氏族의 연원 | | ■연안차씨(延安車氏)의 연원(淵源)
연안차씨(延安車氏)의 원조(元祖)는 중국황제(中國黃帝)인 헌원(軒轅)의 후손인 공갑(孔甲)의 동생 신갑(辛甲)께서 고조선(古朝鮮)으로 망명하여 평양(平壤)의 일토산하(一土山下)에 살면서 성(姓)을 왕씨(王氏)로 정하고 조명(祖明)이라 이름하고 단군조(檀君朝)에 치민장(治民長)을 하시였다.
그 후손인 왕수긍(王受兢)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원년기묘(元年己卯)에 기자(箕子)가 동쪽 땅에 와서 팔조교(八條敎)를 만들고자 하나 풍토가 달라 국내에서 현존자(賢尊者)를 얻고자 하니 백성들이 왕수긍(王受兢)을 천거하였다. 기자(箕子)는 공(公)을 교민사사(敎民士師)로 명하게 되였고 공은 팔조교(八條敎)를 만들어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니 기자(箕子)가 기뻐하였다. 공의 후손 왕몽(王蒙)은「일토초가자위왕(一土草家子爲王)」이란 비어(飛語)로 기준(箕準)의 박해를 당하니 이 수난을 피하여 일곱째 아들 왕림(王琳)을 대리고 지리산에 둔적하여 십여년을 피신하게 되였다. 어느 날 신이 나타나「너의 성인 왕자(王字)를 삼변(三變)하여 성을 정하면 자손이 난을 피하고 대창(大昌)하리라」하니 공은 왕자(王字)를 전자(田字)로 다시 신자(申字)로 다시 차자(車字)로 하여 차씨(車氏)로 성을 정하고 무(無)에서 다시 시작 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무일(無一)로 하고 아들 왕림(王琳)은 신(神)이 예시(豫示)한 두 번째라 신을(神乙)로 이름하고 지리산을 떠나 계림(鷄林 : 지금慶州)에 이거 하였다.
신라태조 혁거세(赫居世)는 계림에 도읍을 정할때 공은 신라태조를 섬겨 공훈을 세웠으며 태조께서 시중(侍中)으로 제수하고 차씨성(車氏姓)을 사성(賜姓)하니 차씨득성(車氏得姓) 시조일세(始祖一世)가 되었다.
득성시조 17세손 차제능(車濟能)은 미추왕조(味鄒王朝)에 승상(丞相)이요, 공의 16세손 차건갑(車建甲)은 소성왕조(昭聖王朝)의 원로승상(元老丞相)이다. 소성왕이 서거시(逝去時)에 친히 공에게 어린 태자를 보살펴 줄것을 부탁을 하였다.
그 후 태자가 12세에 즉위하시니 이분이 애장왕(哀莊王)이시다. 공은 왕의 보상(輔相)이 되여 왕을 보필하시고 나라에 대훈을 세우고 별세 하시니 왕이 만조백관에 하명하여 왕례(王禮)로 기장현(機張縣) 만화동(萬化洞)에 예장하고 공의 위패를 소성왕묘(昭聖王廟)에 배향하시니 공의 묘소를 차능(車陵)이라 칭하게 된 것이며 신라 42대 흥덕왕(興德王)은 차능이 있는 곳이라 기장현(機張縣)을 차성(車城)으로 개칭하니 이것이 기장현(機張縣)의 고호(古號)이다.
승상(丞相) 차건갑(車建甲)의 아들 차승색(車承穡)은 신라 애장왕(哀莊王) 10년 기축(己丑)에 좌상(左相)이 되여 선고의 유언에 따라 왕을 보필 하였으나 왕숙인 김언승(金彦昇)이 왕을 시해하고 자립 즉위하여 헌덕왕(憲德王)이라 칭하니 좌상(左相) 차승색(車承穡)은 아들 사공(司空) 차공숙(車恭叔)과 더불어 임금의 원수를 갚으려고 헌덕왕(憲德王)이 사냥 나감을 틈타서 다리 밑에 숨어서 시해 하고자 하였는데 이 비밀을 아는 자가 있어 언승(彦昇)에게 알려 언승이 병졸을 풀어 잡으려고 하니 공의 부자는 생질인 요동백(遼東伯) 김반전(金盤傳)의 아들 김생(金生)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이에 헌덕왕(憲德王)은 차승색(車承穡)을 체포하기 위하여 금 천근(千斤)과 식읍(食邑) 만호(萬戶)를 현상으로 내걸고 찾으니 김생(金生)이 가난하여 현상을 탐하여 외숙을 밀고 하고자 하니 김생(金生)의 종이 이것을 알고 공에게 알리니 공의 부자는 밤을 타서 몸을 피하여 황해도(黃海道) 유주(儒州) 구월산(九月山) 묵방동(墨坊洞)에 은거하여 조모성인 양씨(楊氏)를 모칭(冒稱)하며 피신하였다.
그 후에 모칭한 양씨(楊氏)는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꾸어 모성류씨(冒姓柳氏)로 하고 이름은 백(栢)으로 개명하고 아들 공숙(恭叔)은 숙(淑)으로 개명(改名)하여 유주(儒州)의 부두가(富荳家)에 고용살이를 하면서 피신을 하였다. 한편 차공숙(車恭叔)의 동생 신라조 사공(司空) 차공도(車恭道)는 강남으로 피신 구성왕씨(舊姓王氏)로 복성 하였는데 이분이 고려 왕건태조(王建太祖)의 증조요 고려국조 원덕대왕(元德大王)이시며 개성 왕씨의 시조이시다. (開城王氏族譜參照) 왕건태조(王建太祖) 정남(征南 : 後百濟征伐)하시니 본성차씨(本姓車氏)를 감추고 모성(冒姓)을 사용하는류해(柳海 : 사호(賜號) 차달(車達)은 삼한(三韓)의 호부(豪富)라 왕건태조를 도와 대훈을 세우니 고려태조는 차씨(車氏)의 묘예(苗裔)라 모성류씨(冒姓柳氏)를 사용한 류백(柳栢)으로 부터 류해(柳海)까지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성토록 명하여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다시 환성(還姓)하여 성명(姓名)은 차해(車海)이며 왕건태조(王建太祖)로부터 받은 사호(賜號) 차달(車達)의 뜻은 「차씨(車氏)를 전(傳)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복성(復姓)을 뜻하는 것이다.
조선조에서 왕명으로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께서 찬술(撰述)한 운암선생(雲巖先生) 설원기(雪寃記)와 고려조 내사(內史) 서희(徐熙)가 찬집(撰集)한 가사(家史) 정지상(鄭知常)이 찬술(撰述)한 서경야사(西京野史) 김방경(金方慶)이 기술한 초당일기(草堂日記)등에 의하면 차달(車達)은 려실(麗室)에 장정(壯丁)을 나날이 보내어 주고 공의 큰아들 차효전(車孝全)은 왕사에 어려움을 당하여 흥원(興原) 땅에 백성을 속곡(粟穀)으로 진대(賑貸)하여 백성을 구휼(救恤)하고 현릉(顯陵 : 高麗始祖의 墓號)과 종사(宗社 : 宗廟社稷)를 정할 때 공훈을 세우고 려태조(麗太祖)가 남정(南征 : 後百濟征伐)을 할 때에 수례를 판출(辦出)하여 계량(繼粮)을 실어서 향궤(餉饋)로 운반하였다. 려태조(麗太祖)는 특별히 공의 아버지에게 차씨세적(車氏世績)을 이어라고 차달(車達)로 사호하고 특별히 차씨(車氏)로 하라 한것은 아들 차효전(車孝全)의 수공(首功)을 들내는 성(姓)으로 분부(分付)를 하였다. 개국공신(開國功臣)을 책록(策錄)하던 날에 차달(車達)에게 대승(大丞)을 제수하여 통합삼한(統合三韓) 벽상이등공신(碧上二等功臣)에 봉록하고 특명으로「念昔車氏之弘烈은 旣不可忘也요 這間柳氏之冒稱은 又不可廢也라」하였다. 이 말은 려태조는 차달(車達)에게 특별히 명하여 가로되「옛 차씨(車氏)를 생각하면 원래의 홍열(弘烈)을 가히 잊을 수 없고 그간 류씨(柳氏)로 거짓 불러온것을 또 폐함도 가하지 못함이라」하면서 큰아들 차효전(車孝全)은 차씨(車氏)로 조상의 홍열(弘烈)을 승계하라 하고 개국의 수공자로 신숭겸(申崇謙)과 복지겸(卜智謙)과 더불어 일등공신(一等功臣)에 배열하여 대광(大匡)의 벼슬을 제수하였고 백작(伯爵)을 봉하여 식읍천호(食邑千戶)를 염주(鹽州)로 하사하니 이곳이 차씨(車氏)의 종적지(宗籍地)로 되고 대광지백(大匡之伯)차효전(車孝全)은 비로소 득관조(得貫祖) 일세(一世)가 되었다. 그 후 려조 23대 고종왕(高宗王)이 거란병 방어에 공있는 곳이라 영응현(永膺縣)으로 승격하고 이 고을 사람 차송우(車松祐)가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됨으로 이곳에 지복주사(知復州事)로 승격되었고 려조 24대 원종왕(元宗王)이 또 이분희(李汾禧)가 위사공신이 되니 이곳을 석주(碩州)로 고치고 또 고려조 25대 충열왕(忠烈王)이 즉위(卽位)하여 현명(縣名)을 승격(陞格)하여 온주목(溫州牧)으로 한 것을 고려조 26대 충선왕(忠宣王)이 목(牧)은 사치(奢侈)하다 하여 부(府)로 나추워 연안부(延安府)로 개칭(改稱)하였다.
이에 차씨의 종적명(宗籍名)을 연안(延安)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31대 공민왕조(恭愍王朝)에서 고려초(高麗初)에 원나라 제도(制度)를 도입(導入)하여 귀족(貴族)에게 내리든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이란 작위(爵位)의 품계명(品階名)을 통합하여 군(君)의 제도(制度)로 개정(改定)을 하였기에 이때부터 차씨(車氏)의 득관조(得貫祖)이신 대광지백(大匡之伯) 차효전(車孝全)을 연안군(延安君)으로 칭존(稱尊)하여 오늘날 까지 연안(延安) 차씨(車氏)로 전승(傳承) 된 것 이다.
대승공(大承公)의 작은 아들 효금(孝金)은 고려태조(高麗太祖)가 성을 류씨로 명사(命賜)하니 비로서 류씨의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되였으며 이로부터 형제분이 차씨와 류씨로 분성(分姓)하게 된 것이다.
차문은 신라 고려조에 수많은 문무장상(文武將相) 이 대(代)를 이어 배출된 명문이다. 고려 공민왕(恭民王) 때에 군부판서(軍簿判書) 차포온(車蒲溫) 용산군(龍山君)은 려조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때에 국방 및 외교로 뛰어난 활약을 하신 려조의 명신(名臣)이며 차문의 현조이시다. 또 불의에 굴하지 않았던 려말의 성리학의 대가이시며 려조 간의대부(諫議大夫)이신 운암공(雲巖公) 차원부(車原頫)께서 조선개국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와 하륜(河崙)등 사얼(四孼)들의 모략으로 억울하게 추살(椎殺) 되시고 차씨 일족은 적족지화(赤族之禍)를 당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태조(李太祖)의 질책(質責)으로 태종이 잘못을 뉘우치고 공의 영혼을 위로하는 치제(致祭)를 명하고 아울러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추증하고 그 후 세종대왕(世宗大王)이 문절(文節)이란 시호를 내리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가증하였다. 다행히 단종(端宗)의 명으로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외 5인의 기문(記文)과 유신석학(儒臣碩學) 44인(河緯地,朴彭年,崔恒,申叔舟,成三問,李石亨,柳誠源,姜希顔,兪鎭,姜孟卿,鄭麟趾,李禮長,李塏,權擥,李克培,李克堪,李克增,李克均,李陸,梁誠之,盧思愼,黃守身,金國光,尹弼商,魚世謙,李季甸,洪應,徐居正,權攀李怒長,尹子雲,韓確,姜希孟,具致寬,鄭昌孫,元孝然,李叔瑊,沈澮,韓繼禧,朴元亨,洪澾孫,李諴長,李叔琦,尹士勻)의 응제시(應製詩)를 모아 세조(世祖) 2년에 예조참판(禮曹參判)의 하위지(河緯地)가 서문을 지어 차운암선생(車雲巖先生) 설원기(雪寃記)를 만들어 세조에 받치니 이에 억울한 사실이 소명은 되였으나 차씨의 수난은 계속 되였다. 세조 13년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해 공을 세우고 순절하신 강열공(剛烈公) 차운혁(車云革) 임진난(壬辰亂)에 평양성(平壤城)의 로포문(露布文)으로 명나라를 놀라게 한 천하문장(天下文章) 오산공(五山公) 차천로(車天輅) 또 임진난에 창의(倡義)하여 왜적을 물리친 삼의사(三義士) 차응인(車應麟) 차덕도(車德道) 차덕홍(車德弘)등과 같은 명조현조님들이 많이계셨다.
근대에는 포우단(砲牛團)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하신 차도선(車道善) 대동공보(大同共報)를 창간하여 독립운동을 하신 차석보(車錫甫)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큰 활약을 하신 차이석(車利錫) 등의 많은 독립유공자에게 정부 건국훈장이 수여 되였으며 이러한 분들이 차문을 빛내었으며 차씨 문중은 절개 굳은 혈통으로 충효공의열사(忠孝功義烈士)가 유달리 많은 문중이며 삼한의 갑족다운 긍지를 잃지 않고 자자손손이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본관지 연혁 | | ■차씨(車氏) 본관지(本貫地) 연안부(延安府)의 연혁
연안부(延安府)는 본래 고조선의 땅이다, 한무제(漢武帝)때는 낙랑군(樂郞郡)에 속하였으며 그후에 대방군(大方郡)에 속하였고 고구려에서는 동음홀(冬音忽)이라 하였으며 후에 고염성(鼓鹽城)으로 고쳤고 신라에서는 해고군(海皐郡)인데 한주도독부(漢州都督府)에 분속(分屬)하고 고려초에 염주(鹽州)로 칭하였으며 고려 성종(成宗)은 방어사(防禦使)를 두어서 패서도(浿西道)에 분속(分屬)하였고 고려 현종(顯宗)은 방어사(防禦使)를 폐하여 해주(海州)에 속(屬)하게 하였으며 후에 감무(監務)를 두어 서해도(西海道)에 분속(分屬)하였다. 고려 고종(高宗)은 거란병(契丹兵)을 막은 공(功)이 있는 곳이라 영응현(永膺縣)으로 승격(陞格)을 시키고 후에 고을 사람 차송우(車松祐)는 위사(衛社)의 공(功)이 있으므로 지복주사(知復州事)로 올리고 고려 원종(元宗)은 또 이분희(李汾禧)가 위사(衛社)의 공(功)이 있어 석주(碩州)로 고쳐 승격하고 고려 충렬왕(忠烈王)은 또 온주목(溫州牧)으로 승격을 하였고 그 후에 고려 충선왕(忠宣王)은 사치(奢侈)한 모든 목(牧)을 부(府)로 나추라 하여 연안부(延安府)로 개칭(改稱)하니 이때부터 차씨(車氏)의 관적명(貫籍名)을 연안(延安)으로 개칭(改稱)하였고 조선 태종(太宗) 4년에 풍해도(豊海道)에 분속(分屬)하였고 태종(太宗) 13년에 황해도(黃海道)에 분속(分屬)하여 도호부(都護府)를 두었다.
1895년 조선 고종(高宗) 32년 을미(乙未)에 연안군(延安郡)이 되었고, 1914년 왜정(倭政) 5년 갑인(甲寅)에 배천군(白川郡)을 합하고 평산군(平山郡)의 일부를 편입(編入)하여 연백군(延白郡)이 되었다.
이곳에 사는 주요 성씨(姓氏)로는 차(車),고(高),김(金),선(單),류(柳),유(劉),이(李)은(殷),송(宋),인(印),전(田),명(明),씨 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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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명록 | | ■차씨종문(車氏宗門)의 근원(根原) 분파(分派)의 명칭록(名稱錄)
차씨(車氏)는 고려 말기(末期)에 자손(子孫)이 번연(繁衍(하여 장손계(長孫系)인 고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군부판서(軍簿判書) 용산군(龍山君)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지도첨의(知都僉議) 동경유수(東京留守) 동중서좌평장사(同中書左平章事) 시호(諡號) 문목공(文穆公) 차포온(車蒲溫)의 장자(長子)인 고려조(高麗朝) 정당문학(政堂文學) 차수동(車壽童)을 파조(派祖)로 한 문학공파(文學公派), 또 문목공(文穆公)의 차자(次子)고려조(高麗朝) 전서(典書) 차명동(車命童)을 파조(派祖)로 한 전서공파(典書公派), 문목공(文穆公)의 삼자(三子)인 월파옹(月波翁) 지방어사(知防禦使) 차종로(車宗老)는 갑자기 권신(權臣)과 간신(奸臣)들의 거슬러 함을 보고 벼슬을 사직하고 둔적(遯迹)하여 처사(處士)로 삶을 마진 월파옹(月波翁)을 파조(派祖)로 한 월파공파(月波公派), 문목공(文穆公)의 사자(四子) 고려조(高麗朝) 상장군(上將軍) 차안로(車安老)를 파조(派祖)로 한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고려 고종조(高宗朝)에훈로(勳老)인위사공신(衛社功臣) 동력보좌(同力輔佐) 대장군(大將軍) 시호(諡號) 세은공(世恩公) 차송우(車松祐)의 차자(次子) 고려조(高麗朝) 중랑장(中郞將) 송림백(松林伯) 광주병마사(廣州兵馬使) 차덕규(車德珪)를 파조(派祖)로 한 지손게(枝孫系) 송림백공파(松林伯公派)와 조선조(朝鮮朝)에서 시호(諡號)를 받으신 고려조(高麗朝) 간의대부(諫議大夫)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 겸 지국평장사(知國平章事) 조선조(朝鮮朝) 증(贈)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가증(加贈) 문하시중(門下侍中)호(號)운암(雲巖) 사시(賜諡) 문절공(文節公) 차원부(車原頫)를 파조(派祖)로 한 문절공파(文節公派)와 조선 세조조(世祖朝)에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에 순절(殉節)하신 출기포의적개공신(出氣布義敵愾功臣) 증(贈) 병조참판(兵曺參判) 봉(封) 연천군(延川君) 사시(賜諡) 강렬공(剛烈公) 차운혁(車云革)을 파조(派祖)로 한 강렬공파(剛烈公派), 임진난시(壬辰亂時) 에 명나라 도독(都督) 이여송(李如松 )의 평양성(平壤城) 탈환(奪還)에 승전공적(勝戰功積)에 대한 찬양(贊揚)의 로포문(露布文)을 찬(撰)하여 명나라에 명성(名聲)을 뜰친 천하문장(天下文章) 오산공(五山公) 차천로(車天輅)를 파조(派祖)로 한 오산공파(五山公派)등으로 크게 팔개분파(八介分派)로 오늘날 까지 전승(傳承)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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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세거지 | | ■주요 세거지(世居地)의 변천(變遷)
연안차씨(延安車氏)의 상계(上系)는 관향(貫鄕)인 연안(延安)에 살았던 것 같다, 16세 차송우(車松祐)의 대(代) 이래(以來)로 장단(長湍)등지에 차씨(車氏)의 묘영(墓塋)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무렵부터 당시의 수도 개성(開城)을 중심으로 경기 지역에 옮겨 살았다고 믿어진다, 이후 차송우(車松祐)의 현손(玄孫)인 운암(雲巖) 문절공(文節公) 차원부(車原頫)의 대(代)에 이르러 문중(門中)의 사얼(四孼)인 정도전(鄭道傳),함부림(咸傅霖), 조영규(趙英珪),하륜(河崙)등이 태종(太宗)에게 무고(誣告)로 왕자난에 련루(連累)시켜서 가문(家門)에 적족지피화(赤族之被禍)로 가문자손(家門子孫)이 산지사방(散之四方)으로 세거(世居)하게 된 것이다.
운암공 사자(嗣子) 차안경(車安卿)은 자액(自縊)을 하였고 그 아들 차상도(車尙道)는 사얼지여화(四孼之餘禍)가 두려워 경북(慶北) 순흥(順興)으로 둔적(遁迹), 그 아들 차계생(車繼生), 차중생(車仲生)이 살다가 차계생(車繼生)의 아들 차경복(車敬輹),차경철(車敬轍)등 형제는 호남(湖南) 승평(昇平;只今順天)으로 이거(移居), 그 후손(後孫)은 전라도(全羅道) 광주(光州),정읍(井邑),남원(南原),려수(麗水),해남(海南),장성(長城), 경상도(慶尙道)하동(河東),남해(南海), 통영(統營),고성(固城),산청(山淸),함양(咸陽) 거창(居昌)에 집성존(集姓村)을 이루고 있으며 차상도(車尙道)의 차자(次子) 차중생(車中生)의 후손(後孫)은 충남(忠南) 서천(舒川), 경기도(慶畿道) 수원(水原), 평택(平澤) 경남(慶南)울산(蔚山) 부산(釜山)등지에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차상도(車尙道)의삼자(三子) 차중련(車仲連)의 후손(後孫)은 충남(忠南)례산(禮山) 전북(全北) 익산(益山)에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었고 문학공파(文學公派) 차수동(車壽童)의 후손인 차륜(車輪)이 선천(宣川) 은거(隱居)로 정착(定着))을 하였고 일부는 강서(江西)에 살고 20세 차숭부(車崇頫)의 후손은 안주(安州),박암(博巖),장진(長津),평양(平壤),태천(泰川),증산(甑山)등지에 살았고 차숭질(車崇質)의 후손(後孫)은 개천(价川),평원(平原), 남중(南中)으로 유배된 차명동(車命童)의 후손(後孫)은 숙천(肅川)에 정착하게 되었다, 또한 차원명(車原命)의 후손(後孫)인 차은규(車殷軴)의 이래로 평양(平壤)등지에 살았다. 20세 차견질(車堅質)의 맏아들 차안기(車安耆)는 두 아들과 함게 영변(寧邊)으로 유배(流配)된 후에 그 후손이 영변(寧邊)에 세거(世居)를 하였고 차견질(車堅質)의 차자(次子) 차운혁(車云革)의 후손(後孫)은 구성(龜城), 영흥(永興), 정평(定平)등지에 살다가 대체로27세 차응우(車應雨)의 대(代)부터 김천(金川), 강화(江華), 화성(華城), 남양(南陽), 수원(水原)등지와 현풍(玄風), 울산(蔚山), 칠곡(漆谷), 봉화(奉化), 합천(陜川), 창원(昌原), 함안(咸安), 경주(慶州), 영일(迎日), 흥해(興海)등지에 산거(散居)해 갔다, 그밖에 당진(唐津), 김해(金海), 진주(晋州), 서산(瑞山)에도 자손들이 살게 되어 경상도와 충청도 일대를 세거지로 삼게 되었다.그리고 차견명(車堅命)의 자손들은 중화(中和), 서흥(瑞興), 순천(順川)등지에 많이 살았던 것 같다. 그리하여 1930년경에 이르러 연안차씨(延安車氏)의 자손들은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唐津郡 大湖芝面), 전남 승주군 별량면(昇州郡 別良面) 경남 합천군 덕곡면 청덕면(陜川郡 靑德面,德谷面 황해도 연백군 운산면(延白郡 雲山面) 송화군 연방면(松禾郡 蓮芳面), 서흥군 매양면(瑞興郡 梅楊面), 평남 대동군 용산면(大同郡 龍山面) 순천군 밀전면 풍산면(順天郡 密田面 豊山面), 용강군 금곡면(龍岡郡 金谷面), 강서군 증산면(江西郡甑山面), 평원군 덕산면,동송면(平原郡 德山面,東松面), 안주군 연호면(安州郡 燕湖面) 평북 구성군 구성면 동산면 오령면(龜城郡 龜城面,東山面,五嶺面), 선천군 영청면(宣川郡 永淸面)등지에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있었다. |
씨족史 | | ■세족사 연안차씨(延安車氏)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칠 때 본성차씨(本姓車氏)를 감추고 모성(冒姓)의 류해(柳海)로 살면서 삼한(三韓)의 호부(豪富)로 려실(麗室)에 장정(壯丁)을 모집하여 보내 주고 공(公)의 큰 아들 휘(諱) 효전(孝全)은 왕사(王事)에 어려움을 당 하였을때 흥원(興原;구월산주변 지명)의백성을 속곡(粟穀)으로 진대(賑貸)하여 구휼(救恤)하고 현릉(顯陵;원덕대왕 墓號)과 정사(定社;종묘사직(宗廟社稷)임)에 공훈을 세우고 나라를 위하여 수레를 판출(辦出;구하여 갖추어 냄)하여 계량(繼粮;한해 농사지은 곡식으로 일년 먹을 량식을 이어줌)을 실어서 후백제 정벌(征伐)에 향궤(餉饋;軍糧)로 운송(運送)을 하니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큰아들효전(孝全)의 공훈(功勳)으로 그 아버지에게 특별히 차씨(車氏)를 전(傳)하고 대대로 세(世)를 이어라고 차달(車達)로 호(號)를 내리고 계통(系統)을 차씨(車氏)로 분부(分付)한 것은 효전(孝全)의 수공(首功)을 성(姓)으로 나타내어 다시 본성차씨(本姓車氏)로 환성(還姓)하고 삼한통합 (三韓統合) 익찬벽상이등공신(翊贊壁上二等功臣)에 봉록(封祿)하여 대승(大丞)을 제수(除授)하였고 본성치씨(本姓車氏)로 복성(復姓)한 사호(賜號) 차달(車達) 차해(車海)의 사자(嗣子) 차효전(車孝全)은 개국(開國)의 수공자(首功者)로 고려개국(高麗開國) 정사일등공신(定社一等功臣)으로 봉(封)하고 벼슬 대광(大匡)을 제수(除授)하여 귀족(貴族)의 품계(品階) 백작(伯爵)을 봉(封)하여 식읍천호(食邑千戶)를 염주(鹽州)로 하사(下賜)하니 그 후손들은 이곳을 관향지(貫鄕地)로 하고 신라조(新羅朝) 41대 헌덕왕(憲德王)을 죽이고 왕실(王室)의 질서를 바로 잡아 애장왕(哀莊王)의 원수를 갚을려다 실패(失敗)하여 몰락(沒落)한 가문(家門)을 다시 일어킨 중시조(中始祖)인 득관조(得貫祖)로 하여 비로소 관향(貫鄕)을 사용(使用)한 것이다,
관적지(貫籍地)인 이곳 염주현(鹽州縣)이 여러번 변천(變遷)하여 고려조(高麗朝) 26대 충선왕(忠宣王)이 연안부(延安府)로 개칭(改稱)한 이후(以後)에 관적명(貫籍名)을 연안(延安)으로 개칭(改稱)하여 연안차씨(延安車氏)라 하며 득관조(得貫祖) 차효전(車孝全)을 연안군(延安君)이라 함은 고려 공민왕조(恭愍王朝) 때에 고려초기에 귀족(貴族)의 품계(品階)의 명칭(名稱)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제도(制度)를 통합(統合)하여 군(君)의 제도(制度)로 개정(改定)함에 의거(依據)하여 연안군(延安君)으로 칭(稱)하여 연안차씨(延安車氏)의 득관조(得貫祖) 일세(一世)로 하고 오늘날 까지계승(系承)하고 있다.
사호(賜號) 차달(車達) 성명(姓名) 차해(車海)는 신라초(新羅初)에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섬긴 공(功)으로 시중(侍中)이 되어 차씨(車氏)로 사성(賜姓)을 받은 득성시조(得姓始祖) 차무일(車無一)의 38세 손자(孫子)이며 애장왕조(哀莊王祖) 10년 기축년(己丑年)에 좌상(左相)을 하신 32세 차승색(車承穡)은 애장왕(哀莊王)을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헌덕왕(憲德王)인 김언승(金彦昇)을 암살(暗殺)하려다가 실패(失敗), 이에 아들 차공숙(車恭叔)과 함께 김언승(金彦昇)을 피하여 황해도(黃海道) 유주현(儒州縣) 구월산(九月山) 아래 묵방동(墨坊洞)으로 둔적(遁迹) 조모(祖母)의 성(姓)인 양씨(양氏)를 모칭(冒稱)하다가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꾸어 모성(冒姓=假姓)인 류씨(柳氏)로 하고 이름은 백(栢)으로 개명(改名)하고 그 아들 차공숙(車恭叔)은개명(改名) 숙(淑)으로 한 분의 현손(玄孫)이다.
한편 신라조(新羅朝) 좌상(左相) 차승색(車承穡)의 차자(次子) 신라조(新羅朝) 사공(司空) 차공도(車恭道)는 강남도(江南道;지금平南)로 피신(避身)하여 옛 성씨왕(姓氏王)으로 복성(復姓)하여 개성명(改姓名)을 왕공도(王恭道)라 하였는데 이분이 왕건태조의 증조(曾祖)이며 고려국조(高麗國祖) 원덕대왕(元德大王)이며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시조(始祖)이시다(開城王氏 族譜 參照) 대승공(大丞公) 차해(車海)의 큰 아들 차효전(車孝全)은 고려 개국의 수공(首功)으로 려태조(麗太祖)는 승음수봉지일(承蔭受封之日)에 대승공(大丞公) 사호(車達) 차해(車海)에게 특명(特命)으로 옛 차씨(車氏)를 생각하면 신라에 홍렬(弘烈;조상이 쌓은 공덕)을 있을수 없고 그간 류씨(柳氏)로 모칭(冒稱)한 것을 또 폐(廢)함도 불가(不可)하다 하고 그간 모성(冒姓)을 사용하신 6세는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성(復姓)하고 맏아들 차효전(車孝全)으로 조상(祖上)의 홍렬(弘烈)을 승계)(承繼)하고 차자(次子)는 모성(冒姓)인 류씨(柳氏)를 다시 모방(模倣)하여 왕명(王命)으로 사성(賜姓柳氏)하니 성명(姓名)을 류효금(柳孝金)이라 하고 비로소 차씨(車氏)에서 분성(分姓)하여 류씨(柳氏)로 창성(創姓)하여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득관조(得貫祖) 차효전(車孝全)은 고려개국의 수공자(首功者)로 개국정사일등공신(開國定社一等功臣)에 책록(策錄)하고 벼슬 대광(大匡)을 제수(除授)하고 귀족(貴族)의 품계(品階)인 백작(伯爵)에 봉위(封位)하여 식읍천호(食邑千戶)를 염주현(鹽州縣)으로 하사(下賜)를 하니 이곳에 그후손이 세거(世居)하면서 종적지(宗籍地)로 계승(系承)을 하다가 이 고장(故場)이 변천(變遷)을 여러번 하여 왔으며 고려 26대 충선왕(忠宣王)은 이곳 온주목(溫州牧)은 사치(奢侈)하니 부(府)로 낮추라 하여 부(府)로 낮추어 연안부(延安府)로 개칭(改稱)하니 차씨(車氏)는 관적명(貫籍名)을 고쳐 연안차씨(延安車氏)라 하였고 고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이르러 고려초(高麗初)에 사용한 귀족품계(貴族品階)의 명칭(名稱)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의 제도(制度)를 통합(統合)하여 군(君)의 제도(制度)로 개정(改定)하여서 득관조(得貫祖) 차효전(車孝全)의 작위칭호(爵位稱號)를 연안군(延安君)으로 하게 된 것이다.
연안차씨(延安車氏)는 신라를 걸쳐 고려에 많은 문무장상(文武將相)을 배출(輩出)한 잠영(簪纓)의 대성문벌(大姓門閥)이었다. 그러나 역성혁명(易姓革命)에 의한 조선조초(朝鮮朝初)에 권신(權臣)인 정도전(鄭道傳),함부림(咸傅霖),조영규(趙英珪),하륜(河崙)등은 차씨문중(車氏門中)의 외얼(外孼)들이다 이 사얼(四孼)은 적계(嫡系)인 차씨(車氏)의 문벌(門閥)을 시기(猜忌)하여 멸문(滅門)의 음모(陰謀)를 하였고 특히 하륜(河崙)은 태종(太宗=芳遠)에게 무고(誣告)로 왕자난(王子亂)에 련루(連累)시켜 역적누명(逆賊陋名)으로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이신 운암(雲巖) 문절공(文節公) 차원부(車原頫)와 친족(親族) 70여인(餘人)을 추살(椎殺)하고 적족지피화(赤族之被禍)와 류배(流配)로 산지사방(散之四方)으로 둔적(遁迹)하였고 하륜(河崙)은 지은 죄과(罪過)를 은폐(隱蔽)하기 위하여 차씨(車氏)의 근원(根源)의 맥(脈)을 제거*除去)의 목적으로 차씨(車氏)에 관한 국사판(國史版)을 전삭날조(擅削捏造)하고 차씨보판(車氏譜板) 및 문헌(文獻)을 분탕(焚,蕩)으로 고려(高麗)의 갑족(甲族)이 서인(庶人)으로 전락(轉落)을 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차씨(車氏)의 후손들은 사방으로 흩어저 몰락의 길을 가게 되었다고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선생이 기술(記述)한 차운암선생(車雲巖先生) 설원기(雪寃記)에 기록하고 있다.
연안차씨(延安車氏)의 분파(分派)는 고려 고종조에 위사공신(衛社功臣)이며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16세 세은공(世恩公) 차송우(車松祐)의 아들 대(代)에서 나누어진다 맏아들 도총제(都總制) 차득규(車得珪)의 아들 좌상(左相) 문목공(文穆公) 차포온(車蒲溫)의 아들 대(代)에서 4파로 나누어지는데. 정당문학(政堂文學) 차수동(車壽童)의 후손이 문학공파(文學公派), 전서(典書) 차명동(車命童)의 후손이 전서공파(典書公派), 지방어사(知防禦使) 월파옹(月波翁) 차종로(車宗老)의 후손이 월파공파(月波公派), 상장군(上將軍) 차안로(車安老)의 후손이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이며, 조선조에 와서 증직(贈職)과 시호(諡號)를 받은 현조(顯祖)로 월파옹(月波翁) 차종로(車宗老)의 셋째아들 운암(雲巖) 문절공(文節公) 차원부(車原頫)의 후손이 문절공파(文節公派), 상장군(上將軍) 차안로(車安老)의 차손(次孫) 연천군(延川君) 강렬공(剛烈公) 차운혁(車云革)의 후손이 강렬공파(剛烈公派), 운암(雲巖) 문절공(文節公) 차원부(車原頫)의 8세 지손(支孫) 천하문장(天下文章) 오산공(五山公) 차천로(車天輅)의 후손이 오산공파(五山公派)라 하고 또 16세 위사공신(衛社功臣) 대장군(大將軍) 세은공(世恩公) 차송우(車松祐)의 차자(次子) 고려조 중랑장(中郞將) 송림백(松林伯) 광주병마사(廣州兵馬使) 차덕규(車德珪)의 후손이 송림백공파(松林伯公派)라 하여 모두 8파로 분파(分派) 된 것이다.
득관조(得貫祖)의 2세 차수비(車秀毗)는 태보(太保)였고 3세 차계린(車季隣)은 광평시랑(廣平侍郞)을 지냈다, 10세 차중규(車仲規)는 명종조에 병마사(兵馬使), 삼한대장군(三韓大將軍)을 역임하고 조위총(趙位寵)이 서경(西京)에서 반란을 하였을 때 연주(延州)에서 죽음을 당 하고 창원최씨(昌原崔氏) 최윤청(崔有淸)의 딸과 혼인하였고 공의 아들 차거수(車擧首)는 직사관(直史館), 태복시사(太僕侍事)를 지냈는데 남평문씨(南平文氏)의 문극겸(文克謙)의 딸과 혼인, 12세 차약춘(車若椿)은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지냈고 파평윤씨(坡平尹氏)의 윤인첨(尹鱗瞻)의 딸과 혼인,그의 아들 차덕위(車德威)는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로 양천허씨(陽川許氏)의 허승(許升)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이상의 4대(代)를 통한 혼인관계를 살펴보면 차씨가문(車氏家門)은 고려중기의 대표적인 명족(名族)과 혼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통혼권이 매우 한정되어 있던 당시였으므로 연안차씨(延安車氏)의 위치(位置)를 미루어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세력은 고려말까지 계속 되었다. 차약송은 고려조 명종 16년에 장군(將軍)이 되었다. 그는 무인(武人)으로 그 당시는 무인집권(武人執權)의 시대(時代)였으므로 무인(武人)이 문무직(文武職)을 겸하였고 문하시랑(文下侍郞) 동중서평장사(同中書平章事)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14세 차척(車倜)은 고려조 고종 3년 거란군이 서북면으로 래침(來侵)할 때 좌승선(左承宣)으로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가 되어 출전(出戰)하였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어사대부(御史大夫)를 거쳐 참정(參政)에 이르렀다, 공(公)의 재종제(再從弟) 차신(車信)은 원(元)나라에 가서 살다가 제국공주(齊國公主)가 충렬왕과 결혼하여 고려로 돌아올때 따라와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그 뒤에 찬성(贊成)을 거쳐 검교사도(檢校司徒)에 이르렀다, 차씨(車氏)의 득관조(得貫祖)가 식읍천호(食邑千戶)를 하사(下賜)받아 후손이 종적지로 한 염주현(鹽州縣)은 고려조 고종 때 거란병(契丹兵)을 막은 공(功)있는 고장이라 영응현(永膺縣)으로 승격(陞格)하였고 16세 차송우(車松祐)는 고려조 고종 45년에 류경(柳璥), 김인준(金仁俊)등과 함께 강화도(江華島)에서 최씨무인정권(崔氏武人政權)의 마지막 집권자(執權者) 최의(崔竩)를 죽이고 정권(政權)을 왕실(王室)에 돌려 그 공(功)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니 이곳의 지복주사(知復州事)로 승격(蠅格)되어 차문(車文)의 영화(榮華)는 계속 되었다, 고려조 원종(元宗) 3년 미륵사(彌勒寺) 의 공신당(功臣堂)에 도형벽상(圖形壁上)을 하였다. 공(公)의 맏아들 17세 도총제(都總制) 차득규(車得珪)는 고려조 충렬왕(忠烈王) 4년 내료(內僚=內臣;고려 때액정국(掖庭局)의 벼슬), 내시원(內侍院)의 구전(口傳)에 의한 국고고갈(國庫枯渴)이 문제 되었을 때 그들에 의한 폐단(弊端)을 막도록 별감(別監)에 임명되었다, 일찍이 충렬왕(忠烈王)을 원(元)에서 호종(扈從) 하였으므로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되어 토지와 노비(奴婢)를 하사(下賜) 받았다. 공의 동생 차덕규(車德珪)는 중랑장(中郞將)을 거쳐 광주병마사(廣州兵馬使)를 지내고 송림백(松林伯)에 봉해 졌고 지파(支派)인 송림백공파(松林伯公派) 파조(派祖)이다. 도총제(都總制) 차득규(車得珪)의 맏아들 차포온(車蒲溫)은 공민왕(恭愍王)이 원도(元都)에 있을 때 시종(侍從)한 신하였다, 공민왕(恭愍王) 1년에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로서 일등공신(一等恭臣)이 되었고 이어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올라 용산군(龍山君)에 봉해졌고 고려가 원(元)과 적대관계(敵對關係)에 들어가기 전(前) 두차레나 원(元)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원제(元帝)가 하사(下賜)한 왕의(王衣),어주(御酒)를 가지고 돌아왔다 뒤에 밀직부사(密直副使), 지도첨의(知都僉議), 동경유수(東京留守), 좌상(左相)이 되었고 사시(賜諡)는 문목공(文穆公)이다.
문목공(文穆公) 차포온(車蒲溫)의 맏아들 정당문학(政堂門學) 차수동(車壽童)은 문학공파(文學公派)의 파조(派祖), 둘째 아들 전서(典書) 차명동(車命童)은 전서공파(典書公派)의 파조(派祖), 셋째아들 지방어사(知防禦使)로 계시면서 권,간신(權,奸臣)의 오역(忤逆)함을 보고 벼슬을 사직(辭職)하고 처사(處士)로 둔적(遁迹)한 월파옹(月波翁) 차종로(車宗老)는 월파공파(月波公派) 파조(派祖), 넷째아들 상장군(上將軍) 차안로(車安老)는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의 파조(派祖)로 하여 분파(分派)한 것은 이때에 자손이 번창하여 4파로 나누어5파로 계승(繼承)을 하게 된 것이다.
문목공(文穆公) 차포온(車蒲溫)의 서녀(庶女)가 하륜(河崙)의 외조모(外祖母)이며, 그의 종제(從弟)인 차공윤(車公胤)의 딸이 우연(禹淵)에게 시십갔는데 이 우연(禹淵)의 서녀(庶女)가 정도전(鄭道傳)의 어머니이고 또 차안도(車安道)의 딸이 최습(崔隰)에게 시집갔는데 최습(崔隰)의 딸이 정도전(鄭道傳)의 처(妻)이며 월파옹(月波翁) 차종로(車宗老)의 서자(庶子) 차원석(車原碩)의 딸이 조선개국(朝鮮開國)의 실세(實勢)인 함부림(咸傅霖)의 처(妻)이며,찬성(贊成) 차견질(車堅質)의 서녀(庶女)가 조선개국(朝鮮開國) 의 실세(實勢)인 조영규(趙英珪)의 처(妻),곧 연천군(延川君) 강렬공(剛烈公) 차운혁(車云革)의 서매부(庶妹夫)이다. 운암(雲巖) 문철공(文節公) 차원부(車原頫)는 공민왕(恭愍王) 13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 겸 지국평장사(知國平章事)를 지낸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이며 사군자(四君子)의 중에 매화(梅花)를 잘 그렸다고 한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문목공(文穆公) 차포온(車蒲溫)의 녀서(女婿)인 이약(李約)의 딸이 정몽주(鄭夢周)의 어머니이다. 또 운암(雲巖) 문절공(文節公) 차원부(車原頫)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야은(冶隱) 길재(吉再)등과 같이 이름을 나란히 하여 많은 제자(弟子)를 배출(輩出) 하였다. 우왕(禑王)의 말년에 고려의 기운이 기우는 것을 보고 평산(平山) 수운암동(水雲巖洞)에 퇴거(退去)해서 왕,차,류(王,車.柳)의 역사(歷史)를 정돈(整頓)하고 차류보판(車柳譜板)을 판각(板刻)하여 차류족보(車柳族譜)를 간행(刊行)하고 이 보판(譜板)을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에 소장(所藏)한 이것이 우리 나라 족보(族譜)의 효시(嚆矢)라 한다. 이때에 이성계(李成桂)는 최영(崔瑩)이 억지로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의 벼슬을 주워 료양(遼陽)을 공격(攻擊)을 청하여 죄어치니 이성계(李成桂)는 의주(義州)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러 밖으로 상국(上國=명나라)을 감히 범(犯)하지 못 하겠으며 안으로 임금의 명(命)을 어김도 감히 못 하여 진퇴유곡(進退維谷)이라 이성계(李成桂)는 위화도(威化島)에 군사를 쉬게하고 평산(平山)에 수렵(狩獵)을 빙자(憑藉)하고 평산(平山) 수운암동(水雲巖洞)에 찾아가 운암(雲巖) 차원부(車原頫)에 공료지책(攻遼之策)을 무르니 以外服犯中國一不可也요 以陪臣犯天子二不可也라 이 말은 속국(屬國)이 중국(中國)을 범(犯)함은 첫째 옳지 못 하고 제후(諸侯)가 천자(天子)를 범(犯)함이 두 번째 옳지 못 함이다, 이말에 이성계(李成桂)는 크게 깨닯고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의성(義聲)을 천하(天下)에 알리고 드디어 대업(大嶪)을 창건(創建)하여 만년종사(萬年宗社)를 잡았다. 그리고 개국(開國) 공훈(功勳)을 책록(策錄)하던 날 조준(趙俊), 이량우(李良佑)등이 운암(雲巖) 차원부(車原頫)에게 동참(同參)을 청하니 운암(雲巖) 차원부(車原頫)께서 대답(對答)해 가로데 고려를 개국한공신의 후예(後裔)로 선조대대(先祖代代)로 국록(國祿)을 받은 잠영(簪纓)의 후손(後孫)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精神)을 버리지 못하니 차라리 식초(食醋) 다섯말을 마시지 공훈(功勳) 선정(選定)에는 불참(不參)을 하겠다 하니 망복(罔僕)의 절의(節義)를 온전하게 한 뜻은 송산(松山) 조운흘(趙云仡)과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서로 같드라, 태조(太祖)는 나라를 세워 국본(國本)을 정할 때 운암(雲巖) 차원부(車原頫)를 불러 정언(正言)의 벼슬을 제수(除授)하니 받지 않아 다시 전농시사(典農寺事)를 제수(除授)하여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으니 그 시대(時代)의 사람들이 운암(雲巖) 차원부(車原頫)를 명옥청상(明玉淸霜)과 같다고 하드라, 이태조(李太祖)는 운암(雲巖) 차원부(車原頫)가 머물지 않고 귀향(歸鄕)할 것을 알고 세자(世子) 직위(職位)의 륜전책(輪傳策)을 무르니 불가(不可)하다 하고 시국(時國)이 태평(太平)할 때는 적실(嫡室)의 맏 아들을 먼저 택하며 세상(世上)이 어지러울 때는 공(功)이 있는 것을 먼저 택함이 실권(實權)에 마땅한 처변(處變)의 도리(道理)라 하고 이방원(李芳遠)이 개국에 공(功)있음을 말하니 태조(太祖) 크게 깨달아 륜전책(輪傳策)을 아니 하고 태종(太宗)을 내정(內定) 하게 한것이다. 그런데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선생이 기술(記述)하고 태허정(太虛亭) 최항(崔恒),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등이 주석(註釋)을 붙치고, 유신석학(儒臣碩學) 44인의 응제시(應製詩)등을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선생께서 수집(收集)하여 서문(序文)을 찬(撰)하여 편집(編輯)한 차운암선생 설원기(車雲巖先生 雪寃記)에 의하면 차류보판(車柳譜板)에 언급된 정도전,함부림,조영규,하륜등의 출생신분(出生身分)을 밝힌 서(庶)란 글자에 그들이 평소에 한스럽게 생각하였다 한다, 또한 그들은의주(義州) 위화도(威化島)의 회군(回軍)의 공로(功勞)를 세움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생각하여 이에 하륜(河崙)이 계책(計策)을 꾸며 태조7년 무인(戊寅)에 일차(一次) 왕자(王子)의 난으로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소생(蘇生)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과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을 제거(除去)하고 태조7년 무인(戊寅) 9월 15일에 막료(幕僚) 이숙번(李叔蕃)을 송마원(松麻原)에 보내어 운암(雲巖) 차원부(車原頫) 이하 차씨친족(車氏親族) 70여인(餘人)을 추살(椎殺)를 하고 동년(同年) 9월20일에 운암공(雲巖公)의 부인(婦人) 평산신씨(平山申氏) 또한 왕명불복죄(王命不服罪)의 누명(陋名)으로 피화(被禍)를 당 하였다. 그리고 국사판(國史版)에 기록된 차문사적(車門史蹟)을 천삭날조(擅削捏造)를 하여 차문근맥(車門根脈)을 끊고 강씨(康氏)와 차씨(車氏)의 명사(名仕)들은 여러 죄목(罪目)을 련루(連累) 시켜 유배(流配)를 보내거나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였다 그 후에 이 사실을 이태조(李太祖)가 알고 이방원(李芳遠)을 질책(質責)하여 태종(太宗) 이 잘못을 뉘우치고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을 추증(追贈)하고 원혼(寃魂)을 달내는 치제(致祭)를 명(命) 하고 그 아들 차안경(車安卿)과 손자(孫子) 차상도(車尙道)는 그 시대(時代)의 형량(賢良)으로 천거(薦擧)하여 칭송(稱頌)이 되었으나 다시 하륜(河崙)의 무리들의 모함이 있어 화(禍)가 두려워 고려조 중랑장(中郞將) 차안경(車安卿)은 자액(自縊)하고 고려조 진사(進士) 차상도(車尙道)는 정맹(睛盲)과 라면(癩面)으로 위장(僞裝)하고 청량동(淸凉洞=지금 청량리)에 은신(隱身)하여 이례장(李禮長)의 집에 기식(寄食)을 하다가 경상도(慶尙道) 순흥(順興=지금 영주)으로 둔적(遁迹)하여 앞날에 그 인척(姻戚) 조인옥(趙仁沃)과 조온(趙溫)등이 죄(罪)에 연루(連累)되어 그 화(禍)를 입어 고구(故舊)와 친척(親戚)이 길가는 행인(行人) 같이 보며 피난(避亂)가는 날 사람들이 모두 그 아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런고로 차상도(車尙道)는 그 아들 계생(繼生), 중생(仲生)을 조명(趙冥)의 가노(家奴)인 금석(金石)에게 감추어 숨어 살게하고 차상도(車尙道)는 어머니 성(姓)을 따라 변성명(變姓名) 임성부(林成富), 혹은 임선생(林善生)이라 하고 순흥(順興)에 사는 재인(才人=백정) 이종실(李宗實)의 집에 7년간의 고용(雇傭)을 살고 그 후에 또 과생거사(誇生居士)라 하며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에 사문(沙門)으로 5년간 탁식(托食)을 하며 12년간 은둔(隱遁)하여 피신생활(避身生活)을 하였다.
태종(太宗) 13년 계사(癸巳=1413년)에 소정공(昭靖公) 윤곤(尹坤), 평도공(平度公) 박은(朴訔)등 제현(諸賢)이 차례로 운암(雲巖) 차원부(車原頫)의 신원(伸寃)을 진소(陳疏;해명함)하고 또 세종조(世宗朝)에 좌대언(左代言) 이맹진(李孟畛)이 항소(亢疏)하여 진변(陳辯)하고 그 후 세종(世宗) 29년 정묘(丁卯;1447년)에 충정공(忠定公) 황보인(皇甫仁)이 사모(紗帽)를 거꾸로 쓰고 운암(雲巖) 차원부(車原頫)의 신원)(伸寃)을 진소(陳訴;사정을 말 하여 하소연 함)를 하고 또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은 홀(笏)을 잃어버리고 운암(雲巖) 차원부(車原頫)의 신원(伸寃)에 대함을 건백(建白;웃사람에게 의견을 말 함)을 하여 세종(世宗)이 다시 신원(伸寃)하여 사시(賜諡) 문절(文節)하고 자손(子孫)을 찾아 등용하게 하는 뜻의 교지(敎旨)를 방문(訪問)하여 전하나, 차상도(車尙道)의 아들 차계생(車繼生), 차중생(車中生)은 오직 두려움을 의심(疑心)하여 나오지 아니하고 유비(乳婢) 학금(學今)은 차상도(車尙道)의 유복자(遺腹子)를차보성(車寶成)으로 납명(納名)하고 외족(外族) 김윤함(金允諴)이 신광사(神光寺)에 숨어 있는 도승(道僧) 의종(義宗)은 차중련(車仲連)으로 납명(納名)하여 한 사람이 양명(兩名)이라 허실(虛實)을 알지 못 하여 다시 조사하여 알고 비록 유치(乳穉)하니 급료(給料)만 주고 장성(壯盛)하면 륙품직(六品職)을 주워 조상(祖上)의 업(業)을 잇게 하고 외손(外孫) 윤암(尹巖),유흥준(兪興俊)등은 특별히 동반직(東班職)에 서용(敍用)을 하였다. 단종대왕(端宗大王)은 문종왕(文宗王)의 교명(敎命)에 의거(依據) 전지(田地) 50결(結)을 내리고 집현전(集賢殿)의 학사(學士)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에게 차운암선생(車雲巖先生) 설원기(雪寃記)를 기술(記述)하게 하였다.
이 차운암선생(車雲巖先生) 설원기(雪寃記)에 의하면 고려조의 대표적(代表的)인 대문벌(大門閥)의 명족(名族)이었던 연안차씨(延安車氏)가 몰락(沒落)하게 된 것은 차씨(車氏)의 문중외얼(門中外孼)들의 사적(私的)인 원한(怨恨)에 의해 그 중에서 특히 하륜(河崙)의 원한(怨恨)과 정권(政權)의 유지책(維持策)에 의해서였던 것이다 정도전(鄭道傳)이나 하륜(河崙)이 자신들의 출생신분(出生身分)을 차류족보(車柳族譜)에 밝힌 운암(雲巖) 차원부(車原頫)를 시기(猜忌)하여 무고(誣告)의 음모(陰謀)에 일어난 사건(事件)이다.
운암(雲巖)차원부(車原頫)의 형 참정(參政) 차숭부(車崇頫), 밀직(密直) 차숭질(車崇質)은 송원(松原)에서 추살(椎殺)을 당 하였고 종형(從兄) 전 정당(前 政堂) 차종부(車宗頫), 부사(副使) 차형부(車亨頫)는 마원(痲原)에서 추살(椎殺)되고 동생 총랑(摠郞) 차원명(車原命)은 선산(善山)으로 귀양가고 찬성(贊成) 차견질(車堅質)은 가솔(家率)하여 자주(慈州)로 귀양가고 셋째동생 진사(進士) 차견명(車堅命)은 대명(大明)에 들어가 진사(進士)가 되었고 넷째동생 시어사(侍御使) 차원석(車原碩)은 여러 형과 함께 북변(北邊)으로 귀양가 세 번 옮겼고 그 족제(族弟) 정당(政堂) 차중부(車仲頫) 시중(侍中) 차인부(車仁頫)는 남황(南荒)으로 귀양가서 죽은곳을 알지 못 하고 총제(摠制) 강질(剛質)은 윤안명(尹安命)과 함께 서수(西陲)로 유배(流配)되어 우졸(郵卒)을 면치 못 하였고 대언(代言) 차공질(車公質), 전서(典書) 차명동(車命童)은 멀리 남주(南州)로 가 스스로 향리(鄕吏)를 원하였고 문학(門學) 차수동(車壽童), 참정(參政) 차보명(車寶命)은 가까운 려흥(驪興)에서 스스로 사람의 종으로 의지하고 감무(監務) 차보륜(車寶輪)은 남평(南平)에서 재차 옮겨 상사(長沙)에서 굶어 죽었다, 예빈경(禮賓卿) 차중문(車仲文)은 귀양간 후 사면(赦免)이 있었으나 은전(恩典)을 입지 못 하였고 전서(典書) 차덕륜(車德輪), 총제(摠制) 차지남(車指南)은 의친(懿親;친밀한 친척)이 있으나 남쪽에서 마침 죽었다,참정(參政) 차숭부(車崇頫)의 생모(生母)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정주(定州)로 귀양가고 밀직(密直) 차숭질(車崇質)의 생모(生母)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안주(安州)로 귀양 가고 차원석(車原碩) 일명(一名) 자남(自南)은 북변(北邊)에서 대명황후(大明皇后)의 초친(椒親;후비(后妃)의 친정의 겨레붙이)으로 중국(中國)으로 들어갔고 운암(雲巖) 차원부(車原頫)의 동복동생(同腹同生) 차견질(車堅質)은 아들 병마사(兵馬使) 차안기(車安耆)는 안주(安州)로 귀양 가고 ,운암(雲巖)의 동생 차견명(車堅命) 및 모든 조카 차안혁(車安革), 차안성(車安性), 차종혁(車從革), 차종경(車從慶), 차운혁(車云革), 차운포(車云苞), 차지안(車止安), 차지순(車止順),차현경(車顯卿)등 10여인이 일시에 북변(北邊)으로 류배(流配)되어 처음 류배(流配)는 쌍성(雙城)의 관노(官奴)요 두번째 류배(流配)는 길주(吉州)의 관노(官奴)요 세번째 류배(流配)는 회녕(會寧)의 관노(官奴)로 있다가 마침내 은명(恩命)을 받았다. 이와같이 차문일족(車門一族)은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운 수모(受侮)를당하며 조선조(朝鮮朝)에 원한(怨恨)을 품고 세상을 등지고 살라온 씨족(氏族)이다,
운암(雲巖) 문절공(文節公) 차원부(車原頫)의 외아들 고려조 중랑장(中郞將) 차안경(車安卿)은 아버지가 추살(椎殺)된 후 태종(太宗)이 고려조 중랑장(中郞將) 차안경(車安卿)을 현량(賢良)으로 칭송(稱頌)하고 그의 아버지에게 내리는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으로 내리는 증직(贈職)의 교지(敎旨)를 거절(拒絶)하기 위하여 자액(自縊)을 하였는데 그 후에 세종(世宗)이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追贈)을 하였고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에 의하면 려말(麗末)의 구효중(九孝中)의 한분으로 칭송(稱頌)을 하였다. 중랑장(中郞將) 차안경(車安卿)의 맏아들 고려조 진사(進士) 차상도(車尙道)는 태종(太宗)이 2품직(品職)을 제수(除授)함을 거절(拒絶)하기 위하여 순흥(順興)으로 둔적(遁迹), 가성명(假姓名) 임성부(林成富), 혹은 임선생(林善生)으로 순흥(順興) 재인(才人;백정) 이종실(李宗實)의 집에 고용살이를 7년간 하고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에 사문(沙門)으로 5년간 탁식(托食)을 하며 12년간을 숨어 살았다. 연천군(延川君) 강렬공(剛烈公) 차운혁(車云革)은 단종조(端宗朝)에 신설(伸雪)이 된 후에 오랜 뜻 에 조화(造化)가 않되어 용수동(龍水洞)에 둔적 은거(遯迹 隱居)를 하였고, 그 후 세조(世朝) 2년 병자(丙子)에 특승수용(特承收用)의 명(命)으로 북변(北邊)에서 상경(上京)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좌위좌부사직(忠佐衛左部司直) 겸사복장(兼司僕將)이 되었다. 세조(世祖) 13년 정해(丁亥)에 길주(吉州)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창의(倡義)하여의병장(義兵將)으로 종성인(鍾城人) 정휴명(鄭休明), 부령인(富寧人) 조규(曺糾), 경성인(鏡城人) 박성장(朴成章)등과 함께 적중(賊中)에 들어가 역순(逆順)으로 효유(曉喩)하고 이시애(李施愛)의 동생 이시합(李施合)과 이시백(李施伯)을 사로 잡아 관군(官軍)에 전송도중(縳送道中)에 부장(副將)인 최윤손(崔潤孫)이 박역(叛逆)하여 포로병(捕虜兵)을 풀어주고 이시애(李施愛)에 붙어 의병진영(義兵陣營)의 작전(作戰)을 누설(漏泄)시켜 차운혁(車云革), 정휴명(鄭休明), 조규(曺糾), 박성장(朴成章)등이 적(賊)에 사로잡혀 단천옥(端川獄)에서 함께 순절(殉節)을 하였다,
난(亂)이 평정(平定)한 뒤에 정충출기포의(精忠出氣布義) 적개삼등공신(敵愾三等功臣)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추증(追贈)하고 연천군(延川君)에 봉(封)하여 인각벽상(麟閣壁上)에 도형(圖形)을 하고 이에 패록(牌錄)을 내렸다,
그 후 중종조(中宗朝)에 이 사실(事實)를 삼강행실(三綱行實) 충신편(忠臣編)에 입속(入續)하고 어제시(御製詩)「흉추칭병반길주(凶醜稱兵叛吉州)하니 마운이북골성구(磨雲以骨成丘)라, 독장충의최봉예(獨將忠義嶊鋒銳)하니 일사영명만고류(一死英名萬古留)라.. 공여장허영성일(功如張許嬰城日)하고 충사안소매적시(忠似顔表罵賊時)라, 승승관군제치사(乘勝官軍齊致死)는 삭방상유사남아(朔方尙有四男兒)라」이 두수(二首)로 찬(贊)하고 정조(正祖)의 사훈고의례(司勳攷義例)에 가로데 차운혁(車云革)은 인각(麟閣)의 더욱 교저(較著;명백함)하고 창명(彰明;밝게 드러냄)한 것이다. 또 순조(純祖)27년 정해(丁亥;광도(光道) 7년) 2월 29일 가증(加贈) 정충출기포의(精忠出氣布義) 적개공신(敵愾功臣)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 겸 의금부사(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 연천군(延川君)으로 내렸다.
운암(雲巖) 문절공(文節公) 차원부(車原頫)의 현손(玄孫) 차성륜(車聖輪;譜名 聖輹)은 세조(世祖) 원년(元年;景泰6年) 을해(乙亥)에 덕원(德源)에서 단종(端宗)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寧越)로 멀리 류배(流配)를 간다는 소식을 듣고 추관(秋官;사법관(司法官)을 말 함)을 엿보아 잠자는 사이에 단종(端宗)을 배알(拜謁)하니 단종(端宗)이 유언(遺言)해 가로데 죽으면 의지할 곳이 없으니 혼(魂)이 있다면 너에 집에 갈것이니 너는 그리 알라 하였다, 그 후 차성륜(車聖輪)은 당종(端宗) 류배지(流配地)인 녕월(寧越)에 일년에 한차례의 승후(承候;웃어른께 문안드림)를 하였고 단종(端宗)이 세조(世祖)3년 정축(丁丑)10월24일에 승하(昇遐)하시니 차성륜(車聖輪)은 사는집에 단종(端宗)의 영위(靈位)를 모시고 매일(每日) 일찍 일어나 세수(洗手)하고 정수(精水)를 받치고 곡(哭)하며 받들고 매월삭망(每月朔望)은 백설병(白屑餠) 한시루와 정수(精水) 한그릇을 단종(端宗)의 영위(靈位)에 받치었다.
숙종(肅宗) 24년 무인(戊寅)에 단종(端宗)이 복위(復位)한 후 차성륜(車聖輪)의 꿈에 단종(端宗)이 하교(下敎)하여 가로데 이제 곧 향사(享祠)할 곳이 있으니 이제 마땅히 매월(每月) 한번씩 너에 집에 림어(臨御)를한다고 말한 고로 차성륜(車聖輪)은 매월(每月) 정수일기(精水一器)를 뒤주위에 받혀놓고 단종(端宗)을 추모(追慕)를 하였고 자손(子孫)에 유언(遺言)하여 그 후손(後孫)은 오늘날 까지 뒤주위에 매월(每月) 정수일기(精水一器)를 받쳐놓고 단종(端宗)을 추모(追慕)함이 변하지 않고 가전풍속(家傳風俗)이 되었다.
25세 차광운(車廣運)의 손자(孫子)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門人)이며 문장대가(文章大家)로 선조(宣祖) 10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선조(宣祖) 16년에 문과중시에 급제하였고 통신사(通信士)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日本)에 다녀왔고 그 뒤 명(明)나라에 보내는 문서를 작성하였다, 특히 선조(宣祖) 15년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성(平壤城)을 찾은 전승(戰勝)의 공(功)을 칭송(稱頌)하는 로포문(露布文)을 찬(撰)하여 명나라에 천하(天下)의 문장(文章)으로 놀라게 하여 교관공(敎官公) 차광운(車廣運), 그 아들 차식(車軾), 그 아들 오산(五山) 형제(兄弟)를 세인(世人)들이 삼부자(三父子) 오문장( 五文章)이라 칭송(稱頌) 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을 지내며 폐비(廢妃) 반대상소(反對上疏)를 올려 탄핵(彈劾)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익산(益山), 웅포(熊浦)에 은거(隱居)하면서「강촌별곡(江村別曲), 강호별곡(江湖別曲)」등의 가사(歌辭)를 지었고 정조(正祖) 때에 왕명(王命)으로 오산집(五山集)이 편간(編刊)이되었다.
30세 차은로(車殷輅)는 임진왜란 때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이 되었다, 문장가(文章家)로 이름이 있었고 역리학(易理學)에능통(能通)하였다
30세 차은진(車殷軫)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차은로(車殷輅)와 함께 여러 차례 전공(戰功)을 세워서 선조조(宣祖朝)애 절충장군(折衝將軍) 호군(行護軍)을 지내고 이산군수(理山郡守),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었다. 또한 27세 차득도(車得道)는 종제(從弟)인 차응린(車應麟), 차덕홍(車德弘)과 함께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의 의병(義兵)과 합세, 왜적(倭賊)과 싸웠고. 사재(私財)를 털어 군량(軍糧)을 모으는 등 나라 지키는 일에 앞장섰다. 한편28세 차재중(車載重)은 광해군(光海君) 10년 강홍립(姜弘立),김경서(金景瑞)등이 명(明)나라에 원병(援兵)으로 갈 때 김응하(金應河)의 중장군(中將軍)이 되어 차례중(車禮重), 차영중(車英重)과 종제(從弟) 차임중(車任重), 차치중(車致重), 아들 29세 차경량(車敬亮)등과 함께 명(明)나라로 갔으며 김응하(金應河)와 같이 싸우다가 중과부적(重寡不敵)으로 아들,동생등 5인과 함께 모두 순절(殉節)하였다. 29세 차례량(車禮亮)은 병자호란(丙子胡亂) 후 형(兄)인 차충량(車忠亮), 최효일(崔孝一)등과 함께 청태종(淸太宗)을 죽이고자 가산(家産)을 팔아 여러 장수(將首)를 규합하는 한편 심양(瀋陽)에서 명(明)나라 도독(都督) 관귀(管貴)와 거사(擧事)를 하려고 했으나 사전(事前)에 누설(漏泄)되어 살해되었다, 숙종(肅宗) 때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을 하였다가 이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이 되었으며 형(兄)인 차충량(車忠亮)은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추증되어 형제(兄弟)가 함께 의주(義州) 현충사(顯忠祠)에 배향(配享)되었다.
근대(近代)에 차도선(車道善)은1907년 홍범도(洪範圖), 송명봉(宋明鳳)등과 의병(義兵)을 모아 산포대(山砲隊)를 조직, 북청(北靑) 후치령(厚峙嶺)에서 일본군 궁부(宮部)가 인솔하는 중대병력(中隊兵力)을 섬멸(殲滅)하고 이어 함경도 삼수(三水), 갑산(甲山) 신흥(新興)등지에서 일본군을격파(擊破)했다, 한일합방 후 만주(滿州)로 망명(亡命)해 항일청년단체(抗日靑年團體)인 포우단(砲牛團)을 조직,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전개하며 송화강변(松花江邊)에서 은둔생활(隱遁生活)을 하였다. 또 차석보(車錫甫)는1908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대동공보(大東共報)를 창간(創刊) 사장(社長)이 되어 항일정신(抗日情神)을 고취(鼓吹)하다가 재정난(財政難)으로 폐간(廢刊)을 하였다. 후에 부호(富豪)인 교포 최재형(崔才亨)을 사장(社長)으로 추대(推戴)하고 복간(復刊), 언론(言論)을 통해 독립정신(獨立情神)을 앙양(昻揚)하는 한편 안중근(安重根)등 애국지사(愛國志士)의 독립투쟁을 후원했다,
그리고 차희식(車喜植)은1919년 3/1운동 때 경기도 화성군 쌍봉산(雙峰山) 만세 운동의 총 지휘자로 우정면(雨汀面) 사무소(事務所)와 화수리주재소(花樹里駐在所)를 습격(襲擊), 소각(燒却)하고 일경(日警) 천단(川端)을 때려 죽였다. 뒤에 체포(逮捕)되어 15년 형(刑)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9년 2개월을 복역했다, 또한 차이석(車利錫)은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한편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1년 105인의 사건에 관련 7년의 형(刑)을 선고받고 3년간 복역했다, 3/1운동 후에 상해(上海)로 망명(亡命), 독립신문(獨立新聞)의 기자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간부를 역임하고 1922년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국무위원(國務委員) 겸 비서장(秘書長)으로 13년동안 재임하다가 1945년 중경(中京)에서 병사(病死)했다 묘소는 효장공원 임정요인(臨政要人)의 묘역에 있다, 이 외에도 독립훈장을 받은 분이 많이 있다.
그리고 36세 차경석(車京石)은 한말(韓末)에 보천교(普天敎) 창시자(創始者)이다. 1907년 륭희(隆熙)1년 우치교(吽哆교)에 입교 1909년 교조(敎祖) 강일순(姜一淳)으로 부터 교통(敎統)을 이어 받았으나 교조(敎祖)가 죽자 우치교(吽哆敎)에 회의(懷疑)를 품고 금산사(金山寺)등 여러 곳을 찾아 다니며 여러해동안 도(道)를 닦은 끝에 선도교(仙道敎)를 개창(改創)하여 포교(布敎)를 시작하고 1921년 보화교(普化敎)로 개칭(改稱)하고 1922년 다시 보천교(普天敎)로 개명(改名)하여 교세확장에 힘썼다. 그리고 보천교(普天敎)는 우국지사(憂國志士)들이 모여 은밀(隱密)한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펼치는 거점(據點)의 구실이 되어 조만식(曺晩植) 한규숙(韓圭淑), 정복규(鄭復奎),정상택(鄭常澤)등은 교주(敎主) 차경석(車京石)과 상의(相議)하고 만주에 있는 민족운동의 단체와 연락하여 그 당시일화(日貨) 30만원의 독립자금을 판출(辦出)하다 발각되고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과 수방주(水方主) 한규숙(韓圭淑)의 거소(居所)인 전의사(典儀祠)의 별채에서 발견된 권총 두 자루와 실탄 40여발이 결정적 단서로 조만식(曺万植)과 한규숙(韓圭淑) 정복규(鄭復奎) 정상택(鄭常澤)등은 체포(逮捕)돠어서 서울로 연행하여 서대문 형무소서 취조를 받게 되었는데 마침 취조관이 정읍 경찰서장을 지낸 구라다(栗田)인데 구리다(栗田)는 교주 차천자(車天子=車京石)의 인품을 흠모 하고 있는 덕에 조만식(曺晩植)등은 심한고문을 당하지 않았다.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이 월북(越北)하여 차경석(車京石)의 동립운동에 기여(寄與)한 공적(功蹟)이 전(傳)하지 못함이 애석(哀惜)한 일이다.
■행렬규정표(行列規定表)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의 36세는 종토부(從土部)를 하행(下行)으로 하고 종금수목화(從金水木火)의 상생(相生)의 이치로 차례차례 잇다라 이음을 아래와 같이 정(定)한다. 세대(世代) 36 37 38 39 40 41 행렬자리 ○土 金○ ○水 木○ ○火 土○ 세대(世代) 42 43 44 45 46 47 행렬자리 ○金 水○ ○木 火○ ○土 金○
*행렬자(行列字)의 규정(規定) 은 아래와 같다. 세대(世代) 36 37 38 39 40 41 행렬 자(字) ○壎 鏞○ ○濬 柱○ ○煥 載○ 세대(世代) 42 43 44 45 46 47 행렬 자(字) ○鎬 淳○ ○根 熙○ ○基 善○ 세대(世代) 48 49 50 51 52 53 행렬 자(字) ○澈 榮○ ○憲 垌○ ○鍾 瀅○ 세대(世代) 54 55 56 57 58 59 행렬 자(字) ○植 光○ ○在 銘○ ○洪 東○ |
역대 주요 인물 | | ■신라시대(新羅時代) 인물
-차무일(車無一) 본성명(本姓名) 왕몽(王蒙) 신라태조로부터 사성(賜姓)을 받아 차씨(車氏)의 득성시조(得姓始祖) 벼슬은 시중(侍中). -차신을(車神乙) 본성명(本姓名) 왕림(王琳) 득성시조(得姓始祖)의 아드님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 -차부기(車夫起) 신라조 승상(丞相) 득성시조(得姓始祖)의 손자(孫子). -차유전(車惟典) 신라조 승상(丞相) 득성시조(得姓始祖)의 증손(曾孫). -차무정(車茂正) 신라조 사공(司空) 득성시조(得姓始祖)의 현손(玄孫). -차개수(車介修) 신라조 사공(司空) 득성시조(得姓始祖)의 육세손(六世孫). -차 복(車 復) 신라조 대상(大相) 득성시조(得姓始祖)의 칠세손(七世孫). -차조영(車祖英) 신라조 상주국(上柱國) 득성시조(得姓始祖)의 팔세손(八世孫). -차갑승(車甲乘) 신라조 승상(丞相) 득성시조(得姓始祖)의 십일세손(十一世孫). -차자개(車自開) 신라조 승상(丞相) 득성시조(得姓始祖)의 십이세손(十二世孫). -차무기(車武奇) 신라조 승상(丞相) 득성시조(得姓始祖)의 십삼세손(십삼세손). -차승각(車升閣) 신라조 승상(丞相) 득성시조(得姓始祖)의 십사세손(十四世孫). -차제능(車濟能) 신라 미추왕조(味鄒王朝)에 승상(丞相) 득성시조(得姓始祖)의 십칠세손 (十七世孫). -차등국(車登國) 신라조 승상(丞相) 득성시조(得姓始祖)의 십팔세손(十八世孫). -차휘만(車徽曼) 신라조 승상(丞相) 득성시조(得姓始祖)의 이십일세손(二十一世孫). -차 지(車 智) 신라조 승상(丞相) 득성시조(得姓始祖)의 이십이세손(二十二世孫). -차 순(車 楯) 신라조 승상(丞相) 득성시조(得姓始祖)의 이십사세손(二十四世孫). -차순계(車盾階) 신라조 대상(大相) 득성시조(得姓始朝)의 이십칠세손(二十七世孫). -차단식(車段式) 신라조 대상(大相) 득성시조(得姓始祖)의 이십팔세손(二十八世孫). -차 헌(車 憲) 신라조 승상(丞相) 득성시조(得姓始朝)의 이십구세손(二十九世孫). -차검부(車儉夫) 신라조 승상(丞相) 득성시조(得姓始祖)의 삼십일세손(三十一世孫). -차건갑(車建甲) 신라 소성왕조(昭聖王朝)의 원로승상(元老丞相) 소성왕(昭聖王)의 유언 12세에 즉위 하신 애장왕(哀莊王)의 보상(輔相)이 되여 왕을 잘 보필하고 나라에 대훈(大勳)을 세우고 별세하니 왕이 만조백관에 하명하여 왕례(王禮)를 갖추어 예장하고 공의 위패를 소성왕묘(昭聖王廟)에 배향 하니 공의 묘소를 세칭 차능(車陵)이라 하며 부산(釜山)광역시 기장군(機張郡) 만화리(萬化里)에 있으며 신라 42대 흥덕왕(興德王)이 차능(車陵)이 있는 곳이라 하여 현명(縣名)을 승격하여 차성(車城)으로 개칭하였다. -차승색(車丞穡) 신라 애장왕조(哀莊王朝)의 좌상(左相) 공(公)은 선고(先考)의 유언(遺言)에 따라 애장왕(哀莊王)을 극진히 보필을 하였으나 왕숙(王叔)인 김언승(金彦昇)이 애장왕(哀莊王)을 시해(弑害)하고 자립즉위(自立卽位)하여 헌덕왕(憲德王)이라 칭하니 공(公)은 큰 아들인 신라조 사공(司空) 차공숙(車恭叔)과 더불어 임금의 원수를 갚을 것을 모의하여 헌덕왕(憲德王)이 사냥 나감을 틈을타 다리 밑에 복병으로 시해 하고자 하였으나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있어 헌덕왕에게 미리 알려 헌덕왕이 병사를 풀어 체포령을 내리니 공의 부자는 공의 생질인 요동백(遼東伯) 김반전(金盤傳)의 아들 김생(金生) 집으로 피신 하니 헌덕왕이 금 천근과 식읍(食邑) 만호(萬戶)의 현상으로 찾으니 김생(金生)이 가난하여 현상을 탐하여 공의 부자를 밀고하고자 하니 김생(金生)의 신복(信僕)이 미리 알고 공에게 알려 그날 밤을 틈타 위험을 벗어나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유주(儒州) 묵방동(墨坊洞)으로 둔적하여 조모성 양씨(楊氏)를 모칭(冒稱)하면서 피신하였다. 이 모칭(冒稱)한 성(姓)이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변하여 가성류씨(假姓柳氏)로 하고 이름을 백(栢)으로 하여 가성명(假姓名) 류백(柳栢)으로 피난하였다. -차공숙(車恭叔) 신라조 사공(司空) 아버지 차승색(車承穡)과 더불어 임금의 원수를 갚으려다 실패하여아버지와 같이 둔적하여 피신하고 모성명(冒姓名) 류숙(柳淑)으로 피난하였다. -차공도(車恭道) 신라조 사공(司空) 차승색(車承穡)의 둘째 아드님 즉 차공숙(車恭叔)의 동생 강남(江南)으로 피신하여 구성왕씨(舊姓王氏)로 복성 하였으며 왕건태조(王建太祖)의 증조(曾祖)요 고려국조(高麗國祖)이신 원덕대왕(元德大王)이시며 개성왕씨 (開城王氏)시조이시다. (開城王氏 族譜 參照). -차 해(車 海) 사호(賜號) 차달(車達)은 모성류씨(冒姓柳氏)를 사용하면서 피난하신 차승색(車承穡)의 6세손 류해(柳海)는 려태조 남정(南征)을 할 때 대훈을 세워 려태조는 가성류씨(假姓柳氏)를 사용한 류백(柳栢)으로부터 6세손 류해(柳海)까지 조상본성차씨(祖上本姓車氏)로 복성하여 사호 차달(車達)로 되고 개국이등공신(開國二等功臣)에 봉하여 대승(大丞)을 제수 받으시고 그 큰아들 효전(孝全)은 본성 차씨(本姓車氏)로 조상의 홍열(弘烈)을 승계하라 하고 공의 차자(次子) 효금(孝金)은 류씨(柳氏)로 명하여 사성(賜姓)하니 비로소 류씨시조(柳氏始祖)가 되여 두 형제분(兄弟分)이 차씨(車氏)와 류씨(柳氏)로 분성(分姓)하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高麗時代) 인물
-차효전(車孝全) 대승공(大丞公) 사호(賜號) 차달(車達)의 사자(嗣子)이시다. 조선조에서 왕명에 의하여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이 찬술(撰述)한 차운암선생(車雲巖先生) 설원기(雪寃記)에 의하면 공은 왕사에 어려운 고통을 당하여 흥원(興原)의 백성을 조곡으로 진대(賑貸)하고 현능(顯陵 : 高麗始祖墓號)과 정사(定社 : 開國에宗社를定하는일)에 공로를 세우고 나라에서 남정(南征)을 할 때 수례를 판출(辦出)하여 계량(繼粮)을 실어 향궤(餉饋)를 운반한 공으로 그 아버지 대승공(大丞功)에게 차씨의 세적(世績)을 이어라고 호를 차달(車達)로 내렸고 공은 개국의 수공자(首功者)로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과 더불어 일등공신에 배열하고 대광(大匡)을 제수(除授)하고 백작(伯爵)을 봉하여 식읍천호(食邑千戶)를 염주(鹽州)로 하사하니 이곳이 차씨(車氏)의 종적지(宗籍地)가 되고 공이 차씨의 득관시조일세(得貫始祖一世)가 되었다. 그 후 려조23대 고종왕이 거란병의 방어에 공 있는 곳이라 영응현(永膺縣)으로 승격하고 이 고을 사람 차송우(車松祐)가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됨으로 이곳의 지복주사(知復州事)로 승격하고 려조 24대 원종왕(元宗王)이 또 이분희(李汾禧)가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니 이 곳을 석주(碩州)로 개칭하고 또 려조 25대 충열왕(忠烈王)이 즉위하여 현명(縣名)을 승격하여 온주목(溫州牧)으로 개칭하였다. 려조 26대 충선왕 (忠宣王)이 즉위하여 목(牧)은 사치하다하여 부(府)로 낮추어 온주목(溫州牧)을 연안부(延安府)로 개칭하니 이에 차씨의 종적명 (宗籍名)을 연안(延安)으로 개칭하고 득관시조(得貫始祖)를 칭존(稱尊) 연안군(延安君)으로 하여 오늘날까지 연안차씨(延安車氏)로 전승(傳承)되여 오고 있다. -차수비(車秀毗) 득관시조(得貫始祖)의 아드님 고려 광종조(高麗光宗朝)에 태보(太保) 정일품. -차계린(車季隣)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의 손자 고려성종조(高麗成宗朝)에 광평시랑(廣平侍郞) 종일품. -차용기(車用杞) 득관시조(得貫始祖)의 증손 고려현종조(高麗顯宗朝)에 문하시랑(門下侍郞) 공은 문신(文臣)을 죽여 조정(朝廷)의 기강을 문란케 한 김훈(金訓)등을 이자빈(李子彬)과 더불어 제거하였다. -차백소(車伯炤)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현손(玄孫) 고려문종조(高麗文宗朝)에 시어중승(侍御中丞). -차무강(車武綱)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의 6세손 고려선종조(高麗宣宗朝)에 평장사(平章事)로 송(宋)나라와 절교(節交)를 하고 있는 고려를 공이 다시 복교(復交)를 이루어 내었다. -차계한(車稽漢)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7세손 고려숙종조(高麗肅宗朝)에 서평백(西平伯). -차자순(車子順)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8세손 고려예종조(高麗睿宗朝)에 유주백(儒州伯) -차유개(車幼塏)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9세손 고려인종조(高麗仁宗朝)에 간의대부(諫議大夫)평장사(平章事)요 공은 시어사(侍御使) 이자겸(李資謙)이 준경(俊京)을 불러들여 조정을 선동하여 간궤(奸軌)를 부렸기에 정언(正言) 정지상(鄭知常)과 더불어 바른 말로 윗사람을 충고하여 준경(俊京)을 배제시켰다. -차중규(車仲規)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0세손 고려명종조(高麗明宗朝)에 삼한대장군(三韓大將軍) 증 병부상서(兵部尙書) 공은 고려명종(高麗明宗) 사년병오(四年丙午)에 서경유수(西京留守)며 조위총(趙位寵)의 난으로 순절하시였다. -차거수(車擧首)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1세손 고려명종조(高麗明宗朝)에 태복시사(太僕侍事) 차약춘(車若椿)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2세손 고려신종조(高麗神宗朝)에 병부시랑(兵部侍郞) 공은 천성과 행실이 정직하여 최충헌(崔忠憲) 이 조신(朝臣)을 죽이는 변란에서 조신을 구하고 최충헌(崔忠憲)을 살해하였다. -차약송(車若松)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2세손 차약춘(車若椿)의 동생이며 고려신종조(高麗神宗朝)에중서시랑(中書侍郞)동평장사(同平章事). -차덕위(車德威)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3세손 병부시랑(兵部侍郞) 차약춘(車若椿)의 아들 고려조(高麗朝)에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 -차 척(車 倜)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4세손 고려희종조(高麗熙宗朝)에 참정(參政) 고려고종조(高麗高宗朝)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어사대부(御史大夫) 좌승선(左丞宣)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요 고려고종(高麗高宗) 삼년병자(三年丙子)에 거란병이 내침하니 상장군(上將軍) 노원순(盧元純)과 오응부(吳膺富) 김취려(金就礪)등을 삼군병마사(三軍兵馬使)로 하여 거란병을 방어하려고 하니 노원순(盧元純)이 조정(朝廷)에 군대증원을 청 하니 공을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로 김취려(金就礪)로 후군병마사(後軍兵馬使)로 상장군(上將軍) 송신경(宋臣卿)으로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로 하여 개평(開平)과 원림(原林)의 두역에 삼군(三軍)이 주둔(駐屯)하고 연주신리(延州新里)의 싸움에서 거란병 이백여급(二百餘級)을 참수(斬首)하고 또 익일 싸움에 귀복(歸服)의 병졸을 칠백육십여급(七百六十餘級)을 참수(斬首)하고 가축과 병장(兵仗)을 많이 획득하고 거란병을 격파하여 북경(北境)을 안정하였다. -차 신(車 信)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4세손 차약송(車若松)의 손자 고려충열왕조(高麗忠烈王朝)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검교사도(檢校司徒) 자정원사(資政院事) 상장군시랑(上將軍侍郞). -차수하(車受河)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5세손 차 척(車 倜)의 장자 고려고종조(高麗高宗朝) 중랑장(中郞將) 공은 상장군(上將軍) 노지정(盧之正)이 권신 최 우(崔 瑀)의 해침을 막지 못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 -차송우(車松祐)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6세손 고려고종조(高麗高宗朝)에 훈로(勳老)요 고려고종왕(高麗高宗王) 사십오년 무오삼월병자(戊午三月丙子)에 최충헌(崔忠獻)의 손자 최의(崔竩)는 조정에 기강을 문란케 하고 불충함으로 공은 대사성(大司成) 류경(柳璥)과 더불어 별장(別將) 김인준(金仁俊)등이 최의(崔竩)의 무단정권(武斷政權)을 타도하고 왕정을 복구하였다. 이 공훈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여 벽상(碧上)에 도형(圖形)되고 장군이 되였으며 익년에 공은 사는 영응현(永膺縣)의 지복주사(知復州事)로 승격하였고 공은 원나라에 들어가 도적을 토벌한 공훈으로 금은제기(金銀祭器)를 왕으로부터 하사받고 특별히 도총제(都摠制)로 제수되어 세은(世恩)으로 사시(賜諡)를 받았다. -차득규(車得珪)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7세손 고려충열왕조(高麗忠烈王朝)에 도총제(都摠制)요 충열왕(忠烈王) 사년무인(四年戊寅)에 별감(別監)이 되고 충열왕(忠烈王) 칠년신사(七年辛巳)에 사직공신(社稷功臣)으로 시상되고 충열왕(忠烈王) 팔년임오(八年壬午)에 일등 공신이 되었다. -차덕규(車德珪)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7세손 즉 차득규(車得珪)의 동생 고려충열왕조(高麗忠烈王朝)에 중랑장(中郞將) 광주병마사(廣州兵馬使) 송림백(松林伯)이시며 연안차씨(延安車氏) 송림백공파(松林伯公派)의 파조(派祖)이시다. -차 진(車 珍)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8세손이며 차덕규(車德珪) 아드님이며 고려조 시중(侍中)이다. -차포온(車蒲溫)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8세손 차득규(車得珪)의 장자(長子)요 공의 시호(諡號)는 문목공(文穆公)이시며 고려충열왕조(高麗忠烈王朝)에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군부판서(軍簿判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사도중서시랑(司徒中書侍郞) 지도첨의(知都僉議) 동경유수(東京留守) 용산군(龍山君) 동중서좌평장사(同中書左平章事)인데 충열왕(忠烈王) 이년기유(二年己酉) 육월임인(六月壬寅)에 호종일등공신(扈從一等功臣)이 되었고 동년 구월임자(九月壬子)에 군부판서(軍簿判書)가 되고 공민왕(恭愍王) 삼년갑오(三年甲午) 칠월신사(七月辛巳)에 용산군(龍山君)이 되고 동년십이월갑인(十二月甲寅)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공민왕(恭愍王) 오년병신(五年丙申) 사월무진(四月戊辰)에 지도첨의(知都僉議)로 원나라에서 왕에게 하사한 주(酒)와 의(衣)를 받아 왔으며 공민왕 육년정유(六年丁酉) 삼월신묘(三月辛卯)에 동경유수(東京留守)가 되였다. -차공윤(車公胤)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8세손 차덕규(車德珪)의 삼자(三子) 고려충열왕조(高麗忠烈王朝)에 중랑장(中郞將)이시며 충열왕 육년경진(六年庚辰) 십일월기유(十一月己 酉)에 우승지(右丞旨) 조인규(趙仁規) 대장군(大將軍) 인후(印侯)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중랑장(中郞將) 류보(柳普) 김천록(金天祿) 이신백(李臣伯) 신혁(辛奕) 최공(崔公) 여문취(呂文就) 안흥(安興) 이순(李淳) 김복대(金福大) 차공윤(車公胤)등을 상서(上書)로 청하여 총파(摠把 : 軍職名)가 되였다. -차안도(車安道)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9세손 차공윤(車公胤)의 아드님 공민왕조(恭愍王朝)에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공민왕 십년신축(十年辛丑)에 호종일등공신(扈從一等功臣)으로 벽상도형(壁上圖形)되였다. -차중부(車仲頫)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0세손 차공윤(車公胤)의 장자(長子) 공민왕조(恭愍王朝)에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참정(叅政). -차인부(車仁頫)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0세손 차공윤(車公胤)의 차자(次子) 고려조 시중(侍中)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불사은거(不仕隱居)하였고 사얼지화(四孼之禍)로 남황(南荒)으로 귀양갔다. (죽은 곳을 알지 못한다.) -차세윤(車世胤)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8세손 차복규(車復珪)의 아드님 고려조 감찰사(監察使). -차중문(車仲文)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9세손 차덕규(車德珪)의 손자(孫子) 고려조(高麗朝)에 예빈경(禮賓卿)이시며 사얼피무지화(四孼被誣之禍)로 시중(侍中) 이세옹(李世蓊)과 더불어 귀양간 후로 알지 못한다. -차수동(車壽童)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9세손 문목공(文穆公) 차포온(車蒲溫)의 장자(長子) 공민왕조(恭愍王朝)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종이품(從二品)이며 려말충의열전(麗末忠義列傳)에 의하면 승국명류표방록(勝國名流標榜錄)의 기록에 고려가 멸망하였으나 공은 조선의 신복(臣僕)을 수락하지 아니하고 조운흘(趙云仡) 장하(張夏) 김광서(金光叙) 이중인(李中仁) 임득충(林得忠) 염저(廉 詝)등과 더불어 팔판사동(八判寺洞)에 은거하며 불사이군의 충절을 사수하고 그 후에 공은 성거산(聖居山)으로 들어가 분신자살(焚身自殺)을 모의(謀議)하였으나 자손의 만류로 실패하였고 그 후 공은 포은(圃隱)의 동생 정과(鄭過)와 더불어 팔판사(八判寺)의 근처(近處)에 은거하여 망국의 신하로 충절을 온전히 하였으며 공은 연안차씨(延安車氏) 문학공파(文學公派)의 파조(派祖). -차명동(車命童)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9세손 문목공(文穆公) 차포온(車蒲溫)의 차자(次子) 고려조(高麗朝)에 전서(典書) 연안차씨(延安車氏) 전서공파(典書公派)의 파조(派祖). -차종노(車宗老)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9세손 문목공(文穆公) 차포온(車蒲溫)의 삼자(三子) 호(號)는 월파옹(月波翁) 공은 타고난 성질이 기미(旣美)하고 학문이 여럿 중에 뛰어나며 지방어(知防禦)에 직무소에서 일을 다 하더니 문득 권신과 간신의 그릇된 것을 보고 산림으로 둔적(遯迹)하여 벼슬할 뜻을 끊고 자신의 뜻한 바를 밝히고 인덕을 쌓으며 처사로 평생을 마치니 명철(明哲)하게 보신(保身)을 하였다. 연안차씨(延安車氏) 월파공파(月波公派)의 파조(派祖). -차안노(車安老)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9세손 문목공(文穆公) 차포온(車蒲溫)의 사자(四子) 공은 려말의 상장군(上將軍)인데 고려멸망과 사얼피무지화(四孼被誣之禍)로 공의 행적 미상이다. 연안차씨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파조(派祖). -차숭부(車崇頫)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軍) 20세손 월파옹(月波翁) 지방어(知防禦) 차종노(車宗老)의 장자(長子) 고려조(高麗朝) 참정(叅政). 사얼피무지화(四孼被誣之禍)로 송원(松原)에서 추살(椎殺)를 되었다. -차숭질(車崇質)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0세손 월파옹(月波翁) 지방어(知防禦) 차종노(車宗老)의 차자(次子) 고려조 밀직(密直)인데 사얼피무지화(四孼被誣之禍)로 송원(松原)에서 추살(椎殺)되었다. -차원부(車原頫)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0세손 월파옹(月波翁) 지방어사(知防禦使) 차종로(車宗老)의 삼자(三子) 공은 고려충숙왕(高麗忠肅王) 칠년경신(七年庚申)에 탄생하여 공민왕(恭愍王) 십삼년갑진(十三年甲辰)에 문과(文科)에 등제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 겸 지국평장사(知國平章事)가 되셨다. 예설참증(禮說參證)으로 제사법전(祭祀法典)의 조리(條理)를 만들었고 위정척요불(衛正斥妖佛)을 하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목은(牧隱) 이색(李穡), 야은(冶隱) 길재(吉再)등과 더불어 대성리학자로 제명(齊名)하였고 많은 명사가 선생의 문하에서 일시에 배출 되였다. 두문동(杜門洞) 실기(實記)에 의하면 려말의 십건신(十謇臣)의 제일위자이며 신돈(辛旽)을 죽이고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을 제거 한다는 지론이정대하였고 친척이라도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나라의 형세가 위태하여 구하지 못함을 알고 벼슬을 버리고 평산수운암동(平山水雲巖洞)에 은거하여 역리(易理)를 탐독하고 차류보판(車柳譜板)을 새겨 해주신광사(海州神光寺)에 소장하였다. 이때에 이성계(李成桂)는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위덕이 날로 성하니 최영(崔瑩)등이 모의하여 천조(天朝;中國)에 꾸지람을 얻게 하고자 이성계(李成桂)의 장병으로 요동(遼東)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성계(李成桂)는 위화도(威化島)로 행군하면서 심중이 우번(憂煩)하여 평원(平原)에 유렵(遊獵)을 빙자하고 수운암동(水雲巖洞)의 공을 찾아가 계책을 물으니 답왈(答曰)「以外服이 犯中國은 一不可也요 以陪臣이 犯天子는 二不可也라」속국이 중국을 범함이 첫째 가하지 못 함이요 제후가 천자를 범함이 두번째 가하지 못함이라하니 이성계(李成桂)는 위화도로 부터 회군하여 조선의 만년종사를 열었다. 개국의 공훈책록일(功勳策錄日)에 조준(趙俊)과 이양우(李良佑)등이 동참을 원하나 공은 식초 다섯말을 마시는 한이 있더라도 불참하겠다 하고 망복(罔僕)의 절의를 온전히 한 뜻은 송산(松山) 조운흘(趙云仡)과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절의와 같았다. 조선태조가 만년에 국본(國本)을 정하고자 하나 의문이 있어 식자에 문의하고자 하더니 문득 꿈에 운암공(雲巖公) 토옥(土屋)에 들어 간지라 태조는 소명서찰(召命書札)을 하루에 다섯번이나 내리고 칙서(勅書)가 한달에 세번이나 있어고구(故舊)의 정을 버리지 못하여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목은(牧隱) 이색(李穡)에게 서찰(書札)로 화답한후 태조(太祖)가 하사한 역마(驛馬)는 돌려 보내고 초의(草衣)와 청려(淸驢)를 타고 소명에 나아갔다. 이태조(李太祖)는 미복(微服)으로 궐북용연(闕北龍淵)에 인도하여 몇대의 총종(蔥種)을 원대(苑臺)에 뿌리면서 정언(正言)은 자식을 능가하는 좋은 사람인데 어찌 이곳에 머무는것을 즐거워 하지않는가? 공은 은근(慇懃)이 담소(談笑)하고 전대(纏帶)의 총종(蔥種)을 보인것은 불유(不留)의 뜻을 나타 낸 것이다. 이곳이 소위 서총대(瑞蔥臺)이다. 공은 태조가 처음 정언(正言)을 제수 하니 받지 않으니 랑중(郞中)이 의론하고 좌천하여 전농시사(典農侍事)를 제수하나 공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으니 이때 사람들이 공을 청상명옥(淸霜明玉)에 비하였다. 이태조(李太祖)는 공이 불유(不留)할 것을 알고 세자(世子)의 륜전계책(輪傳計策)을 문의하니 공은 불가하다 하고 태종(太宗)이 건국에 공훈이 있음을 말하여 태조는 크게 깨달아 세자륜전(世子輪傳)의 계책을 포기하였다. 정도전(鄭道傳) 함부림(咸傅霖) 조영규(趙英珪) 하륜(河崙)등은 차씨문얼(車氏門孼)이라 운암공(雲巖公)께서 이들의 신분을 일찍 족보에 직서(直書)한 원한과 위화회군(威化回軍)의 논의에 불참으로 개국훈로(開國勳勞)가 되지 못함을 한하였고, 하륜(河崙)이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초친(椒親)인 강호(康昊) 강민(康旻)을 절교하는 등 사유로 강(康), 차(車) 두 씨족을 멸하고자 하던차에 태종이 저사(儲嗣)에 두 마음을 의심함을 틈타서 특별한 음모로 이숙번(李叔蕃)과 무안대군(撫安大君)의 형제를 원대(苑臺)아래로 끌고가 추살(椎殺) 하였고, 태조 7년 무인(戊寅) 9월 15일에 운암공(雲巖公)을 차씨족당(車氏族黨) 70여인과 함께 송원(松原)과 마원(麻原)에서 일시에 추살하였다. 서얼(庶孼)의 출생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신광사(神光寺)에 소장된 차류보판(車柳譜板)을 분탕(焚蕩)하고 사판(史版)을 멋대로 날조하여 차씨(車氏)의 행적을 감추고 역적누명(逆賊陋名)을 입혀 서민으로 전락 시켰으며 차씨문중에 대한 적족지화(赤族之禍)의 수난이 너무 비참하여 말로 다할수 없었다. -차강질(車剛質)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0세손 초명(初名) 상질(尙質) 고려조 대언(代言). -차공질(車公質)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0세손 고려조 대언(代言). -차보명(車寶命)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0세손 고려조 참지정사(參知政事). -차보륜(車寶輪)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0세손 고려조 감무(監務). -차원명(車原命)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0세손 고려조 도총제(都摠制). -차견질(車堅質)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0세손 고려조 찬성(贊成). -차원석(車原碩)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0세손 고려조 시어사(侍御史). -차의남(車倚南)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0세손 고려조 어사(御史). -차지남(車指南)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0세손 고려조 총제(摠制). -차인수(車仁守)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19세손 고려조 령동정(令同正). -차성부(車聖頫)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0세손 시호(諡號) 문양공(文襄公) 고려조 보승랑(保勝郞). -차안경(車安卿)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1세손이며 운암공(雲巖公) 아들로 고려조에 중랑장(中郞將) 운암공(雲巖公)이 참화(慘禍)를 당한 후 이태조(李太祖)가 사실을 알고 태종(太宗)을 질책하여 태종(太宗)이 잘못을 뉘우치고 운암공(雲巖公)의 영혼(靈魂)을 위로(慰勞)하는 치제(致祭)를 명하고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증직(贈職)의 교지(敎旨)를 내리니 선고(先考)의 유지를 생각하여 받지 아니 하고 자액(自縊)하였다. 그 후 조선 태종(太宗)때 아들 차상도(車尙道)와 같이 현량(賢良)으로 정당(政堂)에 별거(別擧)되고 태종(太宗)이 좌찬성(左贊成)으로 증직(贈職)하였다. -차상도(車尙道)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2세손이며 운암공(雲巖公)의 손자로 고려조 진사(進士) 조선 태종(太宗)이 서용(敍用)의 은전으로 정이품직(正二品職)을 제수(除授)하니 공은 조고(祖考)의 유지와 고려의 망국신하(亡國臣下)로 불사이군을 사수하기 위하여 경북순흥(慶北順興)으로 둔적(遁迹)하여 순흥(順興)에서 가성명(假姓名) 임성부(林成富) 혹은 임선생(林善生)이라 칭(稱)하면서 재인(才人) 이종실(李宗實)의 집에 고용(雇傭)살이를 7년간 하고 자칭 과생거사(誇生居士)라 하며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에 사문(沙門)으로 5년을 지냈으며 그 후 귀향하여 별세하였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이 황보인(皇甫仁)과 박팽년(朴彭年)의 진언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하였다. -차 륜(車 輪)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1세손 차밀부(車密頫)의 아들 고려조 좌대언(左代言) -차덕륜(車德輪)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1세손 차강질(車剛質)의 아들 고려조 전서(典書) -차 연(車 衍)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1세손 차강질(車剛質)의 차자(次子) 고려조 별장(別將) -차현경(車顯卿)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1세손 차원명(車原命)의 아들 고려조 밀직사(密職使) -차안성(車安性)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1세손 차견명(車堅命)의 차자(次子) 고려 도총제(都摠制) -차중남(車仲南)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1세손 고려조 현령(縣令) -차 철(車 轍)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1세손 차숭부의 장자(長子) 고려조 정당문학(政堂文學) -차 식(車 軾)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1세손 차숭부(車崇頫)의 차자(次子) 고려조 정당문학(政堂文學) -차안기(車安耆)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1세손 차견질(車堅質)의 장자(長子) 고려조 광주병마사(廣州兵馬使) 상장군(上將軍)으로 있다가 1398년 태조 7년 숙부(叔父) 차원부(車原頫)가 화(禍)를 입을 때 두 아들과 함께 영변(寧邊)으로 유배 되였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인물
-차희인(車希仁)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延安君) 25세손 초명(初名) 인(仁) 자(字) 경래(慶來) 호(號) 독봉(獨峰) 조선조 관직 군수(郡守) 1519년 중종(中宗) 14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525년 문과에 급제 직강(直講)을 거쳐 1537년 양산군수(梁山郡守)를 하시였다. -차광운(車廣運) 조선조 학자 문학(文學)으로 당세에 고명(高明)하여 향선(鄕選)으로 교수가 되었다. 그의 운률(韻律)이 신기전고(新奇典古)한 대수단(大手段)이 있으므로 사림(士林)들이 그의 아들과 손자 삼대를 송(宋)나라 삼소(三蘇;蘇洵, 蘇軾, 蘇轍)에 비견하였다. -차성륜(車聖輪) 조선(朝鮮)의 충신(忠臣) 공은 1457년 단종(端宗)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 하여 영월(寧越)로 유배되자 영월에서 몰래 단종(端宗)을 만나고 돌아 왔으며 이해 단종(端宗)이 죽자 단종(端宗)의 영위(靈位)를 모시고 매일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정수일기를 바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백설병(白屑餠) 한시루와 정수일기로 삭망(朔望)을 3년을 계속하여 군신간(君臣間)의 의리를 끝까지 지켰다. 그 후 숙종(肅宗) 24년 무인(戊 寅 : 1698년)에 단종(端宗)이 복위된 후에 공의 꿈에 단종왕(端宗王)이 하교하여 가로데 이제 향사 와 의지할 곳이 있으니 매월 한번 너에 집에 오겠 다 하였다. 고로 공의 후손은 지금까지 추모함을 변하지 않고 생각 하고 있으며 공의 위패는 동학 사(東鶴祠)에 배향되고 있다. -차운혁(車云革) 조선조 정충포의(精忠布義) 적게공신(敵愾功臣) 연천군(延川君)은 초휘(初諱) 운남(云 南)이며 자(字)는 홍기(弘器) 호(號)는 쌍청당(雙淸堂) 또는 송암(松庵)이며 시호 강렬(剛烈)이다. 려조(麗朝) 찬성공(贊成公) 휘 견질(堅質)의 아들이며숙부(叔父) 문절공 차원부(車原頫)의 피무지화(被武之化)로 황해도(黃海道) 연안부(延安府) 연천리(延川里)에서 5세때 종형제 십여인과 함께 류배되여서 초배지(初配地)는 쌍성(雙城), 재배지(再配地)는 길주(吉州), 삼배지(三配地)는 회녕(會寧)등 의 관노(官奴)의 수난(受難)이 이어졌다. 세종때 에 문절공의 억울함이 신원(伸寃) 되면서 공은 64 세 에 회녕(會寧) 용수동(龍水洞)에 있을 때에 조 정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올라와 어모장군(禦侮將 軍), 겸사복장(兼司僕將)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1467년 단종(端宗)이 서거(逝去)한 소식을 듣고 관직에서 물러나 양주(楊州) 도봉산 아래 은거생활 을 하였다. 1467년 세조(世祖) 13년 5월에 회령 전 절제사(節制使) 이시애(李施愛)가 그 동생 시합 (施合)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니 1467년 5월 18일 세조는 도총사(都摠使)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 외에 36명 문무백관을 불러놓고 왕이 이시애의 난 에 대한 방략(方略)을 전하고 문중선(文仲善)을 보 내어 선온(宣醞)을 내려 격려(激勵)하였다. 1467년 4월 25일 공은 정휴명(鄭休明), 조규(曺糾), 박성 장(朴成章)과 함께 회령의 군사와 합세하여 밤에 이원(利原)의 적진에 들어가 역순(逆順)의 의리(義 理)로 타 일렀으며, 이시애의 동생 시합과 시백을 살 로잡아 본진영(本陣營)으로 보냈다. 이때 전송 도중(縳送道中) 역도(逆徒)들이 급습(急襲)하여 포 로를 도망치게 하였다. 이시애는 홍원(洪原),이성 (利城)에 병사 3천여명으로 공격해 오니 공은 정 휴명등과 함께 그 회령, 종성의 군사를 이끌고 선봉에서서 마운령(磨雲의 적(賊)과 싸워 진격을 둔화(鈍化)시키니 적도귀순(賊徒歸順)이 길을 이었다. 최윤손(崔潤孫)의 반역으로 공은 정휴명, 조규, 박성장 등과 함께 적(賊)에 잡혀 단천옥(端川獄)에서 75세의 고령(高齡)으로 장엄(莊嚴)하게 순절(殉節)하였다. 난을 평정 후 공의 시신(屍身)을 거두니 형틀의 가쇄(枷鎖)로 두로추쇄(頭顱椎碎)라 참혹(慘酷)하였다. 세조는 종사관(從使官)을 보내어 삼목원혼(三木寃魂) 차운혁, 정휴명, 조규, 박성장 등 시신을 거두어 예장(禮葬)하고 제문(祭文)을 지어 치제(致祭)하고 만고충절(萬古忠節)을 기리게 하였다. 공은 이시애의 난에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충절을 다한 공훈으로 정충적개삼등공신(精忠敵愾 三等功臣)에 가정대부(嘉靖大夫), 병조참판(兵曹叅 判)등에 추증(追贈)되고 연천군(延川君)에 추봉(追 封)되었다. 1506년 중종조에 와서 숭정대부(崇政 大夫), 의정부우찬성(義政府右贊成) 겸지(兼知) 경 연사판(經筵事判) 의금부사(義禁府事) 홍문관대제 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 (知) 춘추관성균관사(春秋館成均館事) 신용개(申用 漑)가 편찬한 삼강행실도(三剛行實圖)의 충신편(忠 臣篇)에 입속(入續)하여 충신표상(忠臣表象)으로 기록하고 연천군(延川君)의 토적도(討賊圖)를 그려 어제시2수(御製詩2首)와 함께 수록되여 있다. 1827년 순조 27년 정해(丁亥)에 자헌대부(資憲大 夫), 호조판서(戶曹判書)로 가증(加贈)되었고 1841 년 헌종 7년 신축(辛丑)에 사시강렬(賜諡剛烈)하였 고 1856년 철종 7년 병진(丙辰)에 유상(遺像)을 모사(模寫)하여 칠곡(漆谷) 연계사(鉛溪祠)에 봉안 하고 부조묘(不祧廟)의 은전(恩典)을 입었다. 1876 년 고종 13년 병자(丙子)에 명정여(命旌閭)되여 수 원 남산에 충절을 기리는 정려문(旌閭門)을 세웠고 1884년 고종 21년 갑신(甲申)에 묘갈비(墓碣碑)를고쳐 세웠다. 1897년 함남 사림(士林)에서 정평비석동(定平碑石洞)의 묘소 아래 충효사(忠孝祠)를 세워 배향하고 1899년 기해(己亥)에 초계여심당(草溪如心堂)을 세워 모봉유상(摸奉遺像)하고 사림제(士林祭)로 매년(每年) 춘3, 추9월 상정일(上丁日)에 봉향하고, 각 지방 사림(士林)에서 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순천 오천서원(鰲川書院) 초계덕원서원(德源書源), 울산 자암서원(紫巖書院), 칠곡 연계사 영흥 정충서원(精忠書院) 함안 동산서원(東山書院) 충열사(忠烈祠) 창녕 존경각(尊敬閣) 경 북월성 도장서원(道藏書院) 포항죽성리 여심당(如 心堂;草溪移築建) 경북 영덕 지품율촌 규양각(葵陽 閣)등에 위패(位牌) 및 유상(遺像)을 봉안하고 사 림제(士林祭) 및 본손제 (本孫祭)로 세향(歲享)하고 있다. -차희윤(車熙胤) 조선(朝鮮) 중종조(中宗朝)에 진사(進士)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여 결성군수(結城郡守)를 지내셨고 정언(正言)을 지냈다. -차 식(車 軾) 조선조에 군수(郡守) 자(字)는 경숙(敬叔) 호(號) 이재(頤齋) 1543년 중종(中宗) 38년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평해군수(平海郡守)를 역임 하였다 특히 경사에 밝았다. -차천로(車天輅) 조선조 학자 자(字)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 공은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인(門下 人)으로 1577년 선조(宣祖) 10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고 개성교수(開城敎授)를 지내고 1583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로 급제하고 1586년 여계선(呂繼先)에게 표문(表文)을 지어 주어 장원급제(壯元及第) 시킨 일이 발각되어 명천(明川)으로 유배 되였다. 1588년 풀려나와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그 후로 명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문서를 작성하여 문명이 명나라 까지 떨쳤고 특히 임란에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우리나라를 도와 평양성을 다시 찾은 공훈에 대한 로포문(露布文)을 지어 국내뿐만 아니라 명나라를 놀라게 하여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다. 광해군(光海君)때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을 지냈다 특히 한시와 서예에 능하였다 저서는 오산집(五山集)과 오산설림(五山說林)이 있다. -차은진(車殷軫) 조선조 관직은 부사(府使) 자(字) 탕신(湯臣) 호는 애일당(愛日堂) 공은 철산부사(鐵山府使)로 재직 중 임진란이 일어나서 서울이 함락되고 왕이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하자 의병을 일어 켜 동생 호군(護軍) 차은로(車殷輅)와 함께 적을 대동강에서 막았다 그 후 호남지방에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그 후 병조판서(兵曺判書)에 추증되였고 호성선무(扈聖宣武) 일등공신에 추록되였다. -차은로(車殷輅) 조선조 관직 군수 자(字)는 윤신(尹臣) 호(號)는 일제당(日躋堂) 공은 용력(勇力)이 절인(絶人)한 무인으로 성품이 활달다지(豁達多智)하였고 미래를 췌지(揣知)하였다. 임진왜란 때 형 차은진(車殷軫)과 함께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청도 군수(淸道郡守)에 탁용(擢用) 되였다. 선무원종(宣武原從) 일등훈에 책록되고 중화(中和)의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다. -차운로(車雲輅) 조선조 관직 교리(敎理) 공은 1580년 선조(宣祖) 1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83년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호성원종훈(扈聖原從勳)에 록선(錄選)되였다. 당세에 뛰어난 문장가로 성리학에 능통함으로 동방의 소강절(邵康節)로 불리었다. -차신식(車愼軾) 조선조 관직 교수(敎授) 자(字)는 공근(公謹) 호는 사촌(沙村) 공은 효행(孝行)이 지극 하였으며 1592년 선조(宣祖)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하여 교수(敎授)가 되었다. -차득도(車得道) 조선조 관직 병조참판(兵曺參判) 공(公)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제인 차응린(車應麟) 차덕홍(車德弘)과 함께 의거(義擧)하여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의 의병과 합세하여 왜적을 막고 가재를 털어 군양을 모아 사기(士氣)를 진작 시켰다. -차응린(車應麟) 조선조 관직 병조참의(兵曺參議) 공(公)은 차득도(車得道)와 행동을 같이하고 그 행적 또한 같다. -차덕홍(車德弘) 조선조 관직 호조좌랑(戶曹佐郞) 공의 행적은 차득도(車得道)와 같음. -차덕로(車德輅) 조선조 중랑장(中郞將) 자(字) 광언(光彦) 호(號) 일당(日堂) 공은 병자호란 때에 봉림대군(鳳林大君)과 강평대군(降平大君)을 수행 강화도(江華島) 갑곶진(甲串津)에 피란하여 적을 공격할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적과 싸우는중 성이 함락(陷落)되여 내관 서준(徐俊)과 더불어 빈궁(嬪宮)을 받들라는 명을 받고 수행하던 중 적이 입성한 적진에서 원손(元孫)을 구하고 오백인의 주민을 배를 이용하여 자양도(紫陽島)로 이동. 판서 이상길(李尙吉)의 일가도 구출하였다. 공은 남한로(南漢路)로 나아가 화살이 다 하도록 적과 싸웠고 공은 병자(丙子) 12월 26일 전사하여 충효가 세상에 들났으며 숙종(肅宗)께서 온양(溫陽)을 순행 할 때 문서로 표창되고 특별히 복호오십결(復戶五十結)을 하사 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추증 되였고, 그 후손은 충남 서천군 마산면 안당리 세거(世居). -차철로(車喆路) 조선조 관직 병조참판(兵曹叅判)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초휘(初諱) 철상(喆相) 자(字) 여경(汝慶) 호(號) 용봉(勇鋒) 1615년 광해(光海) 7년 을묘(乙卯) 2월 16일 생(生) 1637년 인조(仁祖) 15년 정축(丁丑) 무과에 급제 관지(官至) 병조참판(兵曹叅判) 1673년 현종(顯宗) 14년 계축(癸丑) 10월 11일 졸(卒) 그 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추증 되였다.(후손경남함양안의세거(世居) -차승로(車乘路) 조선조 관직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종삼품(從三品) 자(字) 여원(汝元) 1667년 현종(顯宗) 8년 정미(丁未) 출생 1692년 숙종(肅宗) 18년 임신(壬申)에 무과에 등제 관지(官至)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종삼품 1739년 영조(英祖) 15년 기미(己未)에 별세 그 후 가선대부(嘉善大夫) 추증되였다.(후손경남산청군범학리세거(世居) -차전곤(車轉坤) 조선조 관직 판관(判官) 자(字)는 용지(用之) 호(號) 단구(丹邱) 공은 1620년 광해군(光海君) 1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전적(典籍) 봉상사정(奉常寺正) 찰방(察訪) 현감(縣監) 군수를 역임 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차재중(車載重) 조선조 절신(節臣) 공은 1618년 광해군 10년 강홍립(姜弘立) 김경서(金景瑞)등이 명나라에 원병으로 갈 때 김응하(金應河)의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동생 차예중(車禮重) 차영중(車英重)과 종제 차임중(車任重) 차치중(車致重) 아들 차경양(車敬亮) 등과 함께 명나라로 갔다 강홍립(姜弘立) 김경서(金敬瑞)가 적에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1619년 3월 4일 자제 다섯과 함께 모두 순절하였다. -차례중(車禮重) 조선조 절신(節臣) -차영중(車英重) 조선조 절신(節臣) -차임중(車任重) 조선조 절신(節臣) -차치중(車致重) 조선조 절신(節臣) -차경양(車敬亮) 조선조 절신(節臣) -차충양(車忠亮) 조선조 의사(義士) 자(字)는 여서(汝恕) -차례양(車禮亮) 조선조 의사(義士) 자(字)는 여명(汝明) 호는 풍천자(風泉子) 시호(諡號)는 충장(忠莊) 공은 1637년 인조(仁祖) 15년 병자호란이 끝나자 최효일(崔孝一)등과 함께 청태종(淸太宗)을 죽이기로 하고 가산을 방매하여 배를 구입 최효일(崔孝一)을 등주(登州)로 보내 여러 장수를 규합 심양(瀋陽)을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공은 심양(瀋陽)에 들어가 친구인 명나라 도독(都督) 관귀(管貴)와 함께 거사하여 안팎으로 협공키로 계획했으나 거사전에 누설 되여서 관귀(管貴)와 함께 살해 되었다. 그 후 숙종조(肅宗朝)에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그 후 호조판서가 가증되고 의주(義州)의 현충사(顯忠祠)에 제향 되었다. -차이재(車以載) 조선조 문과급제(文科及第) 자(字)는 임중(任仲). -차봉원(車鳳轅) 조선조 문과급제(文科及第) 자(字)는 채백(彩伯) 관직 례조정랑(禮曹正郞) -차원철(車元轍) 조선조 의사(義士) 자(字)는 선장(善長) -차명징(車命徵) 조선조 효자(孝子) 자(字)는 기숙(起叔) 호(號) 연리(連里) 처사(處士) 영종(英宗) 22년 병인(丙寅)에 정여(旌閭)를 명하여 내렸다. -차경징(車敬徵) 조선조(朝鮮朝) 효자(孝子) 자(字)는 공숙(恭叔) 호(號) 두산(杜山) 처사(處士) 형(兄)과 같이 정여(旌閭)를 받았다. -차맹윤(車孟胤) 조선조 의사(義士) -차달위(車達違) 조선조 군수(郡守) 자(字)는 가근(可近) -차만리(車萬里) 조선조 관직(官職) 찰방(察訪) -차학모(車學摸) 조선조 관직(官職) 현감(縣監) -차필기(車弼基) 조선조 효자 고성군(高城郡) 도선면(道仙面) 오륜동(五倫洞)에 사는 선비인 공은 효성이 극진하고 덕성(德性)이 순수하며 어버이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화목하며 어른을 공경하고 이웃간에 돈목하고 효행이 탁이(卓異)하다. 1815년 순조(純祖) 15년 을해(乙亥)에 그 아버지 팔순의 고령에 우연히 중병을 얻어 2개월 동안 침고(沈痼)하여 백약이 무효하고 의원도 속수무책이라 천명이 다하니 필기는 매우 애통하여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치며 자기가 대신 죽으려 하니 이웃에 사는 노파가 와서 말하기를 「사람고기가 약이 된다.」고 하였다 이에 그는 자기의 다리살을 두번이나 베어내어 약에 섞어 드리니 죽게된 아버지가 소생하여 일백한살 까지 살아셨고 수(壽)로써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 을 증직 받게 되었다 필기는 아버지 무덤을 지을때 역부들이 소리내어 슬피 우는 것을 보고 장사에 보내는 노래를 지었는데 육아시(蓼莪詩)와 비슷하니 조객들이 듣고 기뻐하였다. 그래서 그 마을 이름을 고쳐서 오륜동(五倫洞)이라고 했다. 이 아름다운 마을 이름 을 얻은 것이 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묘(墓)옆에 여막을 짓고 3년간을 지키는 동안 호랑이가 와서 호위를 하니 나무꾼들이 호랑이를 목격 하고는 범이 넘어간 골짜기를「범골」이라 부르게 하고 서로 경계하여 말하되「차효자(車孝子) 범이다. 해롭게 하지말라」고 하였다 지난 신사년(辛巳年) 가을에 도내 선비들이 임금행차 앞에 나아가서 아뢰었기에 상감의 명으로 예조(禮曹)에서 사실을 조사하여 실제로 보고 하니 특전으로 그해 겨울에 정려(旌閭)를 세우라 명하였다 한편 푸른산에 두어칸 되는 주춧 돌과 대들보가 환연(煥然)하게 서게 되었다 아ㅡ! 이처럼 효행스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은혜를 입지 않았겠는가? 생각된다. -차필한(車弼漢) 조선조 시인 자(字) 몽여(夢汝) 호(號) 쌍연(雙蓮) 고종(高宗) 10년 계유(癸酉)에 진사(進士)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오위장(五衛將). -차좌일(車左一) 조선조 서화가(書畵家) 자(字) 숙장(叔章) 호(號) 사명자(四名子) 공은 글씨 그림 음률 사예(射藝) 시문에 뛰어났다 홍양호(洪良浩) 윤사국(尹師國) 정약용(丁若鏞)등과 시교를 맺었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고 만호(萬戶)를 지냈고 만년에는 시문으로 여생을 보냈다. 저서(著書)는 사명자시집(四名子詩集)이 있다. -차헌규(車憲奎) 조선조 서예가(書藝家) 호(號) 석계(石溪) 공(公)은 조광진(曺匡振)에게 글씨를 배워해서(楷書)와 예서(隸書)에 능했고 큰 글씨를 잘 썼다.
■근대(近代)의 인물(人物)
-차도선(車道善) 한말(韓末)의 항일운동가(抗日運動家) 공(公)은 1907년 륭희(隆熙) 1년 홍범원(洪範圓) 송상봉(宋相鳳) 등과 의병(義兵)을 모아 산포대(山砲隊)를 조직 이해 북청(北靑)의 후치령(厚峙嶺)에서 일본군 궁부(宮部)가 인솔하는 중대병력을 섬멸하고 이어 삼수(三水) 갑산(甲山) 신흥(新興)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한일합방 후 만주로 망명 항일청년단체 포우단(砲牛團)을 조직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송화강변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단장(建國功勞勳章單章)이 수여 되였다. -차경석(車京石) 한말(韓末) 보천교(普天敎) 창시자(創始者) 자(字)는 륜홍(輪洪) 호(號)는 월곡(月谷) 공(公)은 고종(高宗) 17년 경진(庚辰) 1880년 6월 1일에 출생하여 1907년 륭희(隆熙) 1년 우치교(吽哆敎)에 입교 1909년 교조 강일순(姜一淳)으로부터 교통을 이어 받았으나 교주가 죽자우치교(吽哆敎)에 대해 회의를 품고 금산사(金山寺)등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수년 동안 도를 닦은 끝에선도 (仙道敎)를 개창하여 포교를 시작하고 1921년보화교(普化敎)로 개칭하고 1922년 다시 보천교(普天敎)로 개명하여 교세확장에 힘썼다. 그리고 보천교(普天敎)는 우국지사들이 모여 은밀한 독립운동을 펼치는 거점의 구실을 하고 조만식(曺晩植),한규숙(韓圭淑) 정복규(鄭復奎) 정상택(鄭常澤)등은 교주 차경석(車京石)과 상의하고 만주에 있는 민족운동단체와 연락하여 30만원의 독립자 금을 판출(辦出)하다 발각되어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과 수방주(水方主) 한규숙(韓圭淑)의 거소인 전의사(典儀祠) 별채에서 발견된 권총 두 자루와 실탄 40여발 이 결정적 단서로 체포되어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외 한규숙(韓圭淑),정복규(鄭復奎) 정상택(鄭常澤)등 3명은 서울로 연행하여 서대문 형무소에서 취조를 받게 되였는데 마침 취조관이 정읍경찰서장을 지낸 구리다(栗田)인데 구리다(栗田)는 교주 차천자(車天子) 즉 차경석(車京石)의 인품을 흠모하고 있는 덕에 조만식(曺晩植)외 3인은 심한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의 월북으로 차천자(車天子)의 독립운동에 기여(寄與)한 공적(功蹟)이 올바로 전하지 못 하고 있다. -차석보(車錫甫) 한말(韓末)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공은 1908년 륭희(隆熙) 2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대동공보(大同共報)를 창간 사장이 되어 항일 정신을 고취하다가 재정난으로 폐간하였다. 그 뒤 부호 교포(僑胞) 최재형(崔才亨)을 사장에 추대하고 복간 언론을 통해 독립정신(獨立精神)을 앙양(昻揚)하는 한편 안중근(安重根)등 애국지사의 독립 투쟁을 후원했다. -차희식(車喜植) 한말 독립운동가 공은 1919년 3.1운동때 경기도 화성군 쌍봉산(雙峰山) 만세를 할 때에 총지휘자로 우정면(雨汀面) 사무소와 화수리(花樹里) 주재소를 습격 소각하고 일경 천단(川端)을 타살했다. 그 후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9년 2개월간 복역했다. -차이석(車利錫) 한말 독립운동가 호 동암(東巖) 공은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한편 평양 대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1년 105인 사건에 관련 7년 형을 선고받고 3년간 복역 3.1운동 후에는 상해로 망명 독립신문 기자와 한국독립당 간부를 역임하고 1922년 임시정부(臨時政府) 국무위원(國務委員)에 선임되었고 안창호(安昌浩) 김구(金九)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했으며 임시정부 비서장으로 13년 동안 재임하다가 중경(重慶)에서 병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단장(建國功勞勳章單章)이 수여되였다. -차미리사(車美理士) 본관(本貫)은 연안(延安), 한성부(韓城府) 서부 고영군 공덕리에서 6남매의 막내로 출생,ꡒ미리사ꡓ란 이름은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을 때 얻은후 남편 성(姓)을 따라 김미리사(金미리사)로 사회활동을 하였다가 1937년 부터 본성(本姓)을 따라 차미리사(車미리사)로 사회활동을 하였다. 차미리사의 연보(年譜)를 살펴보면 1895년에 16세의 어린나이에 서울 무교동 김씨가문(金氏家門)에 줄가(出嫁), 3년이 못되어 딸 하나를 남겨놓고 남편과 사별(死別), 1900년 21세에 중국으로 유학(留學) 소주(蘇州)에 있는 신학교(神學校) 중서녀숙(中西女塾)에 입학하여 1903년까지 약 4년간 신학(神學)을 전공(專攻) 이때에 격렬(激烈)한 뇌신경병(腦神經病)에 걸려서 그 후유증(後遺症)으로 귀가 어두워저 평생 남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194년 25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캔자스(kansas)시 스캐리트 신학교(Scanitt College)에 들어가 공부하고 1906년에 졸업 하였고 1905년 26세에 파사디나(Pasadena)에서 교육구국(敎育救國)을 목적으로 조직한 대동교육회(大同敎育會)의 발기인(發起人)이 되었고, 1907년 28세에 대동교육회를 개편 확대하여 출발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의 발기인을 하며, 1908년까지 대동보국회 신문(新聞)인 대동공보(大同公報)를 발간(發刊)을 하였다, 1908년 1월 29세에 대동보국회중앙회의 상의원(常議員)에 선임(選任)되었고 동년 5월에 한국부인회(韓國婦人會)를 발족(發足)하여 회장(會長)으로 선임(選任)되고 동년 11월에 평북 선천에 설립한 대동고아원(大同孤兒院) 운영(運營)에 참여하고, 1910년 31세에 국권(國權)을 상실(喪失)하자 여성(女性)을 교육을 위해 동년 9월에 귀국(歸國)하여 동년 12월에 배화학당 사감과 교사로 취임하여 여학생들에게 애국(愛國), 애족(愛族), 독립정신(獨立精神)을 고취(鼓吹)를 하였고 1919년 40세에 3/1운동 정신을 계승(繼承)하여 동년 9월에 종교예배당에 부인야학(婦人夜學)의 강습소(講習所)를 설립하였고 1920년 41세에 조선여자(朝鮮女子) 교육회(敎育會)를 창립(創立)하여 동년 2월에 회장으로 선임(選任)되고, 동년 3월에 배화 여학교 교사 사임하고 조선여자 교육회 기관지(機關誌)인「여자시론(女子時論)」2호를 발간, 조선여자교육회 산하에 조선여자 야학회를 창설하여 구가정 부인에게 신교육을 동년 4월에 실시하였고 동년 9월에 부인야학 강습소를 새문안교회로 이전, 1921년 5월 42세에 청진동에 조선여자 교육회 화관 마련, 1922년 1월 43세에 조선여자 교육회 명칭을 조선여자 교육협회로 변경 동년 3월에 여자기독교 청년회(YWCA)의 발기위원이 되었고 1923년 3월 44세에 야학강습 명칭을 근화학원(槿花學院)이라 하고 동년3월에 주학부(晝學部)를 신설하고 남선순극단(南鮮巡劇團)을 만들어 동년 11월~12월을 순회공연,1924년 12월 45세에 안국동 락천사(樂天舍)로 근화학원을 이전하고 음악부와 영어부를 동년 12월에 확장, 1925년 8월 46세에 각종학교 근화여학교로 정식인가, 동년 12월에 동년 12월에 조선 기독교(基督敎) 봉역자(奉役者) 회의(會議)에 참석하여 기독교의 사회복음화 논의(論議) 1927년 4월 48세 근우회(勤友會)의 발기위원,1930년 1월 51세에 광주학생 운동의 영향을 받아 근화여학교 전교생300명이 만세시위에 참여, 동년 9월에 근화여학교 개교5주년 김미리사 교장선생 근속 10주년 기념식 거행, 1934년 55세에 재단법인 근화여자 실업학교로 정식인가,액수는 십만원, 목적은 근화실업학교영, 재단법인 설립자는 김미리사(金美理士),독고선(獨孤璇),김용규(金容圭),이인(李仁) 장병량(張秉良)등 5인이다, 동년 3월에 김미리사여사 교육사업(敎育事業) 축하회(祝賀會)를 개최, 1938년 10월 59세에 덕성여자실업학교로 교명 변경, 1940년 8월 61세에 총독부 압력으로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남, 1948년 69세에 김구(金九) 선생 남북회담을 지지하는 108인의 성명서를 4회나 발표, 1952년 1월 73세에 덕성여대(德成女大)의 이사장직(理事長職)을 사임(辭任)하였고 1955년 6월 1일에 76세로 별세(別世) 동년 6월 3일에 명동 전주교 성당에서 미사를 마친후 우이동 묘지에 안장 되었다. 2002년 8월 15일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로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敍)를 하였다. -차영철(車永澈) 한말 독립운동가 공은 1920년 11월 28일 중국에서 출생하여 1940년 2월에 한국임시 정부 산하 서안주재 한국청년 공작대 척후 공작원 이서중(李瑞重)과 같이 전지 지하 공작대에 입대 하여 광복군 제2지대 이범석 장군 휘하에서 조국 광복을 위하여 많은 전투를 하였다. 1943년 7월 20일 김천성(金天成) 이서중(李瑞重) 중국인 진충 (陣忠)등과 같이 태원에서 계휴로 가는 일본의 군 용 열차를 습격 폭파하여 일본군 20여명을 죽이고 50여명의 중상을 입힌 대 전과를 거두었다. 1943 년 8월에 태원에 주재한 일본 헌병대의 기습을 받 아 공은 체포되어 1944년 12월 태련 주재 일본군 제 3051부대 군법회의에서 15년 형을 언도받아 북경 형무소에 수감 되였으며 1945년 2월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 1945년 3월에 공주 형무소 로 이감 1945년 8월 15일 조국해방으로 출감 되 였다. 1947년 8월에 민족 청년단 부산중구단 조 직 1950년 2월에 대한청년단 부산 중구단 조직부 장 1968년 3월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수여 1968년 3월 부산시 어패류처리 조합장 1974년 광복회 부산지구 연합지부 사무장 1974년 12월 에 건국포장 수여 1979년에 광복 장학회 부산지 구 부회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愛國章) 수 상 연안 차씨 종친회 부산경남도지부 회장직 역임 2002년 5월 3일 별세 대전국립묘지(大田國立墓 地)에 보훈장(報 勳葬)으로 안장 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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