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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 벽화로 배우는 부처님의 지혜 >
제9회 심우도 尋牛圖
* 본 회에서는 우리가 사찰에서 벽화에서 자주 접하는' 소그림'을 보시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을 심우도라 하는데 그에 담긴 이야기를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Ⅵ. 심우도
1. 심우 (尋牛)
2. 견적 (見跡)
3. 견우 (見牛)
4. 득우 (得牛)
5. 목우 (牧牛)
6. 기우귀가 (騎牛歸家)
7. 망우존인 (忘牛存人)
8. 인우구망 (人牛俱忘)
9. 반본환원 (返本還源)
10. 입전수수 (入廛垂手)
심우도尋牛圖는 우리의 마음을 자유로운 들판의 야생 소에 비유해, 바른 마음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마치 소를 찾는 여행으로 표현한 그림입니다.
요즘은 '소'라는 동물이 그리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대대로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 소는 생활 그 자체였습니다. 따라서 심우도는 생활과 종교의 삶이 하나로 묶여,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웠던 상황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림의 제목은 '찾을 심尋'과 '소牛'자를 써서 '심우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본래성품인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본연의 모습을 회복해 가는 과정을 열 장면의 그림으로 표현했기에 십우도十牛圖라고도 불립니다. 검은 소가 조련되어 점차로 흰 소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마치 우리의 마음도 본래의 순백처럼 깨끗이 다듬어 지는 것 같습니다.
1. 심우 (尋牛)
< 아득히 펼쳐진 수풀을 헤치고 소를 찾아 나서니 물은 넓고 산 먼데 길은 더욱 깊구나.
지치고 피로해서 찾은 길이 없는데 오로지 저녁 나뭇가지 매미 울음만이 들리네.>
첫 번째 장면은 소를 찾아서 집을 나선 상황입니다. 그림 속 동자의 손에는 고삐와 밧줄이 쥐어져 있습니다. 소를 찾아서 잡겠다는 궁리로, 숲속을 이리 저리 살피고 있는 동자의 마음이 잘 느껴집니다.
누구나 무엇을 처음 시작할 때는 그 방법을 잘 알지 못해도 열정만은 뜨겁습니다. 공부도 그렇고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에서는 그 처음을 발심수행發心修行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심우는 이 발심의 단계입니다. 바른 마음을 찾고자 정진을 시작했지만,아직 본성이 무엇인지 모르더라도 반드시 찾아내겠다는 마음을 일으킨 것입니다. 다만, 동자는 마음 밖에서 마음을 찾아 헤매는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도 알 수 없는 것인데, 아직 동자는 그런 이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심우도에서 소는 우리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동자는 소를 찾으려 마을을 나섰습니다. 따라서 심우란 외양간 문을 열어 젖힌 채 까맣게 잊어버리고, 뒤늦게야 사라진 소를 찾아 숲으로 들어가는 어리석은 중생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왜 소가 사라졌는지도 모르고 방황하는 상황, 나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이 소를 찾아 먼 산을 바라보는 모습을 통해 수행의 출발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2. 견적 (見跡)
< 물가 나무 아래 발자국 어지러우니 방초芳草 헤치고서 보는가, 못 보는가.
깊은 산 깊은 곳에 있을지라도 하늘 향한 그 콧구멍 어찌 숨기리.>
소를 찾아 숲을 헤매던 동자가 드디어 소의 발자취를 찾았습니다. 깊은 산 수풀에 숨어 있더라도 발자국을 남긴 이상 온전히 모습을 감출 수 없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수학문제도 공식만 이해하면, 응용문제도 곧 풀어낼 수 있습니다. 수행도 이와 같이 그 방법이 제시되면 믿고 그대로 실천할 때 그 끝에 진리가 드러나게 됩니다. 아직 진리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진리를 얻겠다는 일념으로 꾸준히 정진한 끝에 동자는 어럼풋이 길을 찾게 됩니다.
우리 속담에 '우물을 파도 한 우물만 파라'고 했습니다. 나무 아래 어지러히 놓인 발자국처럼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방초를 헤치고, 풀숲 속에서도 제대로 잘 찾아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수행의 첫 걸음에서 바른 견해인 정견正見을 의미합니다. 바른 견해를 가져야 나아갈 방향이 명확해지고, 바른 생각과 바른 수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급한 마음에 아무 곳에나 땅을 판다고 우물이 샘 솟지 않습니다. 제대도 된 곳에 우믈을 파야 맑고 청량한 샘이 솟아오릅니다. 잘못된 곳에서 아무리 노력해본들 돌덩이만 계속 나올 뿐입니다.
소가 남긴 발자국을 찾았으니 놓치지 않고 잘만 따라간다면 소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가야할 방향이 정해졌다면 방황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3. 견우 (見牛)
< 노란 꾀꼬리가 나뭇가지 위에서 지저귀고 따사로운 해와 시원한 바람에 언덕 위 버들은 푸르구나.
더 이상 빠져 나아갈 곳이 다시 없나니 위풍당당한 쇠뿔은 그리기가 어려워라.>
소의 흔적을 쫓아 숲 속 깊숙이 들어간 동자는 드디어 멀리 있는 소의 뒷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듯 꾀꼬리가 지저귀고 따사로운 햇살과 시원한 바람으로 소를 찾은 동자를 축하해 줍니다. 그러나 아직 웃기에는 이릅니다.
아직 소의 뒷모습만 보일 뿐 본래의 얼굴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뒷모습만으로 뿔이 달렸는지, 찾던 소가 맞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머리를 돌이켜 나를 보게 하든, 한걸음에 소를 붙잡아 두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하든 여기서 걸음을 멈출 수 없습니다. 빠져 나아갈 곳 없는 궁지로 몰았으니 이 기세를 몰아 직접 확인해 보는 편이 확실합니다.
경험보다 더 나은 선택은 없습니다. 겪어봐야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불교수행에서 그것을 체득體得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몸소 실천하여 얻게 되는 수행의 결과를 말합니다.
다른 이의 가르침과 법을 가만히 듣고만 있어서는 진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내 마음을 찾아 떠난 여정이기에, 그 과정의 마침표는 스스로가 찍어야 합니다. 본인 스스로 확인해 볼 수 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모든 공부에서 남이 대신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노력한 만큼 내 성과가 되는 것이 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4. 득우 (得牛)
< 온 정신 다하여 너를 겨우 잡았으나 힘세고 마음 강해 다스리기 어려워라.
어는 땐 고원高原위에 올랐다가도 또 다시 구름 속에 들어가 머무누나.>
드디어 소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벽화에서 처럼 둘은 팽팽한 줄다리기로 맞서고 있습니다. 소가 힘세고 강하게 버티고 있어 마음처럼 다스리기 어려운 상황을 마치 세상이 휜희 내려다보이는 고원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잘 알 것 같기도 하다가도, 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구름 속에 갇힌 것처럼 잘 모르겠다고 표현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와 같습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잠시만 방심해도 언제 그랬냐는 듯 변해 버립니다. 벽화에 등장하는 소들은 짙은 황색으로 그려져 있기도 하고, 때로는 검게 그려놓기도 합니다. 동자의 마음이 아직까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심三毒心에 물들어 있다는 표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소를 잡아 고삐를 묶었으나, 야생으로 살아온 소는 사납기 그지없습니다. 마음을 잡는다는 것이 꼭 이와 같습니다. 그동안 온갖 번뇌에 가려있던 본성을 찾기는 하였으나, 도망가려는 소처럼 쉽게 혼란스러운 상태를 벗어나기는 어렵습니다. 마음은 언제 어떻게 변할 지 모른는 것이기에, 스스로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원하는 것도 잘 이룰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또 이런 비유로써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마음은 독사나 맹수, 큰 불이 번지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히 두려운 존재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꿀 그릇을 손에 들고 신이나 이리저리 움직이고 떠들면서 꿀 그릇만 보고 발아래의 깊은 구덩이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또 성난 코끼리를 매어 둘 수 있는 쇠로 만든 튼튼한 고삐가 없는 것과 같고, 이리 저리 날뛰는 원숭이를 붙잡기 어려운 것과 같다.
마땅히 급히 욕심을 꺾어서 게으르거나 나태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 마음을 풀어 놓아버리는 자는 선행을 잃어버리지만, 마음을 한 곳에 묶어 두면 갖추지 못할 일이 없다." ☞ 『중아함경 中阿含經』
마음이란 성난 코끼리 같고, 날뛰는 원숭이와도 같습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어디로 달아날지 종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소를 잡아 팽팽하게 힘을 겨루고 있는 그림처럼, 방심하는 순간 다시금 고삐를 놓치고 맙니다. 수행에 더욱 부지런히 정진해야 하는 것이며, 한 치의 느슨함도 두지 말아야 합니다.
5. 목우 (牧牛)
< 채찍과 고삐를 늘 몸에서 떼지 말라 멋대로 걸어서 티끌세계에 들어갈까 두렵도다.
잘 길들여서 온순해지면 고삐 잡지 않아도 저절로 사람을 따를 것이다.>
소를 울타리에 가둬두고 키우는 곳이 목장牧場입니다. '칠 목牧'자는 놓아두고 기른다는 의미로, 그래서 소를 기르는 일을 '소를 친다'라고 합니다. 목우는 말 그대로 소를 풀숲에 자연스레 풀어놓고 기르는 일입니다. 거친 소가 이제 도망가지 않을 정도가 된 것이 동자의 자연스러운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더는 밧줄도 보이지 않습니다. 잘 길들인 소가 더 이상 고삐를 잡지 않아도 주인의 걸음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늘 째찍과 고삐를 몸에서 떼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이유는 우리 마음이 과거의 습성, 예전의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었던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을 정말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어떤 상황에서라도 흔들림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소의 몸통이 흰색과 짙은 누런색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또 사찰벽화에 따라서 어떤 소는 머리만 희고 전체 몸통은 누렇거나 검게 물들었고, 또 어떤 소는 절반은 햐얗고 나머지 절반은 검게 그려놓은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어둡게 칠해진 쪽은 여전히 번뇌에 물든 마음이 남아있는 정도를 의미합니다.
반대로 흰색으로 그려진 부분은 마음이 길들여진 정도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수행이 점차로 무르익어, 바른 마음, 본래의 순백한 상태로 되돌아가고 있는 과정을 소가 서서히 흰색으로 바뀌어 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6. 기우귀가 (騎牛歸家)
< 소타고 유유히 집으로 가노라니 밝은 피리 소리 저녁놀에 실려 간다.
한 박자 한 곡조가 한량없는 뜻이려니 음을 알기에 어찌 꼭 설명이 필요하랴.>
동자가 길들인 소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말을 탔으면 기마지만, 소를 탔으므로 기우입니다. 그래서 기우귀가는 소를 타고 귀가한다는 말입니다. 수행으로 말하자면, 본래의 자신으로 되돌아와 번뇌 망상을 벗어난 상태에 해당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니, 본래 '나'로 돌아옴을 뜻합니다.
소는 완연히 흰색으로 변했습니다. 동자가 고삐를 잡고 소를 몰아가는 것도 아닌데, 때를 모두 벗어던진 흰 소는 동자를 태우고서 유유히 진리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마치 부처님께서 불이 난 집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노는 것에만 정신 팔린 아이들을 구하고자 흰 소가 끄는 수레로 호기심을 일으켜 불난 집에서 아이들을 구해낸 것을 비유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흰 소는 동자를 태우고 열반의 세계로 데려갑니다.
이것은 수행자의 마음이 이제 자리를 잡았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동자가 부는 피리소리는 한 곡조 한 가락이 모두가 깨달음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사실상 곡조나 박자에 음악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 소리가 저녁놀에 실려 가는 것이 이제는 마음에 모든 욕망을 벗어던진 경지에 이르렀으니, 동자는 또한 번뇌가 사라진 세상을 향하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7. 망우존인 (忘牛存人)
< 소를 타고 고향에 도착하니 소는 간데없고 사람까지 한가롭네
붉은 해가 높이 솟아도 여전히 꿈 꾸는 것 같으니 채찍과 고삐는 초당에 텅하니 놓아두네.>
애써 찾은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소는 온데간데 없이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동자만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매어놓을 소가 없으니, 이제는 쓸모없어진 채찍과 고삐를 초당(창고)에 무심히 던져둡니다. 그런데 소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분명히 소를 데려 왔는데, 타고 온 소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상 소는 우리를 본래의 자리로 데려다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햐얀 소를 타고서 집으로 돌아온 것은 원래의 자리, 순백처럼 청정한 본래의 마음자리로 돌아왔다는 의미입니다. 돌아왔기에 더 이상 소가 필요없어진 것입니다.
마치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는데, 분명히 타고 왔는데, 문 앞에 타고 온 버스가 없다고 황당해 하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누구도 하지 않는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강가에 뗏목과 같다고 했습니다.
커다란 강을 건네준 뗏목이 아무리 고맙더라도 힘들게 머리 위에 짊어지고 갈 수 없는 것처럼, 본래의 마음을 찾았으면 현실의 나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 이상 따로 현실 따로 두지 않아야 합니다. 무심히 산천을 바라보는 동자의 모습에서 현실 그대로가 대자유의 순간임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8. 인우구망 (人牛俱亡)
< 채찍과 고삐, 사람과 소는 모두 비어 있으니 푸른 허공만이 가득히 펼쳐져 소식 전하기 어렵구나.
붉은 화로의 불꽂이 어찌 눈雪을 용납하리오 이 경지에 이르러야 조사의 마음과 합치게 되리라.>
소와 사람이 모두 보이지 않습니다. 벽화에 텅 빈 원만 있는 것은 사람도 소도 모두 사라진 상태를 묘사한 그림입니다. 하나의 원으로 표현하면서 소식 전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최고의 진리, 모든 것을 초월한 진정한 공空의 이치를 말로써 글로써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경지를 얻은 사람들끼리 서로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유치원 친구들을 데리다 두고 어려운 수학, 과학이나 철학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지 않을까요.
소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비록 본래의 마음을 찾아서 하나가 되긴 했지만, 앞선 망우존인의 그림처럼 동자의 모습이 남아있었던 것은 여전히 번뇌가 남아있고, 내 것이라는 집착이 남아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번뇌와 조금의 생각, 집착도 떨쳐 버릴 수 있어야 참된 진리를 얻게 됩니다. 마치 불이 피어있는 붉은 화로 위로 눈이 내리면, 그 눈은 닿기도 전에 사라지게 될 것이고, 행여 그 눈이 불길을 피해 가마솥으로 들어가더라도 녹지않고 수북이 쌓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스스로 지혜와 하나가 되어야 온갖 번뇌가 쌓이지 않게 됩니다.
참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이제 조금의 번뇌라도 남김없이 녹여버리고, 나라는 생각조차 떨쳐버리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 인우구망의 그림입니다. 이 경지가 되어야 비로소 조사祖師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깨우치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9. 반본환원 (返本還源)
< 본래의 자리에서 돌이켜보니 공치사에 지나지 않구나 차라리 당장에 귀머거리나 벙어리였다면
암자 가운데 앉아 암자 앞의 일을 보지 않을 것을. 물은 저절로 망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그간의 일들을 돌아보니 헛된 노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이 원래 청정한 것인데, 애써 소를 찾고 어렵게 길들여 흰 소로 만들었습니다.
자연이란 스스로가 있는 그대로 존재합니다. 마치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한가로운 산 속 절간에 머무르면서도 답답하다고 절간 문을 나선다면, 복잡한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석다며 웃고 갈 노릇입니다.
벽화의 산수화는 번뇌와 망상이 끊어진 동자가 이제 자연과 하나된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삶을 그린 것입니다. 벽화를 보면 산은 산대로 수려하고, 물은 물대로 유유히 흘러 내립니다. 조금의 더함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그린 것은, 말하자면 조그만 번뇌에도 물들지 않은 참된 지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흔들리면 번뇌 망상을 일으키게 되므로, 보지 않으려면 차라리 앞 못 보는 장님이 더 낫겠다며 동자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억지로 세상을 바라보며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때에도, 이미 자연은 있는 그대로 물결은 잔잔하고, 내 두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에도 꽃은 그 본연의 색으로 산천에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미쳐 알아차리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관심觀心이 없어 마음을 바르게 살펴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10. 입전수수 (入廛垂手)
< 맨가슴 맨발로 저자에 들어가니 재투성이 흙투성이라도 얼굴가득 함박웃음
신선이 지닌 비법을 쓰지 않아도 당장 마른나무 위에 꽃을 피우는구나.>
지팡이를 짚고, 때로는 커다란 포대를 메고서 깨달음을 얻은 스님께서 거리로 나섭니다. 집집마다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찾아가 자비의 가르침을 실천합니다. 여기서 부처님의 전도선언傳道宣言이 떠오릅니다.
"너희들도 또한 사람과 하늘의 속박을 벗어났으니, 마땅히 인간세상을 돌아다녀라. 많은 사람들을 제도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익을 얻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안락을 얻기 위하여. 두 사람이 함께 가지 말라. 또 비구들아, 만약 다른 지역에 이르면 많은 사람을 가엾게 여기고 그들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마땅히 법을 설하라." ☞ 『잡아함경 雜阿含經』 『불본행집경 佛本行集經』 등
이처럼 깨달은 후에는 중생들의 이익과 중생들의 안락을 위해 마땅히 연민과 포용, 그리고 진리의 가르침을 베풀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이 아니라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 마을과 거리를 오히려 수행처로 삼아야 합니다.
이는 보살의 수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보살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하시는 분입니다. 앞서 '심우'에서 시작하여 '반본환원'에 이르는 과정은 상구보리上求菩提,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 과정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림인 '입전수수'는 중생을 제도하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수행에 해당됩니다. 여기에 불교의 참된 가치가 잘 드러납니다. 나만이 잘되고자 하는 것은 올바른 수행자세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혼자 깨닫는 것은 최고의 깨달음이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위없이 두루 바른 깨달음'인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뜻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습니다.
깨달은 이에는 세상의 이치를 다 터득한 연각緣覺이라는 분도 있고, 홀로 수행하며 깨닫는 독각獨覺이라는 경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뭇 중생들의 진정한 공양을 받는 분은 '무상정등정각'을 얻으신 부처님 뿐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뒤라도 중생제도라는 다음 단계의 수행과정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법을 깨달은 성인이 되었더라도 중생에게 베풀지 않는다면 우리로서는 그 깨달은 이치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을 제도하고자 커다란 원력을 세우고, 중생들이 살아가는 거리로 나와 대자대비의 손길을 내밀어주시는 분이 바로 보살님이십니다. 이 보살도의 수행을 거쳐야 비로소 온전한 깨달음이 완성되는 것이 바로 입전수수의 참 뜻입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출처] < 사찰 벽화로 배우는 부처님의 지혜 > 제9회|작성자 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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