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그외에도 강혁을 비롯해서 타 포지션의 여러 선수들이 있었지만..내 포지션이 투수라 그들에 대해 별다른 관심은 없었다.
그당시 유명했던 신일고에는 조성민이나 강혁이 있었지만, 선린상고와의 결승전에서 완투한 설종진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그때 TV에서 보았는데, 그 선수 정말 대단했다.
암튼 세월이 흘러 94년 세계대회에서 고등학생들로 구성된 한국대표팀이 우승을 했다.
그당시 대표가 김건덕, 이승엽, 김선우등이었다.
또한 롯데의 92년 우승당시 염종석의 투구는 정말 놀라웠다. 특히 예리하게 들어가는 슬라이더는 그당시 상태팀 타자들이 알고도 못칠 정도로 정말 대단했다.
그렇게 거의 10여년이 흐른 후 갑자기 어느날 이선수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먼저 곽재성..
이선수는 91년 경남상고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투수다. 그 대회가 첫번째 대회였는데, 강력한 우승후보 신일고를 결승에서 만나 4안타인가를 맞고 완봉했던 투수다. 그런후 이선수는 차명주라는 왼손투수와 함께 경남상고의 쌍두마차로 불리었다. 키도 호리호리하고 185cm정도로 투수로서의 체격도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선수 졸업후 롯데에 2,000만원인가에 입단하고, 그이후로는 거의 볼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아마야구때 혹사 된 선수중의 하나라고도 한다.
한미일 야구대회때도 4타수 4안타인가를 침으로써 박찬호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였다.
그리고 3년후배 김건덕...
이선수 엄청난 선수라고 들었다. 실제로 보진 못했지만, 아래의 퍼온 글에서 그선수의 대단함을 느낄수 있다. 그런데 이선수 엄청난 혹사로 인해, 어깨가 망가졌다고 한다.
지금 무슨일을 하고 있을지 안타까울 뿐이다.
마지막 염종석..
이선수 역시 혹사로 인해 망가진 선수다. 역시 아래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선수들 모두 앞으로 좋은 일만 있었음 좋겠다.
-곽재성-
<출처 : 네이버 지식검색 lgd737님의 글>
고교시설 차명주와 함께 좌,우 쌍투마차로 고교무대를 평정했죠..
한미일고교야구에서 투수 박찬호, 타자 곽재성의 활약은 대단했읍니다.
고교 졸업후 롯데는 체구가 작은 차명주보다 185가 넘는 곽재성을 선호했고
롯데에 입단했으나 빛을 보지 못하고 2군을 전전하다 역시 은퇴했죠..
<출처 : 네이버 지식검색 xyu2000님의 글>
롯데에 입단 했을때 "10년에 한번 나올 재목"이라는 소릴 들었던선수. 허나 역시 얼굴한번 제대로 비추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출처 : 아.야.사>
곽재성선수 대단했었지요. 개인적으로 차명주선수보다 낫다고 보았는 데 아쉽군요.
당시 경남상고 연습하는 걸 구경하러 자주 갔었는 데 키크고 호리호리한 곽선수가 눈에 띄던군요. 타격도 발군이어서 정교하면서 장타를 겸비 했더군요. 투수가 아닌 타자로서의 가능성을 좀더 일찍 찿았더라면 프로에서 중거리타자로 제격이었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글구 동료 및 후배들에 대한 리더쉽도 보이던데,,,
<출처 : MLB 코리아 야구 S혜사랑forever님의 글>
우리나라 야구의 선수층이 얇고 엘리트를 추구하는 학원스포츠의 폐해로 인해 정말 꽃한번 못 피워보고 아마 때의 명성만을 남긴채 그라운드를 떠난 선수들이 정말많죠...
그 중에서도 전 롯데소속 또는 롯데에 들어올 수 있었던 투수2명을 회상하려합니다....
첫번째, 경남상고 에이스 김건덕... 90년대 초반 고교야구를 보시던 분들은 아실겁니다...워낙 유명했던 투수죠... 전 그때 나이가 어려 (대략 그때 10대초반 즉 초딩이였습니다.) 자세히는 알지는 못하지만 그 당시 가끔 TV로 중계해주던 고교야구를 회상하면 제일 먼저떠오르는 선수입니다...
대략 생김새도 체격도 투구폼 마저도 선동렬 선수의 이미지와 흡사했던 기억이나고요...직구도 146~148 그 정도는 나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슬라이더 와 커브도 수준급이었고요...그 또래인 이승엽의 명성도 그 당시에 이 선수에 명성과 실력에는 견줄바가 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선수 고교때의 혹사와 선천적으로 유연성이 좋지못해 결국 부상을당하고말죠...그 뒤로는 투수 김건덕으로는 야구를 할 수 없게 되었구요...어떤 프로그램이었는지 기억이 나지않습니다만 어떤 다큐프로그램에서 김건덕 선수가 어깨가 아파서 볼을 10M도 채 던지지못해 울더라는 그의 감독 말을 듣고는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이 선수 타격에도 꽤 재능이 있었던걸로 기억하는데...결국 프로행은 실패하고 방위산업체 다니다가 손가락살점이 떨어져나가는 부상을 당하고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한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언뜻 본 기억이 납니다... 참 안타까운 선수죠...지금쯤 뛰고 있다면 한창 전성기를 맞이할때인데요...
두번째, 경남상고 투수 곽재성... 어렸을 쩍 스포츠 신문에서 1면 톱기사로 이선수의 기사가 실렸던 기억이 나네요...물론 부산지역 스포츠신문에만 그렇게 실렸을지도 모릅니다. 145km곽재성 롯데입단 하고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나왔었죠...계약금도 상당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참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어찌된 영문인지 프로에 와서는 코빼기도 안보이더군요... 이 선수 역시 아마 때 혹사로인한 어깨가 맛이 가는 바람에 타자로 전향했죠... 그리고는 예전 쌍방울2군에서 1루수로 재기를 해볼려고 노력했지만 아쉽게도 이 선수 역시 프로세계에서 도태되고 말았죠...
이 선수 역시 떠오르는 인터뷰 기사가 있습니다... 부산지역방송 다큐같은 프로그램인데요...거기서 곽재성 선수가 쌍방울 2군선수 생활을 하면서 인터뷰할 떄 이렇게 이야기 하더군요...
처음 프로에 들어왔을때는 잘하라고 격려전화나 응원전화가 많이 왔어요...근데 요즘은 전화가 한 통도 안와요... 야구를 못해서 그런지 사람들에게서 이제 잊혀진 선수가 됐는지 이제 전화가 안와요...
참 이런선수들 보면 안타깝습니다...다른것도 아니고 혹사로 인한 부상때문이라면...물론 선수탓도 어느 정도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 학원스포츠의 폐해 그리고 지도자들의 원칙없는 선수기용...이런건 빨리 고쳐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길게 쓸려다가 시간의 압박으로 이만 쓰겠습니다...
-김건덕- 가장 대표적인 글만..(너무 많아서.)
<출처 : 엑스포츠 뉴스 송성림님의 글>
이승엽의 아시아신기록을 목전에두고 생각나는 이름 김건덕입니다. 부산최고투수 최동원을 이을재목 김건덕,백차승,송승준... 92년 부산고교야구 경남고 서정민(3년),윤민철,손인호,임경완(2년)의 마운드에 대동중 2관왕을 이끈 한성곤(3년)이 있지만,작은체격에 타자로만 활약합니다. 한성곤선수 체격이 김상록선수와 비슷할겁니다. 대신중 출신인 김건덕은 두꺼운 경남고마운드를 의식 경남상으로 진학한것 같습니다. 이 선택이 결국 김건덕 혹사의 서막이 됩니다.당시 안병환감독. 아무래도 경남상투수진의 양적,질적 선수층이 얇아 혹사의 조건을 제공합니다. 김건덕이 경남으로 진학했다면 ...
실제92년 경남상1년때부터 화랑대기에 김건덕은 이름을 올립니다. 당시 부산고교마운드는 부산고 손민한(3년),주형광(2년)으로 막강전력을 이룹니다. 전국적인 명성은 2년생으로 대통령배우승을 이끈 주형광이 먼저 얻게 됩니다. 93년 화랑대기결과는 경남상우승입니다. 주역(김건덕,손인호,주형광)들의 승부를 정리해보면... 준결승 경남vs부산 : 손인호vs주형광 선발맟대결 경남이 4대2로 승리 92년 빛을 갚습니다. 당시 손인호는 4번타자로 주형광에 홈런을 뺐어냅니다. 결승전 경남vs경남상 : 윤민철vs김건덕 대신중 1년 선.후배가 완투 맟대결합니다. 윤민철도 최고 144km에 수직커브가 일품이었지만,제구력이 모자랍니다. 결국 김건덕이 5대2로 승리합니다.
당시 결승전은 부산kbs로 중계되었고,현재 녹화tape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건덕은 2학년때지요.그때부터 "주간야구"에서도 주목을 하고,94년 랭킹1위를 조심스럽게 예약합니다. 2년생 김건덕은 유연한 투구폼,최고 145km의 직구,안정된 제구력을 모두 겸비하고 있었고,슬라이더를 비롯한 변화구 구사능력도 뛰어났습니다. 당시 느낌은 2년생이 너무 완성되었다는 느낌.
고교3년때 청소년대표ace로 세계제패를 하지만,위압감은 전년보다 못한느낌. 결국 봉황기준우승으로 만족을 하지요. 경남상은 또한 김건덕없이 좌완 이동은으로 화랑기준우승을 한걸로 기억됩니다. 부산팀이 화랑기에 강한건,부산강팀은 대붕기.무등기참가를 수치로 생각하며 전통의 화랑대기에 전력투구하기 때문입니다. 올 봉황기 패자 경남고의 대붕기참가도 올해가 사상 처음입니다. 결국 대붕기의 망신(콜드패)이 봉황기우승으로 승화되었지만... 결국 김건덕혹사의 시작은 부산예선에서 찿을수 있습니다. 5일 5연전에 본선진출을 이룰려면 김건덕혼자서는 무리입니다.결국 이 현실이 김건덕을 피지못한꽃으로 만들게 됩니다.
당시 느낀 김건덕은 선동열을 연상시키는 유연한 투구폼,뛰어난 경기운영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교졸업후 롯데로 갔다면 재활치료로 선수생활이 가능했을수도 있었겠지요. 대학이후의 김건덕은 무의미합니다.김선우보다 한해위이므로 지금쯤 절정의 선수생활을 해야할 나이인데,너무 안타깝습니다. 하기야 당시라이벌 주형광,손인호,임경완 등도 롯데에서 평범하게 선수생활하고 있으니. 재목으로서의 가능성은 위 선수포함 김건덕이 단연 랭킹1위인데.
성공에는 기회와 운도 작용하나 봅니다. 주형광,손인호,임경완 모두 억대의 계약금으로 프로입단했는데. 김건덕씨는 어떵게 지내는지. 모교 경남상 감독으로도 훗날 좋은 재목을 키워내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이 선수가 정상적인 선수생활을 했다면,최동원.선동열급은 아니라도 그에 근접하는 활약을 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박동희,정민태,문동환급 이상은 되었으리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출처 : 다음카페, 제부리그, 게으른야구천재님의 글>
2000년 8월에 벌어진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한국은 81년과 94년에 이어 6년 만에 다시 우승을 차지했으며 경기고의 이동현과 함께 한국 팀을 우승으로 이끈 부산고의 좌완 에이스 추신수는 대회 최우수 선수(MVP)와 베스트 나인에 선정됐다. 그리고 이 대회 이후 추신수는 엄청난 고액 배팅을 한 롯데의 스카우트 제의에 굴하지 않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딱 6년 전 김건덕의 모습과 같다.아니 이었어야 했다.
김건덕. 사실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팬들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아까웠던” 실력을 아쉬워 하곤 한다. 짧았지만 강렬했던 그의 고교 시절.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혜성 같은 2년이었다고 할까?
시속 145km의 강속구와 파워 커브 ,슬라이더를 적절하게 배합했던 187cm 95kg의 대형 우완 투수. 유연성은 좀 떨어졌지만 곰 같은 체격과 그에 걸맞은 체력으로 거의 매 경기 등판하며 경남상고를 혼자서 강팀으로 만든 전형적인 고교 야구의 영웅. 여기다 타자로서도 엄청난 파워를 자랑하며 94년 그 해 가장 뛰어난 타율을 올린 선수에게 주는 이영민 타격상의 수상자. 경남상고를 거의 혼자서 이끌었으며 나가는 대회마다 팀을 상위권으로 만들었던 국내 최고의 선수. 93년 동향의 라이벌 팀인 경남고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혜성과 같이 등장, 94년 화랑기 준우승, 봉황기 4위 입상, 대회 중의 대회 황금 사자기에서 개교이래 최초로 결승 진출 후 준우승 등 그 해 김건덕이 있는 경남상고는 거의 나가는 대회마다 4강 안에 진출하며 최고의 성적을 올렸었다. 김건덕에 대한 프로 스카우터들의 평가만 봐도 당시 최고의 좌완 투수였던 이승엽(현 삼성 라이온즈 1루수)이나 휘문고를 혼자 이끌었던 김선우(현 몬트리올 투수)보다 월등하다 했으니 그의 기량에 대해선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런 투수 김건덕의 광채는 94년 8월에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손가락 부상으로 별 연습조차 하지 못하고 참가한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김건덕은 81년 이후 13년 만에 다시 한 번 한국에게 우승을 안겨줬다. 대회 MVP, 우수 투수, 다승왕, 베스트 나인이란 덤을 안고 말이다. 아마 여기까지 김건덕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문제의 싹은 자라고 있었다.
고교 졸업이 가까워 지자 한양대와 롯데 사이에서 당시로는 파격적인 금액인 2억 5천만원의 금액이 오고 갔고, 김건덕은 당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한양대 출신의 선배 투수 박찬호의 전철을 밟기 위해 조금 더 저렴한 가격(?)으로 한양 대에 입학하게 된다. 1년간 투수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투수 김건덕”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대학 입학 후 김건덕은 우리들의 뇌리에서 완전하게 지워진다. 투수 생명을 담보로 1년간 쉬기로 했던 “최후의 약속”은 무지한 야구 협회 사람들이 1년간 투수로 뛴 적이 없는 그를 대륙간 컵 대표팀에 뽑으며 깨어지게 된다. 물론 학교에서나 주위에선 그가 대표팀에 들어가서 많은 것을 배워오길 바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수의 입장. 성적을 내야 하는 대륙간 컵 대표팀 감독 입장 아니 야구 협회 입장에선 한 명의 좋은 투수가 절실히 필요했고, 결국 김건덕은 고교 시절 혹사 당했던 어깨를 완전히 아작내게 된다.
그 후의 모습은 “투수 김건덕”이 아니라 “타자 김건덕”일 뿐이었다. 대륙간 컵에서 무리하게 8개월 만에 볼을 잡은 이후 김건덕의 어깨는 회복되지 않았다. 병원에도 가봤지만 이상은 없다고 판정됐다. 단지 피로로 인해 어깨 근육이 약해 졌을 뿐이라고.하지만 잠잠했던 어깨의 통증은 볼만 잡으면 다시 그를 괴롭혔기 시작했다. 투수 김건덕을 요구했던 한양대 입장에선 이런 애물단지가 없었을 것이다. 비록 지명 타자로 대회에는 출전할 수 있었지만 “투수 김건덕”이란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재활 프로그램 같은 사소한 일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프로 스카우터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고교 시절 받았던 이영민 타격상이나 4게임 연속 홈런 그리고 대학 시절 종종 보여주었던 클러치 히터로서의 능력은 “투수 김건덕”이 보여줬던 놀랄만한 투구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므로.
야구가 좋아서 밤새 야구만 했던 우직한 아이. 형의 야구 유니폼이 멋있다는 이유만으로 야구 선수가 됐던 아이. 평생 야구만 하면서 살면 좋겠다는 소박한 희망을 가졌던 부산 소년 김건덕의 생각은 이렇게 깨져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김건덕은 사라져 갔다. 졸업 후 2차 지명도 받지 못한 채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져 버렸다. 중간에 잠시 94년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MVP 김건덕이 삼성 연습생으로 테스트를 받았지만 탈락했다는 자그마한 몸부림을 남긴 채 말이다.
흔히들 스포츠에 가정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만일 김건덕이 그 때 대학이 아닌 프로행을 선택했다면 지금쯤 우리들은 오른손 이승엽이나 또 한 명의 박찬호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당시 그의 기량은 뭔가 초절함이 있었고 , 187cm-95kg에서 뿜어 나오는 볼 끝이 살아있는 강속구에는 그런 기대를 걸만했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각난다.이런 엄청난 기량을 가진 선수가 어째서 저렇게 허무하게 선수 생활을 마치고 말았을까? 그 이유는 바로 한국 야구계의 고질적인 병폐인 낙후된 시스템을 먼저 들 수 있다. 무지한 야구 협회와 세계 야구의 흐름에 전혀 따라가지 못했던 감독들 그리고 순진한 아이들. 이 3자의 절묘한 하모니로 김건덕 같은 피해자가 만들어 진 것 아닐까? 적어도 5년 전에는 그랬었다. 그리고 2002년이 된 지금도 이런 한국 야구의 병폐는 전혀 고쳐지지 않은 채 보이지 않는 어디에선가 제2, 제3의 김건덕이 만들어 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제2, 제3의 김건덕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의 뒷 모습을 취재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미 야구 판에서 사라져 버린 그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한 열성 야구팬의 고마운 제보로 그가 모교인 부산 대신 초등학교에서 코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급기야 새벽 기차로 부산으로 향했다. 2002년 8월, 고교야구 최고의 유망주 김건덕의 모습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125kg 거구의 ‘코치 선생님’ 김건덕의 모습 만이 남아있었다.
<게으른 야구천재님의 다른글>
얼마전 시행된 2003년 프로야구 2차 지명으로 인해 고교야구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난 요즈음입니다.. 김대우 선수의 계약금 문제나 박정준 선수와의 계약..등의 소식이 스포츠 신문 한켠을 메우고 있고.. 우리들도 여느때와는 달리 심심찮게 고교야구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고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느끼는 것이 역시나 "고교야구의 매력은 훌륭하다.." 라는 거죠.. 신선함과 열정, 패기 등.. 고교야구를 꾸미는 수식어는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고교야구의 진정한 매력은 그런것 이전에 "정신(魂)" 이겠지요.. 늘 그들에게서는 야구라는 스포츠 본연이 가지는 순수함과 정직함을 느낄 수가 있어 기분이 좋습니다.. 돈과 명예.. 스타의식 이전에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오직 승리만을 위한 갈망과 투혼.. 승리 뒤의 환호성과 패배 뒤의 쓰라린 눈물 한방울이 가지는 의미가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임선동-조성민-손경수의 빅3 시대부터 아마야구에 발을 들여 놓은 이후 참으로 많은 선수들을 지켜보며 그들의 몸내음과 땀방울을 보았고.. 같이 기뻐했으며 또한 같이 가슴이 아파했던 기억이.. 지금의 저에게는 굉장히 소중한 추억의 한 부분으로 가슴 한곳에 자랑스레 남아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오랜동안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기억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김건덕 선수가 아닐까 합니다.. 이선수만큼 저에게 많은 기쁨과 동시에 아쉬움을 준 선수도 드물었거든요.. "안타깝다" 라는 말은 이 선수를 위해 만들어 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김건덕 선수를 생각하면 참 많이도 가슴이 아픕니다.. 경남상고의 빨간색 유니폼이 유달리도 잘 어울리고 더불어 상대에게 감당키 힘든 공포감을 주었던 김건덕 선수.. 동대문 운동장의 그늘진 귀퉁이에서.. "저 투수가 던지는 것은 공이 아니다.. 저것은 돌덩이다.." 라고 말하던 어느 아저씨의 감탄이 아직 생생히 남아 있네요.. 야구선수라기 보다 씨름 선수에 가까웠을 만큼의 커다란 골격과 단단한 체격.. 그리고 꾸부정한 자세에서 포수와 사인을 교환하던 모습.. 최고의 강속구와 낙차큰 파워커브와 슬라이더를 던지며.. 상대팀의 강타자들을 차례대로 삼진을 잡아내고도 아무런 제스쳐없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 담담히 덕아웃으로 걸어나오던 모습.. 팀원들 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커 유달리도 웃는 모습이 눈에 잘 띄던 그 였는데.. 괴력의 4번 타자로써 홈런이라도 한번 치고 들어올때면 동료들은 항상 돋음발을 하고서 머리를 두드려 주던 모습도 자주 떠오르곤 합니다.. 그때는 솔직히 경남상 경기가 있는 날이면 오로지 김건덕 선수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곤 했었죠.. 그리곤 그 빨간색 유니폼에 새겨진 경남상고라는 글자가 자이언츠라는 글자로 바뀐 모습을 늘 상상하곤 했었는데.. 그런 기대 하나조차도 저에겐 더없는 큰 기쁨이었고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야구를 사랑하는 부산사람들과 자이언츠팬에게.. 그리고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최고의 영웅이었죠.. 너무 행복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김건덕 선수에게도 그리고 저에게서도..
그런데.. 그 이후의 일들은 생각하기가 싫으네요.. 어디까지나 저는 그때의 김건덕 선수만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더이상의 불운아가 아닌.. 가장 훌륭한 정직함과 순수함의 "정신(魂)" 을 가졌던 불세출의 고교야구 스타로써..
<출처 : 엘지트윈스 cheena76님의 글>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날씨에 별고 없으신지요? 요즘 `슈퍼스타 감사용`이란 영화가 화제인데요. 저도 그에 못지않은 스타를 한 명 알고 있지요. 지금부터 사사롭게 필자의 옛친구 얘기를 조금 해볼까 합니다.
대부분 야구팬들이 그러하시듯 저 또한 중고교시절 야구에 미처 살았었더랬죠. 연습장엔 언제나 영어단어나 수학공식 대신 드넓고 푸른 다이아몬드 그림이나 우리팀 수비위치/라인업 작성표가 자리잡고 있었구여. 허긴, 당시의 프로야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하여 트윈스와 타이거즈의 잠실경기는 언제나 만원사례... 금요일 저녁시간마다 공중파 H모 해설위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야자를 땡땡이 치던 저의 모습도 떠오르네요...ㅋ
어느덧 입시에 여념이 없던 고교 시절의 끝자락에서 전 저와 동년배의 한 고교야구 선수에 주목하게 됩니다. 94년 세계청소년대회 미국과의 결승전에서 8-6으로 뒤지던 8회말 기적 같은 동점타를 터뜨리고 마운드에서도 승리투수가 되며 최다승 타이틀을 차지한 아마야구의 지배자... 경남상고의 에이스 김건덕 말이죠... 그당시 그는 최고의 아마추어 선수로 꼽혔습니다. 93화랑기 · 94년 봉황기 우수투수상, 이영민 타격상 등은 보너스였죠.
다시 제 얘기로 돌아와서... 어찌어찌 대학에 입학하게된 저는 어느날 신문기사를 보고 쾌재를 불렀더랬죠. 그 유명한 김건덕이 저와 같은 학교/같은과에 입학하게 됐다는 기사 내용... 입학후 출석부를 살짝 보니 맨 윗줄에 그의 이름이 있더군여. 그 대단한 김건덕의 이름 석자가 말이져.
저희 학과는 특성상 신고식이 상당히 살벌하답니다. 거기서 그때 저는 개처럼 망가졌더랬죠...ㅋ 어쨌든 저는 건덕이에게 슬슬 작업? 을 걸기 시작했고 이넘아두 신고식때의 저의 우스꽝스런 몰골을 정확히 기억해내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야구부원들과 친해질 수 있었죠...
산만한 덩치, 넙적하고 새까만 얼굴,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ㅋ 수업 아니 강의 시간에 맨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신입생 다이어리에 별첨되어 있던 대한민국 지도 최남단 어느 섬을 찍어주며 자신이 태어난 고향 이노라고... 어느 날 야구부 신입생들이 단체 기합을 받았다며 엉금엉금 강의실에 들어온 그... 젖산이 잔뜩 농축되어 알이 단단히 박힌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툭툭 건드리며 그를 고통에 몸부림치게 했던 나... 군대 짬밥 보다도 못했던 학생 식당에 괴로워 하던 저를 운동부 기숙사의 식당에 데리고가 공짜로 저를 매우 흐믓하게 했던... 태릉 선수촌을 방불케 하는 그때 식단의 버라이어티 함이란...ㅋ 암튼 그와의 추억은 쌓여만 갔지요...
헌데... 저희 학교 시합을 응원하러 동대문 구장에 가보면 이넘아가 좀처럼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가 있어야할 마운드 위에 말이죠. 전광판엔 언제나 지명타자 7번타순 김건덕...
의아했습니다... 쟁쟁한 선배들한테 밀린건가?.
그래서 물었습니다... 대답하더군여 고교시절 워낙 많이 던저서 잠깐 쉬는거 라고...
그런데... 1년이 다 지나도록 단한번두 마운드에 오르질 않더군여. 아무리 그렇더라도 한번은 단한번은 구위점검 차원에서라도 잠깐은 등판해야 되는거 아닌가..?
다시 물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더군여. 자신은 지금 마운드에서 1루로 견제구 조차 던질 수 없는 어깨 상태라고...
고교시절 아픔을 참아가며 던진 오기는 그에게 ‘세계대회 우승의 주역’ 이라는 화려한 빛을 안겨줬지만 동시에 그의 인생을 그늘지게 하는 먹구름 이었던 겁니다. 학교 지하 연습실에서 남몰래 눈물겨운 재활에 매달렸지만 한번 망가진 어깨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죠.
해가 바뀐 후 저는 곧바로 휴학/입대를 하게 되었고... 그와의 만남은 그것이 마지막 이었습니다. 제대 후 복학 해보니 건덕이는 어떤 프로구단의 지명두 받지 못한체 이미 졸업해 고향에 내려 갔다고 하더군여. 들려오는 소식으론 모 초등학교 야구부의 코치로 있다고...
누가 그의 날개를 꺾었나여? 팀과 나라를 위해 팔이 빠져라 공을 던진 죄 밖에 없는 그의 인생은 어디서 보상 받아야 하나여?
어쨌든 아직도 그는 제맘속의 에이스이자 영웅입니다. 어디서, 머하구 사냐? 보구싶다, 임마...
Sleeplessnight... written by cheena76...
<출처 : 엘지트윈스홈피 indiekang님의 글>
오랜만에 옛날을 회상하게 하는군요^^ 님도 저와같은 나이인거 같은데^^김건덕 대단한 투수였지요 참고로 저는 휘문 출신인데요 그때 우리학교에 후배 선우랑 김건덕선수랑 니뽄에서 죽쓰고 있는 시민타자 승엽이랑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을때가 생각납니다^^
고교때부터 150km를 상회하고 거기다가 칼날 슬라이더와 고교생으로 갖추기 힘든 제구력까지 대단했었죠 고교때 승엽이의 경복고등학교 우리의 휘문 건덕이의 경남상고 이 세 학교가 전국무대를 휩쓸었죠
건덕이를 제외한 세계선수권 주역들인 나머지 선우나 승엽이는 해외리그에서 뛰는데 이보다 더 뛰어난 선수였던 김건덕선수는 꿈도 피워보지도 못하고......
그래도 고교때부터 워낙 타격에 재능이 있어서 삼성에서 지명했지만 어깨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선수는 아무리 수비 포지션이 1루이라고 하지만 어려운것이죠 거기다가 대학을 졸업한 후엔 이승엽이 1루를 딱 버티고 있었죠 그러다 야구를 그만두고 예전에 sbs스포츠뉴스에 보니까 초등학교에서 감독을 하던데넘 안타까웠습니다.
이런 훌륭한 선수는 국가로서도 대단한 보배인데 이런 선수를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성적만이 최우선이다는 어리석은 학교와 미련한 감독들 때문에 안타깝게 사라져 가는 선수들을 보면 애석할 따름입니다. 단지 선수를 재고자산으로만 보지 말고 동업자로 봐야 하는데 말이죠
우리나라 아마야구 100여년의 역사중에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아마 최강쿠바를 이긴선수는 단 3명 밖에 없었습니다. 대학때 박철순 그리고 고교때동산의 위재영선수와 경남상고의 김건덕 선수죠 그만큼 대단한 선수라고밖에 설명이 안되는 선수였죠
모쪼록 김건덕 선수 잘 지내기 바라며 보스턴 팬웨이 파크에서 아마최강 쿠바 선수들에게 멋진 강속구로 삼진을 잡았던 것을 떠올리면서 한때 최고의 선수였던것을 마음 깊숙이 아로 새기면서 자신있게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출처 : 스포츠서울 심은정기자의 기사중>
스타’와 취재 약속시간을 잡는 것은 어렵다. 스케줄이 빽빽해 바쁜 데다 시간마저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기자는 ‘그에게 묻고 싶다’ 7번째를 준비하며 섭외하고 취재하는 데 약 3주가 걸렸다.
어느 하늘 아래 사는지도 모르는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는 데 2주, 어려운 생활로 시간조차 내기 힘든 그와 만나기까지 1주일. 여느 대스타를 취재하는 것보다 오랜 시간의 줄다리기가 필요했다.
김건덕(27)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94년 세계청소년대회의 짜릿한 우승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이 퍼뜩 머리를 스쳐갈지도 모르겠다.
김건덕은 94년 세계청소년대회 미국과의 결승전에서 8-6으로 뒤지던 8회말 기적 같은 동점타를 터뜨리고 마운드에서도 승리투수가 되며 최다승 타이틀을 차지한 기대주였다.
이때 함께 뛰었던 이승엽(삼성)과 김선우(몬트리올) 등이 아마추어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당시 김건덕의 명성과 실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런 그가 한양대 진학 후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8년 뒤인 지난 3일 기자는 영화 ‘친구’의 배경이었던 부산 영도에서 공익근무요원인 그를 만났다.
● 잊을 수 없는 것
경남상고 재학 시절 김건덕은 최고의 아마추어로 꼽혔다. 93년 화랑기·94년 봉황기 우수투수상, 이영민 타격상을 받고 그해 캐나다에서 열린 세계청소년대회에 뽑히며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의 ‘대망’의 첫 단계였다. 그러나 한마터면 국제대회에서 최다승리투수가 되는 영광을 놓칠 뻔했다.
“대회를 앞두고 타구에 맞아 오른쪽 손가락뼈에 금이 갔어요. 부상이 알려지면 대표에서 탈락할까봐 숨기고 출장했지요. 꿈을 눈앞에서 놓칠 수는 없었어요. 얼음마사지를 하고 아픈데도 참고 던졌죠. 결승전에서 마지막 타자를 잡자 동료들이 저를 얼싸안았는데 그 순간의 기쁨은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 내리막길이 시작되다
아픔을 참고 던진 오기는 그에게 ‘우승의 주역’이라는 화려한 빛을 안겨줬지만 동시에 그의 인생을 그늘지게 하는 먹구름이었다. 고교 2학년 때 한양대행이 결정됐던 김건덕은 그곳에서 제대로 피칭 한 번 못해봤다. 고교 시절부터 혹사한 어깨가 점점 악화된 것.
지하 연습실에서 남몰래 재활에 매달렸지만 어깨는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프로 지명을 앞두고 아마추어 시절 그를 따라다녔던 스카우트들은 보이지 않았다.
“1·2차 지명을 모두 못 받았어요. 투수 때의 김건덕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타자로 변한 제 모습에 실망스러운 반응을 보였어요. 그들이 스카우트할 대상은 투수 김건덕이였던 거죠.”
● 오르막길은 없다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김건덕은 모교에서 훈련을 하며 재수를 준비했다. 한 번 내디딘 내리막길의 경사는 갈수록 급해졌다. 2000년 현대 입단 테스트에서 낙방하고 2001년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삼성이 그를 데려와 2개월간 실험했지만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모교에서 방망이나 치고 있어라”라는 싸늘한 말이었다.
그 즈음 어깨는 휴식으로 많이 좋아졌다. 그는 두 번째 꿈인 ‘프로 지명’을 이루기 위해 연고구단인 롯데의 전화를 기다리며 훈련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해 겨울, 기다리던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 대신 쓸쓸한 입영 통지서가 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단칸방에 전달됐다.
● 비는 폭우로 쏟아진다
비운은 혼자만의 슬픔이 아니었다. 김건덕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실패하자 중풍으로 쓰러져 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당신이 신경을 못 썼다는 죄책감에 술을 많이 드셨어요. 가끔 텔레비전을 통해 승엽이와 선우가 뛰는 모습을 보면 ‘야구장에 가고 싶다’고 하시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아파요.”
영장을 받은 그는 방위산업체에 지원을 했다. 조금이라도 생활비를 더 벌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신발공장에서 일을 했지만 그가 얻은 것은 돈이 아닌 검지손가락 윗부분의 살점이 잘려나가는 부상이었다.
“계속된 실패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었어요. 괴로워할 틈조차 없었어요. 홀로 계신 아버지 병수발하랴, 생활비 마련하랴 당장의 급한 불을 꺼야 했으니까요.” 손가락 부상으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그는 올해부터 영도구청 주차관리과 공익근무요원으로 세금이 체납된 차량의 번호판을 떼고 있다.
● 피지도 못 하고 진 꽃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를 두고 ‘피지도 못하고 진 꽃’이라고 한다. ‘떨어진 꽃’은 아래를 보는 사람들의 눈에만 들어온다. 생활고로 야구할 때 친했던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지만 외면당했다.
“어려울 때 ‘친구’라는 말이 실감나더군요. 지난해 손가락을 다쳤을 때 (김)선우가 어떻게 연락처를 알았는지 전화를 했어요. 보스턴 레드삭스의 모자를 건네받았는데 찾아주는 후배가 있다는 게 무척 기분이 좋았어요.”
구청 소속 사회인야구팀에서 뛰고 있는 그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은 제대 후 모교에서 야구를 지도하는 것이다. 내리막길의 끝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꿈이 있기에 헤쳐나갈 용기가 생긴다.
기자는 그를 만나고 돌아오며 기분이 묘했다. 이승엽은 이날 하루에 3방이 홈런을 때리고 스포츠서울 1면을 장식했다. 이승엽과 김건덕의 운명의 갈림, 빛과 어둠이 정말 뚜렷한 세계가 바로 이곳이 아닌가 싶다.
심은정기자 fearless@ / 스포츠서울
뒤를 돌아보면 가슴 한구석에 아련히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김건덕. 지난 6월에 영화 ‘친구’의 배경인 부산 영도에서 만났다. 경남상고 시절만 해도 그는 지금의 삼성 이승엽보다 실력에서 더욱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인생은 역전됐다. 이승엽이 한양대 진학에 실패하고 프로에서 홈런왕으로 명성을 쌓아간 반면 한양대에 들어간 김건덕은 어깨 부상으로 브레이크 없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 살점이 떨어져나갔고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의 수발을 들며 어려운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날 서둘러 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간 기자는 그의 집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좁은 골목길 안 대문 틈 사이로 보이는 먼지 쌓인 세탁기. “아버지가 불편한 생활을 하셔서 집 안이 누추해요, 여기서 잠깐 기다리세요”라며 고개를 숙이는 그의 말에 오히려 기자가 더욱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이승엽과 김건덕, 옛 친구 사이인 둘의 극명한 인생역전이 머릿속을 내내 혼란스럽게 했다.
그러던 얼마 전 김건덕에게서 전화가 왔다. 반가운 목소리로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다”며 어느 선수의 연락처를 물어왔다. “좋은 일이 생기면 꼭 알려달라”고 전화를 끊은 지 3주째. 궁금해서 다시 휴대폰으로 연락을 취했지만 고객의 사정으로 당분간 착신이 금지됐다는 안내만 되풀이됐다.
첫댓글 곽재성, 김건덕 둘 다 참 아까운 후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