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태안과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서울에서 오후 네 시 10분 고속버스를 타면 두 시간 남짓 후인 여섯 시에 태안에 도착한다.
태안에서 곰섬 들어가는 시내버스를 타려면 7시 반까지 다시 한 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다.
어차피 저녁 식사를 해야 하므로 그 사이에 근처를 배회하며 먹잇감(?)을 구하러 다닌다.
하느님이 주시는 오늘 일용할 양식이라도 선택은 내게 달렸다.
마치 굶주린 사자마냥 눈을 두리번거리다가 터미널에서 서산 방향으로 큰 길을 따라 나선다.
한 블록을 건너자 "칼국수"간판이 눈에 띈다.
무더운 날씨에는 시원한 냉면이 제격이겠지만 솔직히 난 냉면 맛있는 줄을 모른다.
어쩌다가 다른 이들과 어울려 냉면을 먹게 되는 날이라도 대개는 회냉면이나 비빔냉면을 고른다.
냉면보다는 차라리 냉콩국수를 즐긴다.
냉면 좋아하는 사람들은 냉면의 시원한 육수 맛에 한 겨울에도 냉면을 먹는다지만
난 구수한 콩국수의 콩국 맛이 더 좋다.
국수 중에서는 담백한 우동류나 멸치국물로 우려낸 잔치국수와 애호박 고명을 얹은 칼국수를 좋아한다.
난 국수를 좋아하지만 아내는 국수를 싫어한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국수를 얻어먹을 일은 거의 없다.
오늘 같은 날 눈에 띈 "칼국수" 간판은 파브르의 조건반사 시험 개마냥 벌써 내 입안에는 침이
고이기 시작한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발걸음은 그 칼국수 집으로 옮겨가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안을 들여다본다. 제법 손님이 북적이고 있음은 음식 맛이 나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들게한다.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메뉴판을 보니 칼국수만 해도 그냥 칼국수, 매운 칼국수, 해물 칼국수가 있고 거기다가 여름 특선
검은콩 콩국수에 감자탕까지 머릿속에서는 오늘의 선택이 점점 난해해져 간다.
정답을 모르는 수험생처럼 연필이라도 굴려야 할 상황이다.
이내 여자가 물병과 컵을 들고 와 뭘 시킬 건지를 묻는 게 마치 어서 답을 하라고 채근을 하는 것만 같다.
애라 모르겠다며 그 복잡한 5지선다 문제 중 "해물칼국수'를 선택하고 만다.
조금 있자니 여자가 밑반찬과 보리밥 한 공기를 내온다.
밑반찬은 열무김치와 배추 겉절이 그리고 콩나물 무침이다.
보리밥에 열무라....
오랜만에 보리밥을 보게되니 비벼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보리밥 공기에 열무김치와 콩나물 그리고 배추 겉절이까지 얹어서 비비기 시작한다.
"보리밥 열무에는 고추장이 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보아하니 이미 상에는 고추장 병이 놓여 있다.
알맞게 고추장까지 넣어서 손은 비벼대는데 입에서는 연방 침이 고인다.
그 사이에 여자가 육수를 담은 냄비와 초록빛 털실 타래 같은 국수 사리 한 접시를 내 온다.
여자는 냄비를 가스 불에 얹어 놓고 간다.
"그렇지....
국수가 끓는 동안 난 보리 비빔밥을 먹는 거야."
그러고 보니 이 집은 손님이 우두커니 앉아 기다리게 하지 않는구나!
음식 맛은 차치하고라도 손님 잠시라도 지루할 새라 척척 시간에 맞춰 음식을 내오는 폼이
객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 칼국수 먹으러 왔다가 보리밥 열무 비빔밥에 빠졌다.
오늘의 주제가 해물칼국순지 열무보리밥인지 모르겠다.
오늘 이 메뉴는 그냥 해물칼국수가 아니다.
내가 식당 주인이라면 메뉴판 이름을 색다르게 붙였을 것 같다.
이름하여 <해물칼국수 주제에 의한 열무보리밥 고추장 비빔 변주곡>쯤이면 어떨까?
보리밥 한 공기를 해치우고 있는데 그사이 냄비에 육수가 끓어오른다.
뚜껑을 열고 그 초록 털실 타래 같은 사리를 냄비에 넣고 뚜껑을 닫는다.
여자에게 묻는다. 이 국수사리가 내가 좋아하는 '초록빛'인 이유를.
여자가 내심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턱을 약간 당기더니 "부추를 갈아 넣어서 반죽을 했답니다"한다.
그 부추라고? 중국 사람들은 부추를 파옥초(破屋草)라 부른다지? 집안에 텃밭이 없으면 집 한칸을 부수고라도
부추를 심어먹는다고 해서 파옥초라 한다지 않던가?
뭐라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남자들한테 좋은 거....
그게 파옥초 부추라는데 그 부추를 갈아 넣었다?
이거 그 어디서던가 남자에게 좋은 건데 설명을 할 수가 없다던 어떤 선전에 나왔던 그건가....?
일단 관심을 뛰어넘어 호기심이 극에 달한다.
냄비가 끓기 시작하자 여자가 냉큼 달려오더니 가스 불을 줄이고 간다.
아마도 다 됐으니 먹어도 된다는 신호인 듯하다.
국자로 냄비 안을 휘휘 저어 본다. 아! 여기 저기 왕건이가 즐비하다.
여긴 오징어 저긴 바지락에 홍합이며 굴이며... 이건 또 뭔가? 아니 서울 식당에서는 한 동안 자취를
감췄던 그 귀한 미더덕까지. 그리고 가만 보자... 이게 뭘까? 눈으로 봐서는 판단이 안 간다.
젓가락으로 조심 집어 입으로 가져간다.
아니 이 정성이라니... 감자를 곱게 채 썰어 육수에 담았구나!
국수가닥의 쫄깃함에 부드러운 감자의 식감이라니....
보기 드문 온갖 진귀한 해물이 여기 다 모였구나!
육수 맛이 기가 막힌다. 바로 이 맛이야! 라는 탄성이 하마터면 음식과 함께 밖으로 튀어 나올 뻔 했다.
그러고 보니 이 고장이 해산물의 산출이 풍부한 곳이 아닌가?
문득 지난 번 서울 올라 갈 때 태안여객 버스 기사님 했던 말이 생각난다.
"모르는 사람들은 오징어는 동해안에서만 난디유..."
"근디 오징어가 돌아 나온데유...오뉴월 전께는 동해가 맞지만유 그 댐이는 포항께 그만유.
그라고는 남해 충무 돌아서 목포로 해서 여그 태안까지 돌아 온딩끼유....
지금께는 오징어를 여그서 잡아다가 차로 동해로 간당끼유...."
나도 그 <서해오징어> 모르는 사람 축에 끼었다는 걸 그 기사 말을 듣고서야 알아차렸다.
기실 여기서 잡은 싱싱한 오징어가 여기 해물칼국수에 들어갔으니 그 맛을 새삼 논해서 뭐하랴!
거기다가 입안에서 툭툭 터지는 미더덕의 향기며 굴과 홍합 바지락이 어울려 지상 최고의 해물칼국수
맛이 우러나온다.
이 블러그에 올릴 양으로 연방 사진을 찍는다.
이거 대박이다. 태안에서 건저 올린 오늘의 맛 '홍두깨 칼국수집' 해물칼국수다.
입맛이 없으세요? 여러분 태안으로 오세요요요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