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통/ 치통에 시달리다가 치과부터 달려왔어요. 되는 집만 된다고 월요일 오전 손님들로 바글바글 합니다. 각시 생각도 났고 넓직한 쇼룸이 기분좋네요. 유니폼 입은 치위생사가 X-ray를 찍자면서 펜던트를 빼달랍니다. 악동이 군소리 안 하고 말도 잘 듣네요. 왜그럴까요? 46번 임플란트 언제 할거냐고 물어서 요즘같은 불경기에 누가 이빨을 하냐며 웃어 넘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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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6장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호세아가 간음한 아내를 찾아가, 달래고 위협하고 호소도 해본 것처럼, 하나님은 백성을 향해 해보실 것은 다해보셨어요. 그럼에도 들은 척도 않는 백성에게 "내가 젊은 사자와 같이 덤벼 너희를 찢어 놓겠다"라고 경고하십니다. 에고 무시라. 나의 두 얼굴은 완벽하리 만큼 상반되기 때문에 앞은 뒤를 전혀 모르고 ,뒤는 앞을 상상하지도 못한답니다. 험악한 세월을 살다 보니 내 음지 쪽 사람들은 내가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 농담으로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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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나와 신앙으로 맺은 지체들은 내 깡패 근성을 고백하면 믿으려 들지 않습니다. 물론 식구들도 완전히는 내 두 얼굴을 알지 못합니다. 가증스럽지요. 처음에는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두 얼굴을 자연스럽게 연기하며 살고 있는 내가 스스로도 싫습니다. 바라기는 죽기 전에 꼭 투명한 한 사람의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사람은 감동을 먹고 사는데 요즘 뭘 해도 시큰둥하고 별로 살맛이 안 납니다. 신앙의 감동을 잊은 지 오래 되었고 꿈과 희망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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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같으면 이렇게 마무리를 했을 텐데 내가 4년 동안 철학을 배웠으니 철학이 힘을 발휘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쇼펜하우어 형님이 현역 땐 빛을 보지 못했고 일흔에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히트 쳤습니다. 그는 행복에서 중요한 것은 외적 요소가 아닌 내적인 요소에 있으며, 부와 명예 같은 객관적인 조건보다 세계를 바라보는 주관적인 측면을 더 중시했어요. 행복의 핵심을 '자기 인식’, ‘개성’ 그리고 ‘자긍심’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왜 내가 기분이 좋아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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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나의 표상 이다 고’ 시작하는 첫 문장에서 쇼펜하우어는 바깥 세계가 우리의 감각과 표상을 통해서 만 알려진다는 칸트의 기본 입장을 의심 없이 인정해요. 차이점이라면 칸트의 '물 자체' 개념을 변형하여 ‘의지’로 새롭게 규정하면서, 이를 내부적으로 인식 가능한 것으로 보는 점이에요. 칸트의 불가지론을 넘어서 '의지'는 시간과 공간, 다수성으로 파악될 수 없는 불변하는 세계의 유일한 세계이면서도 개별화의 원리에 의해 개별적 존재로 나타납니다. 물 자체로 디렉트 진입하는 음악(예술)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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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귀인 내가 많이 변했어요. 소향 vs 화사, 정훈이 vs 신효범의 음악 프로에 홀라당 빠져 주이상스인지 오르가슴인지를 느껴보려고 애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이 세계가 무의식적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데 '의지'란 존재이고 '신체(몸)'이며 '이드'라고 해요. 음악은 밖이 아닌 내 안의 세계이고 현상의 모사가 아닌 '의지' 자체를 표현한다고 합디다. 음악은 언어처럼 자기 자체 지시를 통해 세계의 신비를 드러낸다고 해요. 그래서 음악은 삶의 현상을 가능케 한다지요. 치료 음악, 미술 치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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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의 세계를 살고 있는 내가 시공간의 제약에 갇히지 않고 본질(물자체)에 진입하는 길은 종교적 '해탈'과 '예술'을 통한 디오니소스가 유일합니다. 이성은 신체의 욕망에 끌려 다니지만 욕망(의지)은 세계를 움직입니다. 특별히 음악(예술)은 물 자체의 세계를 드러내면서 죽지 않고 죽음을 경험하는 작은 죽음, 순간적으로 경험하는 파토스로 삶의 치료 책이 맞는 것 같아요. 나이트클럽 찢어지는 스피커 앞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은 음악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온몸의 구멍을 통해 진동을 느낀다는 것 아닙니까?
2024.11.25.mo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