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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울드레서 (SoulDresser) 원문보기 글쓴이: 헤이즐넛
소울드레서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댓글 작성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다해주세요.
리뷰들이 너무 좋아서 같이 보고싶어 퍼왔긔. 길지만 읽어볼만하긔
출처 : https://gall.dcinside.com/redsleeves/44196
[글씨를 잘 쓰는 궁녀]
"너는 어떤 궁녀가 되고싶지?"
"소인은 글씨를 잘 쓰는 궁녀가 되고 싶사옵니다."
영빈이 떠나던 날 영조와의 만남에서 어린 생각시 덕임은 글씨를 잘 쓰는 궁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마 글씨를 잘 쓰는 궁녀는 벌이가 좀 더 편하리라는 어린 생각시의 마음이 담겼으리라 생각한다. 글씨를 잘 쓰는 궁녀는 덕임이 살고자 하는 삶을 보여주었다. 글을 써내려 가는 삶, 한 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삶, 선택하는 삶이 그것들이다. 덕임은 본인이 만들고 써내길 바랐다. 그렇기에 영조는 영빈이 직접 지은 '여범'을 하사했다. 여범 또한 필사가 아니라 지었다는 점을 언급하며 말이다.
세월이 흘러 덕임은 자신이 꿈꾸던 대로 글씨를 잘 쓰는 궁녀가 되었다. 여리면서도 힘있고 따뜻한 글씨체를 가지게 되었다. 덕임이와 닮은 그 글씨를 많은 이들이 좋아했다. 그렇기에 제조상궁, 청연궁주, 대비마마 등 많은 이들이 덕임이의 글씨를 갖고 싶어했다. 다만 그들은 덕임이 아니라 글씨를 원했다. 덕임이의 재주를 원할뿐 덕임의 이야기, 그 자체를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런 덕임에게 글씨가 아닌 글을 쓰라는 사람이 등장했다. 바로 산이다. 비록 반성문일지언정 덕임의 이야기를 적어내라고 했다. 이전까지 덕임은 필사 외의 글을 써 본 적이 없었다. 누구도 알고 싶어 하지 않기에 자신을 적어내 본 적이 없다. 오류 투성이의 반성문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산은 그런 덕임에게 끝없이 불통을 내리고, 자기를 바라보고 적어내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 가는 방법을 알려줬다. 산은 그렇게 덕임의 글과 삶을 기다렸다. 그 반성문들은 산의 어느 서랍 속에 여전히 소중하게 담겨있다. 비록 코믹하게 그려낸 장면이지만 한 회를 관통하며 덕임을 궁금해한 유일한 사람을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드라마 속 덕임에게 주어진 설정값은 글씨를 잘쓰고 이야기를 잘하는 아이다. 특히 전기수는 실제 의빈 성씨와는 관련 없이 추가된 이야기로 보인다. (틀리면 알려주길 바람.) 그렇다면 드라마에서 왜 전기수를 잘하는 일까지 덕임에게 부여했을까? 필사 일과 전기수 일은 타인의 이야기를 전한다는 점이 닮았다. 글씨를 잘 쓰고, 말을 잘하는 아이는 남의 이야기를 적고, 남의 이야기를 말하여 살아갔다. 다른 이들은 그의 재주를 샀고, 아이는 그에 만족하며 살았다. 그런 아이의 삶에 끊임없이 질문하며 덕임임을 일깨워 준 사람이 산이가 아닐까 싶다. 필사대신 반성문을 쓰고, 전기수 일 대신 자신의 생각을 또렷이 말할 수 있게 한 사람.
산이 있었기에 덕임은 '글씨를 잘 쓰는 궁녀1'에서 나아가 자신을 알고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는 덕임이 될 수 있었다.
출처 : https://gall.dcinside.com/redsleeves/46813
[왕을 사랑한 궁녀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성군의 조건, 성군의 사람 - 옷소매 붉은 끝동 갤러리 (dcinside.com)
예전에 쓴 이 글에서 이어지는 생각임
왕을 사랑한 그 궁녀는 정말로 무엇을 원했을까?
후궁 신세를 피하는 수동적 꿈 말고
정말로 원했던 것이 궁금해졌어.
처음 덕임이가 사랑에 빠진 순간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 같아.
덕임이의 심장을 처음 움직인 남자는 왕이 아니었어.
아무도 돕지 않는 백성들이 호랑이 밥이 되지 않게 하려고 혼자 발 벗고 나선 청년,
처음으로 덕임이의 재능이 대의에 쓸모가 있다고 인정해준 사람이지.
"훌륭하십니다" 칭찬에 살풋 웃던 얼굴에 덕임이 마음이 처음 흔들렸다면
산이 "책을 읽어다오, 오로지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라고 말했을 때,
정말로 덕임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고 확신해.
덕임은 사회적 쓸모를 인정받을 때 삶의 보람을 느끼는 아이였거든.
적어도 정5품까지는 올라갈 수 있다고 자부심을 느꼈고
임무에 충실하고자 이모비야를 찢었고
그 낱장을 갖고 있는 마음도 내심 언젠가는 공을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
덕임의 꿈은 왕의 사랑을 받는 여인이 되어 궁에서 죽음을 맞는 게 처음부터 아니었어.
차라리 필사로 인정 받고,
전기수 노릇으로 즐거움도 주고 돈도 벌고
재주를 베풀어 친구들의 웃는 얼굴을 보상으로 받는 걸, 인생의 목적으로 삼으면 삼았지.
단단한 유리 천장 아래 적당한 사회적 출세와 돈, 친구들의 사랑 정도가 그 아이가 꿈꾸는 미래,
산을 만나지 않았다면 덕임은 평생 그렇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었을지 몰라.
하지만 덕임은 산을 만나.
더구나 그를 사랑하게 돼.
힘을 갖게 되면 많은 사람을 돕는 데 쓰겠다는 그 남자를 도와서
이 세상을 구하고 사람을 돕는 일에 자신의 재능을 쓰고 싶다는 꿈을 품게 돼.
이 꿈은 중세 봉건제의 남자들 모두가 꾸는 꿈이야.
봉건제의 충심은 에로틱한 애정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굉장히 닮았어.
중세 기사는 영주에게 입술에 키스를 바쳤고 조선의 선비는 사모곡을 썼지.
하지만 여자고, 궁녀인 덕임에게는 불가능한 꿈이지. 덕로면 모를까.
엄혹한 남존여비 사회에서 불가능한 꿈을 꾸는 여자의 운명은 동서고금 패관소설에 투영돼.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운명을 만났다는 걸 모른 채로
덕임이 산의 말을 듣고 그 무대에서 읽는 책이 <운영전>이야.
<운영전>은 궁녀의 사랑이란 곧 죽음이라는 책이지.
<운영전>에서 체제가 불허하는 사랑을 했던
김생과 운영은 유영의 꿈에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지.
궁녀즈와 비슷한 다섯 궁녀들의 우정이 나오고.
이들은 운영을 변호하며 '궁녀'라는 신분이
인간성을 부정하는 부당한 체제라는 논지를 펼치지.
"저희는 모두 항간의 천한 여자로 대순도 아니며 어머니는 이비도 아닙니다.
그러니 남녀의 정욕이 어찌 유독 저희들에게만 없겠습니까?
김생은 우리 세대에서 가장 단아한 선비입니다.
그를 내당으로 끌어들인 것은 주군의 일이었으며, 운영에게 벼루를 받들라 한 것은 주군의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덕임의 문제는 심지어 운영보다 더욱 복잡해.
산은 억압적 체제의 화신인 주군인 동시에 억압적 체제의 희생자인 김생이거든.
산은 덕임에게 불가능한 인정을 얻어내야 할 사회적 권위이자
불가능한 성적 욕망의 대상이기도 해.
하지만 이 딜레마는 5회의 시경 장면으로 잠시 풀려.
산이, 완벽한 권력을 가지지 못한, 위태로운 입지의 세손이라는 사실이,
덕임이 그토록 원하는 역할을 잠시나마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
그래서 덕임은 어명을 어겨 가며 기사의 맹세를 그에게 바친 거야.
그리고 기회가 찾아와.
오로지 덕임만이 갖고 있는 임기응변, 기지와 스토리텔링의 능력이
여러 번 산의 목숨을 살리고, 다른 누구도 줄 수 없는 위로를 주고,
심지어 합법적으로 사랑하고 마음이 설렐 특권마저 주었어.
세손을 사모하는 건 궁녀가 응당 해야 할 일이니까.
산이 눈치 없이 자신을 여인으로 욕망해
완벽한 균형을 깨뜨리지만 않는다면,
덕임은 딱 좋은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거야.
그저 그가 "고맙다, 덕임아" 가끔 말해주기만 하면,
날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팍팍한 삶이라도 찬란한 의미를 가졌어.
그러니 만신창이가 되어 험한 산을 넘어 산에게 달려오는 덕임의 얼굴에서는 빛이 나.
이 순간 그토록 원하던 모든 것이 되었기 때문이야.
맹세한 대로 그를 지킨 기사,
그 품에 합법적으로 안길 수 있는 여자.
사랑과 인정을 한 몸에 받는 충신이자 연인,
그러니까 그녀가 목숨을 걸고 바라던 모든 것.
산의 품에 안긴 덕임은
그 속마음을 헛소리처럼 무방비로 내어 놓아.
육체적 고통도 정신적 고갈도 넘어서는 순수한 아드레날린의 희열.
"그것 보십시오. 내가 지켜드린다 하지 않았습니까.
저하께서는 나라를 지키시느라 바쁘고 저는 그런 저하를 지키느라 바쁘고,
누가 더 바쁠까요?"
덕임이 일평생, 심지어 산을 만나기 전부터 소원했던 순간이야. 자아실현의 순간.
그래서 덕임은 오빠의 질문에 바로 그 장면을 회상해.
산은 바로 그 순간, 주군으로서 또 남자로서
자신과 완벽한 관계를 맺었으니까.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는 찰나의 관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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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산의 입장은 달랐어.
궁녀의 충심이라니 갸륵하다 생각하긴 했지만,
능력과 공을 제대로 인정하기 어려웠지.
덕임은 뛰어난 기지와 재주로 산의 목숨을 여러 번 살렸지만
산은 알지 못했어.
대비에게 가서 수수께끼에 어떤 빛나는 답을 아뢰었는지
동궁을 살려달라 했다가 영조에게 어떤 꼴을 당했는지
금등지사를 어떻게 찾았는지,
대비에게 허수아비 대비가 될 거냐고 어떻게 겁 없는 세 치 혀를 놀렸는지,
산은 알지 못하지.
산은 언제나 덕임을 과소평가해.
시경도 "알고 읽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대비와의 독대도 "이미 망한 것 같은데"라고 하고,
심지어 역모를 알려야 하니 신호연을 외우겠다는 덕임의 말도 믿지 않았지.
산이 덕임에게 바란 건 사적인 위안이야. 집안의 천사.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
여자로서 눈길이 가기 때문에 궁녀인 주제에 충심을 바치겠다는 그녀가 제법 기특하고
어여쁜 데다 엉뚱하고 웃기고 제법 말상대가 되는 그녀가 귀엽고 사랑스러울 뿐이야.
그래서 자신을 사랑해주고 자신을 위해 오롯이 여자로만 존재하길 원해.
오히려 덕로는 덕임의 진짜 능력을 알아보지.
그래서 "재주는 믿지만 신뢰하지 않는다" 하는데
산은 "신뢰하지만 재주는 믿지 않는다"고 해.
물론 산도 9회 엔딩에서 달려가면서 깨달아.
정말로 그냥 위로에 불과한 여자였다면 그토록 사랑하지 않았을 거라는 걸.
자신이 찾아헤매던 모든 의미에서 "자신의 사람"이라는 걸.
산이 혼자 읊조렸던 그 고백이야말로
덕임이 언제나 듣고 싶었던 말이었겠지.
하지만 그의 진심은,
이미 지쳐 기진한 덕임에게는 닿지 않았지.
그리고
모든 건 완전히 변해 버리고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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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왕이 되면서
두 사람을 옥죄는 체제가 무시무시하게 경직되지.
규장각 장면은 그 변화를 천재적으로 포착했어.
덕임은 "동덕회의 유일한 젊은 여인"이었지.
그러나 이제는 세상을 바꾸는 토론을 하는 그를 구경하며
탕약 한 사발을 들고 있는 신세가 되었어.
동덕회의 동료들은 모두 공신이 되었고 홍덕로는 세상을 뒤흔드는 권력을 손에 넣었지.
아무도 덕임의 공을 알아주지 않았어.
그래서, 지금 그녀는 식은 탕약을 들고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다
밤이면 과로에 지쳐 들어오는 왕의 입에 편강을 물려주는 신세야.
그 입술이 고혹적이면 고혹적일수록,
덕임의 괴로움은 깊을 따름이지.
제 몸 속에서 꿈틀거리는 그 욕망은 그녀가 가장 원치 않는 운명으로 이끌 뿐이니까.
그 절망감과 상실감이 어떨까.
자신이 원하는 사회적 권위를 헛되이 남용하는 덕로를,
덕로를 용인하는 산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떨까.
억울하고 헛헛하겠지.
광은부위도 말하잖아. 부마라서 입신을 할 수 없기에 동덕회에서 세손을 모시던 일이 인생에서 가장 보람찬 일이었다고.
"오로지 너만 할 수 있는 일이야"라는 말을 덕임도 다시 듣고 싶었을 거야.
그나마 덕임이 갖고 있는 재능, "세 치 혀"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
아마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은전군을 죽이라 말했을 때 덕임은 차를 엎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겠지.
자신의 세치 혀도, 그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시점이 도래했다는 걸 안 거지.
이제 몸의 욕망도, 인정 욕구도, 그를 사랑해서 생길 수밖에 없는 소유욕도,
덕임을 지독하게 괴롭히는 번뇌가 되어버리고 만 거지.
마음이 커질수록 덕임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죽도록 숨이 막힐 수밖에.
산은 덕임이 울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고 하지. 사랑이잖아.
덕임이도 말했지. 전하가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서, 왕이 된 이후로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서 옆에서 괴롭다고.
서로의 고통을 마주 본 거울처럼 무한히 투영하며 두 사람은 심리적인 나락으로 떨어져.
소모품처럼 무의미한 일의 반복,
사랑하는 이는 눈앞에서 곪아가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만 하는 상황,
출구를 찾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마음이 폭발 일보 직전이 되었을 때,
덕임은 탈출구를 찾아.
왕에게 실망할 핑계.
내가 원치 않는 주군이니 내가 버릴 기회.
정치질 앞에서 궁녀의 목숨을 저울질하던 건, 예전 호랑이 타위 때 홍덕로가 보여주었던 태도.
어명을 어기면서 궁녀들의 목숨을 지켜줬던 산이,
궁녀라는 꾀임에 사라진 아이들의 안위를 정치적 계산보다 앞세웠던 산이,
어쩌면 그가 예전 홍덕로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버렸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지속 불가능한 관계를 풍비박산 내는 감정에 불을 붙여. 어쩌면 그건 탈출구니까.
마음이 아무리 다치더라도,
목숨이 끝장나더라도,
이렇게 해서라도 그를 버릴 이유를 찾고,
내 친구를, 내게 남은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것을,
보잘것없는 내 삶의 파편이라도 구해야겠다.
아니나 다를까, 산은 배신감에 데어
덕임의 기대대로 "한낱 궁녀 주제에!"라고 외쳐버리고
그 키스는 모든 걸 지독하게 복잡하게 꼬아 버리지.
충심과 연심과 사회적 인정욕구와 육체적 욕망이 뒤엉킨 이 관계는,
덕임에게 대체 어떤 해피 엔딩을 줄 수 있을까?
이 무렵 덕임은 남자가 되는 꿈을 꿔.
덕임이 대비에게 읽어주는 이야기도,
청연군주 사가에서 필사하는 책의 내용도,
"남장을 하고 세상에 나가 모험을 하는" 이야기지.
차라리 칼 든 장수가 되어 산의 옆을 지키고 싶었지.
하지만 덕로와 저잣거리에서 만난 일은,
산이 그 둘을 같은 날 버렸다는 사실은,
덕임에게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했을 것 같아.
덕임이 산의 인정을 얼마나 안타까우리만큼 갈구했는가 하면,
청연군주 사가에서 산이 여범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심하게 흔들리며, 어쩔 수 없이 설마, 설마, 기대하는 마음을 보이는 것.
"네?...네?" 그가 드디어 알아줄까. 애타는 기대.
하지만 산은 홍덕로와 그녀는 이미 자기와 무관한 사람이라는 말로 그 기대를 무참하게 끊어버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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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자연스레 <오만과 편견>의 희박하디 희박한 가능성으로 흘러가.
힘을 가진 그 남자가 여자가 원하는 바로 그 모습으로 마술처럼 변화하는 이야기.
혹은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었던 한없이 좋은 남자를 여자가 오해했던 이야기.
그래서 그 오해가 풀리고 둘 사이의 온전한 인간적 사랑이 이상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개인적 성장의 서사.
산의 '고맙다'가 덕임의 공허를 채워주고. 옷자락을 잡는 손길로 완성되는.
픽션이었다면, <옷소매 붉은 끝동>은 이쯤에서 <오만과 편견>이 될 수도 있었겠지.
아니면 지독한 가부장제가 말괄량이 덕임을 길들여 굴복시킨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되었겠지.
그러나 이 이야기가 어떻게 해도 <오만과 편견>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오만과 편견>은 봉건제가 아니라 적어도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 이야기가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아닌 이유는, 산이 덕임만큼 부러지고 꺾이기 때문이야.
산에게는, 다아시가 마음껏 누리는 개인적 자유가 없거든.
개혁군주의 이야기가 아니라 로맨스, 사랑의 이야기라고만 보면,
이 이야기는 덕임에게만큼 산에게도 잔인하고 잔인해.
산은 사실 <시녀 이야기>의 시녀들만큼이나 제 몸에 대한 자치권이 없으니까.
사실, 우리가 마지막에 본 이 커플은, 지쳤어.
덕임은 그에게 죽어도 충신으로 인정받겠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산은 그녀에게 죽어도 사랑을 받아내겠다는 마음을 내려놓지.
그때 두 사람은 서로의 욕망을 제대로 봐.
꺾이고 부러진 서로의 진심을 이제야 알아.
상대가 포기했을 때, 온전치는 않아도 최선의 보답을 하겠다는 약속으로.
이미 덕임의 젊은 야심은 수백번 혹독한 현실에 찢겼지.
설렘에 파안대소하던 산의 풋사랑은,
사랑하는 여자가 깔아준 금침에서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하는 현실에 부서졌지.
어른의 행복은 타협으로만 가능한 것.
그래서 이제 그들은 서로 손을 내밀지.
부지깽이에 타고, 얼음물에 튼 손을 어루만져.
이제 2회차가 남았어.
이 이야기는 다시 운영전으로 돌아갈까?
그래서 산은 처음, 물에 비친 둘의 얼굴을 보았을 때,
부채를 던져 곤룡포를 지우려 했던 걸까?
드라마가 허투로 나오는 장면없이 연출 서사를 꼼꼼하게 깔아놔서 리뷰가 좋은게 많은데 다 다 들고올수가 없냄ㅠㅠ
중간에 있는 링크글도 추천하긔.
첫댓글 와...너무 좋은 해석이다...중간 중간 나오는 패관소설 덕임이의 생각을 말해주고 있었구나
너무 좋은 글ㅜㅜㅜ 정독하고 갑니다
필력 쥑인다… 좋은 컨텐츠 만드니 글빨좋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구나
와 소름돋네 그러고보니 덕임이 필사하거나 읽은 소설들도 다 의미가 있구나
와 소름돋아 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