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원기 92년 3월 24일 토요정례법회
□ “원불교를 만나서” - 정자은 교우님 강연
1) 저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익산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부모님의 인연으로 원불교를 만나서 좌선도 하며
모든 일을 열심히 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모든 것을 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전남과학고에 가서 괜한 친구들과의 비교심으로 공부를 하지 않았고 성적은 떨어졌다.
이후 원광대 한의대에 진학해서 졸업하고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다.
내가 힘들 때 도와주지 못하는 종교가 얼마나 무슨 종교인가 싶어서 원불교에 대한 회의가 시작되었다. 원불교에 나오기 싫었다.
그런데 기홍교우님께서 나를 교당으로 이끌기 위해서 끊임없는 불공을 하였다.
교당에 나오면서 대종사님께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완전히 답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원불교법과 한의학이 정말 대단하다면 이것을 가지고 해외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단장을 맡으면서 나태심도 나기도 하지만 단원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챙기게 된다..
□ 질문과 답변
- 조상덕 : 자은교우님과 함께 공부하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저에게 깨달음을 주셔서 너무나
고맙고 감사합니다.
- 양도선 : 너무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 김제원 교무님 설법
반갑습니다. 부모님이 오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단장님에게 단원들이 고마운 줄을 아시네요.
공감된 내용도 있을 것이고, 생각이 다른 것도 있을 것입니다. 소감을 한번 말씀해 주세요.
[청중들의 소감]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인연복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참 부러웠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원불교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는데
부모님 은혜 속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어서 참 부럽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제 아이도 사은에 대해서 그렇게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단원들 명단을 받으면서 내가 얼마나 청년회에 불공을 했는가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했는데
저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은교우님같이 좋은 상황이면 자만하기 쉬웠을 것 같고, 좋은 환경에서
그런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은데 자은 교우님은 항상 진리적인 것을 추구하셨던 것 같고,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교법으로 늘 대조했던 것 같습니다.”
“참 부러웠습니다. 복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중간하게
복이 있으면 차고 넘치고 자만하기 쉬운데 정법을 만나서 계속 정진할 수 있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 법을 만난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그래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모든 일이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허망했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 인상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늘 가늠하면서 살아야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은교우님 어머님)
“제 딸이지만 정말 열심히 산 아이입니다. 그런데 대학 들어갈 무렵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 공부를 하고 싶지 않은데 떠밀었습니다. 그게 많이 미안하고, 이 자리를 빌어서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부모님이 자식에게 자력생활을 시켰다는 것이 부럽습니다”
이쯤해서 그만하고 강의하도록 하겠다.
먼저 자은교우님께서 부처님 법을 일찍 만났다는 것은 참으로 대복이다.
내가 대종사님과 이러한 인연이 있다는 것을 넘어서서, 대종사님을 생활에 활용해 쓰는 것까지를
이끌어주신 것을 불연을 넘어 법연이라고 한다.
부처님과 인연이 된 것에서 그치지 않고, 부처님 법을 생활 속에서 활용하도록 승화시켜 준 것이다.
자은교우님의 부모님이 교당과의 인연에 대해서 자은교우님에게 먼저 이야기해 준 것과
부처님 법을 만나서 생활 속에 연결시켜 준 것은 참으로 큰 복이다.
금강산 밑에 산 사람이 금강산 좋은 줄을 모르다가 “아, 우리 집 뒷산이 그렇게 좋았구나” 하는 것을
나중에 안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 부처님 법을 만났기 때문에 중고등학교 때 어려움을 교법에 대조하여 해결할 수 있었다.
자은 교우님도 교회에도 나가봤다가 다시 원불교로 나왔다고 한다.
- 고등학교 때 위축감이 들었다고 하는데, 결국 그것을 극복해 나간 것이 대단한 것 같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도 많다.
- 살다보면, 그 사람의 자력을 갖추어 주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문제이다.
편안하고 따뜻하게 해 주는 것보다도 먼저 마음의 자력을 갖추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 자은교우님을 보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방향을 못 잡고 계속 헤맸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갈 때, 대학교를 갈 때에도 방향을 못 잡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갈등과 힘듬이 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ㅇ 서원의 중요성
막연하면 막연한 인생이 된다.
물론 방향은 크게 잡는다. 어떤 사람은 비전도 없거나 혹은 비전만 있는 사람도 있다.
비전에 대한 구체적인 장단기 계획이 있어야 한다.
저희 아버지가 저를 출가시키기 위해서 군대에 갔을 때 매일 편지를 보내주셨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씀을 어떻게 하면 못하게 할까 하여 내 일생 계획을 세워서 보내드렸다.
나는 출가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내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잡았었다.
즉, 가게를 하는 사람이라면 구체적인 방향이나 목표를 잡아야 하는 것이다.
시험공부 하는 사람이 진도표가 없다면 그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이다.
우리 인생도 진도표를 짜야 한다.
그것이 사실은 빨리 잡히면 더욱 좋다.
그러면 대종사님은 그것을 어떻게 잡아주셨는가.
본인이 어느 쪽인지 보아 주시기 바란다.
ㅇ 작은 욕심과 큰 욕심
“제 9 무본편 54장”
작은 욕심 : 범부중생 - 국한이 있는 사사로운 밭 - 이욕의 종자 - 떠날 때는 허망
큰 욕심 : 불 보 살 - 국한이 없는 공변된 밭 - 교화의 종자 - 사생의 자부, 삼계의 도사
내가 어디에 가서 대접받고 명예로운 것에만 관심이 있는가 생각해 보자.
재색명리가 없으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재색 명리를 추구하되 더 넓은 세상으로 무형의 세계까지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왜 그러한가.
나라는 존재는 유형의 존재이면서도 근원적으로는 무형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작은 욕심으로 사는가. 이욕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욕심이라기 보다는 무명 때문이다.
왜 12인연의 굴레속에서 사는가.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모르는 무명 때문이다.
어떤 것이 나인지를 모르고 열심히 사는 것이다.
키가 얼마고 나이가 몇이고 얼굴이 어떻고 점수가 몇점이고 집이 몇평인 것이 자기인 줄을 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참 자기라면, 죽어서도 가지고 가야 참 나가 아니겠는가.
육신은 지수화풍 사대로 흩어질 뿐이다. 모아지고 흩어진다. 아주 간단한 원리이다.
만약 사람이 죽는다면 호흡이 끊어진다. 그 다음 뜨거운 몸이 식는다. 그리고 흙이 된다.
사람의 몸은 지수화풍이 엮어졌을 뿐이다. 형상있는 것은 이치적으로 볼 때 변화하는 것이다.
참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어떤 것이든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계절은 춘하추동으로 변화한다.
우리 육신도 생로병사로 변화한다. 그런데 그 구성은 지수화풍이라는 원소가 모였다 흩어질 뿐이다.
모든 스승님들이 진리를 알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때로는 스승을 찾아서 묻는 구도적 행각들은 무엇인가.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찾아볼까 하는 것이다.
언제부터 나이고 어디까지 나이며 참 나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깨달음을 갖거나 믿음을 가져야 한다.
불지품 54장 법문을 보라.
공을 들일 때는 돈도 벌리고 뭔가 되는 것 같은데 이것이 허망하다.
허망하지 않을 것 같지 않은가! 참으로 착각이다!
나이먹고 사는 것 금방이다! 여기에 앉아있는 사람 중에서 30대 넘어간 사람은 이미 육신이 늙기
시작했다.
나는 안 늙을 것 같은 것이 착각이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그렇게 되는가!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알고 통계를 알아야 한다.
역사를 통하여 그러한 모든 흐름들이 있어왔음을 사실적으로 알아야한다.
역사를 통해서 있어진 모든 것들을 다 유추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아 사람은 다 가는구나!” “죽을 때 저렇게 다 허망하구나” 유추해 볼 수 있다.
“아, 의자왕 같은 사람은 허망하구나!” 넘겨볼 수 있다. 그렇지 아니한가?
내가 마흔이 넘으니 달라지는 것이 몇가지 있다.
예전에는 누가 공적인 일로 무엇을 하자고 하면 밤이라도 바로 할 수있었는데,
40대가 넘으니 밤 12시가 되면 몸이 힘들어지고 밤에 무엇을 하자고 하면 걱정이 된다.
지금 늙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저것이 금방 나라는 생각을 하여야 한다.
늙은 사람들은 “엊그제 나 저랬는데” 생각하는데, 젊은 사람은 늙는 것이 몇백년 후일 것 같을 것이다.
갑자기 사고로 인해 장애가 있어진 사람, 사업을 하다 망한 사람, 불화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
갑자기 병이 난 사람들을 보면 마치 남 이야기같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서 남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묘비에 “나도 거기 섰을 때는 그 생각 했어”라고 했다지 않은가.
죽은 사람은 알지만 젊은 사람은 모른다.
이 법문을 보아도, 불보살들은 큰 욕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안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이것이 남 이야기이다.
불법을 듣고
"아 좋은 말이다. 그러하지 않은가!"
하고 실행이 없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은 나중에 떠날 때는 허망하다.
정말로 허망하지 않으려면 자기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시간에 대한 깨침이 있어야 한다.
작은 욕심 - 시간적 관점이 한생
큰 욕심 - 세세 생생
제 9 무본편 55장. “서원과 법연”,
서원이 있는 사람은 방향을 결정하는 것.
자은교우님이 왜 헤맸는가. 만약 부모님이 자은교우님께 서원의 방향을 제대로 알려주었다면,
훨씬 방황의 길이 짧지 않았겠는가 생각된다.
방향을 작은 욕심으로 잡을 것인가 큰 욕심으로 잡을 것인가가 무척 중요하지만
또 중요한 것은 법연이다.
내가 알아서
자기 스스로 이 길을 가지 못할 진댄,
자은교우님 - 법연은 있었는데 서원은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
즉 서원을 세우기가 잘 되어야 했다.
이 서원을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인연이고 타력이고 신심이다.
즉 성자의 법문을 믿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법문을 볼 때에도
“백년 교무님이 이렇게 말씀하셔도 나는 믿지 않겠다”라고 묘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 반드시 허망하다.
그러나 큰 욕심을 내신 분은 반드시 무량한 복과 혜를 얻게 된다.
우리 기홍교우와 호겸교우가 얼마나 불공을 많이 했는가 생각해 보라.
우리 자은교우님은 그래도 법연을 일찍 만났었고, 그리고 서원을 지금 잡게 되었다.
그러니 복이 있다.
여러분들 남들이 복받을 때는 부러워하는데 자기가 복지을 때는 게을러한다는 말씀이 있다.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여러분들은 교화의 인연을 심어야 한다.
중생들은 인연을 지어도 욕심으로 짓는다.
그러나 불보살들은 교화를 위한 인연으로 만들어나간다.
얼른 볼 때는 개인 인연으로 지어진 것이 너무나 인간적이고 계산적인 것 같다.
그러나 교화의 인연을 심어주는 것 같이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이 없다.
자기가 열린만큼 알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아까 원불교에 가라고 하는 것을 못가게 할 수도있다. 중생일 때는 그것이 너무나 고맙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교화의 인연을 심어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
그물을 짜는 것을 알려줬더니 얼마든지 고기를 잡을 수 있듯이 자력을 심어준 것이 너무나 고맙다.
마지막에 “혼자였다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반이 있기 때문에 얼마나 좋느냐”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어떤 글을 보았더니 리더십도 중요하지만 팔로우십(함께 가는 것)도 중요하다는
글이 있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이기적인 사람은 누구나 싫어한다. 그리고 이타적인 사람은 누구나 좋아한다.
내가 하기에는 이타적인 것은 어렵고 이기적인 것은 하고 싶어한다.
참으로 어렵다.
생각은 그렇게 하지만, 내 선에서 무엇인가를 도와주고 손해보고 챙겨주는 것은,
해주는 것을 바라기는 쉽지만 내가 해준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기브 앤 테이크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누구나 가져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주는 것이 없이 누가 돌려주겠는가.
인생을 살면서 나는 주는 것을 먼저 할 것인가 아니면 가져오는 것을 먼저 할 것인가.
여러분들 그것을 아셔야 한다.
내가 잘 못하면 나중에라도 갚아야 한다.
이기적인 마음에서는 인과가 너무나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인과는 진리 중의 진리라고 한다.
이기적인 마음에서는 인과같이 부담스러운 일이 없다. 차라리 이기적인 마음으로 기도하고 싶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 점수가 더 나와야지, 공부를 안한 사람이 점수가 더 나온다면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가.
그런데 우리의 욕심으로는 나만 점수가 잘 나오기를 바래서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모른다.
□ 질문과 답변
Q. 양도선 : 친할아버지께서 원불교 법을 오래 공부하셔서 법사위까지 올라가셨는데,
저희 할아버지께서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우연치 않게 그 아이가 죽게되고,
그런데 부모님께서 천도재를 안 하셨는데 괜찮은가.
A. 교무님 : 어사 박문수 이야기 아시는가. 항마위 정도 되면 능하신 분들은 가능하다.
천도가 자기해탈천도가 있다. 즉, 자기 영혼의 힘이 있는 사람은 가능하지만 사실 드물다.
할아버지 정도이시라면 대단한 법력이다. 보통 중생들은 형상있는 것만 쫓는 것 같다.
Q. 조상덕 : 사심보다 공심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는데 공심도 지속적인 공심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같은 경우는 “내가 여기에서 무엇하고 있는가”라는 것을 반조하면서 공심을 낸다.
더 낫고 좋은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 있는가.
A. 교무님 : 보상체계가 있으니 공심을 한번씩 낸다.
그러나 이것이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인 공심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공심(空心), 빈 마음이 되어야 공심(公心)이 나온다.
원불교인의 봉사, 봉공은 공에 바탕한, 성리에 바탕한 공심이다.
그래서 이 공심은 복받는다니 내는 공심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텅 빈 마음으로 아는 공심이다.
이 존재를 알았을 때 공심은 내면 그만이 아니다.
억지로 참고 “이렇게 살면 복있다더라”가 아니라,
내 존재가 해탈이 되면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
사은에 대한 은혜를 느끼고 알면 공심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서원이 중요하고 신심이 중요하다.
원불교에서는 사은의 은혜를 알고 느끼라고 한다. 그리고 그 은혜를 나누고 베풀고 살라는 것이다.
정말 나라는 존재가 사은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면 공심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공즉 공이라, 이 공심은 사심과 달라서 전심(全心)이라고도 한다. 전체가 된 마음이다.
우리 교당의 임원을 하여도, 정말로 임원을 하려면 신심으로 해야 한다.
조금 더 간 사람은 나라는 사람은 내가 공심으로 살겠다는 방향을 잡아야 한다.
조금 더 간 사람은 사은의 은혜 속에 내가 살고 있구나!
내가 거기에 갚지 않을 수 없구나! 라는 교리적 이해가 있어야 한다.
천치 하우자라도 알 수 있다고 한다.
공기 없이, 물 없이, 부모 없이 살 수 있겠는가.
감사의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어떻게 보은활동으로 살 것인가 보자.
나라는 존재는 참으로 텅 비어서 불생불멸 영원한 것이다.
그것은 형상이 없어 텅 비어 있다. 이것을 관념으로 설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사심으로 번뇌를 놓아 자성광명이 솟아올라 깨달음을 얻을 때 비로소 공을 깨달을 수 있다.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다.
보통 사람들은 조금만 좋은 차 몰고 잘 나가면 자기가 잘난 줄을 안다.
허망한 삶이 아니라 영원한 지혜 광명이 그 속에서 나올 것이다.
임원을 하고 공적인 일을 하더라도 공에 대해서 알고 하시라.
□ 처음 참석하신 부처님들
** 권성훈 교우님
“이창훈 교우님의 추진력과 카리스마의 근원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유연희 교우님 : 이지현 교우님과 함께 오셨습니다.
배성원 일반교도님의 한의원에서 함께 오셨습니다.
“법명은 유은서, 초등학교 때 다니다가 다시 마음공부를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안병은 : 경인교대에 이번에 입학하였습니다. 교무님 좋으신 말씀 잘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안제영 : 중앙대 다니고 있습니다. 오늘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길운교우님의 사촌입니다.
**김정섭 교우님 : 고등학교 3학년이고 잘 부탁드립니다.
마음통통 10단 소덕종교우님 인연
**북일교당에 다니고 있는 전경명입니다.
우리 교단에서 가장 청년회가 잘 된다는 안암교당에 와서 법회를 보게 되어서 너무너무 영광입니다.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99학번입니다. 강연을 들으면 들을 수록 저랑 너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첫댓글 아~ 순명교우님께서 전달해주신 법회록을 올리기만 하여도 절절한 법의 은혜가 저를 감쌈을 느낍니다. 리더쉽의 절정! 우리 제원교무님, 강연해주신 자은교우님, 질문해주신 교우님들, 법회록 정리해주신 교우님 아 펠로우쉽 장난아냐 정말..ㅜ.ㅜ 모두 감사합니다.
완소 법회시간이었습니다 후기 감사~ ^^
김명선 교우님께서 법회후기를 꼭꼭 올려주시니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