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로 본 세계사...
역사의 불가사의 - 왜 이런일이?!
원시인도 오른손 잡이였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발견자인 다트에 의하면 유인원도 이미 오른손 잡이였다는 것이다. 그 증거가 되는 것은 바로 유인원에 의해 살해되었던 비비(아프리카에 분포하는 원숭이과동물)의 두개골에 관한 연구이다.
그에 따르면, 십수마리에 이르는 비비의 두개골 중 대다수가 전두부 좌측이나 후두부 우측 에 타격을 받은 상처자국이 있다. 또 그 상처자국의 형태로 보아서 부기는 영양의 상완골인듯, 이뼈의 돌 기가 비비 두개골의 함몰된 부분에 딱 들어맞는 예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로 보아 유인원은 앞에서 달려오는 비비나 도망치는 비비의 멀리를 오른손에 쥔 영양의 상완골로 후려 쳤을 가능성이 많다. 만일 왼 손에 뼈를 쥐었다면 비비에세 생긴 상처는 반대로 되어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시인의 뇌의 용적은 몇cc?
" 여보, 두개골이 발견되었어요!" 마리부인이 기뻐 소리쳤다. 때는 1955년 여름, 인류학자 리키부처가 탄자니아의 올드바이 협곡에서 조사를 시작한 지28년째 되는 해 의 일이었다. 문제의 화석은 약 사방 30cm에 4백여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을 접착시켜 복원시 켜 보았더니 뇌용량은 600cc, 연령은 18세 이하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리키는 그원인을 `진잔트로푸스`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원시적 인류)라고, 명명했다. 연대는 방사능측정에 의해서 175만년전으로 추정 되었다
가장 오래된 농촌 - 그땐 몇사람이 살았나?
최초의 촌락의 형태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곳은 이라크 동북부의 자르모에 있는 선사시대 유적이다.
1948년 이후 미국의 조사대에 의해서 발견된 이 유적은 가로 90cm, 세로 140cm의 넓이에 몇 개의 방이 갖추어져 있는 집 25채정도가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한 가구당 5명으로 계산하면 마을의 인구는 125명인셈이다. 탄화된 밀, 보리 등의 곡물과 가축으로 길러진 듯 싶은 양이나 돼지의 뼈도 다량 출토되었다. 관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비료도 사용되지 않았으며, 농경은 지상에 내린 비(연 강수량 200 - 600mm)에만 의존 하고 있어다. 이와 같은 마을이 기원전 6000년 경 서아시아 각지의 고원지대에 점점이 흩어져 자급자족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술의 힘
중국 최초의 왕조라고 일컬어지는 하왕조를 연 것은 우왕이다. 우왕은 정치에 있어서 뿐 아니고 일상생활에서도 검소와 절약을 실천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날 한 신하가 매우 좋은 술을 만들어 우왕에게 바쳤다. 우왕은 그것을 마시고, "훌륭한 맛이로다!"하고 칭찬을 했다. 그러나 그는 "멀지 않아 이것으로 나라를 망칠 자가 나올것이다."라고 말하고, 그 신하의 벼슬을 빼앗아벼렸다는 것이다.
우왕으로부터 17대째에 걸왕이라는 왕이 있었는데 그는 매우 사치를 좋아했다.
인민들로부터 무거운 세금을 거둬들여 온통 보석 으로 단장한 궁전을 짓고, 밤낮을 연회로 보냈다. 정원에는 육산을 만들고, 주지를 파 배를 띄웠으며, 3천 여명의 신하들이 북소리를 신호로 하여 그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이쯤 되니 정치가 잘 될리가 없었다. 결국 중국 역사상 최초의 [쿠테타]가 일어나게된다. 그때까지 하에 조공을 바쳤던 은의 탕왕이 병사를 일으켜 걸왕을 멸한 것이다.
선조인 우왕이 우려했던 술의 해악이 이렇게 자손에게 나타난 셈이다.
공자의 제자는 자그마치 3천명 ?
고대 중국의 사상가 동자는 만년 향리인 곡부에 정착하여 고전의 연구와 교육에 힘을 쏟았다. 공자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체격은 무장이었던 아버지를 닮아 유별나게 컸던 듯하다.
키는 자그마치 9척6촌(약 220cm)이나 되어 사람들로 부터 '장인'이라 불렸다고 한다. 한대까지 곡부의 공자묘에 보존되어 있었던 그의 의복으로부터도 체격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흔히 그의 제자가 3천명이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과장된 말이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어느 정도였을까? 사마천의 '사기'라는 공자의 집에 보관되어 있던 문제명부를 근거로해서 77명의 성명과 본적지 등을 기록하고 있다. 거기에 중도퇴학자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제재의 수는 기껏해야 100명정도 였을 것이다. 학습방법은 어떠했을까? 당시는 아직 종이가 없었고, 책은 나무나 대를 엮어 만든 지극히 값비싼 것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교과서가 있을 리없었다. 상상해 보건대 수업은 선생님이 먼저 택스트를 읽은 뒤에 그것을 제자들이 따라서 열심히 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진시황제 - 그는 이렇게 명석한 사람이었다.
기원전 2세기 말, 진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의 중국에서는 물건을 헤아리는 단위나 각종 제도등이 지방마다 서로 달랐다. 그래서 전국을 통일한 시황제는 도량형의 단위, 차륜의 폭, 문자의 서체 등까지 통일했다. 화폐의 단위도 통일하여 반양전이라 불리는 동그란 모양에 사각 구멍을 낸 중국식 동화를 만들어냈다. 또 전국을 36군으로 나누고, 군을 또 현으로 나누었으며, 군에는 황제가 임명하는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 집권체제를 만들었다. 이 군현제에 기초를 둔 지방행정 조직은 중국 최후의 왕조인 청이 멸망하기까지(1912년) 2천수백여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시황제는 사상과 언론에 대한 탄압도 주저하지 않아 후세의 유학자로 하여금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현대 중국에서는 대정치가로서 높이 평가된다.
'만리장성'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중국북부를 연연히 흐르는 만리장성 성벽의 길이는 자그만치 2,400km.
그야말로 인류가 만든 최대의 건조물이라 이름 붙여 손색이 없다. 이것은 북방민족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 축조를 한 사람으로는 진의 시황제가 가장 유명하다. 그는 이전의 전국시대 여러나라가 축조한 장성을 하나로 이어 완성시켰다. 현재의 만리장성이 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그런 이유로 오해인 것이다. 그 유적은 오늘날까지 일부밖에 발견되지 않고 정확한 위치 등은 아직도 밝여지고 있지 않다. 그 이후에도 여러차례 장성이 만들어졌으나 현재의 것은 명대의 장성이다.
먼 옛적의 장성은 흙을 단단하게 뭉쳐 만든 것이 대부분이지만, 명대의 것을 보면 북경을 지키는 동부는 특별히 단단한 연와로 덮어씌워져 있고, 북경북방의 팔달령 부근에는 높이가 무려 9m에 이른다. 그에 비해서 서부는 흙을 뭉쳐쌓는 방식을 취하는 등 축조방식이 가지가지이다.
한 황제에게 1백명 이상의 후비가 있었다.
중국의 전설상의 황제인 곡은 4명의 비를 두었다고 하는데, 중국의 황제들은 처음부터 일부다처의운명에 있었던 듯 하다. 하왕조에서는 후비의수를 3+9인 12명으로 했는데, 3과 9는 중국에서는 신비적인 숫자로 인정되고 있다.
그 후 은왕조에서는 비가 더욱 늘어 3*9=27이라 해서 27명으로 늘리고 앞의 12명을 합쳐 39명으로 했다고 한다.
당의 제도에서는 황후는 한명 으로 하고, 부인은 귀비, 숙비, 덕비, 현비의 4명, 그 이하를 포함하여 모두 122명이었고, 이것이 후세 후비제도의 표본이 되었다. 이것을 보면 역사상 이름높은 양귀비는 황후의 다음가는 지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행자를 괴롭힌 '사막의 망령'
'서유기'의 삼장 법사는 손오공 등을 거느리고 서방으로 구법여행을 떠나 온화하고 자상한 스님으로 묘사되 있다.
그러나 그 모델인 현장은 상당히 건장하며 다소 소극적인 사람으로서 어떠한 곤경도 견뎌낼 수 있는 강인한 의지력과 놀랄만큼 넓은 지식을 가진 고승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현장도 타클라마칸사막을 넘을 때는 많은 두려운을 느꼈는데, 그 여행기인 '대강서역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막에 들어서자 모래가 바람에 날려 발자국을 덮어버려 방향을 분간할 수 없었고, 곳곳에서 노래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 방황한 적도 있다. 이것은 사막의 악마나 망령의 장난일것이다.'
6백여년이 지난 후 똑같은 사막을 지나갔던 마르코폴로(1254 - 1324)도 그의 여행기인 '동방견문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사막을 횡단하고 있을 때 다수의 망령들이 말을 걸거나 이름을 불렀다. 여행자가 이때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터무니 없는 유혹에 넘어가거나 목숨을 잃기도 한다. 두 사람의 기록이 우연히 닮아있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만, 이 '망령'의 실체는 어떤 현상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떠오르는 또 하나의 미스터리...
바벨탑은 실제로 존재했다.
구약성서에 창세기에 '사람들은 시날의 평지에 도시를 만들고 거기에 하늘까지 닿는 탑을 벽돌로 쌓기 시작했는데, 신의 노여움을 사 공사를 중도에서 중지했다.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바벨이란 '신의 문'이라는 뜻으로서, 원래 이 도시는 메소포타미아지방에 있었는데, 나중에 그리스인들로부너 바빌론이라 불렸다. 그 후 이 도시는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되어, 유럽인들은 12세기 경부터 메소포타미아지방을 찾아다녔다.
결국 20세기초 독일의 한 조사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이 바빌론유적을 발견하고 탑의흔적을 발굴하는데 성공했다. 조사단에
따르면 탑의 한 변의 길이는 90m, 높이는 90m, 모양은 정방형이고, 제 1단부터 단계상으로 8단으로 쌓여져 있었으며, 재료는
연와를 사용했던 듯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같은 모양의 '지그레트'라 불리는 단계상의 신정이 40여개 발견되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함무라비법전은 메소포타미아에 꽃피웠던 고대 함무라비왕국의 함무라비왕이 제정한 것으로 모두 282조로 되어 있다.
그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만일 사람(귀족)이 다른 사람(귀족)의 눈을 찌르면 그의눈도 찌른다. 만일 그가 다른사람(귀족)의 뼈를 부러뜨렸을 때는 그의 뼈도 부러뜨린다. 만일 그가 평민의 눈을 찌르거나 뼈를 부러뜨렸을때는 은1마나를 지불한다' 고 하는 조문이다. 이것은 신분에 따른 형법상의 차이를 나타냄과 동시에 동태복수법의 사고를 나타내고 있다.
'목수가 어떤 사람의 집을 부실하게 지은 나머지 그 집이 무너져 그 때문에 집주인이 죽었다면 그 목수는 참한다' 고정해져 있는 조문도 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히브리인의 율법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하는 것도 이 법전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한개의 돌로 거인을 쓰러뜨린 소년 다윗
팔레스타인지방에서 헤브라인이 초대왕 사울의 통솔아래 페리시테인(고대 팔레스타인의 남서부에 살았던 호전적종족으로 이스라엘사람의 적)과 싸웠들 때의 이야기다(구약성서 사무엘기). 펠리시테인의 진영으로부터 키가 4m나 되는 골리앗이란 거인이 나타나 헤브라이인들과 일대 결전을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본 헤브라이인은 뒷꽁무니를 뺄 뿐 누구하나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형을 찾아 진중에 왔던 소년 다윗이 골리앗의 고함을 듣자 자신이 한번 대적해 보겠노라고 사울왕에게 말했다. 다윗은 하손으로 지팡이를 들고 골짜기에서 돌맹이 다섯개를 주워 자루에 넣고 골리앗에게 다가갔다.
이를 본 골리앗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했다. 골리앗의 지척에 당도한 다윗은 준비한 돌 한 개를 팔매질했다. 돌은 보기좋게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했고, 골리앗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 다윗은 나중에 헤브라이 제 2대 왕이 되었다.
솔로문은 그의 아들이다. 저 미켈란젤로(1475 - 1564)의 걸작 다윗상은 골리앗에 대해서 금방이라도 돌을 던지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작품이다. 또 오늘날의 팔레스티나라는 지명은 이 이야기의 펠리시테인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5천년의 전통이 있는 매춘의 역사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직업은 매춘부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매춘은 언제쯤부터 시작된 것일까?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기초를
쌓은 수메르인의 기록에 따르면, '신전창부'가 최초의 매춘부로서 기원전 5000년 경에 있었다고 한다. 슈메르인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의 치수와 관개농업에 성공하여 고도의 도시문명을 발달시키고 설형문자의 체계를 만들어냈다. 슈메르의 도시는 신전을 중심으로 세워졌는데, 그 신전의 여사체는 신, 즉 왕의 첫째부인이었다. 그리고 신을 옆에서 모시던 것이 바로 '신전창부'이다. 그들은 신전에 공납하는 모든 남성과 성적 교섭을 가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 물론 그것은 불명예가 아니었고, 오히려 모르는 사내와의 육체적 교섭은 신비적인 혼인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고 해서 슈메르인들이 성적으로 문란했던것은 아니다. 일부일처제가 가족의 기본형태였고, 처녀를 유혹한 사내는 반드시 그 처녀를 아내로 삼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쨌든 이 '신전창부'가 신전안에서 매춘으로 모습을 바꾸는데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볼링은 인간이 만든 가장 오래된 경기다?
볼링의 역사는 매우 길어 인간이 만든 가장 오래된 경기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집트의 묘에서 현재의 볼링핀이나 볼과 비슷한 도구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그 기원은 자그만치 기원전 5000년으로 거슬러 올라사는 것으로 보여진다.
또 13세기에는 볼링을 하나의 종교의식으로 사원에서 실시했으며, 당시의 농민들도 항상 곤봉을 가지고 다녔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승려들은 신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곤봉을 사원의 뜰 한쪽에 세워놓게 했는데, 이것을 악마나 재앙의 상징으로 삼아 커다란 공을 굴려 쓰러뜨리게 했다고 한다. 잘 쓰러뜨리면 악마를 쫓았다는 뜻에서 칭찬을 듣지만, 실패하면 신이 노하고 있다는 증거라 해서 생활태도에 대해 엄한 질책을 받았다. 볼링이 근대화된 것은 1895년 9월 뉴욕에서 미국 볼링연맹이 설립되어 처음으로 규칙을 표준화한 것으로 잡고있다.
클레오파트라는 실제로 미인이었나?
로마의 영웅 시저를 비롯하여 수많은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기원전69 - 30). 그녀는 흔히
미인의 대명사로 인정되고 있는데, 실제로 그녀가 그처럼 빼어난 미모를 갖추었던 것일까?
당시 발행되었던 화폐의 초상등의 연구자료에 따르면, 그녀는 기다란 매부리코에 큰 입을 하고 있었으며, 반드시 미인의 부류에 속하는 여인은 아니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 오히려 그녀의 매력은 풍부한 교양과 여왕으로서의 품위있는 행동거지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또한 그녀는 이집트어롸 그리스어 등 수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말하는 방법이나 몸놀림에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미인이란 단지 외견적인 모습뿐만이 아니라 뛰어난 지성에 기초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인것 같다.
미이라가 될 수 있었던 사람, 없었던 사람
미이라는 이집트에서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유독 이집트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 것은 이집트의 건조한 기후가 그 보존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어도 미이라상태로 몸이 보존되어 있으면 영혼이 다시 돌아와 머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이라는 처음에는 파라오<이집트의 왕>의 특권이었지만 나중에는 일반인들에게도 허용되게 되었다.
만드는 방법은 먼저 시체로부터 뇌를 꺼내고, 다음에는 심장을 제외한 장기를 모두 들어낸다. 그리고 소다용액에 수주 동안 담근 뒤 체내에 방부제를 넣고, 몸전체에 수지를 입힌 다음, 마지막으로 마포로 동여맨다. 내장은 4개의 항아리에 보관한다.
미이라를 처리하는 방법은 업자에게 지불하는 돈의 양에 따라 3단계로 나뉘어졌는데, 가장 훌룡한 미이라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돈 많은 부자뿐이었다.
파르테논신전의 알려지지 않은 비밀
파르테논신전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우선 놀랍게도 엄밀한 직선은 하나도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루나 처마까지도 완전한 수평은 아니다. 미미하게나마 가운데가 약간 높아진 곡선 형태로 되어있는 것이다. 즉 70m나 되는 기다란 마루가 중앙부분에서 11cm정도 높게 되어 있다
다음에 엔타시스(기둥 중앙이 배가 나오도록 한 건축양식)의 곡선으로 알려진 높이 10m의 기둥이 정확하게는 수직으로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네기둥의 중심축은 맨꼭대기에 7cm씩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 기둥들의 연장선은 수천m 상공에서 한점으로 모아진다고 한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인은 정밀하게 계산해 만든 계획에 의해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곡선과 경사를 건물에도 적용시켜 눈의 착각을 이용하여 균형과 조화를 이룬 뛰어난 건축물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투명일기
스무살에 마케도니아 왕이 되어 동방으로 원정을 떠난 알렉산더대왕은 근 10년 동안에 인더스강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기원전 323년 대왕은 신도시 바빌론의 왕궁에서 심한 열병에 걸렸다. 대왕의 '궁정일기'의 단편이 후세에 전해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열병에 걸린 대왕이 점차 쇠약해져가고 있는 모습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다이시소스월(대략 현재의 6월)
18일, 발열때문에 욕실에서 잠이 드시다
19일, 왕은 거실로 옮겼으나 밤새도록 고열리 계속되시다.(중략)
25일, 상태가 매우 악화되어 방에 들어온 장군들에게도 말을 걸지 못했다.
26일, 밤낮으로 고열이 계속되시다.
27일, 마케도니아 병사가 병상을 다녀갔다. 왕은 입을 열 수 없어 오른손과 눈으로 신호를 했다.
28일(현재의 6월 13일에 해당된다), 저녁 무렵 서거하시다.
당시 대왕의 나이는 불과 32세였다. 열병은 아마도 마라리아였던 듯 싶다. 대왕이 죽고 얼마되지 않아 제국은 분열되어
버리고 말았다.
시저가 절대로 밝힐 수 없었던 고민 한가지
기원전 49년, 시점(기원전 101 - 44)는 로마에 머무르고 있었던 정적 폼페이우스가 자신을 치려 한다는 것을 갈 리아(현재의 프랑스)에서 알았다. 그는 선제공격을 취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본국 이탈리아로 되돌아가 굳은 결심을 하고 루비콘강을 건넜다. 당시 이 강의 남쪽으로 군대를 몰고가는 것은 법률로 금지되어 있었는데, 그는 '일이 이왕 이렇게 된 이상 하는 수 없다'
라는 의미로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그리스 희곡의 대사를 외쳤다고 한다. '루비콘'이란 '빨간강'이란 뜻인데, 오늘날의 어느 강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정치가, 장군, 문장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갖춘 그에게도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스무살부터 시작된 대머리증세였다. 그는 매일 아침 남아있는 뒷머리의 머리카락을 이마까지 늘어뜨리는데
적지 않이 고심했다고 한다.
예수가 실제로 태어난 날은 언제인가?
예수가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는 신약성서의 '누가복음서'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불 수 있는데 그 정확한 탄생월일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예수탄생을 축하하는 날도 없었다.
그런데 기원 200년경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클레멘스는 5월 20일을 예수 탄생일로 기록하고 있다.크리스마스를 매년 축하하게 된것은 4세기 중엽부터이고, 354년에 탄생일을 12월 25일로 정했다고 하는데, 이날 예수가 태어났다는 증거는 없다.
팔레스타인지방의 12월은 우기로서 성서에 기록된 탄생의 모습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다만 로마에서는 동지가 1년의 전환점으로서 이 시기를 새로운 생활의 시작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기초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혼란했던 로마 말기-50년간 황제가 26명!
로마제국이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235년 농민출신 마쿠시미누스 황제가 오른 뒤부터였다. 일개 병졸의 신분에서 벼락출세한 그는 우람한 체격과 괴력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보통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식가로서 군대의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그가 부하에게 살해된 후에는 제국의 각지에 주둔하는 군대가 걸핏하면 자기들 마음대로 군사령관을 황제로 추대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이렇게 해서 약 50년 동안 18명이나 되는 황제가 등장했고, 부자공동통치자까지 한 명씩 헤아리면 22명이나 된다. 게다가 일반적인 승인을 얻지 못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황제의 수는 자그만치 26명에 달한다. 그 중에서 황제로서 천수를 다한 사람은 단 한사람 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전사나 암살로 생을 마쳤다.
이들 환제는 당시의 황제들과 같이 전임 황제의 추거나, 원로원의 지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군대에 의해 옹립된 황제였기 때문에 <군인황제>라 불렸고, 또한 이 시기를 역사적으로 구분할 때 <군인황제시대>라고 한다.
이와 같은 극도의 혼란을 잠재운 것은 284년에 즉위한 디오클에티아누스(245~313)였다. 그도 역시 일개 병졸에서 입신한 군인황제 중의 한 사람이었으나, 그 강력한 군사력으로 간신히 국가의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로마의 휴일은 몇일?
로마의 휴일-이라고 해서, 그 유명한 오드리 햅번이 주연한 영화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는 고대 로마시민들의
휴일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기원전 1세기말, 초대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즉위했을 때 로마의 역에는 76일의 축제일이 있었다. 그 후 점차 늘어나 서로마가 멸망한 5세기 말에는 휴일이 자그만치 175일에 달했다. 1년의 거의 절반을 쉰 셈이다.
(1993년의 한국의 휴일은 일요일과 법정공휴일을 합해서 약 65일이다.)
당시의 휴일에는 연극, 스포츠 등 볼만한 행사가 자주 열렸고, 시민들은 무료로 이들 행사를 구경할 수 있었다. 특히 칼을 가지고 노예들끼리 싸우는 검투나 투우는 가장 인기있는 종목이었다. 그 때문에 수많은 노예들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어야 했다. 휴일은 시민들에게는 즐거운 날이었지만 노예들에게는 비극적인 날이었던 것이다.
알려지지 않았던 중세의 계략
칭기스칸의 묘는 어디에 있는가
1대 동안에 아시아 초원지대를 정복한 칭기스칸(1162-1227)은, 그 엄청난 군사력과 잔인함으로 세계인들의 기억속에 깊이 남아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런 그도 나이에는 어쩔 수 없은 듯 1227년 황하 상류의 육반산기슭에서 낙마때 생긴 상처가 원인이 되어 세상을 떴다. 그의 유체는 고향인 불칸산에 운반되어 매장되었는데, 그 위를 기병대가 왕복하여 흙을 밟아 다지고, 묘석을 비롯한 일체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떠났다. 이것이 당시 유목민의 매장풍습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 뒤를 잇는 황제들도 같은 방법으로 같은 곳에 매장되었다. 때문에 그와 그 후계자들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한 장소가 밝혀지지 않은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몽골기병의 위력은 이렇게 대단했다
몽골제국이 완성된 것은 초대황제 칭기스칸이 나라를 세운뒤 불과 70년 후의 일이다. 지극히 짧은 기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처럼 짧은 기간에 그같은 대제국을 이루어 낸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칭기스칸을 비롯하여 역대 황제가 뛰어난 군사지도자였다는 사실, 당시 동서무역의 안전을 바라고 있었던 이슬람 상인들이 유력한 몽골을 지지했다는 사실, 주위의 나라들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사실등을 들 수 있다. 거기다 한가지 추가해야 할 것은, 몽골 기병의 탁월함이다. 그들은 각자 6마리 정도의 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바꾸어 타면서 재빨리 이동을 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그들은 특유의 집단전법을 취하고 양뿔로 심을 박은 강력한 반궁으로 적을 쓰러뜨렸다.
동방견문록에 기록된 '황금의 섬'
'황금의 섬'이라는 매우 매력적인 이미지로 일본을 서양에 소개한 것은 13세기 이탈리아의 마르코폴로다.
'지팡그'(마르코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일본을 지정해 부르던 지명. 중국 동쪽 1,500리에 있는 해중의 섬으로 황금이 풍부하다 하여 콜럼부스가 이를 믿고 서방의 뜻을 굳혔다고 전해진다.오늘날의 japan은 여기서 온 말이다)란 이름은 일본의 중국음인 '지펭귀'가 변해서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일본이 다소의 금을 중국에 수출하고있었던 것은 '송사'의 일본전에 나와 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던 듯 싶다. 유럽에서는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극동의 떠오르는 태양 아래 황금섬이 있다'는 전설이 믿어지고 있었는데, 마르코폴로는 일본의 이야기를 전설과 결부시켜 황금향으로 유럽에 소개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마호메트는 11명의 여자를 거느렸다.
이슬람교도들의 모든 생활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예언자 마호메트가 신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기록한 '코란' 이다 거기에는 '자애로우신 알라신은 남녀간의 우열을 구분하셨다. 돈은 남자가 내는 것이므로 당연히 남자는 여자의 상위에 서야 한다'라든가 '남자는 아내를 40명까지 둘 수 있다'등의 말이 있다.
이처럼 이슬람교도는 일부다처제가 합법화되어 있고, 마호메트자신도 평생에 11명의 아내를 두었다. 그러나 그 진정한 의도는 전쟁에서 죽은 교도들의 가족을 보살피는데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슬람사회에도 지금은 여자인플레로 인하여 신부값이 올라 4명은 커녕 한 사람의 아내를 갖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8세기의 바그다드 - 2백만 국제도시의 풍경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는 그 예날 이슬람제국의 수도로서 번영을 구가한 도시였다. 이 도시는 8세기말에 건설되었는데, 처음에는 '마티나 앗사람(평안의 도시)'이라 이름했었다. 칼리프(상속자란 뜻. 마호메트의 후계자로 정치 종교의 양권을 장악하는 자의 칭호)의 궁정, 관청, 그리고 고관들의 저택이 줄지어 선 중심부는 직경 약2km의 3중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 제2성벽의 높이는 34m나 되었다. 뿐만아니라 티그리스강의 부두에는 중국 등으로부터 온 배가 죽 늘어서 있었고, 상점가에서는 중국의 견직물, 도자기, 동아시아의 향료, 러시아의 모피, 아프리카의 상아 등이 판매되었으며, 상인들이 사용하는 여러나라의 말이 분주하게 오고 가는 인구 2백만명의 국제도시였다.
십자군은 사실은 이렇게 잔인했다
고도 예루살렘은 유태, 크리스트, 이슬람 세 종교의 공통의 성지이고, 7세기부터 시작된 이슬람통치하에서는 크리스트교도의 순례나 시내주거도 허락되어 있었다. 그런데 서방으로부터 온 크리스트교도의 십자군은 이교도에 대해 관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1099년 이 도시를 점령하자 가동할 만행을 저질렀다. 재물을 약탈하고, 이슬람 유태교도 7만명을 남녀아이 할 것 없이 모조리 학살했다. 더구나 그들은 이 만행을 조금도 거리낌없이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기독교도는 마음속으로 이 학살을 신의 재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에 대해서 이슬람측도 반격을 가하여 결국 1187년 이집트의 사라센이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그러나 이때는 학살도 약탈도 파괴도 없었다. 사라센은 크리스트교도들을 미워하기는 했지만, 남자는 그화10개(여자5개,어린이2개)의 몸값을 지불하면 못숨을 구하고 퇴거를 허락했다. 또 몸값을 지불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이나 전사자의 미망인, 고아에게는 사라센 자신이 사재를 던져 몸값을 지불해주었다.
'소다','알칼리','암모니아'의 어원은?
'소다''알칼리''암모니아'라든가 숫자의 '제로'라는 말의 근원은 유럽사람이 수입한 아랍어이다. 10-12세기 서유럽을 중심으로 이슬람세계가 빛나는 문화의 꽃을 피우고 있을 당시 유럽은 아직 후진지역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유럽사람들은 이슬람학문을 열심히 받아들였는데, 그때 '알칼리'나 '제로'등의 용어가 전해졌다.
학문뿐만이 아니고, 석궁이나 전서구의 사용법, 축성법 등으로부터 중국전래의 제지법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문물이 유럽에 전해졌다. 우리들이 흔히 유럽의 문장에서 볼 수 있는 백합꽃이나 쌍두의 독수리 디자인도 원래는 이슬람교도의 왕들이 사용하고 있었던 문장이었다고 전해진다.
커피는 아랍인들의 '술의 대용물'이었다
커피의 원산지는 아프리타으 에티오피아 고원지대라고 말해지는데, 이는 분명하지는 않다. 이 콩을 부수어 뜨거운 물에 타마시는 것을 발명한 것은 아랍인들로서 벌써 1천년 이전의 일이다. 커피의 원어인 '카페'도 아랍어로서 일종의 술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이슬람교에서 음주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아랍인은 커피를 술의 대용으로 하여 향과 맛을 즐기게 되었던 것 같다.
이것이 유럽에 전해진 것은 루이14세(1638-1715)무렵이고, 그후 점차로 커피상점이 런던이나 파리에 생겨나게 되었다.
커피를 애호하는 사람이 늘고 수요가 급증하자 그 재배지도 각지로 확대되어 브라질 콜롬비아 등에 새로운 산지가 출현했다.
남아프리카의 '짐바브웨'란 무슨 뜻?
1980년 봄 남아프리카에서 독립한 짐바브웨공화국은 그 국명을 어디에서 따온 것일까? 짐바브웨란 '돌의 집'이라는 뜻으로, 일찍이 이 지방에 꽃피웠던 쇼나왕국의 수도였다.
그 유적은 솔즈베리 남방 300km산중에 사방 1km에 걸쳐 남아있다. 건축물은 산에서 잘라낸 화강암을 쌓아올려 만들었는데, 특히 직경 100m에 이르는 원형 궁전터의 돌담 높이는 자그만치 10m인 문화를 낳았는데, 그 원동력이 된것이 이 지방으로부터 수출되는 황금이었다.
짐바브웨라는 이름은 이 흑인 신생국가의 이름으로 아주 어울리는 듯하다.
바이킹이 탔던 배는 이랬다
'바이킹'이란 이름은 8-12세기에 걸쳐서 덴마크,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원주지로 해서 유럽각지에서 활동했던 노르만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원래 바이킹이란 '강가민족''시장사람'이라는 의미였는데, 그들은 상업에 종사하는 이외에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했기 때문에 '해적'을 의미하는 이름이 되어버렸다. 그들이 탔던 배는 길이 30m, 폭 5m 정도의 크기에 50명 가량이 탈 수 있는 것이었고, 상앗대와 돗대를 사용하여 항해를 했다. 그들은 홀수가 낮은 배로 각지의 강을 거슬러올라갈뿐만 아니라, 순풍일 때는 노르웨이에서 아이슬란드까지 9일동안에, 북해 횡단은 불과 3일 동안에 해도나 나침반도 없이 건너갔다고 한다.
바이킹이 콜럼버스를 이겼다?
북구의 사가에 따르면, 1000년경 노르만인 레이후 에릭슨은 30여명의 동료와 함께 그린렌드에서 남하하여 육지를 계속적으로 발견한 뒤 제각기 헤를렌드(돌의 나라), 마르크랜드(숲의 나라), 빈랜드(포도주의 나라)라 명명했다.
이 사실은 바이킹시대가 끝남과 함께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는데, 근년에 들어 연구가 진척되어 그린랜드의 노르만식민지가 발굴되었고, 나아가 위의 발견지는 각각 라브라돌, 노바스코시아, 뉴잉글랜드로 추정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노리만인이 콜럼버스보다 앞선 거의 5백년 전에 죽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이렇게 해서 대헌장은 성립되었다
13세기초 잉글랜드왕 존은 프랑스왕과의 싸움에 패하여 귀국했을때 영국으로부터 저항을 받았다. 이것은 그가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로 난폭한 행동이 많은 데다가 도시나 귀족들이 끈질기게 무시한 중세를 부과했기 때문이다. 곤경에 처한 왕은 1215년 6월 15일 런던 서방의 템즈강을 거슬러올라간 라니미드의 중주에서 귀족들과 회합하여 그들의 요구를 인정한 뒤 이에 기초한 헌장을 발포했다. 이것은 귀족과 도시의 특권을 인정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영국헌법의 근본 되는 중요한 문서가 되었다.
지금 런던 대영박물관에는 양피지에 라틴어(영어가 아님)로 쓰여진 당시의 대헌장이 전시되어 있었다.
요리가 된 황제의 이야기
제3회 십자군은 영,독,불의 세군주가 지휘관이 되는 최고의 스탭을 갖춘 십자군이었다. 특히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1세는 당시로서는 매우 월등한 15만 대군을 이끌고 출발했다.
그런데 그는 소아시아의 세레우키아 부근의 강에서 익사하게 된다. 이 돌연한 사고사의 진상은 확실하지 않지만, 유별난 것은 그 시체처리법이었다.
우선 몸을 잘라 큰 가마에 넣어 삶는다. 스튜(서양요리의 하나)로 만들어 뼈와 고기를 불리하고 뼈만 모아 물로 씻은 뒤 포대에 담아 고국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내장은 현지에서 묻는다. 이것은 당시 유럽에서 신분이 높은 사람이 먼이경에서 죽었을때 취한 방법인데, 참으로 소름이 끼쳐지는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레이디'란 가루를 반죽하는 사람
단단한 곡물을 가루로 만든 뒤 물로 반죽하여 건조시켜 먹는 것은 원시시대로부터 시작된 일이었고,그것을 부풀린 뒤 구워 부드러운 빵으로 '변신'시킨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천년전의 이집트사람들이었다.
당시 그 제법을 몰랐던 주위 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문명국에서는 여성들이 밀가루를 빻아 빵을 굽는 일을 했는데, 그 제법은 비밀사항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비법도 결국은 타지역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리스에서는 더욱 효과적으로 굽는 방법이 연구되었고, 로마에서는 빵굽는 일이 하나의 직업으로 정착되었다. 당시으 유적인 폼페이에서도 빵 굽는 곳이 많이 발굴되고 있다.
중세가 되면 빵은 또 자가체가되고, 빵을 만드는 것도 여성의 일로 되돌아왔다. 오늘날 숙녀라든가 귀부인을 의미하는 '레이디(lady)'란 말은 '가루를 반죽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게르만어로부터 온 말이다.
실재했던 흡혈귀 드라큐라의 모델
밤마다 예쁜 여자의 목에 송곳니를 박고 피를 빨아먹으며 5백년 이상이 살았다고 하는 흡혈귀 드라큐라. 그 모델이 된 인물이 루마니아에 실제로 존재했었다.
그의 본명은 블라드 4세. 통칭하여 '관자공'으로 일컬어지는데, 15세기 중반 남부루마니아의 지배자였다. 그는 적이나 아군을 가리지 않고 산채로 '꼬치'를 만들어버리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루마니아어로 용(dragon)이나 악마를 의미하는 드라큐라란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드라쿠라공은 남쪽의 강국인 오스만 터키군이 침입해 들어왔을 때 소수의 병력으로 잘 대응하여 여러차례 적을 곤경에 빠뜨렸다. 애석하게도 다섯번째 싸움에서 전사했지만, 루마니아에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대국을 상대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던 영웅으로 칭송되고 있다.
떠오르는 또 하나의 미스터리...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서 맛본 비참한 기억
1948년 5월, 남인도 서해안의 캘커타항에 수척의 낯선 무역선이 입장했다. 이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출항하여 15개월만에 가까스로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한 포르투갈의 항해가 바스코 다 가마(1469-1524)일행이었다. 육지인들은 그들 일해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알고 놀라 "이렇게 먼 곳까지 무엇을 찾으러 왔는가?"하고 물었다. 이에 바스코 다 가마의 부하는 "크리스트교도와 향신료를 찾으로 왔다"고 대답했다. 또 사람들은 캘커타왕에게 바치는 바스코 다 가마의 선물이 조잡한 띠와 모자 따위라는 데 놀라며, 아무래도 국왕에게 헌상할 만한 물건이 아니라고 비웃었다. 바스코 다 가마에게는 비참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유럽은 아시아보다 가난했던 것이다.
아프리카 희망봉은 실제로 [희망]의 땅이었다.
아프리카대륙 남단에 있는 [희망봉]은 1488년 포르투갈 탐험가발트 로메오 디아스가 발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의 포르투갈왕이었던 조안 2세는 동방과의 향신료 무역을 위해 인도양을 가는 길을 찾도록 디아스에게 명령했다. 그들 일행은 아프리카 남서부 앞바다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남쪽으로 휩쓸리는 바람에 거의 2주 동안이나 육지를 보지 못했다. 풍랑이 그친 뒤 동쪽으로 항해를 했으나 육지는 찾지 못하고, 북쪽으로 항로를 바꾸어 발견한 곳이 이 곶이었다. 그는 여기서 풍랑을 만났다하여 [푹풍의 곶]이라 이름지었다.
그러나 조안2세는 인도항로의 발견이라는, 미래를 위해 좋은 희망의 곶, 즉 [희망봉]이라 바꾸었다.
신항로 발견 후 아시아에 들어온 유럽선박의 수
신항로가 발견되자 유럽의 상인들이 계속해서 아시아의 여러 항구에 입항했다고 한다. 그러면 과연 얼마나 많은 배들이 들어온 것일까? 16세기 포르투갈을 출발하여 아시아로 향한 상선의 숫자는 연평균 7척이었다.
이들은 매년 봄에 선단을 조직하여 리스본항을 출항했다. 또 같은 시기 일본으로까지 진출했던 [남만선]도 평균 한척의 포루투칼선이 1년에 한차례 인도의 고어나 중국의 마타오로부터 내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조금 뒤인 18세기에 있어서도 영국 동인도회사(17세기 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동양에 대한 무역을 경영하기 위해 동인도에 설립한 무역독점 회사)가 아시아무역에 사용한 배는 연평균 11-20척이다. 당시의 무역은 각국의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만, 그 규모에 있어서는 상선의 수만 보아도 현대와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얻어맞아 납작해진 미켈란젤로의 코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의 천재적인 조각가 미켈란젤로(1475-1564)는 코가 매우 납작했다. 당대의 역사가들도 그의 코가 툭 튀어 나온 이마아래 납작하게 붙어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코가 납작하게 된 것은, 소년시절에 그가 시건방진 소리를 하다 친구 예술가인 피에트로 트리지아노에게 얻어맞았기 때문이라 한다.
트리지아노가 주먹으로 미켈란젤로의 얼굴에 일격을 가했는데, 그것이 코에 명중하여 코뼈가 부러진 것이다.
트리지아노는 그의 일기에서 능청스럽게도 이렇게 하여 미켈란제로는 내가 남긴 기념비적인 흔적을 몸에 지닌 채로 일생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루터가 독일전역에 던진 2주동안의 파문
1517년 10월 31일, 작센의 뷔텐베르크성 교회의 문에 라틴어로 쓰인 [95개 조항의 합의서]가 나붙었다.
이것은 이 교회의 목사 마르틴 루터(1483-1546)가 로마 법왕의 면죄부(중세기 로마 천주교회에서 금전이나 재물을 바친 사람에게 그 죄를 면한다는 뜻으로 교황이 발행했던 증서) 판매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학자의 의견발표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때마침 유럽네는 그때까지의 교회의 행태에 대한 불만이 높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라틴어 원문은 즉시 독일어로 번역되어 2주일만에 전 독일에 퍼져나갔다. 여기에는 당시 시작되고 있었던 활판인쇄의 역할도 컸다. 루터가 던진 파문은 이윽고 서유럽의 크리스트교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수염세]를 거둔 러시아의 황제가 있었다!
러시아 절대주의의 확립자라 일컬어지는 피오트르대제는 모든 것에 적극적인 군주였다. 손재주가 매우 좋아 자신의 의자와 식기 등을 직접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외과나 치과의사들의 의료기술도 어느정도 마스터하고 있었다. 병이 난 측근들은 그가 수술도구를 갖고 나타나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했다. 또 그는 뒤떨어진 러시아에 선진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대사절단을 서구에 파견하면서 자신도 수행원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했다.
그런가 하면 당시 해군국이었던 네덜란드와 영국의 조선소에 직공으로 들어가 몇개월동안 망치를 두드리며 몸소 조선기술을 습득했다. 그리고 러시아인이 긍지로 여기고 있는 턱수염을 자르게 하여 서구풍의 풍속을 따르게 했고, 이를 어기는 사람에게는 [수염세]를 받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12명의 정부를 거느렸던 여황제
18세기 후반의 러시아에 군림한 여제 에카테리나 2세는 원래 러시아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독일 귀족의 딸이었는데 16세에 러시아 황태자비로 맞아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저능인이었고 따라서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 남편이 즉위하여 피오트르3세가 되었지만, 인망이 없어 1762년에 근위사병들이 황후를 추대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에카테리나 2세로서 제위에 올랏는데 유폐중이었던 남편은 곧 변사하고 말았다. 그 후 그녀는 곁으로는 독신을 고집했으나 실제로는 자유 분방한 사생활을 즐겼다.
상대가 되는 총신은 계속적으로 바뀌어 그수가 무려 12명, 혹은 21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중에서 10년이상 계속된 오를로프백작, 17년을 기록한 포춤킨공, 손자뻘 되는 즈보프백작 등이 유명하며, 오를로프백작과는 아이까지 두었다. 초로를 넘기고서도 그녀는 언제나 총신을 곁에 두고 있었고, 새로운 얼굴을 시녀로 스카웃해다 의사의 신체검사를 거쳐 채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년에 그녀가 "만약 젊었을 때 사랑할 수있는 남편이 있었다면 평생 정숙하게 살았을텐데..." 하고 고백했던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가련하기도 한 여성이다.
베르사이유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선진국 수뇌회담 등 국제회의의 회장으로 종종 사용되고 있는 베르사유궁전은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17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루이 14세(1638-1715)가 이 궁전건설에 착수하고 대충 완성할 때까지 무려 30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됐다. 공사는 언덕을 깍아내고 센강물을 끌어들이는 대역사였는데 동원된 민중만도 하루에 3만6천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매일 밤 죽은 시체들이 화물차에 가득 실려 나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희생자가 많았다. 또 엄청난 공사비용은 왕실의 재정을 어렵게 하여 훗날 프랑스혁명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이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생리적인 욕구를 도대체 어떻게 처리했을까? 어떤 귀족은 이 때문에 향을 담은 작은 상자(변기?)를 가지고 다녔다는 이 궁전에는 18세기 중반에 수세식 화장실이 50여군데나 있었다고 한다.
가면을 쓴 채 죽은 사나이의 정체는?
프랑스의 루이 14세(1638-1715)시대의 일이다. 1698년 9월, 검정 빌로드의 가면을 쓴 죄수가 파리의 바스티유감옥으로 이송되어 왔다. 이 죄수는 1669년에 이탈리아 남북부에 있던 국사범수용소에 투옥되어 각지의 감옥을 전전한지 벌써 30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그는 이름도 분명히 밝히지 않은 채 5년 후인 1703년 11월에 옥사하는데 묘지에 묻힐 때에도 가면을 쓴 채였다. 그리고 사망자 대장에도 무명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면 당시 정부가 얼굴도 이름도 숨기고 사형에 처하지도 않은 이 죄수는 도대체 누구였다는 말인가?
이 수수께끼 같은 사건은 여라가지 소문을 만들어냈으며, 어느 사이에 검은 빌로드의 가면은 [철의 가면]으로 불리어지게 되었고, 후세의 소설 속에도 등장하게 되었다.
프랑스에 있었던 28세의 할머니
영국의 농학자 아서 양은 프랑스혁명이 발생하지 직전 프랑스 각지를 여행하고 [프랑스 여행기]란 책을 썼다.
이 속에서 그는 로렌 지방에서 만난 노파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여자는 아무리 가까이서 보아도 60세나 70세 정도로 보인다. 심한 노동으로 인해 그녀의 허리는 할머니처럼 구부러져있고, 얼굴에는 깊
은 주름이 파여 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아직 28세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심한 노동은 신체의 균형이나 여성다움을 완전히 파괴시켜 버리는 것이다. 당시 상류계급 사람들이 매일 놀이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반면에 이와 같이 힘든 생활을 하는 민중이 있었던 것이다.
루이 16세와 어느 소년의 운명적 만남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앙뜨아네뜨가 북프랑스 랑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돌아오다 파리의 루이 대왕학원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학원에서 선발된 학생대표가 국왕앞에 나와서 대관의 축하와 환영의 의미로 라틴어시를 낭독하기로 되어있었다. 이 때 선발된 학생은 17세의 소년이었는데, 고전성적인 가장 좋아 이 명예로운 역할을 맡은 것이다. 화려한 복장을 한 국왕은 마차속에서 의례적으로 시를 듣고 있었지만, 그 앞에서
무릎을 끓고 열심히 시를 읊고 있는 소년은 때마침 내리고 잇던 비에 의복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1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때는 1792년 말, 프랑스대혁명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턴풀탑의 감옥에 갇혀 있던 루이 16세는 국민의 적으로서 이윽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때 "루이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며 왕의 처형을 요구하는 무리의 선두에 선 사람은 혁명의 지도자 로베스 피에르였다. 이사람이 바로 지난날 환영의 시를
읽었던 그 소년이었다. 운명치고는 참으로 짓궃은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단두대의 발명자가 단두대에...?
프랑스혁명 당시 사형을 시키기 위해 목을 자르는 도구로 사용된 단두대는 의사인 기요탄이 발명하고, 그 이름을 따서 기로틴(정확하게는 기요티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제로 단두대를 발명한 것은 그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에서 사용되고 있던 것을 그가 국민의회에 제안했을 뿐 진짜 발명자는 누구인지 밝혀지지않고 있다. 어쨌던 이것에 의해 루이 16세와 왕비 앙뜨아네뜨, 로베스피에르등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기요탄 자신도 이 도구에의해 처형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잘못 전해진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최근까지 사형집행에 이 기로틴을 사용했는데 너무 잔혹하다는 이유로 1981년에 와서야 폐지되었다.
손수건에 얽힌 역사
평소 손을 닦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손수건은, 머리에 두르던 수건인[케치프]를 손에 들고 다닌데서 나온 말이라
고 한다. 손수건의 기원은 유럽으로서, 로마시대에 이미 식사를 할 때 냅킨으로 사용했다. 동야의 비단이 귀중품에 속했던 중세때 그 천은 교회의 재단을 장식하거나 남녀가 애정의 표시로 연인에게 선물하는데 쓰였다.
출정하는 기사들도 연인들로부터 받은 비단손수건을 투구속에 넣고 다녔다는 말도 있다. 18세기의 프랑스에서는 계란형, 직사각형, 삼각형의 손수건까지 등장했다. 그래서 1785년, 당시의 왕비 마리 앙뜨아네뜨의 희망에 따라 앞으로 프랑스 국내의 손수건은 가로 세로 같은 규격으로 통일할 것 이라는 규칙이 국왕의 이름으로 발표되어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후 나폴레옹의 황후 조세핀의 영향으로 소형이 유행하기도 했고, 영국에서는 사방 60cm의 대형이 쓰이기도 했다. 현재의 크기로 정착한 것은 19세기 말의 일이다.
역사를 움직인 남자와 여자
58명 중 42번째였던 나폴레옹의 성적
코르시카섬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나폴레옹(1769-1821)은 10살 때 프랑스로 건너가 상파뉴의 브리엔느 군사학교에 입학했는데, 동급생들은 그의 사투리를 놀려 코끝에 매달린 지푸라기라는 뜻으로 '라파이요네'라 불렀다. 그는 15살 때 파리의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그 이듬해 졸업했는데, 그의 졸업 성적은 58명 중 42번째였다. 선생님이나 학우들은 그에게 수학에 대해 뛰어난 재능니 있다는 것은 인정했으나, 그의 날카로운 감수성이나 판단력, 과감한 행동 등을 꿰뚫어 보지는 못했다. 나중에 나폴레옹이 유명해졌을 때 브리엔느의 동급생들도 그가 지난날의 '라파이요네'라고는 믿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를 보면 시대가 보인다
세계대전을 부른 사라예보의 총성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드 부처가 사라예보시의 환영회에 참석했을 때, 7명의 암살단은 벌써 예정된 위치에 도착해 있었다. 시청사로 향하는 황대자의 차에 군중으로부터 폭탄이 투하되어 수행원과 시민 10여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환영회가 끝난뒤 부처는 예정을 변경하여 부상한 수행원을 문안하기 위해 시청사를 나왔다. 코스변경 사실을 알지 못했던 운전수가 당황하여 방향을 바꾸기 위해 자동차의 속도를 늦추었을 때 별안간의 총성이 하늘을 갈랐다. 두 발의 탄환은 부처를 명중했고 15분뒤 두 사람은 숨을 거두었다. 오전 11시반쯤의 일이었다. 암살단은 이웃나라 세르비아의 비밀결사였고, 이 사건이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독재자 스탈린의 '피의 숙청'
1934년 12월, 소련 공산당 지도자 스탈린(1879-1953)의 오른팔이었던 키로프가 암살을 당했다. 드러자 곧바로 그 배후관계가 조사됨과 동시에 소련 공산당내의 불순분자에 대한 '대숙청'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그 때 까지의 숙청(제명 내지 추방을 뜻하는 것)과는 다른, 육체의 말살을 의미했다. 1938년 12월 까지 숙청된 사람 1천2백만명 중에서 처형된 사람은 1백만명, 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은 2백만명이었다. 중앙위원도 예외가 없었는데 모두 1백30명의 중앙위원중 98명이 체포, 사살되는 참극이었다. 더구나 그 대부분이 아무런 죄도 없이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숙청은 계속되었고, 그 희생자는 무려 1천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1956년2월 스탈린을 비판한 흐루시초프(1894-1971)는 한 연설에서 "`1934년에 선출된 당중앙위원 1백 39명중 98명, 즉 7할이 숙청, 사살되었다"고 말했다.
성적에서는 낙제생이었던 히틀러
나치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1889-1945)는 국민학교때는 공부도 잘하고 의욕적인 어린이였다. 또 항상 많은 친구들과 잘 어울렸는데 난폭한 행동을 한 일은 없었다. 그림 그리는 솜씨도 제법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장래 실용적인 공부를 시키려고 생각했던 듯 싶었다.그런데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자 수학성적이 나빠 낙제를 하고 말았다.
나중에 그가 "월등히 성적이 좋았다"고 자만했던 지리, 역사도 성적부를 조사해 보면 간신히 합격점을 넘었을 뿐이다. 가장 성적이 좋았던 것은 체조였다.
결국 그는 3학년때 학교로부터 전학 요구를 받고 학교를 옮겼는데, 그 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하고 만다.
이에 대해 그는 "심한 폐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고 변명했지만...
역사를 역전시킨 전투 - 롬멜의 최초의 패배
이집트의 알렉산드라시에서 서쪽으로 1백km쯤 떨어진 곳에 엘아라메인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곳에서 벌어졌던 대격전은 제2차세계대전 역사상 이름이 높다. 1942년, 당시 독일의 아프리카군사령관은 불패의 명장 롬멜 원수였다. 그는 전차군단을 이끌고 용맹을 떨쳐 적은은 그를 '사막의 여우'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 독일군이 리비아에서 동진하여 엘아라메인에 도착한 것은 6월 말이었다. 그러나 물자의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9월에
는 공격을 중단하고, 룸멜도 병을 얻어 독일로 귀국해야 했다. 한편 패전을 계속해온 영국측을 구한것은 막대한 물량공세였다. 우세한 공군에다 전차가 1천대, 동원병력도 독일군의 2배를 넘었다. 이렇게 하여 10월하순, 만전의 준비를 하고 대기하고 있던 영국군은 대반격에 나선다. 롬멜은 급히 전선으로 복귀했으나 독일로부터의 보급이 없어 결국11월 초순 적의 포위를 피해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롬멜군의 최초의 패배였다. 그의 탁월한 재능도 물량공세에는 어쩔수 없었던 것이다. 이 전투는 연합국이 기선을 잡게 되는 큰 전기가 되었다. 영국수상 처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엘아라메인 이전에 승리는 없었고, 에아라메인 이후에 패배는 없다."
노르망디상륙작전은 적의 실수로 승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를 장식하는 연합군의 노르망디상륙작전이 결행된 것은 1944년 6월 6일이었다. 작전은 무려 1년전부터 계획되었고, 그 준비도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독일측에서도 이에 대비하여 대서양연안의 방위태세를 강화했다. 그러나 연합군이 상륙해 들어오는 지점을 노르망디가 아닌 그 동쪽의 칼레방면으로 예상하고 그곳에 정예부대를 배치했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첫번째 오산이 되었다. 독일측의 두번째 오산은 불시에 기습을 당한 것이다. 연합군측은, 상륙을 위해서 늦은 일출, 새벽의 썰물 등을 필요로 하고 있었고, 그 조건에 맞는 것은 6월5일 - 7일의 3일 동안이었다. 그런데다가 6월에 들어 기후가 갑자기 불순해졌다. 독일측에서는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연합군의 공격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상륙작전은 그런 예상을 뒤집고 6일 아침 기후가 좋아진 틈을 이용하여 결행되었다. 그리고 세번째 오산이 있었다. 독일측은 노르망디에 상륙한 적군이 허수아비 군대이고 나중
에 주력부대가 어딘가에서 상륙해올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병력을 노르망디에 집중하여 연합군을 초반에 격퇴할 찬스를 놓치고 말았다.
미국이 해독한 암호문은 몇개였나?
제2차 세계대전때 미국이 일본의 암호를 해독해 전국을 유리하게 이끌었던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 중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1922년 워싱턴에서 열린 해군군축회의에서 일본 전권대사는 주력함보유량을 영미대비 7할로 할 것을 주장하여, 6할을 요구했던 미국과 영국에 대립하고 있었다. 그 곳에 일본 정부로부터 전권에게 다음과 같은 암호전보가 보내졌다.
"어떻게든 10대 6.5의 비율로 낙착되도록 노력하라. 최종적으로는 10대 6에 동의할 의사가 있다는 것은 절대로 숨기도록 하라."그러나 이암호는 즉시 미국의 비밀 암호해독기관에 의해 해독되 대방측에 먹혀들지 않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미국측은 일본측에 철저히 압력을 가해왔다.
일본측은 하는 수 없이 "미국이 제안한 10대 6의 비율을 수락하는 이외에 길은 없다" 고 전권대사에게 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미국측은 해독해버렸다.
이 회의중 미국이 해독한 제 외국의 암호문수는 5천통 이상이 된다고 한다.
세계최초의 우표는 이랬다
세계 최초의 우표는 1840년 5월 1일 영국에서 발행되었다. 1페니와 2페니짜리 두 종류였는데, 빅토리아 여왕의 초상이 인쇄되어 있었고, 흑색의 1페니 짜리 우표는 블랙 페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당시 영국의 귀족들은 무표 우편의 특권을 남용한다든가 요금후불제를 악용하는 경우가 많아 국영우편제도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국내요금 균일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개혁안을 제창했다. 이안은 국회의 심의에 회부되어 귀족파와 대중파가 대논쟁을 벌이다 1839년 8월에 가결되었다. 우표에 대한 아이디어는 인쇄출판업자인 제임스 찰리의 제안을 힐이 채용한 것이라고 한다. 오늘날에는 전세계적으로 20만종이 넘는 우표가 발행되고 있다.
통조림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통조림이 만들어진 데는 나폴레옹의 공헌이 적지 않았다.
프랑스혁명과 연이은 영토확장 전쟁으로 장기간의 종군을 강요당한 군인들 사이에는 신선한 음식물이 부족해 괴혈병이 만연했다. 굽거나 절인 음식만 섭취했으므로 그렇게 되는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음식물을 신선한 상태로 보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이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1795년 프랑스 정부는 1만2천프랑을 상금으로 내걸고 '새로운 보존방법'을 공모했다. 여기에 응모한 것이 파리 교외에서 일하는 요리사 니콜라 아페르였는데, 모집후 10년 만의 일이었다.
그가 제시한 방법은 입이 큰 병속에 조리한 음식물을 넣고 코르크마개를 끼워 열탕속에서 가열한 뒤 밀봉시키는 것이었다. 이듬해 영국의 피터 듀런은 차깡통에서 힌트를 얻어 유리병 대신 양철용기를 생각해 냈다. 나폴레옹도 생각하지 못한 측면에서 인간생활에 공헌을 했던 것이다.
125명의 아내를 둔 사우디 국왕
1975년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이 조카로부터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국왕의 동생이 전 국왕인 하리드 국왕과 압하드 국왕이다. 이 암살사건을 정식으로 말하면, 좀 까다롭긴 하지만 파이살 이븐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 국왕이 파이살 이븐 무자헤드 이븐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왕자에게 살해된 것이다. 이것을 알기 쉽게 고쳐 말하면 '사우드가의 압둘 아지즈의 아들인 파이살국왕'이 '사우드가의 압둘 아지즈의 아들인 무자헤드의 아들인 파이살 왕자'에게 살해 당한 것이 된다. 여기에 나오는 압둘 아지즈란 전 국왕과 현 국왕의 부친이고, 이 나라를 세운 초대 이븐 사우드 국왕을 말함이다. 그는 평생동안 적어도 125명의 여자를 아내로 삼았고, 1953년 그가 죽었을 때는 30여명의 왕자를 남겼다. 공주의 수는 이슬함사회의 풍습상 공표되지 않지만 아마도 왕자와 비슷한 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 당시 국왕은 다음과 같이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젊었을 때 나라를 만들었기 때문에 나이가 든 지금은 오직 '국민'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의 '제로'징크스란?
어찌된 영문인지 미국 대통령중에서 서력 연대 말미에 '0'자가 붙는 해에 당선된 사람은 그 임기 도중에 죽는 다는 묘한 징크스가 있다. 링컨은 남북전쟁완료 직후에 암살당했는데 그는 1860년에 당선된 사람이다. 1880년에 선출된 가필드는 관직을 얻지 못한 자에 의해 암살당했다. 1900년 2선된 매킨리도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버펄로에서 암살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1960년 선출되었던 케네디가 유세지인 택사스주 댈러스에서 암살을 당한 것이다. 한편 1840년 선출된 해리슨은 취임후 불과 1개월 밖에 되지 않아 병사했고, 1920년 대통령직을 맡은 하딩은 유세중 샌프란시스코에서 의문의 급사를 당했다. 그런가 하면 뉴딜정책으로 명성을 올려 1940년 3월3선을 달성한 프행클린 루즈벨트도 4기째에는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병사하고 말았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징크스에도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1800년 선출된 제퍼슨과 1820년 2선된 몬로 두 사람만은 완전하게 임기를 채웠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놀라운 복귀
1814년 전쟁에서 패한 나폴레옹은 엘바섬에 유배되었으나, 그 이듬해인 2월에 섬을 탈출하여 남프랑스에 상륙함으로써 전 유럽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병사와 농민들은 열렬한 환영을 했고, 그 덕분에 쉽게 파리로 귀환하여 황제의 위에 복귀했다. 이를 보도하던 파리의 신문 '모니톨'의 제목이 그의 파리 근접상황에 따라 사사각각 변하는 것이 재미있다. '악마 유형지를 탈출', ;코르시카 출신의 늑대, 칸에 상륙', '맹호 카프에 나타나다', 전체황제 리용에 진입', '보나파르트는 북방으로 진격중', '나폴레옹은 내일 파리로', '황제 퐁테느브로에', 황제폐하 어젯밤 취히리 궁전에 도착'
나폴레옹의 이름이 사라진 교향곡 '에로이카'
악성 베토벤은(1770~1827)은 프랑스 혁명을 위해 싸우는 나폴레옹으로 부터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나폴레옹을 위한 교향곡을 작곡했고, 이것이 완성되자 표지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곡명을 붙여 그에게 바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앉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베토벤은 "나폴레옹도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는 야심가 였던가"하고 분노하며, 그 악보의 표지를 찢어 바닥에 내던졌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이름이 사라진 이 작품은, 나중에 '한 위대한 인간의 추억'이라는 주석이 붙운 채 '에로이카(영웅)'라는 곡명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다.
게릴라의 원조는 스페인이었다.
유럽의 지배자가 된 나폴레옹은 1808년 대군을 이끌고 인접군인 스페인을 점령했다. 그해 5월 2일 포악한 프랑스군의 만행에 견디다 못한 마드리드의 시민들은 돌과 몽둥이를 들고 일제히 일어섰다. 그러나 그들은 곧 프랑스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그 보복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학살을 당하게 되었다. 이를 본 스페인 국민들의 침략자에 대한 분노가 전국적으로 폭발했다. 각 지방에서 피끓는 청년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일어나 게릴라전을 개시했던 것이다.
게릴라란 스페인어로 작은 전쟁이란 뜻인데, 이 말처럼 민중들은 몇년 동안이나 곳곳에서 프랑스군에 대항했다.
나폴레옹은 훗날 "스페인의 궤양이 나를 파괴시켰다"고 했는데, 스페인의 반항이 결국 나폴레옹을 몰락시키는 첫걸음이 되었던 것이다.
영웅 넬슨의 떠들썩한 로맨스
트러팰거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무찔러 나폴레옹의 영국정복에 대한 야심을 꺾고 자신도 장렬하게 전사한 해군제독 넬슨은 지금도 영국의 국민적 영웅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넬슨제독에게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로맨스 하나가 있었다 상대 여성은 엠마 해밀턴, 당시 나폴리 주재 영국 공사의 부인이었다. 남편을 가진 여성과 아내가 있는 그가 서로 사랑을 한 것이므로 당연히 일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가정은 파탄에 이르렀고, 아내와는 영구별거를 하게 되었으며, 두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차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트러팰거해전이 이 로맨스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그는 전투중에 적의 총탄을 맞아 쓰러진 것이다. 그때 넬슨은 숨을 거두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해밀턴부인을 잘 돌봐주시오!", "신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도 엠마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 낭비벽이 심했던 그녀는 넬슨의 유산까지 모두 탕진하고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현재 런던의 국립초상화미술관에는 두 사람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어쩌면 세월이 그녀에 대한 평가를 바꾸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아내입니다" - 빅토리아 여왕의 인품
영국의 현 여왕인 엘리자베스2세의 5대 선조가 영국 전성기에 군림했던 저 유명한 빅토리아여왕이다.
그녀는 18세의 젊은 나이에 여왕의 위에 올랐는데, 3년후 외사촌이며 독일 출신인 알버트와 결혼했다.
알버트는 훌륭한 보좌역인 동시에 좋은 남편이었다.
그의 조심스러우면서 적절한 판단과 충고는 공과 사를 떠나 젊은 여왕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여왕도 또한 그를 깊이 사랑하고 마음으로부터 신뢰했다. 이 두사람에 관한 유명한 에피소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어느 날 여왕이 알버트의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요?" 남편의 목소리에 그녀는 말했다.
"여왕이요"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또 다시 노크를 했지만 역시 묵묵부답.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아내입니다."
그때서야 문이 열렸다. 이런 것으로부터 그녀의 가정적인 인품의 일단을 엿볼수 있다. 그녀는 아홉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가족과의 온화한 생활은 영국 가정의 귀감으로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세계 최초의 지하철 - 그 희한한 광경
세계 최초의 지하철이 개통된 것은 1863년 1월의 일인데, 이것은 런던시내의 약 5.5km를 연결하고 있었다. 이미 130여년이 넘은 먼 옛날의 일인 것이다.
지하철이라고 하지만, 당시의 건설방법은 땅속에 터널을 뚫는 것이 아니라 지표에 홈을 파고 그 위에 뚜껑을 덮는 식이었다. 그리고 군데군데에 뚜껑을 덮지 않고 그대로 두어 위로부터 빛이 비치도록 했다. 왜냐하면 당시에 는 아직 전기로 차를 움직이는 기술이 발명되지 않아 모든 열차가 증기기관으로 운행되었기 때문이다. 5km이상의 긴 터널을 연기를 내뿜는 증기기관차가 달린다면 그연기는 어디로 빠져나갈 것인가. 그래서 여기저기에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뚜껑을 덮지 않은 채로 놓아두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배려에도 불구하고 터널 속은 언제나 연기로 가득차버리게 마련이다. 객차는 문을 닫아도 자욱하게 연기가 들어오고 승객의 얼굴이나 양복은 그을음으로 새까맣게 그을렸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그런 객차 속에도 {금연}이라는 공고가 붙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2천만 잉카제국이 180명의 스페인군에 패한 이유
페루를 중심으로 번성한 잉카제국은 인구가 2천만명 이상이나 되었고, 수준높은 문화를 지녔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 나라가 불과 180명 정도의 병사를 거느린 스페인인 피사로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피사로는 잉카황제가 있는 카하마르카에 병사와 함께 도착하여 황제에게 우호관계를 맺을 것을 요청했다. 그에 대한 답례로 황제 일행이 피사로를 방문했을 때 피사로는 성서를 꺼내면서 크리스트교로의 개종을 강요했다. 황제가 거부하며 성서를 찢어버리자 이를 신호로 스페인군은 일제히 소총의 방아쇠를 당기며 습격을 시도했다. 허를 찔린 잉카군들은 패주하고 황제는 붙잡혔다. 이 불의의 공격에 의해 잉카제국은 멸망했다. 1532년 11월의 일이었다.
죽기 전에 남편의 러브레터를 태운 워싱턴 부인
조지 워싱턴은 26세때 돈 많고 젊은 미망인 마사와 결혼했다. 그녀는 상냥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여성이었고, 독립전쟁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남편을 도와 전장에서 부상병들을 간호하기도 했다. 또 남편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내키지도 않았지만 사교계에도 얼굴을 내밀었고, 오전 중에는 수수한 옷을 입고 집안일을 꾸려나갔다.
남편이 죽은 2년뒤 그녀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세상을 뜨기 바로 직전에 그녀는 일찍이 남편으로부터 받은 러브레터를 대부분 불태워버렸다. "이런 편지는 사람들에게 공개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그녀의 신중함은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상품화하는 현대의 일부 연예인들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링컨 암살사건에 얽힌 이야기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흑인노예해방이라는 위대한 업적은 남긴 링컨이 괴한의 흉탄에 쓰러진 것은 남북전쟁이 종결된지 불과 5일후, 즉 1865년 4월 14일의 일이었다.
그날 저녁은 안개가 자욱하고 으스스하게 추운 밤이었다. 링컨부처는 워싱턴의 포드극장 2층 특별석에서 때마침 상연되고 있던 희극을 관람하고 있었다. 복도에서 호위경관 1명이 경호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는 무책임하게도 자신 의 근무지를 떠나 극장 근처의 바에 들어가 있었다.
저녁 10시가 지나 한 남자가 복도문을 열고 극장안으로 숨어들어 약 1m앞에 있는 링컨의 뒷머리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별안간의 총성에 놀라 수라장이 된 현장을 남자는 재빨리 뛰어나와 모습을 감추었다. 극장 근처의 민가에 옮겨진 링컨이 숨을 거둔 것은 다음날인 15일 아침이었다. 하수인은 존 부스라는 배우로서 광적인 남부 애국자였다. 도망친 그는 같은 달 26일에 사살되었고, 그 공범자도 체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