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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춘대학교(남녀공학) 원문보기 글쓴이: 야미
평화의 언어 에스페란토
왜 에스페란토가 평화의 언어인가?
대한민국에 살면서 그 언어적 불평등을 안 느끼면 산다는 것은 힘들 것이다. 제국주의의 횡포와 야만적인 포식자로서 전 세계를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는 언제나 영어 중심주의가 자라잡고 있다. 거리에서 미제 타도를 외치면서도 집에 돌아가면 토플, 토익이나 영어회화를 공부하여야 하고 심지어 일본어, 중국어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 속의 언어적 굴레에서 벗어나서 본인이 하고 싶은 공부에만 전념하기를 희망하기도 하고 또 왜 영어 사용권 나라에 태어나지 못하여 이런 고생을 하는지 불평도 하였을 것이다...
현재 많은 단체들과의 국제적인 연대 활동에서나 회의, 세미나에서 당연히 영어가 공용어로 채택되어 사용되고 있다. 당연히 통역은 영어와 자국어 하나로 되어있다. 어떤 경우에는 영어로만 이루어진 국제회의도 있으며 그것을 대단한 권위인양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토론에 비영어 사용자들이 있다면 그것을 위한 배려와 특히 토론 참가자 중에 비영어 사용자가 있으면 그 민족어의 통역이 이루어 져야 한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참가한 국제회의나 토론을 보면 비영어권 토론자의 경우 발제문을 보고 영어로 쓰여진 것을 읽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그러기에 개인의 생각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깊숙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특히 심한 경우에는 전혀 전문성이 없는 사람이 영어를 잘 한다는 이유만으로 국제적인 행사에 중심인물로 자라잡고 있는 것을 보는 경우도 있다.
나는 국제회의나 세미나에서 영어를 사용하지 말자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비영어 사용자들에 대한 배려가 이루어 져야 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영어의 횡포 속에서 좀 더 대안적인 언어를 이야기 하려고 한다. 한국사회에서 영어는 중요하다. 공부하여야 하며 극복하여야할 자기 수련 과정이다. 하지만 계급적 상승이 아닌 사회운동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영어가 일반인들과 같이 사고된다면 언어적 문제는 영원히 안 풀릴지도 모른다. 특히 평화운동을 고민하는 활동가나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평화의 언어는 한 번쯤 사고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부터 그 한 방법으로 평화적 언어에 에스페란토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아래 글은 에스페란티스토인 남희정님의 직접 경험한 평화의 언어 체험담이다.
지난 여름 토다 키요시와 에스페란토
내가 에스페란토를 만난 것은 지난해 여름, 일본에서였다.
대학시절 뇌리에 깊숙히 박히도록 충격을 준 책, '환경정의를 위하여'의 저자 토다 키요시를 오사카에서 만났다. 그와의 대화중에 그가 에스페란티스토(에스페란토를 하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고, 막연하게 알고 있던 에스페란토에 대해 조금 구체적인 설명을 들을 수가 있었다.
창작과 비평사에서 나온 '환경정의를 위하여'의 일본어판에는 원래 에스페란토로 쓰여진 서문이 있다. 아쉽게도 한국어판에는 실려 있지 않다.
토다 키요시가 말한 에스페란토의 장점은 첫째, 특정 지배국가의 언어가 아니라는 점, 그래서 민족과 민족이, 국가와 국가가 만나는 것이 아니라 민중과 민중이 만나서 사용할 수 있는 언어라는 것이다. 국제적(영어의 international)이 아니라 민제적(에스페란토의 interpopla, 영어에는 이에 해당 하는 적절한 단어가 없다) 언어라는 것이다.
둘째, 매우 훌륭한 매개어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어를 바로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매개어 에스페란토로 번역한 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훨씬 완성도가 높다는 것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유럽연합의 경우 에스페란토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고 있다고 한다. 각 국가들이 모두 자국의 언어를 공식회의에서 고집하고 있어 통역이나 번역에 드는 비용이 매우 부담스럽고, 번거롭다는 것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유럽의회 의원들 중 약 18%정도가 에스페란토의 공용화에 찬성 하고 있다고 한다.
셋째는 감성적 언어라는 것이다.
인공어이기 때문에 생길수도 있는 감정표현의 한계점이 거의 없고 오히려 언어를 달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보다 더 정확하고 풍성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른 언어에 비해 배우기가 쉬운 점이다. 에스페란토는 1887년 자멘호프라는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어이므로, 자연어에서 흔히 생기는 불규칙 변화나 관용구, 복잡한 문법이나 문장구조가 없다. 철저히 계획된 규칙과 질서에 의해 만들어진 언어이므로 매우 배우기가 쉽다.
그렇다고 딱딱하고 고정된 언어라 볼 수는 없다. 조어법의 특성상 끊임없이 머리 속에서 새로운 단어와 표현들을 탄생시킬 수가 있다. 그래서인지 내가 만난 에스페란티스토들은 대부분이 매우 활동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에스페란토는 어떻게 탄생 했는가
에스페란토는 기본적으로 1민족 2언어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자국민들끼리는 자국의 언어를, 다른 언어사용 국가의 사람들과는 그 국가가 가진 정치력이나 경제력과 관계없이 동등하게 제 3의 언어인 에스페란토를 사용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를 탄생시킨 자멘호프 박사가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그 배경을 살펴 볼 수 있다.
'내가 태어나서 어린시절을 보낸 이곳이 내 미래의 목표를 향한 방향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폴란드의 비얄리스톡의 주민들은 러시아인, 폴란드인, 독일인, 히브리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민족들은 서로 다른 민족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성격을 지닌 나는 이러한 환경 아래에서 어떤 다른 곳보다 여러 언어로 인하여 더 무거운 불행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한 언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 인간가족을 서로 반목케 하고 적대적 관계로 나아가게 하는 주요 원인의 첫 단계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나를 이상주의자로 만들었으며, 모든 인간은 한 형제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거리에서, 마을에서의 나의 느낌은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러시아인이, 폴란드인이, 독일인이, 히브리인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이 항상 나의 어린 영혼을 심하게 괴롭혔습니다. 그 당시 나는, 어른이 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힘이 생기리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른이 되면 반드시 이 잘못 된 모습을 바로잡아 해결하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당시 자멘호프가 살았던 폴란드는 19세기말, 제국주의 국가들의 힘겨루기 장소였고, 당연히 여러 민족과 여러 국가의 사람들이 서로 반목하고 불신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마 그는 러시아 짜르 정부의 유대인들에 대한 경멸, 거주 허가제에 의한 거주의 제한등의 사회적으로 표출된 차별, 입학에 있어서 유대인 어린이 수의 제한, 유대인은 정부의 관리가 될 수 없는 제약에 대하여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보다 더 절실하게 느꼈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1914년 6월 히브리 연맹이 시오니즘을 위하여 서로 협조하자는 요청을 하였으나 무조건 거부하였다.
'나는 나를 특정 종족, 종교의 목적이나 이상과 연관시킬 수는 없습니다. 나는 각국의 민족주의가 인류를 가장 큰 불행으로 이르게 한다고 확신하고 있으며, 모든 인류의 목표는 조화로운 인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자의 민족주의는 비열하고, 약자의 민족주의는 판단력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자신의 집단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그리고 완전한 중립적인 기초 위에서 서려고 하지 않으면, 우리 인류는 그 잘못된 불행의 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오랜 동안 연구한 끝에 에스페란토를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다.
3000 여종이 넘는다는 세계의 민족어 가운데서 완전히 중립적인 언어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자멘호프 역시 이 부분에 대한 고민 끝에 라틴어와 프랑스어, 이탈리아 어, 스페인어등의 유럽어에서 정수들을 뽑아 에스페란토를 창조했다. 그는 평생을 에스페란토와 인류인주의에 대해 연구하고 실현하는데 바쳤으며 결국 가난속에서 1917년 4월 14일 생을 마쳤다.
우리나라에서도 세종대 연구팀이 동서양의 16개 언어를 분석하여 우니쉬(unish)라는 인공어를 내놓은 적이 있다. 에스페란토가 발표될 무렵에도 비슷한 인공어들이 많이 생겨났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결국 에스페란토만이 살아남아 120 여년간 사용되어지고 있다
에스페란토는 언어로서 완전 한가
근래 모 신문에서 에스페란토가 고유의 민족과 문화를 가지지 못한 인공어였기 때문에 실패 했다는 글이 실렸었다. 혹자는 과연 에스페란토가 언어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에스페란토가 원전인 수많은 시와 소설들, 매달 발행되는 정기 간행물들, 에스페란토로 번역된 세익스피어의 작품과 성경, 근대 한국단편소설집, 새롭게 발표되는 다양한 에스페란토 음악들, 또 수많은 에스페란티스토 가정들(에스페란티스토 가정에서는 일상적으로 에스페란토가 사용되고 이들 사이에 태어난 2세들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에스페란티스토가 된다.) 을 본다면 이런 의문들은 아마도 금새 해결될 것이다.
중국, 바티칸, 폴란드, 오스트리아, 쿠바 등 11개 국가에서 단파 및 위성 방송을 통하여 매일 수차례 에스페란토 국제 방송을 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성서뿐 아니라 논어와 코란, 햄릿과 같은 세익스피어 작품, 죄와 벌, 데카메론, 돈키호테, 파우스트, 설국, 삼국지 등 동서고금의 작품들이 에스페란토로 번역되었을 뿐 아니라 원작 소설과 시의 창작 활동도 활발하다.
매년 열리는 다양한 형태의 에스페란토 회합이나, 모임 역시 모두 에스페란토로만 진행되는데 의사소통에 전혀 어려움이 없고, 오히려 특정 민족어로 대화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가 더욱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고 한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과 영어로 대화를 나눌 때, 누구나 주눅이 드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위축감 없이, 에스페란토는 누구에게나 새로운 언어이기 때문에 서로 평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에스페란토의 기본 구성
에스페란토의 문자는 모두 28개로 5개의 모음과 23개의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자 1음의 원칙에 따라 모든 문자는 하나의 소리를 내고
또한 소리가 나지 않는 문자도 없으며, 강세는 항상 뒤에서 둘째 음절에 있기 때문에 뜻을 몰라도 사전 없이 문장을 읽을 수 있다.
단어는 주로 인도 유럽어 계통의 언어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형태를 어근으로 하여 누구나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게 하였다.
발표 초기에는 유럽을 중심으로 단편적으로 보급되다가, 1905년 프랑스에서 제 1차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가 개최되고 1908년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 UEA(Universala Esperanto Asocio)가 결성되면서 보급 운동이 조직화 되기 시작하였다. 현재 120 여개국의 3000만 정도의 사람들이 에스페란토어를 사용할 줄 안다고 한다.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 UEA(Universala Esperanto Asocio)는 유엔 산하의 비정부 단체로서 1954년부터 유네스코와 영사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하다. 과학, 교육, 경제, 예술, 스포츠 등도 45개 전문 분과 단체가 활발하게 활동 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에 약 2000 여명의 대표자를 두어 여러 전문 분야의 업무를 관장하 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박제도(Pasporta Servo)를 통하여 여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렇게 만남을 가진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서로가 에스페란티스토라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집 열쇠를 통째로 맡기기도 한다.
매년 한번씩 개최되는 세계 대회에는 수 천명의 에스페란티스토가 참가하여 통역없이 각종 회의를 통하여 의사를 교환하고, 연극, 영화, 인형극 등을 공연하며, 또한 자유로운 만남을 통하여 우의를 다진다.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사
우리 나라에 에스페란토가 보급된 것은 1920년 김억에 의해 YMCA에서 공개 강습회가 개최된 것이 시초로서, 이 강습회의 강습생들을 중심으로 같은 해 조선 에스페란토 협회가 창립되었고, 김억과 함께 신봉조, 홍명희, 백남규등이 초기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김억은 1920년에 발간된 <폐허>지의 창간호에 라는 에스페란토 창작시를 발표하였고 1922년 <개벽>지에 <에스페란토 자습실>을 발표하는 등 자신의 문학 활동과 에스페란토 보급활동을 연결하고자 노력하였다. 1923년 최초의 강습서인 <강습용 에스페란토 독본>이 신봉조에 의해 발간되었다. 특히 김억은 1930년대 중반까지 김동인의 <감자>를 비롯한 단편소설들을 번역하였고, 신문에 많은 논문을 게재하였다. 1937년 홍형의에 의해 순수에스페란토 잡지가 창간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에 의해 곧 폐간 되었다. 나비 학자 석주명은 전공 논문의 내용 또는 요약을 에스페란토로 발표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1947년 <국제어 에스페란토 교과서>를 출간하였다. 6.25 동란 후 1960년대 중반까지 부산의 이재현, 대구의 최해청, 홍형의, 서병택, 그리고 서울의 최봉열등에 의해 그 명맥을 유지해 오던 활동은 1975년 한국 에스페란토 협회가 탄생함에 따라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고, 이후 대학을 중심으로 학생과 일반인을 위한 보급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976년부터 발행된 이란 잡지는 1994년 폐간될 때까지 123호가 발행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메밀꽃 필 무렵>, <백치 아다다>, <발가락이 닮았다>, <제3인간형>, <타인의 방>등이 에스페란토로 번역 발표되었다. 독립운동가였던 이재현에 의해 1969년에 <에스페란토-한국어 사전>이, 1982년에 <국어-에스페란토사전>이 발간되었다. 장충식은 1985년 에스페란토를 단국대학교의 정규 교과목으로 채택하고, 1986년에는 부설 에스페란토 연구소를 설립하여 에스페란토의 학문적 연구 수준을 제고하였다. 1994년 1800명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에서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가 열렸다.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사에 있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당시의 시대적 정세에 따라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과 전세계 민중들간의 연대를 위해 에스페란티스토가 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것은 구소련의 스탈린 독재 아래에서 활동하던 에스페란티스토들도 마찬가지였다. 수 많은 에스페란티스토들이 에스페란토어를 말한다는 것만으로 목숨을 잃었다. 물론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아나키스트였고, 스탈린 독재에 저항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전 세계 에스페란토 운동에 매우 큰 타격을 주었다.
왜 평화 활동가들이 에스페란토를 배우야 하나?
앞서 글을 쓴 남희정님의 경우 일본의 환경, 평화운동가인 토다 기요시의 만남을 통하여 에스페란토에 대한 만남이 시작 되었다. 일본의 SAT(Sennacieca Asocio Tutmonda, 세계 무국적자, 무민족자 협회) 회원인 Viola(비올라)님의 경우 일본의 살해 당한 아나키스트인 오오스키 사카에의 연구를 통하여 에스페란티스토가 되어 현재 열심히 활동하고 있으며 국내의 길거리 평화행동을 함께하는 CGA의 Paz님의 경우 독학으로 에스페란토를 2달간 공부 한 후 일본의 활동가인 Daisin과 이메일 교환 후 직접 한국에서 만남이 있은 후 에스페란토가 실제로 사람과 사람 사이, 국가를 초월하고 민족을 뛰어넘는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현재 에스페란토 인터넷 잡지 “ La Solidareco"에도 편집진으로 직접 참여 하고 있다.
에스페란토 인터넷 잡지 “ La Solidareco"는 현재 16호가 발행되어 전 세계 진보적인 에스페란티스토들에게 매달 1600명에게 보내지고 있다. 그동안 한국의 상황이나 생각들을 잘 알지 못하던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이 잡지를 통해 새로운 한국과 만나고 있으며 소통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신자유주의라는 물결은 국경을 넘나들면서 일국의 모든 것들을 파괴 시키고 있다. 불량하고 부정한, 야만의 얼굴을 한, 필연적으로 약자들의 언어와 문화를 짓밟으며 성장할 수밖에 없는, 거대 국가의 자본의 횡포는 언제나 언어적 강요를 동반한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자국의 식민지 국가에 강제된 제국주의 언어의 교육은 비단 일본어만이 아니었다. 제국주의 침략으로 자국의 민족어를 잃어버린 국가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알 수 있다. 과거의 식민지 쟁탈전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제국의 횡포의 담론에, 개인의 계급적 상승을 위한 인터네셔날로 가는 코스모폴리탄 국민으로서의 영어라는 민족어 앞에 전 세계 국가와 민중들은 언어로서 이루어지는 평등성을 상실하고 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듯이 누구나 쉽게 우리가 아닌 타민족을 만날 수 있고 친구가 될 수 있다. 무엇으로 우리는 그들을 만날 것인가? 자본으로 무장된 타민족의 착취를 동반한 폭력을 수행하는 제국주의 언어로 만날 것인가? 우리가 살아가야할 땅을 황폐화하고 파괴함은 물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관계마저 파괴 시키고 있는 평등성을 상실한 민족어들의 횡포에 우리는 평화의 언어로서 그들과 만나야 한다.
거대한 자본과 그것을 형성 한 권력들과 부조리한 것들을 저지시키려는 작은 행동의 몸짓들은 우리들의 희망이다. 평화를 고민하고 활동하는 이들에게는 에스페라토야 말로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영어권의 사용자인 외국인을 만나서 헤어질 때 상대방에게 에스페란토라는 언어가 있는데 당신도 배워서 한 쪽이 느끼는 언어적 불평등에서 떠나 평등하게 이야기 하자고 당당하게 이야기 해보자. 우리는 평화운동을 하면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는 운동을 하여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또한 문화의 다양성과 존중을 이야기 하고 민족어의 보존, 심지어 사라져가는 지방어(사투리)의 보존을 이야기하면서 국가 간 소통에는 영어로 이야기 하자고 한다. 일국의 민족어, 아니 영어가 보편화 되었다고 세계 공용어로 영어를 사용하자는 이야기는 전 세계 비영어권 사용자들에게는 이러한 언어적 불평등 속에서 교육받은 사람들하고의 소통만을 이야기 하고 있다. 과연 영어가 세계 공용어가 될 수 있는가? 전 세계 언어학자들이 말하는 세계 공용어의 조건이 3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배우기가 쉬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규칙적이고 예외가 없어야 하며 셋째, 언어적 풍부성이 완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어떠한 민족어도 위 세 가지를 충족시키는 것이 없었다. 세계 공용어라고 만들어진 인조어가 지금까지 1000여종에 되지만 100년 넘게 아직까지 살아있는 언어로 사용자들이 있는 언어는 에스페란토 밖에 없다.
나는 누구보다도 평화 활동가들이 에스페란토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에스페란토의 태생적 환경 역시 평화의 언어로서 만들어 졌기에 전 세계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언어로 소통하기를 바라고 있다. 실제로 많은 전 세계 에스페란티스토들이 평화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에스페란토를 하면 친구가 되고 동지가 되는 것을 금방 알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방도 똑같은 고민 속에서 에스페란토를 공부하였기에 거기에서 느끼는 느낌은 형제애 같은 것이다.
나는 에스페란토가 배우기 쉽다하니까 누구나 아무런 목적과 의식이 없이 배워서 여행을 가서 쉽게 에스페란티스토들과 친구가 되는 것을 보아왔다. 이런한 언어적측면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 안에는 우리 만 알면서, 우리끼리만 즐기겠다는 생각이 에스페란토를 하는 사람사이에서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에스페란토티스토 중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다양한 생각들이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생각의 공유 속에 평화 활동가들이 많아져서 에스페란토를 통한 평화운동이 전 세계 민중들에게 희망의 언어, 평화의 언어로 진정으로 다가갔으면 한다.
세계 곳곳의 민중들의 정당하고 올바른 목소리가 모아지고, 연대를 이루고, 또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이 쌓이고, 곧 그것이 잘못되고 가고 있는 세상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거대한 물줄기가 될 것임을 믿는다.
일상적으로 끊임없이 침략의 구조를 파괴하는 민중의 네트워크를 강화시키면서 해방의 인터내셔널리즘, 즉 intrepopola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 매개체로서 에스페란토의 역할을 또한 기대한다. 지배자의 언어와 문화가 아닌, 강자의 것도 약자의 것도 아닌 제 3의 평화의 언어 에스페란토 말이다.
에스페란토에는 그러한 내적인 힘이 있다. 국가주의, 민족주의에 갇혀 보지 못하는 전 세계 민중을 향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평등한 가치의 언어, 에스페란토는 어느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며 독점적으로 점유할 수 없는 누구든지 배울 수 있는 언어이다. 언어로서의 가치적 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전 세계 민중연대를 위한 도구로서 가능하며 평화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에게는 더욱 연대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또 하나의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저 슬쩍 지나치며 조금 알아나 두자고 올려 봤습니다. ^^
첫댓글 에스페란토를 제작한 자멘호프는 폴란드의 아슈케나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칭 세계를 지배하는 자칭 가짜 유대인은 아닙니다. 나치시대에 죽은 유대인의 정체가 동유럽에 살던 유대교 신자들입니다. 그들은 고리대금업을 한 적이 없었는데 나치정권에 의해 누명이 씌워졌습니다. 그 주범이 바로 고리대금업을 하던 가짜 유대인들입니다.
1987년에, 에스페란토 교재와 사전을 가지고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전에 스페인어를 공부한 적이 있기 때문에, 스페인어보다 훨씬 쉬운 언어입니다. 파생어가 규칙적이고, 발음이 규칙적이어서 외우는 번거로움이 없습니다. 문법은 또 매우 쉽습니다. 에스페란토는 단어만 익혀놓으면 책을 읽을 수 있고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습득하는 것에 있어서는 스페인어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상형문자 한자를 이용한 국제어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소전체로 하면 됩니다. 한자에 대한 발음은 새로 정해야 합니다. 한문 문장이 있고, 위첨자로 한글로 발음기호가 적혀 있으면 됩니다.
이 방법을 오랫동안 구상해왔습니다. 언젠가 방안을 한번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표의문자는 표음문자보다 학습시간과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한자는 상형자와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에 한자 한 글자를 봐도 물체를 연상하지 못합니다.
한자 글꼴은 소전으로 합니다. 한글을 정비하여 새로 만듭니다. 두가지 문자를 동시에 사용합니다. 소전을 익히기는 어렵지만, 장점이 있습니다. 단어를 무한히 확장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한자를 정비해야 하고, 음이 500개도 안되는 것도 정비해야 합니다. 한자의 음을 3천개 이상 만들어합니다. 더 자세한 것은 다음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