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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자가의 성 바오로
예수 고난회(Congregatio Passionis Jesu Christi)의 창립자 십자가의 성 바오로(Paul of the Cross, 1694~1775)는, 1694년 1월 3일 이탈리아 제노바 공국의 오버다(Ovada)에서 루가(Lucca Danei)와 안나 마리아(Anna Marie Massari) 사이의 15명의 자녀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15명의 형제들 중 9명이 죽었으며, 바오로는 남은 6명 중 장남이었다. 장남으로서의 가족 부양의 책임은 정규 교육에 걸림돌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신앙적 열망과 수도생활의 원의를 따르는데도 넘어야 할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였다.
바오로의 일생의 신앙적인 전환점은 자신이 "첫 번째 회심"이라고 부른 1713년의 체험이다.
바오로는 어느날 미사 중 어떤 사제의 강론을 들으며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엄위로우심을 느끼는 동시에 그분의 사랑을 받기에 부당하다는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자각"[無 nothingness 체험]이 가슴 깊이 체험하였다. 하느님의 현존의 빛으로 하느님과 자신에 대한 새롭고 깊은 이해가 생기면서, 바오로는 하느님이 자신을 '참회의 생활'에로의 초대하심을 자각하였는데, 바로 이런 내적 변화가 그에게 평생을 지속할 신비생활과 수도회 창립의 성소에 문을 열어 주었다. 1716년 터어키와의 십자군 전쟁에 나간 것은 그의 참회의 열망을 표현하는 구체적인 실례였다. 그는 십자군 전쟁에서 순교함으로써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바오로는 이 전쟁터에서 자신이 다른 종류의 전쟁, 곧 영적인 전쟁[삶]에 투신하도록 불렸음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전쟁터를 떠나 여전히 객지를 떠돌며 이런 확신 더 깊어지게 되었는데, 그는 고향으로 되돌아오던 길에서 흔히 "두 번째 회심"이라고 하는 체험으로 자신의 성소를 보다 구체화하게 된다.
1717년 바오로는 제노아(Genoa)로 가는 길에 리비에라(Riviera) 해안을 걷던 중 세스트리(Sestri) 마을의 가쪼(Gazzo) 언덕 위에 성모님께 봉헌된 작은 경당을 보게 되었는데, 그는 그때의 체험을 "그것을 보았을 때 제 마음은 고독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부모님을 모셔야 할 입장으로 이 열망을 실행할 순 없었으나, 이 고독에 대한 열망은 해가 갈수록 더욱더 제 마음에 감미로움을 더해 주었습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체험으로 바오로에게 고독에 대한 열망과 더불어 '함께 생활할 동료들을 모으고자 하는 열망도 자라났다. 바오로는 이를 하느님의 뜻으로 확신할 수 없었으나, 1720년 여름 미사 후 귀갓길에 내적 평화와 함께 깊은 잠심 중에 마음의 눈으로 성모님이 입고 계신 "가슴에 흰 십자가가 있고 그 밑에 예수님의 이름이 하얀 글씨로 쓰인 수도복"을 본 후 수도회의 창립은 구체화되었다.
2) 예수고난회 창립과 발전
1720년 가을 바오로는 영적 지도신부의 도움으로 가티나라 주교(Francis M. Arborio 야 Gattinara)를 만났으며, 바오로의 영적 체험과 확신의 진정성을 확인한 갇히나라 주교의 허락으로 11월 22일 검은 참회의 수도복을 입고, 카스텔라쪼(Castellazzo)의 성 찰스와 안나 성당에 딸린 초라한 방에서 40일간의 피정을 시작하였다. 이 피정 동안 바오로는 회칙을 작성하였는데, 수도회 창립 이전에 이미 회칙이 있었던 것은 수도회 창립 체험의 독특한 양상이었다. 40일 피정 후 갇히나라 주교는 그의 성령의 영감성을 식별하고 카스텔라조 근처 성 스테판 성당에서 은둔생활을 허락했다. 이곳은 기도와 고독과 참회의 여건을 제공하였고, 이곳에서 영적 지도와 미사, 교리교수와 공적 기도가 허락되었으나, 동료를 모을 수 있는 허락은 주지 않았다. 따라서 바오로는 3월 11일 회 창립을 위해 동료를 모을 교황의 허락을 받기 위해 로마로 향하였다. 9월 20일경 로마에 도착했으나 주교 추천서와 신분 확인서가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성모 마리아 대성당 성모상 앞에서 고난의 기억에 충실하고자 하는 열의를 증진하고 회 창립을 위임하는 개인적 서약을 발하였다. 그 후 9월 8일 항해 중 보았던 몬테 아르젠따리오(Monte Argentario)에 도착하여 관할 주교에게 성모 영보 은수처에서 살 수 있는 허락을 얻었으나 역시 공동체 허락은 받지 못하고 다만 동생 세자 요한과 살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이후 오랫동안 여러 교구에서 은수적 생활과 평신도로서 선교와 봉사 활동을 하면서 수도회 창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실패를 거듭하던 중 1741년 5월 14일 베네딕도 14세 교황(1740~1758)으로부터 교황 면속 수도회로 인준을 받았다. 교황은 회칙을 인준하면서 "교회에서 제일 먼저 설립되었어야 할 성질의 수도회가 이제야 설립되었다"며 새 수도회의 사명을 장엄하게 선포하였다.
또한 1771년 5월 3일에는 타르퀴니아(Tarquinia)에 예수 고난 관상 수녀회가 창설되었고, "신비적 죽음"과 다수의 영적 찬가와 2059통의 영적 서신이 유작으로 남겨졌다. 성인은 1775년 10월 18일 로마의 성 요한 바오로 수도원에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성모 마리아의 통고에 대한 신심을 불러일으키십시오, 천국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수도회 창립자, 설교가, 신비가로 가난과 참회 그리고 고독 가운데 생활하면서 기도를 통해 체험한 십자가의 신비를 말과 행동으로 선포하였으며, 생애 말년까지 교황들의 영적 지도와 고해 신부로 활동하였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1867년 6월 29일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10월 19일이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 사후 수도회는 계속 발전하여, 2000년 현재 예수 고난회는 56개국에서 2,400여 명의 수도자들이 피정과 순회 설교, 본당 사목과 출판 및 매스콤 활동 그리고 군종과 특수 사목 활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를 선포하고 있다.
청계산 트레킹을 이어서 찾은 곳은 우이령 트레킹이다. 북한산 국립공원 권역에 있는 우이령은 삼각산과 도봉산의 경계선의 축이다. 국립공원화를 하면서 함께 묶어 북한산 국립공원이라 이름을 짓지만 산 이름은 엄연하게 다르다. 백운대를 정점으로 만경대와 인수봉을 선으로 연결하면 어느 방향에서 보나 삼각을 이루어 붙여진 이름 삼각산은 우리나라 고유의 산 이름이다. 그리고 당시 도내에서 가장 높다는 인식에서 붙여진 道峯山은 의정부 사패산에서 출발하여 우이령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사패산을 출발한 도봉산 등줄기는 포대 능선을 넘으며 맥이 갈리면서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 천축사 맥으로 남쪽으로 향하고 신선대, 주봉, 칼바위로 이어져서 서쪽으로 향하여 우이주능을 이루며 우이암에서 남쪽으로 달려 우이동 우이령 초입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칼바위 부근에서 북서로 트는 맥이 생기는데 그 맥은 바로 순수 화강암으로 이어지는데 다섯 개의 암봉이라 하여 붙여진 오봉과 그 아래 여성봉 있고 그 안부에 송추폭포와 계곡을 만들고 송추에 가서 멈춰 서게 된다. 서울 우이동을 출발하여 우이령을 넘어가다 보면 좌측은 고양군에 속하고 우측방향은 양주군에 속하면서 오봉부근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물은 석굴암 아래 삼거리에 커다란 담수를 만들고 밤나무골의 멋진 풍광을 자랑하던 운둔의 계곡이었었다. 개인적으로 북한산의 숨은 벽 계곡과 그 아래 육모정을 좋아했고 도봉에서는 주봉아래 용어천계곡, 오봉아래 밤나무 골 계곡과 회룡폭포 계곡을 좋아한 곳이다. 특히 오봉계곡을 가려면 관할경찰서를 찾아가 입산허가서를 받은 후 등반을 하였으나 운둔지역에서 풀리면서 국립공원관리공단에 탐방 신청서를 내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되어 특히 요즈음은 자주 찾게 된 곳이 바로 우이령이다. 그만큼 추억이 많은 곳이다. 오봉을 알게 된 것은 60년대 중반 암벽등반 강습회에 참석하면서부터다. 한국산악회에서 주최한 1박 2일 일정으로 오봉샘 옆에 켐프사이드 설치한고 능선 두 개를 넘어 3봉 아래 스라브 밑에서 시작하여 감투봉을 넘어 하강 후 침니를 올라 다시 쪽두리봉 오른 후 오버행으로 하강하고 다시 제1봉을 올랐었다. 아주 옛적 일인데 지금도 어제일처럼 느껴진다. 강습 후 받았던 기념 페난트와 배지도 있었는데...
일본 섬 트레킹을 준비하면서 함께 할 걸음 여행 새로운 도반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한 일한으로 우이령을 선택한 것이다. 우선 걸음수로는 20,000보 정도 km는 18km로 책정해 두었다. 또한 정주지역에서 출발하는 동선에 편리함을 줄 목적으로 지하철 4호선을 선택한 후 우이경전철 환승을 도모하기 위하여 만남의 장소를 성신여대 역사 환승 입구로 정해 두었다. 예정된 인원을 파악한 후 환승하여 우이동에서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전방별장을 지나 명상의 집 성모님 상 앞에 서서 기도를 시작으로 우이령 트레킹을 시작하였다.
한 무리의 남성 피정객들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드리는 기도소리가 봄을 맞으며 부르는 새들의 노래처럼 맑고 경쾌하게 느껴졌다. 간략하고 낮은 음성으로 기도를 드리자 이어서 도착한 도반들과 함께 기도를 드린 후 트레킹 시작의 첫 페이지 사진을 남겨 둔 후 걸음을 옮겼다.
국립공원 우이령 분소 절차에 따라 손전화기로 받은 전자 표식을 인식기계 아래에 밀어 넣고 통과음으로 입산절차를 끝내고 안으로 들어섰다. 산벚꽃과 진달래 그리고 산복숭아 꽃이 숲의 정경을 아름답게 치장해 주고 향은 봄기운을 더욱더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생동감은 겨울의 침묵을 전부 몰아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숲은 이미 봄 바탕을 만들고 꽃으로 봄을 완성하고 있는 중이다. 열흘간이며 이 정경도 떠날 것이고 그 자리는 성숙의 이름으로 여름자리를 만들겠지...
앞서가며 간혹 뒤를 돌아다 보면 도시생활과는 다른 순수의 환희심이 가득 찬 모습으로 걷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어 덩달아 기분이 숲에 물들어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렇게 걷다 길가에 만들어 놓은 원목 장의자에 걸터앉아 각자 준비해 갖고 오신 여러 가지 행동식을 나누며 쉬어가기로 하였다. 헬레나 자매님께서는 고교동문을 만나 옛 여고시절로 돌아가셨다. 가만히 들어보니 졸업 후 처음 만나는 일이라니 얼마나 반갑겠는가? 그런데 3년 동안 단 한 번도 같은 반은 하지 않았단다. 대신 서로 가장 가까운 동창친구에 서로 친구란다. 고교학연처럼 가까운 벗도 없는 것이 살아보면서 경험하는 일이다. 진달래 빛이 청계산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빛과 향이 압권이었다.
아름다움이 사라진다면 인간의 심성은 삭막해지겠지 하며 꽃그늘에 서서 마음 피정으로 모든 것을 대신해 두었다. 흙길로 이어지는 오솔길에 서면 저 앞에 무엇인가 행복이 나를 기다려 주는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된다.
어느새 우이령 정점에 도착하였다. 전차 장애물 시설 좌측은 상장능선으로 이어지고 우측은 우이주능으로 이어져 우이암까지 연결된다. 우이(牛耳) 소귀라는 뜻이다. 소귀를 닮은 마을 우이동은 도선사라는 큰절의 사하촌이었으며 서울에서 양주로 넘어가는 최단거리 령이었던 길이었다. 계곡이 수려하여 유원지와 명승지의 역할을 하며 서울 장안 사람들에게 피서지였다. 정릉이 그랬고 세검정과 송추도 그러한 곳이었다. 아직도 모니카 회장께서 부르시는 봄노래는 정겹다. 약 5km 걸어 도착한 오봉 산 아래 광장 여러 명의 트레커들이 점심을 챙기고 있었다. 우이령의 길은 지금 형태의 길로 만들어준 사람들은 주한민군들이었다, 그 후 지방관서와 산림청이 사방사업 일한으로 재정비하여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최근에는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진달래는 봄맞이 꽃으로 최적이다. 숲 곳곳에 드러낸 자태는 봄의 여신답게 느껴진다. 산벚꽃과 진달래 빛은 서로 다르지만 묘한 어울림을 전해 온다. 마침 전망대 부근에서 그러한 모습을 감지하고 담아 두었다.
주말에는 양방향으로 산객들로 넘치는 우이령이지만 평일은 호젓한 편이다. 발자국 소리가 사라진 우이령 반면에 새소리가 참 정겹게 다가왔다. 특히 붉은 머리 딱따구리가 부리로 나무통을 두드리는 소리는 공명현상이 겹쳐져 환상적이다.
4월과 5월이 좋은 이유는 어디를 가나 꽃이 사람을 감싼다는 것이다. 메마른 나뭇가지에 이런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진달래와 산벚꽃이 봄바람에 난분분하게 허공에 흩어졌다. 미풍이라 그런지 허공에 꽃잎의 정체시간이 느릿하게 다가왔다.
꽃그늘에서 피어나는 향기는 청정함의 결과물처럼 가슴을 맑게 정화시켜 주고 있었다.
저 멀리 오봉을 구경하다 다시 길을 나섰다.
내리막 길 사방에 핀 진달래 봄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야성봉과 오봉 안부에 자리 잡은 석굴암, 지금 불사를 일으켜 규모가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었다. 삼거리에서 석굴암까지 왕복 1,2km 된다 오르는 길은 조금 가파른 형태다.
석굴암 창건에 대해선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께서 창건했으며, 고려 공민왕 당시 왕사(王師)였던 나옹화상께서 3년간 수행정진 하셨다고 한다.. 초안스님의 은사이신 동암선사께서는 조국광복을 위해 끊임없이 상해 김구선생의 임시정부를 도와 광복 운동을 하시면서 틈틈이 석굴암에 오셔서 수행정진 하셨고, 조국은 해방이 되었지만 1950년 6·25 사변으로 인하여 석굴암의 전각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창건주 초안스님의 세수 28세 1954년 6월 5일 석굴암에 오셨을 때에는 대지 한평도 없었고, 법당은 완전 전소되고,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석굴 안에는 전화로 인해 아미타불, 지장보살, 나한님과 수구다라니 목판만 남아 나뒹굴고 파손되어 있었다. 초안스님께서 모두 소중히 수습하는 동시에, 모친 조 삼매심 보살님, 화주 윤 일광심보살님과 함께 폐허가 된 경내지에 임시로 움막을 짓고 주변에 널려 있던 수많은 전사자들의 시신을 화장 또는 안장해 주셨다. 그리고 석굴암의 중창복원 불사를 일심으로 발원하는 천일기도에 들어가셨다. 이로써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초안스님과 두 분 보살님의 뼈를 깎는 헌신과 간절한 기도 원력 덕분으로 차근차근 불사를 이루어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 전인 1792년의 일이다. 당시에는 석굴암에 노스님과 동자승 단 둘이서 살았다고 한다. 그날은 마침 동짓날이었고, 밖에는 많은 눈이 와서 마을과의 왕래가 두절되었다. 동자승이 아침 일찍 일어나 팥죽을 끓이려 아궁이를 헤집어 보니 그만 불씨가 꺼져 있었다. 노스님께 꾸중들을 일에 겁이 난 동자승은 석굴에 들어가 기도하다 지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눈을 뜬 동자승이 공양간에 가보니 아궁이에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바로 같은 시간. 석굴암에서 10여 리 떨어진 아랫마을 차(車) 씨네 집에서도 팥죽을 끓이고 있었다. 당시 50대 초반의 차 씨 부인(파평 윤 씨)이 인기척에 놀라 부엌밖으로 나가보니 발가벗은 아이가 눈 위에 서 있었다.
깜짝 놀란 차씨 부인이 "어디에서 새벽같이 왔느냐?"하고 묻자 동자승은 "오봉 석굴에서 불씨를 얻으러 왔다"라고 대답했다. 차 씨 부인은 하도 기가 막혀 "아니, 스님도 너무 하시지. 이 엄동설한에 아이를 발가벗겨 불씨를 얻으러 보내는 법이 어디 있냐"라고 안타까워하며, 때마침 펄펄 끓는 팥죽 한 그릇을 떠서 동자승에게 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보통아이 같으면 펄펄 끓는 팥죽을 수저로 불며 떠먹었을 텐데, 이 동자승은 그릇째로 들이마시더라는 것이다. 얼른 부엌에 가서 불씨를 담은 차 씨 부인은 소중히 동자승에게 건넸고, 불씨를 얻은 동자승은 홀연히 자취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차 씨 영감(차대춘 씨)에게 부인이 새벽에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차 씨 영감은 혹시 동자의 흔적이라도 있을까 해서 사립문 밖에 나가 보았지만 눈 위에는 발자국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후 눈이 어느정도 녹아 노스님이 아랫마을에 내려가니 차 씨 부부가 일주일 전 동짓날 새벽에 일어났던 일의 전말을 설명하면서 노스님에게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노스님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동짓날 사시에 마지를 드리려고 예불을 드릴 때 나한존상의 입가에는 팥죽이 묻어 있고 김이 무럭무럭 났던 것이 새롭게 떠 올 났다. 그래서 동자승을 불러 확인해 보니, 동자승이 불씨를 꺼뜨리고 항망중에 나반존자께 기도를 들었는데, 불씨가 저절로 되살아나 팥죽을 끓여 부처님께 공양하였다는 것이었다. 바로 동자승의 안타까운 사정을 굽어살핀 독성님이 이적(異蹟)을 보이셨던 것이다. 이후 독성님께 팥죽을 공양한 차 씨 집안은 6대조 차대춘(1802년 작고)씨와 2000년 현재의 차영민(60세)씨에 이르기까지 6대째 화제(話題)의 그 집에서 그대로 살고 있다. 차 씨 집안은 특히 이날 독성님께 팥죽을 공양한 음덕과 어머니의 간절한 나한기도 덕분에 6·25 전쟁 피난길에서 잃어버렸던 당시 아홉 살 차영민 씨가 살아서 돌아오는 등 집안이 나날이 번창해 화목한 일가를 이루었다.
오른 후 내려가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석굴암에서 내려와 다시 우이령을 넘기위하여 오르막 길을 천천히 걸었다. 내려가면서 보지 못했던 사물들은 오르면 느끼게 될 적이 많다.
원점회귀 ~~~ 그러나 아직도 우이동까지 2,5km 걸음 여행이 남아있다. 언덕이라는 50년 된 곰탕 집이 우이동에 있다. 최남선의 별서가 있던 우이천 건너 방학동 넘어가던 언덕 오른쪽에 있던 집이다. 지금은 우이천 가로질러 가는 다리 초입 우측으로 이사와 영업 중이다. 이곳이 바로 늦은 점심을 챙기는 식당이다. 약 20,000보의 걸음 여행은 그곳에서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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