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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905_화요공부방_정전개요3
교무님 설법
날씨가 선선해졌습니다. 오늘이 정전 세 번째죠. 맨 처음에는 어떻게 경전이 구성되어 있고, 7대 교서가 무엇이고, 법문을 듣거나 교전을 봉독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일원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했습니다.
오늘은 표어에 대해서 할 차례입니다.
정산종사 법어 경륜편 1장에서 원불교에 대해서 나옵니다.
원- 형이상 : 언어와 명상이 끊어진 자리
형이하 : 우주 만유 전체가 원이다.
모든 법의 근원인 동시에 실제이다. 그러면 불교와 헷갈리게 원교 라고 하지 왜 원불교라고 했느냐고 묻자 정산종사님께서 뭐라고 했냐면요.
불- 覺 = 心. 결국은 마음이 들어서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 가르치고 배운다.
원은 진리를 상징하고, 그것을 깨달아서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다. 라고 합니다. 원이라는 것은 어떤 종교에서나 다 있습니다. 원은 같으나 제도가 다른 것입니다. 그 시대의 인심에 따라서 성자들이 다르게 법을 편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서가모니 부처님이나 공자 노자 등은 진리를 각각 다르게 봤냐. 아닙니다. 원 안에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인심과 인지에 따라서 다르게, 말도 다르게 표현했고 제도도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 자리, 실상 자리는 같은 것입니다.
일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이고, 부처님이고 자연입니다. 결국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어떤 종교는 믿음을 통해서 해결하라고 한 것입니다. 신념체계입니다. 인지가 덜 발달했을 때는 그렇죠. 과거 예수님께서는 신념체계로서 이것을 잡아주지 않았나 합니다. 불교나 원불교는 진리를 깨달음을 통해서 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원불교는 신앙과 수행을 같이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냐.. 아닙니다. 믿음을 통해서 깨달음으로 가자 이겁니다. 그래서 대종사님도
원불교 사람들이 실행력이 기독교 사람들보다 뒤집니다. 기독교인들은 평균 1주일에 교회에 4번정도 옵니다.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원불교는 어쩌죠? 일주일에 한번 오죠. 기분좋으면 두 번오고요. 헌공도 5분의 1도 안 냅니다. 제가 지금 실행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종교인 기독교도 실행을 그렇게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새벽에 보면 딱 성경책 끼고 교회로 올라갑니다. 할머니도 학생들도 다 그렇습니다.
비만 치료하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데 의사가 뚱뚱한 것입니다. 환자가 물어보니까 의사 왈. 환자의 살만 빼주면 되는 것 아니냐.. 이렇게 하면 안 되죠. 자기가 먼저 실천을 해야 하는 겁니다.
원불교는 반드시 일원상, 그 자리를 믿고 깨달아서 가르치고 배우는 그런 종교입니다. 그런데 원불교를 교양 수준 정도로 바라보고 그런 욕심으로 교당에 온다면, 그 본래 목적과 안 맞는다 이겁니다. 그래서 무엇부터 해야 하냐? 일원상. 이것부터 나와져야 하는 겁니다. 원불교 교도라면 누구나 일원이 묻어 나와야 합니다. 그런 눈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상식이나 교양정도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약하지 않냐 합니다.
마음이 복잡해서 그냥 왔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해야하냐면, 원불로써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표어를 하겠습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
불상 : 나무로 돌로 금동으로 .. 각종 불상이 있습니다. 佛은 보통 서가모니 부처님으로 알고 있죠? 그래서 원불교 처음 온 사람이 부처님 어디 모셔놨냐고 하죠? 우리는 그것을 넘어서서 우주만유가 전체가 다 부처다 이것입니다. 모두가 법신불의 응화신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절에서는 부처님 그러면 서가모니 부처님이요 불공하면 그 부처님에다 불공하는 것이빈다. 향 올리고 꽃, 초, 쌀 등등을 올립니다. 부처님 앞에 불공을 참 잘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불공은, 어디까지를 부처님으로 보냐에 따라서 그 내용이 달라집니다.
옛날에 어느 서울대 교수님이, ‘처처불상’은 과거에도 나와 있습니다. 서홍스님 법문 하는 것 들으니까 처처불상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대종사님의 처처불상은 어떤 면이 있냐. 사실 우리의 신앙의 대상에 위에 많이 있죠. 우리는 신앙의 대상이 어디있죠. 끌어와서 쫘악 펼쳐놨습니다. 수직 뿐 아니라 수평까지 되어 있습니다. 요새 노무현 대통령이 고생 많죠. 그것은 요새 세상이 처처불상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시키는 대로 무조건 하는 게 아니라 설득을 해야 하는 겁니다. 교무도 옛날에는 무조건 시키면 교도들이 따라 했습니다. 하지만 요새는 달라들기도 합니다. 좋을 때는 다 처처불상이지. 나한테 헤꼬지 하고 나를 열받게 할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정화신불과 편화신불을 알아야 하고 대자리와 소자리로 나눠서 알아야 합니다. 유무자리로는 모두다 부처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정기훈련을 나고 나니까 부처님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의 본성 으로서 정화신불과 편화신불.
처처불상의 신앙까지만 가도 원불교의 반은 다닌 겁니다. 완전히 눈이 달라지는 겁니다. 보통은 처처가 도둑놈이고 처처가 경쟁자이고 나와 다른 사람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나 처처는 나와 하나인 것입니다. 견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견성은 꾸어서라도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팔뚝에 상처가 났어요. 그러면 바로 반대손이 바로 달라 들어서 상처를 잡고 치료해주죠. 그렇다고해서 치료비를 청구하는 게 아닙니다. 처처불상의 일원자리를 깨친 사람은 시방세계가 다 나와 둘이 아닌 것입니다. 사농공상을 떠나서 금수초목까지 더 나아가서 유정물까지도 전개하는 겁니다. 차별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우차별. 이런 것은 합당한 차별입니다. 남자 여자가 본래는 하나죠. 그런데 하나이면서 둘입니다. 하나인것을 알고 둘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제가 지금 익산에 가서(새벽에 출발). 우리 동기 교무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큰아들은 연대 의대 나왔는데 원불교 교무가 되었고. 작은 아들도 의대 나왔고 딸은
탈관을 해가지고 땅에 넣는데, 진타원님이 말씀하시기를 다음 생에서는 동지로 만납시다 하는 겁니다. 둘다 우리 전무출신 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정신 나간 사람이죠?? 자기 남편 시신 앞에서 이런 소리 하는 거죠. 처처불상 신앙이 되면 인과가 같이 보이게 되고, 모든 사람이 권능이 있음을 압니다. 우주만유가 전부가 다 부처님이다. 그런데 무슨 권능을 가지고 있냐. 죄와 복을 줄 수 있는 권능이 있다. 사사불공은 대종사님이 처음으로 내놓으신 것입니다. 예전에는 석가모니 불상에만 불공을 했습니다. 왜 사사 라고 했습니까? 상황상황마다 다르니까 그렇게 말씀하셨겠죠. 좋아하는 대로 해드려라. 했습니다. 대종사님 당대에 어떤 사람이 아파요. 그때 병원에 가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어는 단체에서는 기도하라고 합니다. 인지가 이렇게 발달했는데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사사불공, 보이지 않는 위력에다도 불공을 하는 것입니다.(기도) 그러면서 동시에 무엇이냐. 천지에게는 천지에 맞는 불공을 하고 부모에게는
일제시대에 황 순경(황이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원불교 총부에다가 주재소(파출소)를 세워놨어요. 그곳에다가
대종사님 앞에서 책상 위에다 발을 올려놓고, 막 대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난리가 납니다. 하지만 대종사님은 더 잘해주셨습니다. 대종사님의 크신 감화력으로만 교화한게 아니라 불공을 직접 실행하신 것입니다. 이런게 없다면 다른 종교와 다를 게 없는 것이죠. 황 이천을 제자들은 나쁜 놈으로 보셨고, 대종사님은 부처님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에게서 감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입교한 것입니다. 결국 자기 딸 전무출신 시키고 돌아다니면서 교화 설교 하고 다녔습니다.
처처가 사은입니다. 처처가 사은이고 일원상입니다. 견성을 해야 알 수 있는 겁니다. 우주 만유가 전체가 다 진리요 전체가 다 위력이 있다. 제복의 권능이 있다. 그런데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은 그러대요. 오직 어떤 분만이 위력이 있고 다른 사람은 죄인이라고요. 이것과는 차이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목사 딸의 편지를 잠깐 볼 일이 있었는데 오직 그 양반 말고는 내 직장동료와 조상님들도 모두 죄인(중생)이라고 합니다.
원불교의 신앙의 대상은 처처불상
불공의 방법은 사사불공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손님들에게 불공을 잘 해야지 기도만 해서 쓰겠습니까? 피아노 학원 운영하는 사람이 애들과 학부모들에게 잘 해야지 불당에서 기도만 하면 됩니까? 잘살고 못살고는 불공을 잘하고 못하고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지금 잘 살면 불공을 잘 했다는 것이고 못 살았다면 불공을 잘 못한 것입니다. 앞으로 잘 살고 싶으면 불공을 잘 하면 되는 겁니다.
2. 무시선 무처선
원불교 수행 표어입니다. 원불교 수행의 귀결은 무엇이냐. 무시선 무처선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다. 수행과 선 하는데 그렇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많았고 그렇게 생각해 왔었다 그러는 거죠. 머리를 깍아야만 하고, 직업을 버려야만 하고, 결혼을 안 해야 하고, 고기도 안 먹고, 부모처자도 멀리하고.. 황벽선사- 원불교에서 보면 황벽선사는 나쁜 사람인 것입니다.
대단한 서원을 가지고 출가를 했씁니다. 홀어머니를 놔두고 출가를 했습니다. 이 사람 발에 사마귀가 났습니다. 어머니는 장님입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고 싶어서 사람들의 발을 잘 씻어 줍니다. 아들을 만났는데 황벽선사가 발을 바꿔버립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그 뜻은 기려야 하지만 그
수행이나 연구나 계행이나 한 곳에 치우치거나, 조용히 하는 것만을 취하는 것을 타파하고 주야 24시간 행주좌와어묵동정 간 마음을 챙겨서 대조하는 공부법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얼마나 좋아요. 그래서 과거에는 주로 수행한다 그러며는, 진공묘유라고 그러는데.
眞空- 체
妙有- 용
과거에는 주로 진공자리 위주였습니다. 그 자리를 깨치면 견성을 했네 그랬습니다. 그것은요 정시에 챙기는 것입니다. 동시에도 그렇다면 목석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동시에는 진공자리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서 생활적인 측면에서 쓰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공은 허공과 같다고 합니다. 정해도 정하는 바가 없고, 동해도 동하는 바가 없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맞습니다. 중생들은 정할 때 이것저것 잡념들이 나옵니다.
무시선 무처선도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에 마음을 잡습니다. 執心. 처음에는 염불 기도 백배 이런 것들이 상당히 좋습니다. 觀心. 無心. 能心- 능수능란하게 마음을 쓸 자리에는 쓰고 거둘 자리에는 거둡니다. 보통사람들은 반대로 하죠. 어둘 자리에 밝고 밝을 자리에 어둡습니다.
신앙으로 시작해서 수행으로 들어가고 그것이 다시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무시선 무처선이라는 것은 삼학 병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것이 없으면 불공도 미약해 집니다. 무턱댄 불공이 아니라 삼학에 바탕된 불공이어야 하는 겁니다. 내가 가게를 한다고 했을때 딱 보면 물건을 살 사람인지 안 살 사람인지 알아서(연구) 해야할 것 아닙니까? 준비 연마 철저한 계획 등이 동반되야지 현대 사회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학생들도 예습만 잘해도 80%는 먹고 들어가는 겁니다. 사업을 하고 무엇을 한다고 했을 때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김포의 다도 박물관에를 가봤는데, 15년간을 준비했다 이겁니다. 정신 육신 물질로 그렇게 준비한 것입니다. 내가 봤을때는 그것이 수행이라 이겁니다. 박물관을 하나 짓는데도 그러는데 내가 불보살이 되어야 겠다, 이생에 뭔가 깨달음을 얻어야 겠다 이렇다면 철저하게 삼학을 들이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타력신앙 하는 사람들은 안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정신 수양좀 했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안 되고,,
무시선 무처선은 결국 상시응용주의사항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침에 선 시간을 갖는 것이고, 낮에는 보은봉공하고, 저녁에는 참회대조 해서 일기를 작성하는 것입니다. 수입지출, 학습상황, 감각감상, 심신작용 등을 작성해야 그것이 무서선 무처선입니다.
내가 일원의 진리를 깨쳐서 일원의 행을 해보겠다 하면 아침에 잠에 취해서 살고 낮에는 대충대충 살다가 밤에는 티비보다가 자면 일원의 진리는 어떻게 되느냐 이겁니다. 과거에 이따만하게 투자했다면 원불교는 요만큼만 투자해도 이룰 수 있다 이겁니다. 대충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중근병은 찌다 만 것입니다. 설익은 밥이빈다. 중근병에 걸리면 **체를 합니다. 아무리 내가 바빠도 버스속에서 기도할 수 있는 겁니다. 형식으로만 체 하면 결국 내 인격으로 가지 못하겠다 이겁니다.
일원상은 신앙의 대상이면서 수행의 표본이라고 했습니다.
교리도에도 나오지만. 신앙의 귀결은 처처불상 사사불공입니다. 복이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수행은 무시선 무처선이 귀결입니다. 지혜롭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는 학벌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대종사님은 어떻게하면 노는 사람들을 유무념 공부 시킬라고 콩으로 태조사를 시켰습니다.
수행은 대自적인 것이고 신앙은 대他적인 것입니다.
(쉬는시간)
3. 동정일여 영육쌍전
동정일여는 무시선 무처선과 상당히 통합니다. 우리가 장소를 따로 잡아서 수행하는 것을 과거에는 수행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할때의 수행이고, 동할때도 필요하지 않느냐. 일심이 지속되어야 하지 않느냐 이겁니다. 어떻게 보면 정시의 수행이 동시의 수행으로 이어져야 하지 않겠냐 이겁니다. 힘든 일 속에서도 일심을 놓지 않는 공부, 이것이 동정간에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동정일여. 보통사람은 정시에는 딴생각하고 잠 잡니다. 동시에는 창황전도 하죠. 과거 종교에도 동정간의 정에 치우졌다는 것 아닙니까? 정 공부를 잘 하면 동 공부도 잘 합니다. 동과 정이 골라맞으면서 수많은 경계속에서 일심을 놓지 않아야 겠다. 과거에는 정 공부를 쌓는 시간, 동 공부를 사용하는 시간 이렇게 봤습니다만, 이제는 두가지를 병진해야하며 굳이 따지자면 정보다는 동에 더욱 무게를 두는 것입니다.
일없을때 뭐하세요? 백화점 쇼핑 합니까? 전화해서 이야기 합니까? 일없을때는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해야 하죠!! 우리가 일원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 다는 것은요. 정시에는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해야하는 것이고 동시에는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해야 하는 겁니다.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해야하는 것이죠. 이것이 골라맞아야 합니다. 요새 사람들은 주로 무엇을 잘 합니까? 쓰기만 합니다. 심해져서, 우울증 걸리고 눈 충혈되고 그럴죠. 이것은 정시 공부가 바탕되지 않아서입니다.
대종사님은 처음에 저축조합, 일시키고, 바로 익산가서 원불교 총부 세웠습니까? 그러지 않고 변산에 가셔서 시간을 가지시고, 인연도 만들고, 교법도 짜고 그럽니다. 그리고 만덕산에도 가서 일차 훈련도 나보고 그럽니다. 그 당시에 그렇게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 때도 제자들 다 졸았다고 합니다. 우리 선진님들은 영양이 부족해도 앉혀놓고 좌선을 시켰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훈련을 시키고 삼개월간 훈련을 시켰습니다. 요새는 너무 쓰기만 해서 이런 병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정 공부만 했는데요.
영육쌍전
초대법회때 영육쌍전을 가지고 설법할까 합니다. 원불교의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도가에서 육신을 뭐로 봤죠? 가죽 주머니라고 했고, 저것 때문에 욕망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생활 측면에서는 의식주라고 했죠. 靈은 수양 연구 취사 가 속합니다. 과거에는 영에 치우쳤습니다.
직업을 가지고도, 제가여도, 출가여도, 둘다 챙겨라 이겁니다.
천-靈-정신-불법
지-氣-육신-생활
본래 원리는 영과 육이 하나입니다. 쓰임에 있어서는 주와 종이 있습니다. 영이 주가 되고, 육이 종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같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육)과 혜(영)를 같이 쌓아야 하지 않느냐 이겁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누구도 가장 소중하고 원하는 것을 두가지로 말하면 복과 혜입니다. 원불교에서만 말하는 사상이 아닙니다. 똑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은 잘 생겼고 어떤 사람은 못 생겼고, 똑같은 시간을 일했는데도 누구는 10만원 벌고 누구는 5만원 법니다. 지혜 차이와 복 차입니다. 이것을 갖도록 해주는 것은 신앙문을 통해서는 복, 수행문을 통해서는 지혜를 얻게 해 주는 것입니다. 사은 사요도 마찬가지입니다.
영-무형
육-유형
영과 육도 일원이다. 본래 하나이다. 영은 변하지 않는 것이고 육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둘이면서도 하나입니다.
쌍전이라는 것은 정신의 의식주가 육신을 도와주고, 육신의 의식주가 정신을 도와주고 윈윈하는 관계입니다. 원불교의 영육쌍전은 내가 복을 지어서 부자가 되고 그 여유로 내 정신의 의식주를 또한 챙기는 것입니다. 복이 없으면 여름에 정기훈련도 못 납니다. 복이 있으면 교무님을 초청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혜를 땡겨올 수도 있습니다. 영육이 서로 도움이 되는 것이지, 가난해도 좋은 것이다라는 것은 아닙니다. 공부와 생활, 이사병행이라고도 합니다. 일하면서 공부하고, 공부로써 일하고 그런 겁니다.
첫댓글 김재원교무님 법문말씀 알아가는 기쁨으로 받들고, 실행하며 어찌다행 이법문에 들어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