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더위도 슬그머니 꼬리를 뺐다. 일교차가 생기면서 포도색이 짙어지고 맛도 깊어졌다. 몇 십 년 만의 더위와 가뭄에도 어김없이 수확 철을 맞았다. 어느 것은 잎이 다 타기도 했고 익기도 전에 포도송이가 말라버린 것도 있지만 나름대로 제 몫을 다한 포도들이다.
밭에 가면 포도들에게 항상 미안하다. 젊은 사람들이 활기차게 웃으면서 재미지게 일을 해야 하는데, 할머니들의 끙끙 앓는 소리만 들어야 하는 포돈들 무슨 신이 나겠는가. 더위에 크느라고 욕본다고 갈 때마다 위로를 해주었다.
농촌에는 젊은 사람이 없다. 아마 그들은 밥을 굶으면 굶었지 땡볕에서 일을 하진 않을 것이다. 일이 힘들어서만은 아니다. 농사에서 희망이 보이고 돈이 된다면 귀농하는 인구가 늘어나 농촌도 젊어질 수 있을 텐데, 농사를 지어봐야 간장 된장 값도 나오지 않으니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봄부터 수확이 한창인 지금까지 일요일 마다 밭에서 살았다. 봄에는 잘 자란다고 추켜 세워주고 여름에는 더워서 어제 저녁에도 잠 푹 못 잤구나, 힘들지? 위로해 줬다. 세상사는 고해지만 그래도 견딜 만 하다고 하니 잘 살아보자고 약속도 했다. 때로는 동요도 불러 주었다.
농작물은 주인 발자국 소리 듣고 자란다고 한다. 포도밭 밑은 논이다. 논주인 아저씨는 전주에 사는데 모 심고부터 탈곡할 때 까지는 시골에서 산다. 논농사는 모만 심어 놓으면 크게 할 일이 없는데도 아주머니와 떨어져 살면서 매일 자전거를 타고 논을 둘러본다. 아저씨의 농사 사랑에 비하면 나는 그야말로 새 발의 피다.
아저씨는 나이 때문인지, 대농이기 때문인지(우리 농장의 서너 배나 되는 평수를 가지고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서인지 여유가 있다. 나보고 일요일은 쉬어야지 뭐 일하러 나왔냐고 야단을 치기도 한다. 잠깐이라도 쉬었다 하라는 뜻이다.
그 아저씨가 요즘 매일 포도밭으로 출근을 한다. 당신 논을 한 바퀴 돌고는 일손이 모자란 포도 수확을 도와주기 위해서다. 아무 말 없이 와서 박스가 부족하면 박스를 접어주고, 포장해 놓으면 띠지를 붙여 열 개씩 반듯하게 줄을 맞춰 놓는다. 농협으로 출하할 때는 트럭에 포도를 실어준다. 가려운 곳을 알아 긁어 주니 몇 사람 몫을 하는 것이다.
아저씨는 포도밭 때문에 살맛이 난단다. 논을 둘러보는 데는 한 시간 남짓이면 끝난다. 나머지 시간이 무료했는데 일도 도와주고, 여러 사람들과 점심을 같이 먹고, 얘기도 나누고, 새참도 먹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것이다. 이 일이 아니면 혼자서 밥 먹고 볼 것도 없는 텔레비전의 채널이나 이리 저리 돌리고 있을 텐데 정말 사는 것 같단다.
때로는 일꾼을 구하지 못해 물량을 납품하지 못하는 날도 있다. 부지깽이도 한 몫 거든다는 이 때 아저씨는 큰 힘이 된다. 농지가 이웃해 있어 알게 된 사이인데 남편은 그를 형님이라고 부른다.
지난 일요일에는 아주머니가 전주에서 오신다고 했다. 우리 밭에 들러 포도 좀 가지고 가시라고 했다. 아저씨가 잠깐 나갔다 오더니 아이스크림을 한 봉투 들고 들어왔다. 아주머니가 사 오신 것이다. 그녀는 밭에 오지 않았다.
더위에 아이스크림, 금상첨화다. 일하는 아주머니들도 환호성을 질렀다. 아저씨의 무료봉사에 아이스크림 간식까지, 맛있고 피로도 풀어주었지만 좀 염치가 없다.
일요일이라서 남동생, 올케, 조카까지 일손을 보탰다. 아저씨가 또 슬그머니 자리를 비웠다. 포도 가지고 가셨어야 하는데 모두들 바쁘니 못 챙겨 드려서 서운했다.
아주머니들은 시간에 맞춰 퇴근을 하고 남동생 네와 우리 부부는 야간작업을 하는데 아저씨가 또 오셨다. 자전거 뒤에는 쌀 포대가 실려 있다. 아주머니는 방아를 찧으러 왔고 막 찧은 쌀이라 가져왔단다. 일 도와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직접 농사지은 쌀까지 주는 것이다. 포도출하로 지쳐있는 남편에게 밥맛 좋은 쌀로 입맛 잃지 말라는 배려다. 햅쌀이라고 작년에도 주셨는데.
며칠 전에는 ROTC 동기생 부부가 와서 하루 종일 가족은 박스를 접고 동기생은 포도를 날라주었다. 일손이 부족한 줄 알고는 연거푸 삼일을 계룡에서 익산으로 출근을 했다.
어느 날은 생각지도 못한 남편의 초등학교 동창들이 와서 일손을 거들어 주기도 하고, 군대에 있을 때 부하직원들이 와서 한 몫을 하고 가기도 한다. 궁하면 통한다고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 같다. 고해지만 사바세계라는 말이 맞다. 농사짓는 일이 희망이 없고 돈이 되진 않지만 바쁜 일손을 거들어 주고 농사지은 것을 서로 나누어 먹을 줄 아는 인정은 아직도 남아있다.
포도밭일 끝나고 아저씨네 벼 수확 때 도와드리고 싶은데 모두 기계작업을 하니 기회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포도하고만 얘기를 나눌 것이 아니라 아래논의 벼들에게도 박수를 쳐 주고 칭찬을 해 주는 것이다. “가뭄에도 참 잘 자랐구나. 수확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끝까지 잘 견디자. 끝이 좋아야 다 좋은 거란다. 지금까지 잘 자랐으니 틀림없이 대풍작 될 거다. 아자자!”
세월은 포도만 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늙게 한다. 포도밭에 일하러 나오는 아주머니들이 지금은 모두 할머니가 되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우리 포도밭의 창립멤버들이다. 마음과 열정은 그 누구보다 앞서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일이 팍팍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니 일손이 부족할 수밖에.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 나도 실감하는 나날이다.
(윤복순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