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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작 마당에 둔 양털 한 뭉치
삿 6:33-40
33 그 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요단 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34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35 기드온이 또 사자들을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따르고 또 사자들을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 그를 영접하더라
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38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39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40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삿 6:33-40 / [표적을 구하는 기드온]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쪽 사막에 사는 사람이 요단강을 건너와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쳤다. 34) 여호와의 ㄱ) 숨결이 기드온을 휘감자 기드온은 전쟁터로 싸우러 나가자는 뜻으로 나팔을 불어 댔다. 그러자 아비에셀 가문 사람들이 모두 나와 기드온을 따라나섰다. 35) 기드온이 또 사람들을 므낫세 지파 사람들에게 보내자 그들도 모두 기드온을 따라 나섰다. 또한 아셀 지파와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에도 사람을 보내자 그들도 역시 올라와서 기꺼이 기드온을 따라나섰다. 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었다. `주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제가 이스라엘을 구해 내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말입니다. 37) 주님, 보십시오. 제가 양털 한 뭉치를 가져다가 타작마당에 두겠습니다. 그래서 이 양털뭉치에만 이슬이 내리고 주변 마당에는 이슬이 내리지 않는다면 우리가 나가 싸워 저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이스라엘을 구해 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겠습니다.' 38) 그랬더니 정말 기드온이 하나님께 요청한 대로 되었다.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 일어나 타작마당에 두었던 그 양털뭉치를 가져다가 이슬을 짜보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게 고였다. 39)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었다. `주님, 제가 또 여쭙는다고 해서 제발 화내지 마십시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이번에는 양털뭉치에는 이슬이 내리지 말게 하시고 타작마당에만 이슬이 내리게 해주십시오.' 40) 그러자 기드온이 요청한대로 되었다. 곧 하나님께서 양털뭉치에는 이슬을 내리지 않아 말라 있고 타작마당 여기저기에만 이슬이 내려 젖어 있었다.
드디어 미디안과의 전쟁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비에셀과 므낫세 지파가 따랐습니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33-35)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칠 때,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했다는 말씀을 직역하면 옷을 입혔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전투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대하 20:15).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 어떠한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진리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36-38) 기드온이 마지막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증거를 구합니다. 그 유명한 양털증거입니다.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면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알겠다고 합니다. 증거는 재판에서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으로 승패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드온도 출전하기 전에 확실한 증거를 구한 것입니다. 기도온을 위해 하나님은 증거를 주십니다. 다음 날 기드온의 요구대로 되었습니다(38). 무엇이든지 확실히 하고 넘어가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불신하는 방향으로 가면 안됩니다. 기드온은 예전에도 하나님의 사자에게 표증을 구하여 바위에서 불이 나서 고기와 무교병이 불타는 증거를 보았습니다(삿 6:21). 그런데도 믿지 못하고 또 증거를 요구합니다.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39-40) 자신의 요구대로 증거가 주어졌지만 기드온이 또 다시 증거를 요구합니다. 이번에는 양털은 마르고 주변 땅에만 이슬이 내리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만큼 기드온은 용사라고 불리기에는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붙들어 쓰시면 큰 용사가 될 것입니다. 이로써 기드온에게 바위에서 나온 불의 기적까지, 3번의 증거가 주어졌습니다. 성경에서 3은 완전을 의미하고 확신과 확정을 뜻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3명의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막 5장), 나사로(요 11장),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 7장)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죽은 자들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적용: 당신은 기드온처럼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나요? 혹시 믿지 못한다면 기드온처럼 확실한 증거를 보여 달라고 기도하길 바랍니다.
기드온은 전쟁을 앞두고 자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하루는 양털에만 이슬이 있도록 하고, 또 하루는 양털을 제외한 주변 땅에만 이슬이 있기를 요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이런 요구를 다 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순종하기 위해서 확신을 구하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그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의 말대로 그대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기 위해서 확신을 구하는 것을 도우시며, 강한 용사로 키워가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왜 확신을 구하는지를 보시고 우리를 자상하게 인도하십니다.
< 설 교 >
표징을 구하는 연약함,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
삿 6:33-40 / 행복한교회
하나님의 영이 임한 기드온은 어떤 행동을 취했나요?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미디안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이스르엘 골짜기(평지)에 진을 칩니다. 가나안 땅의 곡창 지대인 이스르엘 평야를 차지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의 영'(34절)이 기드온에게 임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주님의 영이 기드온에게 갑옷을 입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과 함께하심으로 그를 보호하는 무기가 됩니다. 기드온은 곧바로 나팔을 불어 군대를 소집합니다. 나팔을 부는 것은 '거룩한 전쟁'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수 6:4). 미디안 연합군과의 싸움은 하나님이 신적 전사(divine warrior)로서 싸우시는 전쟁이 될 것입니다. 성도는 거룩한 전쟁을 치르는 군사로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옷 입어야 합니다(엡 6:11).
내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감당할 거룩한 전쟁은 무엇인가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구세주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앞에 나아가 때에 맞는 은혜를 구하여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간구에 응답하셔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령하나님을 보내어 함께 살게 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란 성령께서 함께 사시는 삶이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이고, 성령의 도우시는 능력으로 살아가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거룩한 전쟁으로 표현하자면 내 자신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육체의 욕망과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려는 세상의 풍조와 맞서 싸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삶의 기준으로 삼아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방식으로, 성령님의 도우시는 능력으로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특정한 영역에서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룩한 전쟁을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왕 되심을 인정하는 거룩한 전쟁을 싸우는 것입니다.
표징을 구한 기드온의 요구를 다 들어주신 것에서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알 수 있나요?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고 하나님의 군대가 소집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된 것 같은데 정작 기드온은 아직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이에 기드온이 하나님께 표징을 구합니다. 그가 요구한 첫 번째 표징은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이어서 그 반대의 현상을 두 번째 표징으로 구합니다. 아마도 처음 표징을 자연 현상일 수 있다고 의심한 것 같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음에도 여전히 의심하고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연약함을 아시고 두 번의 요청을 모두 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시 103:14) 기쁨으로 헌신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표징을 구하기보다 말씀을 믿고 순종할 일은 무엇인가요?
최근 올림픽 경기가 끝났습니다. 수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놀라운 결과를 이룬것은 하루 아침에 갑자기 특별한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스포츠의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결과를 내기 위해서 어렸을때부터 꾸준히 훈련받은 결과 그런 결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의 믿음도 운동선수들의 근육과 같다고 합니다. 하루 아침에 갑자기 우리의 믿음이 기적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연습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의 근육은 더욱 강건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일이 점차 자연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표징을 구하기 보다는 말씀 믿고 순종하는 훈련을 사모하고 받는 것을 더욱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근육이 아직 발달되지 않은 영역이 어디입니까? 오늘 그 영역을 주님앞에 내어놓고 주님의 말씀을 믿고 다스림을 받을 수 있도록 구하십시오. 믿음의 훈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주님을 신뢰하는 우리의 믿음 조차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인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한계를 아시고 오래 참아 주시며 우리의 수준에 맞게 깨우치셔서 자라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의 근육이 날마다 자라가기를 사모합니다.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삿 6:33 ~ 40 / 잡초
하나님은 때가 되어 이스라엘과의 바른 관계 회복을 위해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후에 제일 먼저 여호와 샬롬의 표징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로 기드온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날 밤에 아비 집에 있는 바알의 단을 헐고 단 곁에 아세라 상을 찍으므로 여룹바알이 되는 표징을 받았습니다.
이때에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사람들이 다 모여 요단을 건너와서 이스라엘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6:33).
저들의 이러한 행동은 이스라엘을 약탈하려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기드온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표징을 구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명에 대하여 자기 확신의 긍지를 얻기 위함입니다.
히스기야도 자신의 생명이 연장되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표징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기꺼이 히스기야에게 표징을 보여 주었습니다.
열왕기하 20장 8-11절에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조가 있나이까 이사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서 왕에게 한 징조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 십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도가 물러갈 것이니이다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일영표(日影表)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인간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표징을 구하는 것은 인간들의 한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연약성이라고 일축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다만 자기 확신을 구하기 위함이라는 평가가 정당합니다. 기드온의 요구에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다시 한번 또 주 되신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Ⅰ.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임하신 표징입니다.
본문 6장 34절에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강림하시니』에서 라마쉬( )는
① '옷을 입히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기드온을 옷 입히시듯이 하나님의 신으로 무장시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신으로 무장을 한 기드온은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②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을 점령했다는 뜻이 있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정복을 당했다는 말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에게 정복당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에 정복당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을 점령하여 마치 든든한 끈으로 묶듯이 기드온을 꼼짝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신은 능력 있는 신입니다. 이사야 11장 2절에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어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께 붙잡혀야 됩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이 신이 임했다』는 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41장 38절에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11장 25절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임했다'는 말에 대한 신약적 의미는 보혜사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에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을 근심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므로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위대한 지도자로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임하기 전에 포도주 틀에 올라 밀 타작을 하던 겁쟁이 기드온이 아닙니다(6:11).
이제는 자신이 작고 약하다고 탄식하던 기드온이 아닙니다(6:15).
그는 이제 여호와의 사자가 말한 대로 큰 용사였습니다(6:12). 여호와 샬롬의 표징과 여룹바알의 표징이 소명에 대한 확신의 표징이라면 여호와의 신이 강림한 표징은 기드온이 능력을 덧입는 표징입니다.
1) 그는 나팔을 불 수 있었습니다.
본문 6장 34절에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전쟁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나팔 소리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솔한 일은 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행군을 시작하는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통솔하기 위해 은나팔 제작을 지시했습니다(민 10:1-2). 그리고 나팔을 부는 신호를 규정했습니다(민 10:3-10). 200만 명에 달하는 무리를 모세와 아론이 통솔하기 위해 나팔소리를 이용하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나팔소리는 이스라엘을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육성과도 같았습니다.
2) 백성들이 기드온 앞으로 모였습니다.
본문 6장 34절에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라고 했습니다. 나팔소리를 듣고 기드온 앞으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3) 백성들이 기드온을 좇았습니다.
본문 6장 34절에 『…그를 좇고』라고 했습니다.
본문 6장 35절에 『…기드온이 또 사자를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좇고…』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의 씨족과 바알 신을 섬기는 자들이 전쟁에 참여하기 위하여 기드온을 따랐습니다. 이것은 일대 종교적 혁명입니다.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의 아비에셀 출신입니다. 따라서 므낫세 지파가 제일 먼저 합류했습니다.
4) 백성들이 기드온을 영접했습니다.
본문 6장 35절에 『… 또 사자를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서 그를 영접하더라』고 했습니다.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기드온을 영접했습니다. 주변에 사는 족속들까지 합류함으로 기드온은 예기치 못한 지원군을 얻은 셈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 되시는 표징은 그의 약속대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요 15:26; 16:7-11; 행 1:8). 성령 받은 주의 제자들은 성령강림 이전의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아니했습니다. 성령은 곧 주의 제자들의 능력이었습니다.
주의 교회는 복음의 나팔을 불었습니다. 예수를 따랐습니다.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우리의 목자장으로, 왕으로 영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을 오히려 즐거워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받은 자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자는 겁쟁이가 아닙니다. 소신 없이 눈치를 보는 기회주의자가 아닙니다. 자신이 받은 사명에 대해 도망치는 비열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9장 2절에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뜻을 받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표징입니까?
Ⅱ. 이슬의 표징입니다.
본문 6장 36-37절에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미디안과 접전을 앞둔 기드온은 하나님께 한 번 더 주 되신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타작마당에 둔 양털 뭉치에만 이슬이 있게 하고 사면 땅은 마르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기드온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알겠다고 했습니다(6:37).
그대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튿날 기드온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양털을 취하고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요구대로 해 주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이번에는 그 반대로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이슬이 있게 해달라고 조심스럽게 요구했습니다.
일차적으로 그의 요구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표징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미디안과의 전쟁을 앞두고 불안한 그의 심정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대가 미디안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전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거듭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디안 군대로 인하여 아직까지 불안해하고 있는 기드온에게 그의 요구대로 임마누엘의 표징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습니다.
본문 6장 40절에 『이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기드온이 이슬의 표징을 요구했던 본문 36절부터 40절까지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해서 여호와( )로 나타나지 않고 엘로힘( )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①이방신과 구별된 하나님 그리고 ②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과 ③백성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출애굽기 6장 7절에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고 했습니다.
엘로힘(( )은 이방신을 포함한 모든 신 중에 신이신 하나님을 언급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창조의 능력을 강조할 때(창 1:1; 출 20:1; 신 6:4; 삼하 22:32)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기드온이 찾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자연 만물까지도 주장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엘로힘( )은 하나님이 복수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신론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형태는 복수(( )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단수로 취급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삼위이시나 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기드온은 이방의 모든 신들 중에 신이신 능력의 하나님께 표징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구국의 소명자로서 임전태세를 갖추고 마지막 결단을 내리기 위한 최종점검 역시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본주의 자세입니다.
여기 양털에 맺힌 이슬은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미디안을 구별시킨다는 말입니다. 이슬은 하나님의 은총의 표상입니다.
양털이 사면의 이슬을 흡수해 버리는 표징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알려주는 묵시입니다. 양털에 이슬이 내리지 않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날 때 한 방울의 이슬도 내리지 않고 이스라엘은 메마른 광야가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묵시적 교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드온이 하나님께 표징을 구한 것은 결코 사욕을 위하여 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구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침략에서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표징을 구했습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는 양보할 수 없는 일념에서 구한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을 의심했다든지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함이 아니라 전쟁승리의 확증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현장 체험의 대망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이 말의 신약적 표현은 교회운동을 위하여 표징을 구하는 것입니다. 곧 일하기 위해서 표징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여호와의 신으로 충만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약한 자가 강하게 됩니다. 겁쟁이가 큰 용사로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이슬의 표징을 체험합니다. 이 이슬의 표징은 승리의 확증입니다.
우리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은 바로 이슬의 표징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현장에는 항상 땀과 눈물과 피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를 위해서만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립니다. 땀과 눈물과 피를 아무 때나 흘리지 아니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지혜이자 성별의식입니다.
우리 눈에 눈물이 있는 동안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 눈에 한 방울의 눈물도 보이지 않을 때 메마른 광야같이 되고 맙니다. 믿지 않는 골육을 생각할 때 눈에 눈물이 흐릅니다. 선교지역의 영혼들을 생각할 때 눈물과 함께 저들을 돕기 위해 우리 몸에는 신성한 노동의 땀이 흐릅니다.
우리가 받은 교회운동의 사명수행에 방해를 받을 때 순교의 피가 쏟아집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는 흘릴 수 없는 눈물과 땀과 피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몸 된 교회 운동의 고난의 현장에서 흘리는 눈물과 땀과 피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가 우리의 주가 되신다는 확실한 표징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사사기 6:33-40 / 이철신목사
논 지 :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말씀을 그대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가. 성령강림(33-35) – 임마누엘의 내적 증거
1. 외적의 침입(33)
한 해 동안 땀 흘려 농사를 짓다가 추수를 할 때는 기쁨과 감사의 계절이 됩니다. 우리나라의 추석이 그렇고, 미국의 명절이면서 기독교의 명절이 된 추수감사절이 모두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명절입니다. 그런데 기드온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추수 때가 두려움과 분노의 계절이었습니다. 곡식을 수확할 때가 되면 주위의 이방 부족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해 왔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역시 마찬가지여서 요단강 동쪽 사막에 사는 부족들이 요단강을 건너와서, 북쪽의 비옥한 이스르엘 평지에 진을 치고는 침략하고, 농사 지은 것을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땀 흘려 농사지어서 수확하게 되니까, 강도들이 먼저 와서 다 빼앗아 갑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킬 힘이 없었습니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주위 부족들의 먹이 감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수고만 하고 주위 부족들이 수확물을 다 빼앗아 갔습니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 추수철만 되면 계속해서 반복해서 일어났습니다.
2. 성령강림(34a)
이때도 외적이 침입한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였습니다. 34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난 주에 본 대로 기드온은 민족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제일 먼저 한 일이 그들 속에 있는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을 회복하였습니다. 영적갱신을 먼저 하였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와 생활 관습에 물들어서 세속화된 자기 민족을 정결하게 하고 영적으로 갱신하고 정신을 개조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답게 정결되고 거룩한 삶을 회복하였습니다. 이렇게 영적 갱신으로 거룩한 삶을 회복한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신이 강림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기드온에게 강림하여, 기드온을 휩싸고 기드온을 사로 잡았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기드온을 지배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강림하니까 기드온의 마음이 감동되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기드온의 생각과 태도를 성령이 지배했습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탐욕이나 이해관계가 뒤로 물러나고, 하나님 중심의 생각이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일신상의 편안을 다 뒤로 하고 하나님께서 민족을 구원하라고 주신 사명감이 그의 마음 가운데 강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외적이 침입하기만 하면 두려워서 겁내던 마음이 뒤로 사라지고 그들의 불의한 강도 짓에 의로운 분노가 생겼습니다. 자기 민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났습니다. 외적을 물리쳐야 하겠다는 강한 의욕과 용기가 생겼습니다.
또 이렇게 성령께서 기드온에게 강림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함께 하신다는 내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내적증거라는 것은 자기 혼자만 아는 증거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은 내가 어떤 것을 받았고 어떤 확신을 받았는지 알지 못하지만 내가 내 마음 가운데 분명한 증거와 확신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감동과 확신이 기드온의 마음 속에 생겼습니다. 민족 구원의 소명감이 확실해 졌습니다. 민족 구원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령 강림은 받은 자만이 알고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남은 알지 못하지만, 받은 자는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관적이긴 하지만, 그러나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내면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신앙생활 하는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에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강림하신 내적증거를 우리가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지만 나만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신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서 성령께서 내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내적증거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군대 소집(34b-35)
성령이 강림했을 때에 기드온은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나팔을 불었습니다. 나팔을 불었다는 것은 외적이 침입했음을 알리는 경고의 소식입니다. 또한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모이자는 군대 소집의 소식입니다. 기드온이 나팔을 불자, 미디안을 무서워해서 산으로 도망하던 사람들이(6:2) 싸우려고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상을 파괴한 기드온을 죽이려고 했던 기드온의 집안 사람들과 동네 사람들도 미디안과의 전쟁에 같이 참여하기 위에 모였습니다. 기드온이 속한 므낫세 지파 사람들은 물론이고 다른 지파 사람들도 기드온을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미디안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용기를 내어 싸우려고 모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영적갱신을 통하여 사람들이 완전히 변화 되었습니다. 우상을 깨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회복되고 나니까 우상에게 의지하던 것들을 다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에게 매여 있던 의존적인 생각을 버리게 되고 정신이 개조되고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또한 영적 갱신 과정을 통하여 그들은 기드온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기드온이 용기 있게 우상을 다 깨뜨리고 하나님 예배를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기드온이 영적인 권위가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하고 자신들의 지도자로 받아 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을 중심으로 모인 것입니다. 용기 있게 미디안을 물리치기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기드온은 성령강림함으로 민족 구원의 사명감과,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서 구원하신다는 내적 증거를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들마저도 자신을 지도자로 인정하고 모이고, 여러 지파 사람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서 민족을 구원하신다는 외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감을 가지고 적을 향해서 나갈 때가 된 것입니다.
나. 하나님의 신실하심 – 임마누엘의 외적증거
1. 기드온의 불안(36-37)
그런데 막상 사람들을 소집해 놓고 전쟁터로 나가려고 할 때에, 기드온의 마음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전쟁의 문턱에서 주춤거리고 망설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이 먼저 머리에 들어 왔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은 그 숫자가 엄청나게 많고 또한 그들은 싸움에 익숙한 싸움꾼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남을 침략하고 남의 것을 빼앗아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떻게 전투하는지를 잘 알았고, 남을 제압하는 방법을 잘 알았습니다. 전투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비해 이스라엘은 늘 도망 다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싸움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싸워본 적도 없고, 한번도 전쟁에 승리해 본적도 없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미디안과 싸우려고 하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인간적인 상식으로 판단하니까 불안한 마음이 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회의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셨는데, 과연 말씀하신대로 함께 하실까? 의문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말씀하신대로 구원하실지 걱정되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여러 번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두번씩이나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약속의 말씀이 분명하다는 증거를 보여 주셨는데, 반석에서 불이 나와 제물을 살라 버리는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6:21). 또 두 번째로는, 여호와의 신이 강림하는 내적인 증거를 주셨습니다. 세 번째로는, 기드온이 나팔을 불 때에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다 모이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증거를 계속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전쟁터로 나가려니까 불안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함께 하신다는 외적인 증거를 보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요청했습니다. 밤이 되면 이슬이 내리는데 마당에 양털을 놓을 테니 땅은 마르고 양털에만 이슬이 젖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37). 기드온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내 눈으로 보이는 것, 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증거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외적인 증거, 객관적인 증거만 분명하고 확실하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보통 우리는 신앙생활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만 가지고는 잘 믿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감동하시고, 강림하고 역사하시는 것 만을 가지고 잘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증거, 외적인 현상을 요구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 도마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예수님 손의 못자국을 보고, 자기 손가락으로 예수님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고 의심했습니다(요 20:25). 예수님께서 오셔서 도마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직접 모든 것들을 보여주신 다음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많은 증거가 뒷받침된 것이고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에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주셔서 우리가 믿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께서 여러분들 가운데 감동하셔서 말씀을 믿는 복된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신실하심(38)
기드온이 하나님께 눈에 보이는 증거를 요청하고, 아마 그날 밤늦도록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 하나님의 구원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전쟁을 눈 앞에 두고, 불안과 두려움을 한꺼번에 깨끗이 씻을 수 있는 증거를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확신과 자신감과 담대함을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만져 보니까 과연 양털이 젖었습니다. 주위의 땅은 다 말랐는데, 양털만 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지키신다는 신실함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역시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임을 확신할 수 있도록 증거를 주신 것입니다.
3. 기드온의 갈등(39)
그만하면 이제 확신을 가지고 전쟁터에 나갈 만도 한데, 기드온의 마음 가운데에 불신의 병이 다시 도졌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의심과 회의, 갈등과 불안이 다시 꿈틀거렸습니다. 밤에 이슬이 내려서 양털을 적시고 땅은 말라 있었던 것이 혹시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닌지 의혹이 들었습니다. 한번의 증거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상식을 넘어서는 강한 의심이 들었습니다. 기드온은 본래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미디안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빼앗길까 두려워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막상 전쟁터로 나가려고 하니까 주저되고 망설여졌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이 몰려왔습니다. 마음 한 쪽에서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서 구원하시리라는 믿음이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강한 미디안과 전쟁해서 이길 수 없다는 인간적이고, 비관적인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두 마음이 그의 마음 속에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연약한 존재입니다. 죄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지만 그래서 마음 한 쪽에서는 강한 믿음과 확신이 있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불신과 회의가 둥지를 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고 자백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탄식하며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롬 7:24-25). 여러분, 이렇게 우리 인간들은 회의하고 우유부단하고 갈등하면서,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기드온은 자기가 연약한 존재이고, 의심이 많은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께 고백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외적인 증거를 보여 주시도록 요청했습니다. 이번에는 이전과 달리 땅은 이슬에 젖고, 양털만 마르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번 증거를 보여줬는데도 불구하고 또 계속해서 또 다른 증거를 보여달라고 요청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한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들에게 얘기합니다. ‘네가 공부 열심히 하여 대학에 입학하면 학비를 책임지고 도와줄 테니 열심히 공부만 해라’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들이 그 말을 믿고는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다시 아버지에게 와서 ‘아버지 학비를 전적으로 도와준다고 하셨는데 분명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래 걱정하지 말아라’ 그랬더니 다시 자기 방에 가서 공부를 합니다. 그러다 또 조금 후에 다시 와서 그 약속이 확실한지 묻습니다. 그래도 못 미더워서 ‘아버지,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하는 것이 좋으니까 각서를 하나 써 주세요’. 그리고 또 조금 있다가 ‘아버지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를 확실히 해 놓는 것이 좋으니까 삼촌들 2사람만 보증인을 세웁시다’. 또 조금 있다가 ‘아버지, 집을 담보로 합시다’. 여러분이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 아들을 두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버지가 약속한 그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다른 증거들을 요구한다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무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증거를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다른 증거를 요청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례하게 하나님을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신실하심(40)
이렇게 기드온 불신하고 의심하면서 무례하게 하나님께 요청했지만, 자비로운 하나님은 기드온이 요청한 그대로 행하셔서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약속의 말씀 외에도 또 필요한 증거를 주고, 또 필요한 증거를 계속해서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죄인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의심하는 자도 용서하셨습니다. 거듭되는 무례를 인내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기드온을 지도자로 세우는 일에 책망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를 세웠습니다.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끝내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지도자로 세우시고, 확신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담대하게 하시고, 자신감을 주셔서 마침내 기드온을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구원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같은 죄인들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불신할 때에도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무례할 때에도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방황할 때도, 갈등할 때도, 불안해 하고 두려워할 때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약속을 그대로 지키시는 신실한 분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믿고 담대하게 세상 속에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서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약한 믿음을 도우시는 주님
사사기 6장 33~40절 / 생명의 삶
[배경 이해하기]
기드온은 사사기에 등장한 다섯 번째 사사이자 6명의 대(大)사사에 속하는 인물로, 기드온 이야기는 사사기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다른 사사들에 관한 서술과 달리 기드온 이야기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전쟁의 전개, 이후의 상황을 상세하게 보여 줍니다. 당시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 사람들의 침입은 이스라엘에 매우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연합해 수확기가 되면 찾아왔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장기간 그 땅에서 진을 치고 약탈했으며, 메뚜기 떼같이 많이 들어왔다고 표현합니다(4~5절). 이러한 일이 매년 계속되자 이스라엘은 생존 차원에서 큰 위기를 겪게 됩니다.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배교를 지적하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말씀하시며, 사자를 보내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매우 의심이 많고 소심한 인물로, 여러 차례 하나님의 구원과 함께하심을 확인하고 표징을 구하며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기드온 이야기는 적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에 초점을 두기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 주는 데 중점을 둡니다. 즉, 기드온의 영웅적인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가 되시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경배의 대상이시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돌이키시기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관찰과 묵상]
1. 미디안, 아말렉, 동방 사람들이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 칠 때 기드온에게 어떤 영적 사건이 있었나요?(33~34절)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이 사자를 므낫세와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 군사를 모았습니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연합군은 이스라엘에 너무도 위협적이고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기드온은 노략질하는 미디안의 눈에 띌까 두려워 포도주 틀에서 몰래 밀을 타작했습니다(6:11). 그러나 미디안과 싸워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하는 하나님의 때가 이르자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합니다. ‘여호와의 영’은 옷니엘, 입다, 삼손 등의 사사가 하나님 능력을 발휘할 때 사용되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다만 34절에서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였다’라는 표현은 ‘(옷처럼) 둘러싸다, 덮다, 감쌌다’라는 원어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성경 다른 부분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표현이 아니라 구약성경에만 세 번 나타나는 표현입니다(34절; 대상 12:18; 대하 24:20). 따라서 ‘여호와의 영을 옷 입다’의 문자적 의미는 기드온 자신에게는 출중한 능력이나 자질, 담대한 믿음이 없지만, 여호와의 영이 친히 그를 둘러싸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는 기드온은 이 전쟁의 대리인일 뿐, 이 싸움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행하신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여호와의 영을 힘입은 기드온은 두려움을 이기고 그의 집안 아비에셀을 향해 나팔을 불어 군대를 소집합니다. 이어서 가나안 땅의 서북쪽 지파들인 므낫세와 아셀, 스불론과 납달리에도 사자를 보내 군사를 모집합니다.
적용과 나눔
현재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문제는 무엇인가요? 그 두려움을 넘어서기 위해 나의 믿음 생활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믿음의 반대말은 두려움’이란 말이 있습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연약할 때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인 감정입니다. 반대로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 신뢰입니다. 기드온은 매우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스라엘을 향해 나팔을 불고 싸움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를 감싸고 두를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선포하며 세상 앞에 설 수 있는 용사가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두려움과 염려가 찾아올 때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영으로 무장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모든 상황을 주목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확신을 가지고 반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말씀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확신 있게 바라볼 수 있도록 성령으로 친히 옷 입혀 주십니다.
2. 기드온이 하나님께 요청한 두 가지 시험은 무엇인가요? 이를 통해 그는 무엇을 알고자 했나요?(36~40절)
양털을 타작마당에 두고 하루는 양털에만, 이튿날에는 주변 땅에만 이슬이 내리기를 요청했고, 이를 통해 하나님이 그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심을 알고자 했습니다.
기드온은 더 확실하면서 초자연적인 증거를 하나님께 구합니다. 그는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할 때 하나님의 사자에게 미디안의 손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말씀을 들은 후 바위에서 불이 나와 젖은 고기와 무교병 예물을 태우는 표징을 경험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에서 군대를 모을 때 ‘여호와의 영’이 임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체험한 기드온이지만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에 나가기 전 다시 한번 믿음이 흔들립니다. 기드온의 양털 시험은 신의 뜻을 확인하는 고대 근동의 문화이기도 했지만, 그의 소심한 성격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불신과 시험 요구는 하나님 관점에서 무례한 행동입니다. 기드온도 그것을 잘 알기에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39절)라며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 조건 없이 기드온의 요구를 두 번 모두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의심과 불신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를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연약한 믿음을 책망하고 정죄하기보다, 믿음을 갖기까지 인내하시며 마침내 승리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적용과 나눔
하나님이 나의 연약한 믿음을 아시고 도우시는 분임을 신뢰한다면, 내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본문은 기드온이 그랬던 것처럼 믿음이 없을 때마다 하나님을 시험해도 된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까지 하면서 하나님과 행동했던 기드온의 두려움과 소심함을 강조하며, 이를 이해하시고 시험의 내용을 그대로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사명을 받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인지했음에도 여전히 믿음의 발걸음을 힘차게 떼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할 때 그 연약함을 탓하실까 봐 두려워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을 갖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귀신 들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나아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라는 말씀으로 믿음 없음을 지적받았을 때,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4)라고 외쳤던 아버지처럼 성도는 믿음을 갖도록 도우시는 하나님 앞에 언제든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아시고 삶의 전쟁터에서 친히 싸워 주심으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그 하나님이 미디안의 압제 아래 부르짖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시고, 그에게 ‘여호와의 영’을 부으셔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또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기드온의 요청을 들어주시며 그분을 신뢰하게 하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견고히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견고해질 때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과 인내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이 믿음의 싸움에서 큰 힘이 됩니다.
[말씀으로 기도하기]
매 순간 성령님의 임재를 확신하고 모든 두려움과 염려를 이겨 내길 원합니다. 믿음이 흔들릴 때, 눈을 들어 믿음이 견고해지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온전히 신뢰하게 하소서.
징조를 보이시는 하나님
삿 6:33~40
1. 하나님께서는 준비 된 자(ERE)에게 기회를 주신다.
33절 “때에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다 모여 요단을 건너왔다”.
‘때에’ 기드온이 아비에게 속한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상을 찍어 불살라
‘여룹바알’ ‘바알에게 대항하다’ 라는 이름을 얻은 때,
기드온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여 미디안을 물리칠 수 있는 신앙적인 준비되었을 때,
미디안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왔고, 기드온이 미디안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셨다.
물론 다 하나님의 섭리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자에게 사역을 주신다.
하나님은 준비하게 하시고 준비가 완료되면 일하게 하시고 기도하고 일하면 역사 하신다.
요셉은 보디발의 노예로 팔려가 가정 총무와 옥중 사환을 하면서 신앙적으로, 행정적으로
충분히 총리를 감당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하신 후 총리가 되게 하셨고,
모세는 애굽 왕실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생활을 통하여 학문적, 군사적, 지리적, 신앙적으로 충분히 준비된 후 바로를 대면하고 출애굽하였다.
그리고 다윗, 사도 바울, 및 그밖의 사역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려면 먼저 준비되어야 한다. 준비되지 않으면 일할 수 없고 하더라도 실패하게 된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에게만 기회가 주신다. 우리도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하나님이 사업을 안되게 하시고, 10년 이상 교회 사역자를 하다가 신학을 가고, 부교역자로 5년6개월 복무하였고 전도사, 강도사를 거쳐 목사 안수도 받았고, 개척할 장소도 준비되었고, 아이들도 다 보내 주셨고, 이제 때가 되어 일을 시작한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다. 기대하라.
2. 진정한 용기는 자기 의지의 실현이 아니라 자기 의지의 포기다.
34절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었다”.
기드온이 성령에 감동되어서 전쟁을 위해 군대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쉬운 상대가 아니다. 보통의 용기로는 불가능하다.
객관적인 전력을 비교해도 상대가 안된다. 숫자적으로도 미디안 연합군은 메뚜기의 중다함같이 무수하였다(5절), 또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자들이었다(3,4절). 미디안은 몰려다니면서 약탈을 일삼는 전쟁에 능한 자들이고 이스라엘은 농경과 목축을 하는 사람들이다.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싸워도 못이길 것인데 300명만 출전하게 하셨다.
인간적으로 미디안을 물리칠 수 있겠나?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무모한 전쟁을 시작하려면 기드온에게 용기가 필요하다.
시드온이 전쟁에 임할 용기를 낼 수가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이 강림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이 강림하셔서 강권적으로 이끌어 주셨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기드온의 용기는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굴복하는 것이다.
진정한 용기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포기하는 것이다.
결코 자신의 의지를 주장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진정한 용기가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나가는 것은 만용이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인본주의고 오만이고 교만이다.
진정한 용기는 오직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의지와 판단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힘입어 행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용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포기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인간적인 계산에 의한 생각이나 판단, 그리고 육체를 따르는
어리석고 불의한 의지를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을 때
진정 하나님 앞에서 용기 있는 자로 세워질 것이다.
우리도 목사가 되고 개척하는데 15년 이상이 걸렸다. 하나님의 때가 되었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데에도 개척하지 않고 편하게 청빙이나 바라는 것은 불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능력을 믿고 개척하는 것은 인본주의고, 만용이고, 교만이다.
3. 주의 사역에 신중함과 결단력이 필요하다.
36절~40절 기드온은 하나님께 자신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선택받았다는 징표를 보여 달라고 기도하였다.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사면의 땅은 마르고, 반대로 사면 땅에는 이슬이 내리고 양털에는 내리지 않는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는 미디안과 결전에 앞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뜻을 확인해 보려는 신중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사자를 통하여 표징을 보여 주심으로써 확증해 주신(19-21절) 말씀을 과감히 행치 못하고 이처럼 다시 한번 표징을 구하는 것은 그의 결단력 없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신중한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저 감정에 치우쳐 밀고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신중해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확증해 주신 말씀을 과감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도 옳지 않다. 우리는 신중하면서도 과감한 결단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불분명하면 신중하게 기도하고, 그 뜻이 분명하면 머뭇거리지 말고 과감하게 실행해야 한다.
(삼상23:1-5)다윗은 하나님의 명에 따라 그일라를 돕기위해 블레셋을 치려고 하자 사람들이 도망 다니는 주제에 왜 남의 전쟁에 끼여드나? 라고 반대하자 다시 한번 하나님께 물어보는 신중함을 보였다. 그러나 두번째 기도에도 동일한 응답을 받고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블레셋을 쳐서 대승하였다. 이처럼 다윗이 신중함과 결단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귀하게 쓰임을 받았다. 이와같이 우리들은 언제나 신중함과 결단력을 가뎌야 한다.
신중하게 문제를 살피더라도 그 문제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머뭇거려서는 안되며,
또 하나님의 뜻을 결단력 있게 행할지라도 자신에게 있는 많은 문제점들을 미리 신중하게 살펴서 그 문제점들을 염두에 두고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우리도 모든 것이 다 잘 되고 있다고 자만하지 말고, 조금 안된다고 낙심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기도하면서 아침마다 아이들의 상태를 하나하나 살피고 기도하며 신중하면서도 결단력있게 나가면 된다. 이번에 집사님문제가 대표적사례다. 사람에게 끌려 다니면 안된다.
4. 징조보다 믿음으로 사역하라.
사실 기드온의 기도는 옳지만, 표징을 구한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때로는 표징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면 더 큰 용기와 힘을 낼 수 있으며, 당당하고 강해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간증꺼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간증자들이 암이 치유되거나, 죽을 수 밖에 없는 위기에서 살아나거나 엄청나게 크게 사업이 성공한 것을 간증하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나도 간증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기도 한다.
이제 교회를 개척하기에 앞서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보이신 이적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신기한 기적을 보여 주셨다.
학원생이 20명만 넘으면 개척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했는데 이미 작년 말녀 20명이 넘었다.
그런데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의 교회를 흩으시므로 개척하고자 마음을 먹었는데, 사모가 보이스 피싱범에게 모든 정보를 내어 주어 교회를 개척하기에 필요한 물품을 사기 위해 모아 둔 통장의 돈 200만원을 빼내가고, 알뜰폰도 4개나 개설하고, 다음날에도 더 정보를 빼 내갈 것이 없나? 하고 사모 폰을 원격조정으로 들어 왔다가 보이스 피싱범닝 줄 알게 되었다. 교회 개척을 앞두고 얼마나 큰 낙심과 상실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하나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는지 의문을 품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경찰서와 은행과 알뜰폰 회사에 신고하고 연락하고, 읍사무소에서 주민번호까지 바꾸었다.
그런데 한달 후 털린 계좌를 확인하고 보니 가상계좌로 빼내어 간 돈이 그대로 들어와 있었다.
경찰도 잡을 수 없고 은행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고 돈 찾기를 포기하고 있었는데 보이스피싱범이 스스로 돌려 준 것이다.
보이스피싱범에게 받은 카톡에 “가져간 돈으로 몸에 나쁜 음식 사 드시지 마시고 좋은 음식 사 드시고, 꼭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가세요”라는 문자를 보내었다.
아이와 아내가 그 문자 보이스 피싱범이 보지 않을 것이라 했다 나 역시도 그가 보리라 확신하지 않았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그가 그 문자를 보고 회개하고 돈을 돌려 주었다는 것 말고는 해석할 방법이 없다. 이런 신기한 기적을 보여주심으로 우리는 개척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고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역사를 기대하며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표징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눈에 보이는 표징은 참으로 불완전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완전한 믿음을 줄 수가 없다. 단지 일시적인 감동과 확신을 줄 뿐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감동과 확신은 사라지게 되고 곧 또 다른 의심이 일어나며
그 의심을 해결하기 위한 또 다른 표징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만약 표징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그 믿음 전체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광야에서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았던 출애굽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리신 하나님의 엄청난 재앙을 열 번이나 생생하게 목격하였으며,
또 광야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보았고, 홍해를 육지처럼 걸어서 건넜으며, 반석에서 터져 나온 물을 마셨고, 또 날마다 내리는 만나로 배를 채웠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원망하고 대적하여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다 광야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하였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표징은 사람들에게 확신을 줄 수가 없다.
그것은 단지 순간적이고 감각적인 확신을 줄 뿐이다.
눈에 보이는 표징은 진정한 표징이 아니고, 진정한 표징은 오직 믿음 그 자체뿐이다.
오직 믿음만이 그 어떤 상황과 형편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확신을 주고
그 확신으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도마가 예수님 손과 발의 못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고서야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라고 말씀하셨으며, 또 히11: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표징이 아니라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진실한 믿음을 구하자. 눈에 보이는 표징에 근거하여 우리의 신앙을 유지하려고 하지 말자. 우리가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표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 보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며,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음을 의심치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 찾기
삿 6장 33-40 / 박용규 목사
어떤 성도가 눈을 감고 성경을 펴서 손가락으로 짚는 구절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유다가 목메어 죽으니라”는 구절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아니다 싶어서 주여! 하면서 다시 성경을 펼치니까 뭐가 나왔는지 아십니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것도 아니다. 싶어서 “어느 때 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이 말씀을 주술적으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언제나 문맥을 통해서 읽어야 합니다. 어떤 배경에서 그 말씀이 주어졌는지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분별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정말 무엇이 하나님의 뜻일까? 하면서 고민, 갈등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거나 선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우리 어머니는 기도를 많이 하신 분으로 기억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고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너무 답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희 어머님은 무식하게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도 안되는 논리를 펴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고민 갈등하셨을 것입니다. 누구와 결혼해야 할 것인가? 어떤 회사에 취직을 해야 할 것인가? 어떤 사업을 해야 성공할 수 있을까? 아파트를 살려면 언제쯤 사야할까? 수많은 선택 앞에 고민하고 갈등합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마치 무당에게 찾아가서 점을 치듯이 “예언기도”의 은사가 있는 분을 찾아가서 묻기도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적 무당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신18:9-12)
신앙생활이란 앞으로 어떤 일이 우리에게 나타날지 알 수 없지만 내 모든 삶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함께 하실 것을 믿으며 믿음으로 한 걸음씩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을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엡 5:17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기드온이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양털 표징을 사용한 말씀입니다.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사람들이 쳐들어 왔습니다. 동방사람들과 연합을 해서 대대적인 공격을 합니다. 이때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했고 기드온은 여러 족속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기드온이 성령이 충만해서 나팔을 불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기드온이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신상을 파괴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 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환경이 바뀌거나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 앞에 현실의 죄와 싸워서 이겨야 할 영적 전쟁이 시작되어 있습니다. 그때 기드온은 하나님께 양털 표징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우리는 이런 본문을 읽을 때 마다 이러한 응답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기드온처럼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시면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길까요? 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말씀을 통해서 은혜받기 원합니다.
1) 표징을 구하는 것은 믿음의 행위가 아니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드온의 행동이 과연 본받을만한 것입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기 위해서 표징과 증거를 보여주실까? 많은 성도들이 양털 기적이 하나님의 뜻을 찾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기드온은 이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상을 파괴 했을 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해서 나팔을 불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드온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양털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고 하나님을 시험합니까?
36절 =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에서 이미 기드온은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내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한다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기드온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 분명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드온에게 성령을 부어주셨고 3만 2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모이게 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왜 기드온이 양털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고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이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 같이 내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고 합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대로 되었습니다.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쭙습니다.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데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그랬더니 응답되었습니다. 기드온의 요청에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셨다고 해서 옳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비로운 하나님은 믿음 없는 기드온을 긍휼히 여겨서 응답했을 뿐이지 기드온의 행위가 옳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기드온이 양털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방법은 믿음의 확신이 부족해서입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시험에서 기드온은 39절 =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있고 정당치 않은 의도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머리로서는 믿지만 가슴으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확인하고 싶어서입니다. 기드온은 자신의 눈으로 보아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실 때 초자연적 방법을 통해서 나타내십니다. 물론 지금도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간섭이 필요할 때입니다. 우리의 건전한 이성과 상식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인도를 구하라는 명령은 없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꿈을 꾸어라 환상을 보라”는 구절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초 자연적인 방법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시 143:8 =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나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삶의 지침이 됩니까?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서 한 마디만 해주시면 따르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꿈이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그 옆에 개도 한 마리 있었습니다. 아직도 꿈을 꾸고 꿈에서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을 따르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짓입니다.
심리학자들이 꿈의 분석에 의하면 첫째는 자기의 소원이 꿈에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억압된 스트레스와 마음속에 불만이 꿈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꿈은 내 뜻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 표적,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보이는 것, 초자연적인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기 원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도마는 같이 있지 않았습니다. 열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나는 못 믿겠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손을 그의 못 자국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옷서 손바닥을 보여주시며 못 자국 창 자국을 보여주셨습니다.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요 20:29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보고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이것이 눈으로 보는 것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치 않습니다.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 알기를 원치 않습니다. 계시된 말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신다.
“그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의 땅에 이슬이 있었더라”
기드온의 두 번째 양털 시험은 첫 번째 시험을 성공 시켰으므로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 다 이슬이 있었더라”라고 여호와께서 구체적으로 기적을 행했음을 말씀합니다.
첫 번째 시험을 들어 주셨는데 두 번째 양털시험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일관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두 번째 시험도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목적과 관계없이 여호와께서 그의 원하시는 것을 들어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소원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이 뜻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때에 막연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한가지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뜻입니다. 이 뜻은 우리가 저항할 수 없습니다.
행 2:23-23 =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어 있을 수 없음이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이 계획입니다.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살전 4:3 =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죠.
살전 5:16-18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거룩하게 하는 것 기뻐하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를 향한 허용적인 뜻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구와 결혼할지 어떤 직장에 갈지 집을 언제 살 것인지 언제 친구를 만날지 등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은 어떻게 결정되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은 어떻게 결정되든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에 매달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만 하나님의 자신의 주권적인 뜻에 더욱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한 뜻은 우리가 어떤 사라밍 되는가에 초점이 있습니다. 무엇을 할까? 보다 어떤 사람이 될까?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직장에 취업하느냐 하는 것보다 그 직장에서 얼마나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어떤 집에서 살 것인가? 몇 평의 아파트가 적당할까? 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인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유익과 생활속에 이익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과 관계있는 것보다 자신의 삶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면 사업의 운이나 배우자의 궁합을 보기 위해서 점쟁이를 찾아다니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나의 유익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이 땅에 실현되기 위해서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본질적이 뜻을 구하며 산다면 다른 뜻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허용적인 뜻을 가지고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허용적인 뜻은 우리에게 주신 상식을 갖고 판단하면 됩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 가지고 고민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의 길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다 책임지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마 6:31-32 =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의 피’는 나를 통해서 이루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염려하지 말고 미래를 위해서 계획도 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빠져 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너무 상관없는 지엽적인 문제만 갖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내가 잘되고 성공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고난당하고 시련의 환 경속에 있을 지라도 내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느릴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고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본질적인 뜻에 관심을 두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관점, 신비스러운 기적만이 아니라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