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쓸쓸한 귀향(歸鄕) -
다음날 아침.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는 길을 떠나게 되자 주인(主人) 유회(劉恢)가 세 사람을 위한 조촐한 송별연(送別宴)을 열어 주었다.
그 자리에서 유회(劉恢)는 삼 형제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세 분의 영웅호걸(英雄豪傑)과 이별(離別)을 하게 되어 섭섭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저의 집을 떠나시게 되었지만 후일(後日) 반드시 다시 찾아 주십시오. 그리고 세 분이 데리고 다니는 이십여 명의 병사(兵士)들은 그때까지 저의 집에 그냥 머물러있게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세 분이 다시 저의 집에 오셨을 때 재기를 준비(再起)하시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지금 뢍건적(黃巾賊)은 모두 소탕(掃蕩)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세상은 여전히 어지럽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낙양(洛陽)도 머지않아 자멸(自滅)할 징조(徵兆)가 보인다고 하니 세 분은 이를 감안(勘案)하시어 나라와 백성(百姓)을 위해 많은 애를 써주시길 바랍니다."
유회(劉恢)의 말에는 사람을 구(貴)하게 여기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마음이 절절히 흘러넘치고 있었다. 삼 형제는 유회의 말을 듣고 가슴이 무한(無限)한 책임감(責任感)을 느꼈다.
그리하여 유비(劉備)가 정중(鄭重)한 어조(語調)로,
"고맙습니다. 유 대인(劉大人)의 말씀을 깊이 명심(銘心)하여 수하의 병사들은 그대로 남겨 두고 우리 삼 형제만 후일(後日)을 기약(期約)하며 떠나기로 하겠습니다. 그동안의 신세(身世)가 너무도 컸습니다. 다시 한번 고마운 말씀을 드립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윽고 세 사람은 부하(部下) 병사(兵士)들을 모아 놓고 잠시(暫時) 이별(離別)을 하게 된 경위身勢를 설명하고 유사시(有事時)에 집 주인(主人)의 안위(安危)를 지키도록 부탁(付託)하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그들의 전송(餞送)을 받으며 기약(期約) 없는 길을 떠났다.
그들이 유회(劉恢)의 집을 나와 집 앞에 넓게 펼쳐진 들판으로 천천히 말을 몰아가자 담 모퉁이에 외로이 서서 그들을 슬픈 시선(視線)으로 전송하는 미인(美人)이 한 사람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부용(芙蓉) 아가씨였다. 장비(張飛)는 부용(芙蓉) 아가씨가 슬픈 마음으로 유비(劉備)를 전송하고 있다는 사실(事實)을 먼 발치로 보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모른척하고 있었다.
유비(劉備)는 부용(芙蓉) 아가씨의 전송(餞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런 표정(表情)도 없이 천천히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오대산(五臺山) 봉우리가 아득히 바라보일 정도로 유 대인(劉大人) 집에서 멀어졌을 때 장비(張飛)가 유비(劉備)에게 물었다.
"형님은 부용(芙蓉) 아가씨가 담 모퉁이에서 형님을 눈물로 전송하는 것을 알고 계셨소?"
"응! 알고 있었네!" 유비(有備)의 대답(對答)은 간단명료(簡單明했다.
그러나 유비(劉備)의 간단명료한 대답은 사랑하는 남녀 간(男女 間)의 이별(離別)의 사정(事情)을 알고 있는 장비(張飛)에게는 더욱 애타게 느껴지며 일순(一瞬)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래서,
"형님! 영웅호걸(英雄豪傑)이라고 여자(女子)를 가까이하지 말라는 법(法)은 없을게요.
형님도 한평생(限平生)을 독신(獨身)으로 늙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부용(芙蓉) 아가씨가 마음에 드신다면 내가 중신을 서리다. 부용(芙蓉) 아가씨로 말하면 나의 구주(舊主:옛주인)의 딸인 동시(同時)에 부모를 모두 잃은 외로운 처지(處地)이니까 내가 오히려 형님에게 부용 아가씨의 장래(將來)를 부탁(付託)하고 싶은 심정(心情)이오. 하기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어떡하든 좋은 수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말이오."
"나도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 그 얘기는 그만하기로 하세!" 이렇게 대답(對答)하는 유비(劉備)는 먼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숨을 내쉰다.
얼마쯤 가다 보니 갈림길이 나왔다.
애당초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 놓은 곳도 없이 떠나온 그들이었다.
"형님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오?" 장비(張飛)는 갈림길 앞에 말을 멈추며 두 형을 돌아다보았다.
"글쎄, 어디로 가야 하나?" 관우(關羽)도 말을 멈추며 유비(劉備)의 얼굴을 쳐다본다.
"세상(世上)이 넓다 해도 우리들이 막상 갈 곳은 없구려! 고향(故鄕)을 떠난 지가 이미 여러 해 되어 가족(家族)들의 소식도 궁금하니, 일단(一旦)은 고향(故鄕)으로 돌아가 보는 것이 어떻겠소?" 유비(劉備)가 참담(慘憺)한 심정(心情)으로 두 아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향(故鄕)으로 돌아가자고요? 그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이런 기회(機會)에 어머님을 찾아뵙는 것도 좋으실 겁니다." 관우(關羽)가 찬성(贊成)하였다.
그러자 장비(張飛)가 볼멘소리를 한다.
"형님들이야 고향(故鄕)도 있고 살던 본거지(本據地)도 있지만 나 같은 경우는 탁현(涿縣) 고을로 떠돌아 들어가서 산돼지나 잡아서 시장(市場)에 내다 팔고 지냈으니 나야말로 갈 곳이 없는 사람이오!"
"허어 그렇구먼 그러면 자네는 나와 함께 우리 집으로 감세!"
관우(關羽)가 장비(張飛)의 말을 듣자 즉석(卽席)에서 동행(同行)을 제의(提議)했다.
"그러십시다. 그러면 나는 관우(關羽) 형님 집으로 함께 갔다가 큰형님이 오시면 그때 함께 유 대인(劉 大人) 집으로 가기로 하지요."
이렇게 세 사람은 유 대인(劉 大人)의 집을 떠난 지 사흘 만에 탁현(涿縣)에 도착(涿縣)하였다.
"우리 두 사람은 해량촌(解良村) 내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 형님은 누상촌(樓桑村)으로 가시오. 그리고 집으로 가시거든 어머님에게 우리들의 안부(安否)를 전해 주시오."
"저 역시(亦是) 부탁(付託)합니다." 관우(關羽)와 장비(張飛)는 제각기 한마디씩 부탁을 하며 헤어졌다.
유비(劉備)가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헤어진 후 누상촌(樓桑村) 동구(洞口) 안으로 들어서니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자기 집 마당에 있는 커다란 뽕나무였다.
먼 빛으로 뽕나무를 감개무량(感慨無量)하게 바라보던 유비(劉備)는,
"아 아! 인생(人生)은 무상(到着)해도 뽕나무만은 여전히 무성(茂盛)하구나...!"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집 앞으로 천천히 말을 몰아갔다.
집 앞에 도착(到着)한 유비가 사립문 앞에 다가서서 집안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달그락! 달그락!"
집 뒤 후원(後園)에서는 돗자리 짜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유비(劉備) 자신(自身)은 그동안 싸움터를 전전하느라고 바쁘게 돌아갔지만 고향집에서는 아직도 옛날과 다름없이 늙은 어머니가 돗자리를 짜고 있었던 것이다.
유비는 돗자리 짜는 소리만 들어도 눈시울에 눈물이 맺혀졌다.
(어머니.... 늙은 어머니에게 이렇게까지 고생을 시켜드려 죄송합니다...)
유비(劉備)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집 뒤를 돌아 후원(後園)으로 가보니 과연(果然) 백발白髮)이 다 된 어머니가 혼자서 돗자리를 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유비(劉備)는 부리나케 달려가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현덕(玄德)이가 삼 년(三 年) 만에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일손을 멈추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얼굴에는 기쁨보다는 슬픔이 앞서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유비(劉備)는 오랜만에 만나는 어머니를 보고,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苦生)이 많으셨어요!" 하고 한 번 더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나 어머니는 노여운 얼굴을 하며 말한다.
"아, 비(備)냐?... 그런데 너는 지금 뭣하러 집에 돌아왔느냐?" 하고 다짜고짜로 책망(責望) 어린 말을 한다.
유비(劉備)는 그제서야 어머니의 심중(心中)을 알아채고,
"죄송(罪悚)합니다. 아직 아무 뜻도 이루지 못하고 초야(草野)에 묻혀가던 중에 이번에는 관헌(官憲)의 눈을 피해 다니다가 어머니를 잠깐 뵈러 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늙은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으며 아들의 얼굴을 그윽이 바라본다.
"비(劉)야!"
"네!"
"네가 나를 만나려고 집에 돌아왔다는 말이냐?"
"네, 어머니 소식이 궁굼해서...."
"네가 그런 효자(孝子) 노릇을 한다고 이 어미가 기뻐할 줄 아느냐! 네가 집을 떠난 지가 불과 삼 년밖에 안 되지 않았느냐? 빈약(貧弱)한 무기(武器)와 보잘 것 없는 소수(少數)의 병사(兵士)들을 이끌고 넓은 세상으로 뛰어든 네가 불과(兵士) 삼 년동안 잘되면 얼마나 잘 될 수가 있겠느냐? 어미는 네가 꿈같은 성공(成功)을 짧은시간에 거두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세상(世上)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니야!"
"죄송합니다, 어머니! 제가 어리석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어머니의 아들을 향한 훈계(訓戒)는 이어진다.
"싸움을 잘 해서 이기는 것이 영웅호걸(英雄豪傑)이라면 누구든지 해낼 수 있다. 하지만 너는 한주(州) 한군(郡)을 얻으려는 것과 같은 작은 포부(抱負)로 세상(世上)에 뛰어든 것은 아니지 않느냐. 너는 중산정왕(中山靜王) 유승(劉勝)의 후예(後裔)로서 만백성(萬百姓)을 위해 일어선 게 아니더냐? 물론 그런 큰일을 이룰 때까지는 슬픈 일도 괴로운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과 맞닥뜨려 이겨 내지 못하면 큰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이 어미는 네가 큰 뜻을 이룰 때까지 10년, 아니 20년을 못 볼 것으로 생각했었다. 다시 말해서 너를 이 나라에 바쳤다고 생각했단 말이다."
유비(劉備)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머니 말씀을 잘 새겨듣고 앞으로 큰 뜻을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번만은 용서(容恕)해 주십시오."
"네가 그런 각오(覺悟)가 되어 있다면 모처럼 집에 돌아왔으니 오늘 밤만 집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는 집을 떠나가거라!"
"어머니 분부(分付)대로 내일 아침엔 떠나갈 테니 이번만은 용서하십시오."
"네가 그만한 결심(決心)이 있다면야 난들 너를 어찌 이 밤으로 쫓아야 내겠느냐!"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더니 그제서야 아들의 손을 붙잡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어머니!" 유비(劉備)는 어머니의 거칠고 마른 손을 마주 붙잡고 굵은 눈물을 흘렸다.
"비(備)야!"
"네..."
"너는 내 아들이면서 이미 내 아들이 아니다. 천하 만민(天下 萬民)을 구제(救濟)해야 할 너를 어찌 내 아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 나도 너와 함께 살고 싶은 생각은 간절(懇切)하다. 그러나 만천하(滿天下)의 백성(百姓)들이 도탄(塗炭)에 빠져 있음을 생각하면 내가 너를 하루라도 붙잡고 있다는 것은 하늘에 큰 죄(罪)를 저지르는 것 같구나!"
"어머니!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다시 천하(天下)를 구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억조창생(億兆蒼生)을 구제(救濟)하여야 할 너에게는 할 일이 너무도 많은데 어찌 이 늙은 어미 슬하(膝下)에서 헛된 시간을 보낼 수 있겠느냐. 어미 걱정은 말고 한시바삐 너의 길을 가야 하느니라!"
어머니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부둥켜 잡은 아들의 손만은 놓을 줄을 몰랐다.
만나 본 기쁨과 또다시 헤어질 슬픔이 한데 엉켜서 어머니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복잡(複雜)한 심경(心境)이었기 때문이리라.
심국지 - 27회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