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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과 삼백 용사
삿 7:1-8
1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3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4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 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5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더니
6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7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8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각각 그의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 명은 머물게 하니라 미디안 진영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에 있었더라
삿 7:1-8 / [너무 많은 이스라엘 군인들] 여룹바알이라고도 부르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민병대가 모두 아침 일찍 일어나 하롯 샘 부근에 진을 쳤다. 미디안 진영은 이스라엘 진영의 북쪽, 즉 모레산 앞 골짜기에 있었다. 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셨다. `기드온아! 너를 따르는 민병대가 너무 많다. 그래서 내가 미디안 사람을 그 민병대의 손에 넘겨 주지 않겠다. 만일 내가 미디안 사람을 너희 민병대의 손에 넘겨준다면 이스라엘 민병대가 이길 것이 뻔하지 않느냐? 그러면 자기들이 싸움을 잘해서 이긴 줄 알고 하늘 무서운 줄도 모를 것이 아니냐? 3) 그러니 이제 너는 민병대에게 자세히 일러주어라. 누구든지 싸움터에 나가 싸우기가 두려운 사람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좋으니 길르앗산에서 내려가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하여라.' 그러자 집으로 돌아간 사람이 2만 2천명이나 되었고, 남아 있는 사람이 1만 명이었다. 4)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셨다. `아직도 민병대의 수가 너무 많다. 자, 이제 저 사람들을 데리고 물가로 내려가거라. 거기서 정말 싸움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가려내겠다. 만일 어느 사람이든지 내가 `이 사람은 너를 따라가 싸워도 좋겠다' 고 하면 따라가게 하고, 또 내가 누구든지 `이 사람은 너를 따라가서 싸울 수가 없겠구나' 하고 일러주면 그 사람은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5) 그래서 기드온은 민병대를 이끌고 물가로 내려갔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렇게 일러주셨다. `모두 물을 먹게 하여라. 그래서 개처럼 물을 혀로 핥는 사람은 따로 세워 두어라. 또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사람도 따로 세워 두어라.' 6)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사람들이 어떻게 물을 먹는가 하고 보았더니 손으로 물을 한움큼 쥐고 입으로 핥아 먹는 사람은 300명이고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먹었다. 7) 그러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물을 손으로 움켜 쥐고 핥아 먹은 사람 300명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리라. 그들이 너희를 구해 내리라. 남은 사람들은 모두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여라.' 8) 기드온은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고 가려 뽑은 300명만 남아 있게 하였다. 이 300명은 집으로 되돌아간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식량과 신호용 나팔을 거두어들였다. [확실한 승전] 미디안 사람들은 그 아래 평원지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오늘 본문은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기드온이 거둔 승리의 초반부 기록입니다. 본문은 미디안과의 전쟁을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300 용사를 선발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전쟁에 소집된 이스라엘 군대의 수인 총 32,000명을 두 차례에 걸쳐 인원을 300명으로 축소시키십니다. 이로써 이 전쟁의 승리는 사람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차로 이스라엘 군대 축소를 지시하시는 하나님(1-3)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미디안은 기드온이 사사가 되어서도 공세를 줄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기드온이 군대를 소집했습니다. 기드온이 리더쉽이 있는 사사여서인지, 아니면 백성들의 분노와 저항의지가 불타올라서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미디안과 맞서 싸우겠다는 병사들이 무려 32,000명이나 모였습니다. 공부든, 사업이든, 사역이든 기세가 절반이라 했는데, 이런 기세라면 미디안과의 전쟁도 문제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지를 꺾는 분이 있었으니, 그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다”고 말씀하시며(2), 그렇게해서 너희들이 전쟁에서 이기면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걱정하십니다(2). 그래서 모인 백성들을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2차로 이스라엘 군대 축소를 지시하시는 하나님(4-8) 그렇게 돌아간 숫자가 22,000명이고 이제 10,000명이 남았습니다. 기드온과 백성들도 눈 앞에 보이는 숫자에 전의를 상실할만합니다. 그래도 ‘한 번 해보자’는 마음을 먹으려던 찰나, 하나님은 다시 숫자를 줄이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300명으로 말입니다. 군사를 300명으로 줄이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3이라는 숫자가 완전 숫자라고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물을 마실 때 이들 300명을 제외하고는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자”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의미는 300명은 자기들의 힘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숫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은 늘 그렇습니다. 내가 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은 뒷짐을 지시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내가 두 손을 내려놓을 때,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적용: 오늘 당신의 일상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당신이 내려놓아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군대가 승리 후 자신들의 힘으로 이겼다고 자랑할까 염려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미디안과 아말렉 족속 등의 연합군은 약 135,000명이며 이에 맞서는 기드온과 이스라엘의 네 지파의 군대는 약 32,000명입니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아군의 규모를 32,000명에서 10,000명으로, 결국 물 마시는 테스트를 통해 300명으로 줄이게 하십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상황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 설 교 >
하나님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사사기 7:4-8, 마태복음 14:15-21 / 배의신목사
** 들어가는 말
예전 신학생 시절에 ‘존 헌트’가 쓴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라.’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기독서점에서 책을 고르던 중에 제목에 끌려서 구매했던 책입니다. 이 책에서 ‘사람의 두려움, 불 신앙, 불순종, 교만, 무지, 태만 등. 십여 가지의 인간적인 행위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J.B.필립스의 책 ‘너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Your God is too small)에서는, “네 인생의 크기는 네가 믿는 하나님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마음 그릇에 맞추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세상을 자기 인지능력 안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자랐던 마을을 성인이 되어서 찾아 가보면 그렇게 크게 보였던 것들이 실제로는 자그마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머리로 헤아릴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믿음의 그릇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며, 하나님의 능력이 제한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눈을 더 높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본문 말씀을 통하여 확인해 볼 것입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내용을 봅시다.
사사기 본문 말씀은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여 줍니다. 미디안이 싸움을 걸어오자 기드온이 군사를 소집했는데, 삼만 이천여 명의 군사가 모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군사가 많아서 미디안을 넘겨주지 않겠다.’라고 하시면서, ‘전쟁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돌려보내라.’라고 하셨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이만 이천 명이 돌아갔습니다. 만 명이 남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많다.’라고 하시면서 남은 군사를 시냇가로 데려가서 선별하라고 하셨습니다. 군사들이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손으로 물을 움켜 마시는 사람이 삼백 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무릎을 꿇고 물에 입을 대고 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물을 움켜 마신 삼백 명으로 미디안을 물리치게 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미디안 연합군을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데, 겨우 삼백 명만 남기도록 하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본문 2절에서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군사력으로 이겼다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기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이기게 될 때,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은 사람의 머리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본문 말씀은 너무도 잘 아는 ‘오병이어의 이적’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 말씀을 듣느라 종일 굶은 군중들에게 음식을 사 먹도록 마을로 보내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구할 수 있었던 음식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든 작은 도시락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주님은 그 도시락을 가져오라고 하시면서 무리를 50명 100명씩 둘러앉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축복 기도하시고 떡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무리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도시락 하나가 주님의 손에 드려졌을 때,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이나 되는, 남녀노소를 모두 합하면 만 명은 족히 넘을 무리가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을 열 바구니나 모았습니다. 작은 도시락 하나로 만 명이 넘는 사람을 배불리 먹게 하신 큰 역사를 이루신 이 이적의 이야기도 역시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나타냅니다.
※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다니요? 그게 가능합니까? 그런데 사람에게는 의외로 하나님을 제한하는 요소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마가복음 6:3-5절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라고 하십니다. 병자를 고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작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능력의 주님이시지만, 불신으로 가득한 고향 사람들에게는 능력을 행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적을 행하실 때면, 누차 “네 믿음 대로 되리라.”라고 하셨으며, 혈루증 여인에게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막 6:43)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눅 8:50)라고 하셨고, 불신으로 미심쩍어하는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적 행하시는 것을 놀랍게 여기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1:24절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반면에 히브리서 4:2절에서는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라고 하십니다. 이 모든 말씀에서 강조하는 한 가지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은 어떤 환경,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부동(確固不動)한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미국 남침례교 학장을 역임한 ‘스카보로’라는 유명한 박사님의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박사님의 어린 아들이 학교에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와서 아버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정말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고 믿으세요? 과학적으로 얼른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그 이야기를 말예요.” 이때 스카보로 박사님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들아, 나는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는 사실을 믿는단다. 그뿐만 아니라, 만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나에게 물고기를 삼키게 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나는 그대로 믿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그 일이 왜 불가능하겠니.”
믿음의 영성의 기본은 스카보로 박사의 표현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오라.”였습니다. 이것은 ‘와도 좋다.’는 허락이 아니라, ‘나를 믿고 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고 싶으면 해도 좋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내 생각이 들어가는 순간 두려움, 염려, 근심, 불평, 원망 등이 내 마음을 덮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게 속한 모든 것뿐만 아니라, 온 우주를 만드셨고 지금도 운행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 때를 따라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대답은 많이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3:10-13절의 하나님의 선포를 봅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알려 주었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이니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이분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길입니다. 여러분,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많지요? 온 우주의 주권자이시며, 온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고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너무 마음 두지 마세요. ‘이렇게 기도해도 안 되면 어떻게 하나!’라고 미리 의심하지도 마세요. 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안 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오병이어로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인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55:8-9절에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생각에 갇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예수님의 명령을 아무런 의의 없이 순종하여 떡을 나누었던 제자들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기쁨의 도시’라는 책을 저술한 ‘도미니끄 라 피에르(Dominic la Pierre)’는 인도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서구의 부유한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용기와 사랑, 공유 그리고 무한한 행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무명의 많은 위인을 배출한 마력을 발견하고는 ‘기쁨의 도시(City of Joy)’라는 책을 썼습니다.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던 이 내용은, 삶에 환멸을 느낀 한 젊은 의사 맥스가 보다 넓은 세계로 나가서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삶을 찾고자’하는 내용입니다. 맥스는 어린 환자의 생명을 끝내 구하지 못하여 의사를 포기하고 찾아온 곳이 캘커타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도 생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선교사업을 하는 그리스도인인 ‘조안 바실’의 도움도 외면한 채 다시 떠나려 합니다. 그때 조안은 자신이 발견했던 것을 맥스와 나누며, 세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당신은 달아날 수도 있고, 방관자가 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전적으로 헌신할 수도 있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택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과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영원한 행복인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순종과 헌신을 요구하신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있으므로 우리에게는 헌신과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순종하는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역사를 이루십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고 순종하여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드온 용사의 승리
삿 7장 7~9절 / 피종진목사
모든 사람은 다 승리하기를 원하고,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원하는 대로 다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실패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승리의 길이 주님께로부터 반드시 우리에게 임하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항상 전쟁 마당에서 싸웁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누구일까요? 첫째는 바로 자신인데, 우리는 이 자신과의 수많은 싸움을 싸워야 됩니다. 자신의 욕망과 싸워야 되고, 혈기, 교만, 그리고 자신의 모든 슬픔, 고통, 불안, 공포, 육체의 많은 질병과 싸워야 됩니다.
그리고 도전해오는 세력과 싸워야 됩니다. 악한 자의 도전, 유혹의 도전, 그리고 여러 가지 우리를 이용하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의 여러 가지 악과 더불어 싸워야 됩니다. 또는 우리는 천재지변과 인재, 한재, 풍재와 싸워야 됩니다. 또한 우리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더러운 귀신과 싸워서 승리해야 됩니다. 마귀는 교묘하고 간교하게, 그리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사탄이 그 틈을 이용해서 우리를 도전해옵니다.
우리는 때때로 교통사고의 처참한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한순간에 음주 운전해서 잠깐 정신이 팔린 순간에 무서운 사고를 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의 생명이 희생을 당하고, 그 유족들이 정말 땅을 치고 통곡하며 가슴을 찢는 이러한 많은 슬픔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모든 환경 여건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 요아스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제5대 사사가 되어서 그 당시에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미디안을 쳐부수고 40년 동안 나라를 평안하게 이끌어간 그런 위대한 사사였습니다. 기드온과 그 용사 300명은 어떻게 해서 이런 위대한 승리자가 되었습니까? 그 이유 네 가지를 성경에서 상고하면서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축복이 있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삿 6:34) 이것이 바로 기드온에게 승리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기드온이 승리한 가장 기본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땅에 승리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여호와의 신이 함께 하는 자가 승리하는 자가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들과 이 방송을 시청하시는 여러분에게 여호와의 신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수단과 노력을 아무리 동원해도 우리는 역부족의 인생이요, 어리석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생입니다. 어쩌면 질그릇으로 만든 깨어진 옹기그릇 같고, 한 번 쓰고 버리는 1회용 종이컵 같이 찢어지고 부서지기 쉬운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실 때에 그 때부터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함께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신으로 강하게 무장하면 악한 자들도 어느 사이에 여러분에게 손을 내밀게 됩니다. 그리고 말로 폭탄 세례를 퍼붓고 온갖 지위 능력을 가지고 도전하려고 하지 아니해도 성령님께서 상대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어주고 상대의 마음을 괴롭게 해서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성령이 그를 도와주시고 건져주신 사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미디안은 7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농사를 지어놓으면 다 곡식을 빼앗아가고, 양을 길러 놓으면 다 빼앗아서 잡아먹습니다. 그래도 저들은 힘이 없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면서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밀을 타작하던 농부 기드온을 선택해서 그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들어가면서 그에게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사사기 3장에도 보면 '메소포다미아'라고 하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괴롭힐 때가 있었습니다. '구산 리사다임'이라고 하는 그 왕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는데 도저히 이스라엘이 그들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을 택해서 그에게 여호와의 신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강한 메소포다미아 왕을 쳐부수고 이스라엘의 승리로 이끌어내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는 마음과 육체도 강하게 되고, 영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손과 발에도, 말에도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업에도 하나님이 성공적인 사업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제밤까지 성남 참사랑교회에서 성회를 인도했습니다. 손대영목사님이 계시는 교회인데 바로 작년 이 맘 때에 거기에서 부흥회 할 때에 식사를 하면서 사업에 실패하여 아주 어려운 가정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무엇을 해야 될지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알지 못하고 정말 감이 잡히지 않는 어려운 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그 사정을 이야기하고 본인들도 내외분이 하나님 앞에 이번에 은혜 받아야만 길이 열리고 잘 될 것을 믿고 각오했습니다.
이는 힘으로 능으로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을 도와주셔야 됩니다. 성령께서 당신을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길을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그래서 식당에서 안수기도를 했습니다. 그 후로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복을 주셔서 사업의 길이 열렸는데 1년이라는 세월 동안에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백만원씩 하게 되고, 또 한 가정은 돈도 없고 사업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큰 거금을 누가 도와주어서 5억짜리 되는 큰 전원주택을 3,40채 건축하게 되어 거기에서 30억의 수입이 생겨서 어젯밤에 감사헌금으로 1억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30억에 대한 십일조 3억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1년 동안에 막 도와주시니까 갑자기 큰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니까 1년만에 이 어려운 시대인데도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성도들이 그 가정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고 '지금까지 우리의 수단과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었구나, 하나님이 도와주시니까 되는구나.'라고 말하면서 성령을 구하고, 성도들이 더욱 더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사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둘째, 여호와의 손에 구원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해서 군사를 모집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3만 2천명이 군사로 모집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 7:2)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삿 7: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2만 2천명이 물러가고 1만명만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기드온에게 말씀하시기를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삿 7:4)고 하시면서 "무릇 개의 핥는 것같이 그 혀로 물을 핥는 자는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무릇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도 그같이 하라."(삿 7:5)고 하셨습니다. 이 때 적을 향하여 보면서 전투태세를 갖추고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가 300명(삿 7:6)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그 300명으로 하여금 미디안과 싸우게 하시고, 나머지 9,700명은 돌아가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구원이 사람의 손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과 저를 구원해주시고, 우리 자녀를 구원해주시고, 민족을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구원이 있음을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됩니다. 또한 우리는 남은 일생을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고자 하는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셋째, 적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일만 명이었더라."(삿 7:3) 두려워 떠는 자는 승리가 없습니다. 두려움이 있을 때는 하나님 앞에서 벌써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 앞에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했기 때문에 기드온 용사가 승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성도에게 두려움이 있을 때는 ①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담대하게 두려움이 없이 전진할 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②사명을 저버릴 때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할 때는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셔서 우리 마음에 강하고 담대함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에 그냥 예배만 드리고 왔다 갔다 하면 10년, 20년, 30년 믿어도 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쁨이 충만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두려움과 슬픔과 염려가 그림자같이 따르게 됩니다. 무엇을 해도 좋으니까 크든 작든 하나님의 교회에서 무언가 일을 맡아서 신앙생활을 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담대한 마음이 생기고, 기쁜 마음이 생겨지고, 그리고 모든 염려와 근심이 주님의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자극시켜 주셔서 좋은 생각, 좋은 마음, 좋은 일이 있게 하여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여러분이 나이가 많든 적든,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서 살겠다고 결심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 마음에 평안을 줄 뿐 아니라 담대함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불칼이 와도 죽음이 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순교도 하는 것이고, 복음을 위해서 평생을 바치는 것입니다.
③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사명의 길을 걷고 있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말씀했습니다.
넷째,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고 앞으로 전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다가 좌절하면 안됩니다. 뒤로 물러가면 안됩니다. 우리는 전진을 중단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절대 선한 일을 하다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누가 핍박한다고, 시험이 있다고,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누가 그 일을 빈정댄다고 그런 말에 흔들리는 사람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는 사람'과 같습니다. 빈대 무섭다고 집 짓지 않는 사람과 무엇이 다릅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는 '개는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런 마음으로 달려가야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명의 열차를 타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사탄 마귀들은 온갖 시험과 핍박, 조롱, 저주, 거짓말 등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서 성도들을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보면 왜 그렇게 거짓말들이 많고, 왜 그렇게 거짓 모함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그런 것을 보고 당황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이 다 개 짖는 소리로 들리기 때문에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해보세요. 누가 여러분들에 대해서 수군거릴지도 모릅니다. 그 때 '주여, 죽도록 충성하겠네' 이런 마음 가지고 충성해보세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는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뿐일세' 이런 찬송을 하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보세요. 하나님께서 기쁨을 주십니다. 승리를 주십니다. 참 평안을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뒤에 있지 않고 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3,14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
- 그 300명 -
사사기 7:7-8 / 석원태 목사
‘여호와의 사자’ 곧 ‘예수’를 만난 사람은 그 시간부터 싸움터로 나서는 전사의 걸음을 걷게 됩니다. 바로 기드온과 그의 300명 용사들이 그러했습니다. 이것은 신약복음 시대에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총을 입은 자들이 불가불 영전을 치러야 되는 영예로운 복음의 전사들이어야 된다는 예표적 진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사기 7장 8절 중에 「…그 삼백 명은 머물러 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정체는 무엇인가?
Ⅰ. 하나님이 남기신 기드온의 정예부대였습니다(삿 7:1-8).
사사기 7장 7절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남은 백성은 각각 그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기드온이 나팔을 불었을 때 자원하여 그에게 모였던 이스라엘 용사들은 32,000명이었습니다(삿 7:3).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수가 너무 많다고 하였습니다(삿 7:2). 하나님은 그 중에 31,700명을 제외시켰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 많은 사람의 숫자 때문에 전쟁에 이겼다고 자긍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삿 7:2). 사실 32,000명은 미디안 연합군 135,000여 명(삿 8:10)에 비한다면 결코 많은 수는 아니었습니다. 기드온이 적지에 내려가 그 135,000명이 진을 치고 있던 현장에서 그 무리들을 보고 표현하기를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지라」(삿 7:12)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남기신 300명의 정예용사들은 어떤 자들인가?
1. 담대하여 일사각오를 한 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은 두려워 떠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하여 「…누구든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삿 7:3)고 하였습니다.
여기 ‘두려워 떠는 자’란 전쟁 중에 적군을 보고 도망칠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때에 22,000명이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삿 7:3).
2. 존재의식, 곧 전투의식이 확실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다시 말씀하시기를, 남은 자 10,000명도 너무 많다고 하였습니다(삿 7:3b-4). 그래서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해 남은 자 중에서 다시 300명을 선택하는 시험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물가에서 물을 마시는 방법을 가지고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남은 10,000명을 데리고 물가로 내려갔습니다. 하롯샘 물가였습니다(삿 7:1). 지금도 이곳에는 맑은 물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첫째로, 개처럼 엎드려 물에 입을 대고 그 혀로 정신없이 물을 마시는 사람들을 따로 세우라고 하였습니다(삿 7:5).
둘째로,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자들도 따로 하라고 하였습니다(삿 7:5).
셋째로, 손으로 물을 움켜서 입에 대고 핥는 자들 역시 따로 하라고 하였습니다(삿 7:6). 물 앞에 엎드려서 혀로 물을 핥는 자나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는 9,700명이었고, 손으로 물을 움켜서 입에 대고 핥는 자는 300명이었습니다(삿 7:6).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손으로 물을 움켜서 입으로 핥는 자 300명을 남겨두고, 그 나머지 사람은 모두 집으로 되돌려 보내라고 하였습니다(삿 7:7). 이 두 번째 집으로 돌아간 자들은 전투의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은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자신이 목이 마르다는 단순한 욕구에 사로잡혀 자기의 눈앞에 원수가 있다는 사실까지 잊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왜, 무엇 때문에 여기 있는가? 여기가 어디인가? 왜 물을 마셔야 하는가? 누구를 위하여 내가 물을 마셔야 하는가?’ 하는 사실을 망각해버린 자들을 가리킵니다. 생존의식이 약하거나 없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신의 사욕에 이끌리지 않고, 언제나 깨어서 마귀와 접전할 수 있는 자기 존재의식, 생존의식이 분명한 자들이 남은 300명의 정예용사들이라고 생각됩니다. 바로 깨어있는 오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3. 하나님이 붙잡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사사기 7장 8절에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을 각각 그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 명은 머물러 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그 삼백 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처음 32,000명에서 남은 자, 두 번째 10,000명에서 남은 자를 가리킵니다. 그 300명은 머물러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머물러 두니라’는 말은 ‘붙들다’, ‘붙잡다’, ‘꽉 쥐다’ 등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 사람들을 꽉 붙잡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필요와 목적과 계획에 사용하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께서 꽉 붙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가정주부가 음식을 만들기 위하여 도구를 붙잡고 있듯이, 농부가 일을 하기 위하여 농기구를 붙잡고 있듯이, 병사가 전쟁을 하기 위하여 무기를 꽉 붙잡고 있듯이, 야구하는 선수가 공을 치기 위하여 야구방망이를 꽉 붙잡고 있듯이 하나님이 300명의 정예용사들을 꽉 붙잡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하나님께 선택된 자들이 아닌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부름받은 자들이 아닌가! 자기 존재의 의미와 목적과 내용을 분명히 갖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조국 이스라엘을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연합군들의 침략과 압제에서 구원하는 구국의 전사들이 아닌가!
Ⅱ. 하나님의 전투명령에 신종한 자들이었습니다(삿 7:9-23).
사사기 7장 9절에 「이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밤중에 떨어진 전투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신명(神命)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통하여 승리의 표징(t/a)을 받은 기드온에게 떨어진 명령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 꽉 붙잡힌 300명의 정예병들에게 내려진 명령입니다. 그 명령의 내용은 「적진을 치라」는 것입니다. 곧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연합군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을 대적하는 하나님의 원수들이었습니다. 그 명령에는 승리의 약속이 보장되었습니다.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1. 기드온은 적진 속에서 승리의 사인(sign)을 받았습니다(7:10-14).
전투를 개시하기 전 그 밤에,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먼저 적진 속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적진의 현장에서 저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때에 너의 손이 강하여 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삿 7:11).
기드온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부하 부라를 대동하고 적진으로 내려가라고 하였습니다(삿 7:10). 기드온은 부하 부라와 함께 135,000명(삿 8:10)이 진을 치고 있는 적진의 현장으로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실로 이들이 진을 치고 있는 장면은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았다고 하였습니다(삿 7:12).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적진 속으로 뛰어든 기드온은 한 막사를 지나는 중, 깊은 잠에서 깨어난 한 적병이 꿈을 꾸다가 그 꿈 때문에 놀라서 깨어난 장면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병사는 옆에 잠자던 다른 병사를 깨웠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꾼 꿈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우리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우리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리고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져 버리더라.”고 하였습니다. 그 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옆에 동무가 해몽하기를, “이는 다름 아닌 이스라엘 사람 기드온의 칼날이다.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다는 꿈이다.”라고 하였습니다(삿 7:13-14).
그 날 밤 그 적진에서, 기드온과 부라는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삿 7:15).}
바로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하신 말, ‘오늘 밤에 적진 속에 들어가 저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고 하신 바로 그 말이었습니다(삿 7:11). 기드온은 저들의 꿈과 그 해몽하는 말까지 듣고 하나님께 경배했다고 하였습니다. 기드온의 300명 군대가 저들 보기에는 비록 보리떡 같이 보였지만, 그것은 실상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하나님이 쓰시는 기드온의 칼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그리고 그 300명 용사들에게 전쟁 승리의 사인(sign)을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2. 마침내 기드온은 그 밤에 전투를 개시하였습니다(삿 7:15-23).
저들 전술에 따르는 무기는 나팔과 빈 항아리와 그리고 항아리 안에 감춘 횃불이었습니다(삿 16). 저들은 100명씩 세 대로 나누어 적진을 포위하였습니다. 때는 이경 초 곧 밤 10시부터 11시 사이였습니다. 그 밤에 세 대가 일시에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부수고, 횃불을 하늘높이 쳐들었습니다.
그리고 외치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고 소리쳤습니다(삿 7:18, 20).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적군들의 마음을 혼란시켰습니다. 놀라 떨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칼날로 치고 죽이게 하였습니다. 또한 서로 부르짖게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죽은 칼든 적군의 수가 12만 명이나 되었습니다(삿 8:10). 전쟁은 그 날 하룻밤 사이에 끝이 났고, 남은 적병들은 도망치고, 기드온과 300명 용사들에게 승리가 왔습니다. 기드온과 300명 용사들은 도망치는 잔병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추격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삿 7:23).
사랑하는 여러분! 구약의 기록은 선민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의 역사기록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마 1:1)를 알려주는 구속역사의 계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들에게 침략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전쟁사는 오늘 신약 복음 시대에 일어날 사탄과의 싸움, 곧 그리스도 교회가 치를 신령한 전쟁, 영전(靈戰)을 알려주는 예표가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세례 요한 때부터 침노를 당한다고 하였습니다.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하였습니다(마 11:12).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하였습니다(마 10:34-36, 눅 12: 51-53).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눅 12:49).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복음전쟁, 영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바울도 우리의 싸움은 영전, 곧 사탄과의 싸움이라고 하였습니다(엡 6:10-20).
예수를 만난 사람은 그때부터 새로운 전쟁에로 부름받았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으로 하여금 전쟁하게 하려고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전쟁은 그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을 승리의 표징들로 무장시켜 주었습니다. 또한 그를 따르는 300명의 정예용사들을 붙여주었습니다.
저들은 미디안 연합군들이 볼 때 미미한 보리떡 같이 보였습니다. 마치 이 세상이 나사렛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업신여김과 같습니다. 그러나 한 덩어리의 보리떡이었습니다. 연합되고, 단결되고, 뭉쳐진 결사동맹의 보리떡이었습니다. 부르짖고 행동하는 보리떡이었습니다. 적진 미디안을 향하는 향방있는 보리떡이었습니다. 마침내 접전하고 마는, 부딪치고 마는 보리떡이었습니다.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고, 횃불을 쳐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기드온의 이름을 부르는 목적있는 움직임이요, 부딪침이었습니다. 마침내 적진을 쳐서 부셔뜨리고 마는 다이나믹한 생명력을 보유한 보리떡이었습니다.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삿 7:6)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물을 핥아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삿 7:7)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삼백 명은 머물러」(삿 7:8) 둔 자들, 곧 하나님의 손에 꽉 붙잡힌 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은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높이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기드온의 이름을 불렀던 자들이었습니다(삿 7:16, 19, 20, 22).
저들은 구원의 전사로, 복음의 전사로 선택되고, 부름받은 자들이 아닌가! 저들은 믿음의 사람들이 아닌가! 의를 행한 자들이 아닌가! 승리의 역사를 기록한 자들이 아닌가(히 11:30-31)! 확실히 살다가, 주님을 만난 자들이 아닌가! 저들이야말로 현재보다 천 배나 더한 승리의 기적을 체험한 자들이 아닌가!
기드온의 삼백 용사처럼
삿 7:1-8 / 양인순목사
“제자입니까” 라는 책을 썼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두 종류의 교회가 있다고 말합니다. 요양소와 같은 교회와 훈련소와 같은 교회입니다. 요양소와 같은 교회는 세상에서 지치고 힘들고 낙심한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통하여 힘과 위로를 얻는 교회입니다. 훈련소와 같은 교회는 믿음의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쓰임받기 위하여 훈련을 받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파송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지치고 힘든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축복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 있으면 뭔가 모자란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는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고 세상을 이끌어가는 영적인 제자를 양성하는 곳입니다. 세상과 싸워 이기는 영적인 군사를 키우는 곳입니다. 지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제자를 키우는 곳입니다.
저는 교회는 훈련소와 같은 공동체로 존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성지가족 안에 사랑이 넘치는 교제가 필요합니다. 더 넓게! 라는 표어처럼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하고, 축복하는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이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머물면 안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군사, 십자가 군병을 양성하는 훈련소가 되어야 합니다. 백향목처럼 올곧게 자라는 믿음의 거인들을 키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훈련소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사병을 길러내는 훈련소가 있고, 장교를 양성하는 훈련소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논산 훈련소나 미국의 Fort Jackson 같은 곳은 일반 사병을 양성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육군사관학교, 공군, 해군 사관학교, 미국의 West Point 같은 곳은 장교를 양성하는 곳입니다.
똑같은 군인이라고 어디서 훈련을 받느냐가 중요합니다. 군 복무를 마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반 훈련소에 훈련을 받으면 됩니다. 그렇지만 장군의 비전을 가진 사람은 사관학교에 가서 장교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은 영적인 전쟁터와 같습니다. 우리들이 믿음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언제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지 모릅니다. 언제 우리의 영적인 고지를 점령당할지 모릅니다.
어제 신문을 보다가 너무나 가슴 아픈 기사를 봤습니다.(사진) 서울 시내에 교회 십자가를 달았다가 문을 닫는 교회가 많다고 합니다. 통계적으로 100개 개척교회가 세워지면 5개 정도의 교회가 유지된다고 합니다. 서울에 매물로 나와 있는 교회가 300여개가 된답니다. 문제는 교회가 문을 닫으면 그것을 절에서 구입하여 포교원으로 사용한답니다. 기가 막힌 것은 교회의 상징과도 같은 십자가 철탑을 그대로 재활용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끝에 쇠막대를 덧붙여서 절을 표시하는 만(卍)자를 붙인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리해서 건축을 하다가 경매에 넘어가 이단 사이비 집단들이 교회를 구입하는 경우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이제는 십자가가 절로 바뀌는 안타까운 시대입니다.
우리 성지교회는 영적인 믿음의 장교를 양성하는 훈련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반 사병으로서 복무를 잘 감당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기왕이면 꿈을 가지고 장교로서의 복무를 감당하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 할 사명을 맡은 자들입니다. 그럭저럭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비전을 따라 살아야합니다. 세상의 고지를 점령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장교로 쓰임받기 위해 더 많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직 헌신예배를 드리고 세미나를 하는 것입니다. 강한 영적인 군사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강한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 집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이전에 훈련받았다는 추억으로 신앙생활하지 마십시오. 지금이 중요합니다. 왕년에 훈련받은 것은 이미 지났습니다. 근육은 쓰지 않으면 금방 약해집니다. 허벅지에 깁스를 하고 두 달만 가만히 있어보십시오. 다리가 가늘어집니다. 힘을 쓰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계속되는 훈련을 통해 믿음의 근육을 단련하지 않으면 쉽게 쓰러집니다. 영적 전쟁터에서 패하고 맙니다.
교역자로부터 중직들, 제직들, 교사, 찬양대, 성도...누구든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성경공부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에는 전쟁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사 기드온이 지휘하는 하나님의 백성과 미디안의 군대 사이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진행됩니다.
미디안의 군대는 무려 135,000명입니다. 이에 반해 기드온의 군사는 32,000명입니다. 실제로 미디안의 군대는 고도로 훈련된 정예화 부대입니다. 반면 기드온의 군대는 민병대 수준입니다. 훈련도 받지 않았고, 무기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의 군대 숫자를 줄이라고 하십니다. 미디안의 군대가 두려운 자는 돌아가라고 말하자 2만 2천명이 사라집니다. 이제는 만 명이 13만 5천명을 상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기드온에게 명령합니다. 물가로 가서 손으로 물을 떠서 혀로 핥아 먹는 자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물에 박고 먹는 자를 나누라는 것입니다. 결국 손으로 물을 떠서 먹은 자 300명을 남겨두게 하십니다. 이제는 300명대 13만 5천명의 싸움입니다. 기드온의 군사 1명이 미디안의 군사 450명을 상대해야 합니다. 제가 특공여단에서 훈련을 받을 때 구호가 <일당백>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특공병이 적어도 백 명의 적군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훈련한번 받지 못하고, 무기조차 없는 오합지졸과 같은 기드온의 군사들은 450명의 미디안의 군사들은 제압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그런데도 나팔과 항아리로 전쟁에 임한 기드온의 3백 용사가 메뚜기 떼처럼 많은 미디안의 군대를 물리칩니다. 기드온의 3백 용사가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 기드온의 삼백 용사로 거듭나기를 축복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본문 2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7:2)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의 13만 5천명과 싸우겠다고 자원한 3만2천명의 백성이 너무 많다고 하십니다. 그 숫자를 줄이라고 하십니다. 전쟁에서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습니다. 더욱이 메뚜기 떼처럼 많은 미디안의 군대를 대항하려면 더 많은 병력을 추가 모집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많은 숫자가 싸워서 이기면 너의 힘으로 승리했다고 자랑할까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숫자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크기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외형적인 것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오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고 여깁니다. 뭐든지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재물이 적은 것보다는 많은 것이 유익할 수 있습니다. 힘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유익할 수 있습니다. 아픈 것보다는 건강한 것이 유익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패러독스(paradox/역설)가있습니다.
세상은 강한 자를 원합니다. 힘이 있고, 권세 있는 자를 원합니다. 재력이 있는 자를 원합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사는 자를 출세했다, 성공했다고 추켜세웁니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스펙을 쌓고, 권력을 얻으려고 합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모두 나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꿈을 가지고 도전하는 것은 오히려 아름답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없는 성공을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 자기의 노력과 야망을 통해 얻어낸 성공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자수성가한 분들 가운데 끝이 좋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내 수고와 노력으로 내가 성공했다는 자만심, 교만함이 그 인생을 오히려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수성가(自手成家)가 아니라 신수성가(神手成家)를 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이룬 성취가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얻어낸 성취임을 알아야 겸손한 자가 됩니다. 진정으로 자만에 빠지지 않고, 겸손함으로 세상을 섬기는 자가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물량주의와 세속주의의 물결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나 성도들이 모이면 3B를 자랑합니다. Baptism(세례), 세례 받은 교인수가 얼마나 많으냐를 자랑합니다. Building(건물), 교회 건물이 얼마나 크고 좋으냐, 주차장이 얼마나 넓으냐를 자랑합니다. Budget(예산), 교회가 얼만큼의 예산을 집행하느냐를 자랑합니다. 교인의 숫자가 많고, 건물도 편리하고, 예산이 많으면 자랑스럽게 교회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면 왠지 주눅이 듭니다.
과연 하나님의 기준도 우리의 생각과 동일할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큰 교회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대형교회가 바른 역할을 하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작은 교회라고 다 좋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작아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라면 건강한 교회요 좋은 교회입니다. 교회의 크기를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미 별세하신 고 옥한음 목사님께서는 ‘평신도를 깨운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한국 교회가 양적 성장에 급급한 나머지 ‘3허(虛) 현상’을 자초했다” 3허는 허수(虛數)입니다. 교회가 자기 과시욕에 사로잡혀 교회 통계를 부풀립니다. 그래서 한국교회 출석하는 교인 수를 다 더하면 전체인구 보다 많다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집니다. 교회가 정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숫자놀음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허세(虛勢)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은데 사회에서 그 영향력이 미미함을 말합니다. 주일이 되면 적어도 팔백육십만명의 사람들이 교회로 밀물처럼 밀려듭니다. 예배 후에 세상을 향해 썰물처럼 빠져나갑니다. 소금은 염도 3%를 가지고 썩는 것을 방지하는데 이 땅에 약 18%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도 그 영향력은 너무나 약합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비난을 받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허상(虛像)입니다.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지 못해 불신자와 차별성이 없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에 일치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자들이 되어야 함에도 여전히 세속적인 가치와 세속적인 욕망의 노예로 살고 있는 안타까움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따라야 합니다. 크냐 작으냐, 높으냐 낮으냐, 배웠냐 못배웠냐, 가졌냐 못가졌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야 좋으냐,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우냐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숫자놀음을 원치 않습니다. 많을수록 겸손해야 합니다. 적어도 비굴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작아도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셨다면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성공은 결국 자기자랑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23-24)
사랑하는 여러분! 허탄한 자랑에 빠지지 마십시오. 우리의 지혜도, 용맹도, 부함도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의 자랑은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사도바울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만2천명을 삼백 명으로 줄이신 하나님의 의도는 바로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너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보다 앞서가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겸허하게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날마다 허탄한 자랑을 버리십시오. 하나님 없이 이뤄진 성공에 자만하지 마십시오. 더 겸손하게 허리를 동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손에 붙잡히십시오. 우리의 기대보다 생각보다 더 큰 역사와 기적을 이루십니다. 내 스스로 높아지기보다 주님의 높여주심을 기대하며 겸손함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용감한 자를 통해 역하사십니다.
하나님은 두려워 떠는 자를 원치 않습니다. 미디안의 군대가 두렵거든 떠나라는 기드온의 말 한 마디에 2만 2천명이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정신력이라면 전쟁터에 나가봐야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떠나면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고 숨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자신들도 모르게 하나님의 얼굴을 피합니다. 결국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죄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줍니다. 두려움이 없는 삶을 원하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사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다윗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두렵지 않습니다. 적군이 에워싸도 마음이 평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승리케 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환경이나 조건을 바라보면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요즘같이 험한 세상 얼마나 무섭습니까?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 사회 속에서 생존하는 자체가 힘듭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얼마나 힘겹게 공부를 하고 있습니까? 환경은 전보다 비교할 수 없이 좋아졌지만 마음은 쇳덩이가 누른 것처럼 짓눌려 있습니다. 별로 웃을 일도, 신나는 일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소망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나는 할 수 없어도 주님은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메뚜기로 여기는 자는 항상 두려움 속에 삽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똑같은 상황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바라보는 자,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자는 가나안의 모든 환경이 '그들은 내 밥이다‘라고 용기 있게 외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1:7) 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워 떠는 자가 아니라 믿음으로 용감하게 전진하는 자를 통해서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오늘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용감하게 믿음으로 도전하십시오. 그 걸음을 주님께서 인도하십니다. 승리의 삶으로 역사하십니다. 용기있게 전진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자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알아서 다 해주시겠지 라는 안일한 태도를 갖기 쉽습니다. 내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면 내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먼저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에 최선을 다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6-7절에 보면 최종적으로 선발된 삼백 명의 용사의 모습이 나옵니다. 탈락한 자들은 물을 보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물에 박고 정신없이 먹습니다. 그런데 삼백용사는 손으로 떠서 조심스럽게 먹습니다. 긴장을 하고, 주위를 경계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렇게 작은 것 하나에도 최선을 다하는 자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큰 문제 때문에 실패하거나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구멍하나가 댐을 무너뜨리듯 작은 것을 소홀히 여기다가 큰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걸려 넘어지는 것은 큰 돌이 아닙니다. 큰 돌을 보면 피하거나 조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찮게 여기는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집니다.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나 교회에서나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최선을 다하십시오.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큰일에도 충성하게 됩니다. 작은 것을 우습게 여기는 자는 큰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렇게 크게 들어 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시편 78편 마지막 부분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를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78:70-72)
다윗은 양무리를 치는데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양을 돌봅니다. 능숙하게 양들을 지킵니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크게 보십니다. 비천한 목동이지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다윗의 모습을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십니다. 성실한 다윗을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으로 삼아주십니다.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최고의 칭찬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를 들어 쓰십니다. 부족해도 연약해도, 남이 보기에 작은 일일지라도 주님 섬기듯 최선을 다하는 자를 기드온의 용사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기드온의 삼백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승리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 두려움 없는 용감한 믿음의 사람, 주어진 일에 주님을 섬기듯 최선을 다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아무리 우리의 주변상황이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기드온의 삼백용사에게는 여호와 닛시의 승리가 있습니다. 기드온의 삼백용사처럼 영적인 무장을 하고, 힘차게 세상에 나아가 승리의 깃발을 흔드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경영지침
이정익목사 / 사사기 7:1-8,9 요 6:7-13
오늘 제일 각광받는 분야가 경영전략 분야입니다. 학교에서도 가장 선호하는 학과가 경영학 분야입니다. 각 기업에서도 핵심부서가 경영 전략부서입니다. 사원 중에서 가장 명석한 사원들이 포진하고 있는 곳도 경영 전략실입니다. 오늘은 전략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비즈니스에도, 인생 운영에도, 재정 운영에도, 신앙 운영에도 이 전략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유명한 기드온 이야기입니다. 기드온은 사사였습니다. 왕이 없을 때 국가에 위기가 발생하게 되면 하나님은 지도자를 내 세우셨습니다. 그가 사사(士師)입니다. 여호수아 사후에서 왕정시대까지 350년간을 사사시대라고 합니다. 기드온은 기원전 1120년 경 활동하였습니다. 기드온이 300명 군대로 메뚜기 같이 많은 미디안 군대를 물리칩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용사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전략이 나옵니다. 그리고 기드온이 그 전략에 순종한 결과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 이야기의 관찰 포인트는 기드온이 처한 현실이 곧 나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사사 기드온
미디안 군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농사짓던 기드온이 사사로 부름을 받습니다. 부름 받고 전쟁할 수 있는 군대를 소집하니 32,000명이 소집되었습니다. 그들은 훈련도 준비도 되지 않는 민간인들입니다. 상대는 숫자도 엄청나지만 훈련된 상비군들입니다. 성경은 미디안군은 메뚜기 같았다(6:5, 7:12)고 했습니다. 낙타 수는 해변의 모래같이 많았다(7:12)고 했습니다. 전쟁은 불가능합니다. 현실이 암담하였을 것입니다. 그때 기드온은 무슨 심정이었을까요. 그래서 심각하게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현실은 언제나 크게 보입니다. 사람들이 그래서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고민과 갈등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숫자가 많다고 줄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적은데 하나님은 많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또 다른 갈등이 시작됩니다. 어느 이론을 따라야 합니까. 갈등 어디서 오는가 하면 불균형에서 옵니다. 양이 적고 수가 적을 때 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수와 양을 따지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을 채우느라 출혈하고 지출하고 안간힘을 다 씁니다.
여기서 주시는 메시지는 신앙 안에서는 양이나 수가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통해서 배우는 진리입니다. 요한복음 6장 오병이어 사건이 그런 경우입니다. 광야에 5천명이 모였습니다. 모두 굶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 주라고 하십니다. 찾아보니 오병이어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 드리며 “이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양이 터무니없이 적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 그런데 거기 모인 사람은 5천명입니다. 아이들 부녀자까지 합하면 3만 명 이상이 됩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양은 적은데 현실은 큽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심은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요한복음 2장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목격하였습니다. 4장에서 왕의 신하 아들이 죽음 직전에 치유 받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5장에서 38년 된 병자가 고침 받고 6장에서 광야에 5천명이 모여 있습니다. 여기에 그 많은 사람들이 왜 모여 있습니까. 그런 기적을 보았기에 오늘도 그런 기적을 또 보려고 모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하고자 함이라”고 성경을 말씀합니다. 그 말은 빌립이 오늘 여기서도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나 안 믿나 시험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현실은 광야입니다. 사람은 5천명이 모였습니다. 먹을 것을 구할 방법이 전무합니다. 빌립은 그런 현실을 만나자 지금까지 본 기적들은 순간적으로 다 잊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많이 모인 사람들만 눈에 보입니다. 그들을 먹이려면 3백 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까짓 5병 2어가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말합니다.
여러분 현실은 우리에게 고민하고 갈등하게 합니다. 현실은 더 크게 보이고 더 암담하게 생각되게 합니다. 빌립의 모습은 곧 내 모습이고 그의 생각은 곧 내 생각입니다. 기드온이 생각할 때 오늘 현실은 너무 컸고 우리 모습은 작습니다. 우리는 3만 2천명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도 많다고 줄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갈등이 오는 온 것입니다. 기드온이 그래서 고민하고 갈등했습니다.
순종
마침내 기드온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두려운 자는 다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3만 2천명가운데 2만 2천명이 돌아갑니다. 1만 명만 남았습니다. 기드온은 그렇게 많이 돌아갈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순간 기드온의 마음에 또 다시 두려움이 엄습해 왔을 것입니다. 3만 2천명도 적은데 1만 명으로 전투를 해야 하는가. 현실적으로 불가능 합니다. 전투는 그래도 병사가 많아야 합니다. 미디안군대와 비교해 보니 터무니도 없습니다. 너무 빈약하고 상대가 안 됩니다. 이 비교가 문제입니다. 비교해 보니까 내가 너무 초라합니다. 큰 사람 옆에 서 보니까 내가 너무 왜소합니다. 노후 준비가 상대와 비교해 보니까 너무 초라합니다. 딸을 시집보내려고 하니까 상대방이 너무 부자입니다. 거기에 비교하니까 우리는 너무 빈약합니다. 그러자 갑자기 초라해지고 왜소해 보이고 비굴해 집니다. 그 심정이 기드온의 심정입니다. 너무 초라하고 빈약하고 작습니다. 그러니까 더 두려움이 배가되고 떨림이 배가되고 흔들림이 더 커지는 것입니다.
또 다른 시험
그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또 다시 시험을 하십니다. 3만 2천 명 중 2만2천 명 돌아갔습니다. 겨우 1만 명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 1만 명가지고 전쟁하기로 일단 작정하고 결단하였습니다. 결단하고 나니까 마음이 평안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만 명도 많으니 더 줄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슨 대책이 있으신지 아무 말씀도 없이 그냥 줄이라고만 하십니다. 납득이 안 되는 기드온은 심각한 두려움에 빠집니다. 또 다시 갈등에 직면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때로 이런 갈등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암담한 현실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기도해도 아무 소리가 없습니다. 시간은 흐릅니다. 날짜는 다가옵니다. 새벽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를 다 해 보아도 아무 징조가 없습니다. 그때 오는 심각한 갈등이나 두려움이나 흔들림을 우리는 경험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한 가지 알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자세하게 말씀 안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난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것은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응답만 있다면 뭐가 두렵겠습니까. 그 심정이 기드온의 심정입니다. 한 가지 알 것이 또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살아갈 때 당장 무슨 응답을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세한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홍해를 건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설명이 없습니다. “홍해 앞에서 보란 듯이 서서 손을 번쩍 들라, 그러면 물이 좍 갈라질 것이다“ 그렇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면 얼마나 폼 잡고 손을 들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 지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홍해 앞에서 허둥댔고 주춤거렸던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때 훌이 우물쭈물하는 모세의 등을 강물로 떠밀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모세가 떼밀려 물을 밟자 홍해가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팔려갑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 어린 나이에 처음 부모 곁을 떠난 아이가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습니까. 그때 하나님은 “걱정 마, 내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니 기다려”, 그랬으면 얼마나 신나게 유혹받고 신나게 감옥에 들어가서 기다렸겠습니까. 그런데 아무 말씀도 없습니다. 그래서 현실은 암담한 것입니다. 죽을 목숨입니다. 믿음의 세계는 다 보이지 않습니다. 왜 보이지 않을까요. 다 보인다면 믿음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믿음을 요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기드온은 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납득은 안 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순종하기로 합니다.
이 태도가 중요합니다. 일단 지금은 납득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때서 일단 순종하기로 합니다. 성경을 읽는데 이 자세가 중요합니다. 납득이 안 됩니다. 그때 “성경이 뭐 이래”하고 집어던지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이해가 안 되지만 이 성경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일단 믿고 나아가 보자“ 이 태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32,000명 중 두려운 자는 돌아가라 했더니 22,000명이 돌아갔습니다. 만 명이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것도 많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1만을 놓고 테스트를 했습니다. 만 명을 물가로 데리고 가 물을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두 태도가 나왔습니다. 한 부류는 사주경계를 하면서 손으로 물을 움켜서 마셨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개처럼 무릎 꿇고 궁둥이 쳐들고 물을 마시는 자였습니다. 궁둥이 쳐들고 물 마신 자들은 다 돌려보냈더니 남은 자가 300명이었습니다. 기드온은 이 300명을 가지고 수십만 명의 미디안 군과 싸워 이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사기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메시지
하나님은 왜 군대의 수를 줄이라고 하셨을까요? 300명 가지고 전쟁이 가능합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왜 줄이라고 하셨습니까. 그 이유를 알아야 여기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전쟁은 네가 하는 것이 아니고 더구나 군대가 하는 것도 아니고 이 전쟁은 “내가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구경만 하라는 것입니다. 구경도 쉽지 않습니다. 궁둥이를 쳐들고 물마시던 9,700명은 전쟁하는데 방해만 됩니다. 그래서 300명만 남기신 것입니다. 그 300명을 용사라고 하는데 말이 용사지 그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항아리 300개를 들고, 횃불 300개를 들고, 나팔 300개를 들고 전쟁에 나간 것뿐입니다. 그것이 전쟁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럼 무엇입니까. 이 전쟁은 내가 한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구경만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리더로, 사업가로, 지휘관으로, 지도자로 성공하려면 다음 이야기를 생각해야 합니다. 기드온이 용사를 선택하는데 세 가지 테스트를 하였습니다. 하나는 정신입니다. 성공은 양이나 수에 있지 않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일은 양이나 수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자는 돌아가라 했습니다. 엘리야가 이방 선지자 850명과 싸울 때 그 싸움도 수에 있지 않았습니다. 850:1, 세상 이치로 보면 완패 당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이치로 보면 완승할 수 있습니다. 오병 이어 사건도 수에 있지 않았습니다. 정신이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자세를 보았습니다. 물을 마시게 하였더니 궁둥이를 쳐들고 무릎 꿇고 물을 마셨습니다. 지금은 전시입니다. 자세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선택하기 위해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밤새워 고기 잡는 베드로 일행을 관찰하셨을 것입니다. 밤새 그물을 던지고 또 던졌습니다. 지칠 만도 한데 중단안하고 던지고 또 던졌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다가가 “깊은 데로 가서 한 번 더 던져보라”고 하십니다. 이젠 잡힌다 해도 만사가 귀찮을 때인데도 “말씀하시니 한 번 더 던지리이다.”하고 또 던집니다. 이 태도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력서 내봐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조건이나 환경이나 이력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한 가지 보신 것은 그들의 정신이었고 자세였습니다. 이 자세가 문제입니다. 세상일이나 하나님 일에도 이 자세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이 자세를 봅니다. 하나님도 이 자세를 보십니다. 보시고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사명감입니다. 용사됨, 준비됨입니다. 300명은 사주경계를 하며 물을 손으로 떠 마셨습니다. 지금은 전시입니다. 안일하게 대처할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 일이나 삶이나 사업이나 모든 분야에는 이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우연히 재수 좋게 성공하는 법은 없습니다. 벤처 기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식 기술 집약적 기업을 벤처기업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사명과 부지런함이 모아져야 하는 분야입니다. 벤처기업을 한창 띄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후죽순처럼 벤처 열풍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열기가 식어지자 벤처기업들이 쓰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쓰러지는 순서가 사무실이 번쩍번쩍 한 순서대로, 인태리어 호화순위로, 사장실 넓은 순서대로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망하는 회사의 특징은 화장실이 더럽고, 사무실이 지저분하고, 직원들이 불친절하고, 회의가 길고, 상하 위계질서가 문란함 때문이라고 합니다. 망하는 기업인은 사장이 정치와 도박에 관심을 두고, 역술인을 의존하고, 주민 등록지를 자주 옮기고, 자주 자리를 뜨고, 호화 생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세상에서 사업을 하던 신앙생활을 하던 성공했다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남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두 전투생활한 분들입니다. 궁둥이 쳐들고 물마시고 두려워 떨고 편히 쉬고 잠잘 것 다 자는 사람은 어림도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달려갈 길 다 가고 믿음을 지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말은 “나는 치열하게 싸웠고 힘썼고 최선을 다하며 노력했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전쟁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에서 그리고 사회생활에서 모두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방법은 본문을 통해서 배우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삶의 승리는 수에나 양에 있지 않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전략이 있었고 그 전략을 순종함으로 길이 열리고 목적이 이루어짐이 있었습니다. 이런 은혜가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적진을 치라
서명성목사(팔로마한인교회) / 삿 7:1-14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없이 몇 주를 지나가다 보면 1등 당첨금이 1억불이 넘을 때가 있습니다.그러면 복권 사는 열기가 갑자기 생깁니다. 평소에 복권을 잘 사지 않는 분들도 혹시나 하여 사기도 합니다. 그럴 때 어떤 분이 “하나님 이번 복권에 당첨이 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줄 알겠습니다”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들으실까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기도를 드렸다고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면 그 일이 이루어집니다. 사실 그런 기도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본문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기드온이 드렸습니다. 싸움에 나가라고 하니까 나름대로 확실한 증거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부탁을 합니다.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6:37)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양털만 물에 젖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확신이 안 생깁니다. 너무 쉬운 부탁을 했나 하여 두 번째 구합니다.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6:39) 이번에도 하나님은 그 부탁을 들어주셨습니다. 기드온의 행동은 믿음의 행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여줍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성도들이 이왕이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되고 하나님 뜻대로 행하시면서 하나님의 크신 역사에 동참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보시기에 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7년 동안 백성들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는데 이번에는 미디안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미디안뿐 아니라 아말렉과 동방 사람까지 가세함으로 이스라엘의 괴로움은 어느 때보다 극심하였습니다. 그들이 올라와 토지소산을 멸하며 이스라엘에 식물을 남기지 않으며 무수한 사람과 약대를 가지고 올라와서 이스라엘 땅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피해 산으로 가서 구멍과 굴과 산성을 만들이 피신하고 적들이 ‘메뚜기 같이’왔다고 묘사하는 것은 예언서에서 ‘여호와의 심판의 날’을 연상시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사사로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너무 많은즉”(7:2)
기드온이 자기 집에 있던 바알의 단을 허물며 성령에 충만하여 이스라엘을 모으매 그들이 미디안과 싸우고자 미디안의 진 맞은편에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상식과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미디안을 대적하기 위하여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총동원해도 시원찮을 판에 기껏 싸움에 나가겠다고 자원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들어 돌려보냅니다.기드온이 모집한 사람들의 선발 기준은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와도 좋다면서 가능하면 많이 뽑으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미디안의 십만이 넘는 대군과 싸우자면 더 모여야 하는데 하며 기드온은 삼만 이천 명도 오히려 작다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삼만 이천 명이 너무 많다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은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입니다. 신명기 8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하신 일들을 잊고 모든 것들을 자신들의 공로로 돌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경고하며 그럴 경우에 그들이 망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신 8:17-20). 여호와의 관심은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에도 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에게 섬겨야 할 신이 누구인지를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 우상 숭배에서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우선 목적입니다. 이런 여호와의 참 뜻을 기드온은 많은 군대 수의 모집과 양털 시험 등으로 자꾸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걱정하시는 것은 이 백성들이 승리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스스로에게 돌릴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숫자를 줄이게 하십니다. 민수기 20장에서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치면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마치 자기가 기적을 일으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것처럼 교만한 모습을 보이다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다윗이 잠시 교만하여져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인구조사를 했다가 애꿎은 백성들이 칠만 명이나 죽는 대가를 치렀습니다.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가 세 번 기도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은 사역하면서 자기가 너무 교만하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이 그 가시를 주셨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바울은 비록 자기 몸에 여전히 그 가시가 있었지만 자기를 계속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도리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벧전 5:5,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내가 무엇을 좀 한 것을 인하여 아는 것을 인하여 가진 것을 인하여 교만하지 말고 자기를 낮추어 육신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을 본받으며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문제점을 지적하신 후에 해결책을 제시하십니다.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떠나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진 친 곳은 ‘하롯샘 곁’인데 하롯은 ‘두려움’이라는 뜻으로 기드온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두려움의 샘’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을 돌려보냅니다. 이것은 신명기에서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신 20:8)라고 한 율법 정신을 반영한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자들로 인해 남아있는 자들의 사기까지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칠년 동안 미디안에게 철저히 눌려 지냈습니다. 감히 그들과 대항하여 싸울 생각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기드온이 모이라고 해서 왔지만 우리가 그들을 이길 수 있을 까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이만 이천 명이 돌아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미디안의 군대에 비하여 숫적 열세인데 삼분의 이가 돌아갔으니 기드온은 적지 않게 놀랐을 것입니다.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죽으면 죽으리이다 담대하게 나갔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담대해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금신상에 절하라는 왕의 명령을 거절하다가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지게 될 위험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왕 앞에서 담대히 자신들의 입장을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즉 우리가 불에 타죽는 다할지라도 우리는 우상들에게 절하지 않겠습니다. 담대히 선언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담대함’이란 단어에는 ‘현재의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정적인 사람,소극적인 사람, 현재의 상황을 이유로 핑계만 대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담대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아직도 많으니”(7:4)
이제 기드온은 남은 일만 명을 데리고 싸우러 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또 막으십니다. 아직도 많으니 남은 만 명을 물가로 데려가라고 하십니다. 만 명이라는 숫자는 누구의 힘에 의해 승리가 이루어지는지 판단하기 애매한 숫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군대의 믿음 뿐 아니라 그들을 이끌고 갈 기드온의 믿음을 test 하고 계십니다. 가나안의 낮은 뜨겁습니다. 얼마나 목이 마르겠습니까? 물가로 가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얼굴을 물에 대고 정신없이 물을 마십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손으로 물을 떠서 혀로 핥아먹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개가 핥는 것처럼 그 혀로 물을 핥는 자를 따로 세우고 다른 사람들은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왜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자는 싸움에 적합지 않다고 하십니까? 자세로 본다면 얼굴을 물에 박고 먹는 자는 물을 마시느라고 주변 상황을 볼 수 없습니다.그러나 손으로 물을 떠서 혀로 핥는 자들은 마시는 동안에도 주변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설명은 9700명은 무릎을 꿇고 마셨고, 300명은 혀로 핥았는데 하나님은 적은 쪽을 택하셨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왜 삼백 명을 택하였는지 성경은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입에 대고 핥아먹은 자 300명을 구별하여 세우셨다는 점입니다.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7:9)
여호와께서 군사를 300명으로 줄이심으로써 전쟁 준비를 끝낸 기드온에게 적진을 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해 역사하심을 분명히 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하나님의 전투개시명령에도 불구하고 적진을 향해 나아가지 못합니다. 300명으로 십만 대군을 상대하여 싸워야 합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기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신 것은 인정하지만 이스라엘 한 사람이 미디안 군대 333명씩을 물리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자 두려워합니다. 말씀을 듣고도 내려가기를 주저하자 하나님은 부하인 부라를 데리고 그 진으로 내려가서 미디안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기드온은 부라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대로 미디안 진으로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곳에 그가 본 것은 메뚜기떼 같은 사람들과 모래알같이 많은 약대들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기드온은 사람들을 돌려보낸 것을 후회했을지 모릅니다. 적의 진영에 내려가 둘러보는데 마침 어떤 미디안의 병사가 자기가 꾼 꿈을 자기 친구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지더라. 옆에 있던 친구가 그 꿈을 해석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어. 우리가 그와 더불어 싸우면 죽을 거야. 그들의 대화는 미디안 군사들이 지금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소심한 기드온을 위하여 이렇게까지 배려하셨습니다. 기드온은 꿈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 이스라엘이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경배를 드립니다. 전쟁에 승리하는 비결 중의 하나가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기가 떨어지면 아무리 많은 병력과 무기가 있어도 싸움에 이기지 못합니다. 넓은 골짜기를 다니는데 하필이면 미디안 군사가 꿈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고 그 이야기가 불안에 빠진 미디안을 물리치는 기드온 군대에 관한 것입니다. 우연인 것 같지만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그런 말을 기드온으로 하여금 듣게 하셨고 이로 인하여 기드온은 마음을 담대히 하고 싸움에 나갈 각오를 새로이 합니다. 기드온은 진중에 돌아와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느니라”고 합니다. 비로소 기드온은 두려움 속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전쟁을 치를 준비를 마칩니다. 믿음의 갈등이 끝났습니다.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는 믿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갑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1)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과 미디안 모두에게 여호와의 능력과 그분만이 진정한 예배의 대상임을 알리려고 하십니다. 이것은 이해하는데 기드온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기드온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한다면 그들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여호와와 멀어져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묵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무엇 때문에 가나안에 왔는지 알지 못하고 그저 가나안의 풍요로움에 빠져 허우적거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나안을 허락하시는 것은 이스라엘만 그 땅에서 단지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가나안족속과의 싸움은 죄와의 싸움이요 가나안을 하나님의 구별하시는 거룩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싸움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전쟁의 성격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1절에서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부름으로써 이 전쟁은 단순히 미디안과의 전쟁이 아닌 바알과의 전쟁임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싸우시는 전쟁이라는 말입니다. 이 전쟁을 통해 여호와만이 참 신이시며 그분만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능력이 있는 분이심을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기드온은 여호와를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는데 어려움을 나타냅니다.양털 시험에서도 주관적이고 독단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진노하시지 않고 요청을 들어주십니다. 군대의 수를 줄인 후에도 기드온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고 그들에게 여호와를 다시 알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복 받고 살게 하려 하십니다. 그들이 계속 우상을 섬길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저주와 고통뿐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은혜와 인애와 자비와 인내심 등 그분의 많은 속성들이 본문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어떻게 다루셨습니까? 기드온하면 300명의 용사와 더불어 10만의 미디안 연합군을 물리친 영웅으로 떠울리지만, 사사기 6장과 7장에 나타난 기드온은 어떻습니까? 와!정말로 기드온 믿음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까? 아닙니다. 그는 미디안 사람들이 두려워 포도주 틀에 숨어 밀을 타작하던 겁쟁이입니다. 사명을 주셔도 의심과 두려움 속에 계속해서 주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연약한 자를 큰 용사라고 부르시며 비전을 주셨습니다.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바위 위에 있던 제물을 불로 태우는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기드온의 불신앙, 주저함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을 용납하시고 참으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대단하다고 여겨집니다. 은혜로 기드온을 부르시고 당신의 뜻대로 기드온을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 얼마나 저희들에게 위로를 주는지 모릅니다. 기드온은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이니까 그렇지 나 같은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기드온과 같은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너무도 귀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도 저희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저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주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합니다.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달렸기에 이스라엘은 자신이 가진 것을 생각하지 말고 그저 하나님을 의지하고 겸손하게 그분만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없이도 당신의 뜻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려고 할 때 우리를 기뻐하시고 변화시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능력을 주십니다.미디안 군사가 기드온을 언급할 때 보리떡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보리떡은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음식입니다. 그 순간 기드온은 자기를 보게 됩니다. 기드온도 자신을 별 볼일 없는 보리떡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미디안은 그를 하나님의 칼날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보리떡 같은 기드온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안 돼 하며 계속 주저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자신이 보리떡 같은 존재임이 깨달아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사용하신다는 확신이 올 때 우리는 감격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역사는 대부분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숫자가 많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대단하다고 반드시 하나님이 쓰는 것은 아닙니다. 요즈음처럼 성공지향적인 세대에서 크고 많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있는 사람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성별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두려워 떠는 다수”를 통하여 역사하시기보다 헌신된 소수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능력 있는 사람들은 교만해지기 쉬우며 두려워서 떠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사기조차 꺾어놓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요 공중 권세 잡은 마귀와의 영적인 싸움입니다.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환경을 초월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에 의지할 때 영적인 능력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습니다. 기드온과 그 삼백 용사가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삼백 명으로 십만 대군을 무찔렀습니다. 그것도 항아리와 나팔과 횃불을 가지고 막강한 미디안의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우리의 싸움도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고 그의 때를 기다리며 그의 방법을 알고 순종해야 합니다.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만을 의존하고 신뢰하기 원하십니다. 숫자로만 세상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비밀된 힘을 보여줄 때 세상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그저 숫자나 늘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알지 못하는 신비스런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우리의 부족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능력의 지극하게 큰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고후 4:7).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대는 악한 세대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리는 세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한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담대함을 가지고 영적인 능력과 더불어 헌신된 정예용사가 되어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이 예비하신 상급을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00명으로 이긴 싸움
삿 7장 6~8절 / 박종순목사
창세기25장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그두라를 후처로 취한 기사가 있습니다. 그녀에게서 태어난 자녀가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입니다. 후처의 소생 미디안의 후손들이 훗날 이스라엘의 괴롭히는 미디안 족속이 된 것입니다. 창세기 16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갈을 후처로 취하고 거기서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인데 그 후손이 오늘 아랍인들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중동지방의 관행은 일부다처가 허용되고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아브라함이 후처로 취한 여자들에게서 낳은 미디안이나 이스마엘은 훗날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어 그들을 괴롭히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잘못된 선택이 가져온 결과인 것입니다.
미디안은 광야를 주름잡는 부족입니다. 싸움에 능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본문은 기드온이 300명 군사로 미디안과 싸워 승리했다는 승전기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드온의 활동에 관한 기사는 사사기 6:∼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드온은 어떤 사람인가, 어떻게 이겼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기드온은 누구인가?
1) 민족의 우기를 구원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6:3을 보면 이스라엘이 땅에 씨를 뿌리고 난 뒤 미디안, 아말렉, 동방사람들이 공격을 시작했다고 했고 4절을 보면 진을 치고 소산을 짓밟고 식물을 약탈하는가 하면 양, 소, 나귀등 가축도 모조리 약탈해 갔습니다. 5절을 보면 그들의 수를 메뚜기 떼와 같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메뚜기는 황충을 의미합니다. 수천만 마리가 떼를 지어 날아옵니다. 크기는 우리나라 메뚜기의 1.5배 내지 2배 가량됩니다. 황충이 떼는 푸른 빛 나는 모든 식물을 모조리 갉아 먹고 지나가기 때문에 완전히 폐허만 남게 됩니다. 쳐들어온 그들을 메뚜기 떼로 비유한 것은 그들의 잔혹성과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이스라엘은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하기 그지없었다고 했습니다. 위기는 크고 싸워 이길 힘은 없는 절대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치는 표류하고 당리당략 사리사욕에 완전히 눈이 어두워 졌습니다. 경제는 추락하고 사회는 어두워 가고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민심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드온 시대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때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부름받은 사람이 기드온입니다.
2) 농부였습니다.
6:11을 보면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닥치는 대로 착취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을 피해 포도밭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직업정치인도 아니었고 정규군인도 아니었습니다. 땅에 씨뿌리고 거두어 타작하는 단순 노동자, 농부였습니다.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치꾼은 안됩니다.
제가 바라는 정치인 상은 이렇습니다.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 거짓말을 안하고 말을 바꾸지 않는 사람, 자기가 한 말은 책임지는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사람." 기드온은 어려서부터 책상 위에 민족지도자, 정치가가 되기 위해 표어를 써 부친 일이 없습니다. 후원회를 만든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갑자기 민족을 구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지도자는 하나님의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사울왕은 사람들이 세워 왕이 됐고 다윗은 하나님이 세워 왕이 됐습니다. 사울은 사람이 뽑았고 다윗은 하나님이 뽑았습니다. 사울은 인기가 있었고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통치기간은 똑같이 40년이었지만 사울은 당대로 끝났고 다윗은 대를 이어 그 후손이 왕통을 이어 받았습니다. 기드온 역시 하나님이 전격적으로 부른 사람이었습니다.
3) 큰 용사였습니다.
12절을 보면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기드온은 전쟁을 경험한 일도 없었고 군사 훈련을 받아 본 일도 없는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을 찾아온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 "큰 용사"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기드온이 가지고 있는 큰 용사, 큰 지도자, 큰 인물로서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큰 용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군인의 생명은 용기입니다.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기에 부르신 것입니다.
4)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6:34을 보면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신 성령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심으로 그는 민족지도자로 나설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만 그들은 밖으로 나가 예수부활사건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겁나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그들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믿음과 용기가 생기면서 나가 예수부활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그들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입니다. 기드온도 성령충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지도자가 맞춰야할 덕을 골고루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2. 어떻게 이겼을까요
1) 부르짖었습니다.
6:6을 보면 "미약함이 심한지라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고 했고, 6:7 역시 "미디안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고 했습니다.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약할 때 어려울 때 위기에서 기도하면 하나님은 들어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미디안이 쳐들어 왔을 때, 모압이 쳐들어 왔을 때, 블레셋이 쳐들어 왔을 때, 아람이 쳐들어 왔을 때, 그 때마다 그 위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위기를 벗어나게 하셨고 싸움에 이기게 해 주셨습니다.
히스기야왕은 앗수르 대군이 쳐들어 왔을 때 회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응답으로 앗수르 산헤립이 이끌고 온 18만 5천명 대군이 죽고 물러가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불치병에 걸려 죽게 됐을 때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를 들으시고 히스기야를 살려 주셨습니다.
기도의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 누구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왕도, 대신도, 농부도, 선지자도, 과부도, 여자도, 남자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둘째, 누구에게나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기도할 이유가 있고 기도할 내용이 있습니다. 셋째, 누구의 기도나 응답하셨습니다. 왕의 기도, 신하의 기도, 부자의 기도, 가난한 사람의 기도를 다 응답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힘써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안에만 부르짖는다는 구절이 42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시편 77:1을 보면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라고 했고 시편 81:7을 보면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58:9을 보면 "네가 부르짖을 때에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위기가 물러갑니다.
6·25전쟁 3년 동안 투입된 한국군 총수는 185만명이고 미군은 173만명이라고 합니다. 미군 전사자 13만명에 미군목사도 14명이 죽었습니다. 우리는 173만명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친미도 숭미주의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켜주었고 생명을 바쳐 도와준 그 은혜는 알아야 합니다. 가장 질 나쁜 행동이 은혜를 배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6·25의 민족적 위기는 한국교회의 기도가 없었다면 물러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며칠 전 북한을 돕는 NGO의 대표를 만났습니다. 수십번 북한을 드나드는 사람입니다. "6·25때 우리가 공산화되었다면 지금 북한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가난했을 것이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공산화되지 않은 것, 전쟁에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한국교회의 기도 응답이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합시다. 막힌 길을 위해 기도합시다. 직면한 위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2) 300명으로 이겼습니다.
7장을 살펴보면 미디안과 싸우기 위해 나선 지원명이 3만 2천명이었습니다. 미디안에 비하면 극히 작은 수입니다. 다시 그들을 추리고 추려 1만명으로 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골라 작게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7:4을 보면 1만명이 남았을 때 하나님은 "아직도 많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수가 많으면 수가 많아 이긴 줄 알기 때문입니다. 수가 많으면 통솔하기가 어렵고 힘을 모으기가 어렵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하나님의 승리는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마귀는 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군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 군대 마귀가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물러가는 것입니다. 숫자가 승리의 요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00명으로 구성된 특공대가 한일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최신 핵무기나 첨단 과학 무기로 무장한 것이 아닙니다. 유격 훈련이나 게릴라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007영화의 제임스 본드처럼 기발한 신무기로 무장한 것도 아닙니다. 7:20이하를 보면 "나팔불고 항아리 깨트리고 횃불을 흔들고…" 도대체 전쟁에 이기겠다는 건지 목숨을 내놓겠다는 건지 이해가 어려운 일을 그들이 한 것입니다. 천상 300명으로 치루는 전쟁이라면 기습전이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체를 드러내기에 가장 좋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겼습니다. 나팔을 분 것은 선포입니다. 그리고 승리의 개선가입니다. 싸움에 진 군사는 나팔을 불지 않습니다. 이긴 쪽만 나팔을 붑니다. 싸우기도 전에 미리 나팔을 분 것은 미리 승리를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겼다. 승리는 우리 것이다.'라고 믿고 선포한 것입니다.
항아리를 깨트린 것은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나를 깨트려 승리의 제물 삼겠다. 우리가 너희를 항아리 깨트리듯 깨버리겠다'는 것입니다. 횃불을 들고 흔든 것은 어둠의 세력을 내쫓고 광명천지를 만드는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2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심으로 도망치고 이길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300명 때문에 그들이 이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300명 용사들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누구의 도구가 되길 원하십니까?
누구를 위해 일하길 원하십니까?
각각 집으로 돌아간 31,700명이 되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승리를 이끌어 낸 300명이 되길 원하십니까?
그 날 그 싸움은 300명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오늘도 용기와 믿음과 지혜로 뭉친 기도의 사람 300명만 있으면 싸움은 승리로 끝납니다. 300명은 3,000명 30,000명이어도 상관없습니다. 그 믿음, 그 용기, 그 기도의 사람이면 이길 수 있습니다.
믿음의 함수관계
삿 7장 2~8절 / 이동규목사
어린아이를 키우다가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서너 살이 되면 이제 슬슬 독립성이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안돼, 몰라 싫어 라는 말이 입에 붙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손을 붙잡고 가자고 해도 자기가 혼자 가겠다고 합니다. 그냥 막 뛰어 놉니다. 뭐든지 제 뜻대로 제 맘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위험한 상황인데도 그냥 천방지축으로 뛰어 다닙니다. 불안해요. 그냥 처박히거든요. 저는 이렇게 분잡스럽고 고집이 센 아이가 있다면 거친 들판으로 데리고 가라고 권합니다. 자기만 믿고 날뛰던 아이가 갑자기 엄마나 아빠를 찾고 조심스러워 지기 때문이지요.
제가 어느 해인가 아이들을 데리고 여름수련회 캠프를 떠난 적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을 때 그리 분잡스럽고 격렬하게 놀던 아이, 남 쥐어박고 과감하게 놀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들도 못 따라 오게 해 놓고 아이들만 데리고 개울가 외나무 다리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통나무를 엮어 다리를 놓은 곳입니다. 물론 밑으로는 개울물이 흐르고 있지요. 사실 건너려면 건널 수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신뢰감이 많은 아이, 얌전한 아이들은 자~ 나를 따라 건너자 이러니 모두 척척 잘도 건넙니다. 그런데 격렬하게 놀던 녀석 천방지축으로 험하게 놀던 녀석이 오히려 겁을 먹고 외나무 다리를 못건너는 것이었습니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애정이 부족하고 신뢰감이 부족한 아이었습니다. 굉장히 공격적이고 활발하지만 사실은 겁쟁이요, 사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였던 것입니다. 부모를 신뢰하면 목사님도 신뢰하고 외나무 다리도 신뢰하게 되어있거든요. 부모와의 애정이 결핍되고 신뢰가 결핍되니 목사님도 외나무 다리도 사회도 신뢰하지 못하는 거지요.
신뢰의 문제입니다. 신뢰감이 부족하면 그렇습니다. 문제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조건, 환경 탓 하지만 진짜 문제는 신뢰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 고난의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감사와 찬송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신리하지 못하는 사람은 비단길을 깔아 놓고 꽃밭을 만들어 주어도 원망이요 불평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기드온의 군사와 미디안과의 전쟁을 보면서 이 사실을 더 확연하게 깨닫습니다. 숫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힘겨운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핵심문제라는 걸 오늘 말씀은 밝혀 주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원래 기드온을 쫓은 군사는 3만2천명이었습니다. 상대 미디안의 군사는 13만5천명입니다. 4대 1의 싸움입니다. 승패는 불을 보듯이 환한 것이지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두 번의 시험으로 다 탈락 시키고 달랑 300명만 남겨 놓고 이 걸로 전투를 하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과 기드온과의 대화 내용은 들어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
그래서 두려워 떠는 자를 탈락시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돌아간 자가 2만2천명! 1만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많다고.. 그래서 군사들에게 시냇가의 물을 먹이면서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자는 탈락시키라 햇습니다. 전쟁에 임한 자 치고는 너무 태평스럽고 안일 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9천7백명이 탈락하고 달랑 3백명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 3백명은 물을‘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입니다. 철저한 임전태세가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용사들입니다. 거의 불가능의 숫자이지요. 불가능의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인간이 불가능하다 하는 상황!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안된다는 상황으로 철저히 몰고 가시는 겁니다. 그 지점이 인간이 항복선언을 하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너를 좇는 백성이 너무 많다.” (2절) 그러면 ‘나는 안 움직이겠다’ 이 말입니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2절) 내가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0.1%라도 존재하면 인간은 결과를 놓고 내가 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홍해를 가를 때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 (출 13-14)
인간은 아전인수의 명수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스스로 아예 불가능의 상황을 설정하시는 것입니다. 이 만하면 인간이 자기 힘으로 했다라는 말은 못하겠지? 그래서 하나님은 홍해를 가를 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불평과 원망과 삿대질 하는 이스라엘이 홍해의 물한 방울이라도 떠냈다면 자기들이 홍해를 갈랐다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기드온 시대의 이스라엘은 1/10 정도의 병력만 되도 자기들이 위대한 전략을 써서 이겼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가능성 제로의 상황, 즉 450:1 즉 0.002의 확률 상황을 만드는 것입니다.
내 땅과 하나님의 땅은 반비례관계입니다. 인간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은 반비례관계입니다. 나에대한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반비례관계입니다. 시이소는 반비례관계입니다, 내가 낮아질수록 하나님은 높아지고 커집니다. 반대로 내가 커지고 높아질수록 하나님은 낮아지고 작아집니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2절)
자긍은 자기를 믿는 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는 게 아닙니다. 결과를 믿음의 행위라 고백하지 못하는 겁니다. 내 힘으로 된 것이니까요. 이런 곳에서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 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불가능하다는 항복 선언에서 가장 크게 역사됩니다. 전적인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확률 0%면, 믿음은 100%입니다. 확률 10%면 믿음은 90%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 것입니다. 믿음의 함수관계는 그런 것입니다.
숫자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믿음의 내용이 어떠하냐에 따라 위력이 나타납니다. 믿음과 현실의 함수관계, 최고변수는 바로 믿음입니다.
성경은 이 원리를 일관되게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구원은 단지 의인 10명이면 가능했습니다.(창19:32) 여리고성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교만한 이스라엘은 아이성의 전투에는 단지 3천명만 파견합니다. 결과는 대참패입니다.(수7:4) 숫자가 작아도 믿음만 있으면 승리합니다. 믿음도 없으면서 객기를 부리면 아이성처럼 당연히 대참패입니다. 숫자의 많고 적음 보다 믿음의 위력, 믿음의 용량에 달려 있다 이 말입니다.
믿음과 물량(조건)과의 함수관계를 밝히자면 이렇게 정리 될 수 있습니다.
둘 다 풍성하면 필승! 最善입니다. 여리고 성 함락의 사례가 그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숫자나 물량, 조건과 환경이 아무리 부족하고 열악해도, 믿음이 크면 승리! 次善입니다. 기드온의 3백군사가 그 사례입니다.
숫자나 물량, 조건과 환경이 아무리 넉넉하고 풍성해도, 믿음이 적으면 패배! 次惡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의인 10명이 없어 멸망한 것입니다.
둘 다 열악하면 필패! 最惡입니다. 아이성의 패배가 그 경우입니다.
오늘 기드온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멧세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구원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믿음의 정예 용사만이 효력이 있다.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라 이것입니다.
내 능력과 믿음은 반비례관계입니다. 무기력과 믿음은 정비례관계입니다. 위기의 상황과 믿음은 정비례입니다.
그래서 급하면 믿음이 커집니다. 급하면 전폭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절대절망의 순간이 닥쳐야 인간은 잔 수를 쓰지 않습니다. 내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까닭에 인간이 손을 완전히 놓은 순간에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 끝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인간이 포기 선언 항복 선언을 한 그 곳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천막 지붕에 물이 고이게 하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중간에 지줏대를 낮추어 보십시오! 그러면 빗물이 고이게 될 것입니다. 아니 완전히 빼버리면 더욱 좋습니다. 물이 가득 찰 것입니다.
까닭에 미리 자신의 공로를 제해버리십시오. 미리 인간의 한계상황임을 고백하십시오. 미리 무기력을 선포하십시오! 미리 항복 선언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 찰 것입니다. 믿음의 위력이 그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키워드입니다. 믿음이 상황을 좌우합니다. 믿음이 승패를 좌우합니다. 조건과 환경의 열악(劣惡)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믿음의 과소만이 문제가 될 뿐입니다. 환경의 호불호(好不好), 절망의 상황과 희망의 상황 이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최악의 상황이 오히려 믿음의 위력을 나타내는 데 더 호조건일 수도 있습니다. 그 때에야 말로 하나님만이 홀로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야 만인 인간의 자기 이성에 대한 항복 선언을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야 만이 인간은 자기 공로의 손을 놓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믿음입니다. 키워드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상황을 좌우합니다. 믿음이 승패를 좌우합니다. 문제는 신뢰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상황을 좌우합니다.
전폭적인 신뢰는 전폭적인 승리를 가져옵니다. 부분적인 신뢰는 부분적인 승리를 가져옵니다. 신뢰의 상실은 승리의 상실을 가져옵니다.
역경의 상황, 위기의 상황, 포기의 상황, 열악한 환경! 절대 절망의 상황,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상황, 최악의 상황! 기뻐하십시오! 믿음의 역사가 일어날 시기입니다. 믿음의 위력이 나타날 시간입니다. 믿음의 기적이 일어날 시기입니다. 대단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날 시점입니다. 바로 지금이 그 때입니다.
(기도문)
주님 전무후무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숫자의 적음을 넘는 태산 같은 믿음을 주옵소서.
환경을 열악함을 아랑곳 하지 않는 큰 믿음을 주옵소서.
절대절망을 훌쩍 넘는 큰 믿음의 용사들이 되게 하소서.
절체절명의 위기의 상황을 반전시키는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이름으로기도드립니다 –아멘-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삿 7장 2~14절 / 서정호목사
지난 번 수능시험을 보기 전날 인터넷에 '꼴등에서 1등이 된 ‘심재웅’이라는 학생'을 소개했는데 초등학교 5학년까지 반에서 꼴등하던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서 전교 1등을 했다는 것입니다.어떻게 해서 1등을 했느냐? 첫째는 직장에 다니는 엄마가 먼저 공부를 하고 엄마가 아이와 같이 공부를 했습니다.'엄마의 공부'의 원칙은 오래 걸리더라도 함께 공부하며 반복하고 또 반복하였으며 급할 것 없었습니다.당장 성적을 올리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고, 기초를 다지는 것이 목표였습니다.가르침에 임하는 엄마부터 조급함을 버렸습니다.암기 과목은 진도에 맞춰 차분하게 외웠고,과학처럼 원리 이해가 필요한 과목은 실험 도구를 사와 직접 실험도 해봤습니다.그래서 반복하고 반복을 하니까 아들이 "엄마한테'이것은 아는 것인데 또 얘기해?'라는 소리를 정말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엄마는 그만큼 아들의 기초를 다지고,개념을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반복 교육을 많이 했고 두번째는 공부하는 목표를 세우고,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을 했습니다.엄마는 아들 내면에 공부하고 싶은 잠재력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고,"이 아이 안에 잠재된 공부에 대한 욕심과 재능을 발견하고 끌어내 주는 동기 부여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성적이 턱없이 낮았지만 책상앞에 이상적인 목표를 적어 보자고 권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지금도 심군의 책상 앞에는 목표가 붙어 있는데,대학을 어디로 갈 것인가?'큰 목표'가 있고, 다가오는 기말 고사에서 몇 등을 할 것인가? '작은 목표'와,한 달 동안 과목별 진도를 얼마나 나갈 것인가?'한달 목표'가 있는데 이렇게 목표를 책상 앞에 붙여두는 습관은 엄마와 공부를 시작했던 5학년 때부터 들여둔 것입니다.세번째는 아들에게 많은 칭찬과 격려 그리고 용기을 주어서 1등이 되게 만들었습니다.공부에 대한 동기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칭찬과 격려, 용기도 필요했다고 합니다.그래서 엄마는 항상 아들에게 '너는 잘 될 거야.네가 아니면 누가 하니' 등의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해주었고 엄마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주변 사람들한테 "우리 아들 칭찬 좀 해주세요"라고 부탁했습니다.엄마와 공부한지 한 학기 지나서 5학년 2학기 때 중간고사에서 5등을 했고, 학교에 올라와서는 전교 1등을 했습니다.지금은 고등학생인데 지금까지 성적은 전교에서 최 상위권에 머물고 있습니다.너무나 불리하고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모든 악조건을 다 이기고 마지막에 1등하고 승리한 어머니와 아들입니다.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너무나 어렵고 힘든 조건에서도 이스라엘 나라가 미디안 나라와 싸워서 승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기드온이라는 사사가 군사 300명을 이끌고 적군 미디안 군사 135,000명과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여러분 450:1입니다.1명이 450명과 싸워 승리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냈는데 기드온이 어떻게 해서 승리했을까요?1.하나님이 이기게 해준다는 확실한 믿음으로 승리하였습니다(2-8).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고 죄악에 빠지므로 미디안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를 쳐들어와 7년이나 지배하고 있었습니다.미디안 나라에 7 년동안 지배를 받으며 고통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부르짖으며 기도를 했는데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어느날 천사를 보내어 기드온을 선택하여 사사로 삼아 적군 미디안과 전쟁을 하게 했는데 미디안에서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는데 숫자가 135,000 명입니다(삿8:10)그래서 12절에 보면 적군의 수가 메뚜기처럼 중다하고 약대의 수가 해변의 모래같이 많다고 했습니다.이때 기드온이 하나님의 신이 충만하여 나팔을 불며 '전쟁하러 나갈 사람 모이라' 하니까 아비에셀 족속이 몰려 왔습니다(삿6:34).그러나 적들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이때 모인 사람들이 32,000명입니다(삿7:3).고대의 전쟁은 숫자의 싸움인데 이 숫자로 승리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인원이었습니다.고대에 전쟁에 이기려면 3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수의 우위, 전술의 우위, 무기의 우위입니다.적군의 숫자에 비해 이스라엘은 비교가 되지 않지만 이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7:3절을 보십시오.'전쟁하다 죽을까봐 무섭고 두려운 자들은 다 돌려보내라'고 하셨습니다.그렇지 않아도 숫자가 너무나 작은데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사람을 다 돌려보내라'고 하는 것입니다.그래서 두려워하는 22,000명이 '기회는 이때다' 라고 집으로 가버렸습니다.이 사람들은 마지못해 어쩔 수없이 전쟁에 참여했지만 상황이 주어지면 이유를 대고 도망갈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사람들은 10,000명 뿐입니다.10,000명도 너무 작은데 하나님은 또 기드온에게 말씀하십니다.4절을 보십시오.'아직도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그러면서 현재 남아 있는 10,000명을 '시험해 보라'고 해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그들을 데리고 물이 흐르는 냇가로 가서 훈련하다 목이 마르니까 물을 실컷 마시라고 했습니다.그래서 너무 목이 마르고 갈증이 나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처럼 엎드려 물을 핥아 먹는 사람이 많았고,가끔 어떤 사람은 무릎을 꿇고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는 것입니다.지금 전쟁 상태입니다.그래서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을 손으로 떠다가 마시는 것입니다.언제 어디서 적들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주변을 살피며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이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이고, 늘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그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십니다.6절을 보면 '손으로 움켜 물을 먹는자 300명만 남겨두고 다 돌려보내라'고 하셨습니다.왜 하나님이 300명만 남겨놓고 다 보내라고 하셨습니까? 그 이유를 하나님이 딱 한가지 말씀하셨습니다. 2절에 말씀하시길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그러니까 많은 수의 군인들이 전쟁하여 승리를 하면 승리한 사람들이 말하기를 '야,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싸워서 이기고 승리했다 하나님이 도와준것 아니다'라고 자랑하고 교만할것 같으니까 하나님이 다 돌려보내라고 하신 것입니다.그래서 300명으로 전쟁하여 '하나님이 영광과 감사를 받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이 승리하게 했다'고 자랑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신앙을 요구하십니다.우리가 어떤 일을 이루고, 승리하고 나서 '하나님,감사합니다.하나님이 도와서 이루었고,승리했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주장하시는 전능한 하나님이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도와주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이런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며,겸손하게 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자랑하기를 원하십니다.그래서 엡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하셨고 고전 1:27-29'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하려 하심이라'하나님은 교만하고,자기를 자랑하고 나타내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고 미워하시지만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하나님께 감사하고,영광을 돌리는 사람을 가장 기뻐하십니다.어떤 상을 받던, 어떤 일을 잘되어 성공하였을 때 자기가 잘나서 자기의 힘으로 되었다고 교만하지 말고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혜다,하나님이 도와주어서 이루게 되었다'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고전 10:31절 '그런즉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사울이 처음에는 겸손하여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여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세웠지만 왕이 되고 나서 교만하므로 하나님이 그를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겸손한 다윗을 택하여 왕으로 삼았습니다.하나님은 교만한 자을 대적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와 축복을 주시고 그 사람을 들어 사용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하나님이 들어 사용하시면 환경이나 조건이 문제가 되지 않고,환경과 조건을 떠나 얼마든지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그래서 내 인생의 축을 나에게서 하나님께 옮겨야 하고,내 중심을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야 하고,내 마음 내 뜻대로 살던 데서 주님뜻대로 옮겨가야 합니다.버려진 쓸모없는 돌이라도 위대한 조각가가 다듬으면 아름다운 작품이 나오고,아무런 의미 없는 말도 시인이 사용하면 위대한 시가 되는 것이고,쓸모없는 흙이라도 토기쟁이 손에 들어가면 위대한 도자기가 나옵니다.하나님이 우리를 쓰시기만 하면 지팡이로도 홍해를 가르고,조그마한 돌맹이로도 골리앗을 넘어트릴수 있습니다.그래서 성경에 사기꾼 야곱, 살인자 모세,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한 아브라함,간강죄와 살인 죄를 지은 다윗,예수님을 3 번이나모른다고 부인하고 배반한 베드로,살인 방조자 바울도 하나님이 사용하셨기 때문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입니다. 숫자나 나의 능력이 문제가 아니고 지금 처한 나의 환경과 처지가 문제가 아니고 가장 중요하고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이'쓰시느냐?안쓰시느냐?나를 도와주시느냐?안 도와주느냐?'그것이 문제입니다.하나님이 쓰시는 기드온을 통하여 300명의 용사로 13만명 미디안 대군을 물리치고 승리하였습니다.그래서 기드온은 이 전쟁을 통하여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한후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8장 22-23을 보십시오.겸손하게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였습니다.
2. 하나님을 믿고 두려움을 버리고 강하고 담대하여 승리하였습니다(9-14)
전쟁을 하러 나왔던 사람들은 다가고 300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적군은 135,000입니다.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가지 사실만 명백합니다.300명을 통해여 하나님이 승리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정말 300명으로 승리할수 있을까?'의심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이 나타났습니다.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9절입니니다.“일어나 내려가서 적군을 치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그러나기드온이 300명으로 135,00명의 적진에 뛰어들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두렵고 무서웠습니다.하나님은 기드온을 기드온 자신보다 더 잘 아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합니다.10절을 보십시오.'정 그렇게 두려움면 내가 승리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 줄터이니까 부하를 데리고 적진으로 들어가라'정탐을 하는 것은 총 사령관이 하는 것이 아니고 부하를 시키면 되지만 하나님은 기드온이 직접 보고, 들어야만 그 두려움에서 해방될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에 하나님은 그에게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서 부하를 데리고 직접 적진으로 가라고 했습니다.기드온이 밤중에 몰래 부하를 데리고 미디안 적진에 들어갔고 적진에 이르러 적군들이 모여서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한 병사가 친구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니'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 미다안을 쳐서 무너뜨렸다'는 것입니다.그러자 다른 병사가 꿈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 꿈은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 쳐들어와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가 기드온의 손에 다 죽는다'는 해석을 하면서 적군들이 서로 두려워 떨고 있는 것입니다.하나님 기드온에게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시므로 이제는 기드온이 두려움을 물리치고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300명과 전쟁하여 승리하였습니다.처음 모집한 32,000명 중에 하나님이 두려워하는 자들,무서워하는 자들,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은 다 돌려 보내라고 하셨고 300명 용사로130,000명 적군과 싸워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루고,승리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물리치고,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그래서 나폴레옹 힐은"두려움은 모든 논리를 무력하게 하고,모든 상상을 파괴하며,모든 자신감을 꺾어 버리고,모든 열성을 지워버리며,모든 의욕을 없애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고 사람들을 나태와 비참과 불행에 빠뜨리고 마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워즈워드는 "두려움은 수백 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 당신의 마음을 괴롭힌다" 라고 했고,세네카라는 사람은「두려움이 있는 곳에는 행복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심리학자인 앨런 다운스는 [두려움을 극복하라]라는 책에서 '인생 성공의 핵심이 바로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했고 두려움은 인생을 꽃피우게 하는 재능을 무기력하게 만들고,재능을 개발하는데 큰 적이 바로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앨런 다운스는 '당신을 지배하는 7가지 두려움,곧 공포로부터 해방되라'고 말합니다.
1,무능의 공포(만약 실패한다면?),2,거부에 대한 공포(핵심에 끼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3,결핍의 공포(내 성과를 훔쳐 가면 어쩌나?),
4,현실의 공포(어디 손쉬운 해결책이 없는가?),5,미지의 공포(저기 뭐가 숨어 있지?),6,권위의 공포(규칙을 어기면 어떻게 될까?),
7,나이의 공포(퇴물이 되면 어떻게 하지?) 등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365번이나 하셨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31:8절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고 하셨고,여호수아에게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너는 마음을 강하게하고 담대히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고 하셨고,이사야 선지자에게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셨고,41:13-14'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것임이니라.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하시며 딤후1: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두려움을 벗어버리고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승리하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미국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가장 크게 외침 말은 바로 'Yes, We can'이었습니다.'나도 할 수 있고,너도 할 수 있고,우리는 할 수 있다'Yes,We can''슬로건입니다.미국 역사상 최초로 흑인이 대통령에 출마했는데 그의 마음에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습니까?그래서'Yes,We can 우리는 할 수 있다'를 외치면서 대통령에 출마하여 결국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제일 부자라고 하는 마이크로 소프트 창업자인 빌게이츠가 자신의 성공 비결을 말하기를 '자기는 매일 아침마다 오늘은 왠지 종은일이 있을거야.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라고 자신에게 말을 하며 하루를 시작하므로 성공을 했습니다.'두려워하지 않고 나는 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승리하고 성공적 삶을 살아갈수 있습니다.우리는 나를 지켜주시고 인도하며 도와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또한 내 안에 계시는 보혜사 성령님이 함께하는데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할 것이 아니라 자신감 가지고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때로는 어떤 일을 하다가 실패를 했다 할지라도 그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패는 '내가 길을 걷다 잠시 멈추어 생각하는 것이고,'실패는 학습을 위한 경험과 성공을 위한 과정'에 불과하기에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어느 날 기자가 아브라함 링컨에게 어떻게 위대한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고 질문할 때 그때 링컨이 대답하기를 '나는 실패를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그리고 말하길 '내가 실패한 뒤에 항상 두 가지가 속삭입니다.하나는 '야 너는 안돼, 너는 실패한다, 너는 망한다, 너는 못한다'는 부정적인 소리와 또 하나는 '야 너는 할 수 있다,하나님이 도와주시니 할 수 있다,믿음으로 일어나라' 긍정적인 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부정적인 소리를 물리치고 하나님이 주시는 긍정적인 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그래서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마지막에 승리하며 미국에서 가장 위대하고,존경 받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그리고 링컨은 유머도 잘했습니다.대통령이 되고 의회에 참석했는데 한 국회의원이 '링컨은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라며 링컨을 질책했습니다.그때 너무나 무례하게 질책을 하니까 모든 의원들이 긴장을 하면서 링컨을 쳐다보는데 그때 링컨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되물었습니다.“여보시요 의원님, 내가 두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오늘 같은 중요한 자리에 왜 이 못생긴 원숭이 같은 얼굴을 갖고 나왔겠습니까?”이때 모든 국회의원들은 박장대소하며 웃었고 그 의원은 슬그머니 창피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어떤 자리에 가서도,어떤 말을 들어도,여유를 가지고 여유 있게 말을 해야합니다.링컨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믿음이 있어 여유를 가지고 두려워하지 않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3.배신이 아니라 충성으로 순종하여 결국 승리하는 것입니다(15-25)기드온은 하나님이 '적군을 자신의 손에 붙였다'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정탐을 다녀와서 어떻게 했습니까?15절을 보십시오.이스라엘 진중에 돌아와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300명의 병사들을 깨워 “여호와께서 미디안 군대를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라고 선포하고 바로 300명을 3대로 나눕니다.각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게 하고 항아리 속에 '횃불'을 감추게 합니다.정말로 이상한 전쟁입니다.전쟁하러 나가면서 무장을 하거나,칼과 창을 든 것이 아닙니다.정말 이해가 되지 않고 숫적인 열세로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이번 전쟁을 자신에게 맡기고 자신을 통하여 승리하게 해주겠다'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기드온이었습니다. 해할 수 없는 이번 전쟁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왜 충성스러운 3백 명만 남기라고 했는지 이해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약 한 사람이라도 기드온의 말을 시비를 걸고, 또 '안된다'고 부정적인 말을 했다면 이 전쟁은 결코 승리할수 없습니다.정말 인간적으로 볼때 '미련하고, 미친 짓을 하는 것 같았지만' 기드온이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충성스럽게 순종하였습니다.18절 “나를 좇는 자가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진 사면에서 또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고 하므로 300명 용사는 밤에 보초를 바꿀때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부수고 횃불을 밝히며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소리를 지릅니다.그렇게 하므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22절을 보십시오.잠을 자다가 놀란 미디안 군인들은 자기들끼리 칼로 찌르며 싸우다가 자멸해 버렸습니다.인간적으로 생각할때 이해할수 없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충성을 다해 순종한 기드온, 그리고 한 사람도 예외없이 기드온에 명령에 충성스럽게 따른 군인들에 의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 결국 적군을 물리치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입니다.어떤 일이든 승리하고 성공하려면 충성도가 가장 중요하고 필요합니다.전쟁을 하는데 기드온의 방법이 비 이성적이고 상식에 벗어난다고 반기를 드는 사람이 있다면 결코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그래서 흔들리거나 불평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충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그런데 중간에 배신을 하거나, 중간에 도망을 가거나, 중간에 그만두면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그 사람은 하나도 이루지 못합니다.비록 조금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 같아도 충성도가 높고,지속력이 있는 사람이 결국 성공하고,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미국에 강철 왕이라는 카네기가 자신의 후계자를 세울때 '쉬브'라는 무명의 인물을 지명하였습니다.그는 자신의 아들이나, 명석하고 탁월한 회사의 중역을 후계자로 뽑지 않았습니다. '쉬브'는 학력은 겨우 초등학교 졸업 정도이며,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쉬브'는 카네기의 회사에 입사할 때 청소부로 들어왔습니다.그는 그 일에 충성을 다했고 자기가 맡은 장소만 청소한 것이 아니라 공장 전체를 구석 구석까지 다 쓸며 청소하였습니다.평상시 이러한 근무 태도를 보고 간부들은 그를 정식 사원으로 채용해 주었고,정식 사원이 되어서도 남달리 충성하므로 그는 사무직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마침내 물샐틈 없는 충성됨이 인정되어 카네기 사장님의 비서실에 근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그후 그는 카네기가 있는 곳에는 언제 어디서든지 그가 있었으며,그의 손에는 늘 메모지와 펜이 떠나질 않았다고 합니다.어느날 카네기가 공장 확장과 생산 과정에 대한 연구를 하느라고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있다가, 집에 돌아가려고 밖에 나와보니 그때까지 '쉬브'는 밖에서 카네기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카네기는 놀라며‘쉬브! 왜 아직도 퇴근하지 않았는가?고 묻자 쉬브는 조용히 웃으면서‘사장님께서 저를 언제 부르실 지 알 수가 없는데,어떻게 자리를 비울 수 있겠습니까?’라고 당연한 듯 대답 하였습니다. 는 진심으로 충성을 다했기에 카네기는 자기 아들이나 회사의 중역에게 회사를 맡기지 않고 그에게 맡겼습니다.이 세상에서도 충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도 충성하는 사람을 축복해주시고 상급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하나님은 충성된 자를 축복하시고 사용하십니다.조그마한 이익에 따라 배신을 밥먹듯이 하고, 마음에 안든다고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은 축복해 주지 않고, 사용하지 않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이 눅16:10절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라고 말씀하고 하나님은 어떤 일을 맡길 때 충성을 가장 큰 원칙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딤후 2:2)"
그리고 충성에는 반드시 댓가가 있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절) 어려운 때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우리는 다가오는 인생의 전쟁에서 패배하지 말고, 승리해야 합니다.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승리케 해 주신다는 확신한 믿음을 가져야 하고(2-8)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전개 되든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가야 합니다(9-14)마지막으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니님께나 사람들에게 배신하지 말고 충성하므로 승리를 해야합니다.(15-25).
약함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
삿 7:1~25 / 채규현목사
사사기 7장 말씀은 오랫동안 성경의 참된 뜻이 잘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의도하시는 바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우리가 함께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한절 한절씩 읽어가면서 보겠습니다. 먼저 7장 1절부터 8절까지가 한 문단이 되겠고 9절부터 15절까지가 한 문단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16절 이하는 실제로 싸우는 대목입니다. 먼저 1절부터 보겠습니다.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이 일찌기 일어나서 하롯샘 곁에 진 쳤고 미디안의 진은 그들의 북편이요 모레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이 모레산 앞 골짜기라 하면 북쪽의 이스르엘 평지 바로 동편쪽에 있는 땅입니다. 그러니까 북쪽에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드디어 미디안 사람들과 대치해서 싸움이 있을 것인데 그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2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우리는 아담 이후로 계속해서 내 스스로를 하나님의 반열에 올려놓기를 원합니다. 내 스스로를 드러내고 내 명성을 드러내고 내가 모든 사람위에 높이 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끊임없이 그렇게 될 때에는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과 진정한 평안과 진정한 은혜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우리 자신을 그렇게 높일만한 능력이 없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미디안이라는 대적 앞에서 하나님은 동일한 생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너희 이 백성, 지금 모인 백성이 3만 2천인데 이 3만 2천으로 싸워서 이긴다면-사실 이기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지만, 너희 스스로 자긍하기를 ‘내가 이겼다’ 할까 함이라. 그러니 수를 줄여라.” 그래서 수를 줄이기 시작합니다. “두려워 떠는 자는 전부 돌아가라.” 이야기합니다. 그럴 때에 두려워 떠는 자 2만 2천이 돌아가고 이제 1만 명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도 많다고 해서 다시 줄이게 합니다. 이제 물가로 가서 사람들을 왼쪽, 오른쪽으로 갈라놓으라고 하십니다. 한쪽에는 물을 개처럼 핥아먹는 사람, 그러니까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아마 물을 떠서 무릎을 꿇지 않고 좌우를 보면서 물을 먹는 것이 아주 독특한 모양새 입니다. 아마 오늘날에 그렇게 먹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한쪽에는 무릎을 꿇고 보통처럼 먹는 사람, 이렇게 갈라보았더니 3백 명과 9천 7백 명이 나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3백 명이 뽑히니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면을 가지고 “기드온의 3백 용사”라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유치원 때부터 계속해서 들어온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기드온의 3백 용사를 하나님께서 공수부대를 뽑았다, 해병대를 뽑았다.” 이렇게 한다면 과연 여기를 보는 관점이 바른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분명히 2절에 보면 “만약에 너희가 숫자가 많아서 이기면 ‘우리 숫자가 많아서 이겼다’ 이렇게 자긍할까 함이라.”라는 말과 빼어난 3백 명을 뽑았다는 말을 한번 비교해 보라는 말입니다. 과연 이들이 정말 하나님께서 특수부대를 뽑듯이 뽑은 3백 명인가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그것은 애초에 숫자를 줄이라는 하나님의 명령과는 정반대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3백 용사라고 한다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자랑거리가 없게 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게 하겠다는 그 의도와는 정반대입니다. “내가 이렇게 뽑히고 뽑혀서 용사가 되어서 이겼다.” 자기가 자긍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거기에 따라서 그들이 어떻게 용사냐,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개처럼 핥은 것이 마치 주변을 계속해서 경계를 한다는 그런 해석들을 하는데 그것은 전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1만 명 가운데 하나님이 최소한의 숫자가 뽑히게 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가장 적은 숫자가 뽑히게 하기 위해서 가르는 방법으로 가장 일반적인 사람들이 하지 않는 방법으로 먹는 사람만 골라 놓은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 사람들은 요즘말로 하면 약간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만 골라서 3백 명을 만들어 놓은 것이지,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용사로서의 내재적 가치가 있어서 뽑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승리함을 입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적은 숫자, 그중에서 보통도 안 되는 다른 종류의 사람 3백 명의 농부를 뽑은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용사였다면 왜 이제까지 그냥 있었겠어요? 지금까지 모두 다 두려워했습니다. 아무도 미디안에게 들고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택하시고 기드온에게 힘을 주시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1만 명 전체를 이야기하지 왜 구태여 3백 명만 이야기합니까? 그러한 방법으로 해서 하나님은 가장 적은 수-3만 2천명에서 3백 명, 100분의 1로 줄이는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적은 수가 남게 하는 방법을 쓰신 것이지, 하나님이 소수 정예를 위해서 뽑았다는 개념은 여기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의 모든 사건, 사건들을 기록했을 때 그 사건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갖기 위해서는 사건의 처음시작이나 아니면 제일 끝에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이 나오는가 한번 보십시오. 그 하나님의 해석이 있으면 그 관점으로 그 사건, 사건들을 이해하면 됩니다. 그래야 성경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관점으로 바르게 이해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부 내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강함을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을 쓰십니다. 우리의 강함은 오히려 우리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세상적 의미의 강함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 힘이 세다, 높은 자리에 있다, 인기가 많다…, 이게 전부 세상적 의미의 강함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자리에, 그것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왔을 때 교회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질 때에는 그 세상적 의미의 강함이 교회에서는, 믿음 안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약점이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제가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의 이야기입니다. 별의별 신학생들이 다 들어옵니다. 나이도 천차만별이에요. 배경과 직업도 전혀 다르게 다양한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아주 괴짜가 한 명 들어왔습니다. 이 사람은 시골에서 자랐는데 온갖 무술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공수부대에서도 그 중에서 가장 강하게 인정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도 그래서 제가 한번 배를 눌러봤어요. 그런데 배가 마치 철판 같아요. 그런데 참 사람은 순하디 순한 사람이었는데, 문제는 사람들 사이에 이 사람이 그렇게 강하다는 말이 도니까 그 중에서도 무술 하는 사람들, 유단자들 마음에 괜히 한번 찝적거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에요. 그래서 돌아가면서 계속 그 사람을 찝적거립니다. 그래도 이 사람은 참고, 참고, 다니다가 드디어 이 사람이 한번 폭발했습니다. 하도 약을 올리니까 화가 나서 붕 떠서 발로 한번 찼습니다. 그러자 상대는 나가 떨어져 기절했어요. 그 사람은 그걸로 학교에서 정학을 당했어요. 제가 그때 학생처장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 좋은 사람인데 이것 가지고 그럴 수 있느냐?” 그랬는데, 저는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력으로 그렇게 하는 것만은 안 된다.” 제가 그 분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자신 있게 가지고 있던 그것이 믿음 안에서는 걸림돌이 되는 것을 아느냐? 만약에 당신이 목회를 하다가 정말 못된 사람 만날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할거냐? 이게 약인 줄 알고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분은 1년 늦게 졸업했어요. 이 세상에서 내가 자신 있게 가지고 있는 그것이 오히려 걸림돌이 됩니다. 그것은 힘뿐 만이 아니에요. 어떠한 종류든지 이 세상적으로 강함이 있는 것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배움이 많은 사람, 이 사람의 걸림돌은 많이 배웠다는 것이 걸림돌이 됩니다. 많이 배웠다는 면의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많이 배웠는데, 그게 예수님 믿는 데 많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제가 우리나라에 있을 때 제게 전도한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을 때마다 왜 믿어서는 안 되는지, 왜 기독교가 오만하고 독선적인지 제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막 이야기해서 상대의 논리를 완전히 부셔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 저를 불쌍하게 보셔서 여기 한국에 있으면 도저히 믿을 것 같지 않으니까 미국까지 보내셔서 그 어려운 공부를 하게 하셔가지고 제가 완전히 그 면에서 연약해져 있을 때 예수님 믿게 하시더라구요. 정말 은혜 중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저도 지금 생각할 때 만약에 그냥 하나님께서 한국에 두셨더라면 믿었을까 그게 의심이 가요. 그게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가진 게 뭐가 있습니까? 어느 청년 자매가 미모가 아주 아름답고 고왔어요. 자기가 고운 걸 자기도 알고 이웃들도 다 압니다. 그런데 교회 청년 수양회를 갔습니다. 가서 함께 은혜롭게 지내고 이제 캠프 파이어를 합니다. 거기서 기타 치며 인도하던 사람이 “자, 우리 이 중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 찬송 하나 하자.” 그러자 이 사람이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 거예요. ‘나는 찬송 못 하는데….’ 그래서 얼른 일어나 “저 찬송 못해요.” 했습니다. 얼마나 창피했겠어요? 돈이 많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많으면 많을 때 도와줘도 상대편이 고마워할 줄 몰라요. ‘아, 저 사람은 돈이 많으니까….’ 나는 나름대로 큰맘 먹고 도와주는 건데 고마워할 줄 몰라요. 그리고는 안 도와주면 욕먹어요. 자, 가난한 사람이 안 도와줘도 욕먹습니까, 안 먹습니까? 다 이해해요. 돈이 있다는 자체로서 그냥 있어도 욕먹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들 중에서 조금 늦게 목회를 시작한 분들이 있습니다. 사회생활 하고, 사업도 하고 이런 분들이 있는데, 그 분들 중에서 보면 좀 경제적으로 유복한 상태에서 목회를 시작하게 되면 거의 대부분이 목회가 안 됩니다. 가만히 보면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로는 목회에 당연히 어려움이 있고, 특히 사람들 때문에 어려움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럴 때 ‘내가 여기 아니면 먹고 살데 없냐?’ 하면서 툭툭 털고 사역지를 옮기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것도 없이 ‘목회 아니면 우리 가족 굶어죽는다.’ 이런 사람은 어떠겠어요?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목회 안하면 절대 살 수 없다.’는 것으로 목숨 걸고 매달리고 아무리 창피를 당하고 어려움을 겪어도 지날 수밖에 없죠. 그러다 보니까 더 엎드리게 되고 더 매달려서 일하게 되는 거죠. 또 그런 사람을 보면 주변 사람들이 애처롭게 봅니다. 그래서 목회를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저와 같이 공부하던 분 중 한 분이 목회를 시작할 때 상당히 부유한 상태에서 시작을 했어요. 개척을 했는데 모이는 사람들이 전부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 뿐이에요. 도와줄 사람은 하나도 없고 도움을 바라는 사람만 모였다가 목사님이 하다 하다 지쳐서 못하면 사랑이 없다고 떠나고…, 목회가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는 성도들이 마음을 안 줘요. 그 마음을 안 주는 이유가 뭔가 가만히 봤더니, 뭐 된장 하나라도 있으면 ‘아, 이거 목사님 드려야겠다.’ 이 마음이 없는 거예요. ‘목사님은 다 가지고 있는 분’ 그래서 줄 마음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희한하게 주지 않으면 마음도 안 갑니다. 아무도 목사님에게 “목사님, 이것 한번 드셔 보십시오, 뭐 해 보십시오.” 이런 게 없어요. ‘목사님은 다 있겠지.’ 그러다 보니까 성도들이 목사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부흥하지 않아요. 모든 재산 다 없애고 나서부터 교회가 다시 시작되더래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강한 게 뭐가 있습니까? 그게 여러분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도 다 마찬가지예요. 내 연약함을 알지 못할 때, 내가 정말 뭔가 세상적으로 강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도 경험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도 여러분이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 분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내가 가장 강하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깨뜨려지기 전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없습니다. 내가 돈에 자부심을 느끼고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까? 이것이 내게 가장 귀한 것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높은 자리나 내게 있는 힘센 자리나 이것이 여러분의 자랑입니까? 여러분이 세상적 의미의 자랑으로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그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먼저 그것을 버리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놓으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될 때 비로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연약함을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겉으로, 모양으로 자기가 연약한 것처럼 보이는 그게 아닙니다. 실제로 마음에서 깊이 느끼기에 ‘나는 정말 연약한 존재구나.’하고 느끼게 될 때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밀고 가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3만 2천명이 있을 때 “줄이라.” 하셔서 1만 명으로, “더 줄이라, 과감히 줄이라.” 하셔서 3백 명만 남기신 것처럼 가장 연약하게 만들고 오히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케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면에서 세상적으로 자신함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면에서 세상적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이 있는 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여러분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먼저 그 면이 없어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때에는 정말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는 그러한 일이 되게 하십니다. 기드온이 그때 어떤 심정이었겠어요? 지금 “다 모이라”해서 3만 2천모여서 ‘자, 우리하고 저쪽하고 힘이 어떻게 되는가?’ 생각하고 전략도 짜고 할 때 하나님이 갑자기 “그렇게 해서 이기면 안 된다. 줄이라, 줄이라.” 하셔서 3백 명만 딱 남겨놓으셨어요. 저쪽 편은 몇 만 명인데요. 그때 기드온의 기분이 어땠겠어요? 그 다음에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역사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9절부터 보십시오. “이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 드디어 하나님의 진군 명령이 있습니다. “내려가라!” 그런데 하나님이 그 말만 하신 게 아니고 그 다음 말이 재미있습니다.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만일이 뭡니까? 기드온은 지금 두려워서 떨고 있는데요.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같이 내려가서 보라. 거기 표증이 있으리라.” 하시니까 얼른 내려가죠. 두려우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러한 기드온을 대하는 방법을 보십시오. “너 두렵지? 그렇지?” 이렇게 안 물으셔요.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얼마나 존중해서 이야기하고 계십니까? 이렇게 이야기하시니까 바로 그렇게 순종합니다. 내려가서 들으니까 미디안 족속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우리를 이스라엘 백성 손에 붙여서 우리를 멸망하게 할거야.” 그 소리를 듣고 기드온이 용기를 얻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역사하실 때 심지어는 그 대적에게까지도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인도하시고 그들에게도 말을 주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대적인 미디안 병정들의 입에 말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하나님이 아니고 그 대적들에게도 하나님이십니다. 심지어는 짐승들에게도, 만물에게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발람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고 하니까 그 나귀의 입을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볼 때에 하나님이 택하신 기드온은 어떤 사람이에요? 우리가 흔히 알듯이 용사가 아닙니다. 비록 나중의 결과로는 싸움에서 이기지만 기드온을 보면 용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겁이 많은 지도자에요. 그 뒤로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사람입니다.
아마 성경에서 하나님을 제일 귀찮게 한 사람이 기드온일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렇게 겁이 많지만 하나님이 “3만 2천에서 줄이라.”고 하시니까 1만 명으로 줄였습니다. “또 줄이라.” 하시니까 하나님이 하신대로 다 했습니다. 3백 명만 남기라고 했을 때 3백 명만 남겼습니다. 지금 겁이 나서 덜덜덜 떨려서 거의 죽을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3백 명만 남기라고 하셨을 때 3백 명만 남겼어요. 그렇지만 그 3백 명과 함께 있는 기드온은 덜덜 떨고 있다니까요. 하나님이 이렇게 연약한 지도자를 세우시는 면을 봅니다. 하나님은 그리하여서 그 연약한 사람에게 능력을 주시어서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들이 순종할 때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장면이 그 다음에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은 성경 전체에서도 같은 면으로 지도자들을 뽑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을 원합니까? 어떤 지도자를 원합니까? 누구보다도 믿음이 강하고, 확신에 차 있고, 또 항상 즐거워서 그 즐거움을 누구에게도 줄 수 있고, 여러분의 모든 연약함을 알고, 모험도 마다않고…,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지도자를 원하지 않습니까? 이번 선거에서도 계속된 표어가 무엇입니까? “준비된 지도자, 준비된 ○○○, 갖추어진 ○○○….” 왜냐하면 세상이 원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면의 사람을 원하니까요. 우리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들이 몇 년 전에 저를 담임목사로 청빙할 때에도 어땠습니까? ‘아, 누구보다도 준비된 목사일 것이다.’ 하고 생각하고 뽑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상당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아, 우리 담임 목사는 참 잘 준비된 사람이다.’ 이렇게 아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제가 느낄 때 제가 우리 교회를 이끄는 데 준비된 사람이라고 느끼지 못합니다. 제 자신을 너무 잘 아니까요. 아까 무슨 강한 것이 있을 때 오히려 그게 걸림돌이 된다고 그랬는데 제가 그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목회하다가 일주일의 하루 정도는 뉴욕의 맨하탄에 있는 한인 신학교에 가르치러 갔습니다. 그런데 밤에 항상 늦게 끝났어요. 11시 반, 12시 이렇게 늦게 끝나서 차를 몰고 오는데, 목회를 하다 보니까 3,800cc의 좋은 차가 생겼어요.
이 차는 내가 추월을 하겠다고 밞으면 2초면 어떤 차든지 추월할 수 있는 힘이 좋은 차였어요. 그런데 이 좋은 차가 생기고 나서 어떤 일이 있었나면, 맨하탄을 넘어서 뉴저지의 저희 집으로 돌아오는데, 뉴욕 택시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저를 깜짝 놀라게 하는 거예요. 아주 위험하게 운전을 해서 저를 추월했습니다. 제가 화가 났어요. 그래서 엑셀레타를 밟아서 막 쫓아갔습니다. 한밤중에 차는 별로 없는데, 한쪽 방향이 2차선이에요. 그 2차선에 택시와 둘이 서로 경쟁하면서, 서로 눈을 흘겨가면서 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응징하려고 쫓아갔고, 막 가다가 택시는 자기 길 옆으로 쏙 빠져 나가고 저는 그대로 앞으로 갔습니다. 제가 어느 정도 응징도 하고 헤어졌는데, 그리고 가는 길이 1시간 정도 되는데 가다가 생각하니까 제 자신이 참 한심해요. ‘만약에 지금의 이 좋은 차 말고 전에 탔던 조그만한 차를 탔더라면 내가 어떻게 했을까?’ 뉴욕택시가 엔진이 기가 막힙니다. 아주 최고의 차의 성능을 가지고 있어요. 그 택시가 “휙~” 추월하고 갔을 때 훨씬 힘이 약한 차를 탄 제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아이구, 저 나쁜 사람.” 그리고 저는 저대로 제 길을 갔을 겁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제가 힘이 센 차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충분히 저 차를 따를 수 있는 차였거든요. 그래서 쫓아가서 한밤중에 경주를 한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강의 마치고 가면서요. 요즘에 우리 장로님들과 제자훈련 마치고 이제 사역훈련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전부 우리 삶에 대해서 나누는데, 항상 제가 손해 봐요. 결국 이야기하다 보면 저 혼자 죄인이에요. 제 이야기가 제일 많이 나와요. 그래도 저는 제 연약한 점의 그 이야기를 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선 우리 장로님들부터 저에 대해서 착각하면 안 되니까요. 우리 성도님들이 저에 대해서 착각하면 안 되니까요. 제가 그렇게 갖춰진 사람도 아니고 완전한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저는 미리미리 말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저를 뭔가 갖춰진 사람, 완벽한 사람으로 성도들이 본다는 것이 제겐 너무나 부담이 됩니다. 제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되면 또 하나의 문제가 우리 교회가 점점 부흥하게 될 때 그 원인이 누구에게 돌아가겠어요? “아, 그건 우리 목사님이 능력 있어서 그렇게 됐을 거다.” 할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까? 전혀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의 승리는-우리 교회든지, 우리의 삶 속에서든지, 어디서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때에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졌다는 것이 고백되어야만 합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 교회가 부흥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며 같이 하나님께 의지하는 길을 갈 때 거기에 역사함이 있습니다. 누구의 능력이나 누구의 잘남이 뭔가 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 거기에 의지하는 사람을 통해서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의 가정에도 가장들이 있지 않습니까? 가장들이 여러 가지 다 장단점이 있어요. 뭔가 부족한 점이 다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가족을 맡길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업하시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회사나, 작은 가게나 다 마찬가지에요. 사업을 하실 때 여러분의 능력으로 하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회에서 일을 할 때 여러분의 능력으로 일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여러분의 연약함을 바로 볼 때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바울 같은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바울은 말주변도 없어요. 많이 배우긴 했는데 말주변이 없습니다. 말로는 사람을 설득할 능력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외모도 별로 좋지가 않았어요. 등이 굽었다고도 하고 매부리코였다고도 이야기합니다. 하여튼 겉으로 보기에 볼품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쓰셔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바울 때문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때문입니다. 바울이 한 것은 오직 그 하나님을 알고, 믿고, 의지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길 원합니까? 여러분의 세상적 의미의 모든 강함을 내려놓으십시오. 이것이 내가 제일 강하다고 스스로를 높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의 연약함을 온전히 바라보고, 나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께 고백하고, 여러 사람에게도 감추지 않을 때에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여러분을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축복하실 줄을 믿습니다. 이러한 은혜가 있는 주의 사랑하는 백성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러한 삼백 명이 필요합니다
삿 7장 1~23절 / 조상호목사
우리가 두고 온 조국, 대한민국은 지리적으로 반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주위에 있는 나라들과 많은 전쟁을 치렀습니다. 섬나라인 일본은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격해 온 반면, 대륙인 중국은 바다로 진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격해 왔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뒤돌아보면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쟁을 많이 치렀던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그러한 수많은 전쟁 가운데 중국 수(隋)나라와 우리 고구려의 전쟁은 역사에 길이 남는 전쟁입니다. 고구려 영양 왕 때인 612년에 수나라의 왕 양제가 당시 상황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113만 3,800명이나 되는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해 왔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해군이라고 할 수 있는 수군(水軍)은 바다를 건너 대동강으로 쳐들어와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고구려 군에게 대패하였습니다. 또한 수나라 왕인 양제가 친히 거느린 육군은 고구려의 요동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게 되자, 초조한 나머지 특수부대 30만 5,000명을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켜 평양성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때 고구려의 총사령관인 을지문덕 장군은 거짓으로 항복하여 수나라 군대를 압록강과 오늘날의 청천강인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부근까지 깊숙이 유도하였습니다. 나중에 고구려의 유인 작전에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수양제의 군대는 급히 북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으나,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군대가 살수를 반쯤 건널 때를 기다렸다가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결국 수나라의 군대는 살수싸움에서 크게 패하여 살수에서 전멸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전쟁에서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2,70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싸움이 그 유명한 ‘살수대첩’입니다. 이 ‘살수대첩’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사건 중의 하나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 ‘살수대첩’처럼 엄청난 승리를 거둔 이야기가 몇 번 나옵니다. 그 중에서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갈멜산에서 엘리야 선지자 한 사람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적하여 승리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사사기 15장에 보면 삼손이 달랑 나귀 턱뼈 하나 들고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죽인 시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보면 기드온이 단 300명의 용사를 거느리고 가서 메뚜기 떼처럼 엄청나게 많은 미디안 연합군대를 물리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드온의 300 용사와 미디안 연합군대의 전쟁은 굉장히 이상한 형태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대 전술은 둘째 치고 상식적으로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전쟁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미디안, 아말렉,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연합하여 메뚜기 떼처럼, 약대 떼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엄청나게 많은 대군이 몰려왔는데, 8장 10절에 의하면 무려 135,00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대는 몇 명이나 될까요? 3절에 의하면 기드온 군대는 32,000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 대충 계산해도 기드온 병사 한 명당 4.5명을 상대해야 하는 힘든 싸움이 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32,000명의 병사 중, 두려워 떠는 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두려워 떠는 22,000명이 돌아가고 이제 10,000명만 남았습니다. 이 때 기드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135,000명이나 되는 연합군에 대항하는 10,000명은 너무 적은 군대로서 기드온의 마음은 참으로 착잡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설상가상으로 하나님은 또 한번 말씀하십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무릇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가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는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군대의 수가 아직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시냇가로 데려가 물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신 군인만 전쟁터에 데리고 나가되, 나머지는 또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총사령관인 기드온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대로 했더니 손으로 물을 마신 군사는 불과 300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그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7절) 하나님께서는 고작 300명의 이스라엘 병사로 135,000명이나 되는 대군을 이기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기드온과 300 용사 이야기를 말씀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 겸손한 사람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교훈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찾으십니다.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여기에서 ‘자긍’이란 말은 쉽게 말해서 ‘교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32,000명의 병사로 135,000명이나 되는 미디안 연합군을 무찌르고 승리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 기드온 장군의 전략이 좋았어.” “우리 이스라엘 군대는 역시 천하무적이야.” “역시 우리는 대단한 사람들이야.” 이렇게 말할 것 아닙니까? 승리의 공을 자기들에게로 돌리지 않겠습니까? 기드온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겨우 300명의 군사로 135,000명을 이겼다고 한다면 결코 자기들의 힘과 능력과 전략으로 이겼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하면 망하고 겸손하면 승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전 431년, 그리스의 많은 도시 국가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운명을 건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시작할 무렵,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Perikles)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스파르타는 가난해서 이웃나라와 단기전 외에 장기전이나 해외 원정은 해 보지도 못한 촌놈들이다.... 이번 전쟁은 해군력의 싸움인데, 페르시아와 전쟁 이후 우리 아테네 해군은 꾸준히 바다를 연구해와 가히 세계 최강인데 반해서, 농업국인 스파르타의 해군이나 요새는 우스운 수준이다. 이 전쟁의 승리는 우리가 맡아 놓은 것이다.” 기고만장하며 교만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스파르타의 아르키다모스(Archidamos) 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알다시피 우리가 싸워야 할 아테네는 선박, 기병, 중무장한 병사들을 골고루 보유했을 뿐 아니라 인구도 우리보다 많고, 해군력도 탁월하다. 이런 나라를 상대로 결코 안이한 자세로 전쟁을 시작할 순 없는 일, 우리는 오만하지 말고 불운한 환경에 처해도 후퇴하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적이 작전이 치밀하다는 가정 아래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라...” 이처럼 스파르타 군대는 겸손하게 아테네와 전쟁을 준비하였습니다. 결국 교만했던 아테네 군대는 결코 패배를 생각하지 않았던 해전에서 스파르타에게 무참하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9장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또 베드로전서 5장 5절에서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싫어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가 언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줄 아십니까? 겸손하게 낮아져서 하나님만 의지할 때였습니다. 스스로 뭔가 해보겠다고 했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겸손해졌을 때, 그 때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D.L. 무디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모세는 처음 40년 동안에 자신이 대단한 인물(Something)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리고 그 다음 40년 동안에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Nothing)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40년 동안에는 아무 것도 아닌 자(Nothing)를 하나님이 들어 쓰시면, 권능자(Everything)가 될 수 있음을 아는 삶을 살았다.” 40세까지 애굽의 궁궐에서 자란 모세는 스스로를 “나는 굉장히 잘 난 사람이다(I am somebody)”라고 여겼습니다. 그 후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가 되어 40년을 지낸 후의 모세는 스스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다(I am nobody)”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구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지도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비결은 다름 아닌 겸손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겸손한 자를 만나거든 미래를 걸어도 좋습니다. 특별히 결혼하지 않은 자매들은 겸손한 형제를 만난다면 구체적으로 기도해 보십시오. 겸손한 형제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거들먹거리며 교만한 형제를 만나다면 아예 관심조차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형제는 언젠가는 망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주위에서 겸손한 사람을 발견하면 돈을 써서라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겸손 그 사람 때문에 덕을 보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을 만나면 아예 상종조차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교만한 이웃이 오면 아예 이사를 가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과 함께 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성도가 강한 성도며, 겸손한 가정이 복된 가정이며, 겸손한 교회가 주님께 쓰임 받는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를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성도, 겸손한 가정, 겸손한 교회를 들어 쓰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겸손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담대한 사람
하나님께서는 담대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겨우 300명의 군대를 가지고 135,000명이나 되는 미디안 대군을 대항해서 싸우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담대한 사람을 통해서 승리를 거두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일만 명이었더라.”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자를 쓰시지 않고 당신만을 의지하는 담대한 사람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총사령관 기드온과 300 용사는 바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담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지난주에 살펴본 말씀에 의하면 기드온은 참으로 두려워 떨던 겁쟁이였습니다만, 이제는 더 이상 겁쟁이가 아닙니다. 이제는 그가 믿음의 사람, 담대한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기드온이 부라라고 하는 부하 한 사람을 데리고 먼저 적군들을 정탐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미디안 군인 두 사람의 꿈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13절과 14절을 보겠습니다. “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 동무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지더라. 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 미디안의 한 병사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자신들의 군대가 패배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기드온은 용기가 충천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고 이스라엘 진중에 돌아와서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 군대를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15절) 기드온과 300명 용사는 비록 적은 숫자였지만, 승리를 확신하며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135,000명이나 되는 미디안 대군을 향하여 담대하게 나아갔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담대함입니다. 왜냐하면 승리의 비결이 이 담대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리아가 스위스를 지배할 때, 오스트리아의 총독 게슬러가 스위스를 통치했습니다. 게슬러 총독은 스위스를 지배하게 되자, 시내 중심가에 긴 장대를 세우고 자신의 모자를 걸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에 절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어느 날 스위스의 유명한 인물 윌리엄 텔이 자신의 아들과 함께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게슬러 총독 부하들은 윌리엄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 있었는데 예상대로 윌리엄은 그 모자에 절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지나쳤습니다. 게슬러 총독의 부하들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윌리엄 텔을 체포했습니다. 게슬러 총독은 자기 앞에 잡혀 온 윌리엄에게 한 가지 문제를 내놓았습니다. 아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화살로 쏘라는 것이었습니다. 윌리엄 텔은 먼저 화살통에서 두 개의 화살을 뽑아 하나는 품에 넣고, 하나는 활시위에 얹고 아들 머리 위에 있는 사과를 향하여 힘차게 당겼습니다. 화살을 정확하게 아들 머리 위에 있는 사과에 꽂혔습니다. 게슬러 총독이 윌리엄에게 “왜 그대는 두 개의 화살을 뽑았는가?”라고 묻자, 윌리엄은 “만약 내가 실수로 사과를 맞추지 못하고 아들을 다치게 하면 나머지 화살로 당신을 죽이려고 했소.”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게슬러 총독이 “당신은 내가 무섭지 않소?”라고 묻자, 윌리엄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난 후, 지금까지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두려워해 본 적이 없소.”
그렇습니다. 우리는 윌리엄 텔처럼 사람을 무서워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담대한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두 사람을 꼽고 싶습니다. 다니엘과 다윗입니다. 다니엘은 왕 외에 어떠한 신에게나 사람에게 절하면, 사자 굴에 던져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을 가지고 전에 행하던 대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냥 이불 뒤집어쓰고, 또는 중얼중얼 속으로 대충대충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사자 굴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사자 굴속에서도 살아나오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다윗도 다니엘과 마찬가지로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구척 거인 골리앗 앞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 떨었지만, 그는 달랐습니다. 비록 그가 나이어린 소년이었지만, 담대하게 골리앗과 맞짱 떴습니다. 결국 그도 거인 골리앗을 넘어뜨리는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19세기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가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를 하는데 갑자기 바이올린 줄 하나가 끊어졌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지만, 그는 그냥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둘째 줄이 끊어졌고 나중에는 셋째 줄마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파가니니는 남아 있는 한 줄을 가지고 끝까지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그가 한 줄을 가지고 연주를 마치자마자, 청중들은 “브라보! 브라보! 앙코르! 앙코르!”를 외쳤고, 그는 한 개의 줄을 가지고 다시 앙코르곡을 연주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파가니니는 남은 한 개의 줄에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바이올린의 거장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도 바이올린의 거장은 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믿음의 거장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돈 줄, 건강 줄, 명예 줄, 인기 줄 등, 모든 줄이 끊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다른 모든 줄이 다 끊어졌다 할지라도, 하나님 줄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27편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자 굴을, 골리앗을 무서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다한 미디안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미디안 군대에게 나아갔던 기드온과 300 용사처럼 담대하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담대한 믿음의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승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3) 순종의 사람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 군대를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고 소리치며 한 가지 작전을 세웁니다. 모든 300 용사는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게 하고, 또 항아리 안에 횃불을 감추게 한 후, 세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17절과 18절입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나의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가에 이르러서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나와 나를 좇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그 진 사면에서 또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도대체가 이해가 되는 않는 명령입니다. 전쟁터에서 나팔이 왜 필요합니까? 싸움터에서 군인들 위문공연할 일이 있습니까? 또 전쟁에서는 칼이 필요한 것이지, 왜 빈 항아리가 필요합니까? 전쟁터에서 장담아 먹을 일 있습니까? 또 기드온은 자기만 보고 자기 하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나팔을 불면 장단 맞추어, 따라서 나팔을 불라는 것입니다. 갈수록 이해가 되지 않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명령을 받은 300 용사는 어떠한 반응을 보입니까? “전쟁터에 무슨 놈의 나팔이 필요합니까? 전쟁터에서 연주할 일이 있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까? 아니면 “또 횃불은 왜 준비하라고 합니까? 항아리는 장독대에 놓아두는 것이지, 전쟁에 쓰는 것이 아닌데요?”라고 반문했습니까? 아닙니다. 300 용사는 총사령관 기드온의 명령대로 순종하며 준비했습니다. 비록 이해가 되지 않는 명령이었지만, 명령대로 순종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순종은 납득이 되지 않아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내 뜻과는 맞지 않고 내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대로 따르는 것이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처럼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여 말씀하실 때가 많습니다. “여리고 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돌아라. 그리고 일곱 번째 되는 날에는 일곱 바뀌를 돌아라.” 너무 우스운 이야기 아닙니까? 한 두 명도 아니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할 것 없이 전부 꼬리를 물고 뱅글뱅글 돌라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십니까? 또 일국의 국방장관인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알몸으로 일곱 번씩이나 들락날락 해라”는 명령이 이해가 됩니까? 그냥 한번만 몸을 담그라고 할 것이지 하필이면 일곱 번씩이나 요단강에 몸을 담그라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함으로 여리고 성을 돌았을 때, 금성철벽 여리고가 무너진 줄로 믿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순종하고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담갔을 때, 그의 피부가 치료된 줄로 믿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명령이었지만, 300 용사들은 기드온이 지시한 대로 순종했습니다. 세 팀으로 나누어진 300 용사들이 각각 빈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는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는 나팔을 든 군사들이 나팔을 불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캄캄한 밤중에 미디안 군사들은 자기들끼리 죽이고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22절). 결국 기드온과 300 용사는 칼도 빼지 않고 135,000명이나 되는 미디안 대군과의 싸움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처럼 순종이 능력입니다. 순종이 축복입니다. 순종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비결입니다. 순종할 때, 하나님 손길을 경험하게 됩니다.
언젠가 자동차를 타고 Riccarton에 있는 모 성도 댁에 심방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이 늦게 생겨서 큰 길로 가지 아니하고 좁은 골목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길 한가운데에 <이 길은 막혔으니 다른 길로 돌아가시오.>라고 씌어 있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앞을 보니까 아주 잘 닦인 아스팔트길이 곧게 뻗어나가 있어 저는 표지판이 잘못 세워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한참 달렸습니다. 그러나 한참을 들어가다 보니까, 도로 공사 중이어서 더 이상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는 수없이 다시 차를 돌려서 되돌아 나왔습니다. 결국 약속 시간에 한참 늦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근시안적인 판단만을 믿고 살다가, 좌절하고 되돌아서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표지판을 믿지 않고 그 뜻을 어긴 까닭에, 잘못된 길을 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표지판 앞에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여러분들보다 훨씬 지혜롭습니다. 여러분들보다 훨씬 강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여러분의 경험에 맞지 않아도, 순종함으로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도무지 여러분들의 뜻과 맞지 않고 여러분들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손길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가지 질문을 하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쪽에 속하십니까? 하나님의 테스트에 탈락하여 집으로 돌아간 31,700명에 속하십니까? 아니면 엄청난 승리의 기쁨을 맛보았던 기드온과 300 용사에 속하십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기드온과 300 용사와 같은 겸손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갔던 기드온과 300 용사처럼 담대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명령 그대로 순종하였던 300 용사들과 같이 순종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날에도 의미 없는 31,700명 다수보다도, 300 용사와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300 용사,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담대하게 전진하는 300 용사, 이해가 되지 않아도 철저하게 순종하는 300 용사를 오늘날에도 필요합니다.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무릎 꿇은 자
삿 7장 1~8절 / 서정호목사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학교에 다니는 내 자녀가 당장 지금은 다른 곳에는 신경 쓰지 말고 오직 공부에만 전념해 주길 바랍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지금 왜 공부만 해야 하는지 내가 하고픈 일은 왜 못하게 하는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차근차근 설명해 주어서 이해시킬 수 있는 부분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철이 들어야 한다', "이래선 안 되겠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는 스스로의 깨달음이 있어야 공부에 달려들 수 있습니다.
누가 공부를 못하게 했다면 "나는 공부 못한다. 공부할 수 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만 자기가 공부하지 않으면서 '못 한다'고 하는 건 모순입니다. '나는 공부 못한다'하지 말고 '나는 공부 안 한다', '나는 아직 철이 안 들어서 지금도 공부 안하고 있다'고 해야 옳은 표현입니다. 결국 공부는 내가 하는 것 하면 되는 것인데 아직 뭘 몰라서 지금 시작을 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시작만 하면 공부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나는 믿음이 없다. 믿음이 약하다"는 겸손 아닌 겸손의 말을 우리가 얼마나 흔히 사용하고 있습니까? 마치 믿음 없는 것, 믿음 약한 것이 주변의 환경이나 남의 탓인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믿음 갖지 못하게 한 것도 아닌데 왜 믿음 생활이 성장하질 못할까요? '공부 못 한다'고 하던 학생이 “안 되겠다. 이건 나를 위해서 내가 매달려야 될 일이로구나” 하고 깨달아 공부를 하므로 공부를 잘 할 수 있게 되듯이 '나는 믿음이 형편없다'고 스스로 낮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던 성도가 비로소 은혜를 알고 예수를 제대로 믿기 위하여 스스로 열심 내고 말씀의 자리, 기도의 자리를 찾기 시작할 때 신앙의 성장은 시작될 것입니다.
결국 "안하고 있는 게 문제일 뿐" 못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 요소가 바로 "깨달음"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억지로 시키기 전에 어느 날 "내가 이렇게만 살아서 안 되겠다. 나도 뭔가 시작해야 하겠다"하고 바짝 달려들 때 비로소 삶이 달라지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태에서 한 단계 도약을 위한 깨달음이 절실한데 그 깨달음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일까요? 그 깨달음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현실 속에서 기도를 시키십니다. 기도를 시키신 다음에는 오늘날 내 현실의 문제를 직시할 수 있도록 실패의 원인, 무기력함의 원인, 미성숙의 원인을 보여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깨달음을 즉각 주시질 않고 왜 기도를 시키실까요?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만 그 동안 못보고 지나치고, 모르고 지나치던 사실 즉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점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을 하고 그 날 너무 괴로운 나머지 미친 사람처럼 밤새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급기야 강을 건너는 큰 다리 위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깜짝 놀라 주위를 돌아보니 저 만치 늙으신 자기 아버지가 조용히 바라보고 계셨다고 합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의 괴로움을 알면서도 뭐라 위로할 길이 없자 계속 그를 따라다녔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지금도 여러분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 아버지와 같으신 분입니다. 그 분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은 "나의 모든 부족을 다 메우고도 남을 만큼" 엄청난 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사기 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편없이 약할 때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시 미디안 거민, 아말렉 사람들에게 당하고만 살고 있었습니다. 이길 힘이 없으니까 농사지으면 다 빼앗기고 양과 나귀등 동물들도 다 앉은자리에서 빼앗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6절"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깊은 좌절감만 쌓여가고 있었고 스스로 무능함을 탄식하는 중에 오직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 뿐"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 기도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곧 "중대한 깨달음을 주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토록 당하고 살 수밖에 없게 된 원인을 알려주셨습니다.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기 때문이야"(삿6:10) 이스라엘이 오늘날까지 살아온 역사는 하나님을 잊고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역사였습니다. 그러다가 때로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들 멋대로 살아보고자 곁길로 나갈 때 하나님은 "비참한 현실"에 내버려두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은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 분명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몰라서 당하고만 살아오다가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 이젠 살길도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가 시작되는 사람에게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속에는 "기드온"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는 "기드온과 삼백용사"라는 유명한 사건의 주인공인 바로 그 기드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기드온은 처음부터 "영웅"이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눈치껏 살던 사람, 겁도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쓰시고자 사자를 보내어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6:12)하였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하시니 그의 입에서 당장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닥쳐왔습니까? 이렇게 당하고만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삿6:13) 우리도 수시로 하나님 앞에 투덜거리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큰 용사여"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자체가 곧 네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너는 왜 네가 가진 능력조차 알지 못하느냐? 너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면 그 다음엔 가만히만 있으면 되는 줄 아느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곧 네 속에서 "큰 용사"다운 능력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걸 왜 몰랐느냐?" 하는 것입니다.
"너는 네 힘을 의지하고"(삿6:14)이 말은 '너의 힘은 곧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주실 힘이다. 그 힘을 의지하고 일어나면 지금 무엇이 두렵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이 말씀을 아직도 못 알아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 자체와는 별도로 하나님이 큰 군사를 보내 주시는지 큰돈을 주시는지 뭔가 구체적인 방책을 보여주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드온이 여전히 자신 없고 못 알아듣자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하리라"(삿6:16) 더 필요한 게 없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네가 미디안을 물리치기에 충분할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기드온은 그래도 확실하지 않으면 덤벼들지 않는 자기 성격을 그대도 보여줍니다. "증표"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기드온이 해 달라는 대로 해주시면서 함께 하심의 증표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에 어느 정도 믿음이 생긴 기드온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행하게 됩니다. 그것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던 일, 죽기를 각오하고야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즉 미디안의 우상 바알과 아세라의 단을 다 부숴 버린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때로 "도전하는 일"입니다. 엄두도 못 내던 일, 넘보지도 못하던 일에 도전하되 돌다리 두드리듯 이리저리 맞춰본 후에 승산이 있으면 하고 승산 없으면 포기해 버리고 비열하게 살아가는 그런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에 의지하여 도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질 않았는가. 또 다른 것은 필요 없다. 네게는 내가 함께 한다는 것이 최고의 무기가 될 것이다" 기드온이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바알의 단을 훼파(삿6:28)한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늘 힘센 불량배에게 매 맞고 돈 빼앗기고 당하기만 하던 아이가 그 불량배 집에 주먹만한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깬 것과 같습니다. 예전 같으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깨달음, 즉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 하다가 "아! 하나님 말씀 안 듣다 이렇게 되었구나" 하게 되었다면 그 다음엔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요? 이젠 하나님 말씀만 듣고 다른 말은 듣지 말자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곧 성장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도전 정신" 기드온은 현실 타협 그리고 비참할지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만 찾던 자리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도전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바알의 단을 다 부숴 버리고 나니 기드온에게 별명이 하나 붙었는데 "여룹바알"입니다. "감히 바알의 단을 부쉈으니 바알과 싸울 자"라는 뜻이었습니다.(삿6:32)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일을 저질러 놓으니 당연히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들이 다 모여 이스라엘을 삼킬 듯 달려들었습니다. 자! 이제 일은 저질러 놓았고 미디안 사람들은 '잠자던 사자'를 건드린 것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니 그 말만 믿고 이렇게 시키는 대로 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젠 하나님 쪽에서 뭔가를 보여주실 차례입니다. 함께 하마 하시는 하나님은 이 일촉즉발 위기의 순간 어김없이 찾아오셨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삿6:34)
이 하나님의 방법을 정리해 봅니다. 말씀에서 떠나 교만한 이스라엘을 무기력하게 하시고 미디안 사람들에게 꼼짝 못하고 비참하게 당하고만 살게 하시던 하나님. 그건 분명히 하나님이 버리신 게 아니라 '너희가 나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우면 "기도"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순종"이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일 그 하나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므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다른 때 같으면 못했을 일을 하게 하시면서 '순종'을 실천케 하셨고 순종한 결과 찾아온 예상되었던 "환란"앞에서 하나님의 신으로 기드온을 사로잡으셔서 "많은 사람들(뜻밖에 많은 연합군 병력 - 32,000명)을 붙여 주십니다"(삿6:34-35) 이제는 한번 해볼 만하게 되었습니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의 위세에 눌려 이제껏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눈치만 보고 살던 이스라엘에 3만 2천의 병력이 모여든 것은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순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미 충분한 사실"을 또 잊을 뻔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삿7:2) 이게 무슨 말씀인가요. 한사람이라도 더 힘을 보태야 이길 수 있겠다 싶을 때에 "너무 많다"니 사실 그 동안 이스라엘이 기가 죽어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모든 면에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숫자도 부족하고 힘도 부족하고 그래서 용기도 없었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겨우 해볼 만하게 되었나 싶었는데 하나님은 또 '너무 많다'고 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함께 해 오셨고 앞으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면 하나님만으로도 모든 면에 충분히 차고 넘친다면 지금 눈에 보이는 수많은 지원병은 중요하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오늘날까지 이 3만2천의 사람이 없어서 졌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얘기하질 않았느냐? 이미 너희에겐 미디안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너희가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을 뿐이었다" 지금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가르치시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없어서 못한 게 아니다, 못 믿어서 못한 거다", "믿음이 없어서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믿고 실천에 옮겨본 일이 없어서 그런 거다".
결국 주님만으로 충분하다면 3만 2천명 전부 없어도 기드온이 미디안을 물리치는 일은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무 많다"하신 일이 믿음 없는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힘든 일이지만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너무 많다'고 하신 이유를 명쾌하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지금 이 싸움을 또 다시 숫자 싸움으로 몰아가면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7:2)
하나님은 계속해서 강조하시기를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다. 숫자로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함으로 되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철저히 의지함으로 되는 것이다. 내가 어차피 너희를 이기게 할텐데 3만 2천 병력으로 맞싸워 이기고 나면 너희가 나를 생각지 않고 너희 힘으로 이겼다고 생각할 게 아니냐. 3만 2천명은 너무 많다. 그중 전쟁에 나가기가 두려운 이들은 돌아가도록 해라"(삿7:3)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중 2만 2천명이 돌아갔습니다. 계산해 보십시오. 이젠 몇 명 남았나요? 1만 명만 남았습니다. 기드온 생각에 "3만 2천 정도면 해볼 만 했는데 만 명 가지곤 어림도 없겠어"할 때 하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많다"(4절)
하나님은 철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더 이상할 말이 없게끔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완전 힘 빼기"단계이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이었는가 하면 1만 명 중 3백 명만 있으면 되겠다 할 때까지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3백 명만도 충분하신 데 이스라엘은 3만 명 이상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차이인가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3만 2천 병력만 의지할 일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3백명도 절대 부족한 숫자가 아닌 것입니다. 보라! 하나님 있는 사람은 없어 보여도 이미 모든 면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사람은 결국 숫자의 힘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까지 우리의 인생은 "숫자싸움"으로만 이어져 왔습니다.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줄 알고 잔뜩 주눅이 들어서 살았고 가진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줄 알고 슬금슬금 눈치만 보고 살아왔고 뭐든 크고 많아야 힘을 쓴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이스라엘도 기드온도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 꼼짝 못하고 당하고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왜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지 않느냐. 이제 알았느냐" 그렇습니다. 숫자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능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의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너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하고 아직도 멀었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는 너는 이미 다 갖추고 있구나" "공부 못하는 게 아니라 공부 한하는 거라는 사실을 인정하느냐" 믿음이 없는 게 아니라 믿는 대로 살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1만 명이 아직도 너무 많아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람을 추려 가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쓸 만한 사람은 그중 300명이었습니다. 9700명과 300명은 어떻게 나뉘었는지를 아는가요? 그렇습니다. 물가로 내려가 물을 먹게 하는데 9700명은 각기 무릎을 꿇고(삿7:5-6) 입을 대고 물을 마셨습니다. 어떤 자세였는가, 어떤 방법으로 먹었는가 하는 것 보다 본문이 강조하는 부분은 무릎을 꿇은 자 9700명 대 무릎을 꿇지 않고 손으로 떠먹은 자 300명의 차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는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숫자에 신경 쓰느라고 임마누엘 하나님을 놓치게 되면 그래서 '돈 모아두기, 내 실력 쌓기, 내 사람 만들기'에만 집착하게 된다면 하나님은 '너무 많다'(다 소용없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걸러내야 할 대상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 방법으로 사는 그 길, 그 길은 이미 세상을 향해 "무릎 꿇은 길"입니다.
세상을 향해 무릎 꿇은 사람들은 '임마누엘 하나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결코 맛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기드온의 3백 용사를 우리 가운데 찾고 계십니다. 세상을 향해 무릎 꿇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줄 아는 이 시대의 용사들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일중에 가장 크고 귀한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성도는 죽어서 기도의 흔적을 남겨야만 합니다. 이름 남겨서 무엇 하겠습니까? 기도는 죽어서도 역사하고 기도의 응답은, 기도의 사람이 죽은 후에도 계속됩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대리석으로 지은 교회도 아니고 세련된 신자도 아니며 더 많은 헌금도, 더 많은 지식도, 프로그램도, 더 넓은 예배당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비밀병기를 주셨는데 그 것은 광야 40년을 승리와 환희로 이끌었던 모세의 지팡이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지팡이만 있다면, 오히려 다른 것들은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그렇게도 두려워하고 주저하고 막막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돈을 주시지도 아니했고, 탱크를 몰고 가라 하지 않으셨고, 오직 투박한 지팡이 하나 붙잡으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애굽과도 같고 소돔과 고모라와도 방불한 세상에서 꼭 붙잡아야할 것은, 기도의 지팡이입니다. 기도의 지팡이는,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링크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공급받는 신령한 파이프입니다. 기도의 링크가 끊어지고, 기도의 파이프가 녹이 슬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공급받지 못할 것입니다. 기도는 응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명심할 것은 지금 우리의 싸움은 숫자 싸움이 아닙니다. 사탄은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숫자'문제를 부각시키면서 "없다. 부족하다. 안 된다. 못한다."하는 소리만 나오게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뭐가 없어서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분만으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싸움입니다. 깨달았으면 그 믿음을 능력으로 발전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여, 300명을 주소서!
삿 7장 1~8절 / 김흥규목사
<결점 많은 기드온을 쓰신 하나님>
사사기에는 대략 12명 정도의 사사들이 등장하는데 기드온 이야기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6장부터 8장까지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영어로 'Judges', 즉 '판관기'로서 이스라엘에 왕이 나오기 전까지 주로 재판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지도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 이후부터 사무엘 선지자가 나타나기 까지 약 30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사사기에는 재판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나오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이 국가적인 위기를 만났을 때 나라를 구한 영웅들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사들을 '군사적인 구원자들'로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이라는 사사는 이스라엘 민족을 미디안의 압제와 침략으로부터 구해낸 영웅입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사사들 가운데 기드온과 삼손이 가장 유명한데 이 두 사람은 그만큼 뛰어난 영웅인 것에 비례해서 결점도 많습니다. 특히 기드온의 경우에도 워낙 의심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들어 쓰셨는데 미디안 군대를 물리친 뒤 민족적인 영웅이 된 다음부터 보여준 행보는 더더욱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왕을 세우는 것을 싫어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왕인양 행세하며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챘고 스스럼없이 우상숭배를 자행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기드온이 모세처럼 시작했다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던 아론처럼 끝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중요한 사실은 기드온이 인간적으로 매우 심각한 결함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한 시대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기꺼이 쓰셨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완벽한 사람만 쓰시는 것이 아니라 흠이 많고 일그러진 사람도 기꺼이 사용하십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시대에 혜성처럼 나타난 지도자입니다. 미디안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두 번째 아내 그두라 사이에 태어난 자손입니다(창 25: 2-4). 이들은 시나이 반도와 아라비아 서쪽을 배회하며 살던 반(半) 유목민족이었습니다. 이 미디안 족속들이 아말렉 사람들과 동방 사람들과 합세해서 장장 7년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먼저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극도의 심리적 공포심을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집에서 편안히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이나 요새, 동굴 등으로 쫓겨 다니기 일쑤였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생고생 해서 만들어 놓은 농작물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컨대 수많은 가축 떼를 몰고 와서 한참 자라나고 있는 곡식을 뜯어 먹게 했습니다(삿 6: 5). 그리고 산적처럼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양이나 소, 나귀 등의 가축을 모조리 빼앗아 갔습니다(삿 6: 4). 미디안 족속들은 그야말로 아무 특별한 이유도 없이 약자를 괴롭히는 깡패와도 같이 조금 힘이 있다고 해서 이스라엘을 7년 동안이나 괴롭혔던 것이지요.
이렇게 이스라엘의 원성과 탄식이 하늘을 찌를 듯 했을 때 하나님이 내세우신 사사가 기드온입니다. '기드온'이라는 이름은 '부수는 자' 혹은 '도끼로 찍는 자'(hacker)의 뜻을 가집니다. 기드온은 이름 그대로 자기 아버지 요아스가 만들어 놓은 바알 신을 위한 제단과 아세라 목상을 찍어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포도주 틀에서 몰래 밀이삭을 타작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삿 6: 11). 밀을 타작하는 일은 도리깨질도 해야 하고 채질도 해야 하는, 상당히 넓은 공간이 필요한 일인데 바위를 파내 2층 계단식으로 만든 포도주 틀에서 이런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일이지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얼마나 소심한 겁쟁이였는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렇게 미디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라는 소명을 받은 기드온은 반신반의(半信半疑) 하는 마음으로 즉각적으로 부르심에 응하지 않습니다. 마치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는 부족하고 연약해서 적임자가 아니라고 변명합니다. 하나님이 기드온과 함께 하시겠다고 몇 번이고 확신을 주셨지만 기드온은 여러 가지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양털 시험입니다.
미디안 족속과 아말렉 족속 등이 이스라엘을 침략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근처에 와서 진을 쳤습니다. 의심이 많았던 기드온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속한 므낫세 지파를 비롯하여 아셀, 스블론, 납달리 지파 등 네 지파의 군사를 모았습니다. 그러면서 전쟁을 하기 전에 정말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예정이라면 두 가지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첫 번째 표징은 양털 한 뭉치를 밤새도록 타작마당에 놓아 둘 테니 그 양털 뭉치만 이슬에 젖게 하고 주변 땅에는 이슬이 내리지 않아서 말라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삿 36-37). 기드온의 요구대로 다음날 아침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양털뭉치를 쥐어 짜보니 많은 양의 물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번에는 양털만 마르게 해주시고 땅은 온통 이슬로 젖게 해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아마도 기드온은 첫 번째 표징이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고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양털은 물을 머금을 수 있지만 땅은 물을 흡수해버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메마른 땅에 이슬을 머금은 양털 기적보다는 아예 불가능한, 양털은 마르고 사방의 땅은 이슬이 내리는 기적을 부탁합니다. 하나님은 이마저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면서 계속 의심하는 기드온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불러서 써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남은 자 300명의 의미는?>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런 일이 있은 다음 하나님께서 군대를 골라내시는 장면입니다. 드디어 미디안 족속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과 이스라엘 군대가 한 판 승부를 겨루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네 지파에서 모두 32,000명이 전투를 치르겠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상대편 적군의 숫자는 135,000명이나 되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낙타를 타고 있었습니다(삿 8: 10). 숫자적으로 계산할 때 이스라엘 군대가 전부 나선다고 해도 1: 5 정도가 됩니다. 이스라엘 군인 한 사람이 적군 5명을 물리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2절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기드온이 거느린 군인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많다니요! 정반대가 아닙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자기 힘으로, 즉 군사력으로 이겼다고 자랑할 수 있으니 돌려보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투를 앞두고 두려워 떠는 사람들은 돌아가라고 했더니 22,000 명이 돌아가고 만 명이 남았습니다. 그야말로 겁쟁이들은 다 물러가고 전의(戰意)에 불타는 용사들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군대의 숫자는 1/3 정도의 규모로 줄어들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 한 사람이 적군 14명과 싸워야만 하는 아주 불리한 싸움이지요.
그런데 이 1만 명의 군대를 가지고서도 전투를 할 수 있을까 말까인데 하나님은 또 한 번 군대 숫자를 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4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 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3만 2천 명에서 만 명으로, 즉 1/3의 규모로 줄어든 이스라엘의 군대가 아직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은 자 만 명을 물가로 데려가서 물을 먹게 하면 그들이 물 먹는 모습을 통해서 집으로 보낼 자와 남을 자를 구분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5-6절을 봅니다.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더니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물 먹는 자세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한 부류는 개처럼 엎드려서 물을 마셨고, 또 한 부류는 무릎을 꿇고 마셨습니다. 저를 비롯한 설교자들이 이 물 마시는 자세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개가 물을 핥듯이 손으로 물을 움켜 입에 대고 핥는 300명은 군인 정신이 아주 뛰어난 엘리트들이라는 해석이지요. 하지만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사람은 주변 경계를 게을리 하는, 군기가 빠진 사람들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남은 300명은 군인 정신이 뛰어난 엘리트들이라는 해석을 흔히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물 마시는 자세에 따라 '참 군인'과 '거짓 군인'을 가려냈다는 식의 해석은 본문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만 명도 너무 많으니 대부분을 돌려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전쟁의 승패가 군인 숫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알려주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자세로 물을 먹었느냐 하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승패가 사람 숫자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더욱이 아무리 본문을 깊이 묵상 해봐도 개처럼 물을 핥기 위해서도 무릎을 꿇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 역시 무릎을 꿇었다는 해석 이외에는 자세한 부연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이 흔히 해석하는 것처럼 개처럼 물을 핥아 먹은 300명의 사람들은 한 쪽 무릎만 꿇고 한 쪽 손에는 창이나 칼을 들고 다른 한 쪽 손으로 물을 떠서 마셨다는 해석은 물 마시는 자세에 초점을 둔 나머지 나온 지나친 상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300명의 군사들 역시 허겁지겁 개처럼 먹은 자들이지 결코 민첩하고 조심성 있게 주변을 살피며 먹은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에서 정말 중요한 핵심은 군인의 숫자를 줄이는데 있는 것이지 이들이 취한 물 마시는 자세가 될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군인 정신이 뛰어난 엘리트 300명만 뽑아서 전쟁을 치르게 하셨다면 이 역시 승전의 공을 하나님께 돌리기보다는 그 엘리트 300 명에게 돌릴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기드온 이야기를 비롯한 성경에 나타난 모든 전쟁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만일 정반대로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자가 300명이고 개처럼 핥아 먹은 자들이 대다수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적은 숫자의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자 300명을 취하셨을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1만 명 중에 뽑힌 300명은 아주 뛰어난 정예부대이다, 창조적 소수이다, 엘리트 중에 엘리트이다"라는 해석은 본문의 정신을 크게 곡해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전쟁의 승패가 사람이나 숫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리는데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이 말씀을 우리 시대에 적용할 때 우리에게 어중이떠중이, 가라지, 쭉정이 다 버리고 아주 소수의 엘리트 정예 부대 300명만 주시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그 역시 잘못입니다. 만일 그런 식이 된다면 하나님은 잘난 사람, 유능한 사람, 소수 정예의 엘리트들만 데리고 일하시는 분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13만 5천명이나 되는 미디안 군대를 300명 가지고서도 이길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생각해보세요. 벌써 두 번씩이나 과감한 병력 감축이 있었습니다. 3만 2천 명 중에 2만 2천 명이 돌아가고 1만 명이 남았습니다. 그 중에서 또 9천 700명이 돌아가고 300명이 남았습니다. 처음 숫자에 비해 약 1/100 정도만 남았습니다. 99%는 돌아가고 1%만 남았습니다. 이제 이 300명의 군사를 가지고서는 이스라엘 군인 한 사람이 약 450명의 적군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는 사자성어가 이런 데서 나온 말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이긴다면 결코 자신의 능력으로 이겼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진실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기드온의 군대를 대대적으로 축소시켰던 것입니다.
<주여, 주님만 의뢰하게 하소서!>
저는 이 말씀을 새롭게 읽으면서 이 본문을 얼마나 오해해왔는가를 회개했습니다. 남은 자 300명을 정신이 빠릿빠릿한 엘리트요 소수 정예 부대로 해석했습니다. 벌써 물 마시는 자세가 남다르지 않느냐, 민첩하고 조심성 있는, 그야말로 군인 자세가 나오는 용사들만 따로 간추리셨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역시 이런 엘리트들, 주일 성수 잘하고 십일조 잘하고 봉사와 전도 잘하는 300명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적용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과 적용은 틀립니다. 하나님은 300명 아니라 100명이나 30명만 가지고서도 얼마든지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무지랭이 오합지졸들만 붙들고서도 엘리트 정예 부대를 부끄럽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이며 우리는 이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 배움 없는 사람, 아무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큰일을 하실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막상 건축을 시작하고 큰일을 벌려놓았는데 그 동안의 과정도 그렇거니와 앞으로의 일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마주친 미디안 연합군만큼이나 힘에 겨운 과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러다 보니 "하나님, 신앙생활 아주 잘하는, 능력 있는 엘리트 300명을 부쳐주소서!" 이렇게 기도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도 아니고 소수 정예 엘리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건축을 주관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제 설교의 제목부터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주여, 300명을 주소서!" 이 기도가 엘리트 300명을 달라는 기도가 되어서 안 될 것입니다. "300명이 아닌 30명, 3명만 있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한 13만 5천 명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표현하는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일부터 21일까지 3주 동안 우리는 특별 새벽 기도회를 열고자 합니다. 우리 많은 분들이 나오셔서 큰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엎드리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어떤 일도 우리 스스로 잘나서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되는 것임을 인정합시다. 오늘 본문 2절 후반부에 있는 말씀을 잊지 맙시다.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아멘.
누가 세상을 구할 것인가
삿 7장 1~8절 / 김형준목사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적은 수보다는 많은 수로 일하기가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이 일을 할 때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고 효율적이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사업을 할 때도 적은 자본보다는 많은 자본이 더 유리 하다고 생각 합니다. 특별히 전쟁을 할 때는 많은 인원과 우수한 장비가 충분히 동원되어야 승리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전쟁에서 소집된 32,000명 중에 31,700 명은 돌려보내고 300명만 남겨서 135,000명이라는 인원을 상대로 전쟁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기드온에게 요청 하시면서 전쟁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의 어떤 뜻이 기드온에게 전달되기를 원하셨을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이제는 정말 해결해 주실 만도 한데, 계속해서 우리의 문제가 붙들고 계실 때가 있습니다. 사업, 자녀, 질병의 문제들로 아무리 몸부림치며 기도해도 하나님이 정말 돌아보시지 않는 것처럼 응답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는가? 내 기도를 정말 듣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이신가? ”라고 의심을 하기도 합니다.
오늘 기드온에게 300명으로 전쟁을 하라고 하신 그 주님의 의도와 뜻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 시간 한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이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을 가르치시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이 전쟁의 승리에 있지 않음을 기드온에게 알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 이스라엘민족은 미디안과 아말렉 군대에 의하여 7년 동안 엄청난 고통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셔서 확신을 주시고 미디안과 아말렉 군대와 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제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은 2등이 없습니다. 전쟁은 양보가 없습니다. 전쟁에 승리해야 됩니다. 기드온은 모든 힘을 다 동원해서 승리해야 자기 백성을 구원할 수 있고 또 그 민족이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기드온은 이 전쟁에 올인(all in) 하는 겁니다. 기드온은 모든 것을 투자해서 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좋은 전략도 필요합니다. 또 좋은 장비들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조금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그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 이였습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때로는 전쟁의 승패에 하나님은 연연해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드온이 만약 자기의 힘으로 이 전쟁에서 이기게 된다면 그 백성들과 더불어 자신들의 능력으로 이겼다고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영광 돌리는 주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고난과 고통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중보기도 카드를 보면 자녀와 질병 등의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안타깝게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풀어주셔야 자신의 인생이 달라지고 우리 가정이 달라지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계속 그 문제를 두시는 이유가 뭘까요?
주님은 오늘 우리자신들의 체질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문제를 풀어지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말 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풀리지 않고 오래갈 때 그 과정들을 곰곰이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뭘 요청하시고 원하고 계신지를 진지하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를 더 가까이 두시고 우리와 더 친하게 지내기를 원하시고 또한 복 있는 인생, 즉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도 여전히 주님은 주님께서 우리의 삶속에서 모든 생각을 붙들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전에 저희 가정의 문제도 한순간에 풀어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일시적으로 다 해결할 능력이 있으시지만 주님께서 기간을 두시고 서서히 해결해 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 자신과 우리 가정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좀 더 가까이 할 때 그 문제를 하나씩 풀어 가심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복 있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그 간절함이 있기 때문에 오늘도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드온에게 300명의 용사만 남기신 이유는 또한 무엇일까요?
둘째로, 진정한 삶의 풍성함과 승리의 삶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서 나온다는 것을 기드온으로 하여금 고백하기를 주님은 원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오늘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주님께 고백하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노력과, 실력 ,좋은 성품, 좋은 부모, 좋은 환경 때문에 지금까지 왔다고 혹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깨닫기를 원하시고 또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위에 살아가고 있다고 매순간 고백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백성에게 주신 부탁과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신명기 8:12-14, 17에 ‘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기드온은 자기 스스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자’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한 우리 인간의 속성을 아시기에 하나님은 가장 연약한 므낫세 지파의 기드온을 택하여 300명으로 승리하게 하면서 우리의 진정한 승리는 하나님께 있고 저들의 노력과 애씀에 있지 않다는 것을 철저하게 고백하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장 34절보면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라고 말씀합니다. 기드온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 가능한 것임을 기드온이 기억하고 고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자신이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을 제거해버리셨습니다. 7장2절에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사람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일을 맡기실까요? “ 하나님 내가 살아가는 것이 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내 인생이 풍성함을 얻게 되었나이다 ” 하는 그 고백이 우리들 입술 속에 끊임없이 넘쳐나기를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화려했던 한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께 부름을 받아서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들 ” 이라는 아무도 드리지 못했던 신앙고백을 했던 아주 탁월한 영성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귀신이다, 유령이다 라고 두려워 떨 때에 그는 거센 풍랑이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담대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할 때 칼을 빼들어 휘둘러서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했던 사람이요 다 떠날지라도 자기는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신뢰하고 누가 보아도 자타가 공인하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이 심판 받으실 때에 그 뜰에서 어린 계집아이의 말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며 저주하였습니다. 그의 모든 신의와 결단이 한꺼번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자신은 대단한 존재 같았는데, 적어도 나같이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느 날 한순간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자신은 주님을 모실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며, 자신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며 원래 자기고향 갈릴리 바닷가로 돌아갔습니다. 주님은 그 바닷가로 베드로를 찾아갑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수고하여서 고기를 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날 밤은 유난히도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로서도 실패하였고 자기 직업, 그룹의 리더로서도 , 모든 것에서 실패한, 한 사람의 새벽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저 밖에서 묻습니다. “ 너희가 밤새도록 수고해서 잡은 것이 있느냐? ”“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묻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 너희들 열심히 수고하고 달려오고 최선을 다하고 밤잠 이루지 못하며 노력한 것이 너희들 속에 진정한 만족을 주었느냐? 진정한 기쁨이 너희들 속에 있느냐?” 라고 물으실 때 어떻게 대답할까요?
그때 주님께서 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제가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리리이다 ”라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경험과 상식과 모든 것을 통해서는 안 되지만 예수님 말씀하신 것, 그 하나 때문에 나는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할 때에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부르실 때에 그 모습과 동일한 일을 주님은 동시에 보여주시면서 베드로에게 깨달음을 주십니다. “ 베드로야, 너의 수확의 그 풍성함이 너의 능력에 있었느냐? 너의 경험에 있었느냐? 네가 내말을 의지하고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말대로 할 때에 거기에 풍성한 수확이 있고 풍성한 삶이 있다는 것을 네가 왜 몰랐느냐? ” 베드로는 자신에게 능력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용하시는 그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할 때 그에게 능력 주심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물고기와 떡을 구워놓고 이 제자를 기다립니다. 여러분, 아마 제자들이 이 물고기와 떡을 보면 광야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그 사건이 기억날 것입니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던 그 광야와 같은 그곳, 단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만 가지고도 주님은 기도하시면서 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풍성케 했던 그 광야의 잔치, 인생이 때로는 광야 같고 어렵지만 그 주님이 함께할 때에 풍성했던 그 시간을 기억하게 하면서 “베드로야 너의 삶에 진정한 행복과 만족은 너희 노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너가 내 말을 듣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기도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할 때 살아가는 그 삶의 역사 속에서 너가 진정 삶의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지 않았느냐?”
주님은 그 베드로를 깨우쳐 주시면서 삶의 풍성함이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그 주님은 이스라엘과 기드온에게 인생의 풍성함과 보람 그리고 진정한 기쁨은 우리의 노력과 소유의 많음과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고 기도하며 주님의 명하신 길을 걸어가는데 있음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그렇게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걸음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며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나 된 것이 나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받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오늘 내가 살아가는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우리의 입술이 되기를 주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노력으로 자신이 이만큼 이루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씀 앞에 다시 청종하십시오. “주님! 내가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내 뜻대로 살았더라면 이 자리에도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와 벼랑 끝마다 나를 인도해 오신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지금까지 나를 붙들지 아니했더라면 오늘 나의 풍성한 이 삶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활과 삶 가운데서 이 고백이 나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또한 주님께서 기드온에게 삼백 명만 남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셋째로, 주님은 헌신된 사람을 사용하셔서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주님의 일을 펼쳐나가실 때 어떤 사람을 쓰실가요?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쓰셔서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갈까요? 주님은 헌신된 사람, 준비된 사람을 쓰십니다.
오늘 이 미디안과 아말렉 사람들과 전투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32,000명이라는 많은 숫자가 모여듭니다. 그러나 아말렉과 미디안 군사들에 비하면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135,000명이라는 저 미디안과 아말렉 군사들은 바다에 모래처럼 많았고, 골짜기에 진치고 있는 저들의 모습을 볼 때 메뚜기 떼와 같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셀 수 없이 많은 숫자 앞에 비교도 안 되는 숫자인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다 돌려보냅니다. 어떻게 돌려보냈을까요? “ 너희 중에 이 전쟁을 통해서 목숨을 잃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적군은 너무나 강하고 숫자도 많고 우리는 너무나 적다. 정말 이 전쟁에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싸울 수 있는 사람만 남아라.”라고 했습니다. 두려운 사람은 다 떠나라고 할 때에 많은 사람이 떠났습니다. 22,000명이 떠났습니다. 대부분이 다 떠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두려워하는 것을 사용하시지 않으실까요?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감정 중에 여러 감정이 있지만 이 두려움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파괴하는 무서운 영적인 감정입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믿음이 우리 속에서 작동할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신뢰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그 두려움을 이웃에게 전파하고 다닙니다. 두려움을 다른 방법으로 포장하고 계속 자기 두려움을 이야기 하면서 공동체를 상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을 성경에서 보십시오. 공통적으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뭡니까? “두려워 말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그 믿음이 깨어지지 않도록 그 믿음을 간직하라는 의미와도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주님 일을 해나갈 때에 주께서 우리에게 가정의 일들을 맡기셨습니다. 또한 직장과 교회 더 나아가 민족의 일을 맡기실 때, 자신의 물질과 건강과 생명을 때로는 다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그 두려움으로 우리가 선뜻 나서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돌려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는 떠나지 않은 이들을 물가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물을 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전부다 엎드려서 무릎 꿇고 물을 마시는데 무릎 꿇지 않고 물을 떠서 개처럼 핥아먹는 사람 300명을 주님은 선택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적어도 전쟁하러온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갈증이 있을 때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무릎꿇고 물을 먹지 않을 것입니다. 삶 속에 때로는 어려운 일, 힘든 일, 마음 상하고 속상한 일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과 본분이 무엇인지를 늘 기억 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주신 그 일 앞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사람, 사명을 끝까지 기억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헌신된 사람입니다.
여러분, 헌신된 사람의 특징은 자기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어 놓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이 기드온에게 미디안군대와 싸우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준 그 힘을 가지고 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걸 영어성경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Go in the strength you have. 가라 네가 가지고 있는 그 힘, 그것을 가지고 싸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고 할 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두려움 때문에 사용하지 못합니다. 내속에 이런 능력이 있는 지도 알지 못합니다. 아니 이것을 최선을 다해서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는 그 사람에게 위로부터 주시는 하늘의 힘을 함께 더하여서 도와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헌신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 속에 있는 모든 힘을 다 사용하여서 헌신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 이 헌신되지 않은 사람은 자기 것을 쓰지 않으며 자기희생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희생이 없이 새로운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희생이 없는 전쟁은 없습니다. 희생이 없는 역사는 없습니다. 주님의 역사는 주님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사람이 아직 헌신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그를 준비시키시는 분인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공동체보다도 내가 더 우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공동체가 존립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붙잡지 않고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 자기의 진정한 희생이 없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무런 역사를 하실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물질, 시간, 노력, 정성을 함께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명절이 되면서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웃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질을 내어놓고 마음을 드려서 정말 구체적으로 주의 사랑을 하나하나 헌신하여 나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역사와 심령의 역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기드온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여러분의 삶에 적용하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때로는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근심하며 고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계속 붙드시고 가까이 두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때로는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을 두시면서까지라도 주님 곁을 떠나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 앞에 우리가 다시금 “주님! 오늘 나의 나 된 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에게 있는 이 어려움은 나를 괴롭히는 가시가 아니라 나를 붙드시는 주님의 은혜의 사슬인 줄 내가 믿습니다.” 라는 그 고백이 우리들의 입술을 통해서 함께 올려지기를 원합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자신의 삶의 지표가 라틴어로 Coram Deo'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앞에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오늘 내가 살아가는 이 삶이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살겠습니다.” 주님 앞에 그렇게 고백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칼빈을 통해서 종교개혁이라는 하나님의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중요한 일을 맡기시고 그의 삶을 영광스럽게 사용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모든 동안의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계시며 놓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이며 주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고난과 어려움 중에도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그럴 때 주님이 바로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역사를 하나씩 펼쳐 가실 것을 믿으면서 오늘 주님을 향한 감사의 고백과 주님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함께 모아지는 복된 예배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삿 7장 1절 / 서명성목사
적자생존이라는 말은 ‘환경에 가장 적합한 개체가 결국 생존한다’는 뜻이지 ‘강자가 결국 생존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 7장을 보면 미디안이 강자였습니다. 그런데 미디안에게 7년간 압제를 당한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물리치고 살아남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싸움은 하나님이 사령관이 되어 싸우시는 거룩한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적자생존의 법칙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나 신앙생활에서도 얼마든지 적용이 가능합니다. 금수저로 태어나야만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흙수저로 태어나면 세상에서 살아가기가 금수저보다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작아서, 교인들이 적어서, 교인들 중에 유력한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27). 우리는 비록 연약한 육신으로 인해 쉽게 죄에 빠져 살지만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주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능력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능히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함께 살펴보며 어떤 상황에서도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을 붙들며 믿음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군인의 수를 줄임(1-8절)
1-8절은 미디안의 진으로 시작해 미디안의 진으로 마침으로써 하나의 문단 단위임을 보여줍니다. 여룹바알이라는 이름을 언급함으로써 기드온이 싸우는 전쟁은 단순히 미디안 군대와의 전쟁이 아니라 바알과의 영적 전쟁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를 통해 여호와만이 참 신이시며 그분만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능력이 있는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기드온과 이스라엘 군사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진을 칩니다. 곡창 지대인 이스르엘 평야(골짜기) 가운데를 흐르는 요단강 지류를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은 남쪽 하롯샘 곁에, 미디안은 북쪽 모레산 앞 골짜기에 진을 쳤습니다. 두 진영 사이에는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었기에 이스라엘 군사들은 미디안 진영을 볼 수 있었고, 자기들의 수가 훨씬 적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미디안 연합군도 이스라엘 군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디안 군대는 지난 7년 동안 이스라엘을 약탈해 왔고 8년째인 이번에도 이스라엘을 상대로 쉽게 이기리라고 예견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군대의 움직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입니다.
- “너무 많은즉”(2절)
전쟁에서 군인들이 적을 때는 문제가 되지만, 많은 것이 왜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전쟁에서는 군사의 숫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이 전쟁을 이스라엘의 승리로 이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이겼음을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기드온은 숫적으로 훨씬 우세한 미디안의 군대와 대항하기 위하여 가능하면 많이 뽑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나팔을 불어 아비에셀 사람들을 모은 후에도 두 번에 걸쳐 추가로 군사들을 모집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모여든 이스라엘 군사의 수가 삼만 이천 명이었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의 대군과 싸우자면 삼만 이천 명도 작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함께 하는 군사들이 너무 많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두 번에 걸쳐 숫자를 줄이십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은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입니다. 여호와께서도 기드온이 사용한 ‘내 손’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 표현은 신명기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하신 일들을 잊고 모든 것들을 자신들의 공로로 돌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경고하며 그럴 경우에 그들이 망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신 8:17-20). 기드온이 사용한 ‘내 손으로’이란 표현은 신명기의 율법 정신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관심은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에도 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이 섬겨야 할 신이 누구인지를 알리는 데 있습니다. 이런 여호와의 참 뜻을 기드온은 많은 군인들의 모집과 양털 시험 등으로 자꾸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먼저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 떠나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진 친 곳은 ‘하롯샘 곁’인데 하롯은 ‘두려움’이라는 뜻으로 기드온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두려움의 샘’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을 돌려보냅니다. 이것은 신명기에서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신 20:8)라고 한 율법 정신을 반영한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자들로 인해 남아있는 자들의 사기까지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칠년 동안 미디안에게 철저히 눌려 지내다 보니 그들과 대항하여 이긴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기드온이 모이라고 해서 오기는 왔지만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이때 두려운 사람은 돌아가도 좋다고 하자 이만 이천 명이 주저하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금신상에 절하라는 왕의 명령을 거절하다가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지게 될 위험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왕 앞에서 담대히 자신들의 입장을 말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즉 우리가 불에 타죽는 다할지라도 우리는 우상들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담대히 선언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담대함’이란 단어에는 ‘현재의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정적인 사람, 소극적인 사람, 현재의 상황을 이유로 핑계만 대는 사람을 기뻐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 “아직도 많으니”(4절)
그렇지 않아도 미디안의 군대에 비하여 수적 열세인데 삼분의 이가 돌아갔으니 기드온은 적지 않게 놀랐을 것입니다. 그래도 기드온은 남은 만 명을 데리고 싸우러 나가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아직도 많다고 하십니다. 만 명이라는 숫자는 누구의 힘에 의해 승리가 이루어지는지 판단하기 애매한 숫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과 함께 갈 사람들을 친히 추리시겠다고 하시며 기드온에게 백성을 데리고 물가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거기서 그들을 시험하신다고 합니다. 5절에 의하면 그들을 “혀로 물을 핥는 자들”과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로 구별합니다. 백성이 물을 마시는 실제 모습을 묘사한 6절은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와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자’로 표현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삼백 명이 선택되었습니다. 삼백 명이 선택된 기준이 무엇입니까? 혀로 물을 핥으니 좀 더 신중하게 싸울 준비가 되었기 때문입니까? 그들이 물을 마신 자세로부터 선택된 이유를 찾으려 한다면 본문이 말하는 본질을 놓친 것입니다. 본문의 의도는 사람의 어떠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선택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별한 목적은 사람 수를 충분히 줄여서 이스라엘이 오직 여호와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명확히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자질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적은 쪽을 택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자가 300명이었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쪽을 택하셨을 것입니다. 졸지에 3만 2천명이 3백 명으로 줄었습니다. 8절에 언급된 ‘백성’은 남은 300명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제야 자신의 능력을 분명하게 드러내실 수 있다고 생각하셨겠지만 기드온은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미디안 진영에 대한 언급은 3백 명의 군대가 느꼈을 긴장감과 불안감을 암시합니다.
적병의 꿈 이야기(9-14절)
군사를 300명으로 줄이신 바로 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그런데 기드온은 미디안을 자신에게 넘겨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두려워하자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부하인 부라를 데리고 미디안 진영에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너의 손이 강해져서 너는 그 진으로 내려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기드온에게 용기를 줄 방안을 이미 준비하신 것입니다. ‘진영’으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셨는데도, 기드온은 ‘진영 근처’까지만 내려갑니다.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군사들이 골짜기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들이 무수한 메뚜기 떼처럼 많고, 그들이 타고 온 낙타 역시 해변의 모래같이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보고 겁에 질렸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기드온은 미디안 병사가 자신이 꾼 꿈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의 한 장막을 무너뜨리는 꿈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을 번역하면 ‘(보리떡이) 장막에 이르러 치니 (장막이) 무너지고 (보리떡이 장막을) 뒤집으니 장막이 무너졌다’가 됩니다. 13절이 개역개정에서는 다 번역되지 않았지만 히브리어 본문에 ‘보라’라는 단어가 두 번 사용되어 독자의 주의를 끌고 있습니다. ‘보라’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에 대하여 말한다. ‘보라’내가 한 꿈을 꾸었다. 옆에서 꿈 이야기를 듣던 친구는 그 꿈의 의미가 하나님이 미디안과 모든 진영을 기드온의 손에 넘겨주신 것이라고 해몽합니다. 그들의 대화는 미디안 군사들이 기드온과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두려움을 심으신 것입니다.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들으면서 기드온은 비로소 이스라엘이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넓은 골짜기를 다니는데 하필이면 미디안 군사가 꿈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고 그 이야기가 마침 미디안을 물리치는 기드온 군대에 관한 것입니다. 우연인 것 같지만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미디안과의 싸움을 해야 하는 기드온에게 확신과 용기를 주어야하기에 하나님은 먼저 미디안의 진을 정탐하게 한 뒤 꿈과 해몽에 대해 듣게 하시고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셨습니다.
꿈의 내용과 해석을 살펴보면 몇 가지 중요한 점이 드러납니다. 첫째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쳤다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이미 기드온에게 약속하신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6:16)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둘째, 미디안의 병사가 말한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느니라”는 해석은 신학적으로 정확합니다. 이 전쟁에 승리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기드온과 이스라엘의 군대는 그것을 수행할 대리인입니다. 하나님은 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과 미디안 모두에게 하나님만이 참 신이요, 하나님만이 진정한 예배의 대상임을 알리려고 하십니다. 기드온의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를 반영합니다. 여호와께서 승리를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은 여전히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던 기드온은 사람의 말, 그것도 적군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부족함을 아시고 그가 원하는 방식을 통해 그에게 확신을 주신 것입니다.
확신을 갖는 기드온(15-18절)
기드온은 미디안 병사들의 꿈과 해몽을 듣고 경배했습니다. 하나님이 미디안을 기드온에게 넘겨주셨다는 말을 듣고 큰 용기와 확신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를 세 대로 나눕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고, 그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숨기도록 지시합니다. 당시의 나팔은 뿔로 된 것이었기 때문에 어깨에 메고, 빈 항아리와 횃불은 두 손에 들고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팔과 항아리, 그리고 횃불은 공격용 무기가 아닙니다. 이 싸움은 군사적 힘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의 작전에 미묘한 균열이 감지됩니다. 그것은 기드온이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라면서 자신의 행동에 집중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이 승리케 하시는 전쟁인데 기드온의 행동이 중요하게 대두됩니다. 또한 기드온은 미디안 진영으로 돌격할 때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라고 외칠 것을 명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승리한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 싶으셨는데 이 상황에서 여호와의 이름과 함께 기드온이 언급된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자신의 신을 위하라’는 구호와 함께 왕의 이름을 언급하는 가나안의 관습을 생각할 때 기드온이 자신을 왕의 위치에 놓은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의 비결
-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과 이방의 전쟁은 모두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의 승패가 군사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즉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 거룩한 용사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며 당신의 백성을 대신해 싸우시고 승리를 가져다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의 압제를 받았던 것도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빠진 결과입니다. 영적 전투의 원리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후에 나타난 블레셋 장군 골리앗과 목동 다윗의 싸움입니다. 다윗은 칼과 창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서 승리를 거둡니다(삼상 17:45). 모든 면에서 골리앗과 다윗은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그분을 신뢰할 수 있도록 분명한 증거를 주십니다. 대적들의 입을 통해 하나님이 미디안을 기드온에게 넘겨주셨다는 꿈과 해몽을 듣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이 분명히 증거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증거인 성경에 집중할 때 하나님을 신뢰하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영적 전쟁에서는 강한 자가 아니라 믿는 자가 이깁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과 동행하시며 그들을 이끄십니다. 그 과정을 통해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됩니다.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300명으로 13만 5천명(8:10)의 미디안 군대와 싸우는 것은 상식적으로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이는 곧 그들이 그 싸움이 여호와의 영적 전쟁임을 알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싸우는 자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얼마나 잘 순종하고 따르는 가이지 우리의 수나 능력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속적 시각과 가치관을 제거하시고, 당신의 크신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날 성도와 교회는 악한 영들과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엡 6:12). 성도는 이미 전신 갑주를 입은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싸워야 합니다. 더 나아가 성령의 검인 말씀을 날마다 묵상해 죄와 사탄의 유혹을 거절하고 주님의 다스리심과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방법으로 싸워야 합니다
영적 전쟁에서는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싸워야 합니다. 기드온은 300명과 전쟁에 임하면서 한 손엔 나팔, 다른 한 손엔 횃불을 들게 했습니다. 드디어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한 것입니다. 악한 세력과의 전쟁에 임해야 하는 성도 역시 이러한 주님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이 명하신 사랑과 섬김을 통해 싸우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런 방법으로 이길 수 없다고 조롱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승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기에 하나님을 신뢰하며 주님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악한 세력과 영적 전쟁을 하며 맞서며 두려움 없이 나아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나가면서
본문은 잘 알려진 기드온과 300 용사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어디에도 3백 명을 ‘용사’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3백 명이라는 적은 숫자는 원래 모인 백성의 1퍼센트도 안 되는 숫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셔서 기드온의 군사 수를 줄이시고 전쟁을 치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을 구원했다고 말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기드온 스토리는 숫자가 많을 때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릴 것을 요구합니다. 자칫하면 큰 숫자를 믿고 헛된 자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에 직면합니다. 눈에 보이는 지금의 상황들로 인해 승리를 확신하기 어렵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십자가 역시 하나님의 가장 큰 실패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가장 큰 구원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 십자가 위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의 영광을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주님이 주신 승리를 빼앗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기 위해 그의 요구에 응답하시며 끊임없이 공을 들이셨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큰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과 영적으로 싸우는 성도에게도 승리를 위한 유일한 무기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성도는 승리의 확신을 주시고 대신 싸워 주시는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과 승리의 원리를 깨달아,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날마다 승리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