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20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마태 12,38-42)
복음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8 그때에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40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41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각자는 니네베인 동시에 요나 예언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나 예언자를 언급하시며 우리에게 즉각적인 회개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요나가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는데, 그 사명은 참으로 난감한 것이었습니다. 다름 아닌 당시 가장 잘 나가던 대 제국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로 가라는 것입니다.
당시 니네베는 최첨단 국제도시로서, 오늘날로 치면 뉴욕이나 파리, 도쿄나 서울 정도 되는 도시였습니다. 더구나 니네베는 이스라엘 백성이 혐오하고 적대하던 도시였습니다.
요나는 주님께서 주신 소명, 니네베로 가라는 요청이 너무 두렵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그분 울타리를 벗어난다는 마음에 주님을 피하여 멀리 도망을 갑니다. 요나가 생각하길 가장 먼 곳은 타르시스였습니다.
타르시스는 오늘날 스페인 남서부 과달키비르 강 어귀에 있는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니네베와는 정반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에 반대 방향으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인간이 주님을 피해 달아날 수 있겠습니까? 요나는 주님을 피해 도망간 대가를 톡톡히 치른 다음, 그분 손에 붙잡혀 니네베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휴양이나 관광차 그곳으로 죽을 고생을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는 그 광대무변한 대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외쳐야 했습니다. 무엇을? 칭찬과 격려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왕부터 시작해서 모든 신하, 백성들이 당장 회개하지 않으면 피눈물 날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멸망할 것이라고. 이른바 심판 설교입니다.
사실 니네베는 기원 전 612년 메디아와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요나서는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경 집필되었습니다. 그러니 니네베가 멸망하고 한참 뒤 3-400년이 흐른 뒤 쓰인 것입니다. 따라서 요나서는 역사서라고 분류할 수 없습니다.
비록 니네베는 멸망했지만, 오늘날 또 다른 니네베가 존재합니다. 우리 인간이 저지르는 죄로 인해 하느님의 사랑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장소라면, 그곳이 바로 니네베입니다.
니네베는 내 안에도 있고, 가까운 이웃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 학교, 직장, 교회에도 존재합니다. 자신의 삶을 자유롭고 충만하게 살지 못하고 있다면, 억압과 부자유, 폭력과 파괴가 만연하다면, 그곳이 바로 이 시대 니네베입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또 다른 요나인 우리 각자를 향해 외치십니다. “일어나 니네베로 가라!” 하느님의 명령은 단호합니다. 두렵고 부담스럽지만, 요나는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니네베로 갔습니다.
요나는 내 외침이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일었지만, 자신의 등 뒤에 서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굳게 믿으며 니네베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머뭇거리지 말고 지금 당장 그 악의 구렁텅이에서 일어서라고.
오늘 우리 각자는 니네베인 동시에 요나 예언자입니다.(안드레아 수바르츠, 요나와 함께 걷은 40일, 바오로 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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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
<여러분 삶의 의욕의 정도를 측정해 드립니다>
무엇을 잃으면 삶의 의욕을 잃을까요? 무엇을 찾으면 삶의 의욕을 찾을까요? 알라딘의 요술램프 속에 사는 지니는 요술램프를 소유한 주인에게 모든 소원을 들어줍니다.
“지니가 당신에게 한 가지 소원만 들어준다면 무엇을 청하겠습니까?” 제가 왜 이 질문으로 시작하느냐면 이 대답에 따라 삶을 대하는 자세가 측정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계 제일 부자인 빌 게이츠에게 같은 질문했을 때 그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요? 이 묵상글의 끝에 그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유튜브에 매일 복음 묵상뿐만 아니라 가톨릭교회 교리서 해설, 영성 서적 해설, 성서 해설까지 올리니 어떤 분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그렇게까지 많이 알아야 하는 건가요? 시골 할머니의 단순한 믿음으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나요? 많이 알아도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나요?”
저는 당황하여 “예수님께서 3년 동안 가르치셨다면 배우는 게 좋아서 그러셨겠죠.” 라고 얼버무리듯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많이 공부해도 잘 못 하는 이유는 같은 이슬이라도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는 것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허술한 대답에 답이 다 있습니다. 삶의 이유는 더 배워서 뱀에서 소로, 모기에서 예수로 본성을 변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배움 없이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배움과 삶의 의욕은 결국 비례합니다.
아기가 진정한 성장을 시작하는 때는 언제일까요? 부모에게 이것저것 귀찮게 물으며 배움을 시작하는 때입니다. 성장을 멈추는 때는 언제일까요? 더는 배울 것이 없어서 배움을 멈추는 때입니다.
부모의 이름을 알았으니 더는 부모에게 배우지 않겠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고 심지어 표정도 제대로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기는 부모에게서 배운 것을 따라 하면서 참 인간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부모와 같이 자신도 부모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성장을 멈춥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부모가 가르쳐준 것 이상입니다. 배움에는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 배우려는 이에게 주이지는 시간도 끝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배운다면 말입니다.
워런 버핏은 어렸을 때부터 책벌레였다고 합니다.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책상에 앉아 배우는 것 외에는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니가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며 물을 때 빌 게이츠는 이것을 청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책을 빨리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청하고 싶습니다.”
부자가 되어 더 많은 공부를 하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끊임없이 공부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배움에 대한 자세가 곧 인생에 대한 자세와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악하고 절대 없다고 평하십니다. 왜냐하면, 알려는 마음이 없이 표징만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여주실 표징이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표징은 무언가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알려는 마음이 없이 표징만 요구한다면 그 표징은 그 사람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표징이 아닌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습니다. 배워서 회개한 것입니다. 이어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라고 하십니다.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부모로부터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아 동물적 본성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아기와 같습니다.
인생에 대한 자세가 배우려 하는 자세와 같습니다. 얼마나 더 배워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하느냐가 얼마나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려고 하느냐와 비례합니다.
지니가 다시 한번 묻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해야겠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나 자신을 알고 하느님을 아는 것 외에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는 것은 발전하는 것이고 발전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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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억측을 늘어놓더니(마태 12,24 참조),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 학자들과 함께 다가와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분의 놀라운 행위들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12,28 참조). 그러나 그들은 이를 보고도 못 본 척하며, 계속해서 그 정당성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12,39) 여기서 ‘절개 없는’으로 옮긴 그리스 말 ‘모이칼리스’는 본디 ‘간음하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는 하느님과의 신의를 저버린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입술로는 하느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표징’을 내놓으라며 의심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간음’에 빠진 그들의 실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도 바리사이들처럼 하느님을 시험하려 들 때가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에 대한 신의를 잃고 눈이 멀어 버린 인간은 더 자극적이고 화려한 ‘하늘의 표징’을 갈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12,39). 요나의 기적은 죽음 너머의 생명, 곧 부활을 미리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이 표징을 삶으로 받아들이려면 그저 기적을 구경하는 ‘관객’의 자리에서 벗어나 참된 회개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그 구원 드라마의 서막을 알리는 이들이 바로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복음말씀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