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금동대향로에서 향로형 재털이까지
절집의 급한 사정
국보 287호로 지정된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것은 1993년 12월이었다. 그것은 국립 부여박물관에서 부여의 나성과 능산리 고분들
사이에 있는 절터를 발굴할 때 출토되었는데, 발굴 당시 그것은 뚜껑과 몸통이 분리된 채 각종 금동 제품과
유리 제품 및 그릇들과 함께 나무로 만든 물통의 밑바닥 부분에 파묻혀 있었다. 쉽게 말해서 백제금동대향로는
절집에서 향로가 있어야 할 마땅한 자리, 예를 들어 법당터 등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라, 향로가 있기에는 매우 부적합한 자리에서 발굴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능산리 백제
절집에서 무언가 급한 사정이 생긴 나머지 향로를 다른 귀중품들과 함께 물통 바닥에 숨겼음을 말해준다. 도대체
얼마나 급한 사정이 생겼기에 당시 이 절집에서는 향로를 허겁지겁 숨겨야만 했을까?
능산리 절터에서는 백제
창왕昌王의 이름을 새긴 돌로 만든 사리감舍利龕이 나왔는데, 거기 새겨진 바에 따르면 그 절터는 서기567년에 백제 왕실이 주측이 되어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백제의 멸망과
더불어 그 절집은 폐허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당시 이 절집에서
생겼던 급한 사정도 아마 백제가 무너진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 절집에서는
나라가 무너지는 급한 상황에서도 향로를 엄청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숨겼다. 그것은 그들이 이 향로를
얼마나 귀중하게 여겼는지 짐작하게 만든다. 어쨌든 그들은 이 향로가 신라나 당나라 군사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무려 14세기가
지난 뒤 다시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재생시간 01분 20초
향로의 생김새
백제금동대향로는 한 마리의
용이 향로의 몸통을 받들고 있는데, 몸통은 갓 피어나려는 연꽃봉오리 모양이며, 그 꼭대기에는 날개를 활짝 펼친 봉황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그리고
몸통 가운데를 나누어 본체와 뚜껑으로 삼았으며, 본체는 다시 받침대와 몸통으로 나뉘어져 있다. 또 자세히 살펴보면 이 세 부분을 따로 주조한 뒤 이어붙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향로의 전체 높이는 63cm에 가까우며, 몸통의 최대 지름은 20cm에 가까울 만큼 큰 것인데, 무게도 12kg이나 된다. 중요한 것은 향로의 규모만이 아니다. 이 향로에는 상당히 많은 무늬가 있는데, 74개나 되는 봉우리와
65마리의 짐승 및 23인의 인물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그 밖에도 폭포나 산길 및 나무들이 이 향로의 꾸밈새를 더욱 빛나게 하며, 향로로서의 실용성에 걸맞게 12개나 되는 연기 구멍이 나 있다.
23인의 인물 가운데 5명은
향로의 뚜껑 위쪽에 조각되어 있는데, 그들은 각각 하나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동영상 참조). 그들이 들고 있는 악기는 “일곱 줄 거문고”(七絃琴)와
“열 여섯 짝 대나무 피리”(十六 排簫)와 개량비파인 ‘완함’阮咸과
긴 피리와 작은 북 등인데, 이를 통해 우리는 《삼국사기》에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백제의 음악세계를 짐작할 수 있다.
또 뚜껑의 아래 쪽에는 16명의 선인仙人들이
조각되어 있고, 향로의 본체에도 2명의 선인이 조각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다른 몸짓을 하고 있는데, 바위에 앉아 명상에 잠긴
모습을 비롯하여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이나 길을 걷는 모습도 있으며, 못에서 머리를 감는 모습도 보인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사람과 역근易筋 자세로 하늘을 나는 사람
등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이 가운데 16명 선인들의 모습은 각각
북방 기마종족계의 오랜 수련법인 16가지 수승화강행水升火降行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머리를 감는 것은 잡념을 꺼리는 조목을 나타내고, 명상을
하는 모습은 핏기운을 늦추어주는 조목을 나타내며, 땅을 짚으며 길을 걷는 모습은 땅기운과의 감응 조목을
나타내고, 파초를 만지며 다른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은 몸의 눈을 떠나 귀로서 자기 내면을 살피는 조목
등을 나타낸다. 일찍이 북방 선가에 의해 이른바 현관타좌16식玄關打座16息으로 정리된 바 있는 각 덕목들이 이 향로의 무늬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또 말을 타는 모습과 말을 타고 허리를 돌려 활을 쏘는 모습들은 이 그림의 기마종족적
계통성을 드러낼 뿐 아니라, 몸의 흐름을 거꾸로 함으로써 기운의 흐름을 바로잡으려던 전통을 보여줌으로써, 문화적으로도 우리 겨레다운 계통성을 확인해준다.
이처럼 벡제 절터에서 출토된 이 향로에는 결코 불교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늬들이
새겨져 있다. 물론 향로의 본체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몸통
자체도 연꽃봉오리를 닮았지만, 거기에 새겨진 대부분의 무늬는 북방민족의 전통적 정신세계를 담고 있는
것이다. 마치 불교가 들어온 이후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불교보다 전통사상적인 그림이 많듯, 불교를 국교로 하던 백제 말기의 이 향로에서도 불교보다 전통사상의 흔적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
높이 61.8cm, 무게 11.8kg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5-1번지 능산리 절터 출토

향로 최상단의 봉황 장식 세부 모습
천상계인 정상에 양을 대표하는 봉황을 두고 아래에는 음을 대표하는 수중동물 용을 배치하였다
향로 뚜껑의 펼친 모습
불로장생의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삼신산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향로 단면도
단면도를 통해 보면 향로의 치밀한 설계가 드러난다.
몸체와 관, 받침이 모두 따로 제작되어 섬세하게 연결되어 있다.
향을 사르는 뜻
사실 향로와 향이라는 물건도
불교적인 것만은 아니다. 향이라는 글자를 풀어보면 벼화禾자에 날일日자로 되어 있으며, 벼가 익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더 들어가 향의 옛 글자를 보면
기장서黍자 아래 달감甘자로 되어 있다. 기장이 단맛을 내려면 발효를 시켜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기장을 가지고 술을 만드는 일이다. 즉 향이란 기장
술의 향기를 뜻하는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처럼 기장으로 빚어낸
술을 일러 울창주라고 하는데, 그것은 예부터 신을 내리게 하는 강신주降神酒로 쓰여왔다. 물론 울창주는 오늘날에도 천제나 종묘제례에서 강신주로 쓰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기장술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되는 역할을 했으며, 거기에서 파생된 향도 그런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지금도 몽골의 풍속에는
제사를 지낼 때,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제사지낼 곳 주위에 그 연기를 쐰다. 핀란드나 스웨덴 남부 등 기마종족의 전통이 남아있는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도 이런 풍습은 조금씩 남아있다. 요컨대 향문화는 북방 기마종족의 전통과 함께 이런저런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다만 향을 피우는 향로문화만이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발전했을 따름이다.
이처럼 향로는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북방 기마종족들이 만들어온 물건이었다. 북중국의 경우에도 불교(석가모니 불교)가 생기기도 이전인 은나라 때부터 향로를 사용했으며, 북중국문화의 뿌리였던 기마종족들은 그보다 더 일찍부터 향로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향을 사르는 역사는 아마
불을 사용하면서부터 원시적으로나마 시작되었을 것이고, 나아가 제사의식이나 기도의식이 다듬어지면서 상당히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향이라는 한자어의 발음인 ‘샹’이 한님께 올리는 제사를 가리키는 북방어 샹에서 온 것만 보더라도 향의 본래 쓰임새를 짐작할 수 있다(《나를 다시하는 동양학》) 참조).
그러므로 한님 숭배를 바탕문화로
하는 우리 역사에서 향과 향로의 문화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백제금동대향로의 경우 중국에서 수입되었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백제의 향문화가 거꾸로 중국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살펴보아야
할 정도로 우리의 향문화는 매우 발전해 있었다.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적
전통이 들어온 뒤에도 향문화는 여전히 전톤문화와 함께 다듬어졌다. 백제금동대향로처럼 크고 빼어나자는
않더라도 제사를 지내는 집이면 어디나 향과 향로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소장하고 잇었다. 우리 겨레의 옛
신화에서 자주 나오는 단檀나무도 향나무의 일종으로서, 자단향 목단향 등 좋은 향의 재료가 된다.그만큼 우리 겨레는 향문화를 소중하게 여겨왔던 것이다.
잊혀지고 짓밟히는 세월
한님과 하나됨을 이루려는
전통적 사고방식의 약화와 함께 향문화도 차츰 형식화되었다. 시중에 모조품이 많이 나와 있는 고려시대의
청자투각향로만 하더라도 향을 사르는 문화적 본질보다 형식적 예술성에 치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고, 조선시대의
백자향로는 장난기마저 서려있는 애완물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나 석굴암이나 다른
국립공원의 오늘날 처지를 살펴보면 그런 형식성이나 장난기는 아무 것도 아니다. 자기들 생각에는 예쁘게
잘 만들려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휴지통을 향로 모양으로 만들어놓고 거기에다 담배꽁초 등을 버리게 한다. 참으로 겨레 문화의 바탕을 잃어버린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쓰레기통을 향로 모양으로
만들고 거기에 꽁초를 버린다는 것은 밥그릇에다 담배를 끄는 것보다 더 몰상식에 가깝다. 전쟁이 잃어날
때 밥그릇을 숨기고 떠나지는 않지만, 옛 백제인들은 향로를 눈에 띄지 않게 숨겼을 정도였으니, 과연 어느 것이 더 몰상식이더란 말인가. 또 그것을 이 나라의 문화정책
담당자들조차 느끼지 못할 지경이니, 한님과 하나됨을 이루려는 뜻에서 다듬어온 우리들의 향문화는 이제
진정 사라진단 말인가?
그나마 화학 향을 거부하고
향의 본질을 되살리려는 작은 흐름들에 나름대로 희망을 걸어본다. 향 자체가 아니라 잃어버린 겨레의 소중한
것들이 그런 흐름 속에서 되살아나기를 말이다. 또 그런 흐름 속에서 나를 억지로 꾸며서 한님을 속이려는
화학 향수보다 한님께 스스로를 밝게 보이게 하는 참인간화의 향기가 우리의 미래를 맑게 해주기를 꿈꾼다.
- 모울도뷔 준비 제5호(1999년
0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