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릴레하메르 동계올림픽
여자싱글 ( 금) 옥사나 바이울-우크라이나 ( 은 ) 낸시케리건 - 미국 ( 동) 루첸 - 중국
남자싱글 ( 금) 우르마노프 - 러시아 ( 은) 스토이코 - 캐나다 ( 동) 칸데롤로 - 프랑스
아이스댄스 ( 금) 그리?크&플라토프 - 러시아 (은) 우소바&쥴린 - 러시아 ( 동) 토빌&딘 - 영국
페어 ( 금) 고르디바&그린코프- 러시아 (은) 미쉬쿠티노프&드미트리예프- 러시아 (동) 브라세우어&에이슬러 -캐나다.
국가별 메달 획득현황.
러시아 금 3 은 2
우크라이나 금 1
캐나다 은 1 동1
미국 은 1
중국 &영국 & 프랑스 동 1
특징
1. 하계올림픽과 개최시기 차별을 위해 2년만에 열린 올림픽
2. 프로 선수에게 처음 문호를 개방한 대회
3. 소련 붕괴이후 각각 독립국가로 처음 출전한 대회
4. 구소련 국가들이 금메달 4개를 모두 휩쓴 대회.
5. 그 유명한 낸시케리건과 토냐 하딩의 무릎팍 스캔들로 북미쪽에서 굉장히 관심을 모은 대회.
1. 생뚱맞은 너무나 생뚱맞은
1994년 올림픽은 나름 의미있는 올림픽 이였습니다. 하계올림픽과 겹쳐 열리지 않기 위해 2년만에 열린 대회였고, 프로에게 처음 문호가 개방된 대회였으며, 독립국가연합이란 이름으로 한번 뜸들인 구소련 국가들이 각각의 공화국으로 출전한 대회였으니 이런저런 이슈가 많은 대회였죠.
그런데 이 모든 이슈를 한방에 잠재워버린 사건 하나가 발생합니다.
바로 전미 선수권을 앞두고, 미국의 낸시케리건이 연습이 끝난후 무릎을 린치를 당한 사건이죠.
그때 그녀의 절규하는 표정이 어찌나 리얼하던지.....
그런 표정을 저렇게 찍을수 있는건 자작극 아니냐라는 말 까지 나올정도였습니다.
더불어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는 범인 하나..
그녀와 라이벌 구도를 이룬 자국의 토냐 하딩.
그런데 왜?? 그녀가 뭐 땜시??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당시 미국은 두장의 올림픽 티켓이 있었죠.
미셸콴이라는 어린 꼬꼬마가 제법 잘 한다는 소리는 있었지만, 그 꼬꼬마가 월드 실버 메달 그룹의 토냐하딩과 낸시케리건을 넘을수 있는가에 대해선 다들 no~~~ 였습니다.
걍 놔두어도 자신의 몫이될 하나의 쿼터가 있는데 왜??
올림픽에서의 메달을 위해???
사실 당시엔 올림픽에서 미국의 이 두선수는 강력한 금메달 후보는 아니였습니다.
좀 문란한 사생활로 자기 관리 못해, 성 하나를 붙였다 띠였다 하면서 불은 살로 어기적 거리던 토냐 하딩보다는
새가슴이래도 기술이 정확한 낸시케리건이 포디엄에 올라갈수 있으면 있겠다 정도의 예상...
가장 강력한 메달 후보군은 유럽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크리스티 야마구치의 은퇴로 공석이 된 자리를 차고 든 우크라이나의 신예 옥사나 바이울과..
놀라운 기술을 선보이며 유럽선수권에서는 맹주의 자리를 떨치던 프랑스의 보날리....
객관적으로 다 클린이다 했을때, 금메달은 이 둘에 가까웠지 미국선수의 몫은 아니였는데
어쨌든 토냐 하딩은 세상에서 가장 생뚱맞고 멍청한 테러를 저지름으로서 후일 부와 명예를 모두 잃게 되죠.
피겨스케이팅계에서 파문을 당하고 레슬러로 나선다 어쩐다... 요즘도 잊혀질만하면 삼류 엔터테이먼트 뉴스에서 고래고래 고함지르며 술취한 모습으로 나오는 짠한 인생을 사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일까요?
그냥 그들만의 리그로 취급받던 피겨스케이팅이 북미 언론의 호들갑에 힘입어 메인스티림으로 스리슬쩍 다리를 하나 껴들기 시작합니다.
원체, 엔터테이먼트 투나잇이니 뭐니 하는 연예 가쉽 뉴스와 기타등등 토크쇼와, 요즘 성추문 파문에 휩싸인 데이비드 옹같은 사람이 하는 토크쇼의 소재로 이 둘의 관계가 안주로 놓이면서....
조용한 선인보다는 시끄러운 악인이 훨 낫다는 자본주의의 광고의 힘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계기가 되죠.
2.구소련의 힘.
어쨌든 이 대회 앞서도 이야기 했지만 가장 중요한 피겨스케이팅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첫째로는 1992년에는 EUN으로 올림픽 깃발아래 나왔던 소련이 이젠 각각의 독립국가로 나오기 시작했죠.
이건 그나마 맥시멈 3장의 쿼터밖에 없던 구소련에게, 각 독립국가별 3장으로 늘어난 것으로 그 파급효과가 얼마나 클지 여타국가에겐 경계의 대상이였습니다.
구소련하에서 소련의 피겨스케이팅은 일종의 지역성을 띠였습니다. 수도인 모스크바에서는 아이스댄싱이 강세였고, 레닌그라드( 현 트페테르스부르크) 는 페어가,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속한 오데사는 싱글이....
실 오데사의 싱글은 당시 이 곳에 거주한 코치 즈미예프스카야의 본거지였고, 빅톨 페트렌코와 옥사나 바이울이라는 선수가 그녀의 문하생이였던 까닭에 일시적으로 강했던 때이긴 합니다.
우리나라 양궁이나 쇼트트랙처럼 올림픽 금메달보다 자국 선수권 통과하기 힘들다고 소문난 나라인데...
우리가 올림픽 쇼트트랙에 경상도 대표, 전라도 대표, 경기도 대표 보낸다고 생각했을때 다른 나라는 참 뎅스러웠을겁니다.
3. 프로피겨스케이터들의 복귀
1992년 프랑스 알베르빌 이후 2년만에 열렸고, 프로도 출전 가능했던 대회라 2년전 금메달리스트와 그 이전 메달리스트들의 빅뱅이 예상되었지만, 정작 나왔다면 금메달을 예약했을 아이스댄스와 여자싱글의 금메달리스트는 불참을 선언했고,
페어와 남자싱글의 우승자가 다시 나왔습니다.
여자싱글에선 1984년과 1988년 올림픽을 2연패한 독일(구 동독)의 카타리나 비트가 전성기 대비 약 6 kg 정도 불은 몸매로 컴백을 했었죠.
프로피겨스케이터들의 올림픽 출전 허용은, 올림픽에서 성과를 내자 마자 프로로 전향하는 일급 선수들을 다시 모아 올림픽이 여전히 최고를 가리는 퀄러티 있음을 알려주는것이 가장 큰 목적이였는데....
결과론적으론 그닥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페어스케이팅의 GG가 금메달을 땄고, 아이스댄스의 토빌&딘이 10 년만에 복귀해 아줌마포스를 발휘하며 동메달을 따냈지만...
정작 많은 관심을 모은 브라이언 보이타노나 카타리나 비트등은 순위권에 들지 못함으로, 프로의 진출은 찻잔속의 태풍정도.
하지만 이후 아마츄어 빙상계는 유수선수들의 프로진출을 막아보고자 컴피티션을 연계해 서클을 만들고, 해당 대회에 각각 적지않은 상금을 걸어 아마츄어로서도 돈벌수 있게 해 줍니다. ( 그랑프리 시리즈의 태생)
4. 역대 최고의 성적.
이 대회 남녀싱글에서 정성일과 이윤정이 출전했습니다.
정성일은 김연아이전에 출현한 스케이터중, 가장 경쟁력 있는 선수였고 이윤정은 미국에서 배웠던 선수였죠.
두 선수 20위 안팎의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확실히 안쪽이였는지 바깥이였는지는 오락가락하지만..
둘 다 프리스케이팅을 뛰었고 이는 지금까지 가장 좋은 올림픽 랭킹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언제 한번 프랑스의 보날리선수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 주세요.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선수였던것 같았는데요. ^^
보날리야, 불멸의 98년 심판들 엿먹인 백덤블링의 추억.... 그 포즈 취할때 설마 하다 먹던 감(?) 귤(?) 사과(?) 떨군 기억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