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9.21 [책과세상] CIA, 박정희에게 방탄 리무진 준 까닭은
또 박정희가 타던 방탄 리무진인 캐딜락 프리트우드 68은 미국 CIA가 제공했다는 충격적 사실도 공개했다. 그러면서 CIA가 그 리무진에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박정희의 모든 것을 밀착 감시했을 가능성과 CIA가 하원정보위원회에 보낸 정보유출 항의서한 등도 물증으로 제시했다.
문세광의 국내 동선과 국립극장 입장과정은 중앙정보부 협조자 없이는 불가능 하다는걸 알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것으로 육영수 암살의 주범이 박정희라는 어처구니 없는 추정을 한다)
박정희가 만났던 케네디가 암살(63.11)되고 동생이자 유력한 대통령후보인 로보트 케네디도 암살(68.5)되고 대소련 데탕트를 천명한 닉슨이 워터게이트(73~74)를 겪으며 탄핵위기에 몰려 사임을 발표(74.8.9)하는 경험과 과정 속에서, 과거 좌익혐의로 사형선고받고 셋째형 상희가 좌익폭동을 주도하다가 총맞아 사망하고 형의 친구인 황태성이 김일성 특사로 밀파되어 자신을 접촉하다가 사형된 과거가 있는 박정희가 닉슨정부의 강권으로 남북이 통일로 가기 위해 같은 날에 독재헌법을 반포할 정도로 궁짝을 맞춰 진행됐는데 이제 상황이 역류하여 박정희는 정치적으로 오도가도 못한 상태가 되었고 그러면서 탄핵공세에 밀린 닉슨이 사임하자 1주일 후에 중앙정보부와 협잡이 역력한 문세광사건이 발생하여 육영수가 피격암살됐기 때문에 박정희로서는 이러한 사건의 흐름들 속에서 자신의 앞에 다가올 운명과 위협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박정희는 한국에 주재하는 cia책임자 하우스만에 비하면 약자에 불과하다. 하우스만은 직접 보도연맹학살을 총지휘하면서 한국전쟁을 관통해 5.16쿠데타를 배후조종하고 1981년 5.18을 기획하고 전두환을 집권시킨 후에 은퇴한다.
박정희는 대중이 입에 올리지 않는 하우스만보다 약자이다. 부인과 자신이 5년 사이에 모두 총맞아 암살 되었다는 단순한 사실이 그걸 증명한다. 하지만 진보민주세력은 그 당시 박정희에 대한 실체적 조건을 인식하지 않고 양식장의 어류처럼 비현실적이고 미제가 제한한 인식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박정희가 진퇴양란에 빠진 바로 그 시기에 63세 최태민이 등장한다. 최태민은 이미 63년에 공화당 중앙위원으로 서대문구 지역위원장으로 총선에 출마한다. 그 당시에는 여당은 농촌에서만 당선되고 서울에서는 대부분 낙마하는 형편이었다. 75년 1월에 사이비 교주가 편지를 보냈다는 행위로부터 최태민과의 인연이 시작된다는 이야기의 전파는 일종의 기만인 셈이다.
최태민과 관련된 핵심적인 요점은 기독교를 기반으로 민병대 20만명 조직화를 단시간에 걸쳐 시도했다는 점이다. 구국십자군이라고 일컫는다.
75.1월에 최태민이 엄마를 잃고 실의에 빠진 근혜에게 첫 편지를 보냈다고 그 당시 청와대보좌관, 수사관, 중정수사기록 등이 증언하지만 75.5월에 벌써 최태민은 기독교 기반의 군사민병대를 조직해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최태민의 등장과 박근혜와 결합하는 과정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그럴싸한 우화를 유포한 셈이다. 이러한 종교기반 민병대는 3세계의 정치권력에서는 단순한 정치력 뿐만 아니라 무력을 기반하기 때문에 매우 강력한 정권친위세력이 된다.
기독민병대는 강화도라는 소지역에서만 1500명이 교회를 중심으로 조직된다. 최태민에 대한, 꿈에 나타난 육영수 에피소드를 소재로한 편지 이야기는 기만하기 위한 박정희의 짜고치는 고스톱이었을 뿐 진짜 목적은 정권을 호위할 준군사조직인 기독민병대를 구축할려는 의도였고 최태민은 그러한 조직이 가능한 능력자였던 것이다.
미제의 핵심 발판인 기독교세력을 역으로 발판으로 하여 민간군사조직을 시도한 셈이고 그 길만이 자신의 정부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박근혜, 목사 총검술 '구국십자단' 지원
박근혜씨는 구국십자군 창군 한 달 전인 5월 12일 대한구국선교단 주최로 임진각에서 열린 조국통일을 기원하는 구국기도회에서 이 단체의 명예총재로 추대됐다.
5월 22일치 <중앙일보>는 '대한구국선교단 소속 102명 3일간 육군에 입소 훈련' 제목의 기사에서 "대한구국선교단(총재 최태민 목사) 소속 1백2명의 목사(여 목사 5명 포함)들이 육군 5019부대에 입소, 특수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22일 상오 11시 서울에서 출발했다. 기독십자군 창설의 일환으로 24일까지 2박3일간 실시되는 이 훈련에서 목사들은 사병들과 똑같이 생활하며 사격훈련까지 받을계획"이라고 전했다.
또 이 기사는 "선교단은 이미 서울 성동구 원지동 청계산에 5만여 명의 훈련장까지 마련,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 근혜양을 명예총재로 추대, 기독십자군을 6월중으로 창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일단 유사시에는 일선에 나설 수 있는 훈련을 실시할 방침이다."고 소개했다.
<중앙일보>는 5월 25일과 6월 16일에도 각각 102명, 107명의 구국선교단 소속 목사들의 입대 훈련과 퇴소 소식을 전했다. 또 6월 10일치에는 구국십자군의 창설 의미와 활동계획에 대한 상세한 기사를 실었다.
"90년 기독교 선교사상 이 같은 십자군이 창설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평가한 이 기사에서는 "구국십자군의 목표 병력은 20만명이며 편성은 일반군 편제에 준해 중앙에 사령부를 두고 각 시·도 단위로 군단, 각 개체교회를 분단으로 한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또 "훈련은 십자군이 편성되는 교회에는 국방부와 교섭해 교관을 파송, 매주 토요일 하오1∼5시까지 4시간씩 전국적으로 일제히 제식·사격훈련 등 군 기본훈련을 시킬 계획"이라고 밝혀 구국십자군이 일종의 준군사조직을 지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7월 18일에는 구국십자군 화랑수련대회가 1박2일의 일정으로 경주 화랑의 집에서 열렸다. 이 수련대회에 참석한 천여 명의 십자군들은 이틀 동안 석굴암에서 새벽구국기도를 올렸다.
구국십자군의 지방 조직도 속속 창설됐다. 8월 7일 강화도에 첫 지방군단 조직인 강화 특수군단이 발단식을 열었고, 이듬해 4월 22일에는 천안 시내 15개 신·구교 교파 연합으로 구성된 충남 제1군단이 창설됐다.
<경향신문>은 1975년 8월 8일치에서 강화 특수군단 발단식 소식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대한구국선교단(총재 최태민) 산하 구국십자군의 첫 지방군단인 강화 특수군단 발단식이 7일 상오 11시 강화초등학교 교정에서 선교단 간부 및 강화군민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멸공대·기동대·전도대 등 각 500명씩 1천500명으로 구성된 군단대원은 발단식에서 위기에 처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순교적 신앙으로 총궐기, 민족중흥의 활력소가 되고 기독교의 선과 미로써 조국의 성업에 총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이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