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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지구의 가을 / 이문재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공양을 받습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나는 두려워 헤아리지 못합니다
마음의 눈 크게 뜨면 뜰수록
이 눈부신 음식들
육신을 지탱하는 독으로 보입니다
하루 세 번 식탁을 마주할 때마다
내 몸 속에 들어와 고이는
인간의 성분을 헤아려보는데
어머니 지구가 굳이 우리 인간만을
편애해야 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주를 먹고 자란 쌀 한 톨이
내 몸을 거쳐 다시 우주로 돌아가는
커다란 원이 보입니다
내 몸과 마음 깨끗해야
저 쌀 한 톨 제자리로 돌아갈 터인데
저 커다란 원이 내 몸에 들어와
툭툭 끊기고 있습니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린다 해도
이 음식으로 이룩한 깨달음은
결코 깨달음이 아닙니다
*지리산 실상사 공양간(식당) 배식대 앞에 붙어 있는 공양게송이다.인용하
면서 '보리'를 '깨달음'이라고 바꾸었다.
우리 살던 옛집 지붕 / 이문재
떠나오면서부터 그 집은 빈집이 되었지만
강이 그리울 때 바다가 보고 싶을 때마다
강이나 바다의 높이로 그 옛집 푸른 지붕은 역시 반짝여 주곤 했다
가령 내가 어떤 힘으로 버림받고
버림받음으로 해서 아니다 아니다
이러는게 아니었다 울고 있을 때
나는 빈집을 흘러나오는 음악 같은
기억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 살던 옛집 지붕에는
우리가 울면서 이름붙여 준 울음 우는
별로 가득하고
땅에 묻어주고 싶었던 하늘
우리 살던 옛집 지붕 근처까지
올라온 나무들은 바람이 불면
무거워진 나뭇잎을 흔들며 기뻐하고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그해의 나이테를
아주 둥글게 그렸었다
우리 살던 옛집 지붕 위를 흘러
지나가는 별의 강줄기는
오늘밤이 지나면 어디로 이어지는지
그 집에서는 죽을 수 없었다
그 아름다운 천장을 바라보며 죽을 수 없었다
우리는 코피가 흐르도록 사랑하고
코피가 멈출 때까지 사랑하였다
바다가 아주 멀리 있었으므로
바다 쪽 그 집 벽을 허물어 바다를 쌓았고
강이 멀리 흘러나갔으므로
우리의 살을 베어내 나뭇잎처럼
강의 환한 입구로 띄우던 시절
별의 강줄기 별의
어두운 바다로 흘러가 사라지는 새벽
그 시절은 내가 죽어
어떤 전생으로 떠돌 것인가
알 수 없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 집을 떠나면서
문에다 박은 커다란 못이 자라나
집 주위의 나무들을 못박고
하늘의 별에다 못질을 하고
내 살던 옛집을 생각할 때마다
그 집과 나는 서로 허물어지는지도 모른다 조금씩
조금씩 나는 죽음 쪽으로 허물어지고
나는 사랑 쪽에서 무너져 나오고
알 수 없다
내가 바다나 강물을 내려다보며 죽어도
어느 밝은 별에서 밧줄 같은 손이
내려와 나를 번쩍
번쩍 들어올릴는지
마음의 오지 / 이문재
탱탱한 종소리 따라나가던
여린 종소리 되돌아와
종 아래 항아리로 들어간다
저 옅은 고임이 있어
다음날 종소리 눈뜨리라
종 밑에 묻힌 저 독도 큰 종
종소리 그래서 그윽할 터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머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
저물녁에 중얼거리다 / 이문재
우체국이 사라지면 사랑은
없어질 거야, 아마 이런 저물녘에
무관심해지다보면 눈물의 그 집도
무너져버릴 거야, 사람들이
그리움이라고, 저마다, 무시로
숨어드는, 텅 빈 저 푸르름의 시간
봄날, 오랫동안 잊고 있던 주소가
갑자기 떠오를 때처럼, 뻐꾸기 울음에
새파랗게 뜯기곤 하던 산들이
불켜지는 집들을 사타구니에 안는다고
중얼거린다, 봄밤
쓸쓸함도 이렇게 더워지는데
편지로, 그 주소로 내야 할 길
드물다, 아니 사라만진다
노을빛이 우체통을 오래 문지른다
그 안의 소식들 따뜻할 것이었다
화전 / 이문재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이 여름, 깊은 가뭄으로 흠뻑 말라 있으니
와서, 어서들 화전하여라
나의 후회들 화력 좋을 터
내 부끄러움들 오래 불에 탈 터
나의 그 많던 그 희망들 기름진 재가 될 터
와서, 장구 북 꽹과리 징 치며
불, 불 질러라, 불질러 한 몇 년 살아라
한때 나의 모든 사랑, 화전이었으니
그대와 만난 자리 늘 까맣게 타버렸으니
서툴고 성급해 거두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숲을 찾았으니
이제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와서 불질러라, 불
노독(路毒) / 이문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문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리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농담 /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한다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 이문재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도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보인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길에 관한 독서 / 이문재
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주곤 했을 때
어둠에도 매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으로
아무 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하였다
떠나가고 나면 언제나 암호로 남아 버리던 사랑을
이름부르면 입 안 가득 굵은 모래가 씹혔다
2
밤에 길은 길어진다
가끔 길 밖으로 내려서서
불과 빛의 차이를 생각다 보면
이렇게 아득한 곳에서 어둔 이마로 받는
별빛 더이상 차갑지 않다
얼마나 뜨거워져야 불은 스스로 밝은 빛이 되는 것일까
3
길은 언제나 없던 문을 만든다
그리움이나 부끄러움은 아무 데서나 정거장의 푯말을 세우고
다시 펴보는 지도, 지도에는 사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4
가지 않은 길은 잊어버리자
사람이 가지 않는 한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의 속력은 오직 사람의 속력이다
줄지어 가는 길은 여간해서 기쁘지 않다
마음의 지도 / 이문재
몸에서 나간 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언제 나갔는데 벌써 내 주소 잊었는가 잃었는가
그 길 따라 함께 떠난 더운 사랑들
그러니까 내 몸은 그대 안에 들지 못했더랬구나
내 마음 그러니까 그대 몸 껴안지 못했더랬었구나
그대에게 가는 길에 철철 석유 뿌려놓고
내가 붙여댔던 불길들 그 불의 길들
그러니까 다 다른 곳으로 달려갔더랬구나
연기만 그러니까 매캐했던 것이구나
거미줄 / 이문재
거미로 하여금 저 거미줄을 만들게 하는
힘은 그리움이다
거미로 하여금 거미줄을 몸 밖
바람의 갈피 속으로 내밀게 하는 힘은 이미
기다림을 넘어선 미움이다 하지만
그 증오는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어서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팽팽하지 않은 기다림은 벌써
그 기다림에 진 것, 져버리고 만 것
터질 듯한 적막이다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모든 눈물은 모든 뿌리로 모두 간다 / 이문재
혼자 눈물은 두 손에 받는다
손은 단지다
손은 깊어지고 싶어 운다
두 손은 또 울면서 길어져서
뿌리에 가서 닿고 싶어한다
몸이, 몸이 되고 싶어한다
손의 절망은 자기 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러나
손은 거개가 타인이다
무시로 손은 타인을 향한다
내 손은 내가 아닐 때가
많다, 너무 많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손이다
대중소비사회는 손에 달려 있다
손을 잘 간수해야 한다고
두 손 둘데를 시시각각
결정해야 몸이, 몸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지금 지독하게 외로워진 것이다
손이 내 몸 거죽을 긁는다
뿌리의 손들이 붉은 꽃 게워낸다
민들레 압정 / 이문재
아침에 길을 나서다 걸음을 멈췄습니다 민들레가 자진自盡해 있었습니다
지난 봄부터 눈인사를 주고받던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 꽃대 끝이 허전했
습니다
꽃을 날려보낸 꽃대가, 깃발 없는 깃대처럼 허전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아직도 초록으로 남아 있는 잎사귀와 땅을 움켜쥐고 있는 뿌리 때문일 것
입니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다 멈춘 민들레 잎사귀들은 기진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낸 자세입니다 첫아이를 순산한 젊은 어미의
자세가 저렇지 않을는지요
지난 봄부터 민들레가 집중한 것은 오직 가벼움이었습니다 꽃대 위에 노란
꽃을 힘껏 밀어 올린 다음, 여름 내내 꽃 안에 있는 물기를 없애왔습니다
물기가 남아 있는 한 홀씨는 바람에게 들켜 바람의 갈피에 올라탈 수가 없습
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홀씨는 물기의 끝, 무게의 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잘 말라 있는 이별,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결별,
민들레와 민들레꽃은 저렇게 헤어집니다
이별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지 않습니다 만나는 순간, 이별도 함께 시작됩
니다 민들레는 꽃대를 밀어 올리며 지극한 헤어짐을 준비합니다
홀씨들을 다 날려보낸 민들레가 압정처럼 땅에 박혀 있습니다
낙타의 꿈 / 이문재
그가 나를 버렸을 때
나는 물을 버렸다
내가 물을 버렸을 때
물은 울며 빛을 잃었다
나무들이 그 자리에서
어두워지는 저녁 그는
나를 데리러 왔다 자욱한 노을을 헤치고
헤치고 오는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길이 되어 나는 그 길의 마지막에서
그의 잔등이 되었다
오랫동안 그리워해야 할 많은 것들을 버리고
깊은 눈으로 푸른 나무들 사이의
마을을 바라보는 동안 그는 손을 흔들었다
나는 이미 사막의 입구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길의 일부가 내 길의
전부가 되었다
그가 거느리던 나라의 경제는 사방의 지평선이므로
내가 그를 싣고 걸어가는 모래언덕은
언제나 처음이었다
모래의 지붕에서 만나는 무수한 아침과 저녁을 건너는
그 다음의 아침과 태양
애초에 그가 나에게서 원한 것은 그가
사용할 만큼의 물이었으므로 나는 늘
물의 모습을 하고 그의 명령에 따랐다
햇빛이 떨어지는 속도와 똑같이 별이
내려오고 별이 내려오는 힘으로 물은 모래의
뿌리로 스며들었다
그의 이마는 하늘의 말로 가득가득
빛나고 빛나는 만큼 목말라했고
그때마다 나는 물이 고여있는 모래의
뿌리를 들추어 내 몸 속에 물을
간직했다
해가 뜨면 모래를 제외하고는 전부 해
바람불면 모래와 함께 전부 바람인 곳
나는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그의 마른 얼굴을 씻어주었다
그가 나를 사랑하였을 때
나는 많은 물을 거느렸다
그가 하늘과 교신하고 있을 때
나는 모래들이 이루는 음악을 들었다
그림자 없는 많은 나무들이 있고
그의 아래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늘 지나가고 그 나무들 사이로 바람 불고
바람에 흐느끼는 우거진 식물과 식물을
사랑하는 짐승들이 생겨나고
내 잔등 위에서 움직이는 그가
그 모든 것을 다스려 죽을 것은 죽게 하고
죽은 자리마다 그 모습을 닮은
나무나 짐승을 세워놓고 지나간다
도중에 그는 몇번이나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마시고 몸을 청결히 했다
모래언덕이 메아리를 만들어 멀리
멀리로 울려퍼지게 하는 그의 노래
그가 드디어 사막을
바다로 바꾸었을 때
나는 바다의 환한 입구에서
홀로 늙어가기 시작했다
출렁출렁 바다 위에서 그를 섬기고 싶었지만
그는 뚜벅뚜벅 바다 위를 걸어나갔다
오랜 세월이 흘러가고
또한 훌러와
사막이 아닌 곳에서 그를 섬기는 일이
사막으로 들어가는 일로 변하고
바다가 다시 사막으로 바뀌어
바다의 입구에서 내가 작은 배가 되지 못하고
종일토록 외롭고
밤새도록 쓸쓸한 나날
그가 나를 떠났을 때
나는 물을 버렸다
버리고 버리는 일도 다시 버리고
나도 남지 않았을 때
저녁 나무들 사이로 태양을 버리고
물의 어두운 어깨를 바다로 띄워 보냈다
제국호텔
더이상 빌어올 미래가 없다
이문재
*
본국에서 연락이 늦어지고 있다
1호 광장에 내려앉는 까마귀떼들
이곳 사람들은 오래된 책처럼 보인다
누런 얼굴들 한 귀퉁이가 삭아 있다
본국은 지금 오전 9시
말없이 미지근한 술을 마시고
집 없는 사람들이 집으로 간다
*
마른 빵을 물에 적시며
아침에 듣는 음악을 저녁에도 듣는다
모니터에서 매캐한 냄새가 난다
십수년 전만 해도 아이들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제국백화점 앞 노천 무대
어린 토인들이 매우 빠른 춤을 추고 있다
그들은 터보 엔진을 탑재하고 있다
*
도처에 가을이 상주하고 있다
남서쪽 저지대나 북쪽 고원은
낡은 기계처럼 가르릉 소리를 낸다고 한다
지난 주에는 섬의 북쪽에서
제사를 지내던 여인들이 잡혀왔다
너무 순해 보여서 약간 불쾌했다
젊은 교주는 아직 색출하지 못했다
몇 년 째 낙엽이 썩지 않는다는
저녁 종합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
장벽이 무너지자
모든 것이 장벽이었다
*
걸어다니는 자들이 거의 없다
바람 결에 누런 유전자들이 떠다닌다
제국위생병원 회복실 같은 오후
알칼리성이 희박해진다
본국에서 가져온 가루약을 먹고
나른해지지 않으면 불안하다
멀리 가 있던 감각들이
노란 햇살을 뚫고 달려온다
이제 세계와 나 사이에
아무 것도 없다
*
제국박물관 앞에서
키가 작은 승려가
1인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1인의 그림자는 즉시 삭제됐다
본국의 훈령은 단순 명료했다
기억 용량을 정확히 유지할 것
*
화면의 밖은 풍경의 바깥
전원이 곧 삶이다
제국발전소에 연결되어 있지 않은
시민은 시민이, 아니 생명체가 아니다
아직도 전원으로부터
망명을 시도하는 자들이 있다니
식염수로 제복 상의를 세탁했다
*
광장은 정지 화면이다
본국은 오전 9시
모두 제자리에 있다
오래된 책 표지들이 멈춰 서 있다
까마귀 수천 마리가 공중에 박혀 있다
분수대에서 누런 피가 솟구치다가 굳어 있다
그 누구도 그 누구를 부르지 않는다
겨울은 국경을 넘지 않고 있다
*
토인들의 상형 문자를
오늘 아침에야 해독해냈다
---더 이상 빌어올 미래가 없다
*
제국항로 바로 위로
하얀 달이 뜨고 있다
돌들을 제 자리에 갖다놓고
접속 속도를 재차 점검했다
정기적으로 발음해야 할 단어들이 있다
---나는 물이끼를 만져본 적이 있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아서
제복을 벗고
알약을 물에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