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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되는 가난을 이겨낸 끈기
서울 성북구 송천동 21-220호 홍 순 혜 부녀지도자
1. 타고난 불행
제가 나서 자란 충북 중원군 주덕면 덕현리는 얼마나 시골인지 앞산은 턱을 고이고 뒷산은 등을 미는 듯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하늘만 보이는 마을이었습니다.
굶어 죽어도 양반의 체통만 지키고 사는 집안에서 저는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불행히도 아버지는 제가 세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뜨시고, 저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저에게는 아버지 없이 자라는 설움보다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옛날 벼슬하신 양반들께서는 소실을 두고 살지 않으면 양반 행세를 못했는지? 저의 아버지께서는 소실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저희들까지도 서족 서출이라는 차별 때문에 어린 시절에 기 한 번 펴지 못하고 살아 왔습니다. 위로 언니와 오빠가 있었으나 오빠는 우연히 병을 앓다가 반신불수가 되어 병석에 누워 있고 언니는 친척 집에 키워달라고 주었습니다. 제가 맏딸 겸 맏아들 역할을 하고 자라야 했습니다.
남들은 다 학교에 진학했으나 저는 늦게 아홉 살 되던 해에 이웃의 도움으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억지 춘향 격으로 학교에는 들어갔습니다만 연필 한 자루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끼니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학교에 다닐 때 봄이면 산나물로 연명을 하고 아침밥은 밀기울 아니면 죽으로 끼니를 채우고 저는 도시락을 학교에 가지고 간 일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학교 가는 길은 6km 되는 꼬불꼬불한 산길이었습니다.
그때는 대동아전쟁 중이라 시골에서는 고무신이나 운동화는 구경도 못했고, 나무로 깎아서 만든, 왜말로 『게다』를 신고 다녔습니다. 홀어머니가 꾸려가는 가난한 살림에 도움 드리고자 이것마저 닳을까 봐 아끼느라고 겨울에는 짚신을 신고 험한 산길로 등교를 했으며, 여름철에는 『게다』를 벗어 들고 맨발로 다니기 일쑤였습니다.
아버지가 안 계시기 때문에 겨울철이면 집신을 꼬아 만들어 신고 학교에 다녀와서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산에 올라가 땔나무를 해야 했습니다. 땔나무를 하다 보면 어린 나이에도 조금이라도 더 가지고 갈 욕심으로 나뭇짐과 함께 굴러 떨어져 다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허기 중에 쓰러져 몇 시간씩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저에게 펴주신 담임선생님의 따뜻한 인정의 구원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해 해방이 되어 학교에 월사금을 내지 못하고 학교를 중단하기에 이르렀을 때에도 시골학교 선생님들이 박봉을 털어서 저를 초등학교 6학년 과정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게 뒷바라지를 해 주었습니다. 2 년간의 학비와 도시락까지 보살펴 주신 덕분에 저에게는 학교 졸업장이 과분하다고 생각 되었으며 우선 선생님의 은혜가 태산같이 느껴졌습니다. 한편, 같이 6학년 과정을 마친 급우들이 중학교에 진학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에게는 그 진학 과정이 그림의 떡처럼 느껴졌고,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속담이 있기는 하지만 진학 못하는 것이 그렇게도 한스러웠습니다. 저의 진학 소망은 정말 지워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권세 좋고 문벌 좋기로 유명한 옛날 진사 댁의 서족이라는 서러움, 한 혈육의 자손이었지만 저의 사촌 형제들은 전부 도시에 진학을 하고 호강스럽게 자랐으나 서출인 저와 우리 식구는 남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분수를 알고 저의 위치를 생각한 나머지 모든 것 다 잊어버리고 가난한 살림꾸리기에 고달픈 홀어머니를 도와 드리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해 보았으나 작심삼일이 되어 가더군요. 도시에 진학했던 사촌들이 방학이 되어 교복을 입고 시골에 돌아오는 광경은 어린 저의 마음을 한 없이 흔들어 놓았습니다. 어머니를 돕겠다는 결심이 허사가 되고, 어린 저는 밤낮으로 궁리를 하였습니다.
일주일을 벼르다 윗방에 편지 한 장을 적어 남기고 도시인 서울로 도망을 쳤습니다. 차비 한 푼 없이 걸어서 거지나 다름없이 얻어 먹어가면서 4일 만에 서울에 도착했습니다만 서울에 온지 2 주일도 못 되어 6.25사변이 일어나 다시 피난민 대열에 끼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을 떠나 가족과 함께 청주로 피난하여 그곳에 정착하였습니다.
2. 찾아온 행복은 또 다시
도시 청주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 저는 어린 몸이지만 누구 못지않게 생존경쟁에 뛰어들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의지는 나날이 강해졌습니다. 방직공장, 개성 목공장, 점원, 우체국 교환수 등 닥치는 대로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교환원 생활을 하면서 청주우체국 국장님의 배려로 서울지구 헌병대 통신과에 추천 되어 상경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약 2년간 근무를 하는데 설상가상으로 저에게는 또 다시 직장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될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다행히 헌병대 근무 시 사귀었던 동료의 알선으로 극장 매표원, 안내역, 방송원 등 모든 일에 다시 열중하면서 역경을 극복하고 이겨 나가는 자신감을 가지고 처녀시절을 보냈습니다. 서울의 생활도 익숙해지고 저는 스물두 살에 중매로 미국대사관에 근무하던 동갑인 저의 남편과 결혼하고 신혼 첫출발이 시작 되었습니다.
저의 남편의 고향은 우리나라 제일북단에 있는 함경북도 무산에서 1946년 월남하여 서울에서 홀 아버님과 동생 세 식구가 정착하여 살다가, 6.25사변 당시 미처 서울에서 피신을 못하고 계시다가, 공산군에게 붙잡혀 고향이 이북이라는 죄로 가혹한 고문으로 인하여 끝내 투병 끝에 홀 아버님께선 세상을 떠나시고, 단 형제가 불시에 고아가 되어 성장하신 분으로, 사변 시에는, 학생의 몸으로 육군포병대에 학도병으로 입영하여, 평양을 거쳐 압록강 부근까지 진격했다가 다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구사일생으로 서울로 돌아와, 진해 육군포병학교에서 제대하여 미국대사관에 종사하는 착실한 직장인이었습니다.
결혼 후 세월이 흘러 첫아들 쌍둥이를 비롯하여 딸 둘을 거느린 4남매의 어머니가 되어, 누구 부럽지 않게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며 놓고 살았습니다. 모든 생활이 저에게는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착실한 기반이 잡혔습니다.
자기의 생활에 만족하고 행복하다고 느낄 수 없는 것이 인간생활이 아닌가 합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계속 보존 될 수는 없는 것인 양, 저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저의 남편 고향에서 초등학교 동창생이란 친구 한 분이 찾아와 사업을 하자고 해서 미군 부대에만 종사하던 저의 남편은 사회 물정도 잘 알지 못하고 무계획한 사업에 그만 실패를 거듭하다 보니 착실히 모았던 재산은 순식간에 탕진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때부터 무엇 하나 잘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청파동에, 1960년도 시가로 약 팔백만 환 상당하던 집을 정리하여 모든 빚을 갚고 4남매를 데리고 이사해 온 곳이 미아리 고개를 넘어서 옛날 공동묘지 자리였던 지금의 성북구 송천동이었습니다. 4.19혁명 후 무질서하게 지어진 무허가 판자 집에 단간 방을 월세 700환에 얻어 여섯 식구가 들어앉고 보니 누울 때 다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방에서 호구지책을 생각하며 여기서부터 저에겐 고된 노동이 시작되었습니다.
3. 피맺힌 성공
마을이 모두 수재민과 이재민들의 정착지라 모든 면에서 무질서하고 인심도 각박하여 다시 재생의 길을 찾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곳에서도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에 겪었던 가난한 생활경험이었습니다. 절망이란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밤낮으로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고 남편께서도 백방으로 직장을 구하려고 돌아다녀 봤지만 별로 신통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어린 쌍둥이와 딸아이들은 먹을 것을 달라고 졸라댔지만, 이 아이들에게 일주일을 밀가루 죽도 제대로 먹이지 못할 때 저는 어린 시절에 제가 자라던 때의 처지를 생각하며 정말 앞이 캄캄하여 어찌할 바 몰랐습니다. 그 때 어린 시절에 할머니께서 저에게 말씀하시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할머니께선 늘 “현모양처가 되려면 매사를 참고 견디고 강인한 노력과 부덕을 쌓아야 하며, 이것이 바로 현모양처의 길이노라.”고 하시던 생각이 어렴풋이 기억이 나기에 여기서 저는 다시 한 번 용기를 찾아 옆 철물상에서 물지게를 외상을 구입하여 열 가구에 물을 길어다 주면 하루 300원의 수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아이들의 끼니는 굶기지 않고, 비록 여자일망정 꾸준히 무슨 일이든지 남자 못지않게 열심히 닥치는 대로 해왔습니다.
심지어 건축공사장에 벽돌 지어 나르기 또는 마을 집 아궁이 고치는 일까지 하면서 일손을 멈출 사이도 없이 노력하였습니다. 이렇게 막일까지 하는 것을 저의 남편께선 모르고 계시다가, 제가 영세민 구호미를 타려고 개천과 하수구치기를 하다가 주인에게 발견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저의 남편이 정신이 들었는지 일확천금을 노리던 망상을 버리고 저와 함께 막벌이를 시작하였습니다. 저의 남편은 원래 자동차 운전을 할 수 있는 운전면허가 있었는데 이것을 분실하였다가 다시 재발급을 받아서 시내버스회사에 종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남편의 양해를 구하여서 종전과 같이 아무 일이나 계속하면서 여기서 수입 되는 돈으로 끼니를 잇고, 남편의 수입은 착실히 저축하여 5년 만에 전셋집으로 이사하고 가정은 날로 윤택의 길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동안 저는 무엇인가 여자이지만 여자로서 할 수 있는 한 가지 기술을 익혀 놓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때마침 국가에서 경영하는 서울 시립 부녀사업관에서 군, 경 유자녀와 영세부녀자에게 무료로 기술을 가르쳐 주는 혜택이 있음을 알고 여기서 양재기술을 누구보다 착실히 습득하였습니다. 처음에 기술 습득을 위하여 들어갈 때 약 60명이었는데 수료식 때 불과 13명이 수료하게 되었습니다.
수료식 때, 지금은 고인이 되었습니다만, 고 육영수여사의 친 언니인 육인순관장님께서 수료생들에게 당부의 말씀하시기를 『무료로 습득한 기술이라 헛되이 하지 말고 내 가정의 안정을 이루고 또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나아가 한 사회의 복지에 이바지 해줄 것』을 당부하실 때 저는 열 가지 아는 것 보다 한 가지라도 실천함이 옳은 줄 알고 이를 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졸업 후 셋집에다 서투른 솜씨로 『가정 의상실』이란 간판을 달고 양재 업을 개업했습니다. 간판이 어설퍼서 그런지 찾는 손님이 별로 없었습니다. 저는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마을에 나가서 마을 주부들과 대화를 통해 자작 선전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다소 효과를 거두기 시작하여 차츰 우리 마을 주부들에게 인식이 가고 우리 마을 주부들이 생활상태도 파악이 되어갔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저의 마을은 수재민과 이재민의 정착지라 주부들의 정신 상태는 나태하기가 말할 수 없었고 낡은 폐습에 젖어 있었습니다. 저희가 마을에 이사해 온지도 8년이나 되는데 조금도 발전된 데라고는 찾아 볼 길이 없을 정도고, 주부들이 방에 모여 앉아 남편들이 밖에서 벌어다 주는 박봉을 가지고 가계를 어떻게 살찌게 하려는 생각은 않고, 화투놀이나 하고 술타령이나 하고, 봄. 가을이 되면 박봉에서 몇 천 원씩 갹출하여 관광과 야외유흥에만 소일하는 주부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부녀사업관에서 틈틈이 교양강좌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를 이들에게 전해보려고 했지만 이들 주부들에겐 마이동풍이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연구 끝에 이들에게 헌 옷을 아동복으로 개조 한다든가 또는 간단한 여자 옷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서 이들에게 설득과정을 늦추지 않고 계속 하였더니 몇몇 주부들이 호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주부들은 헌 옷으로 이동복이 훌륭하게 자기 손으로 만들어 질 때 저를 이해하고 저를 도와주기 시작하더군요.
저는 여기서 지금의 새마을운동은 협동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도 사업이라고 날로 일거리가 쉴 사이도 없이 밀어닥쳐, 종업원을 세 명을 두고 일을 하다 보니 많은 돈도 모아지고 남편께서도 안정 된 직장으로 옮기시어 생활은 날로 번창하여 저희가 살던 셋집을 사들여서 다시 개축하여 대지 70평에 건평 40평이나 되는 훌륭한 주택을 마련하였을 때는 꿈만 같더군요.
4. 나만으로 만족 못해
이렇게 변모가 되어 가는 우리 가정을 저의 마을 주부들은 똑똑히 보았고 그들 나름대로 느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저는 알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잘 살게 된 동기를 주부들에게 설명을 하면서 이들에게도 무엇인가 방법을 모색하여 잘 살 수 있도록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되어. 나만이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생각은 이 사회에서 용납 될 수도 없거니와 또 다른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 마을주부들에게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고 일손을 놀리지 말고,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이야기로 이들 주부들을 설득시켜, 제가 양장점을 경영하면서 친분을 익혀 놓았던 중산층 이상의 가정주부들에게 일일 가정부 파출방법을 생각하여 이들에게 중간역할을 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 제도가 날로 선전이 되어 일일 가정부를 희망하는 주부도 많이 늘어나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다섯 명 정도로 했던 것이 가정부를 요청하는 인구가 많이 늘어나게 되었으며 저는 8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착실히 기반도 닦고 생활도 안정됨에 따라 새삼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지난날 제가 기술습득을 위해 수강을 받고 있을 때, 간혹 여성 교양강좌 시간이 있었는데 그 때 어느 강사님의 말씀이 저의 머리를 스쳐 간 것입니다. 강의 내용은 『개인을 위한 야심보다는 한국의 여성으로서 남을 위해 헌신하며 봉사를 아끼지 않고, 다 할 수 있는 여성이 되어준다면 우리나라도 후진국 대열에서 벗어나 잘사는 나라를 건설하는 데 여성의 힘도 일익이 될 것이다.』는 말씀에서 저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마음을 굳게 가지고 지난날의 강인한 인내력과 노력으로 이 마을의 가난을 추방하는데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충청도 여성의 긍지를 가지고 남보다 배우지도 못했지만 제 나름대로의 구상을 가지고 일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마을의 가난한 근본 요소인 문제점을 파악하여 첫째로 해야 할 사업으로는 분수에 넘치는 생활태도와 낭비성, 둘째 소위 딸라 이자 놀이, 셋째 가장 퇴폐적인 화투놀이와 유흥을 즐기며 망상에 적어 있는 정신 상태부터 해소가 되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저는 이러한 주부들에게 계몽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쉽사리 이들에게 이해 전달이 잘 되지도 않거니와 도저히 “마당 꺼진 데 솔뿌리 걱정을 한다느니”하는 빈축을 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끝까지 이들에게 설득과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 궁리하였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일일 가정부로 파출 되고 있는 어머니들을 동원하여 『마을 어머니 친목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이들 어머니들로 하여금 일일 가정부를 희망하는 어머니들을 모집하여 이들 어머니들로서 친목회를 조직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 어머니친목회 회원이 20명 정도가 되기까지는 5개월이 소요 되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친목회가 잘 운영 되어가고 이들 회원들의 일일 가정부로 수입 되는 돈이 가계에 얼마나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주부들의 부지런함은 말할 여지도 없었으며 날로 가정이 윤택하여지자 온 마을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였으며 때마침 1970년도엔 정부에서 새마을운동이 범국민적으로 전국에 울려 퍼지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어머니친목회를 새마을어머니회로 바꾸어 저의 마을 어머니회원들에게 종전과 똑같은 계몽을 하여 일손 놀리지 않기 운동으로 일일 가정부 파출대열에 참여토록 권유하는데 성과를 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차차 질서가 잡혀서 어머니회 운영도 체계가 잘 되어 나가기 시작하면서 우선 어 어머니들에게 부업 갖기 일환으로 여가를 잘 활용하는 방법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일일 가정부로 파출 되지 않는 날은 폐품을 활용하여 새것으로 만들 기라든지 또는 양말 공장에서 양말을 가져다 수놓기 기타 가내공업으로 『비닐』제품 만들기 등을 하여 어떻게든 일손을 멈추기 않기 위하여 일감을 마련하여 주었으며 이들 주부 자신들이 자기가 벌어들인 소득이 가계를 살찌게 했다고 수긍했을 때 저로서는 보람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이들 주부들에게 다 방면으로 수소문하여 중상층 이상의 가정과 연결을 지어 소득증대를 위하여 활동을 중단치 않았습니다. 매일 아침 전화벨 소리에 신경을 집중하여 연락만 오면 즉시 이웃 영세민가구 대문을 두들기는 일과는 오전 10시가 넘어야 끝나곤 하였습니다. 이들 주부회원들에게 월 2회 총회 하는 날을 선정하여 이들에게 제 나름대로의 교양강좌도 하고 회원들에게 저축심 앙양에 관한 이야기도 하여서 매월 일인당 일천 원씩 저축하기로 결정하여, 여기서 모아지는 기금으로 수공예품 만들기를 하여서 120가지 작품을 만들어 구청광장에서 전시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고, 여기서 판매 된 작품의 이익금 일부로 군, 병원 등에 위문도 하였으며 또 이익금의 일부는 어머니회의 기금으로 적립 되어 커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나태한 정신상태의 망상적인 주부들에게 똑똑히 보여주기 시작하자. 지금까지 저의 어머니회에 대하여 중상모략 그리고 빈축을 던지던 사람들도 새마을운동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느끼고 인식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어머니회에서 하는 사업이 잘 진행 되어 가고 있으니 그들도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새 출발 하기에 이르렀으며, 지금 현재 어머니회 회원은 백여 명을 훨씬 초과하여 막강한 어머니회 조직이 되었습니다. 기금도 많이 적립되고 하여 어머니회원 중에는 정회원과 준회원 제도를 두었습니다. 여기서 정회원이라면 일일 가정부로 파출 되는 어머니이며 준회원은 중상층 이상의 가정주부로서 구성 되어 정, 준회원 다 같이 매월 일천 원씩 어머니금고에 저축하기로 결의가 되어 여기서 적립 된 기금으로 사글세방에 사는 정 어머니 회원에게 대출하여 전세방으로 옮기기 운동이 전개 되어 지금 우리 마을 정 어머니회원은 사글세 사는 회원이 없어졌습니다. 날로 번창해가는 우리 마을 주부들은 고달픔이란 아랑곳없이 열심히 일하는 정 어머니회원 수는 60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 정회원이 가사봉사원으로 종사하면서 도시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상류층 가정과 영세민 주부 즉 가사봉사원들 간에 서로 상호 문호가 개방 되어 상류층에서 입던 옷가지가 영세민 가정으로 옮겨져 가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웃돕기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상류층 가정주부와 가사봉사원간에는 서로 협동이 잘 되어 헌 옷가지를 재생하여 고아원이나 양로원으로 전달할 때 저는 어머니회원들과 도시새마을운동 이란 바로 이런 데에 있다는 것을 함께 느끼게 되었습니다.
소득증대사업에 대하여 말씀 드리면 한 가사봉사원이 월 소득이 22,000원이 되고 평균 20일간 가사봉사원으로 종사한 후 나머지 8일간 폐품활용하기, 봉투 붙이기, 수공예품 등을 하여 수입 되는 것이 월 40,000원 정도로 이들 가사봉사원의 연간 총소득은 30만원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가사봉사원으로 봉사하는 정회원들의 75년도 총소득이 일천팔백만 원이란 엄청난 금액이 되었을 때, 한 마을 주부들의 협동 된 힘이 얼마나 크며 또한 가정적으로 볼 때 가계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을 마을 주부들은 크게 깨닫고, 주위에서 새마을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주부들에게도 참여의식을 일깨워 주는데 큰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저의 어머니회원 중 준회원들 즉 상류층 가정주부들의 여가선용에 있어서도 건전노래 부르기 운동 등을 전개하여 이들이 『송미 어머니 합창단』을 조직하여 전국 새마을 국민예술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획득하였으며, 서울특별시 시범합창단으로 선정되어 시민 합동졸업식 매월 1일마다 축가를 불러주는 일을 맡아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온 마을 주부들이 협동을 잘하고 있으며, 76년도에는 마을회관을 마련하고 공동작업장을 건립하여 주민 소득을 확대하여 갈 계획을 세우고 이것을 실현하는데 매진하고자 합니다.
이웃끼리 서로 협동하고 단결해서 나도 잘 살고, 우리 이웃도 잘 살고, 우리 고장이 모두 다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자조 자립의 정신, 이것이 즉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정신입니다.
- 1975.12.10 박대통령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유시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