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마태12,46-50)
복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46-50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모두는 더 이상 남남이 아니라 가족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위해 출가하신 후 성모님은 어떻게 사셨을까요? 이제 내 할 일 다 끝났으니, 여행이나 가자며 희희낙락하며 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늘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 차질없이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하며 사셨을 것입니다.
때로 다른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끼니 거르는 것은 아닌지?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노심초사하며 사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들 예수님에 대한 걱정스러운 소식이 전해집니다. 미친 것 같다는 것입니다.
밤새 뜬눈으로 밤을 지내던 성모님이 날이 밝자 마자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머님이 오셨다고 예수님께 전해드렸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난해하면서도 심오한 질문 하나를 던지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적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건네십니다. 당신 주변에 둘러서 있는 일단 무리,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가리키시며’, ‘손을 뻗으시며’ 라는 표현은 ‘소유’를 의미하는 동작입니다. 둘러서 있는 제자들이 이제 당신께 속하는 존재라는 표현입니다. 동시에 그들을 축복하신다는 표현입니다.
이제 예수님 주변에 둘러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께 속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 안에 새로운 영적 가족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모두 예수님과 피를 나눈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는 성찬 식탁에 둘러서 있는 우리 모두는 그분 안에 새로운 영적 가족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나누어 먹고 마시는 참된 가족입니다. 성찬례에 참석한 우리 모두는 이제 남남이 아니라 세상 둘도 없는 가족인 것입니다.
기존의 혈연이나 종족, 가족이라는 자연적 관계, 민족적 단일성, 이러한 것들이 더 이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관계들이 아무리 끈끈하고 강력하다 할지라도, 살아계신 하느님의 절박한 요구는 그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세상 모든 가치들에 앞서 하느님에 대한 우선권을 부여하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이나 친척, 혈연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대하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둬야 하는가?’ 하는 화두를 늘 가슴에 품고 살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따랐던 열두 사도가 새로운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된 것처럼, 오늘날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예수님께 봉헌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분의 가족으로 수용됩니다.
새로운 혈연관계가 풍성하게 이루어지는 교회의 영적 가족을 통해 우리는 장차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맛보고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임을 통해 그분의 형제가 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전이요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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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
<비대면 사회는 없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이후에는 ‘비대면’ 사회가 온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대면 사회는 오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굳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인간관계를 확장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사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귀찮고 심지어는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코로나 사태를 기회로 직접 만나는 것보다는 전화로, 전화로 하기보다는 문자로 접촉을 피하기도합니다.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부가 멀리 떨어져 문자로만 대화하는 것과 한집에서 티격태격하면서라도 함께 사는 것은 천지 차이일 것입니다. 어떻게 TV로 미사를 하는 것과 직접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같을 수 있을까요? 아기를 TV 화면을 통해서만 사랑을 느끼게 하며 키울 수 있을까요?
사람은 귀찮더라도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를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성이고 ‘사랑’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알거나 배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제 묵상에서 사랑에 대한 배움의 자세가 곧 삶을 대하는 자세와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간관계를 통해 삶의 유일한 가치인 사랑을 배울 수 있다면 인간관계를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저는 중학교 때 사춘기 호기심이 발동하여 성적인 그림이나 책을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성에 관해 칠판에 그래프를 그려가면서 친구들에게 설명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실전에서는 숙맥이었습니다. 여자에게 말을 어떻게 붙여야 되는지도 몰랐습니다.
남녀관계가 그저 성적인 관계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대학에 가서 여자를 만나고 나서야 남녀관계가 성적인 것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에 집중하면 관계가 쉽게 깨어질 수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분명 인간관계는 아픔을 주지만 인간관계가 아니면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은 없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 사랑을 아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가치요 목표라면 그 사랑은 지식으로가 아니라 직접 사람을 만나고 접촉하며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었다는 워런 버핏은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은 한 사람의 강연을 듣고 나서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과 식사를 하려면 수십억 원의 돈을 자선기금으로 내게 합니다.
워런 버핏은 한 번의 만남의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워런 버핏과의 점심 식사」라는 책을 쓴 ‘가이 스파이어’는 2008년 워런 버핏과 한 끼 식사하기 위해 무려 65만 달러, 한화로 약 8억 원을 지급하였습니다. 물론 이것도 추첨으로 된 것이기에 기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이 스파이어는 명문 옥스퍼드 대학과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여 부자 아버지를 둔 엄친아였습니다. 대학원 졸업 후 입사한 회사는 순진한 일반 투자자들에게 쓰레기 같은 주식을 팔아먹는 정말 쓰레기 같은 회사였습니다. 그렇게 돈을 버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 한 번 만나 식사를 하는데 8억을 써가며 워런 버핏을 만나 조언을 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참 가치투자의 방향으로 변하였습니다.
한 사람과 만나 식사 한 끼 하기 위해 적게는 수억 원, 많게는 수십억 원을 내야 하는데도 수많은 사람이 몰려 추첨에 당첨되어야만 합니다.
그 사람이 책이나 화면을 통해 주는 정보와 직접 만나서 주는 정보는 그 질이 같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생을 바꿔줄 주님을 만나기 위해 성체 앞에 얼마나 나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보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으로부터 배우기 위해 당신을 만나러 온 이들을 당신 가족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족을 하느님이나, 요셉과 마리아로 한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과의 관계 확장을 위해 세상에 오시고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모와의 접촉을 통해 배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2)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배움과 대인관계를 위한 직접적 접촉은 하나입니다.
힘들지만 더 넓게 관계 맺고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 우리 관계를 넓혀가야 합니다. 사랑은 관계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관계 확장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느님을 알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인간의 삶에 대한 자세는 ‘배우고 싶은 욕망’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데이비드 맥클란 박사는 25년 동안 사람들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연구했습니다. 그가 알아낸 것은 성공의 99% 이상이 어떤 사람과 어울리는가에 좌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이 곧 여러분입니다. 진리는 찾는 많은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그러면 진리 안에서 살고 발전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이웃으로 인간관계를 확장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를 배우고 싶지 않다는 말이고 그러면 영원히 지속할 진실한 삶의 의욕이 생길 수 없습니다.
사랑은 사람과 사람의 접촉 안에서만 제대로 배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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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의 첫 부분에서는 공간의 대비가 눈에 띕니다. 예수님과 이야기하려고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서 있었다는 구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군중과 대화를 나누시던 곳은 어딘가의 ‘안’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무엇인가 전할 말이 있어 가까이 오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병행 구절을 살펴보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여(3,21 참조) 어떻게든 그분을 밖으로 데려가 설득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라고 반문하신 뒤, 당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바로 새로운 가족임을 밝히십니다. 이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예수님께서 혈연관계를 매정하게 끊으셨다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뒤에 나오는 핵심 내용을 강조하려는 수사학적 장치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더 넓은 의미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12,50)이야말로 참된 가족이라고 힘주어 밝히려 하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밖에서 서성이는 당신의 친족들마저 그 새로운 가족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세례로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고 교회의 지체가 된 우리는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형제’와 ‘자매’라고 부릅니다. 이는 단순한 호칭을 넘어 우리가 실제로 영적인 가족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은 영예나 특권이기에 앞서 더할 수 없이 큰 책임이 뒤따르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아파하고 상처 입은 이들을 교회 ‘안’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그들을 참된 형제요 자매로 받아들일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출처: 복음말씀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