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조대(河趙臺)
襄陽海上靑波側-양양(襄陽) 바다 푸른 물결 옆에
飛翔鷗如亭一座-갈매기 날아갈 듯 정자 하나 있네
遠水平線頭接天-멀리 수평선 끝은 하늘에 맞닿아
天海混沌不區分-하늘인가 바다인가가 구분 안 되네
老松更添海韻致-늙은 소나무 바다운치 더하고
岩如出沒的妖怪-바위는 출몰(出沒)하는 도깨비인 듯
人生榮辱誰皆在-인생 영욕(榮辱)이야 누구나 있었겠지만
今日彼岸見河趙-오늘 두 사람 저세상에서 하조대(河趙臺)를 보고 있는가!!
농월(弄月)
※이글은 1980년 7월8일 하조대(河趙臺)를 구경하고 쓴 것이다.
관동팔경(關東八景)에 하조대(河趙臺)가 빠진 것이 아쉽다 !
용산(龍山)에 “절절하사지심(折節下士之心)”이 있는가??
논어(論語) 제17편 양화(陽貨) 6장
子張問仁於孔子. 孔子曰 能行五者於天下 爲仁矣. 請問之.
曰 恭寬信敏惠.
恭則不侮 寬則得衆 信則人任焉 敏則有功 惠則足以使人.
공자(孔子)의 제자 자장(子張)이 공자에게 인(仁)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恭寬信敏惠(공관신민혜)”이다
恭(공)-공손함이다.
寬(관)-관용이다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해야 한다.
信(신)-믿음이다 신의(信義)다.
敏(민)-민첩함이다 빨리 처리해야 한다.
惠(혜)-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절절하사(折節下士)”란 말이 있다.
큰 뜻을 품은 사람이 자기주장이나 생각을 굽히고 여러 사람들에게 자기를 낮춘다는 뜻이다
이것은 상대에게 굴복이 아니고 큰 뜻을 펴기 위한 자리를 깔아주는 것이다.
“하사(下士)”는 “하인(下人)”이라고도 하는데 남에게 자기를 낮춘다는 뜻이다.
여기서 “하인(下人)”은 남을 깔보지 않고 자신을 낮춘다는 뜻이다.
조선 임금 중에서 “절절하사(折節下士)”를 잘 갖추고 실행했던 임금은 태종(太宗) 이방원이다.
우리는 조선 역사에서 “태종(太宗)”하면
아버지 이성계와 갈등으로 함흥차사 이름이 역사에 전하고
형제를 죽인사람
정도전 정몽주 살해 등등 부정적 생각을 떠올린다.
그러나 필자 생각은 조선왕조 건국 격동기에 나라의 기틀을 튼튼하게 다진 왕이라 생각한다.
신생 조선왕조가 탄생한 초기에 이런 강력한 리드쉽이 없었으면 역사 속에 조선(朝鮮)이
존재 했을는지 의문이다.
“태종실록”에는 젊은 시절 태종 모습을 이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려 말 태종(太宗)은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어 자기주장이나 생각을 굽히고
여러 지식인들 앞에 자기를 낮추고 현명하고 어진 사람들을 찾는데 애썼다”
이것은 이방원을 칭찬하기 위한 입에 발린 말이 아니다.
이성계의 여러 자식들 중에 유독 이방원에게 많은 사람이 따른 이유가 말해 준다.
이방원이 권력을 잡은 것도 혼자 힘이 아닌 이방원 아내의 죽음을 각오한 결단과
이방원을 따르는 사람들의 헌신의 결과다.
옛역사나 지금 정치나 리더는 “절절하사(折節下士)”의 인품을 가져야
많은 사람이 따른다.
많은 사람이 따르게 하는 또 한 가지는 너그러움이다.
공자는 위의 논어(論語)에서 “관즉득중(寬則得衆)”을 강조했다.
관용(寬容)함과 공정(公正)함이 있어야 사람이 따른다.
공(公)과 사(私)가 분명해야 한다
리더는 잘못이 있으면 탁 털어놓고 국민의 이해를 구하여야 한다.
그렇다고 리더의 자리가 없어지지 않는다.
“관용(寬容)”과 “절절하사지심(折節下士之心)”은 서로 통한다.
리더의 입장에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고 자기 뜻과 어긋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쪽으로 선택하려면 자기를 낮춰야한다.
그래야 많은 사람이 따른다.
세습 왕조 시대에도 민심(民心)을 얻기 위한 왕들의 수양이 끊임없이 강조되었다.
역사기록에 조선 왕들은 “경연(經筵)”을 통해서 많은 공부를 하였다.
대체적으로 역사속 세계 왕들과 조선왕을 비교하면 조선왕들의 학문 수준이 높다고 본다.
(27명의 조선왕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시문(詩文)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국민이 지도자를 선출하는 민주사회에서는 이 점이 더 중시되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어떤 대통령은 옛 왕들보다 더 법을 악용하여 그 자리를 더럽혔다.
“절절하사(折節下士)”를 그저 선거 승리를 위한 꼼수의 하나로 이용할 뿐이다.
태종(太宗) 이방원은 영의정(領議政) 조준(趙浚)과 하륜(河崙)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두 사람을 그냥 신하(臣下)로 대하지 않았고 늘 스승과 같은
스승신하(師臣) 로 대했다.”
위에 있는 사진 하조대(河趙臺)는 두 사람의 성(姓)을 따서 이름 지은 강원도
양양의 정자(亭子)다
말년에 이곳에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필자고 경치가 너무 좋아 약 7,8화정도 간 것 같다.
태종은 항상 신하인 조준(趙浚)과 하륜(河崙)앞에서는 조심했다고 한다.
이글을 쓰면서 중국 당태종(唐太宗)과 충신 위징(魏徵)을 떠올린다.
지금 용산 대통령실에 조준(趙浚)과 하륜(河崙) 위징(魏徵)같은 사람이 있는가?
또 대통령은 “절절하사지심(折節下士之心)”을 간직하고 있는가?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