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덕 칼럼] 우파국민의 형성과정과 태극기 시위의 역사적 의미
단군 이래 처음으로 1948년 대한민국이란 이름의 민주공화국이 탄생했다. 이 민주공화국의 경제적 기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였고 그 정치체제는 자유민주주의였다.
대한민국은 우파국가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파국가를 받쳐주는 우파국민이 아직 없었다. 애국애족의 마음은 가득했지만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대통령 이승만 말고는 거의 없었다.
해방공간에서 좌우를 가릴 것 없이 누구나 민주주의를 떠들었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중)민주주의 간의 구별은 늘 모호했다. 이런 상황에 1946년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0퍼센트가 경제체제로는 사회주의가 좋다고 답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지식인층의 선호도는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건국 당시 대한민국은 한 마디로 모래 위에 세워진 나라였다. 그 모래를 다져 단단한 땅으로 만드는 과정은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우파국민이 없는 우파국가는 1950년대에는 이승만 한 사람의 카리스마에 의해 간신히 지탱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6.25의 위기를 극복했지만 그의 개인적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통치행태는 독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부정선거를 계기로 일어난 4.19 학생의거는 독재를 몰아냈으나 인구의 절대 다수가 농민이고 우파국민은 아직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학생들의 때 이른 민주화 요구는 여전히 자유민주주의 우파와 인민민주주의 좌파 간의 구별이 모호한 가운데 정치사회적 혼란을 불러왔다.
이 위기를 극복한 인물이 군인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불과 18년 사이에 기아선상의 가난한 농업국가를 어엿한 산업국가로 바꾸었다. 천지개벽과도 같은 이 기적과 함께 중산층 우파국민이 비로소 탄생했다. 그 이전에는 우파국민은 존재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위대한 통찰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했지만 먹고살만한 수준의 사유재산을 가진 자유시민의 양성이 없이는 자유민주주의가 불가능함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지식인층의 고급 취향과는 안 어울리는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는 통속적인 슬로건을 내걸고 백 년 전 명치시대의 일본처럼 국가 주도로 기업과 기업인을 키우고 시장을 확대하면서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바깥으로는 북한의 남침 위협이 가중되고 안으로는 자유시민 즉 우파국민이 아직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경제와 안보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자니 정권 안정이 모든 사업의 대전제였다. 1969년 삼선개헌과 1972년 시월유신은 정권 안정을 위해 박정희가 내린 고뇌에 찬 결단이었지만 그의 애국심을 이해해주는 지식인은 거의 없었다. 대학생 교수 언론인 등 지식인에게 박정희는 그저 타도해야 할 군인 독재자에 불과했다.
당시의 지적 수준으로는 박정희에 대한 이해가 거의 불가능했던 것 같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덕분에 등장한 중산층 자유시민들 즉 우파국민도 독재자 타도에 동참했다. 10.26은 표면적으로는 김재규가 저지른 시해사건이었지만 그 속내를 더 들여다보면 박정희가 낳은 자식들이 박정희를 죽인 역사적 비극이기도 했다.
박정희가 영구 집권을 꾀했다면 경제개발 따위는 하지 말고 자신이 살기 위해 나라를 말아먹은 김일성처럼 철저하게 독재를 해야 옳았다.
하지만 박정희는 조국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는 길을 택했다. 우파국민이 형성은 되었으나 아직 성숙단계에 이르지 못한 상황에서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터져 나온 민주화 시위는 4.19 때처럼 혼란을 불렀다. 민주화 세력의 요구에는 또 다시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가 애매하게 섞여 있었다. 광주사태로 인해 혼란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 혼란을 신속하게 극복한 인물이 군인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박정희 이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했지만 혼란을 극복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부의 힘으로 정권을 안정시키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민주화 세력을 신뢰하지 않았던 그의 판단이 옳은지 여부는 좌파와 우파 사이에 두고두고 논란거리로 남겠지만 북한의 남침 위협과 우파국민의 미성숙, 일부 정치꾼들의 수상한 선동, 그리고 제5공화국의 혁혁한 성취를 고려하면 전두환이 옳았다.
전두환은 북한의 위협에 맞서 안보를 지키는 한편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으로 한국 자본주의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았고 중산층 우파국민의 수를 크게 늘렸다.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대한민국의 도약을 전 세계에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자유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우파국민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실질보다 명분에 집착하고 군인을 저평가하는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파국민의 눈에 전두환 정권은 타도해야 할 군사독재정권으로만 비쳤다. 우파국민의 성숙도가 아직 낮다는 단적인 증거였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았다.
총칼로 권력을 잡은 군부가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떠나는 것은 중남미나 동남아시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데에는 넥타이부대를 앞세운 민주화 세력의 공로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육군사관학교에서 미국식 자유민주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엘리트 장교들의 애국심과 자부심 그리고 자제심이 더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80년대 말 민주화의 일등 공신은 아직 성숙단계에 이르지 못한 우파국민이 아니고 그들의 요구 앞에 자기희생을 각오한 전두환과 신군부였다는 사실을 눈치 챈 우파국민은 아직도 거의 없다.
전두환은 2021년 사망할 때까지 민주화를 내세우는 좌파세력에 의해 30년 넘게 조리돌림을 당했고 우파국민은 그냥 보고만 있었다. 전두환은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았을까. 설령 미리 알았다 해도 전두환은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는 바보짓을 감행했을 것이다.
그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이 영광이라 교육받은 군인이었다. 그가 목숨 걸고 대통령 시해사건을 공정하게 수사하다가 대통령까지 되어야 했던 것도 사관학교 교육의 효과였다. 그런데 민주화 세력에게 그런 전두환을 속죄양으로 바친 것은 우파국민의 죄였지만 다른 한편 80년대 대학가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던 주사파에 대해 너무 관대했던 것은 전두환의 죄였다.
서울대와 연고대에 다니는 전도유망한 학생들이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 동지”를 외칠 때 한국의 언론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대학가의 이 해괴 망칙한 정치 코미디에 대해 제대로 보도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가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도 별로 없었거니와 설령 안다 해도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말도 안 되는 그 주사파가 30년 뒤 청와대를 장악하리라고는 그때는 상상조차 못했다. 전두환과 신군부 또한 우파국민과 마찬가지로 순진하고 어리석었다. 주사파를 탄압해도 탄압의 강도가 세지 않았고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전두환과 신군부의 자진 퇴장으로 권력이 마침내 민주화 세력에게 넘어갔다.
30년 가까이 우파국민을 대신해서 우파국가를 지탱해온 군부의 힘이 사라지자 주사파 중심의 운동권이 민주화세력의 비호와 은폐 아래 정계를 위시해서 각계각층으로 퍼져나갔다. 80년대 말부터 공산권의 붕괴가 시작되었고 90년대 초에는 북한 동포 3백만이 굶어 죽었다. 그런데도 대학가의 주사파는 요지부동이었다. 혹시 누군가 전향을 하면 배신자로 찍어 몰매를 가했다. 우파국민 대다수가 그런 사실을 몰랐고 알아도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고 했다. 심지어 좌파 같은 것은 없다는 물정 모르는 낙관론도 떠돌았다. 그러는 사이 우파국가 대한민국의 좌경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민주화 세력은 겉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듯했지만 김영삼 정권에서 김대중 정권을 거쳐 노무현 정권으로 갈수록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에 대한 비판과 조롱과 부정은 당연지사가 되었고 성장보다는 분배를 더 중시하면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을 자주 드러냈다.
민족주의와는 질이 다른 민족지상주의에 따라 친북적 내지 종북적 자세를 자주 보여주는 동시에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자꾸 자극하고 한미동맹을 흔드는 일까지 비일비재했다. 특히 대통령 노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