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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신부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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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건 신부님이 묻히신 경당 모습 |
미리내 성지는, 한국 최초의 방인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묘소와, 이윤일 요한 성인의 묘소 유지(遺址), 그리고 <16위 무명순교자의 묘역>이 있는 거룩한 성지이다. |
미리내성지 관내 약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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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김대건 신부의 묘역에는 김대건 신부에게 부제품과 사제품을 준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高주교, 미리내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1929년까지 33년간 본당을 지킨 초대주임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세 번째 방인사제 중 한 분) 신부와, 간도지방 최초의 방인사제였던 미리내 본당 3대주임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의 묘소가 함께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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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리내성지 주차장에서 내려서 길을 따라서 쭉 걸어 갑니다. |
묘역 왼쪽 윗 편으로는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高) 우르술라의 묘소,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소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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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순교자 103위 기념 성당까지 가는 길목의 주변 모습 |
김대건은 최초의 한국인 신부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천주교 103위 성인 가운데 한사람, 세례명은 안드레아. 아명은 재복 보명은 지식. 관명은 대건. 본관은 김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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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순교자 103위 기념 성당과 잔디광장 모습 |
김대건은 1821년 (순조21) 8월21일 충청도 솔뫼 (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과 장흥 고씨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몰락 양반의 가문으로, 천주교와 관계를 맺은 것은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 때였다. 김진후는 한국천주교회가 탄생된 지 얼마 안 되어 내포의 사도인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하였다. 그는 신해박해(1791) 때 체포되어 관가에서 신앙을 고백한 적이 있고, 1801년 때 유배되었다가 1805년에 다시 해미에서 잡혀10년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1814년 옥사 순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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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순교자 103위 기념 성당과 성모당 건물 모습 |
진후의 셋째 아들 종한은 솔뫼에서 안동 우련밭으로 피해 살다가 여기서 1815년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1816년 대구 감영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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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당 전경 |
그리고 김대건의 아버지 제준은 1839년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 순교함으로써,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김대건의 가계는 순교자들로 일가를 이루었다. 김진후의 둘째 아들인 택현은 솔뫼를 떠나 용인군 이동면 묵리 한덕골에 정착하였는데, 1827년 정해박해를 피하여 이곳으로 이주한 듯하다.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이 세례를 받은 것은 1836년이었다. 그는 1836년 초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모방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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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당 앞의 좌우로 두 분씩, 네 분의 묘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위 사진에서는 두 기둥으로 묘가 가려 있음. |
김대건에 앞서 두 소년이 신학생으로 선발 되었는데 최양업(토마)은 2월 6일에, 최방제는 3월 14일에 각각 서울로 올라와 한문과 라틴어 등 외국으로 유학 갈 공부를 하며 수련에 있었다. 그러나 김대건은 7월 11일에서야 이들과 합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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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당 좌측편에 있는 강도영 마르코신부 묘(좌)와 김대건신부 묘(우) |
그리고 12월 3일 중국으로 귀환하는 유방제 신부와 정하상, 조신철 등 신자들의 인도를 받으며 변문으로 떠났다. 이 때 조선인 신자들은 변문에서 새로 입국하는 샤스탕 신부를 맞아들여 귀경하였고, 세 신학생들은 샤스탕 신부를 안내한 중국인 안내원들을 따라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남하하여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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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측에서 바라 본 경당 모습과 우측편에 있는 페레올주교 묘(좌)와 최문식 베드로신부 묘(우) |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조차지로서, 신앙인들이 극동 진출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며, 동양 전교 활동의 거점이었다. 출발할 당시에는 세 신학생들이 공부할 장소가 결정되지 않았었다. 이들은 파리 외방전교회가 운영하는 동양인 성직자 양성소인 페낭 신학교에 갈 수도 있었지만, 당시 이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국인 신학생들이 소요를 일으킨 일이 있어서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워 교육을 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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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건신부 묘 |
세 신학생들은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인하여 1837년 8월과 1939년 4월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였다. 그 때마다 신학생들은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신학생인 최방제가 1838년 11월 27일 열병으로 죽었다. 김대건의 건강 역시 좋은 편은 아니었다. 두 신학생은 1841년 11월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 과정에 들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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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당 내부는 줄을 서서 한 사람씩 들어 갑니다. |
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 두 신학생은 아직 수학 중이었지만, 프랑스 함대의 함장 세실은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하여 조선 원정 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째 조선 교회로부터 소식이 끊겨 있었던 터라 대표부 신부들은 이번 일을 하느님이 주신 기회로 여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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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당 측면 모습과 경당 좌측에 위치한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高) 우르술라의 묘 |
김대건은 조선 포교를 지망한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2월 15일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842년 8월29일 남경조약이 체결되자 조선 출동을 중지하고 마닐라로 회항하였다. 그래서 김대건은 하선하여 강남 교구장 베지의 도움을 받아 중국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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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당을 돌아 나와서 103위 성전으로 갑니다. |
▲ 103위 성전 내부 전경 |
10월 2일 상해를 떠난 그는 10월 23일 요동 땅에 도착하여 백가점에 머물면서 3차에 걸
김대건은 1843년 12월 양관에서 있은 제3대 조선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한 후 주교의 지시를 받고, 1884년 12월 두만강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 했지만 실패하고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 12월 최양업과 같이 소정의 신학 과정을 마치고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았다. 그들은 사제품의 법정 연령인 만24세 미만이므로 사제품을 받지는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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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위 성전 내부에 안치된 김대건 신부님 성해 비골(종아리뼈) 모습 |
김대건의 사목 활동 기간은 짧았다. 그는 입국하던 해 11월 12월 사이에 서울과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 등을 방문했는데, 은이 공소에는 그의 동생 난식과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이 두 달이 조선에서 있은 사목 방문 활동의 전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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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위 성전 내부 모습 |
그의 교회 활동은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서 끝났으니, 말년의 직책은 조선 교구 부교구장 이었다. 그는 1846년 5월 14일 주교로부터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출범하여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편지와 지도를 탁송한 후 순위도로 왔다 . 거기서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되고 10일에는 해주 감영으로 이송 되었다가 다음 날인 6월 21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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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위 성전 내부 모습과 2층으로 올라가면 순교 형틀과 순교 장면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김대건은 포청에서 3개월 동안 40차의 문초를 받고,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26세였다. 그의 시체는 모래사장에 가매장 되었는데 40일 후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하여 미리내에 안장되었고, 1901년에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졌다가 1951년 그의 두개골을 혜화동 소재 가톨릭 대학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1857년에 가경자, 1925년 7월 5일에 복자로 되었다가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 미리내성지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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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성지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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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141 화살표 ↑ 위치 부근에 미리내성지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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