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12강
X. 사회적인 관계들
교회가(교인이) 세상에서 어떠한 마음 가짐으로 살아야 하는지는, 가족 부양을 위한 노동(직장생활 등)과 이와 관련된 사회적 관계를 위한 권면에서도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즉, 신자가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원칙을 잘 배우면 각 상황에 맞게 적용할 수 있게 된다.
1. 노동(직장 생활)에 대해
노동에 대해서는 바울이 특별히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 권면한다. 신자는 열심히, 그리고 올바로 일해야 한다. “단정히” 행하지 않는 자(아마도 꾸준히 일하지 않는 자)는 꾸짖어야 한다(살전 4:11-12; 5:14).
o 살전 4:11-12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o 살전 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그런데 살후 3:6-12는 노동을 하지 않고 쓸모없는 일만 하는 교인에게 하는 말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들이 영성주의에 빠져 있다거나 말세가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참조: 살후 2:1). 바울은 이에 대해 자기 입장을 분명히 밝힌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이와 함께 자기의 예를 든다. 바울은 자기의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일하지 않고 전승대로(바울이 가르친 복음대로) 살지 않는 형제를 떠나라고 매우 강력하게 말한다. 모든 사람은 조용히 일해야 하고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이와 다른 행동은 복음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
이 권면으로부터 일반적인 기독교의 노동윤리 규범을 도출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바울은 일반적인 도덕적 원칙인 질서와 평온함과 예절을 근거로(살전 4:11)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것이 근면한 삶을 하도록 자극이 된다는 점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권위로 교회에게 제시한 질서는, 자연적 삶(사회에서의 삶)에 관련된 하나님의 뜻에 방향을 맞춘 것이다. 바울이 그것을 단지 사랑의 계명에서만 도출하지 않고, 이 질서를 자세히 정의하거나 분석하지 않은 채 그 질서가 직업을 가지고 사는 삶에 유효하다고 가르친다. 그는 로마서 13장과 관련하여, 이 질서가 하나님의 명(2)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현세의 자연적인 삶의 질서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질서를 주신 의미(이 질서를 주심으로써 의도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실천하게 만든다.
2. 사회적인 관계
바울이 신자의 사회적 관계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이와 같은 의미에서 말한다. 이에 대해 고전 7:17-24가 중요하다. 누구든지 자기 “부르심의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가 할례 받은 자이든, 무할례자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그것이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섬기는 데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계속해서 22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며, 즉 주님께 매여 있고,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서 값을 치르고 사셨으므로, 누구는 노예고 누구는 자유인이라는 사회적 편견에 따라 사는 인간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으므로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그는 사람의 노예가 된다.
바울은 이곳에서 사회적 관계에 대해 다루지 않고, 도리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 즉 그의 엄청난 영적 신분의 변화에 비추어 볼 때 사회적인 지위가 상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하고 있다(참조: 갈 3:28; 골 3:11). 우리는 이에 대해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1) 분명한 것은 사도가 기존 사회제도를 경솔하게 파괴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고전 7:17b)라는 지시는 그가 이곳에서 일반적인 행동 규칙을 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복음은 새로운 사회적 프로그램으로 등장하지 않을 뿐더러, 기존 질서를 폭력으로 무너트리려는 것이 결코 아니라, 기존 사회구조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영, 그리스도 영이 그곳에 침투하도록 만들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가 고린도전서 7장에서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우연한 것이 아니라, 그가 제시한 보편적인 행동 윈리에 해당한다.
바울은 기존의 사회질서, 특별히 노예 질서를 하나님이 주신 질서라고 말하지 않고, 그 제도가 변개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가 고린도전서 7장에서 어떤 맥락 속에서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바울은 거기에서 종의 신분인 것과 자유인의 신분이라는 문제를 할례를 받은 것과 받지 않은 것이라는 문제와 동일선상에 둔다. 후자와 관련해서도 그가 즉각적이거나 큰 변혁을 원하지 않는다(17-18). 하지만, 그는 자신의 복음 전파가 할례 제도 전체에 대해서 큰 변혁을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2) 바울이 각 사람은 자기가 부르심을 받은 그 위치에서 그대로 지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내용적으로 본다면 노예제도의 커다란 변혁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의해 신자의 인간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으므로(인간상이 달라지므로),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내면으로부터 새롭게 되는 것이 가능케 되고, 또한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노예와 자유인을 둘 다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판단하며, 이 두 그룹 사람 모두에게 인간의 노예가 되거나 인간적인 판단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고 하면서 그가 제시한 근거대기는 노예문제뿐만 아니라 인간 사이의 관계 문제에서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이 가르침은 노예 반란에 폭발물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이에 대해서는 바울이 분명하게 반대한다), 하나님 나라의 누룩이 되어 사회를 변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와야 한다.
빌레몬서는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좋은 예가 된다. 바울은 도망한 노예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낸다. 그는 주인의 권리를 인정했으므로 그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어떤 학자들은 13-14와 20-22절에서 바울이 오네시모를 다시 자기에게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것을 보고, 그를 해방하라는 요구로 해석하면서, 이것을 공식적인 해방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곳에서 해방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바울이 이전의 주인과 노예 관계는 없어졌다거나 적어도 그것이 이제는 부차적이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오네시모를 위해 애쓰고 있다. 그는 전에는 주인에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빌레몬과 바울에게 유익하다(11)고 하고, 자기 주인이 개과천선한 오네시모를 영원히 소유하기 위해 그가 한동안 주인을 떠났을런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네시모를 노예로서가 아니라 형제로서 소유하기 위함이다. 그는 이미 지금 바울에게 사랑스러운 형제가 되었는데, 이제 자기 주인과 동시에 형제가 된 사람에게 얼마나 잘 하겠는가?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그의 주인에게 그가 사도를 형제로 여긴다면, 그를 자기처럼 여기라고 한다(17). 이렇게 바울은 주인에게 결정권을 넘겨주면서, 그와 자기 종 사이에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를 토대로 해서 결정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울의 사회윤리적 권면의 핵심이다. 즉, 개혁과 개혁의 방향은 복음에 의해 변화된 „내면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3. 가정 규범에 나타난 노예와 주인 간의 관계
끝으로 바울이 가정규범(엡 6:5-9; 골 3:22-4:1. 참조: 딤전 6:1-2; 딛 2:9-10)에서 노예와 주인에게 주는 권고도 이러한 이중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노예가 자기 주인에게 복종하고, 주인을 마음을 다해 섬길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신자의 종들은 자기가 주인의 형제라는 이유로 “가볍게 여기지 말고” 도리어 더욱 “더 잘 섬겨야” 한다는 경고를 받는다(딤전 6:2). 다른 한편으로는, 노예와 주인의 관계는, 각자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와, 교회(교인)로서의 그리스도와의 관계라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변혁을 의미했는지는, 바울이 노예와 주인을 교회의 동등한 지체라고하고, 서로 간의 관계를 하나의 같은 책임의 양면으로 설명하는 것에서 쉽게 드러난다[1]. 이런 일은 당시 세계에서, 또는 유대교에서 노예의 지위를 고려해 볼 때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노예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즉 주인을 섬기되 인간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듯 하라는 사고 속에, 진정한 자유의 비밀과 자기 자신에 대해 새롭게 (긍정적) 평가할 수 있는 비밀이 있다. 바울은 주인에게 하늘에 계신 주님을 생각하라고 함으로써 주인도 노예와 같은 입장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바울은 이곳에서 “노예제도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종과 그리스도인-주인에게 말하면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그리스도로부터 바라보고 체험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노예제도를 엄청난 긴장 속으로 몰아 넣었는데, 이것은 그가 권면을 할 때 원래 의도한 바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가 사회적 관계를 기독교 윤리적 측면에서 접근하므로, 그의 권고는 모든 사회적 관계에, 시대를 초월해서 현재까지도 영속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사도가 가르친, 노예제도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앙을 기초로 한 주인과 노예 간의 관계는, 모든 인격적인 연결(성격)이 결여된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에서, 자기를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는 자세로 이것을 어떻게 모범으로 삼아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1] 주인과 노예는 서로에게 책임이 있는데, 각자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그 책임을 이행한다면, 모두에게 같은 책임이 있는 것이다.
*강의자 : 송다니엘 교수
*본 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12강은 2024년 8월 25일(주일)과 9월 1일(주일)에 실시된 부천개혁교회의 사경회와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집중강의를 겸하여 강의된 내용에 수록된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