또 사자를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좇고 또 사자를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서 그를 영접하더라는 말씀처럼 기드온에게로 돌이키기 시작하였습니다.
미디안에게 고난 받는 이스라엘의 청년이라면 누구든지 자신의 힘으로 고난 받는 동족을 구원하고자 하는 애국심을 다 갖고 있었지만 문제는 소명감과 자신감의 부족으로 인해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기드온 역시 여호와의 사자가 자기에게 나타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말에 강한 의구심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삿 6: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와 동일한 약속 하에 모세와 함께 하셨고(출 3:12) 여호수아와도 함께 하셨습니다. (수 1:15). 따라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역사 하셨던 것처럼 이제 기드온과도 함께 하사 그를 통해 큰 역사를 이루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두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드온의 불신앙으로 볼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패역한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으로 미디안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온 백성들에게 증거하여 기드온을 따르게 하는 좋은 증거였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같은 기드온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삿 6:37)“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양털만 이슬에 젖게 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밤에 사면은 이슬에 젖고 양털만 마르게 해 달라는 요구를 허락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양털에 이슬이 내린 것이 우연이나 자연 현상이 아니며 하나님이 기드온과 함께 하심으로 미디안을 이기게 하실 것이라는 증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셨으며 기드온은 제일 작은 자에서 큰 용사가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주신 것입니다.
결 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지극히 작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크게 쓰임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기드온은 약한 사람이었으나 그들을 큰 용사로 부르셨을 때 그 부르심에 순종하였을 때 큰 용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가문이 비천하고 실력과 재주가 없고 무능력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와 부족을 알지 못하고 교만한 것이 문제이며, 자신이 작은 자임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고 순종하지 아니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기드온을 찾고 계십니다. 주의 일꾼이 되기 전에 자신의 일에 충성하며 자신이 제일 작은 자임을 깨닫고 항상 겸손하며 주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는 것이라면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누구든지 큰 용사로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의 약한 모습에 낙심하고 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옛날 기드온을 만나셨던 평강의 하나님이 지금 당신을 향한 기대를 품고 부르고 계십니다.참된 신앙은 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바로 나를 부르신 그 하나님의 가능성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나의 어떤 불평도 핑계도 다 받아 주십니다. 문제는 그분께 나아가든지 그 분의 부르심에 순종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하다가 슬픔과 실패로 가득 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이에 순종하여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내가 하나님을 붙잡는 것보다 더 내가 하나님께 기드온처럼 붙잡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붙잡으시게 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신이 특별히 임하였을 때에는 명철과 지혜(창 41:38,39), 예언(민 11:25,26), 비상한 체력(14:6,19)등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약한 자를 부르시며 그 약한 자에게 큰 기대를 거시며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자신은 나약하지만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은 결코 약하시지 않고 전능하심을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시며, 마음의 위로자가 되시며, 강하게 하시며 도우셔서 마침내 큰일을 하게 만드십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제일 작은 자라는 사실과 더불어 하나님은 그 제일 작은 자를 큰 용사가 되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부르심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큰 일꾼으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능성을 보시는 하나님
삿 6장 11~18절 / 김용국목사
오늘날의 가치관에 대해서 누군가가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한 미치광이가 주인이 없는 백화점에 들어가서 상품들의 정가표시를 뒤죽박죽 섞어놓은 것과 같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예를 들면, 백만원 짜리 상품에 있는 정가표시를 만원짜리 상품에다 갖다 붙이고, 만원짜리 상품의 정가표시를 수백만원짜리 상품에다가 갖다 붙이는 꼴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제자가 자기 스승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스승님, 오랜 세월 동안 수련을 했지만, 아직도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그 제자에게 반짝이는 보석 한 개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장에 가서 이 보석의 값을 알아 보거라. 단 어떤 값을 부른다고 해도 이 보석을 절대로 팔지 말아라."라고 했습니다.
그 제자는 제일 먼저 과일 가게에 들렀습니다. 보석을 과일가게 주인에게 보여 주면서 "제가 이 보석을 가지고 있는데, 당신은 이 보석에 대한 대가로 나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과일가게 주인이 "사과 두 개 쯤이면 적당할 것 같은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야채 가게에 가서 똑같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 배추 두 포기를 주면 되겠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제자가 조금 실망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대장간으로 갔습니다. 대장장이는 평소에 보석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꽤 많은 돈을 주겠다. 라고 했습니다. 제자는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가, 한 보석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보석상 주인이 보석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보석, 도대체 어디에서 났습니까? 이 보석은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는 그 보석을 가지고 다시 스승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스승에게 이야기해주자, 스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그대는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되었네. 사람은 자신을 하찮은 사과 두 개에, 배추 두 포기에, 또는 얼마의 돈에 팔아넘길 수도 있지. 하지만 내가 원한다면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 존귀한 사람으로도 만들 수 있다네. 모든 것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네."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만약에 스스로를 ‘나는 깡패다.’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깡패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스스로 ‘나는 실패자다.’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실패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스스로 사과 두 개 정도의 가치밖에 안 된다. 라고 생각하면 사과 두 개 정도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반면에 스스로 자신을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보석처럼 빛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실력이 있는 한 청년이 입사 시험에 계속 떨어지니까 상담자를 찾아갔습니다. 상담을 통해서 발견한 그의 문제점은 취업의 결정권이 회사에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면접해주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면접관들의 눈에 늘 자신감이 없어 보이고 뭔가 부족한 사람으로 보여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상담을 받고 난 후에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나는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고 또 중요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런 태도의 변화로 인해 그가 원하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서도 나는 대단한 존재다. 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우리 인간의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실 만큼 '나'를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해주셨습니다. 물론 내가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가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39편 14절에서 뭐라고 고백합니까?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심히 기묘하게 지으셨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개혁성경에서는 ‘신묘막측’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하고 오묘하다. 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Fearful(경의롭다), Wonderful(훌륭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를 그렇게 창조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의 고백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심히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어야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사실을 믿지 않으면 나를 별로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대단한 존재임을 믿습니까? 옆에 계신 분들에게 이렇게 축복해주십시오. "당신은 참으로 기이하십니다. 신묘막측하십니다." 쑥스러워하지 마시고 자신있게 ‘아멘’이라고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들에게 항상 큰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분! 작가가 최선을 다해서 만든 작품을 아무렇게나 방치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존귀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치지 않습니다. 우리를 항상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가능성을 항상 보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시면, 기드온이라고 하는 사람이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밀농사를 짓는 아주 평범한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평범한 기드온에게서 놀라운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기드온의 미래를 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기드온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12절에 보십시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만나자마자 "큰 용사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럴 때 기드온이 얼마나 쑥스러웠겠습니까?
여러분! 기드온이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먼저, 기드온은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여기에 보시면 기드온이 밀을 타작하는데 어디에서 그 일을 하고 있습니까? 타작마당이 아닌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보시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도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조금은 알지만, 타작은 원래 넓은 마당에서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좁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비좁은 장소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미디안 사람들이 두려워서! 라고 했습니다. 매년 힘들게 농사를 지어서 추수할 때가 되면 미디안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추수한 곡식을 다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추수한 곡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몰래 숨어서 타작을 했다는 것입니다. 또 27절 말씀도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기드온이 종 열을 데리고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아비의 가족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은 자기 집에 있는 바알과 아세라의 신상을 헐어버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은 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혼자서 그 일을 하지 못하고 종 열 명을 같이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대낮에는 성읍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서 어두운 밤에 몰래 가서 우상을 깨뜨렸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드온은 우리가 알다시피 큰 용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몰래 숨어서 타작을 하는,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서 혼자서는 단독으로 못하고, 밤중에 몰래 행동으로 옮기는 겁쟁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사사로 선택해주셨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할 사사로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서 미래를 보신 것이고 그의 가능성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겁쟁이 기드온이지만 그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에 지금 현재의 모습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보십시오. 그들에게 제자로서의 자질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 보시면, 밤 사경 즈음에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서 오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다!"라고 소리치면서 어떻게 할지를 몰라했습니다.
그럴 때 저 같았으면... 제가 예수님의 입장이었다면 그들을 향해 "야, 이 놈들아, 너희들은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너희들을 믿고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내가 잘못이지? 정말로 한심하다. 이 시간부터 너희들은 내 제자가 아니다. 내가 제자를 다시 뽑아야 되겠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그들을 책망하셨나요? 그들에게 실망하셨나요? 아니면 자질이 있냐 없냐를 가지고 그들에게 면박을 주셨나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책망하지도, 면박을 주지도, 그렇다고 실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마가복음 6장 50절에 보시면, 예수님은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렇게 위로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은 비록 제자들이 겁쟁이지만 장차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증인들이 될 거라는 가능성을 그들에게서 보셨던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이 예수님의 예상대로 로마의 그 극심한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전혀 굴하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져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서 순교를 당하기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의심이 많던 도마 같은 경우에는 인도에까지 가서 열심히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도 지금 현재의 상황 앞에서 기가 죽거나 겁먹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 지금의 모습보다 앞으로의 모습을 즉 미래의 가능성을 더 중요하게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렇게 위로해주시면서 "나는 너를 끝까지 믿는다. 너에게 기대한다. 장차 너를 통해서 나타날 역사를 기대한다."라고 말씀해주시는 분인 줄로 확실하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기드온은 참으로 미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문도 별로이고, 가진 것도 별로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미래를 보고 평가하십니다. 그 사람의 가능성을 보고 평가하십니다.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기드온은 겸손해서 자신을 낮추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는 므낫세 지파 중에서 가장 미약한 집안의 출신이었습니다. 또 그렇게 미약한 가문 중에서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은 그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스스로 절망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을 지극히 연약한 사람으로...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런 미약한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능성이라는 렌즈를 끼고 기드온의 미래를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지금의 조건이, 지금의 상황이 아무리 불리하고 안 좋아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열악한 모습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보시고... 우리의 가능성을 바라보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만났을 때에 뭐라고 말씀하신 줄 아십니까? 요한복음 1장 42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까지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형 안드레의 손에 끌려서 예수님께 왔습니다.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다못해 예수님께 "선생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이런 말조차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시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네가 지금은 시몬이다. 지금은 흔들리는 모습이고, 별 볼일 없는 모습이지만, 그러나 너는 장차 게바가 될 것이다. 베드로가 될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시각이고 생각입니다. 혹시 우리 주변에 ‘저 사람은 별로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시각으로 그 사람의 미래와 가능성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스스로에 대해서도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 대해서 절대로 기죽지 말고 항상 당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현재의 내 모습이 아닌 나의 가능성을 보시고, 나의 미래에 대해서 큰 기대감을 가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기드온은 굉장히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기드온이 보잘 것 없는 신분이지만, 앞으로 큰 용사로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기드온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나 같이 미약한 사람을 써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당돌하게 ‘그러면 내가 믿을 수 있도록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세요.’라고 했습니다. 확실한 징표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내가 믿을 수 있겠다. 라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믿음도 없어 보이고 굉장히 당돌하고 괘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하겠다면 하는 거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라고 혼을 내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드온이 원하는 대로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기드온이 예물로 가지고 온 염소 새끼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바위 위에 올려 놓고 그 위에 국물까지 부어서 제물이 축축해지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거기에 지팡이를 내밀었더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축축하게 젖어 있던 제물을 다 태워버렸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마술 같이 신기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정도 되면 믿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기드온은 여전히 믿지를 못하고 또 다른 증거를 보여달라. 라고 하나님께 요구를 합니다.
이번에는 기드온이 직접 양털 한 뭉치를 가져다가 아주 이상한 제안을 합니다. 타작마당에 둔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주변의 땅이 마른 상태가 되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사로 세우신 줄로 믿겠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38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이 요구한 그대로 되었습니다. 주변 땅은 말라 있고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는 아주 신기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처럼 기드온은 매우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양털에만 이슬이 내린 것은 우연일 수도 있다."라고 하면서 또 다시 다른 징표를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래야 내가 하나님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양털만 마르고 주변 땅은 이슬이 젖게 해달라."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런 기드온을 보시고 하나님이 얼마나 속이 터졌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요구마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4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인내심이 정말로 대단하시구나. 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마 저라면 포기했을 것입니다. "아유, 그만두자. 너 아니면 내가 쓸 사람이 없는 줄 아느냐? 나를 그렇게도 못 믿겠니? 마음대로 해라. 내가 다른 사람을 쓰고 말지."라고 포기해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참고 인내하시면서 기드온이 변화되기를 기다려주셨습니다. 비록 의심이 많고 소심한 기드온이지만, 그런 기드온을 끝까지 기다려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지금은 비록 소심한 사람이지만, 앞으로 큰 일을 감당할 사람으로 하나님이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7장에 가서 보면, 기드온이 300명의 군사를 데리고 13만 5천명이나 되는 미디안 연합군을 박살을 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군대에서 말하는 '1당 100'이 아니라 300명이 13만 5천명을 상대했으니까 '1당 450'으로 대승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을 보면 우리와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기드온이 300명의 군사를 데리고 13만 5천명의 대군을 무찔렀다고 해도 그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드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모습은 우리보다 나을 게 별로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출신도 그렇고 겁쟁이에다가, 매우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가능성을 보시고 “큰 용사여!”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겁쟁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 별로 좋지 않아도, 우리가 비록 소심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보다 우리의 가능성을 보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제임스 어그레이라는 사람이 쓴 [날고 싶지 않은 독수리]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꼭 알았으면 하는 내용이 있어서 여러분에게 그 책의 내용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내용을 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한 남자가 새를 잡으러 산에 갔다가 가시덤불에 걸려 있는 새끼 독수리를 발견하고 집에 데려다가 닭과 오리가 사는 우리 안에다가 넣고 키웠습니다. 새끼 독수리는 그 안에서 모이를 먹고 물을 마시면서 다른 짐승들과 똑같이 살았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점점 새끼 독수리가 자라서 큰 날개를 가진 어미 독수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독수리는 하늘을 날지 못하고 닭처럼 오리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거기에 들렀던 동물학자가 이 모습을 보고 다시 독수리가 하늘을 날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날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독수리의 몸속에는 '독수리의 정신(Eagle Spirit)' 보다 '닭의 정신(Chicken Spirit)'이 더 강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 학자가 닭이 되어서 날지도 못하는 그 독수리를 데리고 높은 절벽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독수리를 하늘 높이 던져 버렸습니다.
하늘로 던져진 독수리는 한참 동안 날지도 못하고 그냥 무기력하게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동물학자가 낙심이 되었습니다. '저렇게 덩치도 크고 큰 날개를 가진 독수리가 날지도 못하고...' 그렇게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독수리를 한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는데, 그 때 그 동물학자의 눈앞에 아주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땅바닥을 향해 떨어지던 독수리가 푸드득 몇 차례 날개 짓을 하더니, 마침내 하늘 높이 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시시한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이 직접 손으로 빚어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주인이 던져주는 모이만 쪼아 먹는 닭처럼 무기력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큰 용사로 써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나는 할 수 없어.’라고 ‘나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어.’라고 낙심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데도 하늘을 날지 못하는 독수리처럼 연약한 성도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다면 그런 잘못된 생각이나 태도를 확실하게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다 큰 용사들입니다. 하늘을 훨훨 나는 독수리처럼 당당하게 세상을 정복하고 이길 수 있는 용사들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해주십니다. "큰 용사여, 일어나라. 내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큰 용사가 되어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조현영 씨의 “나는 하나님의 가능성이고 싶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오직 거룩과 순종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지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고, 비로소 여호수아 세대처럼 우리가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다. 라고 그 책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모세의 시대를 지나 여호수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거룩과 순종으로 무장하여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정복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르심의 과정
삿6:11-16 / 배영진 목사
오늘은 부르심의 과정에 대하여 설교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을 부르시는 과정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리를 부르실 때 두가지 차원으로 부르십니다. 맨처음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 예수믿고 구원받게 하시는 부르심이 첫번째라면, 그 다음, 하나님의 일군으로 두번째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예수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적절한 때에 하나님이 당신의 일에 쓰려고 부르시는 부르심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기드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 사사로 기드온을 쓰시려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사사로 부르심받고 쓰임받는 과정이 6장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사가 총 12명인데, 그중 유명한 사사가 여섯명, 옷니엘, 에훗, 드보라, 그리고 기드온, 입다, 삼손입니다. 그런데 여섯명 중 초기 세명, 옷니엘, 에훗, 드보라는 믿음이나 헌신이 확실합니다. 이들에게는 인간적으로 취약한 모습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기드온, 입다 삼손, 세명은 현저하게 인간적 약점과 하자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불러 쓰시는데 쉽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이게 이스라엘 4백년 사사시대의 영적 상태가 점점 밑으로 하락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하나님이 기드온을 부르십니다. 기드온을 불러 큰 용사로 쓰시려 하시는데, 기드온이 설득이 잘 안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그가 선뜻 일어나지를 못해요. 사실상 기드온을 보면 엄청난 용사로 미디안의 압제를 단숨에 끊고 승리합니다. 그리고 40년 샬롬이 옵니다. 그런데 그가 오늘 부르심 받을 때 엄청 주저합니다. 왜 그런가? 그가 부르심에 믿음으로 아멘! 하고 반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어요. 기드온이 하나님앞에 뭐라고 하는지 알아봅니다. 부르심에 응답을 못하는 이유가 두가지예요. 첫째 기드온은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 오해가 있습니다. 둘째, 기드온은 자신 스스로의 평가가 상당히 박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자신을 살펴보면 이 기드온의 두가지 생각이 우리 속에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 선뜻 아멘! 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 두가지예요.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자기자신의 평가가 낮아요. 그런데 이 두가지가 하나예요. 우리가 이 두가지 문제에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을 못합니다. 부르심에 설득이 잘 안됩니다. 기드온이 뭐라고 하면서 하나님앞에 난 안된다고 하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의 일군으로 부름받을 때 이러한 이유가 내 속에 있지 않은가? 오늘 자기 내면을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오해가 있는가? 나는 자신 스스로의 평가가 박한가?
첫째, 하나님께 대한 오해가 있다.
다같이 13절을 읽어봅니다. 기드온은 일단 하나님께 좀 삐져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대단히 오해했어요. 기드온 부르심을 받고 세가지 문제를 쏟아냅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왜 우리가 이런 어려움을 겪는 걸까요? 라고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주님이 놀라운 기적으로 출애굽도 일어났다 하고, 홍해바다 열린 얘기도 하는데, 지금 우리한테는 그런 기적들이 왜 안일어납니까? 그리고 마지막이 가장 심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어려운 것은 주님이 우리를 버리셔서 이런 것 아닙니까? 고난의 문제, 기적의 문제, 그리고 주님이 버렸다! 마지막이 결정적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 아닌가? 이 생각에서 위 두가지 질문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관심이 없거나, 혹 버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런 어려움이 왔는데 방치하시고, 왜 아무 기적도 안일어나는 것이야!
그런데 이 세가지 문제에 대하여, 초신자들은 대부분 이 오해를 갖고있습니다. 하나님이 제대로 알지 못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더욱이, 교회를 제법 오래 다닌 사람 중에도 하나님앞에 이런 생각을 갖고있는 경우가 많이 있을 것이다 생각합니다. 자 여러분에게 공개적 질문을 하겠습니다. 세번째 오해부터 풀어봅니다. 지금 사사시대 이스라엘이 미디안 압제를 받아요. 7년이나 아주 극심한 고통가운데 있습니다. 6장 서두를 읽어보면,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짓눌렀다 그랬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자기 땅에서 밀려나 산위로 올라가 토굴파고 살았습니다. 비참하게 살아요. 가나안 원주민들을 몰아내기는커녕, 그들에게 밀려나서, 산속에서 사는데, 거기 산에서 파종하여 수확을 하려고 하면 미디안민족이 메뚜기떼로 몰려와서 논밭을 짓밟고 싹 쓸어가버려요. 가축들도 다 끌고가버려요. 미디안이 몰려오면 논밭이 황폐하게 되어버립니다. 한번 그들이 몰려오면 다 쓸고가버려서 이스라엘이 기를 펼 수가 없이 됩니다. 이게 7년간이나 지속되었고 6절에 이스라엘의 궁핍함이 극심했다고 했습니다.
자 누가 누구를 버려서 이렇게 된 것인가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나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렸나요?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 들어와 여호수아 죽은 후 이런 이방민족의 식민지노릇을 하는 일이 계속 되풀이되는데, 이스라엘이 이렇게 궁핍하게 된 것이 우연입니까? 하나님의 징계입니까? 예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미약하게 하셨다 그래요. 하나님이 미디안에게 이스라엘을 넘겨주셨다 그래요. 하나님 백성의 삶은 우연히 미약하게 되거나 어쩌다가 가난하게 되는 일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우리 삶에 어려움은, 징계가 아니면 연단입니다. 죄를 지으면 징계를 하십니다. 죄가 없어도 연단이 옵니다. 연단을 통하여 축복하시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질문합니다. 지금 미디안의 손에 짓눌려있는 이 상황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을 버린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려요. 6장 1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보시는 눈앞에서 악한 일을 저질렀어요. 영적으로 미숙한 초신자나, 성경을 모르고 교회만 다닌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삶에 어려움이 찾아오면,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고 말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궁핍은 그들의 불순종의 결과였어요. 여러분 그래서 성경을 정확히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택한 백성은 세상 두쪽나도 버리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만하고 게으르고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지 않고 하나님 눈앞에 악한 일을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그래서 그 삶을 미약하게 하십니다.
첫번째와 두번째 질문도 하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13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왜 우리가 어려움을 겪습니까? 예전에는 우리 조상들은 출애굽기적도 많았다는데 왜 우리에게는 기적이 없습니까? 자 성경적으로 오해를 풀어봅시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우리 인생에는 어떤 어려움도 오지 않는다. 이거 맞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내려갈지라도, 누가 사망의 골짜기로 양을 데려가요? 목자입니다. 출애굽하면 바로 광야입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없는 죽음의 땅 광야입니다. 왜 어려움이 없어요?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은 오해한 것입니다. 기적도 그렇습니다. 출애굽 홍해만 기적이고 광야40년 매일 만나, 기적이 아닙니까? 암같은 큰 질병에서 낫게하신 것만 기적이고, 오늘 하루 내 일상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기적이 아닌 것입니까? 기드온은 날마다 기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너무 용감하게 따지고 듭니다.
그런데 오늘 기드온의 항의에 하나님이 어떻게 대답하시고 설득하시는지 보세요. 하나님이 기드온을 불러 쓰시려고 할 때 맨처음 찾아와 뭐라 하시는지를 봅니다. 12절입니다. 힘센 장사야 주께서 너와 함께하신다. 큰 용사여! Mighty warrior! 그러자 기드온이 세가지 항의를 쏟아냈죠. 그런데 14절 주님의 대답이 뭡니까? 나는 너를 통하여 이 공동체의 미약한 상태를 회복하고 새 힘을 주려고 한다! 그러니 지금 네게 있는 힘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에게 힘을 주고 구원해내라. 내가 친히 너를 불렀다. 내가 너를 보낸다! 하나님은 기드온이 대안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세가지 항의에 한가지 답입니다. 그래 지금 너희가 엄청 어렵지, 그런데 이제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겠다. 그리고 너희에게 구원의 기적을 베풀어주겠다! 네가 답이다. 내가 너를 불러 너에게 힘을 주리라. 네가 일어나라. 그래서 네가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해내라. 이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 우리는 이렇게나 어려움이 많은데, 기적도 안주신다! 그래서 부르심에 망설이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기드온 네가 답이다. 네가 일어나 헌신하라. 너의 이 모든 질문에 답이 될 것이다 하십니다.
둘째,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
15절을 다같이 읽어봅니다. 이게 마치 모세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와 유사합니다. 하나님은 저는 못합니다. 저는 본래 말도 잘 못합니다. 본래 혀다 둔합니다. 내가 가도 이스라엘이 날 믿어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제발 다른 사람 보내주십시오! 모세가 넋두리를 늘어놓습니다. 80세 모세는 자신에 대한 평가가 매우 낮아요. 그런데 기드온도 그래요. 그가 어떻게 자기를 평가하는가 보세요. 제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한다구요? 제가요? 감히 제가 나서요? 자기가 얼마나 별것이 아닌 사람인지를 나열합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나의 가문은 므낫세 지파중에 가장 약한 가문입니다. 나는 아버지 집에서 가장 어린 사람입니다. 우리 가문은 약한 가문, 나는 우리 집에 가장 어린 사람,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가 뭡니까? 나는? 아닌 겁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기드온도 그랬고 모세도 그랬습니다. 모세는 40년 이집트왕자로 궁궐에서 이집트 모든 학문 무술 병법을 다 배워요.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하든, 적게 하든, 나이가 많든, 나이가 어리든, 재산이 있든, 재산이 없든, 그게 문제가 압니다. 문제는 뭐예요?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입니다.
이게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이 내가 너를 쓰겠다 하실 때,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있는 생각입니다. 제가 어떻게 그러한 일을 해요? 저는 못해요. 손을 내저어요. 그리고 자기 스스로도 이러한 생각을 계속 합니다. 아이구야 내가 뭐라고? 난 안돼! 왜 그럴까요?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이랬어요. 어릴 때 우리는 누군가가 나를 격려해주고 지지해주고 하는 경험이 많지 않아요. 우리 부모님들에게, 아들아 나는 너를 믿는다. 딸아 너는 소중한 사람이다. 이런말을 듣고 자란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너의 모습 이대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지지한다. 너의 생각을 지지한다. 너의 판단을 지지한다! 이런 경험의 결핍이 많은 것입니다. 너 어떻게 일을 이렇게 했니? 너는 왜 항상 그 모양이야? 그래서 사람구실 하겠니? 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격려와 지지의 결핍입니다.
그러니까 어릴 때 집에서 사랑과 인정과 지지와 격려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격려가 충분하면 그가 자신의 가치를 박하게 보지 않아요. 그런데 어린 시절에 너무 많이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격려를 받지 못하고, 방치되는 일이 많아요. 그렇게 방임속에서 자라면, 나 자신이 스스로를 아주 박하게 봅니다. 그런 습관이 생깁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의견, 내 소신, 이것을 헐값으로 취급하려는 생각이 많아집니다. 그런데 우리중에 상당히 많은 경우에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하여 박한 평가를 줍니다. 이것이 헌신을 방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에 대하여 평가를 보세요. 어때요? 너무나 후하십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항상 후하시다. 이게 제가 오랫동안 성경을 깨달은 확신입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뭐라고 자꾸만 말씀하시는가, 강조하시는가를 보세요. 16절을 보세요. 확신입니다. 용기입니다. 용기를 부어넣어요, 이것을 격려라고 합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너는 미디안사람을 한 사람 쳐부수듯 쳐부술 것이다. 주님의 천사가 처음 찾아와 만났을 때도 그러셨어요. 첫마디가 뭐예요? 12절, 큰 용사 기드온이여! Mighty warrior! 이것은 위대한 용사, 기드온이여! 무엇을 말하고 있어요? 주님의 평가는 대단히 언제나 후하시다. 어떤 기준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믿음이 미숙하고 낮을 때 그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아요. 우리가 가장 성숙하고 가장 용감하게 되었을 때, 가장 하나님앞에 뜨겁고 헌신된 그 상태로 충만했을 때, 그때의 상태를 기준으로 우리 인생을 평가해주십니다. 가장 잘못한 때가 있고, 가장 잘한 때가 있어요. 최고점수와 최저점수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최고점수를 평점으로 주십니다. 하나님은 후한 분입니다.
주님이 맨처음 베드로를 만났을 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갈릴리 어부로 있는 베드로에게, 그날 밤새도록 고기잡이 허탕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라 하시고 그물 가득 고기를 잡게 하신 다음에, 네가 사람낚는 어부가 되리라, 하십니다. 너는 베드로라 하십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베드로 처음 만난 시점에 뭘 보시는가? 오순절 성령충만한 사도 베드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자후를 토하며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하는 설교자 베드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를 쓰고 기쁨과 소망으로 순교하는 믿음의 사도 베드로, 그 위대한 모습을 처음 부르시는 날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흔들흔들할 때 모습으로 평가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날동안 많은 연단과 훈련을 받고 가장 멋지게 성숙한 수준으로 우뚝 올라선 그 모습, 그걸로 평가하십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지를 성경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장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영웅들의 이름을 기록한 장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2절, 믿음의 사람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요셉, 모세를 열거한 다음,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을 동급으로 거명합니다. 주님이 이 믿음의 사람들을 보고 저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리라 그러십니다. 하나님이 정말 자랑스럽게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바락을 묵상한 적이 있습니다. 바락은 부르심 받을 때 온전한 헌신이 아니고 좀 계산적 믿음, 좀 담대하지 않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락을 믿음의 영웅 명단에 쑥 넣어주십니다. 기드온, 입다 삼손, 인간적인 약점이 많은 사사들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 하나님의 평가는 아주 후합니다.
더 증거를 보여드릴까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던 날, 거기 롯이 있었습니다. 롯은 우리가 볼 때, 소돔성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은 사람, 거룩한 의인의 모습을 거의 찾을 수 없는 사람, 무늬만 그리스도인같은, 선데이 크리스챤같은 사람입니다. 그날밤 소돔성이 유황불로 망한다는 천사의 긴급한 메시지를 듣고도 얼마나 꾸물댔는지 모릅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을 너무 사랑하여 도망쳐 나오다가 뒤를 돌아보고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롯의 두 딸은 소돔성을 피하여 나온 후 아버지 롯과 근친상간을 하여 모압과 암몬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후서 2장 보면 소돔성에 살던 롯을 뭐라고 후하게 평가해주셨는가? 정말 충격적입니다. 소돔성의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고통당하는 롯, 의로운 롯이라고 했어요. 의인 롯이 소돔성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그 의로운 심령이 상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오늘 두가지를 여러분께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손을 결코 놓지 않으십니다. 나 자신이 스스로를 보면서 평가를 박하게 할 수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고 너무 기뻐하셔요.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고 좋아 어쩔 줄 모르십니다. 너무나 귀하게 여기십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겨자씨같은 믿음을 보시고, 너무 사랑스럽게 귀하다 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미약한 믿음을 갖고 있을지라도, 우리가 가장 장성한 믿음을 가진 그 완숙한 상태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이런 엄청난 시각으로 주님은 오늘 우리를 당신의 일에 부르십니다. 기드온이 이 부르심과 격려와 지지를 받고 일어섭니다. 망설이고 두려워하는 기드온을 부르셔서 담대한 하나님의 일군으로 만드십니다. 기드온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미디안을 쳐서 크게 승리하고 40년 샬롬이 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큰 용사
삿 6장 11절 / 문기태목사
주님의 천사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의 땅 오브라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와서 앉았다. 그 때에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포도주 틀에서 몰래 밀이삭을 타작하고 있었다.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힘센 장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기드온이 그에게 되물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어째서 우리가 이 모든 어려움을 겪습니까? 우리 조상이 우리에게, 주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어 우리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말하였는데, 그 모든 기적들이 다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지금은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시기까지 하셔서, 우리가 미디안 사람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라. 내가 친히 너를 보낸다."
기드온이 주님께 아뢰었다. "감히 여쭙습니다만,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습니까? 보시는 바와 같이 나의 가문은 므낫세 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약하고, 또 나는 아버지의 집에서도 가장 어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네가 미디안 사람들을 마치 한 사람을 쳐부수듯 쳐부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사사기 6장 11-16절)
여러분은 자신을 크고 중요한 인물이라고 여기십니까? 작고 시시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세상을 새롭게 바꾸어가는 중요한 지도자라고 생각합니까? 아무에게도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살며 어쩔 수 없이 환경에 순응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를 작고 시시하게 여기지 말고 크고 중요한 인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크고 좋은 영향을 끼치며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 지도자라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리더십을 발휘하며 거룩한 영향을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미미한 존재로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그것을 겸손으로 생각하는 데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사단의 속삭임에 속아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드는 불신앙적인 사고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식어진 채 미디안 족속에게 시달리고 있던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 온 것은 비참한 현실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셨습니다. 미디안의 세력이 강해져 이스라엘을 억누르며 약탈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디안 사람들을 피해 산에 있는 동굴 속에 숨어 지냈습니다. 애써 씨를 뿌리면 미디안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밭과 농작물을 다 약탈하고 망쳐 놓았습니다. 기껏 키워 놓은 양이나 소 그리고 나귀도 다 빼앗아 갔습니다. 메뚜기 떼처럼 쳐들어와 초토화시켰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을 것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를 펴지 못하고 숨어서 지내며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선지자를 보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어 원수들을 쫓아내고 이 땅을 너희에게 주면서 이 땅의 사람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주의 천사를 기드온이라는 젊은이에게 보내어 말씀하십니다. "큰 용사여!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기드온은 깜짝 놀랐습니다. 천사를 만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천사가 자기를 향해 "큰 용사여!" 하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까? 게다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되묻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어째서 우리가 이 모든 어려움을 겪습니까? 우리 조상이 우리에게, 주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어 우리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말하였는데, 그 모든 기적들이 다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지금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시기까지 하셔서, 우리가 미디안 사람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모든 곤경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수없이 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이 옛날 이야기처럼 현실성이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버리셨으니 이렇게 된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 말에 천사는 일일이 대답하지 않고 "주님께서 너를 보내니 너는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해내라."고 하십니다. "나는 가장 작고 어린 사람인데, 내가 어떻게 이 민족을 구할 수 있습니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네가 미디안 사람들을 한 사람을 쳐부수듯 쳐 부술 것이다." 하십니다.
기드온은 처음부터 용감하고 힘이 센 장군이 아닙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무서워서 몰래 숨어서 그 날 먹을 양식을 위해 포도주 틀에서 조금씩 타작하고 있는 겁쟁이 소년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연약한 기드온을 향해 하나님이 "큰 용사여!" 하고 부르십니다.
'혹시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특별한 사람을 보내신다면 모를까... 나 같은 겁 많고 평범한 사람을 통해 설마 하나님이 그런 큰 일을 이루실까?' 하며 기드온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누군가 특별한 사람이 나타나서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면 참 좋겠다.' 하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큰 용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큰 승리를 가져올 큰 용사가 나타나야 소망이 있습니다. 대단한 능력을 갖춘 사람, 크게 헌신하여 많은 사람을 위기에서 건져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탁월한 지도력을 갖추고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축복된 길로 이끌고 갈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겠지만 우리 가정에 닥친 위기를 해결해 줄 그 사람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몸 담고 있는 회사의 큰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밖에서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오는 것이 아니고, 바로 여러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회에 심각하고 어려운 문제를 풀어갈 사람을 먼 곳에서 보내시려고 하지 않고 바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우리들을 사용하셔서 풀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 여기에 찾아 오셔서 여러분을 향해 "큰 용사여!" 하며 부르십니다. 우리 자신을 향해 불러 봅시다. "큰 용사여,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옆 사람에게 같은 말로 불러 봅시다. "큰 용사여, 당신은 큰 승리를 이룰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믿어지십니까? 과연 여러분 자신이 큰 용사가 되었다는 확신이 옵니까? '아무리 그래도 나는 용사가 아니야. 내가 무슨 큰 용사야? 나는 우리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사회의 크고 어려운 문제를 풀어갈 능력이 없어.' 하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기드온도 여러분처럼 "큰 용사여!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쉽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너를 친히 보내니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여라." 사명을 받고도 여전히 의심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 가장 약한 가문인 므낫세 지파였습니다. 므낫세 지파 중에서 가장 약한 집안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에서 가장 어린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작은 자가 어떻게 그렇게 어렵고 중요한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하고 큰 용사라는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기드온을 택한 것입니다. 과거에 기드온이 세운 큰 공로를 보고 택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기드온의 성공과 열매를 보고 '너는 싹이 있구나!' 하여 택한 것도 아닙니다. 기드온에게 아무런 특별한 점도 없고 오히려 겁쟁이고 약한 자이며 침체된 사람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큰 용사여!" 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작고 연약하고 겁이 많은 시시한 사람을 택하시고 부르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일하심을 더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 1:27에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세상의 약한 이들을 택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그런 원리를 알고 있는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약함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
여러분도 질병이 있거나, 실패했거나, 가난하거나, 시련을 겪고 있거나, 하여 가장 약할 때 그 때 하나님을 의지하면 가장 강할 수 있습니다. 강하신 주님이 붙잡으시면 누구보다도 큰 능력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약하고, 부족하고, 다듬어지지 않았고, 단점이 많기 때문에 쓸모 없는 존재라고 간주하고 좌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멸시하고 천대하고 무시하며 “너 같은 것이 무엇을 할 수 있겠어?" 하며 깔보고 있습니까? 그러면 참으로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렇게 여러분이 약하고 작은 자이기 때문에 여러분을 큰 용사로 만들어 쓰십니다. "큰 용사여!"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말씀을 의심치 말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드온이 작고 미약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큰 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강하고 무서운 미디안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기드온과 함께 계시니 한 족속을 한 사람을 쳐부수듯 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대신 싸워 주시는데 누가 당해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 함께 싸워 주시면 적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큰 용사가 되는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아무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큰 역사, 큰 승리, 큰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서 큰 일을 잘 감당하고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기드온은 자신에게 집중된 눈을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자신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로 향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수소를 잡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며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알 제단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내 불살랐습니다.
그리고는 삼백 명의 용사를 이끌고 미디안 군대 십삼만 오천 명을 단숨에 무찔렀습니다. 정말로 큰 용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자신을 불러보십시오. " 큰 용사여!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여러분 모두 기드온처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힘입어 큰 용사가 되어 가정과 직장과 목장과 사회를 낙심과 두려움과 실패와 불행으로부터 구해내며 큰 영향을 끼치며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큰 용사여
삿 6장 11~16 / 이정익목사
한 달 동안 역설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역설의 삶입니다. 살아가는 삶의 방정식에는 세상의 방법이 있고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너무 세상의 방법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법은 생소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들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내 자신이 더 작아지고 왜소해 지는 것을 느낍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섬김을 받으려면 먼저 섬기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보지도 못했던 하나님을 위하여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섬기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하여 대화하며 기도합니다. 이기고 싶으면 지라고 했습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 모두가 역설의 원리입니다. 알고 보면 신앙의 삶은 이렇게 신비한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 생각해 보니 그 보다 더 큰 역설이 하나 더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내가 주님으로부터 기억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나를 택하셔서 자녀 삼으시고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예배드리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 많은 사람들 중에서 부름을 받았고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이들보다 더 낫고 훌륭하고 유능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부족한 나와 여러분들을 부르시고 자녀 삼으셨을까요? 여러분은 그 의미를 아십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리고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사사기의 일부입니다. 왕조시대가 열리기 전에는 사사시대였습니다. 나라와 민족 앞에 큰 위기나 어려운 일이 발생하게 될 때 하나님은 한사람을 등용하여 난국을 해결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부름 받은 사람을 선비 사(士) 자와 스승 사(師)자를 써서 사사(士師)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인들이 연합해서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학대했던 시대였습니다. 우리의 일본시대처럼 압제받는 일은 민족에게 슬픈 일입니다. 내 나라 안에서 힘이 없어서 남의 민족에게 압제받고 고난 받는 삶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산으로 도망하여 움막을 짓고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독립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드온을 보내어 민족의 해방을 이루도록 임무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렇게 파송되는 기드온은 자질이나 자격이나 강력한 지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름 받은 기드온은 그런 사람이 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네가 가서 민족을 구원하라고 했을 때 기드온이 처신한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취한 기드온의 행동은 우리들의 자질과 흡사합니다.
소심한 자
12절에서 사자는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네가 가서 미디안을 물리치고 백성을 구원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기드온은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중이 아니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에게 1년 농사를 다 빼앗길까봐 무서워 숨어서 타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천사가 그런 기드온을 찾아와서 “큰 용사여”하고 부르셨습니다. 기드온이 무슨 용사입니까? 그는 아주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사례가 나옵니다. 천사가 기드온에게 “네 아버지 집에 있는 바알 제단과 아세라 상을 헐고 모두 찍어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사람들이 볼까봐 두려워서 대낮에 못하고 밤에 가서 우상을 찍어냈습니다.(25절) 기드온은 이렇게 아주 소심하고 용렬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이 기드온의 모습을 보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부름 받은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다 능력이 있어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먼저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참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장차 큰일을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온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고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똑똑해야 하고 아주 우수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선택하신 제자들의 면면을 보면 그 시대에서도 결코 우수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사람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부족하고 무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서를 보십시오. 제자들이 얼마나 무능하고 부족하게 보입니까? 그들은 실수를 연발하고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부족한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셨을까요? 그것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기드온이 그런 수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소심하고 용렬한 사람이었습니다.
의심 많은 자
또 기드온은 의심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미디안으로부터 “네가 나가 싸워서 백성을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였습니다. 확신을 갖기 위해서 어떤 증표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6장 19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여 내가 예물을 가져 오리니 떠나지 마소서”하고 집에 가서 염소 고기와 무교병과 국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그것을 바위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국을 부으니 그곳에 불이 내려와서 다 태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믿을 수 있을 것인데 그는 그것으로는 미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6절을 보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마당에 양털 한뭉치를 놓을 테니 그 주변 땅은 마르고 양털만 이슬이 젓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잠을 자고 새벽에 보니 양털뭉치에는 물이 가득하였고 그 주변은 마른 땅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로 양털은 마르고 주변 땅은 적셔달라고 했더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은 보는 것만 보고 들리는 것만 듣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드온에게는 천사의 말을 그 자리에서 믿을 수 있는 자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번 증표를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기드온을 우리는 용사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용사입니까? 기드온은 아주 소심한 사람이었고 아주 의심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드온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정작 기드온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도 똑같은 절차를 밟았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서 고난받고 있는 내 백성을 구해내라고 하셨을 때 모세는 한사코 못 간다고 버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확신을 주시려고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네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를 당에 던져보라.” 그랬더니 그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또 “네 손을 품에 넣었다 꺼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손에 갑자기 나병이 돋아났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그런 확증을 보고서도 “나는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니 말 잘하는 사람을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말 잘하는 아론을 모세에게 붙여 주면서 애굽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부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자격이나 자질이 출중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결 같이 이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불평하는 자
기드온은 또 불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불평은 아주 좋지 않은 습관입니다. 불평을 자꾸 하는 사람은 정신이 병든 사람입니다. 정신이 병들었으니까 희망과 소망적인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과 정신이 병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마음이나 생각이 병든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볼 것 다 보고도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역사 중 출애굽 사건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조상들을 통해서 들어서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네가 가서 미디안과 싸워 백성을 구하라”고 하자 그러면 뭔가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를 보여주었더니 다 보고 난 후에 또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13절에서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준 것 아닙니까”하고 따졌습니다. 기드온은 옛날 출애굽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통해 우리민족과 함께 하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과거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함께 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하였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왜 이렇게 이 백성들이 고난 받도록 놔두시느냐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이 이 백성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늘 불평만 합니다. 그래서 불평자들은 좀처럼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이 점을 보면 기드온은 결코 용사가 아닙니다. 생각이 용렬하고 소심하고 의심이 많고 거기다 불평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런 기드온을 향하여 “큰 용사여”라고 부르십니다.(12절) 기드온이나 12제자들은 결코 용사들이 못 됩니다. 그래도 가라고 하시니 기드온이 이렇게 또 핑계를 댑니다. “내가 어찌 이 백성을 구원하리이까 나는 므낫세 집안의 가장 약한 자이오며 내 아비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그 말은 나는 죽어도 못 가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큰 용사입니까? 그래서 이를 역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큰 용사여”라고 부른 것은 현재시제가 아닙니다. 장차 너는 큰 용사가 될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기드온의 순종
결국 기드온은 하나님의 분부를 따릅니다. 순종합니다. 어떻게 순종합니까? 그것이 34절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결국 소심자요 반항아이며 의심자인 기드온이 이 하나님의 영에 힘입어, 즉 성령에 힘입어 군사 300명으로 미디안군 135,000명을 무찌르게 됩니다. 그리고 기드온은 큰 용사가 되고 전설적인 사람이 됩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고대합니다. 내 눈으로 그것을 보았으면 합니다. 한번 보면 잘 믿을 것같이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여러 번 기적을 보았어도 그것이 크게 동기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기적을 본 사람들이 잘 믿을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병고침을 받은 분들이 믿음이 좋을 것 같지만 얼마 있으면 곧 잊어버립니다. 기적이 다가 아닙니다. 복음서를 보면 많은 기적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많은 기적들을 곁에서 보고 체험하였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떡을 얻어먹고 박수를 치고 병을 고침 받고 눈도 뜨고 귀도 열리고 입도 열리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에는 한사람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까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보는 세계, 만져지는 세계가 아닙니다. 기적이 다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주의 영이 함께 하시니…” 이것이 해답입니다. 기드온은 보고 체험하고 목격한 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함께 하시니”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병사 300명을 데리고 135,000명의 미디안 군사를 물리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기드온은 큰 용사가 되었고 전설적인 사람이 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도 처음에는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실패를 거듭하였습니다. 왜 저런 무능한 사람들을 제자로 선택하였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다락방에 내린 성령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을 제자로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제자들은 더 이상 시행착오를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제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마침내는 모두 순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고 합니다. 바돌로매는 가죽이 벗겨지는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를 하였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도하다가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창에 찔려 순교를 하였고, 안드레는 에베소에서 십자가에 못박혀서, 맛디아는 감람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였고, 누가는 헬라에서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또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약하고 왜소하고 병자였던 그가 사역을 끝까지 잘 감당하고 마침내 로마에서 장칼로 목을 내리칠 때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순교했다고 합니다. 기드온도 결국 큰 용사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역설입니다.
하나님은 엘리트만 좋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한 사람들만 좋아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스스로 엘리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부르시지도 않습니다. 엘리트들은 고난의 때가 오면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모험도 희생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름 받은 자들을 보면 처음에는 한결 같이 부족하고 무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제자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고 기드온도 대표적입니다. 그런 기드온을 향하여 천사가 “큰 용사여”라고 불렀습니다.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라고 부른 것은 현재시제가 아니고 미래시제입니다. 이는 미래 큰 용사가 될 사람임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은 부족해도 미래에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을 불러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능력 있게 하신 후에 사용하십니다. 엘리사는 농사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불러 선지자로 삼으셨습니다. 엘리야로부터 부름 받았을 때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영감에 배나 달라”는 요구였습니다. 그 결과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보다 배나 더 강한 영적 힘으로 사역을 승리롭게 해냈습니다. 사도바울은 교만했던 사람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 하여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얼마나 병든 자아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까? 그는 병든 교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를 그 교만이 부서질 정도로 강하게 불러내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마침내 교만이 부서지고 자신의 병든 자아가 건강하게 치유되는 전환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후에 주님은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교만, 자만, 병든 자아를 가지고는 주님을 위한 사역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부수고 깨뜨려서 주님과 중심을 맞추신 다음에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꽤나 그 시대에 뒤쳐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무능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서 미래, 장래성, 가능성을 발견하시고 그들을 불러 훈련하시고 사용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성령을 흠뻑 취할 만큼 부어주셔서 제자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가끔 왜 나를 부르셨는가를 생각해봅니다. 왜 나 같은 사람을 불러 이 일을 하게 하셨는가를 생각해봅니다. 왜 우리 같은 무능한 사람들을 불러 사용하고 계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역설입니다. 이제 부름 받은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신다면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쓰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서 겸손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에 충만하여 살아가기를 기대하고 고대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내가 여기에 서 있어야 할 아무런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주의 영이 함께 하시니” 그때부터 기드온이 된 것처럼 오늘 우리도 내 안에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쓰임 받고 주의 도구로 사용되게 되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큰 용사여!
김광일목사 / 벧엘교회
1930년도는 세계적으로 대공황의 시기였습니다. 하루의 끼니를 구하기 위해 거리를 헤매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한 마리의 말이 있었습니다. 시비스킷(Seabiscuit)이라는 몸집이 작고 다리는 구부정하고 경주마로서 최악의 체형을 가진 말이었습니다. 게다가 게을러서 한번 누우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격도 포악해 마주들에게 수없이 매를 맞았습니다. 맞다보니까 성격이 더 포악해졌습니다. 함부로 달려들고 부수고 행패를 부립니다. 마주들조차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명마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찰스 하워드(Charles Howard) 인데 재산을 탕진한 가난한 사업가였습니다. 조련사는 톰 스미스로서 한 물간 카우보이였습니다. 기술은 자니 레드 폴라드인데 권투선수 출신으로 한쪽 눈이 실명 당했습니다. 이 세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시비스킷의 재능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 말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절대로 때리지 않았습니다. 쉬려고 하면 마음껏 쉬게 해줍니다. 달리기 싫으면 억지로 훈련시키지 않습니다. 동기를 부여해 달리고 싶을 때까지 기다려 줍니다. 말을 안들을 때는 채찍질 대신 토닥거리며 간식을 주고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말을 훈련시켰는데 얼마 후 시비스킷은 세계적인 명마가 되었습니다. 경주대회에 나가 놀라운 결과를 얻었습니다. 89전 33승을 하고 13개의 거리별 경주 신기록을 달성했습니다. 시비스킷이 출전하는 경마 대회에는 항상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은 시비스킷을 보면서 희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폐기 될 번한 말이 위대한 명마로 탄생한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인정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초라한 말도 칭찬과 인정을 통해 명마가 되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면 우리 인생 역시 명품 인생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초라하고 볼품없이 열등감에 빠져있던 기드온이 위대한 지도자로 탄생된 이유는 하나님의 인정이었습니다. 기드온은 본래 소심한 농부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미디안에 의해 압제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7년 동안 괴롭힘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수확철만 되면 미디안 군대가 수확물을 다 빼앗아 갔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조차 없습니다. 나중에는 종자까지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제대로 살지 못하고 산에 토굴을 짓고 살았습니다. 기드온도 포도주 틀에 숨어서 밀을 손으로 비벼서 타작을 했다니 얼마나 나약한 모습입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이 찾아와 말씀하실 때도 기드온은 “나는 므낫세 중에 가장 작은 자입니다. 나는 가장 연약한 자입니다. 아무것도 못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열등감에 빠져있던 기드온에게 큰 용사라고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입니다.
‘용사’라는 말은 인디언들이 사용하는‘전사’의 의미와 같습니다. 힘이 있고, 전투력이 있고, 부족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었던 칭호였습니다. 용사들은 부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 생명을 걸고 부족을 구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용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용사로 부르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해 내라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기드온은 나약하고 의심 많고 불평하던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미래를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갈 때 열리는 가능성을 보신 것입니다. 우리도 기드온처럼 말씀을 믿고 나아간다면 큰 용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서‘큰 용사여!’라고 선언하시며 약속하십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첫째로 함께 하시리라
1623년 영국이 어지러울 때였습니다. 한 농부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우리 민족에게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선한 지도자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위대한 일꾼이 필요합니다. 보내주옵소서”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강한 인물, 선한 사람, 위대한 일군은 바로 너다” 그러나 그는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 저는 농부에 불과합니다. 저는 아닙니다.”그때 하나님께서 성경을 펼치라고 하십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러자 그는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면 저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강력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그가 누구입니까? 청교도 지도자가 되어 영국을 이끌어 간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기드온이 미디안을 칠 수 있는 동력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의 믿음이었습니다. 기드온이 할 수 없다고 했던 이유는 자신에게 아무런 힘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내가 능력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기드온에게 있는 능력이 미디안보다 강하기에 미디안을 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우선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만 있으면 모든 것은 부수적인 문제에 불과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얼마만큼 확신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확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신앙은 강해질 것이고 약하면 약할수록 비례하여 신앙이 약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힘을 주시리라
존 칼빈(John Calvin)은 16세기 종교개혁을 단행한 인물이며 27세에 기독교 강요를 지었습니다. 그가 프랑스에서 도망하여 스트라우스 버그에서 보내려고 제네바에 머물렀습니다. 그때 윌리암 파렐이 찾아갔습니다. “당신이 이곳에 온 것은 당신이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셔서 온 것입니다. 이곳에서 종교개혁을 위해 시작한 일을 이어서 충성을 다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천만에요. 저는 스트라우스 버그로 가는 길에 잠깐 들렸을 뿐입니다. 학자로 조용히 여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종교개혁의 와중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할 만한 용기도 없고 재질도 없고 자격도 없습니다”라며 거절하였습니다. 그 때 파렐은 “하나님께서 당신으로 하여금 종교 개혁을 하도록 보내주셨는데 만약 나의 요청을 거절하고 다른 곳으로 간다면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릴 것입니다. 필시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을 하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결국 칼빈은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제네바를 도덕적으로 정결한 도시, 공의가 살아 있는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도시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큰 용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기드온의 힘이 아니라 기드온 속에 있는 힘을 의지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드온 속에 있는 힘은 하나님의 힘입니다. 동시에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힘은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없는 기드온에게 “네 속에 있는 그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드온은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고 300명의 군대로 미디안 군대 13만 5천명을 물리치는 승리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힘으로 역사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은혜를 베풀리라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의 ‘상처를 역전시켜라’의 내용입니다. 이란 테헤란에 있는 왕궁에 가면 돔 형태의 천장과 다이아몬드로 장식해 놓은 휘황찬란한 벽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잘게 부순 유리조각입니다. 이것을 만들게 된 연유가 있었습니다. 본래 왕궁을 건축하던 건축가는 출입문을 고급 유리로 장식하기 위하여 프랑스에서 대형거울을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거울이 도착했을 때 깨지고 말았습니다. 건축가는 쓸모없게 된 거울조각을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건의했습니다. “깨진 거울조각을 잘게 부수어 모자이크를 한다면 훨씬 더 아름답지 않을까요?”건축가는 깨진 유리조각으로 모자이크해갔습니다. 햇볕이 반사되자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찬란한 빛을 반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와 같습니다. 실패의 조각들을 모아 놀라운 작품을 만드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부족한 자도 큰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 17절입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기드온이 얻어낸 응답은 무엇입니까? 회복의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은혜입니다. 감당해야 할 인생의 짐이 힘겹게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속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은혜를 베푸십니다.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그 은혜로 인도하십니다.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로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감당케 하십니다. 복음을 위하여 쓰임 받게 하시고, 부르신 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로 되게 하시는 은혜가 헛되지 않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부족한 모습보다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부르심 또한 은혜가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큰 용사 되기를 원하십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음으로 가기를 원하십니다. 숨은 구덩이에서 나와 행동하기를 원하시기에 부르십니다. 부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미루지 말고 예배하는 일, 교회를 섬기는 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큰 용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무사 라만차(La Mancha)가 말을 타고 가는 데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창녀를 가운데 두고 돌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신음하는 여인에게 다가선 라만차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창녀가 아니라 귀부인이군요”“어째서 나에게 귀부인이라고 하시나요?” “내가 보니 당신은 창녀가 아니라 귀부인입니다. 정말 귀부인 같습니다.” 그리고 라만차는 말을 타고 사라졌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라만차가 숨을 몰아쉬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때 귀부인이 나타나 그의 곁에 앉았습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라만차가 힘든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나는 창녀였지요. 많은 남자들이 나를 멸시하고 죽이려고 할 때 당신은 나에게 귀부인이라고 말해주었지요. 그 때 나도 귀부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화상을 바꾸었습니다. 당신의 말대로 귀부인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말 한 마디가 나를 바꾸었습니다.” 사람은 사랑해 주는 사람이 말하는 대로 됩니다. 이것을 ‘거울 자아 이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큰 용사로 불러주셨습니다. 부족하지만 부르신 대로 큰 용사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부족한 우리는 서로 격려하여야 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합니다. 부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비전을 갖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비전을 받아 드리기만 하면 그대로 된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우리를 향해 ‘큰 용사여!’라고 부르십니다. 부디 하나님의 기대를 믿고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부르시는 하나님은 내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내가 힘을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은혜를 베풀리라는 약속을 믿고‘하나님의 큰 용사’가 되어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이라 하지 마십시오 큰 용사입니다.
삿 6장 11~16절 / 김영주목사
경기도 안산에 가면 안산 동산 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학교입니다. 안산에 사는 학부모들이 자녀들을 꼭 보내고 싶어하는 학교요, 안산동산교회에서 세우고 운영하는 학교입니다. 이 학교 이사장은 그 교회 담임 목사인 김인중 목사입니다. 이 분은 어렸을 때 집안이 너무 어려워 공부를 할 수 없었습니다. 실력은 있는데 돈이 없어서 공부하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남보다 학교를 늦게 가기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굶기도 하고,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야겠는데 등록금이 가장 싼 대학은 서울대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 입시 준비를 하는데 너무 어렵습니다. 더구나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공부해야했기에 더 어려웠습니다. 한번 보고 떨어졌습니다. 다시 도전했습니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까운 교회를 갔는데 목사님이 새벽기도 나오면 대학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하시는 것을 듣고 열심히 새벽기도에 나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서울대 합격시켜주세요" "합격시켜 주시면 제가 나중에 저 같은 사람 없도록 학교 세워서 어려운 아이들 공부시켜 주겠습니다." 기도했습니다. 목사가 되고 안산에 개척을 해서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7,000명이 넘게 모이게 되었습니다. 약속대로 고등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안산에 사는 사람들은 이 학교에 못 들어가서 난리입니다. 실력 있는 교사 많고, 가장 믿을 만하고, 학생들에 대한 투자가 가장 확실한 학교이기 때문입니다. 이 학교의 교육방침 중 특이 한 것이 몇 개 있습니다.
'믿음 사랑 소망 사랑의 신앙을 바탕으로 한 교훈, 협동, 죄에서의 자유....지도원리로 삼아 건학 이념을 구현한다'
'영, 지, 덕, 체 예, 기를 조화롭게 개발하여 전인으로 성장케 한다'
'교사는 학생과 사랑의 만남을 통한 교육을 한다' 등입니다.
이 학교에서는 매주 화요일 학교와 나라를 위한 학부모기도회가 열립니다. 기도하면서 학교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성적 우수 자는 자비로, 모범학생은 교비로 어학연수, 문화탐방을 실시합니다. 이 학교는 한 사람의 기도로 잉태되었고 그 결과로 태어났습니다. 김 목사님은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학교는커녕, 먹고살기도 힘든 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편이었습니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사람들을 보면 '가진 것' 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우선 당장 가진 것이 없어도 믿음이 있으면 큰 부자입니다. 하나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가 하나님께 붙들렸지만 말입니다. 하여튼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하나님은 응답해 주십니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재산 중 가장 큰 재산은 믿음입니다. 모든 것은 여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가진 게 없어서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믿음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기드온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주 힘들게 살던 때였습니다. 추수 때만 되면 주변에 있는 강한 나라들이 치고 올라와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7년 동안 미디안이라는 나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쫓겨서 다 산에서 살았습니다. 산에서 굴을 파고, 구멍을 뚫고, 성을 만들고 살았습니다. 상대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감히 싸워볼 생각도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두려움에 빠져있습니다. 죽겠다고 하나님께만 부르짖는 것입니다. 기드온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두려움의 출처입니다. 두려움은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결핍에서 나옵니다. 어떤 형태의 옷을 입고 나오더라도 그 근본은 같습니다. 불신입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장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공급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응답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역(공부)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지혜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맡김에 대한 두려움은 머리카락 하나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의 책임지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안에는 이런 두려움 없습니까?
이 기드온이 어느 날 밀을 타작하고 있을 때입니다. 적이 알면 다 빼앗아 가니까 조용히 숨어서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났습니다.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12절)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14절) 너는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이 말을 들은 기드온은 기가 막혔습니다. 뭐 가능성이 있는 얘기를 해야죠. 나 같은 겁쟁이를 '큰 용사여!' 하지를 않나, 자기 같이 약한 사람에게 가서 미디안을 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라하지 않나? 황당해도 이렇게 황당한 얘기가 없을 것입니다. 너무 현실과 안 맞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꾸합니다.
"(13절)아니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우리가 이렇게 삽니까? 홍해바다를 갈라지게 했다는 하나님의 기적, 능력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 아닙니까? 버려놓고는 뭐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십니까?"
(15절)"내가 무엇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원해 냅니까? 가진 게 있어야 할게 아닙니까?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내 형편을 보십시오.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서 가장 약한 집입니다. 더구나, 나는 그 중에서도 제일 작은 자입니다. 그러니 이런 내가 뭘 하겠습니까?"
여기 15절에 '므낫세 중에서 극히 약하다'는 표현은 당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한 지파인 므낫세 지파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The least'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제일 작은 자'라는 표현은, '가장 어린 자'라는 말입니다. 너무 어려서 경험이 없습니다. 실력도 없습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어떻게 뽑아도 나 같은 사람을 뽑을 수 있습니까?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고로 못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요즘말로 바꾸면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 실수하셨습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여기 본문의 분위기를 보면 하나님이 한마디 하셨다가 된통 당하는 분위기입니다. 하나님은 한마디하시는데 기드온은 몇 마디 해댑니다. 기드온이 딱 잘라 말했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안됩니다". 혹시 기드온이 이렇게라도 대답했다면, 그래도 하나님 체면이 좀 설텐데 말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그래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니까 일단 해보겠습니다."
"내가 볼 때는 아닌데 하나님이 그렇다 하시니까 생각이라도 해보겠습니다"
"일단 기도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딱 잘라 거절해버립니다.
15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기드온의 대답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기드온은 내게 무엇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빈 손들고는 못한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볼 때 가진 게 없습니다. 재능도 없습니다. 탁월한 기술도 실력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도 할만한 뭐가 없습니다. 이것처럼 비참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일하고 싶은데 준비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더구나 자신의 현실은 더 안 좋습니다. 므낫세 지파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요, 가장 어린 자입니다. 실제로 그랬다는 것보다는 기드온 자신이 자신을 볼 때 그렇게 느꼈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이 기드온을 그 동안 가두어왔습니다. 이 생각이 얼마나 강했는지 하나님이 말씀해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했을 때 '아멘, 믿습니다.'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너무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생각이 강하다보니 '내가 무슨 큰 용사--웃기시네' 이렇게 나왔단 말입니다.
또 '이스라엘을 구원하라'했을 때--아멘,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가면 될텐데 '내가 무엇 있다고 가서 구원합니까?' 하면서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왜 기드온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자기 생각을 바꾸지 못했나? 이렇게 바꿀 수 있잖아요?
--나는 보잘 것 없어도 하나님이 힘 주실 것이다.
--나는 가장 어려도 하나님이 능력, 방법, 지혜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고로 나는 작지 않다. 나는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니다. 큰 용사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장난하시는 분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농담하시는 분 아니잖아요? 뭔가 이유가 있고, 방법이 있고, 대책이 있으니까 말씀하시는 거 잖아요? 그런 한번쯤이라도 생각해봐야 하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립니다. 하나님도 무안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원체 '나는 안돼'라는 믿음이 강하다 보니까 그 잘못된 믿음에 하나님도 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큰 용사로 보는데 정작 자기 자신은 '가장 작은 자'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결정적 이유는 '가진 게 없다'는 것입니다. '준비된 게 없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착각이 무엇입니까? 가진 것이 있어야만 하나님이 쓰신다는 생각입니다. 생각해보십시다. 세상적으로 가졌다해서 하나님이 꼭 쓰시는 것 아닙니다. 때로 가진 사람도 쓰시기 위해서는 먼저 버리게 하시고는 쓰십니다. 쥐고 있으면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붙드느라 하나님을 붙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재능, 어학적 은사, 언변 술, 좋은 직장, 학위, 건강, 재산....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면 귀하게 쓰여질 수 있지만 이것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쓰시기 전, 하나님은 먼저 버리게 하십니다. 바울도 그 많은 학식 버리게 하셨습니다. 버리니까 하나님이 보인 것입니다. 버리지 않았으면 그것이 하나님을 가렸을 것입니다. 모세도 40년간 애굽에서 배운 것들을 버리게 하셨습니다. 버리니까 하나님이 쓰십니다. 세상적으로 못 가졌다해서 꼭 하나님이 안 쓰시는 것도 아닙니다. 모세는 애굽으로 다시 돌아갈 때 다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지팡이 하나 들고 갔습니다. 모세는 너무 많이 가진 것이 문제였습니다. 버려야했습니다. 다 버리고 갔습니다. 지팡이 하나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어느 위대한 사람도 못하는 일을 했습니다.
한 민족을 출 애굽하게 했습니다. 노예에서 해방시켰습니다. 40년간 광야를 동행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 중 가장 멋진 기적은 모세를 통해서 일어난 것들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홍해 바다가 갈라진 것입니다. 바위에서 샘물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학위 가지고도 못하는 일입니다. 권력 있어도 못하는 것입니다. 돈 있다고, 힘있다고, 건강 있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능력 있는 수많은 왕들, 대통령들이 있었지만 홍해바다를 갈랐다든지, 바위를 두들겨서 샘 물 나오게 했다는 말 못 들어 봤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재산이라고는 지팡이 하나밖에 없는데도 이런 일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으로 가졌어도 하나님을 못 가지면 아무 것도 못 가진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적으로 못 가졌어도 하나님을 가지면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가진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지 못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죄짓는데 사용될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어도 세상적으로만 가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만 메달리는 것입니다.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실력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데 믿음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이런 때 믿음 있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이 크게 쓰시고 많은 실력 있는 사람들을 붙여주십니다. 하나님이 문열어 주지 않으면 누구도 못합니다. 실력 있다고 인생이 다 잘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큰 공원에 가면 대게 연못이 있고, 금붕어, 고기들이 살고 있습니다. 가서 먹이를 던져주면 금붕어들이 입을 떼를 지어 몰려듭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면,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을 붙여주십니다. 돈 가진 사람, 힘있는 사람, 배운 사람, 재능 있는 사람 다 붙여주십니다. 이상하게 길이 열리고, 도움의 손길이 있고, 사람들이 붙습니다. 일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까? 먹이를 던져주는 인생입니까? 먹이를 쫓아다니는 인생입니까? 요즘은 가진 사람은 많은데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얼마 전 저희 갈렙 순이 모였습니다. 정기 모임은 금요일인데, 화요일 날 갑자기 모이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나기 전에 자기들끼리 이렇게 얘기했답니다. '이번 주는 오늘 모였으니까 안 모이는 걸로 합시다'. 그렇게 하자는 사람도 있고, 모이자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한 형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끼리 아무리 결정해봐야 소용없어 순장님이 오케이 해야돼, 순장님이 '모여' 하면 모여야해' 그렇습니다. 인생이 꼭 그렇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준비하고 움켜쥐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이 오케이 해야 합니다. 우리의 참 순장이신 하나님이 오케이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쓰시면 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버리면 흔적 없는 인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드온이 큰 용사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의 기드온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긴 설명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말로 간단하게 답하십니다.
--기드온은 어리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큰 용사입니다.
--기드온은 가진 게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부자입니다.
--기드온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입니다.
--기드온은 무능력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백성을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답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됩니다. 후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기드온은 큰 용사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했습니다.
어느 교회에 갔더니 정면 건물에 프랑카드가 걸려있는데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예수가 답이다"
예수가 답이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에 예수를 대입하면 답이 나옵니다. 문제가 풀립니다. 예수가 함께 하면 해답이 됩니다.
--무능한 자는 능력자가 되고,
--우둔한 자는 지혜자가 되고,
--작은 자는 큰 용사가 되고,
--어린아이는 장정이 됩니다.
광야에 있어도 예수가 함께 하시면 천국이 됩니다.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해답입니다. 홍해바다에 직면해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까 육지처럼 건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계시면 문제가 답이 되고, 위기가 축복이 됩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붙들어야 합니다. 목숨 내놓고 믿어야 합니다. 거기에 답이 있는데 어디서 해답을 찾고 있습니까? 오늘 인생의 답을 발견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사람을 키우시는 하나님
삿 6장 11~17절 / 조상호목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Built to last: Successful Habits of Visionary Companies)의 저자인 제임스 콜린은, 과거에는 한 기업이나 단체의 흥망성쇠는 특출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의 리더에 달려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기업들의 역사를 놓고 6년 동안 케이스 스터디를 하면서 내린 결론은 놀랍게도, 지나치게 자기주장과 생각이 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지도자는 장기적으로는 그 기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오히려 저하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예로서, 1920년대 말에 시카고 근교에서 비슷한 규모로 비슷한 아이템(TV와 라디오 제작)을 주종으로 해서 시작한 두 회사 ‘제니스’(Zenith)와 ‘모토롤라’(Motorola)를 비교했습니다. 제니스의 창업주는 ‘유진 맥도널드’(eugene Mcadonald)로 그의 별명은 ‘사령관’이었습니다. 그는 별명처럼 항상 아이디어가 넘쳤고, 성미가 급하고 추진력이 강하여 직원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폭풍처럼 몰아가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반면에 모토롤라를 세운 ‘폴 켈빈’(Paul V. Galvin)은 엔지니어 출신이 아닌데도 탁월한 엔지니어들을 모아서 전자회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제니스의 창업주 ‘유진 맥도널드’(eugene Mcadonald)와 달리, 직원들에게 일을 주도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재량권을 부여했습니다. 매니저 회의에서는 찬반 의견들을 활발하게 개진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탁월한 공학 발명가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을 세워주는 재능이 탁월했습니다. 처음엔 두 회사가 비슷한 수준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창업주가 죽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모토롤라는 핸드폰을 비롯한 최첨단 통신장비를 만드는 세계적인 회사로 발돋움을 한 반면, 제니스는 몇 번의 경영 적자를 겪으면서 여전히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생산하면서 간신히 현상 유지나 하는 기업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인재양성의 중요성입니다. 제니스가 간신히 현상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인재를 양성하지 않은 채, 창업주가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모토롤라가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한 것은 창업주가 사람을 계속적으로 키우고 그들로 하여금 마음껏 역량을 발휘하도록 기회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을 키우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미래는 다음 세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나 회사나 나라 등의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중의 하나는 인재양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잘 키워야 합니다. 인재 양성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인재 양성에 대단히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람을 택하시고 훈련시키시고 또한 그들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를 통해 일하시기 위해 어느 날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면서까지 그를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나서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주셨습니다. 또한 요셉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일하시기 위해 먼저 그를 훈련시키셨습니다. 구덩이에도 빠지게 하시고, 보디발의 집에 종살이도 하게 하시고, 옥살이도 하게 하시고 결국은 애굽의 총리대신에까지 오르게 하셨습니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일하시기 전에, 먼저 그를 미디안 광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40년 동안 그를 훈련시키신 후, 수백만명을 이끄는 민족의 지도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 키우는 것을 중요시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아도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1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지만, 범죄하고 타락한 그들을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 미디안이라는 요단 동쪽의 사람들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매년 농사철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씨앗을 뿌리고 나면, 미디안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서 심어놓은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한 미디안 사람들은 농작물에만 피해를 입힌 것이 아니라 소나 양이나 나귀 같은 가축도 남기지 아니하고 약탈해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자와 어린아이들도 끌고 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저히 들판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2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에 굴을 파고 거기에서 생활했습니다. 이런 생활이 7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고통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합니까? 6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그들은 어려움을 당하니까 비로소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너희들 벌써 몇 번째니?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바락, 다섯 명의 사사를 보내주었으면 되었지, 또 누구를 보내 달라고 그러니? 너희들은 양심도 없냐?”라고 그들을 책망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또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한 사사를 보내주셨는데, 그가 바로 기드온입니다.
우리는 기드온 하면 300명의 용사를 거느리고 미디안 적군 13만 5천명을 박살내었던 용맹스러운 장군을 생각합니다만, 원래 그는 대단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전쟁터에 나가서 싸울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기드온은 요아스의 아들입니다. 원래 이 ‘요아스’라는 이름의 뜻은 ‘절망’입니다. 시대가 너무 절망적이어서 절망이라고 붙였는지, 가정이 너무 절망적인 가정이라서 절망이라고 붙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기드온은 절망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그가 어디에서 타작을 하고 있다고 합니까?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고 있습니다. 타작을 하려면 바람에 겨가 날아가도록 들판에서 해야 하는 반면, 포도주는 바람이 불지 않는 창고나 골짜기 혹은 웅덩이 같은 곳에 설치되어 있는 틀에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들판에서가 아닌,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한 이유를 아십니까? 어렵게 농사지은 것을 미디안 사람들에게 빼앗길까봐 그는 몰래 숨어서 타작을 하였습니다. 그는 겁쟁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당신의 일꾼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할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1) 미래의 가능성을 보시는 하나님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가능성을 보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재 처해진 우리의 상태만을 보시지 않으시고 우리의 미래의 가능성을 보십니다. 현재에는 우리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찬란하게 변화될 우리의 미래를 보십니다. 사실 기드온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디안 사람들의 손으로부터 구원할 사사와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평범한 농부였습니다. 아니 평범하다 못해 겁쟁이였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자기 자신을 세우신다는 하나님 말씀을 들은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15절) 기드온은 단순히 자기 자신을 낮추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 비천하고 부족해서 “나는 우리 가문에서 극히 약한 자입니다. 나는 우리 가정에서 가장 작은 자입니다”하고 하며 스스로 보잘 것 없는 자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12절)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뭐라고 부르십니까? ‘큰 용사‘라고 부르십니다. 이 명칭은 겁쟁이 기드온의 현재의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명칭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르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잠시 착각하셔서 겁쟁이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르셨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과 혼동하셔서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르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 모르시는 것 없이 다 아십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르신 것은, 기드온의 가능성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현재를 보신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보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가능성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서울 금호제일교회에서 부목사님으로 섬기시는 이준구목사님이 신학대학에 다닐 때, 겪은 일화를 읽고 큰 도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목사님이 한 선배와 함께 그 선배의 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아들을 보신 그 선배의 부모님께서 이렇게 인사를 하더랍니다. “목사님 오셨어요.” 일반적으로 부모님이 아들을 대할 때, 어떻게 부릅니까? 이름을 부르던지, 아니면 “얘야” 아니면 “아들아” 뭐 이렇게 부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선배의 부모님은 아직 목사 안수도 받지 않은, 신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들을 향해 “목사님 오셨어요.”라고 극존칭을 쓰면서 인사를 한 것입니다. 그 부모님께서는 아들을 현재의 아들로 여기지 않고 미래의 목사님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더 소개하겠습니다. 폴란드가 낳은 세계적인 근대 피아니스트 파데레프스키는 어릴 적부터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음악학교에 입학했지만, 피아니스트가 되기에는 손가락이 너무 짧고 굵으니, 다른 악기를 하라는 선생들의 권유에 의해 피아노에서 손을 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 악기를 연습했으나 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안톤 루빈스타인을 만났습니다. 루빈스타인은 다른 선생들과 달리, 피아니스트로서의 그의 가능성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루빈스타인으로부터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을 받은 그는 다시 한번 피아노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피눈물 나는 훈련을 거듭하여 마침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대성하였습니다. 그의 명성과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나중에는 폴란드 수상까지 되었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 아직도 “너 같은 게 무엇을 할 수 있어? 웃기지 마. 뭐 네가 판사가 된다고! 지나가는 소가 웃겠다.”등의 이런 저런 말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가능성을 싹부터 짓눌러 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네가 대학에 들어가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등의 말로 자녀들의 가능성을 무시하면서 자녀들을 좌절케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십니까? 인정하고 격려하는 대신, 현재의 부족한 모습만을 보고 멸시하고 무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위에 있는 학생들과 청년들을 어떠한 안경을 쓰고 보십니까? 현재라는 안경을 쓰고 보십니까? 아니면 미래라는 안경을 쓰고 보십니까? 전에 새벽기도회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요한복음 1장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이 시몬이란 흔들리는 ‘갈대’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반면에 게바란 견고한 ‘반석’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형제 안드레의 손에 이끌리어 찾아온 베드로가 지금은 바람에 이리 저리 흔들리는 ‘갈대’ 와 같은 존재이지만, 나중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반석’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현재를 보지 않으시고 미래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어 주셨습니다. 그를 기대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주님처럼 미래의 가능성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기를 바랍니다. 남들을 볼 때에 현재의 연약한 모습만을 보지 않고 변화될 미래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모습에 불만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와 여러분들을 포기해도 하나님은 우리들을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들에게 기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의 가능성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2) 불평까지도 받아 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불평까지도 받아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처음으로 믿음 생활하는 분들은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 ‘벌주시는 하나님’, ‘징계하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생각이 달라 질 수 있습니다. 무서운 하나님이 아닌,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지금 기드온이 뭐하고 있습니까? 불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끌어 낼 때 베풀어 주었던 기적을 지금은 왜 베풀지 않느냐, 왜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 힘들게 하느냐,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러한 어려움을 겪게 하느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린 것이 아니냐?’라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야, 너희들 벌써 몇 번째야? 내가 너희들을 용서하고 너희들을 구원해 주기 위해 벌써 다섯 명의 사사를 보내주지 않았니? 그런데 네가 어디다 대고 불평을 하고 있어?”라며 야단을 치지 않겠습니까? 저라면 야단 뿐 아니라, 아예 박살을 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불평하고 있는 기드온을 박살내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불평하고 있는 기드온을 박살내지 않으셨습니다. 한마디의 야단조차 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를 돌아보셨다고 합니다. 여기 14절 상반절의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기드온을 쳐다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평하고 있는 기드온을 지극한 연민의 심정으로 바라보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상담을 목적으로 찾아온 내담자를 안타깝게 여기며 바라보는 인정 많고 정이 많은 상담자처럼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바라보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가슴이 넓은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미국에 아이언사이드라는 유명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 날 회의에 참석한 어느 한 청년이 일어나서 “법대로 합시다!”라고 매우 무례하게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가관이었습니다. 매우 흥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젊은이에게 아이언사이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 하나님께서 법대로 자네와 나를 다루셨다면 우리는 다 벌써 지옥에 가 있어야 했을 것일세.” 그렇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법대로 다루고 계신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을 은혜로 다루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우리가 잘못하고, 우리가 범죄를 저질러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를 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19장 4절을 보면 스스로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사느니 오히려 죽는 것이 낫습니다. 나를 죽여주십시오.’라고 하며 불평하는 엘리야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엘리야, 너 언제부터 그렇게 교만해졌니? 너 안되겠구나. 회개하라!”라고 했습니까? 아니면 “너는 지금 기도가 필요하다. 너에게 지금부터 40일 금식을 선고하노라.”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열왕기상 19장 4절부터 8절까지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불평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야단을 치지 않으시고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안마해주셨습니다. 마사지 해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광야에서 구하기 힘든 숯불에 구워 몰랑몰랑해진 부드러운 떡과 물을 주면서 먹이셨습니다. 그런 다음 재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마사지 해주며 “일어나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뛰었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비록 불평하는 엘리야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찾아오셔서 그의 필요를 공급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를 사랑으로 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불평까지도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불평을 받아주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헌신을 다짐하고 헌신하고 있는 샘지기라 할지라도 샘원들의 불평을 받아주는 것이 한계가 있습니다. 사랑으로 학생들을 돌보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교사라 할지라도 학생들의 불평을 받아주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전도한 사람도 전도되어 온 사람의 불평을 받아주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6개월, 1년, 3년 시간이 가는데도, 전혀 변함없이 불평만 하고 비상식적인 요구만을 일삼는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면 결국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악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생길 경우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불평을 털어놓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떠한 불평이라도 능히 받아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의 고민과 어려움과 푸념들을 항상 받아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누가 우리의 불평을 받아주십니까? 주님이십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과 16절을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 즉 동정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뉴질랜드로 이민 와서, 자녀들 데리고 유학 와서, 마음 터놓고 대화할 상대가 없어 답답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람을 찾기 전에 먼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불평하지 말고 불평을 들으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달리, 우리의 어떠한 불평과 고민과 문제들을 들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3) 시험까지도 용납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내가 너를 쓰겠다. 내가 너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겠다.”고 말씀했지만, 농사만 짓던 기드온이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17절을 보겠습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인 기드온은 하나님께 표징, 즉 싸인(Sign)을 요구했습니다. 지금 내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당신이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그것을 믿을 수 있는 싸인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기드온은 세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첫 번째로 기드온이 반석위에 염소 새끼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놓고, 그 위에 한 양푼의 국을 쏟아 붓자, 염소새끼와 떡은 국물로 흥건하게 젖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지팡이 끝을 그 위에 갖다대자, 불이 나와 모든 것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마술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이만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믿을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드온은 아직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시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이번에는 양털 한 뭉치를 가져다가 엉뚱한 요청을 합니다. 37절을 보겠습니다.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밤에 사면은 마르고 오로지 양털만 젖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요청대로 해 주셨습니다. 양털을 힘 있게 짜자, 물이 그릇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희한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드온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세 번째로 시험합니다. 39절을 보겠습니다.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여 내게 진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나로 다시 한번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이번에는 둘째 시험과는 정반대로 밤에 사면은 이슬로 젖게 하시고, 양털만 마르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것도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 차례나 기드온의 시험을 용납하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시험하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그 시험을 용납하셨습니다. 자비가 풍성한 하나님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을 읽은 분들 가운데 동전을 가지고 “하나님, 이 동전을 던져 키위 새가 나오면 이렇게 하고, 반대로 엘리자베스 여왕 얼굴이 나오면 저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며, 동전가지고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려는 형제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종이에 사다리를 그려놓고 “A형제가 나의 배우자입니까? B 형제가 나의 배우자입니까?”라고 하며 사다리 타며, 배우자를 결정하려고 하는 자매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4장 12절에서 주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습니다. 십일조와 관련되어서는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용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복을 내리고 싶어서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시험하는 것까지도 허용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마음에 있는 의심을 몰아내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시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그 시험을 용납하셨습니다. 자비가 풍성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표적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의심 많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말씀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표적을 구하지 말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결정에 앞서 도저히 확신이 생기지 않거든 “주님, 나로 하여금 표적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표적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시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그 시험을 용납하십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증거들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키우시는 분이십니다. 기드온을 키우신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도 키우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숨어서 살아가던 겁쟁이 기드온을 포기하지 않으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불평하던 기드온의 불평을 받아주셨듯이 저와 여러분들이 부르짖어 기도하는 기도에 응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번씩이나 싸인을 보여 달라고 하던 기드온에게 증거를 보여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들어 키우시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오시기 바랍니다. 부끄러운 모습도 상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오시기 바랍니다. 확신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 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십니다.
가능성을 보시는 하나님
삿 6장 11~18절 / 조상호목사
어느 책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스승님, 오랜 세월 동안 수련을 하였지만, 아직도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그 제자에게 번쩍이는 보석 한 개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시장에 가서 이 보석의 값을 알아보거라. 단 어떤 값을 부른다 해도 이 보석을 팔지 말아라." 그 제자는 제일 먼저 과일 가게에 들렀습니다. 그는 보석을 과일가게 주인에게 보여 주며 물었습니다. "제가 이 보석을 가지고 있는데, 당신은 이 보석에 대한 대가로 나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주인이 대답했습니다. "사과 두 개 쯤이면 적당할 것 같은데요." 다음에는 야채 가게로 가서 똑같이 물었습니다. "예, 배추 두 포기를 주겠소." 제자는 이번에는 대장간으로 갔습니다. 대장장이는 평소 보석에 대해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꽤 많은 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제자는 몇 군데를 더 돌아다니다가, 한 보석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보석을 이리저리 자세히 살피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보석, 대체 어디서 났습니까? 이 보석은 돈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자는 보석을 가지고 스승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간의 일어났던 일들을 스승에게 설명하자,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야, 자네는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되었노라. 사람은 자기 자신을 하찮은 사과 두 개에, 배추 두 포기에, 또는 얼마의 돈에 팔아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원한다면 돈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의 고귀한 존재로 자신을 만들 수도 있느니라. 그 모든 것은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 바로 그것에 달려 있느니라."
저는 이 이야기를 읽고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만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깡패로 생각하면 정말 깡패처럼 살게 됩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실패자처럼 생각하면 정말 실패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스스로 사과 두 개 정도의 가치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사과 두 개 정도의 가치만을 가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반면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세상의 그 어떤 보석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고귀한 생명체로 생각하면, 보석같이 빛나는 하나님의 고귀한 생명체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실력이 있는 한 청년이 입사 시험에서 번번이 떨어지자, Counsellor를 찾아갔습니다. 상담을 통해 발견한 그의 문제점은 취업의 결정권이 회사 쪽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같이 부족한 사람을 면접해 주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면접관들의 눈에 자신감 없고 무엇인가 부족한 사람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Counsellor와 상담을 한 후에 그의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나는 좋은 사람이다. 나는 실력을 갖고 있다. 나는 이 회사에 필요하고 또 중요한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태도의 변화 이후에 그가 원하는 직장에 좋은 성적으로 취직하였다고 합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예화 입니까?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자아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엄청난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하보다도 귀한 것이 인간의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어 대신 죽게 하실 정도로 '나'라는 인간을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인 다윗은 시편 139편 14절에서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신묘막측하게, 다시 말해서 Fearful하게, Wonderful하게 만드셨다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놀랄만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기이한 존재들입니다. 믿으십니까? 믿으시는 분들은 스스로를 신묘막측한 존재로 인정하는 반면, 믿지 않으시는 분들은 스스로를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인정하는 분들입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신묘막측한 존재임을 믿으십니까? 아멘! 한번 옆에 계신 분들과 인사하겠습니다. "신묘막측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 각자를 신묘막측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최선을 다하여 걸작품을 만든 작가가 만든 작품을 아무렇게나 방치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신묘막측한 존재로 지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치지 않습니다.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가능성을 보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기드온이라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밀농사를 짓는 평범한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기드온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기드온의 미래를 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12절)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큰 용사여", 영어로 "Mighty Warrior!"라고 부르십니다. 이 때 기드온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는 겁쟁이였기 때문입니다.
1) 겁 많은 자
1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기드온이 밀을 타작하는데, 어디에서 타작을 하고 있습니까?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도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잘 압니다만, 타작은 넓은 마당 같은데서 합니다. 거기에다 곡식을 펴놓고 잘 말린 다음에, 긴 나무로 만든 도리깨 같은 것으로 내려치면 껍질이 벗겨집니다. 그러면 채 같은 것에 담아 벗겨진 곡식과 껍질을 따로 분리하여 자루에 담곤 하는데, 기드온은 지금 어디에서 곡식을 타작하고 있습니까? 포도즙을 짜는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매년 파종할 때만 되면 미디안 사람들과 아말렉 사람들과 동방 사람들이 몰려 와서 파종한 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갈 뿐 아니라, 어렵게 농사를 지었다 할지라도 추수할 때에 무더기로 몰려와서 추수한 곡식을 탈취해 가곤 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그들에게 추수한 곡식들을 빼앗길까봐 몰래 숨어서 타작을 한 것입니다. 또 27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기드온이 종 열을 데리고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아비의 가족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그는 집안에 있는 바알의 단을 헐고 단 곁에 있는 아세라 상을 찍어 버리라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두려움 때문에 혼자서 행하지 못하고 몸종 열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대낮에는 두려워서 행하지 못하고 캄캄한 밤에 우상단지를 찍어버렸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사 기드온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결코 큰 용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숨어서 타작을 하고 혼자서는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부엉이처럼 밤에 활동하는 겁쟁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사로 선택하셨습니다. 미디안의 손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미래를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능성을 가지고 겁쟁이 기드온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사람을 보실 때 현재의 모습을 보시지 않으시고 미래의 가능성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솔직히 그들에게 제자로서의 자질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 보면, 밤 사경 즈음에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유령이다. 유령이 나타났다!"소리치며 난리법석을 떨었습니다. 그 때 저 같으면 그들을 향해 "야, 이놈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그렇게도 겁이 많니? 너희들을 믿고 세계복음화를 이루려고 하는 내가 잘못이지? 아이고 한심하다 한심해! 야, 너희들 이 시간이후부터 다 내 제자가 아니다. 내가 제자를 다시 뽑겠다"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그들을 책망했습니까? 그렇다고 그들에게 실망했습니까? 자질론을 내세워 그들에게 면박을 주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을 책망하지도, 그렇다고 그들로부터 실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마가복음 6장50절을 보면, 주님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위로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현재에는 겁쟁이들이지만, 장차 목숨걸고 복음을 증거 할 위대한 인물이 될 가능성을 보신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주님의 예상대로 로마의 극심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져 목숨 걸고 복음을 증거하기도 했고,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음을 전하기도 했고, 저 아시아의 인도에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현재의 상황에 겁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의 모습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을 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위로하시며 "나는 너를 기대한다. 나는 너를 통해 나타날 역사를 기대한다"라고 말씀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2) 비천한 자
하나님께서는 현재 가문이 별로 좋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이 없는 비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미래를 보십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기드온은 지금 겸손해서 자기 자신을 낮추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는 므낫세 지파 중에 가장 미약한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또 그 미약한 가문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러한 자기 처지를 바라보며 자기 삶에 스스로 절망한 자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극히 약하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비천한 배경의 사람인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능성의 렌즈를 끼고 기든온의 미래를 보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조건이, 여러분의 현재의 상황이 비천해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현재의 열악한 상황을 보지 않으시고 미래를 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시몬을 만났을 때 무엇이라고 말한 줄 아십니까? 요한복음 1장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 42절이 있기 전까지 어디를 둘러보아도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형제 안드레의 손에 이끌려 왔습니다. 처음으로 예수님을 대면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다못해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내가 당신의 소문을 익히 들었습니다. 기적을 많이 행사한다지요.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다지요. 내가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 한마디 조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42절을 보면,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지금은 시몬이다. 지금은 흔들리는 모습이요, 별 볼일 없는 모습이지만, 그러나 너는 장차 게바가 되리라. 베드로가 되리라.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되리라." 이것이 주님의 시각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주변에 볼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미래를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형편없는 모습이지만, 주님의 렌즈로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저희 교회의 젊은 청년들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별 희한한 모습을 하고 교회에 나옵니다. All Blacks 럭비 팀의 Tana Umanga같이 머리를 가닥가닥 따고 온 청년도 있고, 황금물결로 출렁거리는 것처럼 노랗게 머리를 염색한 청년도 있고, 1미터 옆에만 접근해도 담배 냄새가 코를 찌르는 청년도 있고, 귓부리가 찢어질 만큼 무거운 귀고리 세 개씩이나 달고 다니는 청년 등, 별의별 청년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을 보고 소망을 갖기로 했습니다. "너희들, 조금만 있어봐라. 하나님의 은혜만 받으면 너희들은 딴 사람이 될 것이다" 주님의 시각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미래의 가능성을 보시기 바랍니다. 집안이 안 좋으면 어떻습니까? 4년제 대학 나오지 않았으면 어떻습니까? 고등학교를 3번씩이나 떨어졌으면 어떻습니까? 랜트집 살면 어떻습니까? 600불 짜리 자동차 타고 다니면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외부적인 환경에 움츠러들지 말고 주님 안에서 당당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현재를 보시지 않고 우리의 가능성을 보시며, 우리의 미래에 대해 기대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3) 소심한 자
하나님께서는 비록 기드온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이지만, 앞으로 큰 용사로 만들어 가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예, 알겠습니다. 나 같은 비천한 자를 쓰시다니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표징, 즉 Sign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기드온은 하나님께 표징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믿음 없고 괘씸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를 허락하시고 표징을 보여 주십니다. 기드온은 반석 위에 염소 새끼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놓고, 그 위에 국을 쏟았습니다. 제물이 축축하게 젖어 물이 흘러내립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것에 지팡이를 내밀어 대자, 축축하게 젖은 고기와 떡이 다 불에 탔습니다. 마술 같은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정도면 믿을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기드온은 믿지 못하고 한번 더 하나님께 증거를 요청합니다. 이번에는 양털 한 뭉치를 가져다가 요상한 제의를 합니다. 타작 마당에 둔 한 뭉치의 양털에만 이슬이 젖게 하고 사방은 젖지 않고 마른 상태로 있으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사로 세우신 것을 믿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소심한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38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찌기 일어나서 양털을 취하여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기드온의 요구대로 되었습니다. 마당은 젖지 않고 한 뭉치의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워낙 소심했습니다. 새벽이라서 양털에 이슬이 더 잘 묻었나 싶어 "혹시 양털에만 이슬이 묻은 것은 우연일 수도 있어"하고 하나님께 또 다시 요청합니다. 이번에는 둘째 번과 정반대로 "하나님, 한번만 더 요청할께요. 마당 사면은 이슬에 젖게 하는 대신에 양털은 보송보송하게 해 주세요."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40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이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저는 본문을 보고 하나님은 정말로 인내가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저 같으면 "그만둬라. 너 말고 다른 사람 쓰겠다. 그렇게도 나를 믿지 못하겠니? 야, 그래 가지고 너 남자라고 할 수 있겠니?"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내하며 기드온이 변화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비록 의심 많은 기드온이고 소심한 기드온이지만, 그를 용납하시며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지만, 앞으로 당신의 위대한 일을 행하는 기드온을 꿈꾸셨습니다. 결국 7장을 보면, 기드온은 단 300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던 최소 13만 5천명 이상의 아말렉과 동방의 연합 군대를 박살을 내었습니다. 군대에서 말하는 '1당 100'이 문제가 아니라, 300명이 13만 5천명을 상대했으니 '1당 450'으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인물들이라 할지라도 우리와 특별하게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기드온이 300명 가지고 13만5천명 이상의 미디안 사람들을 무찔렀다 해도 그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는 우리보다도 더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비천한 환경의 출신이었고, 겁쟁이였고 소심한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미래의 가능성을 보시고 그를 큰 용사, "Mighty Warrior!"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작용됩니다. 우리가 겁쟁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환경이 별로 좋지 않다 할지라도, 우리가 소심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미래의 가능성을 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1년 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데, 제임스 어그레이라는 사람이 쓴 <날고 싶지 않은 독수리>라는 책을 다시 한번 소개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마르고 달도록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호흡이 끝나는 날까지 이 이야기를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한 남자가 새를 잡으러 산에 갔다가 가시덤불에 걸려 있는 새끼 독수리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다 닭과 오리가 있는 우리 안에 넣어두고 키웠습니다. 새끼 독수리는 그 안에서 모이를 먹으며, 물을 마시며 다른 동물들과 똑같이 살았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점점 아기 독수리는 성장하여 엄청나게 큰 날개를 가진 어른 독수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날지 못하는 닭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하게 들른 동물학자가 이 모습을 보고 그 독수리를 다시 날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날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독수리의 몸 속에 '독수리 정신(Eagle Spirit)' 대신에 '닭 정신(Chicken Spirit)'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 학자는 독수리, 아니 닭이 되어 날지 못하는 독수리를 데리고 높은 절벽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독수리를 하늘 높이 던져 버렸습니다. 하늘로 던져진 독수리는 한참 동안 날지도 못하고 그냥 무기력하게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동물학자는 낙심이 되었습니다. '저렇게 큰 날개를 가진 덩치 큰 독수리가 날지도 못하고 떨어지다니' 학자는 날지도 못하고 떨어지고 있는 독수리를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는데, 그 때 그의 눈앞에서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땅바닥을 향해 떨어지던 독수리는 푸드득 푸드득하며 수 차례 날개 짓을 하더니, 마침내 힘차게 날개 짓을 하더니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시시하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피조물과 달리,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손으로 친히 빗어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택한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왕자와 공주들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주인이 던져주는 모이만 쪼아먹는 치킨과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안에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큰 용사로 만들어 주셨는데, 우리는 할 수 없다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늘과 땅의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우리와 성령으로 함께 하시며 동행하시는데도 마치 치킨 정신으로 날지 못하는 독수리와 같이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치킨정신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독수리정신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큰 용사입니다. 하늘의 훨훨 날을 수 있는 독수리처럼 당당하게 승리할 수 있는 큰 용사들입니다. 오늘 주님은 기드온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큰 용사여, 내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소심하고 겁쟁이 같은 우리들을 세상을 호령하는, 세상을 정복하는 큰 용사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큰 용사로써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여호와 살롬
삿 6장 11~24절 / 조재호목사
어떤 사람이 영국 런던의 번화가 길 모퉁이에서 스코틀랜드 전통악기인 백파이프로 은은하게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지나가던 한 사람이 환한 미소를 띄면서 다가와 물었습니다. “고향이 스코틀랜드이십니까?” “아뇨, 제 고향은 천국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일 뿐이죠.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그네의 삶을 인도하시지요“ 그 분은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그 분은 여러분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좋으신 하나님이 되시는가요?
첫째로 하나님은 한 사람의 가능성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나라 옆에 미디안 이라는 족속이 이스라엘 백성을 심각하게 압제하고 있었습니다. 그 압제가 얼마나 심하고 고통스러웠던지 사람들은 고양이 앞에 쥐와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생활상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산에 토굴을 파고 굴속으로 도망해서 원시인 같이 살았습니다. 손바닥만하게 땅을 개간해서 밀이나 보리 씨앗이라도 뿌리면, 미디안 원수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여지없이 공격해 와서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사라졌습니다. 어느 집에서 양이나 염소를 키우는 것이 발각되면 때를 지어 쳐들어와 다 빼앗아 갔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한 삶을 살고 있었겠습니까? 하루라도 편히 지낼 날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7년씩이나 연약한 두더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불안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 이라는 사람도 살고 있었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1) 원래 밀 타작은 바람이 부는 큰 마당이나 넓은 들판에서 하고 포도주 틀은 광이나 잘 안 보이는 구덩이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조금 수확한 밀을 빼앗길까봐 무서워 숨어서 타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을 무서워하며 두려워하는 평범한 농부일 따름입니다. 미디안의 눈에 안 띄게 살아 피해를 안보는 것이 기드온의 소원입니다. 그러한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큰 용사여!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기드온이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이 미디안이 두렵고 불안해서 숨어서 일하고 있는 겁쟁이 기드온을 부르셨습니다. “큰 용사여!” 하나님은 기드온이 지금은 큰 용사가 아니지만 앞으로 큰 용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가능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현재의 상태만을 보지 않으십니다. 싸움 경험도 없는 숨어 있는 기드온에게서 큰 용사를 보셨고, 고기 몇 마리 잡는 베드로에게서 기독교 신앙의 반석을 보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실 때 축복의 놀라운 사건들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그가 큰 용사가 될 수 있는 것은 무기 쓰는 법을 배운 것도 아니고, 갑옷을 빌려 입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것은 힘과 능력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에게도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성경의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도 아버지로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 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변함 없고 흔들림 없는 약속입니다. 여러분과 반드시 함께 하신다는 언약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녀에게 아빠가 필요하듯이 우리에게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은혜인가요? 삶에 불어닥치는 비바람에도 지워지지 않도록 마음속에 깊숙이 새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째로 하나님은 평강을 주시는 살롬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에게 표징을 보여 달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시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떠나지 마십시오. 예물을 가져오겠습니다” 기드온이 급히 양과 떡으로 제물을 마련했습니다. 돌 위에 올려놓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살라 버렸습니다. “내가 하나님이니라!” 막상 보여달라고 이야기했지만 불이 사르는 것을 보고 놀라서 죽을까봐 두려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기드온이 그곳에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평강이시라’ 평강과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기드온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미디안이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굴에서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누구에게나 확신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 약속하셨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입니다. 확실한 것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 큰 차이가 납니다. 확신이 없는 사람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은행에 월 얼마씩 불입해서 3년 만기 5백 만원 적금을 들었습니다. 월급을 받을 때마다 몇 만원씩 부었습니다. 벌써 6개월이 지났습니다. 통장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나중에 5백 만원 가지고 뭐할까? 즐거운 나날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3년 후 은행에서 이 통장 아니라고 하면 어떻하나? 그동안 이 은행이 망하면 어떻하나? 그래서 그는 다음 날부터 매일 은행으로 출근합니다. . 문여는 것을 보고 ‘오늘도 안 망했구나’ 창구에서 통장을 확인하고 ‘이 통장이 통하는구나’ 은행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3년 후에 5백 만원은 적립되었다 하더라도 아마도 그 돈은 신경쇠약 입원비로 사용해야만 할 것입니다. 확신을 갖지 못한 증거입니다. 확신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자신과 용기가 없기 마련입니다. 확신이 있는 사람의 믿음과 삶의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확신은 사람에게 용기와 평안을 줍니다. 기드온은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구나’ ‘여호와 샬롬’ 평안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미디안이 무섭고 두려워 숨어서 탈곡하던 기드온은 한없는 평안과 쳐서 무찌를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기드온은 더 이상 숨어 지내는 비겁한 사람이 아니라 불의와 두려움과 맞서 싸우는 용사가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확신이 필요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부르심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확신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입니다. 그래야 풍랑 속에서 평안을 누립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벗어날 평안을 누립니다. 병상에서도 평안을 누립니다. 두려움의 그림자를 몰아내고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돈도 아니고 직분도 아니고, 신앙경륜도 아니고 시험 치루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달라고 말씀드리고 성령의 인치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살롬,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주의 은혜와 평강이 확신가운데 더욱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