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부석사 무량수전과 관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부아가 치밀 때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 무량수전의 단청과 관련된 언사들이다. “단청을 하지 않아야 고색창연한 멋이 있다, 단청을 하면 무량수전을 버린다”는 등의 말이다. 일말 타당성이 있게 들리지만 옛 스님들이 들으면 몽둥이를 들고 좇아 올 일이다.
1808년 기록된 ‘양보전단확중수기(兩寶殿丹雘重修記)’를 보면 당시 무량수전과 영산전의 실상을 잘 알 수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지붕과 처마가 썩어 비가 새고 부서져 있다면서 이 전각들이 우리의 얼굴과 같아 부끄럽다는 심정을 토로하면서 1806년 3월 공사를 시작하여 1808년 10월에 가서야 마칠 수 있었으니 당시 무량수전과 영산전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무량수전의 단청 복원에 대해서는 지난해부터 정밀조사를 실시하여 그 기초를 다져가고 있으니 그렇게 서두를 일은 아니다.
공민왕의 친필인 부석사 ‘무량수전’ 현판.
무량수전 현판은 고려 제31대 왕(1330~1374)인 공민왕의 친필을 판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얘기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누가 어떻게 공민왕의 친필임을 증명해서 전해져오는 것인가? 이 의문의 답은 지금의 현판 뒤에 이를 밝힌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옛날 신라 의봉 원년(676)에 부석사를 창건하였는데 금당의 액자 글씨는 공민왕이 쓴 것이다. 경오년(1690)에 왕족인 낭선군이 부석사에 와서 그 액자를 건 뜻을 쓰고 신미년(1691) 여름에 이 절 화승 영필이 마음먹고 액자 테두리를 다시 만들었다(粵在新羅儀鳳元年創建浮石寺, 金堂題字, 恭愍王之親筆也, 當此庚午之時, 國族朗宣君到于浮石寺, 題于符板之意, 命其書鎭云, 到于辛未孟夏間, 寺畵僧瑛珌慨然傾心四雪角改造也)”.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 공민왕이 부석사 무량수전의 현판 글씨를 쓴 것일까.
고려는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이 외세의 침략을 받은 왕조 가운데 하나 일 것이다. 왜구는 기본이고 거란, 여진, 몽고, 홍건적 등 많은 외세의 침략과 약탈로 왕성이 침탈당하는 비극까지 겪었다.
공민왕 때도 마찬가지로 1361년 홍건적이 쳐들어와 개경이 함락되자 이 해 12월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에 머무르게 된다. 이후 1363년 1월 지금의 충북 청주로 옮겨갔고 이해 윤3월에 개경으로 돌아갔다.
공민왕의 무량수전 현판 친필은 아마도 1361년 안동으로 피난 가는 도중 1358년 왜구에 의해 부석사 무량수전이 소실되자 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남기고 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현판의 글씨가 공민왕의 것이라고 한 낭선군(朗宣君)은 누구인가.
낭선군[1637(인조15)~1693(숙종19)]은 옛 명필들의 글씨를 모아 서첩을 만든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의 편찬자인 선조(宣祖)의 손자인 이우(李俁)이다.
그러면 낭선군 이우는 왜 부석사에 온 것일까. 또 혼자 부석사 유람을 온 것일까.
물론 그가 부석사에 온 이유가 있었다. 또한 그는 혼자 오지 않았다. 물론 수행원들이 있었겠지만 그와는 다른 인물이 동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는 관련 기록을 찾기 힘들었지만 낭선군이 부석사를 온 것은 다름 아닌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에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동행한 인물이 바로 그의 동생인 낭원군 이간[朗原君 李偘(인조18년(1640)∼숙종25년(1699)]이다. 두 형제 모두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능숙함은 물론 불교와도 인연이 있어 몇몇 사찰의 사적기 및 고승의 비명(碑銘)을 써주기도 하였다.
‘부석(浮石)’에 새겨진 ‘선원록봉안사낭원군(璿源錄奉安使朗原君)’명문.
낭선군은 그렇다 치더라도 낭원군이 부석사에 왔음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모든 문제의 답은 현장에 있다. 무량수전 서쪽 ‘부석(浮石)’ 정면에 ‘선원록봉안사낭원군(璿源錄奉安使朗原君)’이라는 명문이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1681년 완간된 <선원록>을 1690년 태백산사고에 봉안하기 위해 각화사로 향하던 낭선군, 낭원군 형제가 부석사에 들러 무량수전 현판을 보고 공민왕이 친필임을 고증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실록에도 등장하지 않는 <선원록>의 태백산사고 봉안 연대가 확인되는 셈이다.
이 글을 쓰면서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무량수전의 단청은 차차 한다고 쳐도 현판만은 제대로 봉안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판이 무엇인가. 그 건물의 얼굴 아닌가. 금칠도 단청도 모두 벗겨져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으로 있는 무량수전의 현판에게 우리는 정말 미안해해야 하지 않을까.
*양보전(兩寶殿)에 대해 여러 설들이 있지만 18세기부터 19세기 초에 기록된 부석사 전각의 여러 현판과 중수기 등을 통해 볼 때 영산전과 무량수전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문경 대승사에 봉안된 보물 575호 아미타후불목각탱의 본래 봉안처에 대해 일부 문헌에서는 금색전(金色殿)이라 하였지만 이 금색전이 바로 영산전임을 알 수 있게 하는 기록이 바로 1796년에 작성된 ‘경상좌도 순흥 태백산 부석사 영산전 미타후불탱 급 미타 관음 개금기(慶尙左道順興太白山浮石寺靈山殿彌陀後佛幀及彌陀觀音改金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