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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살롬의 제단
삿 6:19-24
19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20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 하니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라
21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22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4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삿 6:19-24 / 기드온이 집으로 가서 염소새끼 한마리를 마련하고 가루 2.2리터로 누룩 넣지 않은 떡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염소 새끼를 잡은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그릇에 담아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그에게 갖다드렸다. 20) 그랬더니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말하였다. `가져온 염소 고기와 누룩 넣지 않은 떡을 이 바위 위에 올려놓아라. 그리고 국을 그 위에 부어라.' 기드온은 그가 말한 대로 하였다. 21) 그러자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손에 잡고 있는 지팡이를 내밀어 그 끝을 고기와 누룩 넣지 않은 떡에 대자 바위에 불이 붙어 그 고기와 누룩 넣지 않은 떡을 살랐다. 그러는 사이에 하나님의 심부름꾼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22) 그제야 기드온은 그가 여호와의 심부름꾼인 줄을 깨닫고 `주님, 제가 감히 주님의 심부름꾼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군요' 23)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아라. 너와 나는 이렇듯 가깝지 않느냐? 네가 나를 보았다고 해서 죽지는 않을 것이다.' 24) 그래서 기드온은 그곳에 제단을 쌓아 여호와께 바치고 그곳을 ㄱ) 여호와살롬이라고 불렀다. 그 제단은 오늘날까지도 아비에셀의 후손에게 딸려 있는 오브라에 남아 있다. (ㄱ. `여호와는 평화'라는 뜻이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표징을 보려고 염소 새끼와 무교병과 고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자 앞에 나아갑니다.
기드온이 가서(19-20) 기드온이 염소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 여호와의 사자에게 드립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고기와 무교병을 바위 위에 놓고 기드온에게 국을 부으라 합니다. 그랬더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서 모든 것을 불살랐습니다(20). 상식적으로는 절대로 불이 바위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드온은 자신 앞에 나타난 천사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인줄 믿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믿고 그대로 하라고 할 때 하인들이 순종하여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요 2:1-11). 이처럼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21-22)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났습니다(21). 그때 비로소 기드온이 자기 앞에 있던 이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22). 성경은 2가지 유형의 두려움을 교훈합니다. 하나는 무익한 두려움으로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다른 하나는 유익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입니다. 한글성경은 이를 경외라고 번역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잠 19: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23-24) 자신이 죽을까 두려워하고 있는 기드온을 하나님께서 안심시키십니다. 기드온에 대한 하나님의 격려는 네가 죽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서 네게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니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감격한 기드온은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여호와 살롬이라 했습니다. 여호와 살롬은 하나님의 평안과 평화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향한 기드온의 신앙고백입니다. 기드온이 큰 용사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았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도 계속됩니다. 이런 사실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기드온처럼 믿고 사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적용: 당신은 기드온처럼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했나요? 없다면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달라고 기도하길 바랍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직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압제 아래 고통받고 있고, 기드온은 어떠한 일도 행한 적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기드온에게 임하신 것은 하나님의 평강이 이스라엘에 찾아왔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뵙고 안전하였음을 의미하는 의미로 여호와 살롬이 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여호와 살롬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당신의 삶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가득하고, 고통이 남아있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면 당신의 삶은 여호와 살롬입니다.
< 설 교 >
기드온의 교훈
삿 6:19-32 / 박봉수목사
기드온협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전 세계 호텔, 병원, 군부대, 학교, 교도소 등에 무료로 성경을 배포하는 단체입니다.
이 단체가 시작된 것은 정말 우연한 만남 때문입니다. 존 니콜슨이라는 사람이 여행 중에 한 호텔을 찾았는데 방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종업원의 제안으로 사무엘 힐이라는 사람과 한 방에서 묵게 됐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다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어서 잠자기 전에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이 습관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중에 함께 주의 일을 하기로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이 두 사람의 제안으로 1899년 7월 1일 미국의 위스콘신주 제인스빌이라는 곳에서 첫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임 중에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를 의논하다가 함께 특별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한 사람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드온’이라 하자 제안했고, 삿 6-7장을 읽고 기드온이라 이름을 짓게 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 사람의 설명은 기드온이 계획이나 결과에 대한 자신의 판단에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이 원하셨던 바를 정확하게 실천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의 위대한 점이 바로 겸손, 믿음,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이후 이 모임의 이름을 ‘기드온 협회’로 했고, 겸손, 믿음, 순종 이 세 가지를 이 협회의 덕목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드온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할 믿음의 모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특히 기드온은 겸손, 믿음,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우리도 기드온을 본받아 겸손, 믿음,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다 깊이 살펴보면, 이외에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소중한 교훈들이 있습니다. 그 교훈들을 찾아보겠습니다.
영적 신중함
삿 6장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과 기드온 사이의 대화가 기록되어있습니다. 16-17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테니 미디안을 치라 네가 이기리라” 여느 사람 같았으면 단박에 아멘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승리하실 것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신중했습니다. 정말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삿 6:18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청을 들으시고 표징을 보이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 놓고 그 위에 국을 붓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바위에서 불이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태웠습니다. 이 일로 기드온은 지금 자기에게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삿 6:36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습니다. 기드온이 사람을 보내 군사를 소집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미디안과 싸우라 명하셨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약속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면 공격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기드온은 다시 한 번 하나님께 표징을 구합니다. 이번 이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자기가 승리할 것이라는 확증을 받기 위해 표징을 구한 것입니다.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둘테니 하나님께서 이슬이 이 양털 뭉치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되지 않았을까요? 39절을 보면 기드온이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 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표징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해 달라는 것입니다. 양털만 마르고 주변 땅에 이슬이 가득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또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기드온은 그제야 군사들을 이끌고 미디안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다 보면 기드온이 의심이 많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아멘하고 나서면 되지 왜 이렇게 표징을 구하며 확인을 하는가? 믿음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태도를 책망하시거나 문제시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요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의 이런 태도를 존중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의 이런 신앙적 태도를 의심이 많은 것으로 보시지 않고 신중한 태도로 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앞에서 신중해야 합니다. 자칫 내 욕심을 하나님의 뜻이라 착각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탄의 미혹을 하나님의 뜻이라 혼동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중하게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면서 다음 몇 가지를 표징을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말씀의 표징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주시며 우리가 구하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시켜주실 때가 있습니다.
둘째, 마음속의 표징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평안을 주시고 또 담대함을 주실 경우가 있습니다.
셋째, 환경을 통한 표징입니다. 우리가 생각지 못한 일을 겪을 때, 그리고 뜻밖의 사람을 만나며 대화를 나누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실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간절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할 때 이런 표징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이런 표징들이 중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전에 신중하게 그 뜻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 담대함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삿 6:25-2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산성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한 마디로 말하면, 우상제단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는 이 일은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일입니다. 만일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버릴 경우, 마을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을 따르기로 합니다. 밤에 종 열 사람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순종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마을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기드온의 집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이 때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나섰습니다. 아들을 변호했고, 마을사람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이 일로 기드온은 죽음을 무릎 쓰고 우상들을 척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을 “여룹바알” 즉 바알과 다툰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됐습니다. 그 후 이 이름은 바로 영적 담대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삿 7장을 보면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우선 1절을 보면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영적 담대함의 사람 기드온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전쟁은 담대함의 승리가 될 것을 암시하고 있는 말입니다.
실제로 이 전쟁은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됩니다. 우선 병력면에서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미디안의 병력은 13만 5천명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병력은 고작 300명입니다. 450대 1의 전쟁입니다. 다음으로 병장비면에서도 말이 안 됩니다. 미디안 군사들은 당시 막강한 전투장비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사들은 전투 장비를 갖지 않고, 항아리와 횃불, 그리고 나팔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지휘관인 기드온과 300명의 병사들은 두려웠을 것입니다.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미디안을 자기 손에 넘겨주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영적 담대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적 담대함으로 결국 미디안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적 사건에서는 양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질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수나 장비의 성능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믿음과 담대함이 중요합니다. 환경과 상황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적 담대함이 중요합니다.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를 영적으로 개혁한 종교개혁자였습니다. 일생동안 수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1년 7개월 동안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여왕 메리 1세에게 극심한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영적 담대함으로 마침내 자기의 조국을 믿음으로 지켜냈고,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습니다.
낙스에 대한 사람들의 평이 전해집니다. 낙스를 박해했던 영국 여왕 메리 1세의 말입니다. “존 낙스의 기도는 100만 명의 군대보다 더 두렵다.” 그리고 존 낙스가 세상을 떠난 후 장례식에서 당시 스코틀랜드의 섭정이었던 모튼이 한 말입니다. “여기에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한 사람 낙스가 누워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영적 담대함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여룹바알이라 불리던 기드온처럼,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한 사람이라고 불리던 낙스처럼 영적 담대함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영적 담대함을 가지고 계십니까? 무엇인가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 어떤 상황도, 심지어 사탄 마귀까지도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 해이
이렇게 위대한 신앙의 용사 기드온에게도 없었으면 좋았을 실수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소위 ‘에봇사건’으로 불리는 실수입니다.
삿 8:24 이하를 보면 기드온이 금으로 에봇을 만듭니다. 에봇은 대제사장이 가슴에 받쳐 입던 옷입니다. 출 28:6을 보면 이 에봇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무려 1700세겔, 오늘의 무게로 환산해 보면 5200돈, 20Kg이나 되는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도대체 기드온은 왜 금으로 에봇을 만들었을까요? 분명히 사람이 입자고 만든 것은 아닙니다. 구약을 연구한 학자들은 고대시대에 우상을 섬기는 한 방법으로 가정이나 마을에 신상을 만들고 그 위에 에봇을 입혀서 섬기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드온은 이 에봇을 신상을 만들어 입히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기드온은 하나님을 섬기는 한 방법으로 상징적으로 에봇을 만들어 마을에 보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이 에봇을 마치 우상처럼 받들기 시작했습니다. 삿 8:27을 보면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 백성은 물론이고 기드온의 가문까지도 이 금 에봇을 우상처럼 받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드온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시내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이 여호와라고 섬겼던 것처럼 이 에봇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기드온은 또 다른 실수도 저질렀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을 물리친 뒤 왕에게 버금가는 자리에 올라 무려 40년을 사사로 이스라엘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면서 안타깝게도 기드온은 자기 집안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삿 8:30-31을 보면, 아내를 많이 두었고 그 아내들을 통해 낳은 아들만 70명이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겜이라는 곳에 첩도 두었고 그 첩을 통해 아비멜렉이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죽은 뒤에 이 아비멜렉이 배다른 자기 형제들을 죽이고 세겜에서 왕이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세겜에서 왕 노릇하며 악행을 저질러서 결국 세겜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해 죽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드온은 오랜 세월 사사로 왕처럼 이스라엘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가정을 잘 돌보지 못했습니다. 아내를 여럿 두었고 첩까지 두었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을 믿음으로 양육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기드온이 죽은 뒤에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고, 이스라엘도 다시 우상숭배의 길로 돌아서게 됐습니다.
왜 기드온이 이런 실수를 저질렀을까요? 위대한 용사요 여룹바알이라 불리던 기드온이 왜 이렇게 끝이 좋지 않을까요? 바로 그가 승리의 자리에 오른 뒤에 영적으로 해이해졌기 때문입니다.
원래 기드온은 돌다리도 두드려 가며 건너는 식으로 영적인 신중함을 보였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승리의 자리에 오른 뒤 그 신중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에봇을 만들 때 하나님의 뜻인지를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얻을 때 역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 해이해졌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우리 사회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소위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입니다. 공기업에 공적자금이 수십조 투입돼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복지자금이 밑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술술 새나갑니다. 힘 있는 위치에서 성적인 문제를 저지릅니다. 다 그 양심에 도덕적 해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 해이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해이(Spiritual hazard)입니다. 원래 늘 기도하던 사람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순종하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 평안한 삶을 살게 됐습니다. 점점 영적으로 해이해져갑니다.
최근 사학자 이만열 교수는 요즘 한국 기독교의 모습이 고려말기의 타락한 불교나 이조 말기 나라를 망하게 한 유교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돈과 명예와 성적으로 지탄받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터와 세상 속에서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손가락질 받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 영적인 해이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다시 영적인 허리띠를 졸라매야하겠습니다. 더욱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그 말씀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받은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서원했던 것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영적 해이에 빠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기드온을 반면교사 삼아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기드온에게 본받을 점
삿 6장 19~24절 / 박봉수목사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근대 정신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이분은 사람에게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밝혀냈고, 정신분석이라는 창의적인 방법으로 그 무의식의 세계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임상적으로도 수많은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의 문제를 찾아주었고, 그 문제를 해결할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심장 고동이 불규칙해서 병원을 찾았더니 의사가 당장 흡연을 중단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는 잠시 중단했지만 담배를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턱뼈 암으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고 마침내 아래턱을 완전히 드러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도 계속되는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끊지 못해 그렇게 담배와의 싸움에서 참담하게 패한 채 인생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은 전쟁입니다. 자신과의 싸움, 죄와의 싸움, 적과의 싸움, 원수 마귀와의 싸움... 끝없는 전쟁의 연속입니다. 이런 전쟁에서 승리해야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이런 전쟁을 치러낼 힘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전쟁의 본질을 알고, 적을 알고, 이길 수 있는 길을 안다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프로이드처럼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알아도 능력이 없으면 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문제에 대해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 모든 전쟁에서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하는 그 놀라운 능력이 우리를 승리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인생길에서 만나게 되는 그 많은 전쟁을 다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주시면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그것도 넉넉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문제의 본질이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느냐?”가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느냐?”가 문제의 본질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 인생의 문제와 씨름해서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의 힘으로만 우리 인생의 문제와 싸워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기드온은 우리에게 주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는 비결을 알려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인생의 문제와 싸워 승리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살고 있을 때, 미디안 족속이 쳐들어와서 7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때로는 아말렉 족속과 동방 사람까지 합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했습니다. 토지 소산을 멸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양식을 남겨두지 않았고,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을 피해서 산으로 가서 굴과 산성을 만들어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저들이 쳐들어올 때 그 수가 너무 많아서 “메뚜기 떼”같이 쳐들어왔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선지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저들이 미디안에게 시달림을 받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큰 용사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셔서 미디안을 물리치게 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기드온은 원래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큰 용사로 이스라엘을 이끌고 국가적 전쟁을 수행할 만한 영웅도 장수도 아니었습니다.
6:11을 보면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이 두려워서 몰래 숨어서 밀농사를 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밀 타작을 포도주 틀 속에 숨어서 할 수 밖에 없었던 소심하고 평범했던 농사꾼이었습니다.
6:15을 보면 기드온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이렇게 답했습니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자기는 감히 다른 사람들 앞에 서서 지도자로 일 할 그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드온은 정말 평범한 인물이었습니다. 소심하고 겁이 많던 사람이었습니다. 지도자의 꿈도 꾸어본 일이 없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큰 용사가 되어 대 사사로서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게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6:12을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6:16을 보면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힘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큰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힘주시면 그 무지막지한 수많은 미디안 군사들도 한 사람 상대하듯 쉽게 싸워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드온이 하나님께 계속해서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었던 비결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비결을 본 받아야 하겠습니다.
여호와 샬롬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가 전해 준 하나님의 언약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표징을 구했습니다.
먼저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무교 전병과 고기 담은 소쿠리와 국을 담은 양푼을 준비해서 여호와의 사자에게 가져왔습니다. 그 때 여호와의 사자가 고기와 전병을 바위 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고 명했습니다. 그대로 하고 지팡이로 그 위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솟아나 그 전병과 고기를 태웠습니다. 표징을 본 것입니다.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한 것이 너무 두려워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셨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24절을 보면 기드온이 거기에 여호와께 단을 쌓고 그 제단을 “여호와 샬롬”이라 불렀습니다.
기드온은 이 사건을 통해서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전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됐습니다.
우선 기드온은 당시 다른 여느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됐습니다. 여기 기드온이 “여호와 샬롬”이라고 이름 붙인 제단을 쌓은 곳 상수리나무 아래는 저들이 우상을 섬기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이 드리는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제 기드온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샬롬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가 쓴 [은혜의 전부]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목사님이 가난한 부인의 딱한 소식을 듣고 얼마의 돈을 마련해서 찾아갔습니다. 그 부인 집 문을 두드렸을 때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몇 차례 다시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답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 목사님은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온 그 부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난 금요일 댁을 방문했는데 계시지 않더군요. 어디 다녀오셨나 보죠?” 부인이 물었습니다. “몇 시에 오셨었는데요?” “아마 정오 쯤일 겁니다.” “그 때 집에 있었는데 집 주인이 세를 받으러 온 줄 알고 일부러 인기척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를 받으러 오시지 않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려고 오십니다. 우리가 그 분을 담대하게 맞아들이면 우리는 그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아오셔도 피하여 숨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참 좋은 관계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모든 선물을 남김 없이 받아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후 동산 나무 밑에 숨게 된 뒤에 더 이상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그 관계를 잘 지켜 가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항상 하나님의 그 놀라운 능력을 선물로 받고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룹바알
이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종 열과 함께 밤중에 바알 제단을 무너뜨렸고, 아세라 상을 찍어버렸습니다. 아침에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주범이 기드온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기드온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 때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지혜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기드온이 바알 신상을 무너뜨렸으니 바알이 직접 기드온과 맞서게 하자는 것입니다. 바알이 참 신이면 바알이 직접 그 제단을 무너뜨린 사람에게 저주를 내릴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에게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룹바알입니다.
여룹바알이란 글자 그대로 하면 “바알로 하여금 맞서게 하자”라는 뜻입니다. 기드온이 바알의 제단을 부수며 바알을 상대로 싸움을 걸었으니 당연히 바알이 기드온을 상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맞선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바알의 저주가 내려서 농사를 망치게 되고 심할 경우 죽게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에 바알에게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알을 미워했고, 바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바알과 맞섰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바알과 싸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과 달리 바알은 침묵할 따름이었습니다. 기드온에 의해서 자기 제단이 무너지고 기드온에 의해 바알 종교가 훼파되는데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이 참 신이 아님을 깨닫게 됐습니다. 모두가 바알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기드온은 여룹바알로 더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삼상 12:11을 보면 사무엘은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후손들이 기드온의 여룹바알의 신앙 때문에 그 땅에 바알 제단이 무너지게 된 것을 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주에는 독특한 풍습이 많은데 그 중에 하나가 신구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구간이란 대한 후 5일에서 입춘 전 3일 간을 가리킵니다. 바로 지금이 신구간 기간입니다. 이 신구간은 신구세관이 교체하는 과도기라서 모든 신들이 하늘에 올라가 버려 이 땅에는 귀신이 없는 기간이라고 믿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옥황상제의 임명을 받아 내려왔던 신들은 임기가 끝나 하늘로 올라가고 새로 임명 받은 신은 아직 착임하지 않은 이른바 신간과 구간이 교체되는 공백 기간인 셈입니다.
바로 이 기간에 이사를 하거나 집을 고쳐도 아무런 탈이 없지만 평상시 이런 일을 했다가는 동티가 나고 액운을 면치 못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제주도에는 이사하느라 정신이 없답니다. 이사 비용도 평소보다 훨씬 비싸고 전세 계약 기간도 아예 이 신구간에서 다음 신구간까지 정해 놓았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영적으로 무지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이런 일을 자행합니다. 귀신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조심합니다. 이사를 하면 귀신에게 고사를 지내고, 집을 지을 때도 고사를 지냅니다. 심지어 영화를 새로 찍을 때도 고사를 지내고 야구 시즌을 개막하면서도 고사를 지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신을 두려워 그 앞에 제사를 지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룹바알 신앙은 바로 이런 것을 과감하게 떨쳐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풍습을 없애고 이런 미신을 타파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호와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그 능력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300 용사
드디어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미디안이 아말렉과 동방의 여러 족속과 연합하여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쳤습니다. 이 때 모인 군사 수가 무려 135000명 정도입니다.
기드온이 연통을 돌려 모은 이스라엘 군사의 수는 32000 정도입니다. 이것만해도 1/4 밖에 안 되는 어림없는 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수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돌려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은 수가 300명입니다. 이제 300명의 군사가 135000과 전쟁을 치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저들이 한 밤중에 기습 공격을 감행합니다. 한 손에 횃불을 항아리 속에 담아 들고, 다른 손에 나팔을 들고 적 진 깊숙이 침입했습니다. 갑자기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고 횃불을 밝히니 적들이 자다가 놀라 나오며 서로 싸웠는데 이 때 자중지란으로 12만 명이 죽었고 15000이 도망쳤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입니다. 300명이 135000과 전쟁하겠다고 나선 것 이것은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무기도 없이 나팔과 횃불만 들고 적진 깊숙이 침입해 들어가는 것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마치 골리앗 앞에 물맷돌 5개를 들고 선 다윗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 믿음이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옵니다.
사실 300명 군사는 전쟁 중에 한 일이 없습니다. 자기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뿐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 뒤쫓아 오던 바로의 군사가 물속에 수장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던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입니다. 저 기드온 300명 용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내 인생의 문제 속으로 끌어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인생의 전쟁 속에 오셔서 싸우십니다. 우리는 그저 지켜보고만 있으면 됩니다.
기드온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여호와 샬롬의 교훈, 여룹바알의 교훈, 300명 용사의 교훈입니다. 우리가 이 교훈을 본받으면 우리 역시 큰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여호와 샬롬
삿 6장 19~24절 / 박덕기목사
퇴임을 10여일 앞둔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송금문제로 지난 14일 드디어 대국민 사과를 하였습니다. 김대통령은 우리나라에서 전쟁을 막고 국익과 평화를 위해서 한 통치행위이니 너그럽게 양해해달라는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한나라 당은 두 번째 국민을 속인 거짓말이라며 여당 단독으로라도 특검제를 통과시켜 파헤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어서, 이로 인한 여야간의 정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 같습니다. 그런가하면 미국은 작년 한 해 동안 계속해서 이라크에 대한 전쟁을 경고해오더니, 이제 그 공격의 시기가 임박했다고 떠들어 댑니다. 세상은 이렇듯 항상 전쟁 아니면 전쟁의 위협속에서 불안하기만 합니다.
싸움과 전쟁은 국가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탤런트 이경실 양은 남편의 구타로 갈비뼈가 몇 개씩이나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이혼을 하겠다는 발표를 해서 사람들의 화제 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가정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주님없는 세상 고통과 죄악뿐 사람들은 무서워 떠네. 주님없는 세상 평화없네♪ 그렇습니다! 주님 없는 세상은 평화가 없습니다. 죄와 전쟁은 끝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온 인류가 애타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평화일 것입니다. 이렇듯 싸움과 죄악이 참혹한 땅에서 오늘은 하나님의 이름 중 ‘여호와 샬롬’ 곧 ‘평강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뜻을 상고해 보며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삿 6:1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7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에 의해 이스라엘의 사사로 부름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로 인해 미디안 사람들의 침략을 받아 노예가 되다시피 하였습니다. 이처럼 죄악이 있는 곳에 평안이 없습니다. 사 57:20-21에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은 파종할 때나 추수할 때마다 침략하여 식량을 약탈했으며, 가축들도 노략질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끊임없는 전쟁과 약탈로 이스라엘은 이제 어느 곳에서도 평강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비참한 상황을 감찰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기드온을 사사로 세워 미디안을 쫓아내어,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자를 기드온에게 보내어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자기 앞에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가 정말 하나님이 보내셨는지, 그리고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는 그의 말이 사실인지 의심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에게 표징을 구했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의 요구대로 그에게 표징을 보여주게 됩니다.
본문 19-21에“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서,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전병을 가져 이 반석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고 했습니다.
여기 ‘여호와의 사자’란 세상에 오시기 전 구약 시대에 활동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보여 준 표징을 봄으로써 기드온은 비로소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구원하여 평강을 주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 자신은 여호와의 사자, 곧 하나님을 대면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몹시 불안해졌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피조물인 태양도 바로 볼 수 없다고 했지요? 하물며 죄악된 인간이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도 환상중에 하나님을 본 후 떨면서 말하기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 곧 하나님을 대면하고 난 기드온은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22절에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고 하면서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드온에게 죽음 대신 평강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며, 자신에게 평강을 베푸셨음을 알게 된 기드온은, 표징을 위해 제물로 올려놓았던 그 반석 위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샬롬’ 즉 ‘여호와는 평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같은 하나님의 평강에 대해서 좀더 살펴보도록 하시겠습니다.
1. 평강의 본질
빌 4:6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평강의 본질은 곧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60억이 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평화입니다.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려는 사람도 돈 많이 벌어 평안하게 살려고 해서입니다. 권력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사람도 권력을 차지해서 평안하게 살아보려 해서입니다. 머리를 싸매고 잠을 설치며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도 좋은 학교에 다니고 좋은 직장 취직해서 안정되게 평안히 살아보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원하는 대로 많이 벌면 평안하게 삽니까? 소원하던 권력을 손에 쥐고 세상을 흔들면 평안합니까? 공부 많이 해서 학위 얻고 안정된 직장을 얻으면 평안합니까? 다 누려보고 얻어 보아도 바라는 평안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 세계의 비극입니다. 평안을 원하나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기 말씀대로 하면 세상이 주는 평안이 있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평안을 줄 것 같은데 실상 평안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참 평안이 아닙니다. 돈만 많으면 평안할 것 같지요? 그런데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불안합니다.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더 불안하게 된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조르고 언제 누가 자기를 헤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을수록 불안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대통령이 최고의 권력자인데 대통령의 자리가 평안한 줄 아십니까? 옛날 중국의 북경 자금성에 가보면 왕의 침실이 있는데 한 방에 동과 서로 침대가 둘 있다고 합니다. 궁중에서도 왕이 어느 침대에서 잠을 자는지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는 소위 안가(安家)라는 곳이 몇 채 있었습니다. 그래서 회의를 할 때 이 안가, 저 안가 이동해 가면서 회의를 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청와대 안은 평안합니까? 누가 지금 김대통령을 향하여 평안하다고 하겠습니까? 권력에 평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고 세계를 지배하려다 워털루 전투에서 패전한 뒤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돼 있을 때의 일입니다. 지난 날 그는 세계를 제패했던 영웅이었지만, 이제는 죄인의 몸이 됐기에 좀처럼 남들에게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기자가 어렵사리 그를 인터뷰하게 되었습니다.“지난날을 회상할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나폴레옹은 백발을 날리며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눈물을 흘렸습니다.“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였지. 잠시 전투가 그친 어느 주일 아침이었는데, 산 아래 조그만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려왔지. 그 소리에 이끌려 교회로 들어갔다네. 나는 그때 눈물을 흘리며 인생 최고의 행복을 맛보았다네” 천하의 나폴레옹도 하나님의 집에서 안식을 찾았습니다. 탕자같이 방황했던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 첫 페이지에서 ‘하나님, 당신은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으므로 우리가 당신 품안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참된 안식이 없었나이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하나님 품안에 돌아와야만 진정한 하나님의 평안을 맛볼 수 있습니다.
2. 평강의 기초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입니다. 골 1:20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오는 근원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오는 죽음과 그 이후의 심판에 대한 공포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는 인간은 결코 근원적인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을 제거하시고,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즉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회복하고 그로 인해 죽음과 심판의 공포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근원적인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불안정한 평안과는 질적으로 달리하는, 다시 말해서 그 어떤 고난이나 문제도 흔들 수 없는 안전하고도 영원한 평안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만사가 순조로울 때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즉 아무런 문제나 고민거리가 없고 장애가 없을 때 평안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안은 진정한 평안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만사는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며 변화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이러한 평안을 깨는 문제거리들이 튀어나올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평안은 참으로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은 위태롭고도 불안한 평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진정한 평안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어떠한 평안입니까? 그것은 모든 환경을 초월해서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초대 교부 크리소스톰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라는 로마 황제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황제의 령을 듣지 않아 체포되었습니다. “그놈을 독방에 처넣어라” “아니 되옵니다. 기독교인들은 독방을 더 좋아 합니다” “왜 그런고?” “조용한 기도실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잔인무도한 악당들이 있는 곳에 집어넣어라” “그것은 더욱더 아니 되옵니다. 악당들을 전도하여 기독교인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끌어내어 목을 쳐라” “폐하! 그건 더 아니 되옵니다” “왜 그것도 안 된단 말이냐?” “기독교인들은 순교를 최상의 영광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도 헛일이옵니다. 그들은 순교할 때 울지도 않사옵니다. 오히려 얼굴에서 광채가 납니다” “그러면 그놈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강은, 어떤 환경가운데서도 하늘의 태양처럼 흔들리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은 모든 환경을 초월할 수 있는 참된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3. 평화의 종류
1)하나님과의 평화
십자가의 구속을 믿으므로 전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그 진노와 정죄의 대상이던 내가, 이제 하나님으로 더불어 누리는 평화, 이것이 가장 원천적인 평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진노하시고, 형벌하시고, 죽게 하심으로,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화해하사, 사랑의 관계를 회복해 주시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2)마음의 평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한 사람에게는 내적인 깊은 마음의 평안을 주십니다. 이 평안은 예수의 평안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인즉, 절대적인 것이어서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 없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인 것입니다. 이 평화는 노한 파도가 부딪혀 깨지고, 천둥이 치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의 절벽 위, 어미 새의 날개 속에 있는 새끼 새의 평안같은 것입니다.
3)이웃과의 평화
이렇게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하고, 내적으로 깊은 하나님의 평안을 소유한 사람은, 그 속에 내란이 끝나고 전쟁이 그쳤으므로, 모든 이웃과 더불어 화평하게 됩니다. 싸움이 있는 곳에 화평을 심는 사람들이 됩니다.
4)영원한 평화
이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 왕국, 영원 왕국에서, 사자가 풀을 먹고, 어린 아기가 독사와 장난을 하는 우주적 평화 시대의 시민으로 참여하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영국의 시인 오던은 현대를 가리켜 ‘불안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과연 우리는 오늘날 다른 어느 시대보다 더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는 에너지 문제, 자원 고갈, 문제, 공해 문제, 식량 문제, 자살 폭탄 테러, 핵전쟁의 위협 등으로 불안합니다. 국내적으로는 북한의 핵문제, 끊임없는 여야 정당의 정쟁, 경제 문제, 청소년들의 문란한 성도덕, 가정의 파괴와 이혼 문제 등으로 불안감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환각제나 수면제 등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급증하는 것을 보아서도, 이 시대가 얼마나 불안한 시대인가 단적으로 증명이 되고도 남습니다. 이렇게 불안과 혼란이 팽배해 있는 이 시대에, 사람들 모두가 크게 갈망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평강일 것입니다.
어떤 책을 보니까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 하나를 키우는 부부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원인 모르는 병으로 죽었습니다. 먹구름이 그 가정을 덮은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린 딸이 엄마를 땅에 묻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현관에서부터 시작하여 방, 부엌, 응접실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데, 두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어두운 밤이 되었습니다. 아빠가 딸을 침대에 눕히고 기도해 주면서 편히 자라고 하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얼마 후 딸의 방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빠가 가 보았더니 “아빠! 무서워요, 어두워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빠가 딸에게 타이릅니다. “아무리 어둡고 무서워도 아빠가 있으니 무서워 말고 조용히 자거라” 그런데 어린 딸이 눈을 감고 한참 있더니 “아빠! 아무리 어두워도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라고 하며 안심하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때 그 한 마디에 딸과 함께 상심했던 이 아빠는 새 빛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딸의 입술을 통해서 나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신 것 감사합니다. 나의 주변이 아무리 어두워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므로 실망치 않습니다. 비록 우리의 가정에 먹구름이 덮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이 느껴지지만, 내가 딸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고 힘을 얻습니다. 평안을 얻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할 때 그의 마음에 있던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는 것을 그는 느꼈습니다. 그를 사랑하시는 면에서 만세반석이 되고,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믿을 그 때에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 찾아온 것입니다.
‘여호와 샬롬’ 곧 하나님의 평강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사랑하는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