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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삿 6:25-32
25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26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27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28 그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었으며 그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제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
29 서로 물어 이르되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가 하고 그들이 캐어 물은 후에 이르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30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하니
31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32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 함이었더라
삿 6:25-32 / [깨어진 우상 제단] 그날 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셨다. `네 아비가 기르는 살진 소, 곧 칠 년된 소 한 마리를 산꼭대기로 끌고 가서 네 아비가 쌓아 놓은 바알 제단을 헐어 버리고 그 제단 옆에 세워 놓은 아세라상도 찍어 버려라. 26) 그런 다음 그 옆에다가 네 하나님 나 여호와에게 제물을 바칠 단을 돌로 차곡차곡 쌓아 올려라. 끌고 온 수소를 잡아서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번제를 드릴 때에는 네가 찍어 버린 아세라상의 나무를 불태워 올려야 한다.' 27) 기드온은 자기 일을 거들 사람 10명을 데리고 올라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였다. 그런데 기드온이 이렇게 여호와의 말씀대로 실천한 때는 낮이 아니라 밤이었다. 남이 알아볼 수 없는 밤에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기드온이 자기 아버지뿐만 아니라 자기 가문 사람들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28) 다음날 아침 마을 사람들이 일찍 일어나보니 바알 제단이 허물어져 있고 그 옆에 세워 두었던 아세라상도 찍혀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제단이 세워져 있는데, 그 위에 제물까지 드렸던 흔적이 남아있는게 아닌가! 29) 그것을 바라보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 수군대기를 도대체 어느 녀석이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고 하면서 조사를 해본 결과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그렇게 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30) 마을 사람들이 요아스의 집으로 몰려와서 `당신 아들을 끌어내시오. 당신 아들이 바알 제단을 허물어 버리고 그 곁에 세워 두었던 아세라상까지 찍어 버렸소. 그러니 당신 아들을 우리 손으로 죽여야 하겠소.' 31) 요아스는 자기 집에 몰려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당신네들이 바알의 편에 서서 입씨름이라도 하겠다는 말이오? 아니, 그래, 당신들이 바알을 구해 내기라도 하겠단 말이오? 그렇게 열만 올리지 말고 바알을 편들어 입씨름하겠다는 사람 있으면 나서 보시오. 그런 사람은 오늘 아침 죽음을 면치 못할 테니 그리 아시오. 바알이 진정한 신이라면 그 단이 허물어져 버렸을지라도 스스로 나타나 기드온을 죽이든지 할 것 아니겠소?' 32) 그날 사람들은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고 불렀다. 기드온이 바알 제단을 헐어 버렸기 때문에 바알이 그와 맞설 것이라고 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기드온이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내고,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립니다. 모두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입니다.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25-27) 하나님은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7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규례대로 제단을 쌓으라고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25). 이렇게 명령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를 가장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밤에 7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오라고 하셨습니다(25). 이스라엘의 하루의 시작은 저녁이기에 하루의 첫 시간에 드리라는 것이고, 7년 된 둘째 수소는 7년 동안 미디안에 지배받은 기간을 의미합니다. 본문의 둘째 수소는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수소 두 마리라고도 해석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제사로 드린 수소가 한 마리이든 두 마리이든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드려지는 면에서 의미는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대속제물로 드려지신 예수님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바알의 제단이 파괴된 것을 보고(28-30) 새로 쌓은 제단 위에 수소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28). 이를 본 성읍 사람들이 기드온의 행위로 알고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요아스에게 네 아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가합니다. 이처럼 의로운 행동에는 저항이 따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말씀처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마 5:10-12).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31-32) 감사하게도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신앙관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바알의 편에서 변론하는 것을 책망합니다. 그래서 바알이 살아있는 신이라면 그가 기드온을 처리할 것이니 바알에게 기드온을 맡겨두라고 합니다. 지혜롭고도 믿음이 있는 변론입니다. 요아스의 영적파워에 압도당하여 사람들은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알이 그와 더불어 싸울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지도자(Leader)를 세우시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고 함께 할 사람들을 보내 주십니다.
적용: 당신은 둘째 수소처럼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희생한 주님께 늘 감사하고 있나요? 당신은 여룹바알처럼 우상과 이단세력들을 이길 수 있는 영적파워를 키우고 있나요?
성읍 사람들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아세라 상을 찍어버린 기드온에게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여룹바알’이란 ‘바알이 직접 싸울 것이다’는 뜻입니다. 바알이 신이라면 자기 형상을 파괴한 자를 가만둘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진노한 바알이 직접 싸워, 기드온은 벼락 맞아 죽든, 병에 걸려 죽든, 비참하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여호와를 위하여 바알의 제단을 허물고 수소를 잡아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린 자입니다. 그는 멀쩡하게 살아서 이스라엘을 구하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후일 ‘여룹바알’이라는 말은 비난의 말이 아니라 영광의 면류관과 같은 칭송의 말이 됩니다.
< 설 교 >
바알의 단을 헐며
삿 6장 25~40절 / 양인국목사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를 통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앙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듣고 그 대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확인한 후부터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순종했다. 우리는 기드온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온전한 마음으로 말씀에 따라 살도록 이끌어 주는 것은 확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자신이 들은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던 기드온이 얼마나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2. 25,26절의 말씀이다.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6:25,26)” 여기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라는 말은 기도온의 아버지는 우상숭배자였다는 것을 말해 주며 또한 그 집이 바알숭배의 전당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바알의 제단을 헐고 우상을 찍어 버리는 행위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이웃들에 대한 강력한 도전행위였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명하신 일은 생명을 담보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이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임한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확신할 때 환경을 초월하여 말씀에 따라 행할 수 있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과정들을 통하여 믿음을 보다 더 온전함으로 세워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기드온이 말씀에 순종하여 바알의 제단을 헐지 못한다면 어떻게 더 큰 일 즉 미디안과 싸울 수 있었겠는가?
기드온이 예상했던 대로 아침에 성읍 사람들은 우상이 찍힌 것을 보고 크게 동요했고, 그 일을 행한 자를 밝혀내어 죽이려 했다(6:28-32). 이와 같은 사람들의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나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는지 말해 주고 있다. 특별히 본문에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 본즉”이라는 말은 이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무엇보다 먼저 하는 일이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었음을 말해 준다.
놀라운 사실은 이와 같은 위기의 상황에서 기드온을 구해 준 사람이 우상 숭배자이며 자신의 집을 우상의 전당으로 만들었던 아버지 요아스였다는 것이다. 요아스는 아들을 죽이기 위하여 내어달라고 외치며 자신을 둘러싼 성난 무리를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6:31)” 여기 요아스가 성난 무리에게 말한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는 말은 지금 그들이 행하고 있는 행동과 우상 숭배에 대하여 크게 도전되는 말이었다. 즉 그들은 바알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그것을 숭배하고 있는데, 지금 그들이 행하고 있는 행동은 바알을 보호해 주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기도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계속하여 무리에게 말했다.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6:31)”
기드온의 믿음의 행동은 먼저 아버지를 변화시켰다. 기드온의 아버지는 우상숭배자였지만 아들의 행위를 통하여 바알 숭배가 헛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기드온의 행위는 아버지의 권위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아버지를 우상 숭배로부터 돌이키게 했다. 우리는 기드온의 믿음의 행위가 우상숭배자였던 아버지를 변화시킨 것을 보며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주신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내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우리가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면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언제나 최선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따라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드온의 믿음의 행위는 아버지를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성읍 사람들에게도 우상 숭배의 헛됨을 깨닫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무리에게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음을 당하리라”고 말했을 때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더 이상 기드온을 내어달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그들 모두가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한 사람의 믿음의 행동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는 은혜의 수단으로 작용한다.
“그 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요단 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기드온이 또 사자들을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따르고 또 사자들을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 그를 영접하더라(6:33-35)” 본문은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하여 요단을 건너와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쳤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때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임하셔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행해야 할 일들을 말씀해 주셨고 그 말씀을 들은 기드온은 전쟁을 위한 나팔을 불었다(민10:9).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는 자는 두려움이 없다. 이전의 기드온은 미디안이 두려워 숨어서 밀을 타작하던 자였으나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지금은 미디안과 싸우기 위하여 나팔을 부는 자가 되었다. 기드온이 이처럼 믿음을 가지고 나팔을 불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비에셀과 므낫세와 아셀 그리고 스불론과 납달리가 그를 따른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을 말해 준다.
36-40절의 말씀이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기드온은 거듭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하였다. 여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믿음이 확실하면 승리도 확실하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보장해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면 누가 싸움의 대상이 될지라도 두려워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기드온은 전쟁터에 나가기 전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 전쟁에서 승리를 보장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양털 뭉치를 가지고 거듭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간구를 들어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기 위하여 행하는 일들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말해 준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기 위하여 믿음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는 듯한 물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갈지라도 그것은 불신앙과 다르다. 왜냐하면 불신앙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밖에 없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따라 행하기 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기드온이 양털로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해 보고자 한 것도 이와 같은 행동이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말씀해 주고자 하신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믿음의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살도록 이끌어 주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들은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누가 그 말씀에 반하는 길을 갈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말씀에 따라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 호세아를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이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주가 계신 것과 주가 주신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해 주시고 이 믿음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갈 수 있도록 해 주옵소서. 아멘!
우리가 찍어 버려야 할 것
삿 6장 25~32절 / 이영무목사(영신교회)
여러분 참 잘 오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 여러분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고 기쁨 주시기를 원하시고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절망이 희망으로 여러분의 상처가 기쁨으로 회복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두 분의 선교사님이 아프리카에 가서 사역을 하고 있었답니다. 어느 날 밀림 지역으로 가서 사역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주 위험한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 큰 사자가 나타났답니다. ‘어이쿠 죽었구나!’ 덜컥 겁이 났습니다. 그런데 두 선교사님 중에 한 분이 갑자기 운동화 신발 끈을 열심히 매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 한 선교사님이 ‘여보게 자네가 아무리 신발 끈을 매고 열심히 달려도 사자만큼 빠를 수 있겠나?’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랬더니 신발 끈을 매던 그 선교사님이 냉소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그럼 내가 신발 끈을 맨다고 해서 사자만큼 빠를 수 없지. 그러나 적어도 자네보다는 빠르지 않겠나?’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믿을 사람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이 믿음의 대상이고 신뢰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 앞에 헌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6층 두란노실에 지난 주간에 한 번 가 봤더니 아주 놀랍게 변해 있어요. 두란노실이 그렇게 깨끗하고 아름답지 않았는데 아주 얼마나 아기자기 하게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페인트칠도 새로 깨끗하게 해서 정말 다른 방에 온 것 같아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마더 와이즈 시작하면서 우리 청년들이 토요일 아침부터 오후까지 반나절 동안 봉사했어요. 벽 흰 페인트를 새로 해서 약간 블루가 나서 아주 보기 좋게 페인트칠을 다 했어요. 필요 없는 물건들을 다 정리했어요. 그리고 거기다가 이제 다른 분들이 장식을 했는데 너무 아름다운 방이 되었어요. 청년들 일곱 명이 토요일에 데이트 할 일도 많았었고 얼마나 바빴을까? 그러나 그들은 그 귀한 시간을 하나님의 교회에 와서 여러 성도님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방을 꾸미는데 시간을 헌신 했어요. 그 헌신의 결과는 보는 사람마다 너무너무 기뻐하는 거예요. 이렇게 들어오고 싶은 방이 되었구나 하고 느끼는 것이예요. 여러분 우리 작은 헌신도 하나님께 영광이고 많은 분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찾으셔야 해요. 그런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간 가정 치유 집회를 했습니다. 가정 치유에 관한 좋은 말씀들 우리 정태기 박사님 말씀 듣고 얼마나 저도 은혜를 받았는줄 모릅니다. 마지막 셋째 날 금요일 밤에 목사님이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어요. 그 정태기 박사님의 친구가 같은 한신대학교 교수로 계시던 고재식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총장까지 하셨어요. 그런데 그 고재식 박사님하고 정태기 박사님은 같은 동리입니다. 신안군 증도에 있는 아주 작은 섬입니다.
그런데 정태기 목사님의 가정은 집안이 넉넉해서 돈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고재식 박사님은 집이 굉장히 어려웠대요. 할아버지도 남의 집 머슴이었고 아버지도 남의 집 머슴이었답니다. 땅 한 평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는 것이 뻔 하지요. 7-80년 전 이야기니까요. 그렇게 어렵게 살아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못 갔어요. 그래서 고재식 박사님이 우연한 기회에 동네 교회에 나오게 되었어요. 그런데 보니까 그 소년이 어떻게 새벽 기도회를 나오게 되었어요. 어른들이 새벽기도를 나오는데 자기도 나오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어른들이 그 당시에는 너무 가난하니까 헌금을 못 드리고 보리쌀을 가지고 나와서 성미를 드리는 것을 봤어요. ‘나도 좀 뭘 드리고 싶다.’하고 소년은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자기는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광에 갔더니 그 쌀 한독이 있는데 거기에 제사 때 쓸려고 쌀을 모아 놓은 것이 있어요. 아 그것을 두 됫박 퍼서 자루에 퍼 넣어서 가지고 온 거예요. 엄마가 알면 맞아 죽지요. 그것을 새벽에 가지고 왔어요. 그런데 그 날 따라 교인들이 아무도 안 온 거예요. 전도사님도 안 나왔어요. 그래서 그것을 제단에 올려 놓고 기도하고 돌아왔어요.
나중에 그는 검정고시를 통해서 학위를 따게 되고 그리고 한신대학교에 신학생으로 입학을 했어요. 신학생으로 입학을 하고 같이 체육대회를 하기로 되어 있어요. 정태기 목사님, 고재식 목사님 모두 신학생들이니까 서울에 있는 6개의 신학대학이 같이 체육대회를 하는데 거기서 신안교회의 전도사님을 만났어요. 지인태 전도사님! 너무 반가워서 빵집에 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도사님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그 신안군에 있을 때 참 고생 많이 했다. 밥 먹는 것 보다 굶는 게 더 많았다.’는 거예요. 어느 날은 새벽기도를 가려고 일어났는데 그만 어지러워서 쓰러져 버렸어요. 며칠 동안 먹지를 못했거든요. 그렇게 보니까 죽겠더라는 거예요. 동네가 너무 가난하다 보니까 먹을 것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죽더라도 제단에서 기도하다 죽어야지 그러면서 기어서 강대상까지 왔답니다. 거기서 죽으려구요. 그런데 거기에 쌀 두 됫박이 있는 거예요. 이건 하나님이 보내신거다! 하나님이 보내신거야! 할렐루야!! 그리고 그거 가지고 연명을 해서 생명을 유지했다는 거예요. 도저히 목회할 환경이 안돼서 그가 정리를 하고 육지로 뭍으로 나왔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이제 대학원생이 돼서 체육대회를 참석한 거예요. 거기서 만난 거예요. 근데 그때 고재식 신학생이 “전도사님 그거 제가 갔다가 놓은 거예요.” 그러는 거예요. 얼마나 놀라운지. 그래서 서로 반가워서 간증을 나눴다는 거예요. 참 놀라운 일이죠. 세상에 살다 살다 이런 간증이 있을 수 있어요. 그 어린 소년이 갔다가 놓은 걸 놓고 전도사님이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났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후에 목사님이 되고 교수님이 되셨어요. 근데 한신대학이 종합대학이 되면서 이 고재식 박사님이 총장이 됐어요. 그때 정태기 박사님이 그런 생각이 들었대요. ‘아니 고재식이하고 나하고는 친구인데 우리 집안이 훨씬 잘살고 내가 더 잘생겼고 내가 공부도 더 잘했는데 어떻게 저 친구가 나보다 총장이 먼저 된다는 말이야.’ 이런 생각이 불만스럽게 들었대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유가 있더라는 거예요. 저 친구는 굶을 죽을 때에도 쌀 한 되박을 갔다가 전도사님을 살렸어요. 하나님이 그 옥합을 깨뜨린 정성을 보셨구나. 그래서 고재식 박사님이 미안해했다는 거예요. “자네가 총장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돼서 미안해.” “아니야. 자네는 총장 될 자격이 있어. 자네는 옥합을 깨드렸잖아. 하나님 앞에 헌신했잖아. 생명을 살렸잖아.” 그렇게 위로를 해드렸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헌신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헌신하는 영혼들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전도영상을 봤습니다만 오늘도 전도를 위해서 우리가 헌신할 수도 있고, 헌신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전도는 나와 상관없는 거야. 전도는 전도사가 하는 거지. 내가 왜 전도를 해.” 라고 그냥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하나님의 주신 명령 앞에 최선을 다해 헌신하는 사람들,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그런 사람이 천국에서 가장 유명한 자가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헌신하는 영혼들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이라는 한 젊은이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어려운 명령을 내리십니다. “네가 바로와 아세라 상을 찍어서 그 찍은 나무로 땔감을 만들어서 내게 번제물을 바쳐라.” 하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얘깁니다. 바로와 아세라 신상을 헐고 찍어버리라. 여러분 기드온은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특별히 어릴 때부터 제사일 때문에 아버지 손을 붙들고 가서 바알 신상에 절을 하던 그런 젊은이였습니다. 여러분 무당이 평생 굿을 해서 먹고 살았는데 마음이 변한다고 굿당을 다 당장 허물 수 있겠습니까. 굿당을 허물었다가 ‘내가 이거 혹시 벌 받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 안 들겠어요. 근데 기드온은 그 제단을 헐어야 되는 우상의 제단을 찍어버려야 되는 어려운 위기에 처하게 됐어요. 그러나 기드온은 결국 그 일을 해냅니다. 그는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기드온이 그 어마어마한 우상의 제단을 헐어버릴 수 있었을까요? 그가 무슨 간이 부었을까요? 우황청심환을 먹고 배짱이 두둑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누군가가 대신 그 일을 해줬을까요? 무엇이 기드온으로 하여금 죄에 고리이고 상징인 바알 제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가 드려지게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이 시대에 찍어야 할 아세라 상이 있습니다. 우리가 헐어버려야 될 바알 제단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이 붙들고 있는 것들, 때론 물질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중독되어서 거기에 끌려 다니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무언가에 붙들려서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사랑하는 것이 있을 수 있어요. 오늘 이 시대에 많은 분들이 중독 현상에 시달립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있습니다. 게임 중독에 많은 젊은이들이 빠져있습니다. 인터넷 중독에 빠져있습니다. 홈쇼핑 중독에 빠져서 물건을 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여자분 들도 있다고 그럽니다. 어떤 분들은 음란영상에 중독에 빠져서 그것 보지 않으면 잠을 못 잔다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들을 해치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만들고 우리 영혼을 공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대기업에 다니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술을 처음에는 그저 기분 전환 정도로 먹고 마셨습니다. 나중에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결혼해서도 술을 끊을 수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술 한 잔 반주하고 출근합니다. 입에서 늘 술 냄새가 풍깁니다. 결혼을 했는데 아내가 그 남편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요. 퇴근할 때 온전한 정신으로 퇴근한 적이 없어요. 꼭 술 취해서 들어오는 겁니다. 아내는 결심했어요. “당신하고는 못살겠다. 우리 별거하자.” 그리고 아내가 짐을 싸서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렸어요. 정말 어려운 위기에 봉착하게 됐어요. 그런데 이 술 취한 이 사람은 정말 어렵게 기적적인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술을 끊게 됩니다. 그리고 신실한 신앙인이 되죠. 그는 회사에서 인정을 받고 대기업에 지금 말하면 여러분이 다 알만한 대기업의 사장이 됐고, 고문을 지내고, 그는 교회의 장로가 돼서 열심히 봉사하다 지금은 은퇴하셨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끊기가 어려운 술 중독에서 해방 되게 했을까요. 그가 무슨 비법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심리치료를 받았을까요.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었을까요. 무엇이 그로 하여금 바알과 아세라 상과 같은 술 중독에서 그가 해방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기드온의 이야기는 때를 거슬러서 약 3400년 전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의 통치를 받던 사사시대 이야기입니다.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바알신당의 제사장으로서 그 신당을 관리 할 때 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혼합종교를 섬깁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동시에 그 가나안땅에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을 잘 섬겨야지 하늘을 비를 내리고 저들을 잘 섬겨야지 땅이 농사를 짓는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거대한 바알 신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다 제물을 드리고 수소를 드리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게 바로 가나안땅의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어요. 교회에 와서는 예배를 드리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또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하나님보다 그 우상을 더 사랑할 수 가 있습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거대한 바알 신상 앞에 두려워 떠는 마음으로 그 앞에 절을 하고 예물을 드립니다. 우리가 예물 안 드리면 우리가 벌 받지, 농사가 망하지 늘 이런 두려움 가운데 살아갑니다. 기드온은 특별히 겁 많은 젊은이 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요아스를 따라서 우상에게 늘 절하던 그런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은 왜 우리민족을 축복하시지 않아, 왜 미디안에 의해서 우리가 고난을 당해야해. 늘 이런 불만속에 살아가던 그런 젊은이 였습니다. 믿음이 없던 그 시대 사람. 결국 기드온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은 우상이 그들에게 더 크게 보이곤 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기드온에게 놀라운 명령이 임했습니다. 기드온아 너가 가서 이제는 바알 제단을 헐고 아세라상을 찍어서 그 나무를 쪼개어서 내게 번제물로 바쳐라. 아주 무서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기드온은 두려워 떨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는 겁쟁이 였거든요. 아 내가 어릴 때부터 바알제단에 절을 했는데 어떻게 헐수 있어요 아세라 상을 내가 찍어서 어떻게 불쏘시게로 쓸 수 있어요. 그는 그런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때부터 고민하게 됩니다. 내가 만약에 아세라 신상을 찍어 버린다면 그것은 곧 아버지를 찍는 것과 똑같은 거야. 왜? 아버지가 제사장인데 아버지를 배신하는 일이지. 내가 어릴 때부터 섬겨왔던 그 신을 내가 어떻게 싸워서 이길 수가 있을까? 내가 어떻게 찍다가 잘못될지도 몰라. 벌을 받을 지도 몰라. 더군다나 그 신상을 바라보면 그 날카로운 눈매가 자기를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꼼짝달싹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저 바알신상을 헐었다가 이 마을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나를 잡아 죽이면 어떻하지 우리집안이 이 동네에서 몰살당하면 어떻하지. 우리 아버지가 제사장인데 이 제단을 헐면 우리 집 굶어 죽으면 어떻하지. 가족의 생계가 막막해요.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믿음 없는 기드온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보다 죽은 우상이 더 두렵게 보이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기드온은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쓰나미 같은 고통이 몰려옵니다. 밤마다 참으로 그는 고통을 당합니다. 바위 같은 근심이 그의 가슴을 짓누릅니다. 저 바알을 찍어야 되는데 저 제단을 헐어야 하는데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너무나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세라 상의 눈빛을 바라보면 자신을 쏘아 붙이는 그 눈빛 앞에 온 몸이 오싹 거립니다. 잎에 침이 마릅니다. 식은 땀이 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불평을 토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직접 찍으시지 왜 하필이면 나보고 하라는 거예요. 나쁜 일은 다 나한테만 시키고. 불평도 해봅니다. 하나님 도대체 못하겠어요. 아에 그냥 나를 찍으세요. 나를 찍으세요. 난 도저히 못 찍겠어요. 그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기드온이 어찌 보면 하나님의 명령은 고통처럼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기드온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앞에 헌신하기를 다짐합니다. 자 오늘 성경을 다시 한번 보시죠. 사사기 6장 27절입니다.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아멘! 할렐루야.
정말 이 어려운 명령. 이제는 기드온이 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실행 할 수 없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그는 아세라 상을 찍을 것을 결심했어요. 아니 죽을 각오한 겁니다. 망할 각오 한 겁니다. 그 찍다가 발각되면 나는 끝장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더 우선순위에 뒀습니다. 그런데 낮에는 도저히 못하겠어요. 사람들이 보면. 그래서 한 밤중에 그 일을 하기로 결심했어요. 그런데 혼자는 못하겠어요. 그 어마어마한 바알신상을 허는 게 혼자 될 일이 아니에요. 도끼 몇 개 가지고 안 됩니다. 자기 집에 종 10명을 설득하고 부탁했어요. 너희가 좀 도와주라. 그래서 종 10명을 데리고 갔어요. 바알, 아세라 신상을 쳐다보는데 공포심을 느꼈지만 그러나 그는 바알제단을 가차 없이 헐기 시작했어요. 아세라 신상을 꺽어 버렸습니다. 팔을 짤라 버리고 다리를 잘라 버리고 목을 잘라 버렸어요. 온 몸을 산산조각 나도록 장작 패듯이 팻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번제물의 땔감으로 쓰도록 했습니다. 그것만 아니에요. 둘째 수소를 데리고 높은 산 위에 올라갔어요. 허물어진 하나님의 제단을 다시 수축합니다. 거기에 7년 된 수소를 놓고 그리고 그 아세라 상을 찍은 그 나무를 가지고 땔감을 해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립니다. 기드온의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내가 저 나무 막대기와 같은 저 우상에게 속아서 몇 십 년 동안 헛된 삶을 살았지. 하나님을 배신했지. 이제 하나님 앞에 정성을 다해서 예배드리는 그 기드온의 마음에는 기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한 편에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기드온은 믿음으로 헌신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결코 이 시대의 죄악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죄를 끊고 우상을 찍어버리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악한 습관을 버리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죄악을 청소했습니다. 죄악의 꼬리를 끊어버렸습니다. 절단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 같은 젊은이가 그 언제까지 바알과 아세라 신상에게 절하면서 그렇게 죄악에 물들어 사는 것을 원치 않으셨어요. 그가 정결한 청년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서기를 하나님은 원하셨어요. 또 하나님은 기드온의 마음에 용기를 주시고 믿음을 주셨어요.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깐, 기드온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그런 신실한 예배자가 되도록 하나님은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마음속에 우상 숭배가 큰 죄악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담대함을 주십니다. 그리고 열 명의 종들을 그에게 붙여주십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주십니다. 그리고 여러분 한 밤 중에 그 어마어마한 바알 신상을 칼로 쳐서 찍어내고 허는 데 소리가 조그만 동네에 안 나겠습니까?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이 태풍을 보내셨든지, 소나기를 보내셔서 그 소리를 다 차단시켜 주셨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기드온이 어떻게 됩니까? 이게 다 들통이 납니다. 그런데 그의 제사장인 아버지가 오히려 기드온을 변호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드온을 “죽여야 되겠다.” 그러니깐, “아니다. 바알이 살아있으면 그가 직접 복수할 것이다. 기다려보자.” 오히려 아들을 변호해주는 것입니다. 이거 하나님이 도와주신 거예요. 하나님은 오늘도 믿는 자 속에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짓된 것을, 죄악된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붙들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정말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기드온의 헌신을 하나님은 너무너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그는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기드온이 죽었습니까?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해주셨습니다. 담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만이 진정한 신이심을 그는 온 천하에 공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에게 임합니다. 마을 사람도 존경을 받게 됩니다. 그는 유명인사가 됩니다. 그리고 담대한 기드온은 나중에 전쟁에 나가서 또 큰 승리를 거두게 되지요. 기드온의 이름이 그 때부터 여룹바알로 바뀝니다. 여룹바알이란 말은 ‘바울과 싸워서 이겼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감히 우상 신과 싸워서 이긴 사람입니다. 여룹바알, 위대한 사사가 되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바알과 아세라 상을 찍어버리지 아니하고, 계속 우상을 섬겼다면 하나님이 미디안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켰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를 복으로 바꾼 인물이 바로 기드온입니다. 그들의 죄악 때문에, 그들의 우상숭배 때문에, 하나님은 미디안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셨거든요. 그런데 이제 기드온이 헌신함으로 하나님의 복이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믿음으로 행하는 자를 기쁘게 여기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도 이런 문제들이 늘 따라있을 것입니다. 오늘 기드온 시대의 문제는, 그 시대 3400년 전의 얘기만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그들이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또 섬겼듯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만 동시에 우상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무슨 이사하려면 꼭 점쟁이한테 가서 물어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컴퓨터 점이라는 것을 칩니다. 점을 칩니다. 거기에 가서 물어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거나 묻지 않습니다. 이게 뭐에요? 또 하나의 우상을 섬겨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믿지만, 동시에 얽매여있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 도박 중독, 인터넷 중독, 게임 중독, 음란 영상을 보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는 사람들. 이거 끊기가 쉽지 않아요. 예배드릴 때마다 마음의 가책이 됩니다. 설교의 지적을 받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왜 목사가 저런 얘기를 해, 불편하게, 좋은 얘기나 하지.”
죄를 지적 받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하지만 끊지 못합니다. 똑같은 생활이 반복 됩니다. 앞에 말씀드린 알콜 중독이 된 대기업 직원은 아내가 떠나고 그날도 빈방에서 술을 먹습니다.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고, 얼음주머니에서 얼음을 꺼내려고 하는 순간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덕진아 너 술을 끊어라 하나님의 음성이었어요. 하지만 그는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는 막무가내로 술을 마십니다. 그 다음날 출근을 합니다. 퇴근 후 회사 회식이 있어서 참석을 했어요. 그런데 그 앞에 놓인 술을 보는 순간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술을 어느 때와 다르지 않게 술을 먹습니다. 하지만 다 토해냅니다. 온 시장 바닥에 자기 먹은 것을 다 토해냈어요. 집에 질질 끌려서 돌아왔어요. 그때서야 그는 하나님이 술 끊으라고 말씀하신 것을 확신합니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제 술을 끊겠습니다. 술 입에도 안대겠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다음날 술자리에 초대를 받아도 술 생각이 없어요. 물론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은 점점 사라졌어요. 그는 그 때부터 중독에서 회복되었어요. 그는 열심히 일합니다. 신실한 회사원이 됩니다. 그 내놓으라는 대기업에 사장이 됩니다. 나중에는 사장 자리를 내려놓고 고문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장로님으로 열심히 섬기다가 이제 은퇴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알리기 어려운 습관들이 있지 않습니까? 죄의 연결고리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은밀한 죄악 된 습관을 끊기를 원하십니다. 기드온이 가차 없이 바알과 아세라 상을 찍어버렸듯이 여러분의 죄악 된 습관을 끊어버리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정결한 사람들의 예배를 원하십니다.
우상숭배 하던 그들이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은들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가 죄악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정결한 몸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하나님은 바라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죄악을 끊습니다. 그리고 정결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로마서 6장에 보니깐 너희의 몸을 불의의 병기로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드리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인들이 이런 양심의 가책들 남에게 알리기 부끄러운 은밀한 죄악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고통을 가지고 있는 한 믿음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진실한 기도를 드릴수가 없습니다. 늘 양심의 가책에 시달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이러한 억눌림에서 해방되길 바라고 계십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를 창조하시고 공의하신 하나님 여러분을 도와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마음속에 내 악한 습관이 깨달아 질 때 결단할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도록 좋은 동역자를 붙여 주십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행동을 인도하십니다. 성령으로 여러분을 결단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위대한 성도는 죄의 습관에 끌려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악한 습관을 찍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감정에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지금까지 끊어버리려고 해도 실패했던 것들, 어둠속에서 홀로 붙들고 있었던 것들을 과감하게 찍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결단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건강을 주십니다. 다시는 유혹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건전한 취미를 주시고 가정의 행복을 주십니다. 부부관계에도 변화를 주십니다. 이제 믿음이 성장하고 그리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받게 하십니다. 은혜가 충만합니다. 매사에 자신감이 생깁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빠른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인생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늘 지혜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이고 결단입니다. 우리 한번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을 자막에 한번 읽어볼까요? 로마서 12장 1절과 2절 자막에 한번 준비해주세요. 같이 읽습니다. 시작.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이 어두운 세대를 따라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이 어두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그리고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무슨 말씀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진정한 예배 자는 죄를 끊으셔야 됩니다. 죄의 고리를 정리하셔야 됩니다. 죄악의 습관을 찍어버리셔야 됩니다. 그리고 정결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셔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산 제물이고 진정한 헌신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기뻐하세요. 이런 성도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진정 죄악 된 삶은 끊어버리시고 헌신된 삶을 살기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요? 전도하는 것입니다. 전도.
저는 알코올 중독자가 전도하는 것은 못 봤습니다. 인터넷 게임에 중독된 사람이 전도하는 것 못 봤습니다. 그 사람은 거기에 빠져 있어요.
그러나 정말 전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먼저 정결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과 시간을 주님을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에 우리자신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인생을 책임져주시고 복 주실 줄로 믿습니다.
전도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지옥에서 한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만이 전도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전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전도하려고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이 주신 그 사명에 귀를 기울이셔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드려서 헌신해야 됩니다. 우리는 앞에서 해병대를 제대한 한 노인의 영상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전도에 헌신 할 수도 있고, 헌신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헌신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하늘의 스타가 됩니다. 하늘의 복을 받습니다. 이 땅에서도 너희가 복음을 위해 헌신하면 내가 백배의 복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면 우리의 일을 주님께서 대신해주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전도를 위해 우리 자신을 드리면 그 외 모든 것 하나님께서 공급하시고 채워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 이번주간에 꼭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전도를 위해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작정한 태 신자들을 위해서 하루 세 번 기도하십시오. 기도 없이는 전도가 안 됩니다. 기도만이 태 신자의 마음을 열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만나셔야 합니다. 만나지 않으면 전도가 안 됩니다. 만나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당신 예수 믿으십니까? 당신오늘 죽으면 천국 갈 자신 있으십니까?” 여러분 물으셔야 됩니다. 만나서 물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이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렇게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볼 때에 저 사람은 전도가 될 거야 안 될 거야 미리 판단하지 마세요.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세요.
정말 전도가 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너무 쉽게 전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전도가 잘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시고 기도하고 나아가십시오.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이 누구를 만나든지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십시오. 라고 물으십시오. 예수 믿느냐고 질문해 보십시오. 오늘 죽으면 천국 갈 자신 있느냐고 물으십시오. 이것이 바로 전도의 시작입니다.
전도는 타인을 죄에서 건져내고 생명의 복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전도의 헌신으로 하늘의 상금을 쌓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소명을 받았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사사기 6:25-40 / 김준원목사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지금까지 역사상 가장 운 좋게 예수 믿은 사람을 뽑으라면 누구를 뽑으시겠습니까? 아마도 많은 분들이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를 뽑으실 것 같습니다. 그는 악하게 살다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너무나 운이 좋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옆에서 자기도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안 믿는 분들 중에서 성경을 조금 아는 분들은 예수 믿으라고 하면, ‘나도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 강도처럼 마지막 죽기 직전에 믿겠다.’고 말합니다. 실컷 인생을 즐기며 살다가, 자기가 좋은 대로 살다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믿고 천국 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만 알고 셋(?)은 모르는 생각입니다. 보통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고 하지만 이 경우에는 ‘셋을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은 뭐냐 하면, 사람은 자기가 언제 죽을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안다고 해도 그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을지 없을지, 힘이 남아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셋이 더 중요한데, 예수님 옆에는 그 사람 하나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두 명의 강도가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렸는데, 한 명은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다른 한 명은 끝까지 거부하고 저주하다가 그냥 죽었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예수님 옆에 있었지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똑같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각각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지고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은 그 강도가 결코 단순히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믿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구원으로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 강도는 그리스도인 중에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으로의 부르심을 받고나서 소명자의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원을 받자마자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을 한 것이 없이, 그냥 예수님 믿고 천국에 간 겁니다. 소명자로서 살 때 누릴 수 있는 기쁨과 감격과 행복과 영광을 알지도 맛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론 그가 한 일이 하나 있긴 합니다. 예수님을 비방하고 모독하고 저주하는 다른 강도를 꾸짖었습니다. 꾸짖는 소명을 받은 건가요? 그거 하나 하고 갔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구원으로의 부르심이 있고, 또 소명자 또는 사역자로의 부르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두 가지 부르심 중 하나만 받는 것이 아니라 둘을 동시에 받습니다. 구원을 받은 자라면 하나님의 소명 없이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구원을 받지 않은 자라면 그에게 무슨 하나님의 소명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시대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구원으로의 부르심만 알고, 소명자로서의 부르심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대다수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으로만 불러주시고 소명을 주지 않으셔서 그런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실 때, 동시에 소명자로도 부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은 구원은 받았지만 내가 이 땅에서 어떤 목적과 사명을 가지고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시지를 알지 못한 채, 그냥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편한대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압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일부 특별한 사람들만 소명자로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소명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 중 대다수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받고나서 즉시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강도처럼 믿자마자 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도 아직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 하기를 원하시는 일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나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그 목적이 무엇인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소명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러한 소명자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평생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늘 불안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소명자의 삶이며, 염려하는 대신 평안과 행복 속에 세상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소명을 받았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소명을 붙들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명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소명을 받을 때 한 가지가 끝까지 고정되는 경우는 드물고, 주신 사명에 순종해서 나아가다 보면 또 다른 사명을 주십니다. 작은 것에 순종하다 보면 더 큰 것으로 맡기십니다.
선교사님들이 선교지로 나가는 것이, 믿자마자 갑자기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자기 있는 곳에서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것을 깨닫고 순종할 때 ‘이제 되었다. 지금부터는 이것을 해라.’ 하시며 다른 것을 주십니다. 또 그것을 따라 살다 보면 그 다음에 또 다른 것을 주십니다. 그러다 마침내 준비가 되었을 때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소명자들 중에서 기드온이 있는데, 그가 소명을 받고 살아나가는 모습이 좀 특이합니다. 그래서 지난주와 오늘, 그리고 다음에 한 번 더, 그의 삶을 세 번에 걸쳐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내 안의 바알과 아세라를 깨뜨리라
미디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소명을 주신 하나님은, 그 전에 먼저 기드온이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이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비의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찌니라” (25-26절)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시키신 일은, 자기 동네에 있는 바알 제단을 허물고 그 곁에 있는 아세라 신상을 찍어버린 후 그것으로 불을 살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첫 번째로 생각해볼 것은, 왜 미디안 사람을 치기 전에 자기들 안에 있는 바알 제단과 아세라 신상을 먼저 부수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디안을 통한 징계를 불러온 것이 바로 이 바알과 아세라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신 것은 그분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한분만 믿지 못하고 다른 신을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400년 넘게 살다가 조상들이 살던 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산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땅에서는 새로운 사고방식과 새로운 신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섬기던 여호와 하나님은 너무 오래된 신이어서 이 복잡한 가나안의 삶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가나안의 신들도 섬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지역 신의 개념이 있어서 지역이 바뀌면 신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바알도 섬기고 아세라도 섬겼습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에서 가장 처음 계명이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이고, 둘째 계명이 “우상을 만들지도 섬기지도 말라”인데,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그대로 했으니,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고, 결국 미디안을 통한 징계를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신 후에 처음 하라고 하신 일은 무슨 엄청난 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미디안의 대군을 맞이하여 나가 무조건 싸우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먼저 자기 눈앞에 있는 바알 제단과 아세라 신상을 깨어버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부터 없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떠나게 만드는 원인부터 제거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요구하시는 것은 무슨 엄청난 일을 이루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바알과 아세라를 먼저 제거하라고 하십니다. 먼저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부터 없애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바알 제단과 아세라 신상이 누구 것이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네 아비에게 있는”(25). 그러니까 바알과 아세라가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의 관할 아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기드온의 아버지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일에 있어 주동자였습니다. 이것은 가나안의 사고방식이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속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바알을 어느 구석에 숨겨 놓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드러내 놓고 섬기고 있었고, 그 마을의 지도자부터 솔선수범해서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이 특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우상 숭배자의 아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 아버지가 우상을 만들어 팔던 사람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우상 숭배자의 아들을 부르시는 것이 정상이겠습니까? 이왕이면 신앙의 집안, 열심히 믿어보려고 하는 집안에서 선택을 하지, 무슨 우상 숭배 주동자의 아들을 부르셔서 소명을 주십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나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아버지의 둘째 수소로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첫째도 있었다는 말인데, 왜 하필 둘째 수소입니까? 첫째 수소가 더 좋지 않습니까? 어쩌면 첫째 수소가 이미 바알에게 바쳐졌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수소에게 무슨 흠이 있어서 제물로 부적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이미 미디안에게 빼앗겼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25절에 보면 이 둘째 수소는 7년 된 소입니다. 이 7년이라는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 때문에 고생한 햇수와 같습니다(1). 그러니까 이 둘째 수소는 미디안이 공격하기 시작할 때 태어나서 미디안에게 고통당하는 기간 동안 계속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살아온 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수소를 바치게 하심으로써 이제 미디안으로부터의 고통은 끝났다는 것을 암시해주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아세라 신상을 찍은 나무로 이 둘째 수소를 바치게 하심으로써, 이제 바알과 아세라는 죽었고 미디안의 고통도 끝났다는 사실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바로 이런 선포와 같습니다. 즉 ‘이전에 나를 부끄럽게 하던 죄 된 생활은 이제 끝났다.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과거의 기억들은, 지난주의 죄들은, 이 수소와 함께 끝났다.’는 선포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바로 그런 죄들을 태워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기드온은 가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합니다.
“이에 기드온이 종 열을 데리고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행하되 아비의 가족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27절)
기드온은 하기는 하는데 대낮에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지는 못했습니다. 낮에는 도저히 자기 가족들이나 친척들이나 성읍 사람들을 대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감히 낮에 하지 못하고 밤에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밤에 일을 처리했다고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바알의 단이 훼파되었으며 단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것이 누구의 소위인고 하고 그들이 캐어 물은 후에 가로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28-29절)
미디안의 압제에 대한 고통 중에 분노를 느끼며 고민하고 있었지만,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몰래 숨어서 그것도 포도즙을 짜는 틀에서 밀을 타작하던 기드온이었습니다. 그는 겁이 많은 사람이었고 소극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그는 원래부터 큰 용사였던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도 낮에 바알 제단과 아세라 신상을 깨뜨리지 못하고 밤에 합니다. 그러나 비록 밤이긴 했어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분이 싫어하시는 것들을 부수었습니다.
기드온의 가장 무서운 적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사실은 미디안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 집안에 있는 우상이 가장 큰 적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이때까지도 부수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까? 아버지가 싫어하고 어머니가 섭섭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더 이상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더러운 우상들을 깨뜨릴 소명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고통하게 만든 원인은 먼 데 있는 적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우상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사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잘 적응해야 쫓겨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세상적인 방법을 자기들의 삶 속에 끌어들였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미디안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열심히 농사지은 양식과 가축을 다 빼앗아 가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7년 동안이나 계속 와서 빼앗아갔습니다.
지금 삶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미디안이 있습니까? 먼저는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일이 어렵게 된 원인은 바로 나 자신 안에 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야 합니다. 멀리 있는 저 미디안이 문제라고 하기 전에, 하나님이 왜 내게 이렇게 하시느냐고 원망하기 전에,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살지 못한 것은 없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있다면, 내 안에 바알과 아세라가 있다면, 그것을 찍어 쪼개야 합니다. 그것으로 불을 살라 하나님께 그리는, 그런 처절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지금 나의 바알과 아세라는 무엇입니까? 바로 나 자신일 때가 많습니다. 고생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려고 하는 마음이 우상인 것입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보통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욕망을 끄집어내서 표현해주고 만족시켜주는 것이 우상입니다.
우상의 가장 큰 특징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런데 우상은 한 곳에만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면 가보고 원치 않으면 안 가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가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를 섬겨주어야 한다는 것이 우상입니다. 우리 머릿속에는 세상적인 가치관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조차 모를 때가 대부분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려면 이 세상의 가치관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다 하는 방식대로 나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길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이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단순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들이 뭔지를 발견하여 그것을 부수어야 합니다. 지금 내 안에서 하나님을 하나님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니면서 마치 하나님처럼 내 안에서 군림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삶에 하나님이 싫어하실 만한 것들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자녀입니까? 집입니까? 어떤 잘못된 관계입니까?
우리 안에 세상의 가치관이 들어오면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불이 있는 예배, 내 안에 있는 모든 부끄러움이 성령의 불로 태워지는 체험이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성읍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깨뜨린 것이 기드온이라는 것을 알고 몰려옵니다.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찌니 이는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단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30절)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열렬한 우상 숭배자였지만 동네 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죽이겠다고 내놓으라고 하니까 오히려 자기 아들을 적극 변호하고 나섭니다. 그런데 기드온을 변호하는 그의 말 속에 유머가 담겨 있습니다.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쟁론하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는 자는 이 아침에 죽음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찐대 그 단을 훼파하였은즉 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 하니라” (31절)
‘만일 바알이 진짜 살아 있는 신이라면 기드온이 바알의 신전을 다 때려 부수어버렸으니까 바알이 그를 직접 심판하거나 징계하면 되지 왜 너희들이 난리냐?’는 말입니다. 이 일로 인해 기드온은 “여룹바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단을 훼파하였은즉 바알이 더불어 쟁론할 것이라 함이었더라” (32절)
“여룹바알”은 쉽게 말해서 ‘바알 파이터(Baal Fighter)’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거짓된 신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 기드온의 임무였습니다.
우리도 지금 이 세상에서 거짓된 신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세상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소리치는 신들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는 세상적인 가치관들과 방법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7년의 세월을 끝장낼 제물을 찾아야합니다. 7년 된 둘째 수소를 찾아야 합니다. 무엇이 나의 눈을 멀게 했습니까? 무엇이 진리를 보지 못한 채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게 했습니까?
기드온은 7년 된 둘째 수소를 바쳤습니다. 그의 집에서는 이 수소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7년 내내 걱정하며 신경 썼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은 시간이 다 되었고 미디안의 고통은 끝났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해방되어 자유를 누릴 수만 있다면 7년 동안 아껴온 수소를 바치는 것이 뭐가 아깝겠습니까?
2.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
사사기 6장은 35절에서 끝나면 아주 은혜롭고 좋습니다. 지금 “여호와의 신” 즉 성령께서도 기드온에게 임하신 상태입니다(34). 수많은 무리들이 기드온과 함께 싸우기 위해 속속 모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담대하게 나아가 싸우는 기드온 이야기가 이어지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는 계속 표징을 구합니다. 기드온은 돌다리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36절)
기드온 자신도 인정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미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양털을 가지고 하나님께 요청을 합니다.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37절)
하나님께서 자기가 요청한 그대로 들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나가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또 한 가지 더 요청합니다.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여 내게 진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나로 다시 한 번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39절)
처음에는 양털에만 이슬에 내리고 주변은 마른 땅이 되게 해달라고 하더니, 그래도 못 믿겠는지 이제는 그 반대로 양털만 마르고 주변 땅은 이슬이 내리게 해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참 인내가 많으십니다. 그래도 기드온의 말을 들어주십니다.
이 대화 내용이 여러분과 자녀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처음 요청을 할 때부터 머리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또 두 번째로 부탁을 하게 되면 아예 폭발을 하지 않겠습니까? 소위 뚜껑이 열리는 겁니다.
사실 기드온의 그런 모습은 불신앙의 모습입니다. 이미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양털로 시험을 한 것도 들어주셨습니다. 그쯤 되면 믿어야 되는 게 아닙니까?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미 증거는 주어져 있고 약속이 주어져 있지만 계속 묻습니다. 그것은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약속이 확실하면 이제는 믿고 가면 좋겠는데 자꾸 묻고 또 의심합니다. “주님, 맞습니까? 진짜입니까? 정말 해주실 거예요? 정말이에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이 소명자의 현실입니다. 여러분, 소명을 받았다고 거기서 끝난 게 아닙니다. 소명을 받았다고 완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불완전하고 여전히 의심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거기서 계속 인도해주십니다. 우리 수준에 맞추어 주십니다. 그럼 그것을 빨리 깨닫고 이제는 나아가야 합니다. 기드온은 마침내 그렇게 합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발견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일단 믿고 구원은 받았으니까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주고, 나머지는 예수 안 믿는 사람과 별로 다른 것 없이, 좋은 음식 먹고, 사람들 만나서 놀고, 술 마시고, 여행가고, 운동하고, 아이들 챙기고....
그게 다입니까? 그게 인생의 전부입니까? 그게 지금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것이 소명입니까? 분명히 다른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틀 안에서 주신 소명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셨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행하고 계십니까?
여기 있는 우리들 중 안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죽습니다. 그 말은, 우리 모두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는 좀 빨리 가고 누구는 좀 천천히 간다 뿐이지, 모두가 다 갑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날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해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 자리에 서는데,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을 어떻게 아무 준비 없이 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시며 주신 그 소명을 따라 사는 삶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갈 때 아름다운 소명자의 삶의 축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명자로 빚으시는 하나님
삿 6장 25절 / 서명성목사
살다보면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낙심이 되고 앞으로 어떻게 진행이 될지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소심해지고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의지도 약해지기 쉽습니다. 기드온이 바로 그랬습니다. 당시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 사람들의 침입은 이스라엘에 매우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수확기가 되면 어김없이 쳐들어와 장기간 진을 치고 약탈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매년 계속되자 이스라엘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부르짖으니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배교를 지적하시고, 사자를 보내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매우 의심이 많고 소심한 인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선뜻 응하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기드온 이야기는 적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에 초점을 두기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둡니다. 즉 기드온의 영웅적인 모습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가 되시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경배의 대상이시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돌이키시기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각자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일이 순적하게 풀리면서 기쁨이 있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앞뒤좌우가 막힌 것 같아 낙심이 되고 하나님은 내게서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됩니까? 기드온을 인도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살펴보며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여전히 신뢰하고 그분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룹바알이 된 기드온(25-32절)
기드온이 ‘여호와 샬롬’이라는 단을 쌓은 바로 그날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아버지에게 있는 7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오고, 그의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산성 꼭대기에서 하나님을 위해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끌어온 수소를 잡아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보통 번제 규정에서는 번제로 드릴 소의 연령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7년 된 소의 연령과 7년의 미디안의 압제 기간이 같은 것이 흥미롭습니다. 미디안의 압제가 시작하면서 태어난 소를 번제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네 하나님 여호와”로 묘사하시며 기드온과의 관계를 강조하십니다. 제단을 세울 장소로 ‘이 산성 꼭대기’가 제시되는데, 그곳은 바알의 제단이 있었던 곳이거나 그 제단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찍어버린 아세라는 번제를 위한 땔감이 됩니다. 기드온의 집안뿐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행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 일을 시키신 것은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로 나서기 전에 먼저 신앙적으로 바로 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여호와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종 열 명과 함께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했다는 것은 그의 집안이 부유했음을 알려 줍니다. 기드온이 ‘밤에 행했다’는 설명은 명령을 받은 바로 그날 밤에 행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밤’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은 기드온이 그다음 날 밤 혹은 며칠 후 밤까지 기다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가 낮에 그 일을 실행하지 못한 것은 자기 집안과 성읍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밝힙니다. 날이 밝자, 온 성읍이 난리가 났습니다. 그들이 섬기던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새로 만들어진 제단에 수소가 번제로 드려져 있고, 아세라 상은 땔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본 즉’이라고 번역된 ‘히네’는 마치 성읍 사람들이 본 장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 주는 듯한 기능을 하면서 성읍 사람들의 당혹감을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일을 저질렀음을 알게 된 성읍 사람들은 요아스에게 그의 아들을 당장 끌어내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섬겼다면 그를 처벌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 우상을 찍은 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을 끌어내 죽이려 하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미디안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을 한 기드온을 죽이려 합니다.
이에 요아스는 허물어진 바알의 제단이 자신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의 편을 듭니다.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라는 말은 바울 때문에 기드온을 해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그를 죽이겠다는 경고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위대한 신이라면 너희가 감히 바알을 위해서 논쟁을 벌이고 바울을 구해낼 수 있겠느냐? 바알이 알아서 처리하게 내버려두라. 바알이 신이라면 자기 스스로를 지킬 것이다. 요아스는 바알이 참 신이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무능한 우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성읍 사람들은 잠잠해졌을 것입니다. 바알의 무능함을 드러내고 바알 숭배를 여호와의 섬김으로 바꿔놓은 후에 기드온은 바알과 맞서 다투는 여룹바알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여기서‘더불어 다투다’라는 표현은 같은 편이 되어 함께 싸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싸움의 대상으로 삼아 다툰다는 의미입니다. ‘여룹바알’이란 이름은 무능한 우상 바알에 대한 기드온의 승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한 기드온(33-35절)
그때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쳤습니다. 이번에도 이스라엘로부터 곡식과 가축들을 약탈하려고 온 것입니다. ‘골짜기’라고 번역된 단어는 사실 평지를 의미합니다. 그곳은 갈릴리 호수와 사마리아 사이에 있는 매우 비옥한 땅이요 군사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그들은 요단을 건너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을 넘보고 있습니다. 이때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합니다. ‘임하다’라는 동사는 문자적으로‘덮다, 감싸다’라는 뜻으로 구약성경에 두 번 더 나옵니다. “그 때에 성령이 삼십 명의 우두머리 아마새를 감싸시니”(대상 12:18). “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대하 24:20). 기드온은 출중한 능력이나 자질, 담대한 믿음이 없지만, 여호와의 영이 친히 그를 둘러싸고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드온이 여호와의 영을 힘입어 싸우는 대리인이며, 이 싸움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행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기드온은 곧바로 군대를 소집합니다. 나팔을 불자 그가 속해 있던 아비에셀 족속이 몰려듭니다. 이어서 가나안 땅의 서북쪽 지파들인 므낫세와 아셀, 스블른과 납달리에도 사자를 보냅니다. ‘또 사자들을 ... 보내매’라는 표현이 두 번이나 사용된 것은 성령의 인도함이 아닌 기드온의 독자적인 행동임을 뜻합니다. 7장을 보면 하나님이 두 번에 걸쳐 모인 군대의 수를 줄이십니다. 기드온이 두 번이나 군대 수를 늘인 것을 무산시키려는 의도와 연결돼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과 싸우려면 많은 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께 의존하기보다 나름대로의 안전망을 구축하는데 많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후에 다른 사사들처럼 곧장 적에게 나아가야 하는데 기드온은 망설였다는 것이 이제부터 시작하는 기드온 스토리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양털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36-40절)
기드온은 군인들이 소집된 상황에서도 여전히 주저합니다.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구원에 대해 조심스럽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삿 6:14,16). 특히‘내 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자신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는지에 대해 확신을 갖기 원합니다. 여호와의 관심은 바알이 아닌 여호와만이 참 신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능력이 있으신 분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자신이 여호와가 약속하신 대로 용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보소서’하면서 기드온은 여호와께 자신의 말에 주목해 주실 것을 부탁합니다. 기드온은 양털을 타작마당에 두었을 때,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주변 땅이 말라 있으면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여호와의 말씀을 믿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제안에 순순히 응해주십니다. 38절은 아주 간결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그대로 된지라’라고 말합니다. 기드온이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과연 타작마당은 마른 채 양털만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슬이 습기를 많이 오래 함유하는 양털에 있고 그 주위의 땅이 마르는 것은 자연적으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제시한 첫 번째 시험이 스스로 보기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을 기드온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초자연적인 개입이 없으면 불가능한 증거를 요구합니다. 주변 땅은 모두 젖고 그 가운데 있는 양털만 말라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또다시 하나님께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 무례한 일이라는 것을 기드온도 알았기에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라고 하며 부탁합니다. 아브라함도 소돔을 위하여 간구할 때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창 18:32) 그러나 그때는 50명에서 45, 40, 30, 20으로 여러 번 부탁하고 난 후였는데 기도온은 두 번 만에 이런 말을 합니다. ‘시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도 부적절합니다.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에 금지돼 있습니다(신 6:16). 사사기 2:22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모세의 율법을 청종하는지를 시험한다는 표현이 있는데 기드온이 지금 여호와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증거를 두 번이나 구한 이유는 그의 소심한 성격과 여호와에 대한 편견, 그리고 부족한 믿음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기드온에게 바알의 제단을 헐라는 명령을 하시면서 자신을 ‘네 하나님 여호와’라고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선언했을 때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셨다’라고 여호와에 대한 실망감을 토로했습니다. 미디안의 강력한 압제로 인한 비참한 상황이 기드온을 소심하게 만들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갖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드온은 말씀을 듣고도 눈에 보이는 증거 없이는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비슷한 요구를 두 번이나 반복하는 기드온의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셔서 그의 요구대로 응해주셨습니다.
* 우리의 자세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쓰임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본문은 믿음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거룩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냥 사용하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삶의 방식에 영향 받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이 먼저 자기 집안에 있는 우상 제단과 우상을 제거해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기 원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욕과 탐심에서 벗어나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시며,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도의 거룩함은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로 주어진 것이기에 그분과 동행함으로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바알이 참된 신이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무능한 우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죄와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성령 안에서 죄의 정욕을 죽이며 사탄과 맞서 대적하는 ‘여룹바알’과 같은 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는 새 신분에 맞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성령의 임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옷니엘과 에훗에게 임한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했고,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로 부름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를 감싸고 두를 때,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선포하며 세상 앞에 설 수 있는 용사가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두려움과 염려가 찾아올 때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무장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모든 상황을 주목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확신을 가지고 반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려주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확신 있게 바라볼 수 있도록 성령으로 친히 옷 입혀 주십니다. 기드온처럼 소심하고 문제 많던 예수님의 제자들을 쓰임 받게 한 것 역시 성령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사명을 위해 간헐적으로 임하던 그 영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임합니다. 성도는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영적 전쟁을 수행해야 합니다.
-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연약할 때 나타나는 보편적인 감정입니다. 두려움을 이기려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견고히 합니다. 믿음이 견고해지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과 인내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명을 받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음에도 여전히 믿음의 발걸음을 힘차게 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연약함을 탓하실까 두려워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귀신 들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나아온 아버지가 예수님으로부터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는 말씀으로 믿음 없음을 지적받았습니다. 그때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라고 외쳤던 아버지처럼 성도는 믿음을 갖도록 도우시는 하나님 앞에 언제든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에는 자신의 현재 상태나 조건이나 자격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그분의 능력과 지혜를 붙들고, 그분이 이뤄 가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나약한 모습에 실망하고 포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도리어 좌절한 자를 일으켜 세우시고,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용기를, 무능을 고백하는 자에게는 능력을 주심을 알게 하시며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기드온의 양털 시험은 그의 소심한 성격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의 요구는 하나님께 무례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드온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의심과 불신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를 회복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믿음을 책망하고 정죄하기보다, 믿음을 갖기까지 인내하시며 마침내 승리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나가면서
기드온은 주님이 이미 말씀하신대로 자기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확신은 없었습니다. 연약한 자신이 과연 구원 사역을 감당하실 수 있을까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털 한 뭉치를 사용해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이 말한 대로 행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지 못하는 기드온에게 표징으로 확신을 주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를 통해 그분의 나라를 세워 가기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실 뿐 아니라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용기와 확신을 주십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려면 우상을 제거하고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사모하며 성령을 힘입어 삶의 두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믿음이 견고해지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예나 지금이나 결코 만만치 않지만 우리의 시선은 주님께 고정해야 합니다. 독생자까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임마누엘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이 시대의 여룹바알이 되어 영적 전쟁을 잘 치르며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며 거둔 열매를 인해 주님으로부터 칭찬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우상을 헐라 하시는 하나님
삿 6장 25~32절 / 이수영목사
사사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마도 기드온과 삼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드온이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여자 사사 드보라에 이은 새 사사 기드온의 이야기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새 사사가 등장했다는 말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제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삿6:1)는 것입니다. 두 여인 사사 드보라와 야엘 그리고 군사령관 바락의 활약으로 가나안 왕 야빈과 그 군대장관 시스라로 말미암은 20년간의 극심한 학대(삿4:2-3)에서 벗어나 40년간의 평화를 누린 이스라엘은(삿5:31) 또 다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고 이스라엘을 칠 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넘기셨습니다(삿6:1).
이 칠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논밭에 씨를 뿌리고 나면 미디안 사람들이 아말렉 사람들과 동방 사람들과 더불어 쳐들어오곤 했습니다(삿6:3). 그들은 아예 그들의 가축과 장막을 가지고 메뚜기 떼 같이 몰려와서는 진을 치고 머무르며 이스라엘 백성의 토지소산을 깡그리 빼앗아 먹을 것이 없게 만들었습니다(삿6:4-5). 굶어죽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살아남기 위해 산에 웅덩이와 굴을 파고 성을 쌓고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삿6:2, 6). 그러나 궁핍함이 심해지자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 또 부르짖었습니다((삿6:6-7).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삿6:8-10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지적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실 준비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기드온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났을 때 기드온은 밀을 포도주틀에서 타작하고 있었습니다(삿6:11). 정상적으로는 밀 타작은 바람이 잘 부는 산이나 높은 지대에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리깨로 쳐서 밀 껍질과 알곡을 분리시키고 채에 담아 공중에 던져 가벼운 껍질은 바람에 날려가 버리고 무거운 알곡만 밑으로 떨어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산이나 높은 지대에서 그렇게 하면 멀리서도 금방 미디안 사람들이 알아보고 달려와 뺏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고 포도주 짜는 틀 속에 들어가 힘들게 밀을 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말하기를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며 말을 걸었고(삿6:12),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너를 보내니 너는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삿6:14, 16) 말씀하시며 그에게 사사로서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사로서의 기드온이 해야 할 첫 과제로 명하신 것이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대로 그의 집안에서 우상을 철거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주신 명령을 본문 25-26에서 다시 보면 첫째는 그의 아버지 집에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 제단 곁에 있는 아세라 상을 찍어버리라는 것이며, 셋째는 산성 꼭대기에 하나님을 위하여 규례대로 제단을 쌓으라는 것이고, 넷째는 기드온이 찍어버린 아세라 나무를 땔감으로 써서 번제를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드온은 종 열 사람을 데리고 가서 이 명령대로 행했습니다(27절). 그 다음날 아침 난리가 난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읍 사람들은 그것이 누구의 소행인지를 조사한 끝에 기드온이 한 일임을 알아냈고(29절),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에게 기드온은 마땅히 죽어야 하니 그를 끌어내라고 압박했습니다(30절). 그러자 기드온의 아버지가 나서서 말했습니다: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31절). 비록 집안에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목상을 두고 있긴 했으나 기드온의 아버지는 열렬한 우상숭배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기드온에게 열 명의 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아버지는 재력이 있었고 그 성읍의 지도자 격이었던 사람 같습니다. 그래서 그 성읍을 대표해서 그의 집 안에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목상을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성읍 사람들에게 죽을 위기에 처하자 그는 아들을 살려야겠다는 본능적인 동기에서 형식적이던 그의 바알 숭배를 내던져버리고 오래 잊고 지내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되돌아오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한 말을 다시 들어봅니다: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지금 바알을 위해서 떠들며 싸우자는 것이냐? 그 바알은 지금 이렇게 맥없이 죽어 있지 않느냐? 이렇게 죽어버린 바알을 너희가 살리겠다는 것이냐? 내 아들 손에 죽어버린 바알, 그것은 신도 아니다. 그것이 신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이 내 아들 손에 이렇게 파괴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 드러난 것이 아니냐? 그런 바알이 다시 살아날 것 같으냐? 너희가 흥분하고 떠든다고 바알이 다시 살 것 같으냐? 어림도 없는 소리다. 바알은 신도 아니었고 그건 이미 죽은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 바알 편에 서서 떠들며 싸우자고 대들고 내 아들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이 아침이 지나기 전에, 다시 말하면 당장에 내 손으로 죽여버리겠다. 너희 말대로 바알이 정말 신이라면 자기 제단을 파괴한 자를 그냥 두겠느냐? 바알이 스스로를 위해 다툴 것이 아니냐? 그가 참 신이라면 당연히 내 아들은 그의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잠잠히 지켜보기나 해라. 이것이 기드온의 아버지의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알과 아세라 숭배에 빠졌던 이스라엘로서는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던 기드온의 우상파괴사건은 일단락 지어졌습니다. 그 날부터 사람들은 기드온을 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32절). 이란 이름은 기드온이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정말 신이라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했다는 뜻을 담은 것입니다. 이렇게 기드온이란 새 사사가 탄생했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7년간의 도탄에서 구원하시고 다시 그들에게 40년간의 평화를 누리게 하시는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기드온을 택하여 쓰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에 의해 쓰임 받는 기드온에게 조금 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드온은 영웅적 존재가 되었고 거의 왕과 같이 대우를 받으며 권세를 누렸지만(삿8:22-26, 30) 그가 처음부터 그런 영웅의 모습을 지녔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와서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며 말을 걸었을 때에 사뭇 회의적이고 반항적이며 냉소적이고 자포자기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6:13을 보면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삿6:14) 하시자 기드온은 또 대답하기를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삿6:15) 했습니다. 기드온은 이렇게 자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다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삿6:16) 하시자 그는 다시 대답하기를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삿6:17) 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증거를 보이라고 요구할 만큼 의심이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와 함께하셔서 그가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 불살라버리고서도 흥분한 성읍사람들로부터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이스라엘을 공격해왔을 때 담대하지 못하고 소심하게 두 번씩이나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삿6:33-40). 첫 번째는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기를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삿6:36-37)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드온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났을 때 주변 땅은 말라 있었으나 양털을 가져다가 짜자 물이 그릇에 가득하게 나온 것입니다(삿6:18). 그러나 기드온은 두 번째로 하나님께 여쭈며 정반대로 요청하기를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이번에는)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삿6:39) 한 것입니다.
이러한 기드온의 모습을 볼 때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드온의 이야기 속에서 당신의 백성이 언제까지나 우상숭배의 죄 속에 빠져있으며 그로 인해 고통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비록 회의적이고 반항적이며 냉소적이고 자포자기적이었으며 자신 없고 소심하고 겁 많고 의심 많던 사람 기드온을 오래 참으시며 확신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며 크게 들어 쓰신 하나님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남이 다 하니까 따라서 바알을 섬기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던 자를 세우셔서 바알 제단을 헐고 그와 다투는 자로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집을 바알을 섬기는 거짓신앙으로부터 구해내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가 함께 하심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시고 나아가 온 백성을 포악한 침략자로부터 구해내는 사사가 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못난 자까지도 당신의 뜻대로 다듬어 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는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다 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의 그릇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적 신분이 어떠한가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는 말씀을 듣고 기드온이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며 움츠려들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들은 척도 안 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우리에게 힘과 재능이 부족한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쓰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과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의 믿음과 순종입니다. 그것이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드온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존재도 귀하게 쓰실 수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아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구원자로 세우시기 전에 먼저 명령하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우상을 헐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에 의해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도구로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우상을 헐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만큼이나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서 철저히 부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우상을 헐라고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 바른 제단을 쌓으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찍어버린 우상의 나무를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를 위하여 불사르라 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과 상관없이 온통 마음을 쏟으며 애지중지하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도구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불사를 때 우리는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크고 귀한 도구들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
삿 6장 25~40절 / 석원태목사
은혜체험- 사사기 6:25-40 -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찾아오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큰 용사로 사사(師士)의 사명을 부여했습니다. 물론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기용하신 그 여호와의 사자는 성육(成肉) 이전에 구약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바로 그 사명을 부여받던 그 시간부터 기드온은 자신의 존재의미와 내용과 목적을 찾은 셈이 되었습니다. 그와 그 조국의 현실은 7년 동안이나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연합군들의 침략을 받아 죽음의 고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하여 이 죽음의 국난을 해결해주겠다는 소명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 그는 분연히 일어나서 자신의 존재적 사명을 다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구원의 사사로서 승리의 확증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그 「여호와의 사자」에게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삿 6:17)라고 감히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드온은 사사로서의 표징을 받고 싶었습니다. 여기 표징은 기적, 표적, 증거 등의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사사로 부름받은 그는 사사된 표적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신분과 사명을 나타내는 또 다른 보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 확실히 말하면 사사로 부름받은 기드온은 주의 은혜를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받은 은혜의 힘으로 백성을 구원하는 사사의 사명을 감당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를 이스라엘의 사사로 부르신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이 요구하는 표징을 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은혜 체험을 시켰습니다.
기드온이 받은 표징, 곧 은혜 체험이 무엇인가?
Ⅰ. 여호와 샬롬이었습니다(삿 6:18-24).
Ⅱ. 여룹바알이었습니다(삿 6:25-32).
사사기 6장 32절에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단을 훼파하였은즉 바알이 더불어 쟁론할 것이라 함이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여룹바알」이란 뜻은 ‘바알과 대적하다’, ‘바알과 논쟁(싸움)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자기 고향 마을의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섬기던 자들이 기드온을 조롱하는 의미로 붙인 별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주신 또 다른 표징, 곧 은총이었습니다. 마치 종교개혁 당시에 로마 천주교 편에서 종교개혁자들에게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란 이름을 붙여준 것과 같습니다. 이는 ‘항의자’, ‘반대자’란 뜻으로 조롱하고 멸시하는 내용의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에 와서는 거룩한 교회사적 이름이 되어 좋은 의미로 해석이 되고 있음과 같습니다. 기드온은 그 날 밤에 사실상 일종의 종교개혁을 단행한 후에 이 이름을 얻었습니다. 제단의 불을 통하여 여호와 샬롬을 체험했던 그 밤에 다시 여호와께서 기드온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르기를 「네 아비의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네가 찍은 아세라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삿 6:25-26)고 했습니다.
실로 중대한 여호와의 메시지였습니다. 기드온은 즉시 그 날 밤에 종 열을 데리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자기 향리의 성읍에 가득 찬 바알과 아세라의 목상을 찍어버렸습니다. 그리고 7년 된 두 번째 소를 잡아 번제를 드렸습니다(삿 6:27-28).
날이 밝은 아침에 동리는 야단이 났습니다. 지난 밤 동안에 저들이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의 목상이 모두 다 절단이 나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이 기드온의 소행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분노한 동리 사람들은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에게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외치기를 “네 아들을 불러내라. 그를 죽여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저들에게 항변하기를 “당신들이 바알을 위하여 쟁론(변호)하느냐? 만약에 바알이 참신이면 바알과 아세라 신을 훼파한 사람을 바알 신이 죽일 것이 아니냐? 그런데 지난 밤에 바알과 아세라 신은 어찌되었기에 오히려 훼파를 당한 것인가?” 하는 도전적 항변이었습니다.
그 결과 기드온은 바알과 쟁론(싸움)한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여룹바알이란 별칭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주신 표징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는 그 시간부터 영적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죄와 더불어 싸우는 믿음의 전쟁입니다. 먼저 ① 온갖 우상주의와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들과 싸웁니다. ② 현대판 바알과 아세라인 물질주의(배금사상), 과학지상(至上)주의, 온갖 류의 이데올로기(유물론, 무신론, 진화론, 불가지론, 허무주의 등), 자신이 믿고 추구하는 사상과 신념들이 종교적 신앙과 싸우게 합니다. ③ 세속주의, ④ 불경건한 신비주의, ⑤ 온갖 류의 악한 이단들과 싸워야 합니다. 바로 이런 영적 싸움이 있다는 자체가, 그가 주께로부터 은총의 표징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송장에게는 싸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영전(靈戰)을 하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 된 표징은 사탄과 사탄의 주구들과 격전하는 영전이 있다는 이 사실입니다. 기드온은 여룹바알의 표징을 받았습니다.
Ⅲ. 여호와의 신의 강림이었습니다(삿 6:33-35).
사사기 6장 34절에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6장 33절에 「때에」라고 하였습니다. 기드온이 주의 표징을 받았을 때였습니다. 기드온이 여호와 샬롬을 체험하고 여룹바알의 체험을 했을 때였습니다.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다 모여 요단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삿 6:33)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는 기드온 자신이 드리는 제단, 제물(예배)을 통하여 여호와 샬롬의 은혜 체험을 주었습니다. 다음에는 기드온 자신의 가정과 향리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찍는 일종의 종교개혁을 통하여 「여룹바알」의 은혜 체험 곧 표징을 주었습니다. 이제 세 번째는 직접 대적들의 침략 앞에서 은총의 표징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적들의 침략 앞에서 그에게 ‘성신을 충만케 입혀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신」은 제3위격인 성령을 말합니다. 「여로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 「강림」이란 말 ‘라보사(hvbr:)’는 ① 공격을 뜻합니다. 성령의 선제 공격을 뜻합니다. 성령께서 기드온에게 밀어닥치고, 밀어붙였음을 뜻합니다. ② 옷입혀 주었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무장을 뜻합니다. ③ 감싸줌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는 성령의 장중에 완전히 사로잡혔음을 뜻합니다.
성령받은 기드온에게 몇 가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봅니다.
① 나팔부는 힘을 얻었습니다. 군인 소집의 힘이 생겼습니다(삿 6:34).
② 백성이 그에게 모였습니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이고(삿 6:34),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모였습니다(삿 6:36). 아셀과 스블론과 납달리 사람도 모두 모였습니다(삿 6:35b).
③ 기드온을 좇고 영접(환영)하였습니다(삿 6:34, 35). 지도자로 추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주신 표징입니다. 은혜 체험입니다. 바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성령 체험입니다. 성령의 공격을 받고, 성령으로 무장하고, 성령의 안전 보장을 체험하는 은혜입니다. 그 사람들은 전도(나팔)하는 힘을 얻습니다. 그 전도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다 성령에 이끌리어 주께 나아옵니다. 그리고 구원 운동에 참가합니다. 바로 은혜 체험의 표징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된 표징이라고 하였습니다(롬 8:9, 14-16).
Ⅳ. 이슬의 표징이었습니다(삿 6:36-40).
그것은 양털의 이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기드온이 다시 주께 요구한 표징이었습니다.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삿 6:36b-37)라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주님은 그대로 응답해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양털에만 내린 이슬을 짰을 때, 물이 그릇에 가득할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다시 주님께 이번에는 타작마당에는 이슬이 내리고, 양털만 마르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주님은 그대로 응답했습니다(삿 6:39-40). 땅은 이슬로 젖어있었고, 양털은 말라 있었습니다.
이러한 양털의 신약적 표징이 무엇인가?
양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의 상징입니다.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은 이슬이 맺힌 제물이었습니다. 그는,
① 땀이라고 하는 이슬이 그 이마에 흘렀습니다.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실 때,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눅 22:44).
② 그는 눈물이라고 하는 이슬을 수없이 흘렸습니다.
그는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슬픔과 동정의 눈물(dakruw, 요 11:35)을 흘렸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고 우셨습니다. 그 눈물은 큰 슬픔의 비애에 잠기는 눈물(klaiw)을 흘렸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인류의 대속을 위하여 영혼의 속건제를 드릴 때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소원을 올렸습니다. 통곡의 눈물(kravzw)이었습니다.
③ 그는 마침내 자신의 몸을 찢어 피와 물을 쏟아 그의 온몸을 적시고 말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못 자국에서 흘러나온 피가 온 몸을 적시고, 가시면류관과 그가 맞은 채찍에 의해 파열된 피부는 피로 얼룩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은 이후에도 로마의 군병들이 찌른 창을 받고 피와 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마 27:32-46, 요 19:34). 이것이 그가 우리 구주 되신 표징이었습니다. 땀과 눈물과 피가 우리 주님의 전 생애를 적시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우리 속죄주의 표징이 된 것입니다. 양털에 맺힌 이슬이었습니다.
바로 2000년 기독교 역사의 표징이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그의 제자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생애는 양의 생애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 가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땀과 눈물과 피로 자기의 생애를 값진 제물로 주께 드려짐이 된 것입니다. 양털에 맺힌 이슬이었습니다.
여러분! 죽음의 때를 살고 있던 기드온에게 새로운 자기 삶의 전환점이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왜 살아야하는가 하는 생존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사실상 살았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의 침략 때문에 그 자신과, 그의 가정과, 그의 조국이 죽음의 압제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통치권이나, 경제적 자립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 목상 앞에서 저들의 장래를 맡기므로 여호와 신앙이라고 하는 선민 의식이나, 자존심이 사라져버린 지가 오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극단적인 개인주의 함정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기드온도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공연하게 마당에서 밀타작을 하지 못하고 포도즙을 짜는 집안의 틀에서 몰래 밀타작을 하여 연명하고 살아가던 자였습니다. 공포와 불안과 초조와 좌절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만이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실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고 있던 무의미한 인생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었던 지난 날의 찬란한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살아갔습니다. 단절된 역사 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새 삶의 비전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에 처한 자신과 자기의 조국을 압제자의 손에서 구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국의 사명’이 그의 존재 의미나 내용과 목적을 새롭게 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 사람은 비로소 사는 맛을 갖게 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의 요구대로 표징(t/a)을 주어 그의 인생을 충만케 하였습니다. 그것이 여호와 샬롬이었습니다. 여룹바알 곧 바알과 더불어 싸우는 자의 은혜였습니다. 여호와의 신의 강림이었습니다. 그리고 양털에 맺힌 이슬의 표징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은혜 체험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만난 이 세상의 모든 기독 신자들이 함께 입을 신약 시대의 복음의 은총을 가리킵니다. 평안의 은총입니다. 사탄과 접전하는 영전의 은총입니다. 약속하신 성령 충만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예수께로부터 받은 땀과 눈물과 피의 은총입니다. 예수를 만난 자마다 받아 누리는 표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