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청 할아버지와 사형수 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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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 때만 해도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장기 집권한 독재자로만 알고 있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권력욕에 가득찬 인물로 알고 있었다.
1979년 10월26일 김재규가 쏜 흉탄에 유명을 달리하고 이듬해 ‘서울의 봄’이 왔을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줄 알았다.
민주화가 되면 모두가 행복한 내일이 열릴 줄 알았다.
1980년 봄 계엄령과 함께 휴교령이 내려졌을 때 고향으로 내려갔다.
가는 길에 구미 상모동 박대통령 생가에 들렀다.
그 전부터 꼭 한번은 들러고 싶었던 곳이었다.
그 당시 시골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나지막한 초가지붕의 토담집이었다.
집도 마당도 넓지 않았다.
생가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다.
주변 산천을 둘러 보더니 “산세가 빼어난 것을 보니 과연 큰 인물이 나올 만하다“고 했다.
등에는 배낭을 짊어졌고 손에는 우산을 쥐고 있었다.
”할아버지 맑은 날에 왜 우산을 갖고 다니세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자신의 지난 날을 털어놨다.
경남 산청이 고향으로 큰 지주의 아들이라고 했다.
10대 때 일본 유학길에 올라 공부한 인텔리였다.
20대 초반 집에선 장가를 가라며 혼사를 서두르고 있었는데 넓적 다리에 가려운 증상이 생겼고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알고 보니 나병이었다.
당시엔 불치병이었다. 그것으로 혼사고 뭐고 다 파탄이 나고 나환자 시설과 산천을 떠도는 신세가 됐다.
고향을 떠나기 전 토지를 소작농과 머슴들에게 나눠 주고, 노비문서를 불살라 신분을 해방시켰다고 했다.
맑은 날에도 우산을 들고 다니는 것은 숙박시설에선 나환자를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비가 오면 다리 밑이든 어디서든 비를 피하려 한다고 했다.
“박대통령 생가엔 어인 일로 들리셨냐”고 물었더니 “고마워서 꼭 인사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육영수 여사 생전에 청와대로 여러번 편지를 썼는데 꼭 답장이 왔으며 나환자들을 위해 여러 가지 지원을 해줘서 너무나 고마웠다고 했다.
산청 할아버지는 배낭에 공책이랑 연필을 한아름 담고 다니면서 아이들을 만나면 나눠주고 격려해 주는 산타 할아버지였다.
토지든 학용품이든 나눔 속에 기쁨과 사랑과 공동체의 건강한 내일이 깃들어 있다는 철학을 실천하는 분이었다.
1990년대 초 국회 출입기자로서 여러 정치인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흥미있는 기사를 봤다.
박대통령 집권시절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이철 의원이 10.26 때가 되면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 박대통령 묘소에 참배한다는 것이었다.
이철 의원을 만났을 때 물어봤다.
“박대통령 묘소에 빠지지 않고 참배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느닷없는 질문에 좀 쑥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하신 일이 참으로 크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국회의원이 돼서 나라가 돌아가는 내막을 속속들이 들여다 본 다음 박대통령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나도 그랬다.
국회를 들여다 보고서야 비로소 박대통령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박대통령이 왜 김영삼 김대중 등 이른바 민주화를 입에 달고 선 야당 정치인들을 경멸하고 10월 유신을 단행했는지를.
그들에게 정치자금 이권 지역개발 예산을 집어주지 않으면 어떤 법안도 처리할 수 없었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1990년대 상황이 그러했으니 1960~1970년대는 어땠을지 안 봐도 훤하다.
YS와 DJ의 국가 경영에 대한 비전이 무엇인지 찾아보려 했으나 맹탕이었다.
민주화란 간판을 내걸고 권력을 쟁취하려 투쟁한 싸움꾼에 불과했다. 공천헌금이란 이름으로 공공연하게 국회의원 자리를 매관매직한 민주화 장사꾼에 지나지 않았다.
생산적인 구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국가 경영에 대한 철학과 안목이 그 정도였으니 훗날 대통령이 된 다음 한 일은 외환위기로 전국민으로 하여금 금붙이를 내다팔게 하거나, 김정일에게 핵개발 자금을 대주고 노벨상을 받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고작이었다.
생각해보면 꿈만 같은 일이다.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가 살았던 삶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이렇게 천양지차로 다르다는 것은. “한국이 제철소를 짓겠다는 것은 쓰레기 통에서 장미꽃을 피우는 일”이라고 비웃었던 서방세계 사람들을 이제는 우리가 비웃으며 선박과 자동차와 가전제품과 반도체를 보란듯이 전세계로 팔고 있다는 사실은.
나라의 팔자를, 운명을 이렇게 단시간에 바꿔낸 인물은 세계역사를 통털어서도 드물다.
차가운 겨울이 되어서 모든 나무가 잎을 잃을 때 사람들이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른 진가를 알아보듯이 박정희 대통령도 그렇다.
뒤를 이은 대통령들이 죽을 쑤는 것을 보고 난 연후에야 비로소 박대통령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다.
물을 마실 땐 우물을 판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도리란 말이 있다.
얼마전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일대기와 업적을 기린 영화 ”건국 대통령“과 ”기적의 시작“을 보면서 우리는 참으로 위대한 선각자를 만난 덕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올 봄엔 이장호 감독이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한꺼번에 그린 영화를 개봉한다고 하니 극장에 가서 꼭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