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로잡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왜 내가 재미없게 본 [실미도]가 관객 1천만 돌파를 눈 앞에 두고 있는가? 웰 메이드를 지향하는 최근 한국영화의 세련된 화면과 짜임새 있는 극적 구성에 훨씬 미치지 못한 강우석 감독의 투박한 연출,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인물묘사나 디테일한 감정선을 드러내는데 성공하지 못한 내러티브의 [실미도]에 왜 관객이 몰려드는지 우리는 설명해야 한다. 더구나 한국전쟁을 소재로 했지만 강렬한 신파적 코드를 갖고 있는 [태극기 휘날리며]는 [실미도]가 세운 한국 영화 흥행사를 뒤 쫒아 가며 다시 또 다른 흥행기록을 수립 중이다.
한국 영화, 정말 왜 이러는 것일까? 1993년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서울 관객 1백만을 돌파하는데 여섯 달 걸렸다. 그러나 [실미도]는 일주일, [태극기 휘날리며]는 5일 만에 전국 2백만 관객을 돌파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영화계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떻게 관객점유율 15%의 한국영화가 50%대로 뛰어 올랐으며,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던 서울 개봉관 숫자가 지금은 200여개 이상으로 늘어났는가, 그리고 TV 드라마에 밀려 사양산업으로 인식되었던 영화산업에 금융자본을 비롯한 대규모 자본이 밀려드는가, 우리는 설명해야 한다.
수용자와의 행복한 소통에 성공한 다른 대중문화가 그렇듯이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의 흥행 요인도 복합적이다. 한국 현대사의 감춰진 부분이 드라마로서 표현되었다거나, 한국전쟁이라는 소재에서 이데올로기를 탈색시키고 형제애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보편성을 획득했다고 대답한다면, 참으로 단순한 시각이다. 물론 국가라는 거대조직에 버림받는 실미도 부대원들을 통해 각각 왜소한 개인으로서 조직에 상처받은 경험을 갖고 있는 관객들은, 자기동일시의 마취작용에 빠지게 된다. 어쩌면 이것은 [실미도] 흥행의 핵심 요인일 것이다.
또 반공 이데올로기의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군사정권하의 전쟁영화들보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훨씬 사상적으로 진일보되어 있는 것도 분명하다. 전쟁씬들은 세계 최강 할리우드의 기술진들이 총동원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화면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는다. 한국영화사상 최대의 제작비인 148억원이 투입되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톰 행크스 한 사람의 출연료보다도 적다. 그러면 왜 한국 영화에 이처럼 관객들이 열광하는 것일까? 영화적 애국심일까? 아니면 다른 대중문화보다 훨씬 완성도가 뛰어나서일까?
*지금, 한국영화는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역설적으로, 한국영화의 위기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잔칫집에 재를 뿌리려는 것이 아니다. 관객 1천만 시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자국영화 점유율 50%의 시대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지금, 이곳의, 한국 영화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음을 진단해야 한다.
99년의 [쉬리] 이후 한국 영화계는 대박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투자에서 이득을 보기까지 자본의 회수 과정이 빠르고, 성공하면 짧은 기간에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영화산업은, 위험을 담보로 하는 벤처기업의 속성과 많이 닮아 있다. 지금 한국 영화는 완성된 시나리오를 감독이 연출하는 가내수공업적 단계에서 벗어나, 기획 제작에서 극장 배급망을 통한 유통 소비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전단계가 체계적 시스템으로 이루어지는 선진기업형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프리 프러덕션은 더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흥행성 있는 소재나 아이디어는 여러 단계의 검증을 받은 후 전문화 된 인력들로 구성된 시나리오 계발 단계를 밟는다. 영화가 완성된 뒤에는 관객들의 반응을 면밀히 계산해서 영화 마케팅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제작사들은 좀 더 안정적인 재원의 확보를 위해 코스닥 상장사와 제휴하거나 합병하고 있다.
영화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들 일상의 핵심으로 진입한 것은 아니다. 영화를 둘러싼 우리 삶의 환경이 변한 것이다. 정보화 사회로 속도감 있게 사회가 변화하면서, 극장 상영이 끝나면 영화사 창고에 먼지 묻은 채 버려졌던 필름은, 지금은 비디오나 DVD, 혹은 TV의 주말의 명화나 케이블 TV, 컴퓨터 게임 등으로 계속해서 몸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영화는 단독의 문화 매체에서 고부가가치를 낳는 영상정보화 사회의 핵심 매체로 위치 이동한 것이다. 따라서 다른 문화예술 분야로 흩어졌던 고급 인력이 영화계로 유입되고, 전국 50여개 대학에 설립된 영상관련학과와 영상원 등에서 쳬계적 교육을 받은 우수한 인적 자원은 한국 영화의 질적 향상을 이루고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고 있다.
*흥행에 성공한다고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110억원 제작비를 쏟아 부었지만 전국 15만 명의 관객동원에 그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비롯해서 [아유레디][예스터데이][튜브][원더풀데이즈][청풍명월][2009 로스트 메모리즈] 등 수없이 많은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실패를 기억해야 한다. 고수익 창출의 욕망에 부풀은 한탕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의 흥행 성공은 [쉬리] 이후 연전연패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체를 딛고 서 있다.
국내 문화산업 어느 장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1천만 명의 문화수용자 확보는 오히려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킨다. 영화계는 이제 더러운 한탕주의에 한층 더 휩쓸려 갈 것이다.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영화산업의 속성상 작가주의 영화, 예술영화, 저예산 영화들이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질 것이다. 전국에는 1200여개의 극장이 있지만 이곳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불과 10여편 내외에 불과한 이런 현상은, 크게 투자해서 크게 벌어보겠다는 블록버스터가 아니면 설 자리가 점점 좁아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흥행에 성공한다고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예술로서의 영화가 아닌, 대중적 선전선동에 능수능란한 재능을 갖고 있는 감독들이 영민하게 대중들의 성감대를 건드리면서 제작되는 영화들이다. 그런 영화들의 상당수는 천박하고, 감성의 유효기간은 극히 짧다. 극장 밖으로 나가는 순간 덧없이 사라지는 그런 영화들은 힛트 앤 런 작전처럼 치고 빠지는 마케팅을 동원한다. 언론매체를 비롯해서 홍보에 대규모 물량공세를 투입하여 작품의 인지도를 높이고 전국의 많은 극장을 잡아 한꺼번에 개봉하여 단기간에 많은 관객을 동원하려는 와이드 릴리즈 전략은, 이런 상업영화의 필수적 마케팅이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돈이 될 수 있는 영화, 관객이 들 수 있는 영화만 기획되는 것은, 영화산업이 거대하게 부풀어오르고 뭉치돈이 몰리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현상이다. 거대자본이 투입되는 영화산업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냉엄한 시장경쟁의 생존논리에 영화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하겠는가? 아니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관객들은 자신들의 기호에 맞는 다양한 영화를 즐길 권리가 있다. 상업적 영화의 흥행에 일희일비하는 관객이 아니라, 지속적인 애정으로 극장을 찾고 영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관객이 필요하다. 즉 일시적으로 반짝하는 베스트 셀러보다는 꾸준히 수요가 늘어나는 스테디 셀러가 좋은 것이다. 올바른 영화보기 운동이 필요하다. 관객들도 일시적 재미를 위해 극장을 찾는 것 보다는, 삶과 세계에 대해 사색하기 위해 극장을 찾아야 한다.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는 영화진흥위원회같은 곳에서는, 단편영화 예술영화 전용관을 만들어 흥행과는 관계없는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예술영화가 대중들에게 소비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하게 해야 한다. 한국영화 스크린 쿼터 대신, 제3세계 등의 예술영화 스크린 쿼터제를 운영해서 다양한 영화가 극장에 제도적으로 뿌리박을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관객 1천만 시대를 맞은 지금, 우리는 영화 매체의 본질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 일고 있는 한국 영화전성기가 일시적 환영에 불과한 사상누각에 그치지 않기를 위해서, 영화산업의 토대를 튼튼하게 구축할 수 있는 독립영화, 저예산 영화, 그리고 최상층부에서 영화의 미래를 예지하는 다양한 실험영화와 작가영화들이 공존할 수 있는 영화적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박수는 어느 순간 썰물처럼 사라지고, 이스트를 많이 넣은 빵처럼 잔뜩 부풀어 오른 영화산업은 바람이 빠지면서 왜소해 질 수 있다. 그것을 경고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