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학에서의 수행법을 지관(止觀)이라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지(止)는 산란한 생각들을 그친다는 뜻이고, 관(觀)은 제법의 이치를 관조한다는 뜻입니다. 천태스님은 부처님의 일대교(一代敎)를 설법 내용에 따라 장교(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의 사교(四敎)로 교판하였듯이, 수행법인 지관도 사교에 따라 구별하여 장교, 통교, 별교의 지관을 상대지관(相對止觀)이라 하고, 원교의 지관을 절대지관(絶對止觀) 또는 원돈지관(圓頓止觀)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원돈지관은 원교의 실상을 마음으로 관하여 실증하는 지관을 말합니다. 천태스님의 여러 저술 가운데 특히 ꡔ마하지관(摩訶止觀)ꡕ에서 이 원돈지관을 상술하고 있습니다. 원교의 이론이 전반적으로 원융한 사상과 더불어 중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원교의 실천 관법인 원돈지관도 역시 중도의 실상경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의 색, 하나의 향이 중도 아님이 없다[一色一香無非中道]’라는 천태종의 유명한 글귀는 결코 이론적인 공부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마음으로 관하여야 할 것입니다. 법의 자성이 항상 적멸한 것이 곧 지(止)의 뜻이요, 적멸하면서도 항상 비추는 것이 곧 관(觀)의 뜻이니라. 法性常寂이 即止義요 寂而常照가 即觀義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18下] 지(止)란 정(定)이고 관(觀)이란 혜(慧)인데, 법성 자체의 체(體)면으로 보아서는 지(止)라 하고 용(用)면으로 보아서는 관(觀)이라 할 수 있으므로 결국은 지가 곧 관이고 관이 곧 지입니다.일체만법이 이렇게 상적(常寂)하면서도 상조(常照), 쌍조(雙照)합니다. 상적을 제외하고 쌍조가 없고 쌍조를 제외하고 상적이 없으니, 불 밖에 빛이 없고 빛 외에 불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유정(有情)이고 무정(無情)이고 할 것 없이 일체만법이 상적쌍조한 상적광토(常寂光土)에 있으며 상적광토를 여의고는 일체만법, 우주법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방편도 아니고 실상도 아니며 이치의 성품이 항상 적멸함을 이름하여 지(止)라 하고, 적멸하며 항상 비추어 방편이기도 하고 실상이기도 함을 이름하여 관(觀)이라 한다. 관이므로 지혜라 하고 반야라 하며, 지(止)이므로 눈[眼]이라 하고 수능엄이라 한다. 이러한 이름들은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합하지도 아니하고 흩어지지도 아니하여 곧 불가사의한 지와 관이니라. 非權非實이며 理性常寂을 名之爲止요 寂而常照하여 亦權亦實을 名之爲觀이라. 觀故로 稱智稱般若요 止故로 稱眼稱首楞嚴이라. 如是等名은 不二不別하고 不合不散하여 即不可思議之止觀也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34下] 권(權)이란 방편이고 실(實)이란 실상이므로 권실(權實)이란 방편과 실제의 두 상대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관(觀)이란 용(用)으로 보아 지혜라 하고 반야라 하며, 지(止)는 체(體)로 보아 눈[眼]이라 하고 수능엄(首楞嚴)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름들은 불과 빛의 관계처럼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아니하여 보통 중생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경계이니 이것이 중도입니다. 지는 곧 본체의 진실함[體眞]이니 비추면서도 항상 적멸하고, 지는 곧 인연을 따름[隨緣]이니 적멸하면서도 항상 비추며, 지는 곧 지(止) 아닌 지(止)이니 쌍차쌍조이다. 지는 곧 부처의 어머니이고 지는 곧 부처의 아버지이며, 또한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다. 지는 곧 부처의 스승이고 부처의 몸이다. 止即體眞이니 照而常寂이요 止即遂緣이니 寂而常照요 止即不止止이니 雙遮雙照라. 止即佛母이고 止即佛父이며 亦即父即母요 止即佛師이고 佛身이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58上] 체진(體眞)은 진공(眞空)에 비유하고 수연(隨緣)은 묘유(妙有)에 비유한 것입니다. 지(止) 자체가 이대로 진실인데 진공이라 하면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단공(斷空)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항상 대광명이 우주를 비추면서도 항상 적적합니다. 이렇게 지는 진공이면서도 또한 수연(隨緣)이니 지를 전환하여 바로 작용하면 그대로가 수연이며 묘유(妙有)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적멸하다 해도 진공 이대로가 묘유이므로 적이상조(寂而常照)하고, 아무리 천만 가지로 변동하고 무한한 활동을 해도 항상 적멸하여 조이상적(照而相寂)합니다. 이와 같이 지는 적멸하면서도 항상 비추고 진공이면서도 묘유이므로, 지는 지가 아니면서도 지가 되어[止即不止止] 마침내 쌍차하고 쌍조합니다. 부처님이 경전에서 말씀하실 때는 보통 쌍차만 가지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쌍차 속에 근본적으로 쌍조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쌍조를 제외하고 쌍차가 없으며 쌍차를 제외하고 쌍조가 없습니다. 같은 이유로 여기에서 지 하나만을 거론한 이유는 지에 관(觀)의 뜻이 내포되어 있어서 관을 따로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지를 곧 부처님의 어머니요 아버지라 부른 까닭은 일체제불과 천하 선지식이 모두 이 도리를 알고 깨쳤기 때문에 이것은 실제로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의 부모인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다’라는 것은 쌍차가 쌍조고 쌍조가 쌍차임을 거듭 강조하기 위하여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만약 양변을 그치는[息二邊] 지는 곧 생사와 열반, 공과 유가 쌍으로 적멸하니라. 이 지에 의지하여 중도의 정을 발생하고, 부처의 눈이 활짝 열려 비추는 것이 두루하지 않음이 없어 중도삼매를 이루느니라. 若息二邊止는 即生死涅槃空有雙寂하니라. 因於此止하여 發中道定하고 佛眼이 豁開하며 照無不遍하여 中道三昧成하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25下] 천태교학에서는 지에 대하여 흔히 체진지(體眞止), 수연지(隨緣止), 식이변지(息二邊止)의 세 가지 지를 거론합니다. 체진지는 지에 의하여 망상을 내지 않고 혜안(慧眼)이 열려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보는 것이며, 수연지는 방편적인 거짓 마음[仮心]을 발하여 법안(法眼)을 얻어 속제(俗諦)를 보는 것입니다. 식이변지는 생사와 열반을 모두 멀리하는 것입니다. 보통은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 열반의 즐거움을 취하는 것이 목적인데 이것은 곧 생사와 열반의 양변입니다. 그러나 열반에 집착하게 되면 생사에 집착하는 병과 똑같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생사와 열반을 다 버리는 중도의 입장을 취합니다. 이와 같이 생사와 열반, 공과 유의 양변을 버리고 중도에 머무르는 지를 바로 식이변지(息二邊止)라 합니다. 생사와 열반, 공과 유를 다 버리면 쌍적하여 중도의 정(定)이 발생합니다. 그러면 부처의 눈[佛眼]이 활짝 열려 시방법계를 다 비추고도 남음이 있는 대지혜광명이 발현됩니다. 여기에서 중도삼매를 이루어 성불하게 되는데, 이것이 부처님이 정등각한 근본 내용입니다. 중도제일의관은 교묘하게 네 가지 실단[四悉檀]을 사용하여 곧 일체종지의 부처눈[佛眼]을 얻느니라. 中道第一義觀은 巧用四悉檀하여 即得一切種智佛眼也니라. [維摩經玄疏 1;大正藏 38, p. 521下] ‘중도제일의관’이란 불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관법을 말합니다. 사실단(四悉檀)의 실단(悉檀)이란 siddhānta의 음역으로 종의(宗義), 정설(定說), 성취(成就)라는 뜻인데, 사실단이란 세계실단(世界悉檀), 각각위인실단(各各爲人悉檀), 대치실단(對治悉檀), 제일의실단(第一義悉檀)의 네 가지로써 중생을 교화하여 성숙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눈[佛眼]’이란 시방 미진수 세계를 비추고도 남음이 있는 대혜안(大慧眼), 대법안(大法眼)을 말합니다. 이 불안을 성취하는 것을 정등각이라 하고 견성이라 하고 성불이라 합니다. 즉 원교에서는 이변을 쌍차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내용에 있어서는 지관(止觀)이라 하기도 하고 적조(寂照)라 하기도 하며, 이것을 성취하면 중도삼매(中道三昧)고 성불입니다. 마음이 중도를 반연하여 실상의 지혜에 들어감을 지(止)에 머무르는 뜻이라 하니 실상의 성품은 곧 지(止)도 아니고 지 아님도 아닌 뜻이다. 또 이 일념이 능히 오주(五住)를 뚫어서 실상에 도달하니 실상은 관(觀)도 아니고 관 아님도 아니다. 이런 뜻이 다만 한 생각 마음 가운데 있어서, 진제(眞際)를 움직이지 아니하고도 여러 가지 차별이 있다. 경에 말하기를 능히 모든 법의 모습을 잘 분별하지만 제일의에서는 움직이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비록 많은 이름이 있으나 대개 반야의 한 법이니 부처님이 여러 이름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여러 이름이 모두 원융하여 모든 뜻도 또한 원융하다. 상대, 절대, 대대하는 체가 불가사의하니 불가사의하므로 장애가 있지 아니하며, 장애가 있지 아니하므로 구족하여 멸함이 없다. 이것이 원돈의 교상(敎相)으로 지관의 체를 나타낸다. 心緣中道하여 入實相慧를 名停止義니 實相之性은 即非止非不止義니라. 又此一念이 能穿五住하여 達於實相하니 實相은 非觀亦非不觀이니라. 如此等義가 但在一念心中하여 不動眞際하고 而有種種差別하니 經言善能分別諸法相호대 於第一義而不動이라 하니라. 雖多名字나 蓋乃般若之一法이니 佛說種種名이라. 衆名이 皆圓하여 諸義도 亦圓이라. 相對絶對待體가 不可思議하니 不可思議故로 無有障碍하며 無有障碍故로 具足無滅이라. 是圓頓敎相顯止觀體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25下] ‘지(止)에 머무른다’ 함은 모든 것이 다 끊어진 상태를 말한다. 오주(五住)란 오주지혹(五住地惑)의 준말로서 견혹(見惑), 사혹(思惑), 무명(無明)의 번뇌를 다섯 가지로 가지고 분별한 것인데, 삼계에서 생사에 집착하게 하는 번뇌를 총칭하는 것으로 알면 됩니다. 그리고 일념이 능히 오주지의 번뇌를 다 끊어 버리면 중도에 도달하여 바로 깨닫게 되는데, 도달된 이 실상은 지(止)도 아니고 지 아님도 아니며, 관(觀)도 아니고 관 아님도 아닙니다. 이와 같은 뜻이 마음 한가운데 있어서 진제(眞諦), 즉 마음의 근본 자성자리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여러 가지 차별이 있으며 또한 아무리 차별되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비유하면 밝은 거울에 천차만별의 형상이 비치어도 밝은 거울이 요동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중도정관(中道正觀)을 성취하여 진제에 들어가면 아무리 세간의 생멸상을 살피어도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동(動)하면서 공(空)하고 공(空)하면서 동(動)하여 동, 공이 완전히 상통해집니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능히 모든 법상을 잘 분별하지만 제일의에서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결국 쌍차가 쌍조고 쌍조가 쌍차된 곳입니다. 여기서 중도라 하든지 열반이라 하든지 부처라 하든지 중생이라 하든지, 이러한 온갖 표현은 다 반야 한 가지의 법을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참된 도리의 법계가 이러하므로 이를 표현한 모든 이름이 원융하며 뜻도 또한 원융합니다. 이와 같은 까닭에 상대와 절대와 서로 상대하는 체가 불가사의하며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장애가 없고 장애가 없으므로 구족하여 멸함이 없으니 이것이 원돈의 교상[圓頓敎相]으로서 지관의 당체를 밝힌 것입니다. 그리하여 공이든지 가든지, 부정이든지 긍정이든지 전체가 원융하여 앉아도 좋고 서도 좋고 누워도 좋은 대자유이며 대자재인 것입니다. 전체가 장애가 없어 부처도 좋고 중생도 좋고 도둑놈도 좋지만, 한편으로는 부처도 안 되고 중생도 안 되고 무어라 이름붙여도 안 됩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도리로 이것은 깨치기 전에는 말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즉 장님에게는 앉으나 서나 넘어지는 것뿐이므로 자유가 하나도 없으며 오직 눈뜨고 볼 일입니다. 원돈(圓頓)이란 처음에 실상을 반연하여 경계에 이르러 곧 중도로서 진실 아님이 없다. 인연을 법계에 매고 생각을 법계에 하나로 하여, 하나의 색, 하나의 향이 중도 아님이 없으니 자기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도 또한 그러하다. 음(陰)과 입(入)이 모두 그러하니 고(苦)를 가히 버릴 것 없고, 무명의 번뇌가 곧 보리(菩提)니 집(集)을 가히 끊을 것 없으며, 변(邊)과 사(邪)가 모두 한가운데이니 도(道)를 가히 닦을 것 없고, 생사가 곧 열반이니 멸(滅)을 가히 증득할 것 없다. 고와 집이 없으므로 세간이 없고 도와 멸이 없으므로 출세간이 없다. 순일한 실상이니 실상 밖에 다시 다른 법이 없다. 법성이 고요함을 지라 하고 고요하면서 항상 비추는 것을 관이라 한다. 비록 처음과 나중을 말하나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 이것을 원돈지관(圓頓止觀)이라 한다. 圓頓者는 初緣實相하여 造境即中하여 無不眞實이라 繫緣法界하고 一念法界하여 一色一香이 無非中道니 己界及佛界와 衆生界亦然하니라. 陰入이 皆如하니 無苦可捨요 無明塵勞가 即是菩提니 無集可斷이요 邊邪皆中正이니 無道可修요 生死即涅槃이니 無滅可證이니라. 無苦無集故로 無世間이며 無道無滅故로 無出世間이라. 純一實相이라. 實相外에 更無別法이라. 法性寂然을 名止요 寂而常照를 名觀이라. 雖言初後나 無二無別하니 是名圓頓止觀이니라. [摩訶止觀;大正藏 46, p. 1下] 원돈이란 일체만법이 원융무애하기 때문에 원(圓)이라 하고, 거기에 시간적인 간격이 없으므로 돈(頓)이라 합니다. 하나의 도가 일체의 도로서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원융하고 자재함을 원돈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원돈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실상을 알아 일체 경계가 모두 중도 아님이 없고 진실 아님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인연을 법계에 매어, 즉 법계에 통하게 되어 일념 이대로가 법계로서 하나의 색, 하나의 향이 중도 아님이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실상이란 가상(仮相) 밖에 실상(實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에게 상이라 하면 가상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부득이 실상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입니다. 즉 중도의 실상은 생멸을 떠나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천차만별하는 이 경계 가운데 있어 진진찰찰이 앉으나 서나 중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선과 악, 천당과 지옥 할 것 없이 천경계 만차별이 중도 아님이 없고 진실하여, 일념 이대로가 법계이고, 하나의 색 하나의 향이 모두 중도이며 자기의 세계나 부처의 세계나 중생의 세계도 또한 그러합니다. 모두가 원융하며 중도이고 부사의한 해탈경계인 것입니다. ‘음(陰)과 입(入)이 모두 그렇다’에서 음(陰)은 오음(五陰)을 말하고 입(入)은 내육입(內六入)인 육근(六根)이나 외육입(外六入)인 육진(六塵)을 말하는데, 이것이 다 그러하다는 것은 천당과 지옥 불계와 중생계 할 것 없이 모두가 진여(眞如)의 대용(大用)으로서 전부 중도 아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옥 천당 할 것 없이 모두가 부사의 해탈경계로서 중도를 이루니 고(苦)는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습니다. 즉 무명의 번뇌 이대로가 보리이므로 집(集)을 가히 끊을 것이 없습니다. 중도를 바로 깨친 사람은 무명 진로 그대로 전체가 보리, 열반이며 변견(邊見), 사견(邪見) 이대로가 다 한가운데[中正]로서 도를 가히 닦을 것이 없습니다. 불교를 믿거나 예수교를 믿거나 무슨 교를 믿어도 중도를 깨친 사람에게는 전체가 다 중도이지 중도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중도는 저 바닷물과 같이 전체가 다 짠맛뿐으로 다른 맛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사 이대로가 열반으로서 멸을 가히 증득할 것이 없습니다. 고와 집이 없는 까닭에 세간도 없고, 도와 멸이 없기 때문에 출세간도 없으니, 전체가 다 법계이고 진여이며 순일한 실상으로 한 법도 버릴 것이 없으며 한 법도 취할 것이 없습니다. ‘실상 외에 다시 다른 법이 없어’ 쌍차가 되고 ‘법성이 고요하며’ 부동함을 지(止)라 하니 쌍조가 되어 고요한 가운데 항상 대광명이 시방법계를 비추는 것을 관(觀)이라 합니다. 비록 처음과 나중을 말하나 이것은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 이것을 원돈지관(圓頓止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삼계가 실제로 원융해서 모든 것이 진여법계 아님이 없고 진여대용 아님이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중생이라 해도 좋고 부처라 해도 좋으며 또한 중생이라 해도 안 되고 부처라 해도 안 됩니다. 구슬을 굴리는 것과 같아 거기에는 어떠한 규격이나 걸리는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것을 삼계가 원융한 중도정관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습니다. 객담을 하나 하겠습니다. 전에 내가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 머무르고 있을 때, 유점사(楡岾寺)에 예수교의 큰 학자가 한 사람 왔었습니다. 한 스님이 안내를 하면서 하나님이 어느 곳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하나님이 없는 곳이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그것은 어지간히 맞는 소리입니다. 그러자 안내하던 스님이 탑을 가리키면서 저 속에도 하나님이 들어앉았느냐고 반문하자, 그 사람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곤란하단 말입니다. 불교의 탑인데 그 안에 하나님이 들어앉아 있다고 하면 하나님이 망신이 되겠거든요. 그래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아니, 당신이 뭐라고 했나요.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저기는 하나님이 왜 못 들어갑니까” 하니 그는 그만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가 버렸어요. 실로 예수교는 그런 식입니다. 요즘은 이론이 다소 발달되어서 하나님이 똥덩이 속에도 있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불교는 일체법이 모두 불법으로서 실제로 정, 혜(定慧)가 사라지고 중생과 부처가 완전히 멸한 곳에, 진진찰찰 그 어느 곳이든지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고 안 모신 곳이 없습니다.이렇게 말하니 “그럼, 좋다. 우리 가사, 장삼 다 벗어 버리고 술도 한 잔 하고 소도 잡고 춤도 추어 보자”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 경우도 그런 대장부만 나오면 그런대로 괜찮은데 만약 잘못 알고 경계에 집착하면 그 사람은 참으로 외도이며 마구니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일체가 원융하다고 말한 것은 그 관점을 근본 무명이 완전히 끊어져 중도실상을 바르게 증득한 데에 두고 하는 말이지 중생의 무명경계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눈뜬 사람은 앉아도 광명이고 서도 광명이고 누워도 광명이지만, 눈감은 사람은 앉아도 서도 누워도 캄캄하여 앞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고 무명업식에 얽매인 사견을 원융무애한 것으로 집착하면 이 사람은 끝내 지옥 중에서도 아비지옥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이 원융무애함을 바로 알고 바로 수용하려면 가장 빠른 길로 화두를 들어 진여자성(眞如自性)을 바로 깨치는 것이 좋습니다. 삼제가 원융한 원돈지관은 ‘이 무엇인가[是甚麽]’를 열심히 참구하면 마침내 알게 될 것이지만,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이론과 말만 따라가면 결국에는 지옥고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옥이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감으면 앉으나 서나 그대로 지옥이고 눈뜨면 앉은 곳 선 곳 그대로가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출처] 백일법문 제6장 천태종사상 4. 원교의 중도설 (3) 원돈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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