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지원의『면학편』중에서
악한 사람을 호랑이 피하듯 하라
고산 지원(孤山智圓 : 976~1022) 법사는 뛰어난 재주와 깊은 학문으로 경론에 대하여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서호(西湖) 가에 높이 누웠으니, 권세로도 부귀로도 스님을 꺾을 수 없었으므로 속된 무리들은 스님과 벗할 수 없었다.
이때 문목왕공(文穆王公)이 전당(錢塘)에 오게 되었는데, 군(郡)의 스님네들이 모두
관문까지 마중을 나가자고 하자, 스님은 몸이 아프다면서 가지 않고는 심부름꾼을 보고 웃으며 말하였다.
"자운법사(慈雲法師)에게 내 말을 전하시오. 전당 땅에 중이 하나 있다고."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일이라고 찬탄하였다.
스님은 늘 비장(脾臟)에 병이 있어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는 가운데서도 침상에 붓과 벼루를 깔아놓고 저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는 대중에게 고하였다.
"내 나이 마흔아홉인데 이미 오래 못 살 것을 안다. 내가 죽거든 땅을 골라 후하게 장례치르느라 내 허물을 더 불리지 말고 너희들이 항아리를 합쳐서 장사 지내다오."
죽음에 임박해서 스스로 제문 (祭文) 을 지어 부탁하였다.
삼가 강산과 달과 구름을 차려놓고 중용자(中庸子 : 지원법사의 호)의 영을 제사 지내노라. 그대는 본래 법계의 원상(元常)이며 보배롭고 완전한 묘성(妙性)으로서, 아직까지 동정의 조짐이 없었으니 어찌 오고 감에 자취가 있겠는가. 이제 일곱 구멍(七竅 : 사람 얼굴에 나 있는 구멍)을 뚫으니 혼돈(混沌)이 죽고 6근이 나뉘어 정명(精明 : 一心)이 흩어지게 되었도다. 그리하여 그대 스스로의 마음을 보건대 바깥 경계와 다른 바가 있도다. 생존과 사멸 두쪽을 집착해서 항상 흔들려 쉴 날이 없으며 깜깜하여 비출 줄을 모르는구나.
내 혼돈(混沌)을 회복하여 정명(精明)으로 돌아가려 하노라. 그리하여 허깨비 아닌[非幻] 법에서 허깨비 언설을 지어내는 것이니, 허깨비 아님도 없거늘 어찌 허깨비라는 법이 있으랴. 그대 중용자도 묘하게 이 뜻을 알아들을지어다. 그대가 이미 허깨비 생을 받았으니 허깨비 죽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허깨비 몸이 있어서 허깨비 병이 있게 되었고, 입으로는 허깨비 말을 빌어 허깨비 제자에게 허깨비 붓을 잡아 허깨비 글을 쓰게 하노라. 그리하여 미리 그대 허깨비 중용자를 제사 지내고 끝없는 뒷사람들에게 모든 법이 허깨비 같음을 알게 하고자 하노라.
이렇게 하면 허깨비삼매[如幻三味]가 여기 있다 하리라. 아! 삼매, 그것도 허깨비로다. 잘 받아 먹으라.
그리고는 가부좌한 채 열반에 드셨다. 「한거편(閑居編)」
오호라. 불법이 점점 쇠약해지는데 부처님 가신 지는 더욱 멀어지는구나. 비록 머리 깎고 먹물 옷 입은 사람은 많으나 도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더욱 희귀하구나. 명예와 이익 다투는 것을 본분으로 삼고 불법을 유통하는 데는 아이들 장난으로 삼으니 마침내 법문의 문을 여는 이는 드물고 교법이 쇠퇴해지는구나.
진실로 뒷사람에게 힘을 주고자 하면 이 도를 굳게 걸머져야 한다. 너희들은 마음을 비우고 법문을 듣고 몸을 깨끗이 하고 스승을 의지해서, 가깝게는 자신의 이름을 떨치고 멀리는 성인이 되기를 기약하여라.
그러므로 몸을 닦고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되 처음과 끝을 한결 같이 하라.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행동을 삼가해 악한 벗을 보거든 호랑이를 피하듯이 하고, 어진 벗을 만나거든 부모를 섬기듯이 하라. 예의를 다해 스승을 받들고 법을 위해서는 몸을 잊어야 하며, 선행을 하더라도 자랑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고, 허물이 있으면 즉시 고쳐라.
어진 이를 만나거든 어진 이가 되기를 생각하고 부처님의 구도정신을 사모하며, 선재동자가 스승을 찾아다닌 것을 본받아서 명예와 이익에 마음 흔들리지 말고 생사를 근심하지 말라. 만일 공이 이루어지고 일을 성취하려면 반드시 가까운 데서부터 먼 데로 올라가야 한다. 명예를 구하지 않는데도 명예가 스스로 드러나고 대중을 부르지 않았는데도 대중이 스스로 오게 되고 지혜가 가득하여 번뇌를 몰아내고 자비가 넘쳐흐르면 사람들을 포용하게 될 것이다.
우선은 자신의 몸을 선하게 다스리고 나중에 통달하거든 천하까지 이롭게 해서 참된 진리가 떨치고 꺼졌던 지혜의 횃불이 다시 밝아지게 한다면 참으로 부처님의 제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세속의 더러운 풍습에 휩쓸려 살면서 자신의 잘못도 깨닫지 못하고 악습만을 쌓고 익혀서 스스로의 몸을 망치려 하는가?
또 율종이니 논종이니 하여 마치 불법에도 대소의 학문이 다른 것 같으나 모두 불심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니 마음을 법계에 두어서 함께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이미 대법(大法)을 알지 못하니 경론을 익힌 자는 계율을 버릴 물건으로 알고, 율을 주장하는 자는 경과 논을 쓸데없는 것으로 알며, 대승을 익힌 자는 소승을 멸시하고, 소승을 들은 자는 대승을 업신여긴다. 이는 단지 남의 편견을 따라 서로 시비하는 것이니 어찌 부처님의 참뜻에 융합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통달하여 피차를 보지 않고 따지지 않는다면 서로가 서로를 구제하고 함께 부처님의 참뜻을 익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깊이 안다면 어찌 나의 주장만 옳다고 고집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각자의 재능을 헤아려서 능력에 따라 공부하되 성품이 넓고 민첩한 사람은 여러 종파의 학문을 겸하여 배우는 것이 좋고, 지견이 얕은 사람은 한 가지 전공에만 전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알고 공부한다면 비록 강줄기는 다르지만 함께 화합의 바다에 돌아가며, 함께 해탈의 자리에 앉아 어두운 길의 나침반이 되고 교문의 목탁이 될 것이다.
■ 고산지원은?
고산지원(孤山智圓) 스님은 중국 송(宋)나라의 스님으로 자가 무외(無外)다. 어려서부터 병이 잦았으나 항주 고산사에 상주하며 항상 저술에 힘쓰니 정진하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의해 저잣거리와 같았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