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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유명한 분이라고 하던데
기억이 안 나네요.
여하튼 다른 카페에서 퍼왔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의 성향이 여러분과 다르다고 딴지 걸지는 맙시다.
[ 한민족 10 대 위인 ]
우리 한민족의 지난 1만년 역사중, 주신나라 이후, 5011년 역사에 있어서 "10 대 지도자"를 보자면 다음과 같다.
단(단군),광개토(호태왕=칸),연개소문, 조영(대조영), 태무진(칭기스칸),최영,김누얼(누루하치=청태조)세종,김XX,(문xx)이XX(박xx)등이다.
여러분들도 잘 보면 알겠지만 위 10대 위인 중, 우리하고는 별관계 없는 사람인듯, 왜곡이나 조작된 사람이 많다.
단군은 실재 지도자(홍익인간)였슴에도 소설속 주인공으로...
연개소문은 이성계와는 감히 비교할수없는 위인임에도 이보다 못한 나쁜놈으로...
태 무진은 우리와 같은 한(칸)민족임에도 전혀 다른 종족의 지도자로...
김 누얼 역시 "실사구시"란 고려의 이념을 계승하여 중국을 정복했던 청태조이나
모두 철저하게 왜곡,조작하여 저 중에 지금 우리가 알고있는 사람은 세종밖에 없는 지경이다.
역사적 위인의 기준은, 당대 최고의 치세를 이룬 업적보다는 창의적 근본을 중시하는 법이다.
연개소문은 국운이 기울어 풍전등화같은 상황에서 대국 고구려를 지켜낸 지도자로써 후일, 그의 뜻을 이어받은 후손들이 마침내 중원회복의 위업들을 달성토록한 신화적 인물이다.
오늘, 위 10대 위인중, 왜곡이 심한 연개소문에 대한 사실을 알리고저 한다.
이 글을 읽지 않은 사람은
앞으로, 한민족이나 고구려 그리고 연개소문을 말하지 말라!
[한민족 10대 위인, 연개소문 편]
644년 11월, 중국왕(당나라) 이세민은, 중국역대의 숙원사업이었던 고구려 정벌을 선언하고 직접 50만 대군을 이끌고 대대적으로 장안을 출발하였다.
아들인 강하왕 도종을 앞세워 탁군을 출발한 중국군50만은 물밀듯이 요택(요하일대의 늪지대로써 약80km에 달함)을 넘어 이듬해 4월까지 고구려의 서쪽 성들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진군해 나갔다.
특히, 이전의 수나라 60만 대군의 공격을 묶어놓아 을지문덕 장군이 대승을 거둘 수 있도록 만들었던 난공불락의 요동성을 단 2일만에 함락하면서 이번에는 고구려를 반드시 점령할수 있을것으로 확신하였다.
645년 6월,당군 50만은 안시성으로 밀려왔고 성안에는 만5천의 병력과 2만의 주민이 있었다. 이 성의 왕은 연개소문에 의해 새로 임명된 양만춘이었다. 당시를 잘 표현한 글이있는데 다음과 같다."당군이 구름처럼 밀려와 성을 포위했는데 성을 포위한 사람들의 끝이 보이질않았다." -청연사(안시)-
당군은 성을 포위한 뒤 운제(구름사다리, 수레위에망루를 세워 성벽높이에서 성을 공격하며 돌진하여 성벽에 이르면 사다리를 놓아 군사를 침투시키는 무기),당차(아름드리 통나무를 수레에 장착하여 성문에 충돌 파괴하는 공성무기),충차(발석거라고도 함, 큰 돌을 쏘아대서 성벽을 무너뜨리거나 파괴하는 무기)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4일동안 밤낮없이 공격했지만 왕과 성민들은 조금도 흔들림없이 완강하게 방어했다.
이에 지친 이세민은 부복애장군의 작전계획을 받아들여 아들 강하왕 도종에게 안시성보다 높은 흙산을 쌓게 하여 고구려군을 공격한 후,흙산의 왼쪽을 무너뜨려 안시성성벽을 파괴하고 성으로 진입,점령토록 하였다.
20만명에게 작은 포대두개씩을 주어 흙을 담게한후 번갈아가면서 쌓도록 하였다.순식간에 안시성에 버금가는 높은 흙산이 완성되었고 당군이 흙산위로 올라갔는데 안시성으로부터 불화살,돌등이 소나기처럼 날아와 도저히 작전을 수행할수 없게된 부복애는 원래의 계획대로 흙산의 왼쪽을 무너뜨려 안시성벽을 부숴버렸다.
그러나 이를 미리 간파하고 있던 양만춘은 흙산에 의해 성벽이 무너지자 미리 대기중인 강력한 철기군을 선제투입하여 도리어 흙산을 점령하고 맹렬하게 공격하여 이로인해 죽은 당군의 수가 1만에 이르렀다. 더구나 도리어 양만춘에게 성하나를 더지어준꼴이 되고만 흙산작전의 결과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이세민은 흙산전투작전을 제안한 부복애를 참살하고
다음날부터,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3일 낮과 밤을 안시성과 흙산을 동시에 공격하였으나 변함없이 강력한 고려군의 방어력에 도리어 기진맥진한 상태로 아침을 맞게 되었는데
이때 갑자기 성밖으로 돌격나온 양만춘의 전차대와 철기군의 공격을 정면에서 받게되었다.
(철기군이란 고구려의 최첨단 기병으로써 말과 사람을 뱀의 비늘과같은 앏은철로 둘러싸 적의 창이나 검, 화살이 튕겨져 나가도록함으로서 당시로써는 제압할 방법이 없던 중무장 기병인데 5기를 1조로하여, 8조 40기가 1대로 편성되어 보통 8대씩 작전에 선제(선봉,돌격)투입되었는데 종횡무진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전차대란 2~4마리의 말이 끄는 2~4인용 특수수레로써 역시 철기군제로 편성되어 작전을 수행한 지금의 탱크와같은 신병기였다.)
양만춘에 표적이되어 도망치던 이세민은 양만춘의 부름에 뒤돌아 보다가 활이 명수인 양만춘으로부터 오른쪽 눈을 정통으로 맞아 말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다리마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간신히 아들의 도움을 받아 사지를 벗어났으나 당군은 지리멸렬하였고 이세민이 이러한 중상을 입어 더이상 움직이 못하게되자 강하왕 도종은 아버지 이세민을 대신하여 전군에게 안시성20리 밖으로 멀찌감치 후퇴하도록 명령을 내리는 한편, 본국에 파발말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세민을 사로 잡아라 !"
안시성의 양만춘으로부터 이러한 전황을 즉시 보고받은 연개소문은 묘도(발해만 묘오타이 제도)에 대기시켜놓고 있던 고구려수군 2만에게 진황도를 거쳐 어양(지금의 북경지역)으로 상륙하여 당군의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군의주력군을 섬멸한후,바로 중국의 서울인 장안을 정복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일단, 대세가 기울어지자 이세민의 아들 도종은 이세민을 대신하여 전의를 잃고 두려움에 허둥대는 패잔병력을 이끌고 요택으로 후퇴할수밖에 없었으므로 요택에서 구원군과 재결합하는 방안을 선택하였다.때는 어느덧 일년이 지나고 음력 9월이라 요서의 날씨는 추웠다.
후퇴하는 당의 주력군은 고구려군의 집요한추격으로 인해 상당한 손실을 입으면서도 어렵게 요택의 늪지대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에서 연개소문의 명령을 받고 미리 도착해있던 고구려수군과 맞닥트렸다. 앞으로는 고구려수군, 뒤로는 추격군의 양면 공격을 받은 당군 상당부분이 이곳에서 섬멸되었는데 이때 죽거나 사로잡힌 당군의 수가 10만을 넘었다.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기록이있는데 다음과 같다.
"출발할때 50만 군대는 다 어디로 가버리고 이세민은 아들 도종과 50여명의 호종병만 남아 한 밤중에 도망쳤다. 한쪽 눈을 잃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부러진 다리에는 임시로 각목을대어 묶었는데 고름이 차올라도 붕대를 바꿀 수 없었다. 이세민을 사로잡으려는 고구려군의 횃불이 요택늪지대를 대낮처럼 밝히고 있어 다리를 쓰지 못하는 이세민은 늪 가의 갈대를 양손으로 움켜지고 낮은자세로 살며시 헤치며 간신히 늪지대를 빠져나와 정말 기적처럼 구사일생으로 포위망을 벗어났다.
도종은 이과정에서 변변한 치료를 받을수없었던 아버지 이세민을 살리기 위해 상처에 난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며 만리장성 입구인 우북평으로 멀리 달아나는데 성공했다." - 당서 이세민 기록-
이정의 구원군과 패주하는 이세민의보병부대가 어양일대에서 극적으로 합류하였다. 그러나 양만춘, 박명기가 지휘하는추격 철기 전차대와 고려기병, 그리고 고구려수군은 온통 어양 일대를 뽀얀 먼지로 뒤덮으며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중국군은 고구려군과 맞서 싸우기보다는 이세민 구원을 위한 퇴로를 여는것이 목적이었던바, 고구려군을 보면 북과 함성만 요란하게 올림으로써 이세민과 도종의 퇴로를 확보하는 작전에 주력하였다. 이틈에 도망친 이세민이 장안으로 무사히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자 이정은 즉시 전군을 어양으로부터 철수시켰다.
연개소문은 이때 접수한 어양 일대에 24개의 고려성과 진지를 쌓아 공격전선을 구축하는 한편,요동에서 어양까지 병참수송로를 닦아 군량미를 확충하는등 장안성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647년 겨울이오자, 연개소문은 장안성에 대하여 최후의 공격을 시작하였다.(고구려군은 전통적으로 전원이 기병으로써 기동성을 중시하여 보통 겨울에 공격함: 돌궐의 몽고군은 후일, 한겨울에 모스크바를 정복하여 500년동안 통치함:러시아도 고조선영역이었슴)
3일 밤낮을 가리지않고 맹렬하게 장안성을 공격하던 4일째의 밤, 위험을 무릎쓰고 진두지휘하던 연개소문이 적의 저격병의 독화살에 피격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갑옷을 입었으나 근접사격한 때문에 맹독화살이 왼쪽 어깨를 관통하였다. 저격수는 현장에서 경호대에 의해 주살되었으나 연개소문은 곧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고구려군의 장안성 공격은 일시중지되었다.
이후에 연개소문의 병세는 더욱 위중해져 칸의 명령으로 평양성으로 후송되었고 어양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군 5만은 6개월째 모두 철수하였다.
이때 철군하는 고구려군을 보며 세민은 "추격하지 마라! 이제, 두다리를 뻗고 한숨 푹 자도록 하자!"라고 하였다.-연사- 이세민은 안시성에서 다친 후유증으로 4년 뒤인 649년 52살에 숨을 거두었는데 이세민은 숨을 거두기전 넷째아들 治(당 고종)를 불러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고구려와 절대로 싸우지 말아라! 네가 아비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사직을 지키기 어려울것이다"
(이세민은 644 맏아들 승건태자를 반란죄로 죽였다.)
[사수대첩] 과 [불멸의 연개소문]
649년, 고구려 원정에서 대패한 당의 내정은 여러움이 많았다. 한편 고구려도 영류왕의 실정으로 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비록 이기기는 하였으나 당을 정복하지 못했고 많은 재정을 소진했다. 게다가 장안의 공격과정에서 연개소문은 중병을 입어 철군함으로써 불안한 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로부터 5년후인 654년,백제의 공격을 받던 신라는 김춘추와 아들 법민을 당에 파견하여 향후, 양국이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 정복을 하기로 합의하였고. 그로부터 1년후 655년 신라의 새로운 왕이 된 김춘추는 당의 새로운 권력자가 된 측천무후와 백제를 먼저 공격하기로 전술을 바꾸었다.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는 방법보다는 많은 뇌물을 써 고구려 내분을 유도하고 주변국과 협공하여 고구려를 정복한다는 소위 '우회협공' 전략이었다.
6년 후인 660년 여름, 측천무후는 소정방, 유인궤, 설인귀 등에게 20만의 병력을 주어 신라군과 연합하여 기습적으로 백제를 공격토록 하였는바, 불시에 대군의 공격을 받은 백제의 의자왕은 사로잡힘으로써 멸망했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와 저번(왜=저팬)에게 구원군을 요청하였으나 고구려는 당시 연개소문이 병중에 있어 보고하지 않았는데, 이때 연개소문은 장안성 공격때 독화살에 저격된 원인으로 중병상태에 있었다. 오늘날 일본인 저번군은 백제성이 함락된 뒤에 도착하여 3일간 전투를 치르다가 돌아갔다고 일본서에 전해진다.
660년 10월, 당군 20만은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패수를 거슬러 올라가 기습적으로 평양성을 포위하여 공격했다. 그러나 고구려군과 백제군은 달랐다. 일주일을 밤낮을가리지않고 공격했으나 성은 도저히 함락될것같지 않았고 660년 12월부터는 큰 눈이 내려 소정방군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되었다, 기진맥진한 당군 소정방의20만군은 살수대첩때 전멸했던 악몽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다급해진 소정방은 이러한 처지를 본국과 동맹국인 신라에 파발말을 보내 급히 지원군을 보내줄것을 요청하였다.
당나라의 황제였던 측천무후는, 이번에야 말로 고구려를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으로, 별동대 20만을 새로 편성하여 자신의 오른팔인 좌효위대장군 방효태에게 주고 "반드시 고구려를 정복토록 하라"고 명 하였는바, 방효태는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한다면 모두 자결하겠다"고 선언하고, 자신의 아들 13명 모두를 데리고 고구려를 향해 대대적으로 출발하였다.
신라역시 백전노장의 김유신에게 5만의 대병력을 주어 평양성으로 진격토록 명 하였다.
[풍전등화] 고구려는 이대로 멸망하는가 ?
당과 신라에 파견되어있던 밀정으로부터 이러한 소식은 속속 평양성으로 전해졌다. 고구려의 조야에는 멸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보장칸은 곧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했으나 참여한 30여명의 대신들중 말하는사람은 아무도없이 침묵만 계속 흘렀다.
암울한 영양황제로 인해 이미 국력이 기울어질대로 기울어버린 고구려는 이미 당나라에 비해 양국간의 국력차이나,병력차이가 너무 심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때였다...
병석에있어야 할 연개소문이 무장을 하고 어전회의에 들어왔다.
병색이 완연한 연개소문은 칸에게 절한후,천천히 말했다....
연개소문은 이 새로운 위기상황에 대하여 작전의 포커스를 지원군인 방효태의 별동대20만에게 맞추었다.
"지금 평양성에 와있는 소정방군은 이미 사기를 잃어 이빨빠진 호랑이 상태이고, 노련한 김유신의 5만지원군은 전선의 상황을 보아 전투에 임할것이므로, 문제는 새로 편성되어 투입되는 방효태의 별동대 20만으로써, 욕망이 높은 방효태는 소정방군과 연합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평양성을 공격,점령하려 할 것이며, 그러기위해서는 가급적 빨리 평양성 동쪽에 도달하기 위해 진로를 패수의 상류인 "사수"로 잡고 통과할 것이다...." 연개소문의 판단은 정확했다.
신라군은 서라벌을 서둘러출발하기는 했으나 도성을 벗어나자 곧 천천히 행군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연개소문은 아들 남생과 남산에게 각 기병 오천기씩을 주어 한밤중에 소정방군을 좌우에서 공격토록 하였다.
불시에 고구려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소정방군은 지리멸렬하여 많은 군수물품을 내버린채 평양성 서북쪽 20리밖으로 후퇴한후, 지원군인 방효태군 및 신라군을 기다리며, 혹시 또 있을지 모를 고구려군의 기습공격을 경계하는데에 여념이 없게 되었다.
연개소문은 한편, 구련성(지금의 북중국 러시아지방)의 고선나와 대진성(지금의 만주,연해주지방)의 연정토에게 파발말을 보내 각1만을 인솔하여 사수로 오도록 명하고, 중병중임에도 자신의 아들 모두를 데리고 1만의 정예군을 인솔하여 눈보라를 뚫고, 2일 동안 주야겸행으로 강행군하여 전략지인 패수 상류인 사수에 도착하여 고선나,연정토군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대형석거(바위나 큰돌을 쏘아 올리는 기계)를 대규모로 제작하여 사수강 양쪽 10여리에 거쳐 병사들과함께 위장 배치시켜놓고 방효태의 대군이 오기를 기다렸다.(사수는 강폭이 비교적 좁고, 때는 겨울이라 얼어있었다.)
"설마..."
설마..,소정방군에게 포위되어있는 평양성의 고구려군이.. 그것도 이렇게 빨리 사수에 도착해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방효태와 아들13명이 이끄는 별동대20만은 사수에 다다르자 얼어있는 강을 확인한후, 12열횡대(약10리에거쳐 12열의 횡대편제로 구보하는 군의 이동형태)를 갖추어 신속하게 도하하기 시작했다. 방효태군의 상당부분이 강위에 올라서자 연개소문의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한놈도 살려두지 말라!"
강 양쪽에서 고구려군의 대형 발석거로부터 커다란 돌들이 비오듯 강을 향해 퍼부어졌다. 바위돌들이 떨어지자 얼어붙은 강의 얼음이 굉음을 내면서 갈라졌고, 방효태군은 강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말그대로 생지옥이요, 아비규환이었다. 요행히 얼음물을 헤엄쳐 나온 당군은 대기해있던 고구려군에게 모조리 죽임을 당하였다.
" 본국에서 보낸 지원군 20만이 중간에서 없어졌다 "
공격개시 반나절 후...,지휘관인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 그리고 지원군 20만대군은 한명도 없이 모두 죽었다. 20만 지원군이 중간에서 증발하고 만 것이다. 연사에 당시의 현장 기록이 있다. " 당군의 시체가 얼음에 싸여 패수50여리를 뒤덮었다"
이 전투를 역사에서는 "사수대첩" 이라고 한다.
병법전문가들은 살수대첩보다 이 사수대첩을 더 높이 평가하는데 이유는 살수대첩 당시는 수양제가 113만 군을 동원할 정도로 고구려는 강대했고 안정되었으나 사수대첩당시 고구려는 국력이 절반정도로 줄어있었다. 당시 당이 고구려를 정복코저 동원한 군대는 처음 소정방의 20만이었다가 다시 지원군 방효태의 20만과 신라지원군 5만까지 합해도 20+20+4 = 45만 이었다.이와같이 당시 고구려의 국력은 상당히 약화된 상태로써 당과 1:1로 대적하기에는 역부족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이점는 이순신의 경우도 같다고 봄이 무방할것이다)
[꺼지는 동방의 등불, 고구려의 운명]
사수전투를 대승으로 끝낸 연개소문은 여기서 죽는데. 연개소문은 자신의 죽음을 비밀로할것을 명하고 당시 사수전투에 참여했던 구련성(거련=거란지역)의 왕(자사)인 아우 연정토와 대진성의 왕(자사) 고선나에게 "내 아들들이 부족하다면 그대들이 대막리지를 맡아서라도 대업을 이루기 바란다" 고 말하고 아들들을 불러 아버지로 모시는 절을 하게 한 후, 아들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은 서로 화합하여 나라와 황실에 충성을 다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너희대에 반드시 중국을 정복하도록 하라!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이 이 말을 잊고 중국인들의 이간질에 놀아나 서로 불신하게 된다면 너희들은 물론, 백두제국 고구려의 천년역사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내 말을 명심하라" 하고 말하고는 홀연히 숨을 거두었다. 당시 연개소문의 나이 아직 젊은 41세였다.
한편,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고 있던 소정방은 예정된 시간이 훨씬 지났슴에도 보이지도 않고 연락도 없는, 방효태군의 행방을 수소문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 사수에서 연개소문이 지휘하는 군대에 의해 방효태군 20만 전원이 한명도 없이 모두 죽었다"는... 도저히 믿을수없는 보고를 받았는 바, "앉아있는 상태에서 지휘봉을 떨어트리고 한동안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고 한다. -연사-
충격을 받은 소정방은 뒤늦게 도착한 신라군의 김유신을 만나자, 본국으로의 철수의사를 밝히고 김유신에게 퇴각에 필요한 최소한의 군수품을 요청하였는바, 이를 조달받자 즉시 철군하기 시작했고, 신라군 역시 소정방군과 동시에 고려땅에서 황급히 떠나갔다.
(자신의 병세가 위중했으나 풍전등화같은 조국의 운명을 눈앞에두고 그대로 죽을수는 없었던 연개소문은 몸소 3만의 대병을 편성하여 사수작전을 직접지휘하는 무리를 범하였다. 대막리지는 유언의 순간에도 전군의 행군을 계속 명 하였는바, 이는 연개소문 자신의 죽음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후일 소정방은 당시 연개소문이 사수전투를 마친후 죽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크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아 아.. ! 연개소문이 죽었단 말이 사실인가 다시한번 확인해 보라! 그가 죽은것이 사실이라면 하늘은 우리 당나라를 돕는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연개소문의 자식은 보통 3명으로 알려져있으나 사실은 4명이었다. -연사-
이 연개소문이 좀더 살아있었다면 중국은 정복당했을것이라는데 한중사학자들 간에 별 이견이 없는데, 그의 죽음은 영류황으로 인해 이미 국운이 기울어있던 고구려를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끈이 끊어졌다고 보는것이 학자들의 공통적인 시각이다. 연개소문은 이점을 이미 알고 자식들에게 저런 각별한 유언을 했는지도 모른다.
중국인들의 역사에 있어서 중국인(사학자)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외국장군이 연개소문이다. 특히 중국인사학자들은 자신들을 정복했던 돌궐의 태무진이나 려진의 김누얼 보다 연개소문을 더 영웅으로 친다. 이러한 이유를 한 중국사학자는 필자에게 이렇게 설명했다."한쪽 팔과 다리가 없는 사람과 싸웠는데 흠씬 두들겨 맞아 죽을뻔한 경험을 겪은 사람많이 알수 있는 일"
그는 또 "중국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연개소문이었다.", "연개소문의 병술은 후일 원나라,금나라에 그대로 전수되어 실전에서 재현되었는데 이것이 중원을 정복하게 된 근본이었다" 이 말을 들은 필자는 당시 이런질문을 했다. 돌궐 말갈 흑수말갈등은 한민족이 아닌가? 하자 한참후에 그는 이런대답을 했다
"周恩來,周恩來!" (주은래의 비밀: 주은래는 원래 한국인 조상 周씨를 둔 중국 조선족으로써 모택동정권의 구심점이었던 유명한 중국의 명재상이었는데, 중국사학계가 북중국의 피라밋을 발굴하면서 동북공정을 건의하자 피는 못속인다고 무척 화를내며 "고구려는 명백한 한민족사인데 그런식으로 역사왜곡을 하면 후대에 지탄을 받게될일이다!"하면서 당시 불허했던 인물이다. 중국인 학자인 그는 필자의 어려운 이 질문에 대해 학자이전에 중국인으로써 또 사학자로써의 양심상 그렇게 우회적으로 대답할수밖에 없었던 재미있는 대답으로 기억되어 적어 보았다.
어떻든, 연개소문이 우리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써 중국인들의 후손들에게 존경받았슴을 뜻하는 동시에 고구려,돌궐(몽고),려진(만주)이 우리와 같은 민족임을 설명,입증하는 증거라 하겠다.
연개소문의 사생활을 기록한 부분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 연개소문의 집에서 밥 잘먹을 생각을 하지 말라" "연개소문의 집에 선물을 가져가지 말라 " 이말은 연개소문이 평소 검소하고 청렴하여 집안에 재물을 두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공무에 있어서는 공사를 엄격히하여 감히 재물을 바치는 사람이 없었다고 풀이해도 좋을것이다. -102-11-
또 연개소문에 대한 성장기 기록도 있는데 "연개소문은 어려서부터 발음이 또렷하고 노래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는 또 기억력이 좋아 한번들은 말은 잊는법이 없어 부모도 말조심을 했다", 연개소문이 18세되던때 스승인 을지문덕장군이 '더이상 가르칠것이 없다' 고 했다" , "연개소문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여기서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그의 집안이나 그가 인재들을 좋아하고 사람들 또한 그 집안이나 그를 존경하여 주변에 항상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로 해석함이 적절할것이다.
연개소문시대 그 대표적 인물로는 양만춘, 추정국, 걸걸중상(대조영의 아버지:후일 발해건국) 걸사비우,고선나(섭나=야율아보기 8대조: 후일 거란건국)등이다.
[보장칸의 연개소문에 대한 신뢰]
연개소문에 의해 칸에 오른 장(보장)은 평소 연개소문을 신뢰해온 황손으로써 그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이 있어 여기에 몇가지 소개코저 한다. "장은 연개소문을 대막리지에 임명하면서 칸을 내렸는데(여기서 칸이란 황제의 상징인 칼이란 뜻으로 칼이란 이런뜻으로 유래된 우리말임= 황제의 상징인 칼=칸=황제=단군왕검) 칸을 연개소문에게 주었다는 것은 연개소문을 전적으로 신임했다란 뜻과 같이라고 할것이다.)
장은 개소문에게 황궁에 들때, 칸을 풀지 말고 들어오도록 명했다. 그래서 개소문은 칸의 앞에 와서야 칸을 풀고 절 한후에 앉았는데 개소문이 죽음을 앞두고 사수전투를 나가기전까지, 이를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당시 황궁내에서 모든 신하는 일체의 무기를 소지할수 없었슴),
칸은 연개소문이 사수전투에서 오는길에 병사했슴을 통보받았는데 이때 연개소문의 편지를 같이 받았다. 이 편지에 " 신이 부덕하여 폐하를 더 보필치 못하게되어 죽어도 눈을 감을수가 없사옵니다. 모쪼록 심기를 더욱 굳건히 하시어 당대에 구려제국의 대업을 꼭 이루시기를 저승에서나마 빌겠사옵니다. -불충자 대막리지 연개소문-", "칸은 이 편지를 읽고는 즉시 사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어영대장 윤정하와 휘하 호위병력 단 20기만 데리고 50리를 마중나가 죽은 연개소문을 맞이하였는데, 가는동안 눈물이 마르질 아니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은 장이 연개소문을 아버지처럼 크게 믿고 신뢰하였다는 증명임과 동시에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대신으로써 그의 황실과 조국 고구려에 대한 깊은 충정심을 잘 엿보게 해주는 기록이라 하겠다. - 청 연사110-2 -, - 청연사 109-1,2 123-8,10,12,24, 124-4.6
"연개소문이 말에서 내릴때는 휘하장수를 엎드리게 하여 밟고 말에서 내렸다" 는 등의 속설들이 전해져 오는데 이러한 속설들은 모두 후대에 조직적으로 조작된것으로써 훌륭한 인물을 비하하기위해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지어내 유포된 말임이 틀림없다. 역사에 기록으로 볼때 최소한, 연개소문은 그런 사람은 아니었슴이 확실하다.
연개소문집안의 본적은 강화도로써 이곳에는 아직도 연씨 집안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강화도에 여행가는 분들은 이곳에 꼭 들러보기 바란다)
대대로 고구려의 고위관료로 대막리지(총리)를 지낸 고구려의 명문가문으로써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는 할아버지 연자유의 고구려 관직(대막리지)을 물려받았으며 연태조 대막리지가 을지문덕을 발탁하였고 을지문덕을 발탁한 이유로 을지문덕으로부터 연개소문이 병법을 전수하였다고 기록되어있는 필자가 인용하는 고서인 이 "청연사"는 과거 만주족이었던 현 중국인이 소장하던 사료이다.
[삼국사기의 역사 왜곡]
삼국사기는 史記라기보다는 詐技라고 봄이 적절한데 그럴수밖에 없었다.
현재, 고조선,고구려,고려사등에 대한 우리측의 독립된 고증자료는 거의없고 있다하더라도
현재 사학계에서는 모두 후일에 조작된 야사나 위서로 취급하고 있으며 연개소문에 대한 이 연사도 후대에 조작된것쯤으로 취급되었다.현재의 우리 국사가 그렇드시 우리역사에 대한 근본자료는 모두 중국사료만을 기본으로 하고 이를 인정하는 것이 관습화 되어있다.
대표적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극명하게 입증되는데 대체로 중국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둔 고려의 명장들은 명성이 높아 할 수 없이 기록한 경우가 많은데 이경우도 반드시,성격이 포악하고 무능했다는식으로 묘사한다. 물론, 반대로 중국에 패배하였거나 항복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인간성도 좋고 성격도 자질도 인물도 다 좋고, 다른 내용도 잘 기록되어 있는 특징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것은 한국역사의 문제인데, 이조시대 이조정권에 의해서 스스로 자국사를 왜곡, 축소 한 사실로서 대표적으로 연개소문에 대한 내용만 간추리자면 다음과 같다.
중국사가들에 의해서는, 연개소문은 난폭한성격으로써 임금을 시해한 역적,
김부식에 의해서는 천민출신으로써 왕을 참살한 불충무도한 파렴치한 인간...
최근의 함석헌에 의해서는 '군사쿠데타의 원조'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왜 이랬을까?
답은 간단하다.
이성계는, 명나라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사람이었는 바, 위화도 회군에서부터 한민족 정통인 고려의 황실과 충신 현자 및 일족들을 세계역사에 유례없이 철저하게 대살륙한 후, 자신이 스스로 중국조선인 기자조선(이씨조선)의 왕에 오른 인물이다.
때문에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국보다 한술 더 떠, 고려를 철저하게 말살시킬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이러한 정책은 이조시대 500년 동안 명석한 세종도 있었지만 거의 일관된 정책으로써, 이 오랜관습의 영향으로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강단사학자들은 오직 중국인들의 동북공정 논리에 충실한 조작된 이들의 중국사료와 그중에 하나인 삼국사기만을 근거로 한민족역사를 설명하려 한다.
여기에다가 일제 36년의 식민사관이 샌드위치식으로 덧붙여져 오늘날 죽은 국사를 먹고,배우고 있는바, 한 일본사학자는 나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당신들은 우리가 일제때, 무슨근거로 몽고와 만주에 이르는 만주제국을 건국했는지 모른다.무슨뜻인지 아는가?" "당신들의 국사교육방식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 없는데 왜,한가지 책만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처럼 여러책을 만들어 학교마다 선택하게 해서 가르치는것이 차라리 바람직 하지 않겠는가? " 하면서 딱하다는듯 날 쳐다보아 민망한적이 있었다. 이 일본사학자의 말은 의미심장한 또다른 의미의 말이 아닐수 없다.
[연개소문의'경극']
원나라(돌궐=몽고제국=구려후손시대)때 위인존중의 정책으로 시작되어 청나라 때 절정기를 맞은 중국의 대표적인 전통극을 이르는 말이다.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영화로 보았던 '패왕별희'같은 것들이 바로 경극인데 대만에서는 아직도 연개소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극이 있어 본적이 있다. 아직도 경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연개소문은 과연, 중국인들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고려의 후손인 려진이 중국을 정복하고 최근까지 통치하던 중국이름, 청나라…청나라때 수도였던 북경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경극공연이 이루어졌는데,중국문화를 대표하는 이 경극에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슨 이유에 의해서일까? 그가 중국정권의 지배자들에게 강한 기억으로 존재되었다는 반증이 아닐수없다.
수양제의 110만 대군의 고구려(고려=구려)) 원정때 살수에서 별동대30만을 전멸시킨 을지문덕이나 당시, 세계최강이었던 중국수군 30만을 패수의 대해전에서 단 한번의 해전으로 전멸시킨 고건무(후일 영류황제), 당태종의 60만군 공격때 이를 당태종의 눈을 쏘아 섬멸한 양만춘이 아닌, 연개소문이 경극에 등장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모르는 사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유일하게 1985년 중앙일보에서 대만에서 공연하고 있는 이 경극에 대하여 보도한 바 있다.
[연개소문 가문의 실체]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많은 조작으로 사실을 왜곡, 축소시킨 대표적인 역사소설책인데, 우리측에 워낙 자료가 없다보니 오늘날 강단사학계는 이것을 유일한 역사기록으로 삼고 있는 바.여기에 보면 연개소문은 (천민출신으로 아비가 없으며)연못에서 나왔다하여 연씨라고 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 김부식의 삼국사기 기록들이 얼마나 날조된 조작인가를 단적으로 입증하는 증거가 아닐수 없다. 필자가 확보한 청연사를 제외하더라도 그 증거가 또 있다.
1923년,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과 남산의 묘가 발굴되었는데, 그 안에서 발굴된 묘지석 기록에 "남생의 아버지가 연개소문,할아버지가 연태조, 증조부가 연자유, 작은 할아버지가 연휘만..."이라고 기록되어있고 모두 대막리지(총리)등 고급관리를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는 이성계처럼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인물이 아니라,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전통적인 귀족집안 출신으로써 고구려시대 지도층 집안이었다는 증거다. 즉, 고려연사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증거다. 필자의 연개소문은 내용은 "청연사(고려연사)"의 기록을 기준으로 연개소문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것임을 밝혀둔다. 다음은 왜곡된 고구려 말기 상황을 바로잡기위해 몇가지를 좀더 전하고저 한다.
[영류황의 환락과 실정 그리고 시해사건 ]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큰 승전을 꼽으라면 단연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일 것이다. 을지문덕의 살수전투는 아군의 병력 손실은 거의없이 수나라의 30만 5천 대군을 단 한방에 몰살시킨 세계 전쟁역사에서 유래없는 전투였다. 고구려는 당시, 이 빛나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중국수군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묻고 그 위에 승전을 기념하는 경관대탑(京觀大塔)을 세웠다.
중국인들게는 말할수없는 수치였다.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구축하려 했던 중국 진족(한족)들에게 고구려는 무적의 강력한 존재였다."하늘에 두개의 태양이 떠 있을 수는 없는 법" 연개소문이 당 정벌을 천명하면서 한 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중국역대왕조는 항상 한민족에 의해 멸망될것을 두려워 해 왔는데, 당시에도 그랬다. 612년부터 618년까지 당은 왕조 교체기와 정권교체기에 수양제의 살수 대패 이후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태원의 군사령관이던 이연을 20살이던 아들 이세민이 부추겨 수왕조를 무너뜨리고 당왕조를 세웠다.
이때 돌궐(몽고) 비롯하여 고구려의 제후국들은 칸(고구려황제)에게 상서를 올려 신흥 정권을 정벌할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늙어 병세에 있던 영양왕이 이를 미루자, 돌궐등(설연타,고창,고막해,아사나 등)고려 제후국들은 독단적으로 연합군을 편성하여 당을 공격하였으나 주력군인 고구려군이 없는 상태에서 당군에 패하여 제압되고 말았다. 당시 고구려내에서도 중원을 공격해야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영양왕의 병세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것이다. 마침내 영양왕이 죽고 뒤를이어 태자 영류가 칸으로 즉위하였다.
[건무 황태자의 학익진과 한민족 최대의 해전승리]
영류황! 그는 태자시절, 양제의 110만 침입때 수군사령관(육군은 을지문덕)으로써, 패수에서 내호아와 주법상이 거느린 수나라 수군 30만군을 맞아 학익진 전술로써 5만수군으로 단 한방에 30만 수군을 전멸시킨 우리민족 최대의 해전 승리를 이룬 명장, 태자 건무였다.
(영류는 영리했으나 셈이 많고,주색을 즐겨 칸에 오르자, 환락에 빠지기 시작하였는데 당에서 보낸 10미녀들과 하루도 빠짐없이 주연을 베풀어 죽기전까지 황실궁안에서 풍악소리가 그칠날이 없었다. 영류는 심지어 을지문덕장군을 파직하여 귀양보내고,막리지회의 제도의 폐지 명령도 잔치중에 내렸는데, 이지경에 이르러 뜻있는 현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백두제국은 망했다." "칸이 제정신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 靑연사 97-2,4 -
[영류가 칸에 즉위하면서 고구려는 쇠망의 길로...]
새 칸이 즉위하자, 고구려의 제후국이었던 돌궐등(설연타,아사나등)은 다시 상서를 올려 당에 대한 정벌을 주청했고 을지문덕을 비롯한 우국충신들은 막리지회의 의결을 통해 영류에게 중원정벌을 공식적으로 상소했으나 영류는 "제후국들의 상서에 칸이 움직인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당의 왕이 두나라가 앞으로 전쟁없이 평화롭게 만세를 지내기를 바랍니다"라고 요청하는 친서를 전해왔슴을 귀공들도 잘 알면서 내가 먼저 공격한다면 천하에 비난을 받을 일이고 이는 선조의 지도이념인 홍익인간의 뜻에도 맞지 않는다" 고 말하고는 묵살할 뿐이었다.
이때 당은 내정을 다지기 위해(전쟁준비) 주변국에 대하여 많은 선물과 친서를 보내 화친전술을 썼는데 고구려의 충신,현자, 젊은 조의선인들은 이러한 영류의 우유부단한 정치에 하나같이 나라의 미래를 우려하기 시작했고,동시에 칸에 대한 불신은 높아만 갔다.
626년, 왕위를 탐내던 이세민이 정변을 일으켜 태자인 형 건성을 죽이고 이의 부당함에 대항하던 동생 원길도 죽이면서 두려움에 떠는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강제로 물려받아 왕위에 올랐다. 당태종은 이렇듯 유교적 관점으로 보더라도 패륜아였던 것이다. (이런 중국을 유교관점에서는 그래도 어버이처럼 섬겨야 도리에 맞는건지…?)
이때 돌궐,설연타,아사나 등 제후국들은 칸에게 중국 정벌을 요청하는 상서를 세번째로 또 올렸다. (중국정권이 안정되면 반드시 침략을 받았기에 선제공격을 하자는 것) 이때 을지문덕을 위시하여 조의선인들은 다시 한번 중원을 공격할것을 막리지결의를 통해 공식요청하였으나 영류는 조의선인 15명을 잡아 하옥시키고 을지문덕은 파직,귀양보내고 막리지제도는 폐지시켜버렸다.
"중원이 안정되면 고구려는 침략을 받을것이고, 통일된 중국은 고구려를 위협하므로 때가오면 반드시 중국을 정복해야 한다." 이는 광개토칸(호태왕=황제)을 비롯하여 선대 칸의 공통된 유지였고 또, 고려의 대신들 다수의 의견이며 상식이기도 했으나 영류는 이를 무시하였는데 이는 "신흥 당정권이 많은 미녀등의 선물과 함께 화친의 친서를 수시로 보내 귀국과 우리나라가 평화롭게 만백년을 함께누기기를 바랍니다" 라는 외교전략 때문이었다.(연사97-6, 97-11)
당은 고구려에 대해 앞으로는 이러한 전술을 펴 안심시키는 동시에 고구려의 제후국이었던 북중국지역의 제후국(돌궐, 창, 고막해, 설연타, 거란등)들을 노략질을 해서 정벌한다는 이유로 차례로 정복해 나갔는데 영류의 안일한 정치의식은 결국, 중대한 과실을 저지른 결과가 되고 말았는바, 마침내 당은 주변 서역을 모두 평정하고 고구려만 남겨둔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주변상황이 점점 이렇게 악화되어가는데도 영류는 당과의 화친을 믿고, 624년에는 당과 정기적인 무역을 시작했고 도교도 수입하였다.
[경관대첩탑 화재사건] 과 [양국포로 교환]
당과의 교류를 이유로 고구려에 온 당의 사신들이 한밤중에 경관대탑(살수대첩 기념비)을 불사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로인해 고려백성의 민심이 흉흉해졌는바, 이에 영류가 항의하자 당은 평화공존정책의 확인뜻으로 양국포로의 교환을 제안하였는데,
이에 고구려는 당시 수나라 포로 대부분인 1만여명을 잘 예우하여 보내주었으나 당은 생존 고구려포로의 극히 일부인 1천여명만 보내 주었는바 그것도 식량등 지원도없이 알아서 가라는식으로 보냈다. 이는 향후 당이 전쟁을 대비한 때문이었으나 영류는 이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고구려의 젊은 조의선인들의 우려와 분노는 극에 달했다. 영류는 그동안의 자신의 실정으로 인한 실각이 두려웠다. 그래서 이 세력을 제거하기위한 전초단계로 이른바 대중국 방어장성구축방안이 모색되었다. (천리장성)
631년, 그는 "앞으로 당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천혜의 방어선인 요하를 그대로 둔 채 요동반도의 비사성에서 장춘(부여 농안)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촉조 사업을 실시한다" 고 발표하고 책임자에 연개소문을 명하여 서대부인으로 봉하고 조의선인을 징발하라는 칙서를 내린다.
이에, 고구려의 조의선인들은 "당장 원정군을 편성해 출진을 시켜도 시원찮은 마당에 무슨 장성을 쌓는다는 말인가? 장성을 쌓은들 돌이 나라를 지켜주는가 도데체 뭐하는 짖인가? 싸울 의사가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 하면서 공공연히 성토하기 시작했다.
사실, 세계 전투사에 있어서 천리장성이건, 만리장성이건, 마지노선이건간에 장성이 국방에 도움이된 예는 하나도 없다. 그것은 겁만은 자들 스스로의 자위행위에 지나지 않는 정체의 상징물일 뿐이었다.
영류칸과 기득권 대신들은, 연개소문이 아버지 연태조의 뒤를 이어 대막리지의 자리에 오르는것 조차도 거부했다. 을지문덕 파직이후, 연개소문이 조의선인의 우두머리였다.
그러나 당시 조야로 덕망이 높고 국가에 공헌도가 큰 연개소문가문의 힘을 무시할수없던 영류는 연개소문을 서부대인의 자리에 임명하는 동시에 천리장성을 쌓는 임무를 명하여 변방으로 보냄으로써 세력제거를 도모하였다.
640년 겨울, 연개소문은 마침내 아무와도 상의없이 스스로 사직하고 강화도로 내려가버린 일이 발생되었다. 일이 이지경에 이르자 조의선인들은 집단상서를 올렸는데 그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당과 교역에있어서 첩자들이 사신으로 위장하여
고구려를 각지를 정탐하는 행위중지
2. 631년 사신들에 의해 파손된 경관대탑의 복원
3. 귀양중인 을지문덕대장군과 귀향중인 연개소문의 복권
4. 국력낭비인 장성의 축조 중단과 당나라 공격을 위한 군비 확충.
이른바, 4대 유치(4有治上書)론이다.
(후일 이성계는 이것을 모방하여 4불가론을 주창했는데 내용적으로나 상황적으로나 정반대인 억지주장에 지나지 않음)
이에, 영류황은"4대유치론" 중, 연개소문의 재등용만을 윤허하고 칙사를 강화도로 보내 연개소문을 도성으로 불러 천리장성 감독관으로 강제 발령했다. 이때, 조의선인들은 민족의 정치관습을 따르기로 결의했다.
단군조선때부터 칸(군)은 스스로 물러났으며 그렇지 않을경우, 즉 정치를 잘못하거나,패전하거나,가뭄이나 홍수가 들어 민심이 흉흉해지면 그 책임을 물어 칸을 죽이거나 추방해온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고구려시대 때만해도 실제로 여러 칸들이 이런 이유로 물러거나 죽임을 당했다.
단군시대부터 한민족의 철학은 실사구시였고 고구려도 마찬가지였다.(후일 청제국의 철학으로 계승되었슴), 이조시대의 유교(양반병역면제등) 문화하고는 전혀 달랐다.
642년, 연개소문등은 천리장성 감독관으로 떠나기전 관례적인 열병식 중에 이를 참관하던 영류왕과 대신 128명을 잡아 하옥시켰고, 이중 영류를 포함하여 41명을 법에 따라 극형에 처했는데 이들이 당나라로부터 받은 뇌물내역을 보면 대표적으로 내관장(내관의 총책임자) 언태손정이 황금 140냥을 비롯, 좌장군 금정환 황금280냥,좌유위표대장(인사담당)황금110냥, 가도위사(보안) 유민이 황금180냥등... 그 액수가 상당하였다고 기록되어있슴. (연개소문은 영류를 처형한 후, 황제의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고 그 일족은 황실의 예에따라 예우 함)- 연사 97-42,45-2. 2/3.2/5 5-8/5
영류황과 관련 비리관료들을 처리한후, 연개소문은 황실의 법통을 이어 영류왕의 조카 장을 칸(보장왕)으로 추대하여 황실을 혈통을 보전하고 고구려의 역사를 이었다. (이점이 고려와 이조와 차이)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
고구려 조의선인들의 영류왕 제거는 때가 많이 늦어있었다.
대대로 충신의 집안이었던 연개소문의 가문에서 칸을 처형한다는 일이 쉽진 않았을 것이다. 여하튼, 이때는 이미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 주변7개의 강력한 제후국이 당에 모두 정복되어 고구려는 이미 국력이 기울어 있던 상황이었는데 특히, 돌궐의 당편입은 큰 손실이였다. 고구려는 이때부터 사실상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것이다.
626년 당의 이세민은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빼앗다시피 하여 즉위한 뒤, 16년 동안 고구려의 제후국인 돌궐등 북방국가들을 정벌하여 편입하고 이정, 위징, 방현령, 장손무기 등을 등용하여 내정을 다졌다. 소위정관지치(貞觀之治)라 불리는 황금시대의 기초를 닦았던 것이다. 그러나 영류는 이기간동안 주연이나 베풀고 환락에 젖어 태평세월을 보낸것이다.
안일한 영류로 인해 고구려로써는 멸망을 준비하며, 당의 시대를 열어준 꼴이 되고 만것이다. 광개토칸(호태왕) 이래 200 여년간 고구려와 형제국이면서 제후국으로써 강력한 동맹세력이었던 제후국 돌궐을 비롯 설연타, 유연, 고창, 거란등(모두 같은북방족)이 차례로 이세민에게 제압되는것이 방치되는 동안 이들나라의 약 오천여명에 이르는 친고구려계 대신들이 죽거나 잡혀가게 되었다. 이렇게 당의 지배하에 철저하게 편입되었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부분이 있는데 돌궐부분이다.
당태종이,돌궐의 정벌과정에서 돌궐의 고구려계대신 일가친척 2.240명을 참살하거나 끌고왔는데 이 사실은 돌궐과 고려의 혈맹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수있게 하는 대목이다. 고구려와 돌궐과는 군사적으로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이었던 것이다.
동돌궐은 전략적으로 중원국가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측면을 견제하는 세력이었으며,서돌궐은 장안과 낙양을 견제해주는 세력이었다. 안일한 군주 영류 로 인해 고구려를 받쳐주던 강력한 제후국들이 이와같이 모두 당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다.(당시 이세민은 돌궐등을 정복하기위해 원정하면서 “이들이 자주침략하여 선량한 양민을 죽이고 노략질을 일삼아 부득이 원정하게 되었으니 양해바란다”는 친서를 영류에게 사전에 전하여 영류를 안심시켰다)
이러한 제후국들의 당의지배권 편입으로 당의 세력은 더 강해지는 반면 고구려는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손실을 입게 되었는데 이것은 후일, 고구려를 멸망시킨 선봉장들이 이세적을 비롯 설필하력,아사나두이,설인귀등 북방민족출신 장수들이란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영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이제 고구려는 전보다 절반정도로 상당히 약화된 상태에서 당의 공격을 기다릴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수문제가 80만 대군, 수양제가 113만 대군으로 공격해야 할 대상이었던 고구려가 불과 30년만에 겨우 50만의 병력으로 공격 가능한 약한 세력이 된 것이다.
[대막리지 연개소문 의 지도력]
연개소문은 대막리지가 되자 황실내의 부패하고 안일한 관리들을 모두 관직박탈하고 과다한 세금을 감면하는등 개혁을 실시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내실을 기하는 한편, 당에는 교역 및 도교사신을 두배로 증가시켜 안심시킴과 동시에 당의 전략과 군세등의 정보를 취득케 하였다. (조작된 국사등에는 연개소문이 도교를 수입하고 불교를 억압한 것으로 쓰고 있지만 도교를 수입한 사람은 영류왕으로써 영류왕 본기 7년 영류왕은 당고조에게 도사파견을 요청하여 도교강의를 듣도록 한 기록이 있다)
외교적으로도 정치적수완이 뛰어난 연개소문은 이점을 이용하여 도교를 수입한다는 명분으로 당의 긴장을 풀어놓으면서 관련 사신들을 대거 파견하여 당의 군세,경제등을 정탐하는 한편, 신속한 국내 안정을 도모했다. 한편 국력 낭비인 천리장성축조를 중지하고, 조의선인들을 요하전선에 전진배치하여 후일 당의 공격에 대비하였다.(양만춘등을 발탁하여 요충지의 제후(왕)로 임명 함)
[이세민의 공격] 과 [당의 장안 공격]
이세민 역시 능력있는 일국의 지도자의 답게 연개소문의 집권 3년도 채 안된 시점에 전격적으로 고구려 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이미 고구려 주변의 강력한 제후세력인 돌궐등을 모두 제압한 뒤였으므로 50만의 병력으로 고구려정복을 확신하고 직접 인솔하여 원정길에 나서면서 조칙을 발표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중국 역대왕조의 원수를 갚고, 패륜의 연개소문을 징벌한다".
여기서, 제하의 원수를 갚겠다는 말은 이해할수 있으나, 임금시해부분인 패륜이라 언급한 부분은 경우가 전혀 다른 부분으로써 이세민 자기는 권력욕심으로 자기 친아버지와 친형제를 살륙한 바, 연개소문과는 비교할수가 없는 억지사항이라 하겠다.
[연개소문의 죽음 = 고구려 천년역사의 멸망]
[남생, 남산, 남건,남주 형제]
연개소문이 죽자 칸(보장황제)은 연개소문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고, 군공을 많이 세운 맏아들 남생을 막리지로, 남산을 어영대장군, 남건과 남주 역시 각 좌우장군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당은 연개소문에게 숙청되어 앙심을 품고 있던 대신들의 족당들에게 많은 돈을 들여 접근, 고구려의 내분공작을 꾀해왔는바, 이 족당들은 남건과 남주쪽에 붙어 왔다. 665년, 남생이 요동방면을 시찰 나간사이 남건과 남주는 남생의 아들 현충을 살해한 후, 남산에게 말하기를 남생이 시찰에서 돌아오는 즉시 우리 모든 형제를 죽이려는 비밀계획을 입수하였다며 이대로 있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것이라면서 보장칸을 협박하여 남산을 대막리지에 임명토록한수 감금하고 칙서를 위작하여 큰형 남생을 소환토록 하였다.
남생은 소환에 응하고자 하였으나, 아들 헌성은 칸이 이미 죽어있을지도 모르는상황이므로 작은아버지(연정토)와 상의할것을 건의했다. 남생은 구련성의 연정토(말갈과 거란지역의 왕)를 찾아가 상의하였는바, 연정토는 직접 평양성으로 들어가 남산을 만나 이 역모의 주동자가 남건,남주임을 파악하게된다. 남산은 칸과 연정토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무능함을 사죄하고 형 남생을 복권시킨후 초야로 물러갈뜻을 밝힌다.
그러나 이를 알게된 남건과 남주는 당일 심야에 사병을 동원하여 남산과 연정토의 숙소를 습격하는데, 남건은 남산을 사로잡았으나 연정토의 숙소를 습격한 남주는 연정토를 죽이는데 실패하고 도리어 죽음을 당한다.
이를 알고 곧 추적한 남건의 부대로부터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쳐나온 연정토는 자신의 지배지인 구련성으로 돌아와,남생과 합의하여 자신의 지배지 68개성을 당군에 넘겨주는 대신, 10만군을 편성해 당군과함께 667년 평양성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남건과 도당일파들을 모두 처형하고 평양성을 당에게 넘긴후, 자신은 신라로 귀화하였다.(오늘날 국내 연씨는 이 연정토의 후손들임)
이러한 내분작전의 성공으로 고구려의 평양성에 입성한 당은 남생과 남산을 비롯, 황족 대신들을 모두 끌고 당으로 돌아가는데 당으로 끌려온 이후 이 두형제는 줄곳 함께 살았는바, 고구려부흥운동을 경계하는 당으로부터 철저한 감시를 받으며 낙양땅에서만 살다가 얼마후 남생이 병으로 죽자, 남산도 곧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자식들과 고구려 유민들은 남생과 남산의 묘비를 세워 장사지냈는데 이 묘비가 1923년에 낙양에서 발견된것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삼국사기등에 조작되어있는것과는 달리, 연개소문의 가문은 대대로 고구려의 명문가문이었슴은 전자에 밝힌바와 같다.
결국, 고구려는 당의 분열책과 연합전술로 668년 멸망하고 말았으나 연개소문 아들들의 내분 이후에도 1년이 넘게 전투를 계속할수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고구려의 국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수있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신라의 고구려 계승]
우리가 잘못알고있는 것과는 달리 고구려의 평양성을 최초로 점령한 군대는 당나라 군대가 아니라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의 군대였다는 사실은 앞에 기술한바와 같다. 연정토는 평양성을 함락하여 남건을 처벌한 후 성을 당군에 넘기고 자신은 휘하의 일대를 이끌고 신라로 귀의하였는데, 당군은 이렇게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여세를 몰아 고구려와 같은 민족인 신라를 마저 멸망시킴으로써 화근을 없애고 직접통치하고저 신라를 공격한다.
이때 신라군을 도와 당군과 전투를 벌인군대가 바로 신라로 귀화한 연정토의 기병과 백제의 유민군이다 신라군과 합세하여 당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3회의 대전투 모두를 신라군이 대승을 거둔다. 결국, 당은 신라정복(한민족 정복)을 포기한채 평양성에 있던 고구려 황실과 대신일족등만 끌고 당나라로 돌아가게 된다. 신라는 고구려와 같은 한민족이기 때문에 후일 후고구려(고려)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연개소문의 부활과 중국 정복]
앞에서 당군이 평양성을 직접 통치하지 못하고 고구려 황실일족만을 당으로 끌고갔다고 했는데 그럴수밖에 없던 이유는 아래로 신라가 있고 북으로는 고구려의 다른 지배지들이 아직 온전한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불가피 한 선택이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연개소문이 죽음으로써 고구려 황실은 멸망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구려영토의 지배지역 전체가 당에 복속되거나 멸망한 것은 아니라는 중대한 사실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때문에 당나라는 고구려 황실만을 끊으려 했을 뿐이었다. 이후 이지역은 연개소문에 의해 이지역의 왕으로 임명되었던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에 의해 진국 즉 발해가 세워졌고, 안율복의 후손 야율아보기에 의해서는 구련(거란)이 세워졌으며 김누얼에 의해서는 금나라가 세워질수 있었으므로 결국 중국을 정복하여 근대까지 다스리게 된 발원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연사(戀史)'에 “연개소문은 위대한 지도자로써 후일 돌궐의 태무진, 고선나의 구련(거란) 고려의 최영, 려진의 김누얼(누얼=누루하치)이 본받았다(본토회복=중국정복)고 기록되어 있는것이다. (靑 구려연사 1-2)
(고구려의 이러한 멸망후, 이 지역의 이러한 유기적관계에 대해 중국정권과 기자조선으로 개국이 허락된 이조정권은 편협한 동북공정사만을 정사로 선택해 가르치고 배워왔고 이러한 국사는 지금까지 초중고대학에 이르기까지 마치 사실인양 국사로 자리하게 되었는바. 국내 강단사학자들은 지금의 죽은 국사를 가르쳐 온 사실을 인정, 크게 반성하고 이제부터라도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안목으로 국사를 재검토하여 재구성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필자는 이 기회를 통해 다시한번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호소하는 바이다)
연개소문에 이러한 역사는 후손대에 귀감으로 전해져 돌궐(태무진:칭기스 칸)이 후손대에서 세계정복을 가능하게 했으며, 려진역시도 후손대에서 본토회복(중국정복)의 대업을 이루게 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고구려역사의 교훈적 의미가 역사적으로 큰의미있슴을 다시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할것이다.
우리나라 강화도에는 연개소문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는데, 이것은 연개소문가문의 고향이 강화도라는 증거가 될것이다. 훗날, 북송 때 개혁의 주도자로써 연개소문을 존경했던 왕안석은 "당태종이 고구려에게 패하고 멸망에 직면했던것은 오직 연개소문의 지도력 때문이었다'라는 평가를 했는데 이런 평가에 걸맞지 않게 정작, 우리나라에는 자료가 하나도 남아있지않을 뿐아니라 우리나라 강단사학계 그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한 평가를 바르게 내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높은 이름, 백두산의 제국이란 뜻의 "구려"란 순 우리 높임말을 비하하여 정반대의 뜻인 싸구려(불량하고 조잡한 물품)로 쓰고 있고, 심지어는 똥냄새나 방귀냄새를 뜻하는 "에이 구려~" 라고 쓰고있다는 현실은 우리 한민족이 얼마나 잘못된 국사를 가지고 있고, 배우고 있는지를 입증하는 산 증거요,바로미터라고 하기에 충분할것이다.
이 글을 읽은 후손들은 앞으로, 절대로 저런 말을 쓰지 말라 !
연개소문!
그의 조국인 (백두산의 제국) 고구려!
그의 이름인 백두산의 천지연
한민족의 후손인 그는, 한민족을 위해 대대로 충성스럽게 살다간 훌륭한 인재였다. 그러나 그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는 그에 관한 자료가 지금까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바, 얼마나 철저하고 조직적으로 우리의 참역사가 훼손되었는지를 알수있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이는, 이조시대 때와 일제시대 때, 고조선 고구려(고려)시대의 자료들이 철저히 수집되어 소각,또는 반출처분되었기 때문이라는 증언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을 전하면서 백두제국, 고구려의 지도자 "연개소문 편"을 여기서 줄이고저 한다
첫댓글 칭기스칸이랑 누루하치가 우리나라 사람이었구나..;; 왜 다들 몰랐을까..;;
이 글 북한사람이 썼습니까? 글씨 풍이 영~^^;;
심심해서 다시봤는데 싸구려와 '에이~ 구려'와 고구려의 구려와의 상관관계에 대해선 뒤집어질수밖에 없구만요..ㅋㅋㅋㅋㅋㅋㅋ
조선시대 고조선의 역사서를 수집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이는 역사서 수집이 목적이지 소각은 아닙니다
칭기스칸이 우리 민족이라는 증거는요? 을지문덕이 귀양갔다는 증거는요? 삼국사기가 소설이라는 증거는요? 이색이 시적인 표현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할까요?
여기서 따지지 말고 그 삼우선생님이란 사람에게 직접 가서 따지십시다.
칭기즈 칸의 일대기에 우리민족이 관련되어 있나? =ㅁ=생존하느라 바빴던 테무진...
칭기즈칸은 고려에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지요
기성 사학과 한계가 잇는 중국 사서에 영향을 배경으로한 현 사학출신전공자들에게는 그저 허무맹랑한 애기로만 들리뿐이고 자료? 증거타령만 내세울 뿐입니다. 100%는 아닐것이나 50%내외는 수긍이 간다고 봅니다! 후대에 까지 중국이 연개소문에 대해서 철저하게 비하. 왜곡. 평가절하한 사실과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많아도 그 속에 들은 청연사의 내용은 분명 가치가 있습니다. 꼭 성향이 틀리다고 무시해야될 것은 아니지요. 적에게도 배울게 있는데 하물며 성향이 좀 다르다해도 그 속에는 다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을겁니다.
중국에 1000여년이 훨씬 지난 얼마전까지도 이국의 경극에도 나타난 인물. 중국이 영화나 소설로 소재를 다 만들어도 유일하게 그들이 통일을 이루던 시기 수.당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거의 없는것으로 압니다. 왜 대대적으로 왜곡과 가필을 할수 밖에 없을 터이니 이곳에도 갑갑한 친구들 좀 잇습니다.
그저 삼국사기가 인생에 전부인줄 알고 밑줄긋고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 따지고 보면 김부식이나 본인이나 오십보 백보수준의 지식들이라 사료되며 본인이 400여년전 임진 정유란관계 서적을 만들고 800년 정도지나면 그것이 삼국사기같은 셈세미..
우리엘님, 이제 이런 이야기는 지겹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습니다. 청연사에 관한 생각을 해 보라고 올린건데 꼭 그렇게 남의 흠집 잡는 일에만 열을 올리셔야겠습니까?
우리엘님은 정말 나이 지긋하신 고집쟁이 분이신지 왜렇게 꽉 막혀있습니까? 적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 합니다. 저 원본저자의 성향이 님의 맘에 들지 않는다고 무시하면 그만인게 역사인가요? 성향이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내용에서 배울점을 찾아야지요. 그 속에 들은 청연사에 대해 알아보자는 취지에서 올렸고,
작가 성향 가지고 뭐라 하지 말자했는데도 그렇게 하셔야겠습니까?
참기를 바랍니다.. 여기에는 서푼짜리 지식으로 간섭군 발끈양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냥 편하게 보면 되고 다소의견이 다르면 다르게 받아들이면 되는데... 꼭 어설픈 지식으로 가르치려 들지요..
그러면 댁이 청연사 찾아와보쇼. 우리나라에서 청연사가 언제 진지하게 연구된 적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