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 나는 등단 시인방'에서 어떤 시를 보았고, 말미에 아래 문구가 떴다.
'이제 염화시중의 미소를 밥이 알려준다'
* 拈華示衆 :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일
설 쇤 지가 사흘째인 오늘.
나는 집나이 74살이 시작되었는데도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문구를 이해하지 못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염화시중에 대한 설명이 있는 댓글을 보았다.
나는 아래처럼 댓글 달았고, 하나의 글감을 삼고자 여기에도 퍼서 옮긴다.
앞으로는 한자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한다.
1)
책벌레이라고 스스로를 말하는 나.
아쉽게도 한자말에는 영 재주가 없습니다.
저는 아무런 종교관이 없습니다.
아는 바도 없고.
제 둘째사위네는 기독교 가족. 바깥사둔은 지방의 목사.
제 둘째딸도 종교기관에서 남자를 만나서 결혼했으니 둘째딸네는 골수 기독교-집안..
저는 기독교/천주교, 불교, 국내에서 자생한 천도교, 예전에 숱하게 보았던 무교/잡신 무당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지요.
신, 귀신, 조상 영혼이 있다면...
왜 제 큰누나는 세 살 때, 형은 세 살 때, 쌍둥이었던 남동생은 22살에 뱀 물려서 급사했을까요?
신/귀신/영혼이 전혀 없기에 이런 사단이 생겼지요.
어려운 한자말 대신에 아름답고 쉬운 우리말로 생활했으면 합니다.
간밤에도 '염화'가 무슨 뜻인지를 몰라서 국어사전, 한자옥편을 들쳐서 검색하다가는 포기했지요.
그거 내가 알아서 뭐할 건데?
저한테는 하등의 가치가 없는 어려운 한자말에 불과하니까요.
죄송..
이런 댓글이라서...
어떤 종교인이 저한테 말하대요.
'종교 이야기는 서로 하지 맙시다'라고요.
끼리 끼리나 통용된다는 뜻이겠지요.
제 아내는 성당 다닌데도 종교 이야기에 대해서는 서로 극도로 자제하지요.
2)
합천 해인사에 있는 불경 경판이 중국말이 아니군요.
그럼 그게 한국말인가요? 아니면 인도말?
저는 그거 한 폐이지는 커녕 단 한 줄도 해석 못할 겁니다.
경판이 8만 개를 넘는다니 굉장하겠군요.
수십 년 전 해안사에 들렀으나 그 경판은 보지 못했지요.
해인사 인근에 있는 경주최씨 최치원 사적지나 들여다 보았으니까요.
덕분에 저는 글자 공부 더 해야겠습니다.
나는 한자, 외국말에는 무척이나 약하다.
공부를 지지리도 못한 탓이다.
내 초등학교 시절에는 대전으로 전학을 갔다. 호랑이처럼 무서운 할아버지.
안방인 할아버지 방에 불려가야 했다. 말총갓을 쓰고 긴 도포를 입은 한문쟁이 영감 앞에서 벼룻돌에 먹을 갈아야 했고, 긴 붓대를 잡고는 붓글씨 연습을 해야 했다. 때로는 할아버지가 내 손을 움켜쥐고는 함께 붓글씨를 써야 했다. 커다란 한지 위에 쓰여진 한자를 보고는 그대로 베껴야 했다.
그게 왜그리 그렇게 잘 써지지 않는지.
나는 돌집의 손자였고, 돌사장의 아들이었다. 할아버지 방에는 남포오석(烏石)인 비석에 새길 한자로 된 비문이 엄청나게 많았다. 붓쟁이 영감들이 늘 득실벅실거렸다.
* 남포오석 : 충남 보령지방 웅천읍, 성주산 일대에서 나오는 검은돌/ 비석을 만든다.
예전에는 남포현에 속했기에 '남포오석'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최고로 질이 좋은 빗돌이다.
불행일까, 다행일까? 내 중학교 2학년 말인 12월에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대전 읍내리 계족산에 산소를 썼고.
나는 조부가 돌아가신 뒤에는 한자 붓글씨 공부에서 해방되었다. 그 지겨운 붓글씨.
수십 년이 지난 탓일까?
나는 한문을 그다지 많이 알지 못한다.
하기사 고등학교에서는 영어, 독일어를 배웠고, 대학교에서는 영어 이외에 일본어를 선택해서 <와레와레와 간고꾸진데스>를 3년간이나 중얼거렸다. 그 뒤로는 공직시험에 필요한 영어에만 치중했고, 직장에서도 영어가 필요했기에 40대 후반까지 솰랏솰라했고, 개인적으로는 50살까지 영어회화에만 치중했다.
퇴직한 뒤 오래된 지금.. 나한테는 한자말, 외국어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가치가 있을까? 전혀 없다.
나는 퇴직 이후의 삶에 필요한 농업 전문지식이 훨씬 중요했다. 과일나무, 꽃가꾸기, 채소가꾸기에 필요한 전문서적이나 필요했다. 지방농업센터네에서 귀농귀촌학에 관한 공부를 했다. 그저 내 삶에 필요한 농사책이나 보았다.
함께 살던 어머니가 아흔여섯 살에 위독해서 서울아산병원 응급실을 거쳐서, 지방에 있는 종합병원 중환실로 모신 뒤로는 나는 농사를 완전히 포기했다. 하나뿐인 어머니는 치매기가 진행 중이었다가 병원에 입원했다. 음식물은 전혀 먹지도 삼키지도 못한 채 오로지 목구멍에 꽂은 긴 호스로만 약물을 쏟아부어서 넘겨야 했다.
나는 병원에서 먹고 자고 심지어는 남한테 얻어먹으면서, 중환자실에 장기간 누워 있는 어머니 주위에서 맴 돌았다. 나한테는 하나뿐인 어머니였기에. 어머니한테는 하나뿐인 아들이었기에.
나는 공부한다고 어린시절에 어머니와 떨어져서 객지에서 살았고, 직장생활한다고 수십 년 동안 어머니와 헤어져서 서울에서 살았다.
내가 퇴직한 뒤에서야 고향에 내려갔을 때에는, 어머니 곁에 갔을 때에는 그 어머니는 나이가 아흔 살!
고향에서 혼자서 크나큰 집에서 외롭게 살았던 어머니였다.
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충남 보령시 서해안 바다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흙집 하나 지어드리고는 그참 나는 서울로 되올랐다.
서울에서는 나한테는 할 일이 하나도 없다. 무지랭이 무직자가 되었기에 시간이나 보내려고 인터넷 개인카페에 가입했다. 아마도 거의 200개 가까운 개인카페. 그 가운데 몇 군데에서만 활동했다가 지금은 몇 군데로 압축시켰다.
전에는 내 고교 여자친구의 카페, 고교 남자친구의 카페에 먼저 잡글/생활글을 올렸으나 지금은 <한국 국보문학>카페에서만 글을 쓴다.
남의 개인 카페에서 글이나 읽고, 나도 댓글 달고, 잡글/생활글을 쓰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글쓰기 공부를 한다.
이왕이면 덜 틀리고, 보다 바르게 쓰자는 생각으로 일관했더니만 지금에는 글쓰기가 제법 나아졌다.
나는 문학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다. 딱딱한 정치 법률 사회학과 공직상의 행정에나 길들여진 사람이다. 나한테 문학이라는 게 가당할까? 전혀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 국보문학>카페에서 오래 머물자니 지금은 글쓰기에 대해서 조금은 문리가 텄다.
눈꼽만큼이다. 터럭만큼이다.
...
이런 내가 중국글자인 한자를 제대로 알랴?
현행 한자 숫자는 거의 80,000자에 달한다. 이 가운데에서 내가 아는 게 몇 개나 됄까?
나는 어쩌면 한자에 능통할 수 있는 환경이었는데도 한자에는 별로 문리가 트지 않은 채 지금껏 살아온다.
그런 거 몰라도 직장생활을 했고, 그런 거 몰라도 텃밭 농사를 지었고, 그런 거 몰라도 사회생활을 충근히 너끈히 하고 있다.
한자숙어, 한자용어 그런 거 몰라도 충분히 산다. 별로 답답한 것을 느끼지 못했기에.
내가 한자말에 무식하다는 사실이 조금은 그렇다.
서해안 내 선산에 가면 빗돌이 잔뜩 줄지어서 서 있다.
나는 그거 한 줄도 읽지 못한다. 한문쟁이나 읽을 수 있는 한자말, 한문 문구이기에.
나한테는 하등의 가치도 없는 빗돌이다. 나한테는 그냥 장식품에 불과하다. 종손인 내가 읽지도 못하는 거 그냥 돌맹이 장식품이다.
서기 1443년에 세종대왕이 만들고 1446년에 세상에 알린 훈민정음(한글)이 있기에 나는 그 어떤 책도 읽으며, 나 역시 한글로 글을 빠르게 쓸 수 있다.
내가 지금은 외국에 나가서 미국 코쟁이와 협상할 일도 없으니까 '쏼라 쏼라' 하지 않아도 된다.
까짓것이다. 내가 쏼라 쏼라 못하면 나는 한국말로 말한다. '너희들이 알아서 통역하고 번역해'라는 신조를 지녔기에.
지금은 중국 한자말보다는 국제어인 영어를 잘 하면 된다.
내 큰딸은 영어로 솰라 솰라하면서 생활한다.
나는 한국말로 말하고 가갸거겨로 한글자로 글 쓰면서 생활한다.
이왕이면 <아름다운 우리말은 바르게 많이 쓰자>라는 생각을 지녔다.
....
염화시중... 이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나.
아무래도 목탁 두들기는 중들이나 아는 용어인 것 같다.
내가 사는 서울 송파구 잠실아파트 길 건너편에는 <불광사>라는 도심 속의 절깐이 있다.
건물이 무척이나 크다. 돈 무척이나 쳐발랐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 집에서 걸으면 10분 이내에 갈 수 있지만 나한테는 그거 별로이다. 내가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는 한자말이나 읊어댈 터.
나는 그저 건달농사꾼이었다. 시골생활을 아직도 그리워 하는 탓일 게다. 내 아파트 베란다에 100여 개의 크고 작은 화분을 올려놓고는 서양 화초를 가꾼다. 추운 겨울철인데도 차거운 수돗물을 자주 부어준 탓일까? 공기소통하라고 열은 유리창문으로 찬 바람을 쐰 탓일까?
서양화초 10여 그루가 죽었다.
아무려면 어떠랴 싶다. 나는 이제는 서양의 다육식물보다는 우리나라 토질과 기후에 적응해서 사는 마늘, 쪽파 등 실용적인 작물을 재배하고 싶다.
하나의 예다. 지난해 가을 황소마늘을 쪼개서 화분에 시험삼아서 심었더니 이게 잘도 자란다. 아내는 두 차례나 시풋한 줄기를 잘라서 밑반찬했다고 한다.
나는 깨닫는다.
서양의 식물보다는 우리나라에 자생하고 적응하는 식물이 훨씬 가치가 있다고.
흔해빠진 식물이 더 가치있다는 생각을 지닌 나.
문학측면에서 나는 앞으로도 더욱 그래야겠다.
중국의 한자말보다는 우리의 토박이말을 더 사랑하며 존경하면서 문자생활을 하겠다고.
오늘도 문학카페에서 어떤 시인의 시를 보았다.
<등단 시인방>에 오른 시인데도 나는 고개를 사뭇 내젓는다.
시라서 그렇게 일부러 틀리게 쓰는 거여? 잘못 써야 한다는 무슨 규정이라도 있는 거여?
아닐 게다. 자기 나라 말조차도 서툴러서, 자기 나라 글자조차도 서툴게 쓰는 게 무슨 시인이라고 ...
나중에 보탤란다.
나를 더 반성해야 하기에...
한자말.. 나한테는 무척이나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