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나는 학교 대표 유도 선수를 지내며 전국씨름대회에도 출전한 장충체육관에서의 추억도 있다.
졸업반이 되어 집안이 급격히 어려워진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진학의 꿈은 무조건 돈 안 드는 학교에 들어가는 방법일 뿐이었다.
그래서 학비는 물론 교복, 책 등도 무상으로 지급되고, 졸업 후 취업까지 보장받는 철도고등학교(현 철도대학) 체육 특기생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실기 전형을 코 앞에 두고 연습 경기 도중 왼쪽 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당해 한 가닥 희망인 그 꿈을 접어야만 했다.
당시(1973년)
단칸셋방살이 우리 집 형편상 인문계 고등학교는 '언감생심' 공립 공고 진학에 필요한 등록금 7천원이 없었던~~~ 찢어지게 가난한 우리 집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부모님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한창 혼란스럽고 고민이 많은 시기에 맞은 그 당황함에 한동안 방황하며 약수동 산동네 껄렁껄렁한 또래들을 상대로 맞짱을 뜨고, 깨질 때 깨지더라도 돈키호테식 오로지 깡다구로 버틴 1:5 패싸움도 불사했었다.
그 결과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한 살림에 일수 찍듯 하루에 500원씩 치료비를 물어주셨던 나의 어머니~~~ 그 애타던 한숨 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듯하다.
그렇다고 질이 나쁜 친구들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았으며, 나름대로의 가치관 속에 동네 약골 친구와 후배들을 보호해 준다는 개똥 같은 명분을 내세운 동네방네 소문난 '깡패 목사'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차!!! 이건 아니다' 싶었다.
엄동설한 그 추운 겨울날 새벽 4시에 일어나 곱은 손 호호 불며 신문배달을 했고, 오후엔 초딩생(시장통 참기름집 외아들 창수) 과외 지도를 해 번 돈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참고서를 구입해 사설 독서실에서 밤새워 공부도 했다.
'드뎌 꿈에 그리던 고등학교 진학.'
철도고등학교의 전신인 공립 용산공고 통신과(남녀 공학)에 진학해 2~3학년 연거푸 반장을 지냈다.
공부를 썩 잘해서가 아닌 투표를 통해 맡은 직책 속에 놀기 좋아하고 영어와 수학이 딸린 공부는 10등 안에 들어본 적이 없는10~17등 사이에서 오르락 내리락했으며, 그렇다고 범생도 아닌 학교를 땡땡이 치고 무작정 산으로 향해 몇날 며칠 독서열에 파묻혀 있기도 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닌 졸업 후 확인한 1, 2학년 생활기록부에는 30여일 넘게 결석 기록이 남겨져 있다.
그런데 세상에나 어쩌다가?
장학금도 받았다.
이름하여 급여장학금.
1970년대 당시 새마을 운동과 맞물린 '공업 한국의 기수' 기치 아래 한 반에서 20등 안에 들면 자격이 주어진 공립이기 때문에 혜택을 누린 거금 22,000원.
만원짜리 수표로 지급 받고 어찌나 좋았던지^^~~~ 그때 그 시절을 아시나요? 시내버스요금 10원, 택시기본요금 60원, 라면 20원~~~
그러했던 나의 고딩시절 1학년 때 담임 선생님!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하편 <君師父一體> 연재에서 뵙겠습니다.
긍정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
만보(漫步) 석진호
첫댓글 지금의 만보님을 보노라면 어릴적 모습이 일치가 안되네요.예나 지금이나 만보님 주위엔 항상 사람이 많았다는거와 궂은일도 싫다안하시고 하셨을 모습이 생생합니다.더도말고 지금처럼만 건강하셔서 지금처럼만 바쁜 나날 보내시길 바랄께요.항상 응원합니다,
넹~ ㅎㅎ
예나 지금이나 걱정한다고 해결되지 않는 인생살이~
그저 긍정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네여~^^
너 언제 장학금.....
난 장학금 면제 받았는데~
선생님이 나를 가엽고 이삐게 봐성
@만보 띠뱅이~~~술쏴
@거브기 알~
까짓것 친구가 쏘라는데
만보 공주에 갈 그날을 기다리삼~~~
오호
멋난다나
영원한 만보의 스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