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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왔습니다만, 뭐?” 나 부장. 비록 최고물산이 2년 전 부도를 맞아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한때는 국내 최고의 기업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물산은 구멍가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곳 홍보실에서 차장까지 했다면, 속된 말로 ‘사람 죽이는 일 빼고는 다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락부락 각진 얼굴, 술만 마시면 옆에 있는 사람을 번쩍 들어올리는 괴력의 소유자. 아니, 괴팍한 술버릇의 소유자. 옆에 있는 사람이 여직원이든남자직원이든 상관없이 들어올린다. 생긴 게 워낙 씨름선수 같고 단순무식해 보여서 그런지 행동은 오히려 순진해 보인다. 그래서 여직원을 번쩍 들어도 뒷말이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 같으면 고소당할 일인데도. “뭐 할 말 있으면 해봐. 어제 시킨 일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해보니까 쉽지 않지? 내가 도와줄까?” 성격도 좋다. 다른 회사 출신이라는 점을 의식하기 때문인지 지시하기보다는 도와주려고 한다. 생긴 것도 까칠한데 성격까지 더러우면 ‘왕따’ 되는 게 우리 회사 문화다. 그렇다고 뭘 바라고 도와주는 쪽은 아니다. 어쨌든 그는 단순하다. “뭐가 어려운지 내가 얘기해볼까? 요즘 신입사원들, 말 안 듣지? 일 시키기 쉽지 않지? 내가 신입사원 때만 해도 까라면 깠는데. 요즘 애들은 왜 그러니? 꼬박꼬박 대들어요.”
이런 젠장, 돈이 있어야지? 워낙 말소리가 커서 홍보실 사람들이 다 듣는 것 같다. 모두들 책상에 앉아 조용하게 일하는 것 같아도 귀는 나 부장을 향해 쫑긋 세우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떠들다가는 ‘탐정’ 일 못 한다. 그도 이런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조용히 나를 부른다. “내가 부산에서 살았잖아. 내가 나온 고등학교에서 우리 때는 1년에 50명이 서울대 갔어. 그런데 얼마 전에 고향에 내려갔을 때 물어보니까 지금은 서너 명도 못 간대. 부산에도 외고, 과학고 생겨서 거기서 다 서울대 보내나봐. 이런 젠장. 우리 큰딸이 초등학교 6학년인데, 초등학교 때부터 외고반이 있어. 우리 때는 고등학교 때도 실컷 놀다가 대학 들어갔는데. 요즘 아이들 너무 불쌍해.” 나 부장은 서울에서도 요지인 대치동에 산다. 그렇다고 부자는 아니다. 32평짜리 전세에 산다. 초등학교 6학년 딸과 4학년 아들을 둔, 한 달에 과외비로 120만원을 쓰는, 자신의 용돈은 30만원인, 그런 아버지다. “요즘은 초등학교에도 ‘복학생’이 있대. 이런 젠장. 해외에 1, 2년씩 연수 갔다 온 아이들을 그렇게 부르나봐. 내 딸 친구는 지난 겨울방학 때 호주에 갔다 왔다면서 자랑을 하더래. 이런 젠장. 나는 돈이 있어야 보내지.” “대치동에서 전세 살 돈이면 다른 데서 집을 사세요. 굳이 거기서 사시는 이유가 뭡니까.” “야, 윤 대리, 넌 아직 애가 어려서 잘 몰라. 나 서울에서 직장생활하면서 제일 부러웠던 게 뭔지 알아? 직장에서 고등학교 출신들 엄청 챙기더라고. 걔네들끼리 모여서 그때 뭔 일이 있었고, 뭐가 유행이었고 하면서 떠드는데 끼고 싶어도 뭘 알아야 끼지. 고등학교 동문이면 바로 형, 동생 하고. 그럼 또 엄청 친해져요. 그래서 생각했지. 우리 아이들만큼은 서울 좋은 지역에서 학교 보내자, 그래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도록 해주자.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뭐 있나. 그거라도 해주는 거지.” “친구 좋으면 뭐해요. 자기가 잘나지 못하면 무리에 끼지도 못해요.” “그건 그래. 내가 3남1녀 중에 차남으로 자랐는데, 부모가 챙겨주질 않아. 형은 형이니까, 막내는 막내니까 챙기는데,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나봐. 근데 내가 꼭 필요할 때가 있어. 방학 때면 시골에 계시는 할아버지댁에 날 보내는 거지. 외로움을 달래드리라고 보내는데 내가 제일 한가해 보였나봐. 그래서 방학 때마다 가서 놀았지. 부모가 신경도 안 쓰니까, 학교에서 뭔 일을 당해도 난 얘기 안 해. 그냥 혼자 해결하고 말았지. 그러다보니 생활력은 형제들 중에 내가 제일 강한 것 같아. 윤 대리는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너무 강해서 탈이죠.” |
전선에서 이탈하면 끝장
“이런 젠장. 근데 요즘 아이들은 참 이기적이야. 사회생활 별거 있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으면 되는 거 아냐? 혼자 커서 그런가봐. 얼마 전에 누가 그러대. 부모가 치매에 걸리면 요양병원에 보내겠다는 거야. 그 얘기 듣고 좀 충격이었어. 나 같으면 회사 휴직하고 부모님께 내려가지. 자식으로서 부모가 인생을 잘 마무리하시도록 도와야 하는 거 아니야?”
“아이고, 부장님. 부장님 나이에 회사 휴직하면 누가 다시 받아줍니까. 전선(戰線)에서 이탈하면 바로 아웃이라고요.”
“이런 젠장. 아픈 부모 곁에 같이 있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돼. 까짓 회사 생활 몇 년 더 하는 게 무슨 의미냐? 나 최고물산 출신이잖아. 그 회사 회장 알지? 이런 젠장. 지금 뭐 하는지도 몰라. 그렇게 잘나가던 사람이 말이야. 인생은 그런 거야. 뭣 때문에 일했던 거야? 그 회사 망하지 않았다면 나는 승승장구했겠지. 근데 그게 무슨 소용이야. 뭔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아느냐고? 그냥 있을 때 잘 살자는 거지. 윤 대리, 있을 때 잘해줄게. 필요한 게 뭐야? 어, 뭐야? 그 표정, 믿지 않는 눈친데? 한번 들어올려줄까? 힘도 남아도는데.”
▼ #Scene 5
“윤 대리, ‘하얀 거탑’ 봤어?”
“의사들 나오는 드라마죠? 마누라하고 마지막 장면은 봤어요. 눈물이 나오두만요.”
“난 그걸 보면서 수컷들의 싸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힘이 약할 때는 쳐다보지도 않다가 자신보다 윗자리에 올라서면 바로 무릎을 꿇어. 남자들은 다 그래? 살기 위해선 자존심도 다 버려? 그런 거야?”
사회공헌팀 신수미 부장. 독신이라는 얘기도 있고, 아이가 하나 있다는 소문도 있다. 그에 관한 소문의 최신 버전은 그 아이는 입양한 아이라는 것. 고아원 봉사활동을 하면서 눈에 든 아이를 데려왔다는데, 워낙 우리 회사가 소문 만들어내기 좋아해 사실 관계는 불명확하다. 그러나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고 있어 갖가지 소문이 떠돈다. 까짓 그런 소문쯤 돌면 어떠랴. 그는 우리 회사 유일의 여성 부장이자, 임원 1순위로 꼽히는 인재인 것을.
“살려주세요”
“나, 사실 그런 남자 알고 있어. 내 동료였는데 부서 상사가 한직으로 발령 났을 땐 거들떠보지도 않더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래도 함께 생활한 게 몇 년인데. 근데 올해 초에 그 옛 상사가 덜컥 자기 부서 상사로 컴백한 거야. 난리가 났지. 근데 웃긴 건, 발령 난 다음 날 바로 찾아가더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살려달라’고 했대.”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그럴 수도 있죠 뭐.”
“그 친구 비난하는 거 아니야. 아니, 처음엔 비난했어. 지금은 아니야. 이해해. 아니, 나도 닮고 싶어. 생존을 위해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리라, 호호호.”
그러면서 창문 밖 허공을 초점 없이 바라보는 신 부장.
“차 뭐 마실래?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대접할 건 마땅찮고. 이를 어쩌나, 호호호. 커피? 녹차?”
“커피 한 잔 주시면 황공하옵나이다, 마마.”
“크, 아부는…. 부장까지는 내가 중심인데, 임원이 되면 나를 버려야 하는 가봐. 무색이 되어야 하나봐. 목적을 위해 버리는 거지. 자기희생은 아니고 일종의 꾀라고 할까. ‘하얀 거탑’에서도 자기 색깔을 지키면서 야합하지 않은 사람은 모조리 도태되잖아. 그나저나 지난 사보에 임원학 쓴 거 잘 봤어요. 읽으면서 생각한 거 알려주는 거야. 내가 임원이 되겠다는 뜻은 절대, 절대 아니라고, 호호호.”
절대 아니라는 말씀, 절대 거짓이죠?
“나는 부장이 임원보다 더 좋은 것 같던데. 아, 물론 임원을 해본 건 아니지만, 옆에서 보니까 그래. 부장은 소(小)사장 같은 거예요. 확실한 영역이 있고, 부서가 있고, 부하들이 있잖아요. 임원은 결정권자지만 조직과 격리돼 있잖아. 부장은 직원들과 어울려서 일하죠. 직원들이 오늘 아침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요즘 무슨 고민이 있는지, 어디가 아픈지, 임원은 잘 몰라. 그런데 부장은 잘 알지. 이게 부장의 힘이라고.”
“조직과 더 가깝지만, 임원이 일 시키면 군말 없이 해야 하잖아요. 그건 힘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거죠.”
“아니야. 물론 싫어도 그 자리에선 ‘예’라고 해야지. 그러나 나와서는 꼭 그렇게 할 필요 없어. 임원 뒤통수 치자는 얘기는 아니고. 다르게 접근할 수 있다는 거지. 조직이 있으니까. 임원에겐 임원이 원하는 길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에선 직원들 시켜서 내가 원하는 길을 뚫어놓고. 그래서 임원이 틀렸음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거야. 결국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지. 그건 부장만이 가능해요.”
독하거나 못되거나
“임원이 맞는지, 부장님이 맞는지 어떻게 확신하세요?”
“자기 확신이 중요해요. 임원은 큰 그림을 보지만, 나는 내 분야만큼은 전문가잖아. 일을 알고, 핵심을 알고. 그건 문제 해결 능력도 있고, 반대로 사고 칠 능력도 있다는 얘기지. 임원이 틀려도 나는 조직을 올바른 길로 끌고 갈 수 있다는 확신, 그건 부장만 가능하지. 고로 부장은 소사장이라는 말씀.”
신 부장은 우리 회사에서 20년을 근속했다. 회사 최초 여성 부장이다 보니 그에 관한 전설적인 얘기도 많다. 수컷들이 우글거리는 정글에서 여성이 부장이 됐으니 독하다거나 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
외환위기 때였던 것 같다. 회사에서 희망퇴직자 신청을 받고 있었다. 그가 일하고 있던 마케팅팀에서도 누군가는 나가야 했다. 신 부장보다 1년 선배인 L상무가 그의 손을 붙들고 이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더란다.
“수미씨, 난 노모가 있고 아이도 둘이나 돼.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어.”
그래서 신 부장이 대신 희망퇴직서를 썼다. 그런 거 보면 그는 독신이든지 그 비슷한 처지가 맞는 것도 같은데…. 어쨌든 그 사직서는 반려됐다. 퇴사 대신 그는 부서를 옮겨야 했다. 남자라면 모두 가기 싫어하는 사회공헌팀으로. 이곳은 돈을 버는 부서가 아니기 때문에 실적을 자랑할 수 없다. 야망에 찬 수컷들은 결코 관심을 보이지 않는 부서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지금, 사회공헌팀은 회사 내 ‘블루오션’으로 떴다. 회장이 사회공헌팀에 엄청나게 힘을 실어줬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의 슬로건이 ‘영혼이 아름다운 회사’라고 하면서.
“남자 동료들이 내게 ‘사회공헌팀에서 일하면서 1년만 쉴까’라고 하는데, 천만에 말씀. 지들은 6개월도 못 버텨. 여기는 본류가 아니고 지류야. 승진에 눈먼 친구들이 어떻게 지류의 생활을 견뎌. 주목받지 못하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사직서를 냈을 때 신 부장은 동료들에게 택시 기사가 되겠다고 했다. ‘웬 택시 기사?’라고 동료들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의아해했을 때 그는 ‘원래 꿈은 소설가’였다고 했다. 돌아다니다 보면 소재를 많이 발견할 것 같다는 것이 이유. 또 다른 이유는 어릴 때 전차 타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는데, 꼭 친구들을 몰고 전차를 탔다고 했다. 신 부장님, 다시 보니 집시 기질이 있으셔.
“나, 어제 점 봤는데. 스님 사주래. 평생 수행하면서 살라고 하던데.”
거봐, 독신 맞네.
든든한 기둥이 사라진다
“그러면서 돈 모으려고 하지 말래. 근데 난 이제껏 내 지갑에 돈 얼마 들었는지 세어본 적이 없어. 부동산 뜨기 직전에 강남 아파트 팔아서 강북에 아파트 샀잖아. 회사 근처에 살려고. 내가 팔자 1년 만에 2배가 올랐대. 다른 사람 같으면 배가 무지 아팠겠지. 난 안 그래. 욕심이 없으니까. 내가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잖아. 어릴 때부터 방목형으로 자랐다고요. 엄마가 맛있는 것 있으면 새끼들 안 주고 당신이 다 잡숴. 그래서 엄마가 계모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어쨌든 그때부터 ‘내 길은 내가 개척해서 살아야겠구나’하고 생각했지. 별수 없잖아. 돌봐주는 사람이 없는데.”
우리 회사 부장들은 대부분 형제가 많은 집에서 태어났다. 신 부장도 그렇고, 홍보실 나 부장도 그렇다. 형제가 많다보니 자기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 특히 중간에 낀 차남이나 차녀는 위로는 큰형과 아래로는 막내의 의사소통 통로가 돼야 했다. 한국물산의 조직문화에서 중간급 간부로서는 기가 막히게 맞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 회사의 부장들만큼 능력 있는 세대도 없다. 자기 영역을 구축하는 데 선수이고 그 영역을 확장하는 데도 뛰어나다. 게다가 경직된 임원들 모시고, 세상 물정 모르고 까부는 신세대 직원들 데리고 종횡무진 잘 이끌어간다. 이 또한 많은 형제 틈에서 자란 환경 덕분이다.
이들이 임원이 되거나 퇴직하면 회사를 받쳐줄 든든한 기둥이 사라진다. 나만 해도 형제 중에 장남으로 커서 어디서고 매개자 구실을 배운 적이 없다.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 두 세계의 다리를 놓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회사 부장님들이 최고인 것 같은데.
“나 진짜 임원 되는 거에 관심 없어요. 나이 50이 되면 내 일을 할 거야. 어라? 부사장 호출이네. 윤 대리, 우리 다음에 보자. 나 올라가야 해.”
▼ #Scene 6
금융팀 이수치 부장은 엄밀히 말하면 팀장이다. 나이가 부장급이지, 정식으로 부장을 달지는 못했다. 사실 금융팀 부장은 따로 있다. 하여튼 그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 나와 어울려본 적이 없다. 술 없이 무슨 얘기를 하겠는가.
이 부장은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땄다. 집안이 부유했던 것은 아니고, 미국 주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다. 우리 회사에선 외환 관련 일을 담당한다. 환 위험을 피하는 금융상품을 설계한다고 하는데, 어려워서 잘 모르겠다. 이렇듯 공부를 많이 한 덕분에 차장까지는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아까 말했듯 술을 못하고, 나처럼 어느 라인에 서지 못한다는 것이 약점이다. 자신의 처지에선 라인에 서지 않는 게 소신을 지키는 것이지만 남의 눈에는 회색인간으로 비친다. 이게 직장생활의 현실이다.
지난해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었을 때, 그는 어느 라인에도 서지 않아 금융팀 U부장에게 밀렸다. 확실한 전공이 있기 때문에 금융팀에서 떨려 나지는 않았지만, 후배인 U부장에게 윗자리를 내줘야 했다. 이 때문인지, 회사에서 가끔 마주치면서 본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베테랑을 인정해주지 않다니. 회사가 썩었어.’ 이렇게 생각할 법한 얼굴이었다.
사실 회사가 그를 이용한 측면도 있다. 어느 라인에도 서지 않았기 때문에 재작년 금융팀 구조조정에서 그는 선배인 P부장을 제치고 팀장 자리에 앉았다. 회사는 이 부장을 이용해 그동안 능력 없는 사람들로 찍힌 간부 사원들을 내보냈다. 금융팀을 강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이 부장의 명분과 이를 통해 구조조정을 하자는 회사의 의도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이 과정에서 몇 라인과 충돌을 빚었고, 그 결과가 올해 인사로 나타난 것이다.
오늘은 우연히 커피 자판기 앞에서 이 부장을 만났다.
“윤 대리님, 잘 지내십니까. 교회는 열심히 나가시고?”
“자주 못 나가요. 바빠서….”
“시간을 내봐요. 성경 말씀이 얼마나 삶에 위안이 되는데….”
이 부장님, 술도 위안이 되는데요.
“하, 어제는 집사람이 나더러 ‘위트는 있는데 유머가 없다’고 해. 그래서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위트는 남의 약점을 꼬집어서 웃기는 것이고, 유머는 다 같이 웃는 거래. 남의 가슴을 후벼파는 말을 삼가라고 하더군. 윤 대리가 보기에도 내가 그래?”
글쎄요. 술을 한잔해봐야 알 것 같은데요.
“대답 안 해도 좋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집사람 말이 맞는 것 같아. 내가 너무 잘난 척했던 것 같아. 실력도 없으면서. 요즘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능력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있어요. 비록 지금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고. 공부하고 논문 쓰고 해야지. 나중에 회사에서 필요할 때 부르면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할 거 아니에요? 조직에서 물먹었더니, 요즘엔 물먹은 후배만 눈에 띄어.”
컥, 그럼 내가?
“윤 대리가 그렇다는 게 아니고. 위로가 필요한 후배들이 보인다고. 요즘 이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게 재미있어요. ‘실력을 쌓아라, 미래는 온다’고 격려하지. 예전에 잠도 못 자고, 밥맛도 없었는데, 요즘엔 괜찮아. 괜찮으니까 윤 대리하고 이런 얘기도 하는 거고. 하나님께서 교만했던 나를 쓰러뜨린 것 같아. 제대로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 언제 술 한잔할까?”
“예? 그냥 차 한잔하시죠.”
“윤 대리까지 나를 내치는 거야? 어차피 술은 못 마시니까. 내가 좋아하는 찻집으로 안내하지. 근데 오늘 얼굴 좋아 보인다, 좋은 일 있어?”
좋은 일? 없어요. 부사장에게 줄 보고서 쓸 일만 남았어요….
▼ #Scene 7
똑똑. 윤병굽니다. 들어와.
“시간 빨리 가는군. 벌써 한 달이 지났나.”
“여기 보고서 가져왔습니다.”
“응, 거기 둬. 다시 말하지만 절대 비밀로 하고. 윤 대리, 그리스와 로마의 차이가 뭔지 알아?”
“그야….”
“그리스는 피를 섞어야 같은 민족으로 인정했고, 로마는 뜻이 맞아야 같은 민족으로 인정했어. 그리스를 굴복시킨 로마제국의 성공은 그 차이에서 비롯된 거야. 회사가 발전하려면 뜻이 맞는 친구들이 있어야 돼. 그게 누구든, 어디 출신이든 상관없어. 수고했고, 일봐.”
…
▼ #Scene 8 에필로그
한국 기업의 부장들을 샌드위치로 만들 것이냐, 너트크래커(Nut-Cracker)로 만들 것이냐에 한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샌드위치는 빵 속에 든 양상추, 햄, 치즈, 소스 때문에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샌드위치를 사 먹는 이유는 중간에 내용물이 들어있어서다.
반면 너트크래커는 위, 아래가 누르고 치고받아 속에 있는 내용물이 깨지는 것을 말한다. 경직된 사고의 경영진, 경험도 없으면서 우쭐거리는 신세대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자신의 능력을 소진하는 부장이라면, 그런 부장이 많다면, 그 회사의 미래는 암울하다.
그나저나 기사를 이렇게 써도 되는 건가? 우리 부장은 뭐라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