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미당문학 전국백일장 장원 作>
자화상
김덕임
바람이 지나간 후
더러는 쓰러졌고 더러는 뿌리를 내렸네
비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 속에서 자라던 잡초
어느 날 아름다운 꽃 장미를 보고
뿌리를 깊게 뻗으면
장미가 되는 줄 알고
무던히도 애쓰던 여름을 보냈네
가을이 되어도
장미의 가시 하나 얻지 못하고
작고 보잘 것 없는
하얀 꽃 한 송이 피었네
소나기 지나고 한 숨 돌리던 날
지나가던 사람들이
곱다고 하고 자랑스럽다고 하네
햇살 좋은 날 모두 다 피고 지었는데
늦게사 피어올린 풀꽃 하나
너에게 오래 기억되는 꽃이고 싶다
김덕임 시인
전주출생
방송통신대학 국문학과 졸
4회 시니어 전국 춘향 선발대회 금상
전국 스피치대회 최우수상, 41회 전북 여성 백일장 운문부 차상
1회 김상의당 시화 공모전 특선, 12회 온글문학상
미당문학 전국 백일장대회 장원,
현) 온글문학 회장, 미당문학,완주문학 회원
시집 『풀처럼 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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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얼굴 풀꽃의 희망 기도
<悳泉> 나 병 훈
자화상은 얼굴이다. 얼굴은 ‘얼’과 ‘꼴’의 합일이기에 불이(不二)다. 불교에서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전자는 안(內)의 정신, 즉 내면의식으로서 공(空)이며, 후자는 밖(外)에 있는 모양으로서 색(色)으로 읽어 얼굴을 ‘불심을 비추는 거울’로 본다. 양자역학의 권위자 닐스 보어가 정립한 ‘관찰자 효과에 따르면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양자의 입자와 파동은 무한 가능성으로 우주 전체에 존재하다가 우리가 주목하는 순간 하나로 구체화 되어 현실로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즉, ‘생각’이 현실의 모습을 드러내는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내면의식(얼)에 존재하는 ‘생각이나 욕망’이 현실을 창조하는 에너지가 원천이 된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시인은 자화상을 어떻게 그려낼까? 화가는 ‘꼴’을 회화하지만, 그는 그 이외에도 자신의 내면(內面)의 얼굴, 즉 ‘얼’을 언어로 형상화한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진정한 자기로 ‘착각’하고 그린다. 여기서 시인의 ‘착각’은 물론 무의식적이며 무한대의 범주를 지닌 ‘문학적 상상력’의 소산임은 물론이다. 위 양자역학 이론에서 보듯 그들이 그려내는 거울 속 얼굴에는 무의식적 내면세계에 꿈틀거리는 생각이나 욕망이 그 단초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시인이 쓰는 ‘자화상’시에는 시인이 의도하지 않는 세계가 반영되고 숨겨져 있는 욕망이 착각의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있을까? 영원불시(永遠不視)요, 착각 일 뿐이다.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 진짜 자신인 줄로 착각하고 살아 갈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거울을 통해 또 다른 자신을 만난다. 그들은 ‘진짜 얼굴’ 곧, 내면적(內面的)얼굴을 무의식의 언어로 형상화 시켜 ‘거울’을 통해 진짜 ‘얼’과 ‘꼴’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언필칭 사유하는 몽상가이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시인에게 있어서는 죽음의 세계에 들 때까지도 멈추지 않을 이러한 시학적 착각의 반복 본능은 자신이 시인으로서 ‘살아 있음’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특이하게도 미당은 칠순 무렵에 발표한 「자화상」에서 ‘애비는 종이었다는“라는 충격적인 고백을 통해 내면의식의 ’억압된 욕망‘을 쏟아내는 오이디푸스적 콤플랙스를 내비친 바가 있지만, 뭇 시인들이 언어로 형상화하는 자화상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나르시시즘적 태도로 그려내는 욕망을 버리지 못라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깊이 들여다보면 다분히 무의식적인 내면세계에서 발화되고 있는 ‘자기애(自己愛)의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인은 거울을 통해 내면의 억제된 감정인 ‘얼’을 시라는 ‘꼴’에 언어로 새겨 무의식적으로 배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문학적 철학의 인식을 염두에 두고 이 노숙한 풀꽃 시인 김덕임이 연주하는 「자화상」이란 자기 고백의 변주곡을 감상 해 보자. 위에서처럼 억제된 감정인 김덕임 시인의 ‘얼’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시인의 무의식을 나의 의식으로 귀 기울이지 말아야 할 일이다. 반대로 나의 무의식으로 시인의 무의식을 만나보면 진짜 얼굴인 ‘자화상’의 실체가 보일 것이다. 이러한 시 읽기가 가능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착각이라는 언어의 창문’을 열며 말을 걸어오는 시인에게 다양한 자신들의 말을 걸어 줄 수 있는 시 읽기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사실 ‘자화상’이란 주제로 변주곡을 연주하는 시인들은 관객들의 마음속으로 먼저 달려 들어가 그들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는 거울을 나눠주고 싶은 고독한 사유자요 몽상가일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시인은 사무엘 바케트가 그린 고도를 기다리는 숙명을 안고 있으므로.
행간을 살피자. 고독했던 삶의 질곡으로 은유되는 ‘바람’이 시의 대문을 열고 있다. ‘바람 얼굴 풀꽃 한 송이의 노래’라고 부제를 나름 붙이고 나니 억압되었던 내면의 욕망들이 보삭거리기 시작한다. 이어 거울에 비치는 화자의 ‘얼’과 ‘꼴’의 모습이 서서히 행간에서 도글도글 거리며 고개를 내민다. 바람은 ‘실존적 고투의 바램(願)’이었다는 그들의 고백을 경청하며 화자가 겪었을 질곡의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는 내면의 언어에 귀 기울여 본다. 77년 세월동안 여자이자 어머니요 아내로 들바람 부는 질곡을 더듬었을 안주인이 자화상을 어루만지며 이름 모를 풀꽃 한 송이로 미소 짓고 있다. 외로움의 말 없는 ‘바램(願)’이라는 언어로 울 자리 한 자락을 내주었을 바람의 흔적들이 행간에서 스멀러리고 있다.
주시하자. 저 바람벽에 나뒹굴고 쓰러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이름 없는 잡초 한 포기를. 그녀가 우러렀던 장미꽃과 심지어 그 가시 하나까지도 삶의 인내와 희망을 인도 했던 알레고리적 기제로 등장시키는 기교가 생기롭다. 장미꽃과 가시는 화자의 내면의식에 억제된 감정인 ‘얼’의 은유다. 그러한 기의로서의 ‘얼’은 결국 ”늦게사 피어올린 풀꽃 하나“라는 하나의 기제가 된 ‘꼴”과의 합일이 되어 서정의 통로인 거울 밖으로 걸어 나왔음을 의미한다. ’자화상‘을 통해 진짜 얼굴을 볼 수 있게 한 이 시의 화룡점정(畵龍點睛) 인 이유다.
그렇다. 무릇 시인에게 있어서 ’거울‘은 안과 밖을 보는 무의식적 서정의 통로다. 이 시에서 그 통로는 기교적으로 행간에 숨어 있다. 그 통로를 통해 김덕임 시인은 ‘얼’과 ‘꼴’의 경계를 넘나들며 무의식적으로 현실속의 자아와 욕망의 세계를 결합시키고 융화시키고자 몸부림치고 있음을 명징하게 보여 준다. “너에게 오래 기억되는 꽃”이고 싶다고 희망 기도를 올린다. 문학은 대게 절망의 형식이다. 슬픔과 절망의 유통기한이 시인에게는 보이는 것일까? 상깃하게도 그녀의 기도는 이제 켜켜히 쌓여있던 고난과 절망의 질곡을 벗어나 희망을 노래한다. 늦게사 피어 올린 바람 풀 꽃 한 송이... 자신에게, 우리에게, 신(神)에게, 우주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김덕임 시인의 ‘얼굴’ 꽃이 되리라 확신한다. 그 풀꽃 한 송이가 저녘 놀에 곱게 물들어가는 시인의 ‘진짜 얼굴’이요, 실존적 존재임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었으므로.
< 悳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