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
- 언덕이 없으면 만들어 비비고 일어서라 -
나는 1938년생이다. 80년 넘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日帝侵略期, 8․15光復, 6․25戰爭, 6월 民主抗爭 등 근세 激變期 상황을 모두 경험하면서 살아왔다. 세상에는 외모가 똑같은 사람은 없다. 쌍둥이조차도 조금의 차이가 있다. 그러기에 사람마다는 태어난 環境이 다르면 性格도 환경에 맞게 다르게 변한다. 그래야 살아나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 生涯를 살면서 살아오면서 겪은 시대의 상황적 배경이 다르니 그에 반응하는 삶의 역사는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나는 歷史의 激變期를 지나면서 受難과 苦痛으로 點綴된 삶을 살아 왔다. 그 삶을 가감 없이 敍述해 보고 싶다. 물론 나와 同時代를 살아온 사람들은 거의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며 살아간 줄 안다.
나는 初等學校 6학년 때 民族의 不運인 1950년 6월 25일에 民族相殘의 피비린내 나는 戰爭을 겪었다. 光復 후에는 政局이 民主主義다, 社會主義다 하는 理念論爭으로 極限 상황에 치닫고, 그 논쟁에 휘말려 할아버지는 國軍에게 銃殺당하셨고, 그런 연유로 知識人이었던 아버지의 沒落과 變身을 보며 자랐다.
나는 基督敎人이다. 어릴 때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체 아버지를 따라 敎會에 나갔다. 風琴소리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며 크리스마스 때에는 선물받는 게 그저 재미있어 다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끔찍했던 6․25가 일어났고, 당시 金融組合 이사였던 아버지는 전쟁이 곧 끝난다 하시며 놋그릇들은 모두 官舍 우물에 던져두고 옷장들은 뒤로 해서 벽을 향하게 해 놓으신 후, 우리 식구 모두는 외삼촌의 소달구지를 타고 대둔산 아래 양촌 외가댁으로 피난을 떠났다.
아버지 생각대로 전쟁은 빨리 끝나주지 않았으며, 나는 놀란 소식을 듣게 된다. 평소 金九를 도우며 자칭 民族主義者로 獨立運動을 외쳤던 할아버지가 不穩한 思想家로 분류되어 우리 아군에게 총살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외갓집에 숨어있던 아버지를 빨갱이들이 그대로 놔 둘리 없다. 아버지를 찾아내어 賦役을 하게 하였고, 9․28 서울 收復이 된다. 自意든 他意든 賦役을 한 아버지는 겨우 14살이 된 오빠와 함께 외가댁으로 피신한 후 상황이 좋지 않자 오빠와 함께 大屯山으로 들어갔다.
13살 나는 내 의지와는 다르게 어린 家長이 되어 내 아래 동생과 어머니를 책임지며 이집 저집 친척집을 찾아 피난을 하며 살아야 했다. 그때 아버지 소식을 듣게 된다. 共匪討伐에서 잡혀 大田矯導所에 있다는 것이다. 평소에 아버지를 따르던 사람들이 천 명 넘게 歎願書를 내주었고, 드디어 아버지는 執行猶豫로 假釋放 되어 나온다. 아버지와는 기적 같은 상봉을 하지만 같이 따라간 오빠가 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 만다.
이젠 學校에 갈 일이 課題다. 그때의 형편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공부는 때를 놓치면 할 수 없음을 알고 아버지께 학교에 가겠다고 하여 許諾은 받은 후 혼자서 初等學校 卒業狀도 없이 근처 中學校에 들어가게 된다. J중학교는 錦江 하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학교였다. 그런 방법으로 어린 동생도 근처 초등학교로 편입을 시켰다.
假釋放으로 집에 계시던 아버지는 韓醫師 시험을 보아 合格을 하였고, 韓醫院을 차린 후 생활이 안정이 되어 갈 때쯤 나는 師範學校를 졸업하고 교사가 된다.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을 피울 수 없다.”고 挫折해 있는 한 남자를 만나고, 그와 삼년 넘게 戀愛를 하다가 곧 結婚을 한다. 그는 6男妹의 맏이였고, 홀어머님과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는 家長이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단다.”라고들하며 나를 만류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언덕이 없으면 “언덕은 내가 만들어 비빈다.”고 응수하며 그에게 다가서 손을 잡으며 “쓰레기 더미에서 함께 장미꽃을 피우자”고 약속을 했다.
試鍊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결혼 후 첫 아이를 낳았는데 腦性麻痺였다. 병원에 갔더니 아이를 보고 의사가 말한다. “이 아이는 出産할 때나 아니면 그 후 머리에 심한 衝擊을 받았습니다. 의사가 출산할 때 머리를 건드린 모양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아들이 몇 번의 수술 끝에 힘든 步行으로 고등학교를 우수하게 졸업하고 서울대 核物理學課에 들어갔다.
아들은 87년에는 民主化運動에 뛰어들었고, 敎師였던 나는 늘 사표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아들을 만류해야만 했다. “아들아, 네가 네 생각에 충실하기 위해 꼭 학생운동을 해야겠다면 네 맘대로 해도 좋다. 대신 엄마에겐 꼭 알려다오. 나도 네 뒤를 이어서 결심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이런 위험 속에서 난 더 열심히 敎師로서의 임무를 다했고, 그로 해서 모범교사 훈장도 받았으며, 3년 동안 포상금으로 나라에서 보내준 여행도 다녀왔다.
家庭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시동생이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내어 매월 일천만 원이란 큰돈을 利子로 내주어야 했다. 남들이 1년 아니면 3년 은행에서 積金으로 타는 돈을 난 매월 利子로 내며 살아야 했다. 결국은 담보한 내 살던 집을 모두 빼앗기고, 시골로 집을 옮겨야 했다. 화병으로 시모님은 천국가시고, 남편도 心筋梗塞으로 쓰러져 입원을 해야만 했다.
아들은 서울대학교 핵물리학을 졸업하고, 서울대 내에 ‘메아리클럽’이라는 동아리에서 만난 며느리와 顯忠日에 結婚을 한 후 미국으로 떠났다. 李輝昭 박사가 다니던 펜실베이니아대학교(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1995년 1월 23일 核物理學 박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 왔지만 다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敎授로 임명되기가 힘들었다.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 플로리다(Florida) 州立大學에서 상임연구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다리가 불편한 아들을 위하여 강의실까지 휠체어로 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었다는 소식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아직도 障礙人에 대한 배려는 후진국 상태였다.
정년 후 모처럼 자유로운 삶을 누리려고 했더니 힘든 삶은 날 놓아 주지 않았다. 남편이 腦梗塞으로 쓰러졌다. 대변도 소변도 언어도 제대로 소통이 안 되는 상태의 마비가 왔다.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2019년 12월 코로나가 中國 武漢에서 시작될 무렵 편안하게 天國 가셨다.
내가 비록 1달란트의 운명으로 태어났어도 그 운명을 바꾸어 몇 배의 달란트로 바꾸어 놓을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 恩惠에 감사한다. “苦難 당한 것이 내게 有益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主의 律例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는 詩篇 119편 71절 詩人의 告白처럼 여기까지 나를 患難에서 인도해 주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시다. 다시 되 돌아보아도 난 그동안의 내 삶을 나는 결코 後悔하지 않는다. 견디고 이겨내게 해주신 그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시험이라면 앞으로도 욥처럼 純宗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켜 나갈 것이다.
不足한 내 삶의 告白의 글을 읽는 동안 글쓴이의 한 삶을 훔쳐보고 함께 共感할 수 있다면 좋겠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하지만 언덕이 없으면 언덕을 만들어 비비며 살아야 한다. 어떤 難關 앞에서도 결코 挫折하지 않고 모두가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