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뜨겁게 살아온 남자가 있었다.
그는 60대 초반인데, 몇 해 전 퇴직할 나이가 되자 일선에서 물러났다.
수십억 대 자산가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수도권 어느 큰 도시에서 길가 주차관리원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아내가 싸준 도시락 가방을 메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건거로 통근하는 모습이 그렇게도 미더울 수가 없었다.
오늘 오후, 그가 나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내용은 이랬다.
(그는 딸만 둘을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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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5월 11일.
일요일 이었어요.
모스크바 나하비노 골프클럽에서 골프 중이었어요.
장모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한달 전 와이프와 첫째가 출산을 위해 서울에 들어가 있었거든요.
딸을 순산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셨어요.
얼마후 IMF사태가 났어요.
예기치 않게 해외 주재원 감축으로 갑자기 귀임 발령을 받았어요.
짐을 싸야 해서 둘째는 할머니에게 맡겨두고, 아내와 첫째가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짐을 부친 뒤에 다시 세 식구가 귀국했지요.
둘째가 태어난 지 한 달 뒤의 일이었네요.
서울에 도착해 보니 할머니집 작은 방에 둘째가 자고 있었어요.
얼굴이 동그랗고 하얀 아기였죠.
할머니가 그랬어요.
얘는 순하다.
잘 울지도 않고 잘 자.
울어도 조그맣게 울어.
근데 잘 먹지 않아서 그게 마음에 걸려.
그렇게 둘째를 처음으로 만났었지요.
둘째가 4살 때였어요.
눈이 내리는 휴일 첫째와 둘째를 데리고 눈사람 만들려고 집 앞에 나왔는데 순식간에 둘째가 사라졌어요.
놀라서 아파트 단지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둘째는 보이지 않았어요.
당황하고 놀라서 어쩔줄 모르고 있는데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둘째였어요.
고양이를 쫓아가다가 길을 잃고 꽤 떨어져 있는 다른 동 아파트 지하 계단에서 울고 있었어요.
일곱 살 때였나봐요.
싱가폴 창이공항 출국장에 있었어요.
갑자기 영어로 멘트가 울렸는데, 한국에서 온 누구 엄마를 찾는다는 방송이 계속 나왔어요.
둘째의 이름이었어요.
그때 비로소 아내와 함께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로 둘째가 없었어요.
허둥지둥 안내 데스크에 갔더니 둘째가 그곳에 있었어요.
이 아이를 여러번 잃어버렸어요.
마트를 가도 항상 방송에 나오고 에버랜드에서도 폐장 후 불이 다 꺼진 뒤까지 찾지 못해서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몰라요.
그 넓은 애버랜드에서..
항상 이 아이는 다른 곳을 가고 싶어 했어요.
대학을 다니느라 집을 4년 동안 떠나 있었고 대학병원에 취업이 되어서 또 3년 동안 집을 떠나 있었어요.
병원을 그만두고 미국 간호사 면허 시험을 준비했어요.
결국 합격했네요.
어렸을 적부터 늘 먼 곳을 바라보며 다니더니 커서도 먼 곳을 향해 가려 하네요.
한번은 둘째가 저한테 물어본 적이 있어요.
"한국에서 간호사 하는게 좋아? 미국에서 간호사 하는 게 좋아?"
"아빠는 네가 한국에 있는 게 좋지. 자주 볼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네가 하고 싶은대로해. 미국에 가고 싶으면 가야지. 인생은 한 번 사는 거니까"
둘째가 주경야독하여 드디어 미국 간호사 면허증을 취득했어요.
마음을 담아 축하해 주었습니다.
교사인 첫째가 12월에 결혼하는데 청첩장 표지를 둘째가 그렸어요.
참 예쁜 그림이에요.
아무리 바빠도 이 분의 혼사엔 꼭 참석하려 한다.
두 숙녀들이 아빠를 닮아 참 순수하고 예쁘다.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고 따뜻하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