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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3 - 유럽을 침략해서 자리를 잡고는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다!
1451년에 약관 20세로 술탄의 자리에 오른 메흐메트 2세는 불과 2년 후인 1453년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마침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후에는 오스만은 변경 공국에서 제국으로 신분이 급상승을 하게 됩니다.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삼은 뒤 스스로를 '로마 황제 (Kayser-i Rum)'
라고 칭하였으며.....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를 비롯한
기존의 기독교 성당 등을 모스크로 개조하는등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서 도시를 개조합니다.
동로마의 천년 고도이자 정교회의 심장이며 기독교의 5대 총대주교좌 도시 중에
로마와 더불어 이슬람의 정복을 면한 두곳 중에 하나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이슬람교도 튀르크인의 영토로 넘어갔으니 로마 제국에 종지부를 찍은 것입니다.
유럽 중세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중세의 종언을 고할 무기인 공성포가 사용되었고,
성벽의 의미도 무너졌기 때문인데.... 소아시아 및 남유럽과 서유럽 및 중부
유럽의 문화적, 정신적 연결 고리가 끊기고 발칸반도도 이슬람 국가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경제적, 정치적 중심지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요한 통로였으니 보스포루스
해협은 폭이 1 km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과 물자를 손쉽게 옮길 수 있었으니 지중해를
통한 해운으로 물건을 수송하는 상인들로써는 최대의 경쟁자이면서.... 넘을수 없는 장벽이었습니다.
도시는 아시아와의 교역에 막대한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동방의 비단들은 이 통로를 통해 들어왔고
군사적으로도 중요했으며, 해협을 강 건너듯 하니 군대를 옮기기도 쉬웠고 흑해와
지중해가 만나는 지점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의 통제권을 쥐고 있다면 흑해를 장악할수 있었습니다.
동로마 황제는 유럽의 모든 왕들 보다 더 높은 직위였으며,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도아케르는
황제를 폐위시킨뒤 그 자리를 계승하지 않고, 제위와 명목상의 황제로서의
권한을 동로마 황제에게 넘겼으며 서한에다가 "로마 제국 황제 폐하께" 라고 버젓이 써붙였습니다.
1204년 베네치아의 꼬임에 넘어간 제4차 십자군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점령당해 동로마
제국은 멸망이 확실해졌지만 처음에는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킬 목적은
아니었으니.... 이는 돈을 받지 못하는 사정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어 나온 결과였습니다.
동로마 제국은 제위 계승문제로 시끄러웠으니 삼촌에게 쫓겨난 황태자 알렉시오스는 십자군에게 거액의
전쟁비용 부담, 성지 수호를 위한 병력 파견, 동서 교회 대통합이라는 조건을 제시해 자금난에 허덕
이던 십자군을 유혹했으니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뚫는 대신에 골든혼만 주변의 성벽을 공격해 함락합니다.
알렉시오스 4세는 십자군에 약속했던걸 지불할 능력이 없었으니 제국의 금고는 텅 비어 있었던지라,
십자군에 약속했던 돈을 지불하기 위해 교회 재산까지 손대기에 이르렀고 '동서 교회의 통합'
이라는 제국 신민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일까지 알려지자 시민들의 분노가 황제를 향합니다.
금고가 빈 것은 삼촌인 전 황제 알렉시오스 3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면서 몽땅 털어갔기 때문
인데, 1204년 7월 십자군에 체포되었으나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두카스의 도움으로 풀려난후
사위 테오도로스 1세가 다스리던 니케아 제국으로 가서 제위를 요구하나 거절당하자
이슬람 셀주크족 룸 술탄국으로 가서 케이휘스레브1세와 함께 니케아를 공격하지만 포로로 잡힙니다.
혼란이 계속되는 와중에 알렉시오스 4세가 살해당하고, 반 십자군성향의 알렉시오스 5세가 즉위했는
데..... 알렉시오스 5세는 전 황제가 십자군과 맺었던 협약의 이행을 거부했으니, 그로 인해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재침공하여 제국을 멸망시키고는 돈 대신에 라틴 제국을 설립한 것입니다.
그러자 망명 세력들은 니케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을 세웠고,
이후 니케아 제국의 황제 미하일 8세가 내부의 도움을 받아 1261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니 라틴 제국은 멸망했고 동로마 제국은 다시 부활합니다.
그런데 미하일 8세는 니케아 제국에서 라스카리스 왕조를 타도하고 즉위한지라 정통성이
부족했으니, 지지 기반을 위해 유럽 지역으로 진출을 위한 군사 원정을
수행했으며 거기에 추가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재건 까지 겁치며 많은 비용을 쓰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높은 세금을 매기게 되면서 아나톨리아 방면 신민들과 유력자의 불만을 사게 됐으니,
후계자인 안드로니코스 2세가 민심 안정을 위해 국방력 약화를 감수하고서라도
감세 정책을 폈는데, 문제는 그 시점이 투르크족인 오스만 베이국이 창건된 때와 겹쳐 버렸습니다.
니케아 제국의 본거지는 오스만 베이국에게 점령당해 경제적 중심지인 아나톨리아 반도를 잃게되었고,
또 북쪽에서는 세르비아가 제국을 선포하면서 그리스 북부를 점령하면서 영토를 잃었으며, 14세기
중반 동로마 제국을 휩쓴 흑사병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구 절반이 사망하면서 제국은 허약해졌습니다.
몽골이 휩쓸고 간 폐허에서 일어난 오스만 베이국은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반도를 휩쓰니, 2대 베이
오르한 가지는 갈리폴리 반도에 교두보를 마련한후 발칸반도로 세력을 확장했으니 1389년 1차 코소보
전투에서 술탄이 전사했음에도 세르비아군을 무찔렀고.... 이후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를 잇따라 격파합니다.
동로마 제국의 영토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만 남게 됐으며 1371년 로마 황제가
오스만 베이 무라트 1세의 신하가 되는 굴욕을 당했고, 1396년에 프랑스와 헝가리등 십자군을
오스만군이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격파한 뒤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보스포루스 해협에 아나돌루 히사리 요새를 세워 동로마 제국을 압박했던 오스만의 바예지트 1세는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패배해 포로로 잡히면서 소강 상태로 접어드는데.... 이후 메흐메트
1세가 10여년에 걸친 내전 끝에 왕위 경쟁자였던 형제들을 제거함으로써 오스만을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5대 술탄 메흐메트 1세는 온건정책으로 아나톨리아 반도는 현상유지 정책을 폈고 앙카라 전투후 독립한
세르비아 등을 다시 신하국으로 삼았으며 6대 무라트 2세는 오스만을 바예지트 1세 때로 되돌려
놓았지만..... 알바니아의 군주인 제르지 카스트리오티와 헝가리의 야노슈 후냐디의 저항에 부딪힙니다.
결국 무라트 2세는 헝가리-폴란드 동맹과의 전쟁에서 희생만 클 뿐 성과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아들
메흐메트 2세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나이가 어려 관료들과 군부의 불만에 부딪혔고
어린애가 술탄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헝가리 왕국과 폴란드 왕국는 군대를 일으켜 진격해 옵니다.
무라트는 1444년의 바르나 전투에서 승리한뒤 아들을 폐위하고 복위한후 1448년의 2차
코소보 전투에서 헝가리군을 연파하여 강화를 맺었는데 그후 알바니아 원정에
나섰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한 뒤 세상을 떠났고 아들 메흐메트 2세가 복위합니다.
7대 술탄 메흐메트 2세 입지는 불안정했으니 무라트 2세때 오스만 술탄국에 새 움직임이 일어났기
때문인데, 오스만 제국은 창건자 오스만 1세 개인의 세력으로 일구어 낸게 아니라 튀르크계
부족들의 연합 정권이었으니... 초창기 오스만 지배층은 이들 튀르크계 부족들의 후예들 이었습니다.
예니체리가 창설된 것도 군사적으로 이들의 영향력을 덜 받기위한 술탄들의 노력이었으니 무라트 2세는
기독교도 소년들을 징집하여 관료로도 부리자고 생각했으니, 따라서 메흐메트 2세의 치세가
시작되었을 당시 오스만 술탄국의 관료층은 기득권 세력과 데브시르메 징집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현 상황을 유지하자는 파 (기득권 세력) 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파 (데브시르메) 로 나뉘어 논쟁을 벌였는데.... 이때 무라트 2세의
신임을 받던 재상 할릴 파샤는 기득권 세력, 그것도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할릴 파샤는 오스만 궁정 내 첨예한 정치적 판도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겪으면
권력의 중심이 아나톨리아 기반의 베이(bey) 들과 대립하는 기독교 피정복민, 즉 루멜리아
(유럽) 출신인 데브시르메파 쪽으로 넘어갈 것이라 생각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을 반대 했습니다.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치명적인 외교적 빌미를 제공하니, 동로마의 재상 루카스 노타라스 대공의
위세를 꺾고,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콘스탄티노스 11세는 할릴 파샤와 메흐메트 2세에게 술탄위
계승 과정에서 쫓겨나서 동로마 제국에 망명한 오스만 왕족 오르한의 관리 비용을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오스만 궁정내 여론이 갈리는 도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먼저 도발하고 나오니 할릴 파샤
를 비롯한 기득권층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을 반대할 명분이 사라졌으니, 메흐메트
2세는 동로마 측의 사신에게 아나톨리아의 반란을 먼저 진압하고 나서 답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후 사신에게 할릴 파샤가 내지른 성토를 보면 동로마 제국의 남은 존재 자체가 오스만 술탄국에게 위험이
되는 이유가 극적으로 설명되니 “오오, 멍청하고 어리석은 로마 놈들아, 네놈들의 교활함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지난 술탄께서는 네놈들에게 관용을 베푸셨겠지만, 지금의 술탄께서는 생각이 다르시다.”
“네놈들은 전 술탄께서 체결하신 화평의 먹물이 마르지 않았는데도 헛된 망상으로 겁주는데 트라키아에서
오르한을 술탄으로 옹립해 보든지, 도나우강 너머 헝가리 놈들을 불러오든지, 뭐든지 해 보란
말이다. 다만 이런 짓을 한다고 너희는 고토를 회복하는게 아니라 남은 것마저 몽땅 잃을거란 것을 말이다!
메흐메트는 할릴 파샤를 비롯 아나톨리아 튀르크계 출신 귀족층을 제압하고, 무라트 2세때 정계에 진출한
데브시르메 세력을 친위세력으로 삼아 전제군주정을 수립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으니, 군세를 형성
하는 유목제국의 성격이 강했던 초기 오스만 입장에서 군주의 권위를 키우는 방법은 전쟁이 효과적 입니다.
7대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여 유럽의 지배자를 자처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으니
자신이 주도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는 것을 선택하였고, 1452년에 보스포루스해협
유럽 방면에 새로운 요새인 루멜리 히사르(Rumelihisarı) 를 건설하니 이는 바예지트
1세가 건설한 아나톨리아 쪽 요새와 함께 보스포루스 해협에 대한 완전한 장악을 가능하게 합니다.
동로마 제국에게 남은 영토란 제후국인 모레아가 통치하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가 전부였으며...... 그리고 실질적으로 방어가 가능한 건 콘스탄티노폴리스뿐이었습니다.
1452년 루멜리 히사리 요새가 완공되자 동로마 제국에 비상이 걸렸는데....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교황과 동맹을 맺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해 겨울에 관료와
성직자들을 비롯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민들도 탐탁지 않게 생각한 동맹이 맺어집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적이 접근할수 있는 서쪽 통로에는 험준한 산들이 있었고, 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이 있었으며 아무리 좁다 한들,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는 것은 굉장한 도전이 필요한
일이고 건너편에는 한 겹뿐이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가장 단단한 성벽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쪽 마르마라 해는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나오는 강한 해류의 영향을 받았고, 변변찮은 항구도
없으니 거대한 도시를 점령할 군대를 배치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며 북쪽 금각만이 만만
했는데, 그곳에는 항상 엄청난 수의 함선이 상주하고 있었으니 말 그대로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밖으로 도시가 팽창하자 테오도시우스 2세는 새로 성벽을 쌓으니 제1 방어선
으로, 6㎞ 성곽은 안쪽에 내벽 바깥에 외벽이 있었으며 외벽과 해자 사이에 parateichion
이라고 불리는 흉벽(胸壁) 이 자리했고...... 성벽 사이는 방어용 탑의 샛문으로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내벽의 높이는 12m 에 달했고 두께는 4.5~ 6m 였으니 벽의 안쪽은 모르타르로 채워졌고 지진에
대한 보강도 이뤄졌으며 96개의 탑들이 20~70m 마다 배치되었는데, 탑들은
높이가 15~ 20m, 폭이 10 m 였으며 막벽으로 외벽과 내벽이 50m 간격으로 엇갈려 있었습니다.
탑의 최상부 옥상에 전투 공간이 마련되었고 탑 내부는 2개 층으로 나뉘어 있었으니, 탑의 아래층은
도시 쪽으로 열려 있었고 창고로 사용되기도 했고 위층에서는 바깥쪽으로 난 창문으로 적에게
사격도 가능했으나.... 보수 과정에서 창문과 총안이 사라져 최상부만이 유일한 전투 공간이 됩니다.
두께 2m 외벽은 내벽 보다 조금 낮은 8~ 9m 높이었으며, 페리볼로스 쪽으로 아치형 출입구가
있어 도시 쪽에서 정문으로 들어가거나 안쪽 방어탑에 있는 샛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또한 높이 12~14m, 폭 4m 의 외벽 방어탑이 내벽의 탑과 탑 사이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내벽은 최후 저항, 흉벽은 일차저지이니 방어는 외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외벽은 가공할만한
방어 체계를 갖추게 되었으니, 외벽은 공간의 양도 적지 않았고, 성벽의 다른 부분과 연계되어 있었던
만큼 성곽에서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해자는 외벽에서 20m 떨어진 곳에 20m 폭으로 파여 있었습니다.
10m 깊이의 해자 안쪽에는 총안이 갖추어진 1.5m 높이의 흉벽이 있어 일차 방어의 역할을 수행
했으며 막벽이 해자를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막벽 안쪽에는 수도관이 있어 해자에
물을 채우는 송수관 역할을 했으며, 해자는 성 로마누스 성문 방면에서 급한 경사 형태가 됩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입지조건 부터 방어에 최적화 되어있었는데, 3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
침입자들은 서쪽 방면으로 밖에 접근할수 없었으니, 천혜의 입지조건에 기존 공성법
으로는 공략이 불가능할 정도의 크고 높은 성벽까지 재래식 성곽 요새의 극치를 자랑했습니다.
해안쪽 성벽은 한겹이지만 다른 성벽보다 튼튼한데다가, 해안이므로 공략하기에 만만치 않은 난이도고,
남쪽 마르마라해는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밀려오는 강력한 해류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평시에도
항해술을 익힌 승조원이 있는 튼튼한 선박만 근접이 가능하였으며 배를 접안하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될 때까지 적군이 성벽을 넘은 사례는 한번도 없었으며, 동쪽의 하기아 소피아 방면
성벽은 고대 부터 비잔티움의 신전이 있었던 곳으로, 고도가 높고 노출된 면이 적으며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밀려오는 강력한 해류를 먼저 만나는 곳이라 평시에도 바다 쪽으로는 접근이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다만 북쪽의 금각만 성벽은 해류의 영향도 없고 만의 폭도 좁아 건너편 육지에서의 지원사격도
가능한 취약점이라 1204년의 제4차 십자군 때는 베네치아인들이 집중 타격하였고
끝내 버틸수가 없었으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황제가 반대파에게 살해되어 혼란
스러웠고 방어력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빈약한 상태였으며 내통자 때문에 성문이 열렸습니다.
당연히 동로마 제국도 약점을 알고 있었기에, 국가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금각만에 해군을 배치
했는데, 따라서 섣불리 공격했다간 성벽의 수비군과 바다의 해군에게 연합공격을 받게
되었므로, 사전에 동로마 해군 부터 무력화하고 제해권을 쥔 다음에야 공격이 가능했습니다.
위와 같은 까닭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난공불락이었으며.... 422년에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쌓은 뒤 도시가 정면으로 뚫려 함락 당하는 것은 무려 천년이나
뒤인 1453년으로 그것도 19번을 방어했는데 이번에 20번째 전투에서 무느진 것입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려는 침입자들의 공격 방향은, 금각만의 동로마 해군을 괴멸
상태로 만들고 공략하지 않는 한 서쪽 방면으로 정해질수 밖에 없었으니....
가장 방어가 탄탄한 곳으로 공격할 수밖에 없는 불리함을 안고 공성전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해자를 넘어 제1 성벽인 흉벽을 기어오르는 동안, 제1·2·3성벽으로 부터 합동공격을 당했으며 해자를 일부
라도 메우지 않으면 공성병기가 성벽이나 성문에 접근하기 어려우므로, 난이도는 올라가며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고생한뒤 제1성벽을 함락시켰다 싶을때, 흉벽 공략과는 비교도 안되는 손실이 시작됩니다.
흉벽 위와 제1· 2성벽 사이로 들어온 공격측 병력은, 제2성벽인 외성벽으로 후퇴한 수비측 병력의 외벽·내벽
으로 부터 공격을 당하며, 흉벽 성문과 외벽의 성문이 엇갈려 있어 흉벽을 함락시키는데 사용한 중장비
는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이며 외벽은 흉벽 보다 훨씬 높으니 흉벽을 넓게 헐어 버리면 외벽에
중장비를 댈수 있겠지만 제2· 3성벽으로 부터 돌과 화살이 계속 쏟아지니 대공사를 진행할 수 없습니다.
엄청난 손실 끝에 제2성벽을 함락했다고 치면 수비군은 제3성벽인 내성벽으로 퇴각하니 이제 똑같은 과정을
한번만 더 되풀이하면 되겠지만 제3성벽은 제2성벽 보다도 높으니 지휘관도 냉정을 잃게 되며, 부대
전체의 손실률과 사기는 이루 말할수 없이 악화되고, 병량을 비롯한 보급물자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흘러 싸우기 좋은 계절이 가고 겨울이 오면 추위 까지 붙어 난이도는 또 다시 올라가니 눈물을
머금고 퇴각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1천년 동안 이런 전투가 19번이나 실패한 이유 입니다.
성문은 총 9개였지만 전해지는 이름은 많으니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수도 있고, 개보수
과정에서 성벽을 폐쇄했을 수도 있으며 본 성문 이외에도 군사용 문이 따로 있었고, 수없이
많은 샛문들을 통해 돌아다닐 수 있게 하였으니 6㎞ 에 달하는 긴 성벽이니 필요한 조치입니다.
결국 악명높은 테오도시우스 3중 성벽은 마지막까지 완벽한 정공법으론 함락되지 않았는데, 제노바인
용병 수비대장이 부상을 입어 드러누워 버리는 바람에 지휘체계가 마비되고, 몇달 동안의 공성포
세례로 간신히 낸 성벽의 구멍을 통해 밀어 넣은 최정예병력 (예니체리) 이 맹활약을
펼치는등, 호재와 피나는 노력에 행운까지 한꺼번에 겹쳐 시너지 효과를 낸 후에야 간신히 함락됩니다.
수비대가 후퇴하면서 성문을 미처 닫지 못한건 공격측이 정신없이 밀어붙였기 때문이고, 수비대장의
부상도 지속적인 파상공세로 수비대의 손실이 높아진 끝에 일어난 일이며, 성벽 틈으로 최정예
병력을 밀어넣어 진출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은 공성전의 기본으로 막대한 물량과 인원을
동원한 오스만 술탄국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면서 '운이 좋아질 때까지' 피나는 공을 들인 결과입니다.
오스만 술탄국이 반년이 넘는 공성전에 전력 투구하며 매몰된 사이에 아나톨리아 영주들의
반란이 일어날수도 있다는 시간 제한에 시달렸으니, 공성에 실패하면 오스만이 역으로
끝장나는 것이라..... 테오도시우스 방벽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었는지 짐작할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