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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언 洪純彦
400여 년 전, 어려움에 처한 한 중국 여인이 있었고, 그녀를 가엽게 여긴 義로운 조선 남자가 있었다. 역관 洪純彦이다. 역사를 바꾼 것은 홍순언의 측은지심과 은혜를 잊지 않은 그녀의 마음이었다.
역사의 장대한 시간을 놓고 볼 때, 찰나에 불과한 그 짧은 인연이 그들 개인과 가족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역사란 수많은 씨줄과 날줄이 서로 엮여서 결국 한 필의 비단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씨줄과 날줄이 만나는 지점에는 조선시대 외교의 최전방에서 활약했던 우리의 역관 홍순언이 있었다.
홍순언 (洪純彦. 1530~1598)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조선 선조 시절의 통역관이었다. 종계변무(宗系辨誣)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中人 신분의 역관임에도 우림위장(羽林衛將 .. 왕실의 경호를 맡는 종2품직)과 당릉군(唐陵君)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홍순언에 대한 기록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우선 조선시대에 중국, 일본 등과의 오교통상 관계를 수록하고 있는 통문관지(通文館志)에는, 조선외교의 기본 방침이었던 사대교린(事大交隣), 즉 强한 나라를 받들어 섬기고 (事大), 이웃 나라와는 대등한 관계에서 사귀어(交隣) 국가 안정을 도모하였던 외교 사례들과 그리고 일선에서 활약했던 譯官들의 행적을 기록해 놓았는데, 그 속에 홍순언의 일화도 소개되어 있다.
위와 같은 "통문관지" 외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실린 책은 30여권이 넘는데, 선조실곡, 성호사설(星湖僿說), 서포만필(西浦漫筆), 열하일기(熱河日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대동기문(大東奇聞) 등이 대표적이고 역사서 뿐만 아니라 소설집도 상당하다. 그만큼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는 의미일 것이다.
홍순언은 역관이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통역, 번역 등 역학(譯學)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던 관리로, 역어지인(譯語之人), 설인(舌人), 상서(象胥)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들은 중국, 왜, 몽골, 여진과의 외교에서 주로 통역업무를 맡았는데, 使行을 따라가 통역을 하거나 외국 사신이 방문하였을 때 통역을 맡아 외교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일찍부터 사역원과 승문원을 설치하고, 중국어를 비롯한 인접국의 언어학습을 장려하였다. 조선 초기부터 잡과(雜科)의 하나로 역관을 선발하는 譯科가 실시되었는데, 과목은 한학, 몽학, 여진학(후에 淸學으로 바뀜), 倭學이었다. 역관들은 기술과 행정실무뿐만 아니라 지식과 경제력에서도 양반계층에 뒤지지 않았으나, 늘 中人으로 대우 받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자 신분해방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나섰고, 근대화의 흐름도 주도적을 이끌었는데, 개화파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오경석(吳慶錫)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노걸대 老乞大
역관이 되기 위해서는 역과시험에 통과해야 했는데, 그 시험과목이라는 것이 한두 과목이 아니었다. 먼저 전공과목으로 중국어, 제2외국어인 몽골어, 외교문서 작성 능력을 묻는 이문(吏文)이 있었고, 교양과목으로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소학 시험을 치러야 했다.
역관이 된 후에도 시험은 평생 계속되었다. 해외출장을 갈 때마다 치르는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당연히 출장도 못가고, 월급도 받지 못했다. 이렇듯 역관이란 철저히 능력이 검증된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국제적인 감각, 세련된 메너와 함께 상대국의 고위 관리들과 대등하게 소통할 수 있는 학문을 갖추어야 했다. 역관은 그야말로 다방면의 재능이 요구되는 전문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외국 유학도 떠날 수 없었던 그 시절에 역관들은 어떻게 외국어를 공부하였을까? 당시 노걸대(老乞大)라는 중국어 교본이 있었다. 이 노걸대는 고려의 상인이 특산품인 인삼 등을 싣고 북경에 가서 팔고, 그곳의 특산품을 사서 돌아올 때까지의 내용을 담았다. 주요 장면마다 대화가 있어서 이것을 가지고 중국어를 익힐 수 있도록 하였다. 노걸대의 원간본은 고려 말에 원나라 시절의 중국어를 학습하기 위해 편찬되었는데,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시대에 맞는 노걸대가 편찬되었다.
역관들이 장사 이야기를 주로 다룬 노걸대를 교과서로 쓴 이유는 당시 조선 역관의 임무에는 사신들의 말을 통역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제무역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홍순언도 당연히 무역에 관여하였다. 그렇게 조선과 명나라를 오가다 石星의 부인이 될 여인을 만났던 것이다.
역관 .. 국제무역상 그리고 조선 최고의 갑부
아래에서 자세히 언급되겠지만, 홍순언이 중국 여인을 구하기 위해 쓴 돈을 생각해 보면... 300금이었다. 300금은 지금으로 치면 1,000만원 정도되는 돈이라고 한다. 홍순언은 별 고민 없이 그 돈을 그냥 내줬다. 그 큰 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사실 홍순언이 通州에서 중국여인을 구했던 돈은 관아에서 빌린 무역자금이었다. 조선으로 돌아와 그 돈을 갚지 못한 홍순언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대로라면 죽는 날까지 옥살이를 해야 했을 홍순언.. 조선 전기의 역관은 관아에서 빌린 자금 외에 人參을 기본 무역자금으로 사용했다. 역관에게는 출장비가 지급되지 않았는데, 대신 인삼장사를 해서 번 돈으로 경비를 충당하도록 하였다.한 번에 가져 갈 수 있는 허용량은 인삼 열 근이었다.
조선시대 인삼 열 근은 지금으로 치면 6kg이다. 당시 은으로 치면 250냥이고, 쌀로 하면 150가마이다. 그때 쌀 150가마니면 지금 돈으로 2,000만원이 넘는다. 이처럼 역관들은 使行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가져가는 인삼과 각종 관청에서 빌려주는 공급을 합해서 상당히 큰 무역자금을 만질 수 있었다. 역관은 국제무역을 통하여 조선시대 최고의 갑부로 떠오르기도 했다. 역관은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국가의 공인을 받은 국제무역상이었다. 역관을 통해 모든 국제무역이 진행되기 때문에 개인의 성향이나 사업 수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막대한 자금을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 까지 역관중에서는 당시 기준으로 따져서 조선 제일의 갑부라고 할 만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中人
위와같이 홍순언을 비롯한 역관들은 국제무역상이면서 전문외교관이었다. 통역이나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등의 전문적인 외교실무는 역관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양반들은 역관의 일을 가벼운 임무로 취급하고, 역관들은 자신들과 같이 설 수 없는 존재라 여기면서 무시하였다.역관에 대한 차별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적용되었다.
문과 응시생들은 에비시험에 해당하는 소과에 합격하면 백패 (白牌)를 받았는데, 역과 합격자는 급제를 해도 백패를 받아야 했다. 조선 초기에는 모든 합격자가 홍패를 받았지만, 역관을 천시하면서 문과 합격자와 구별하기 위해 백패를 지급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는 지역까지도 구분하였다. 조선시대 한양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을 북촌, 남쪽을 남촌이라 불렀는데, 北村에는 주로 고급 관료와 중신들이 살았고 南村에는 선비들이 살았다고 한다. 특별히 중앙인 청계천지역을 중촌이라 불렀는데, 중촌에는 전문기술직 관료들이나 역관, 의원들이 살았다. 조선 후기부터는 中村에 사는 사람들을 중인(中人)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홍순언이 살았던 보은단동(현재의 소공동)도 중촌이었다. 양반들은 중촌을 중바닥이라고 낮잡아 부르기도 하였다.
차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역관은 대대로 역관 직을 세습해야 했다. 홍순언 집안의 족보에는 나오지 않지만, 한 문헌에 따르면 역관이었던 아버지 홍겸(洪謙)의 직업을 물려받아 순언과 수언(秀彦) 두 아들 모두 역관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즉 한 번 역관이 되면 역관 이외의 다른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역관은 오를 수 있는 자리도 한계가 있었다. 역관들의 승진은 국법으로 제한되었다. 역관을 교육하고 양성하던 기관인 사역원(司譯院)의 정3품이 역관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이었다. 그러니 종2품의 우림위장 홍순언을 양반들이 인정할 리가 없었다. 홍순언을 파직하라는 상소가 연이어서 들어왔다. 홍순언은 출신이 미천하여 왕 친위군 장수에 합당치 않으니 바꾸소서. 홍순언은 서얼 출신으로 남에게 천시당하니 바꾸소서. 선조실록. 선조 24년. 1591년
조선 태조 3년(1394) 4월, 조선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도저히 믿기 어려운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명나라에서 조선 왕실의 가계를 잘못 기록한 사건이었다. 당시 명나라의 법령과 제도를 집대성해 놓은 대명회전(大明會典)이 이성계의 아버지가 엉뚱한 인물로 잘못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종계변무의 발단은 태조 3년(1394)에 명나라 사신 황영기(黃永奇) 등 세 사람이 와서 해악산천(海岳山川)의 제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고제축문(告祭祝文) 내용 중에 " 고려의 배신(陪臣 .. 임금을 가까이 모시면서 권세를 부리는 권신) 李仁任의 후손인 성계(成桂)는 운운 .... " 하는 구절이 있어, 조선 조정은 이 명나라 사신 편에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상세히 변무(辨誣)하는 글을 명나라로 보냈다.
그 후 태종 2년(1402)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다 돌아온 조온(趙溫), 공부(孔俯) 등이 고하기를, 명나라의 조훈조장(祖訓條章)에 " 이성계의 宗系가 李仁任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고 아뢰었고, 그 후 대명회전(大明會典)에도 이렇게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로부터 태종 ~ 선조 간, 12대에 걸쳐 전후 15회의 사신을 보내는 등 186년 간의 각고의 노력 끝에 선조 22년(1599)에 종계를 바로 잡고, 2년 뒤인 선조 24년에 그동안 宗系를 바로 잡는데 공이 큰 19人을 골라 輸忠貢誠翼謨修紀 光國功臣으로 책록하였다.
『 15차례의 사신 파견 현황 』
참고로, 조선시대, 중국에 보내는 사신은 정기사절과 임시사절이 있는데, 정기사절에는 정조사 (正朝使 ... 정월 초하루에 중국 황제를 배알하는 사절. 세배사절), 성절사 (聖節使 ... 중국 황제의 탄신일 경축사절), 천추사 (千秋使 ... 중국 황후의 탄신일 경축사절), 동지사 (冬至使 .. 동지를 전후하여 보내는 사절)가 있고, 임시사절에는 사은사 (謝恩使 .. 중국 황제가 호의를 베풀었을 때 감사하는 인사를 드리기 위해 보내는 사절), 진하사 (進賀使 ... 중국 황실의 경사를 축하하려고 보내는 사절 ), 주청사 또는 진주사 (奏請使, 陳奏使 ... 중국 황제에게 상주할 일이나 보고할 일이 있을 때 보내는 사절 ), 진위사 또는 진향사 (進慰使, 進香使 ... 중국 황실의 상고를 위문하기 위하여 보내는 사절 ), 변무사(辨誣使 ... 중국의 오해를 해명하기 위하여 보내는 사절), 참핵사(參劾使 ... 조선과 중국 간에 공동 논의 할 사항이 있을 때 보내는사절) 등이 있는데, 종계변무사신은 임시사절의 변무사에 해당한다.
종계변무 宗系辨誣
종계변무(宗系辨誣)란 왕실의 계보가 발못된것을 바로 잡는다...라는의미이다. 고려 말 1390년 (공양왕 2), 이성계의 정적이었던 윤이(尹彛), 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망가서 이성계를 타도하려는 목적으로, 공양왕이 고려 왕실의 후손이 아니고 이성계의 인척이라고 거짓 고자질한 적이 있었다. 이때 윤이 등은 이들이 공모하여 명나라를 치려한다면서, 이성계의 家系에 대하여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 후 명나라는 이 이야기를 믿고, 그 내용을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그대로 기록하였다. 조선에서 이러한 宗系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394년(태조 9) 4월이었다. 이때 명나라 사신이 와서 조선의 沿海民이 해구(海寇)활동을 하고 있다고 항의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압송을 요구하는 항의문에 " 高麗陪臣李仁任之嗣成桂今名旦者.... 즉 고려의 신하 이인임의 후손인 이성계의 지금 이름을 旦이라 하는 등.... "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에 관한 종계오기(宗系誤記)는 표면적으로 명나라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러나 건국 직후의 조선으로서는 왕통의 합법성이나 왕권 확립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종계 문제를 계기로 이성계를 의심하고 무심하였다. 이러한 宗系誤記를 빌미로 조선을 복속시키려고까지 하였다. 더구나 李仁任은 우왕 때의 권신으로 이성계의 정적이었다. 그런데 이성계가 그의 후사라는 것은 가장 모욕적인 말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양국간에 매우 심각한 외교문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에서는 그해 6월 明나라의 사신 황영기(黃永奇)가 귀국 편에 변명주문(辨明奏文)을 지어 사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여 보냈다. 그 내용은 태조 이성계의 家系 22代를 간략하게 기록하고, 태조 즉위의 정당한 이유에 대하여 밝히면서 이인임의 불법적인 행위를 상세하게 담고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1402년 (태종 2) 1월 성절사 장온(張溫)의 귀국 복명 속에 明太祖의 유훈(遺訓) 가운데, 조선 王의 家系는 이인임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여 지난번의 변명이 헛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곧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시 명나라는 2대 건문제(建文帝)와 3대 성조(成祖) 사이에 황제위의 계승문제로 내란중에 있었으므로 변무(辨誣)의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이듬해 4월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의 문제가 해결되고, 이어 10월에 면복(冕服) 등을 받아 와서 명나라와의 관계가 안정되었다. 그러자 조선은 11월에 사은사 임빈(林彬)을 파견하였는데, 그때에 종계변무의 임무를 겸하도록 하였다. 주청문(奏請文)에는 그동안 명나라와의 사이에 내왕한 문서와 태조 이성계의 가계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과 같은 이씨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이인임의 가계까지 상세하게 기록해 추가로 보냈다.
그러나 명나라로부터는 명태조의 遺訓이 " 大明會典 "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 만력회전. 萬曆會典" 중수본에서 변명사실을 附記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그리하여 종계변무는 이후 근 200년간이나 양국관계에서 외교문제가 되었고, 중종 때 反正의 합법성을 강조할 때에도 다시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즉 1518년 (중종 13) 주청사 (奏請使) 이계맹(李繼孟)이 돌아와 "대명회전" 조선국조(朝鮮國條)의 註에 " 이인임과 그의 아들 단(旦 .. 이성계의 이름)이 홍무 6년부터 무릇 네 王을 시해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음을 보고하였다.
그러자 中宗은 곧 남곤과 이자 등을 보내어 " 태조의 家系가 이인임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또 先世에시역(弑逆)한 일이 없다 "고 밝히고 그 개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의 무종(武宗)은 이 사실을 수긍하면서도 개정하지 않았다. 그후 조선 조정에서는 1529년, 1539년, 1557년, 1563년, 1573년, 1575년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청사를 보내어 개정의 주장을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1581년 (선조 14), 김계휘(金繼輝)를 주청사로 보내고 다시 1584년에는 황정욱(黃廷彧) 을 보냈다. 그리고 황정욱이 중찬된 "대명회전"의 수정된조선관계 기록의 등본을 가지고 돌아옴으로써 종계변무의 목적이 달성되게 되었다. 이어 1587년에는 주청사 유홍(兪泓)을 명나라에 보내어 이번에는 "대명회전"의 반사(頒賜)를 요청하였다. 명나라의 禮部에서는 황제의 친람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다가, 예부상서 심리(沈鯉)의 상주에 의해 명나라 황제의 칙서와 함께 중수된 "대명회전"의 조선관계 부분 한 질을 모냈다. 宣祖는 이것을 종묘, 사직, 문묘에 친히 고하였다. 그뒤 1589년에 성절사 尹根壽가 대명회전 전부를 받아 옴으로써 200년간의 종계변무의 외교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게 되었다.
홍순언과 중국 女人의 인연
통문관지(通文館志)는 사역원(司譯院)의 연혁과 사적을 엮은 책으로 12권 6책이다. 숙종시절의 역관 김지남(金指南)이 아들 경문(慶門)과 함께 쓴 것으로, 譯官으로서 使臣을 수행하면서 보고 들은 사실들을 참고로 하여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에 관한 연혁, 역사, 행사, 제도 등을 체계화하였다. 당시 외교에 종사하던 사신과 역관 등 실무진의 편람 및 사서의 구실을 하는 필수서가 되었고, 청나라와 일본에까지 유포하여 그곳 외교관에게도 조선에 관한 지침서가 되었다. 이 책에 역관 홍순언(洪純彦)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통문관지에 기록된 홍순언과 중국 여인의 인연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홍순언이 일찍이 중국 북경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 통주(通州)에 다다랐다. 조선에서 출발한지 두어 달 만이었다. 통주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고 거리를 걷던 그의 발걸음은 어느 기생집으로 향한다. 그와 조선의 역사에 기록될 운명적인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홍순언과 한 여인의 예상치 못한 인연이었다.
기생집을 찾은 홍순언의 눈에 어느 아름다운 중국 여인이 언뜻 들어왔다. 홍순언은 기뻐하면서 주인 노파에게 그녀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홍순언이 있던 방으로 여인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 여인은 소복(素服)을 입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홍순언은 그녀에게 사연을 물었다.
중국 여인 (유씨) ... 첩의 부모는 본시 절강(浙江) 사람으로 北京에 와서 벼슬살이 하다가 불행히 돌림병에 걸려 두 분 모두 돌아가셨는데, 지금 관(棺)이 객사에 있습니다. 저는 외동딸이고 부모님을 고향으로 모셔가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서 마지못해 스스로 이곳에 나왔습니다.
홍순언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가 가여웠다. 여인에게 필요한 돈을 물으니 300金이면 된다고 하여, 홍순언은 公金을 유용하여 그 돈을 건네주고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때 여인은 홍순언의 성명을 물었으나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여인이 " 大人께서 성명을 말씀하시지 않으면 첩도 주시는 것을 감히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므로 洪氏 姓만 말하고 나왔다. 동행한 일행은 그 이야기를 듣고 모두 그를 바보라고 비웃었다고 통문관지는 전하고 있다. 그런데 후일 이 여인이 명나라 조정의 예부시랑(禮部侍郞 ... 외무부 차관) 석성(石星)의 계실(契室 ..후실)이 되었다.
홍순언, 감옥에 갇히다
그 후 홍순언은 귀국하였으나, 공금 빚을 갚지 못해 여러 해 감옥에 갇혀 있었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의 " 태조실록 "과 " 대명회전 "에 이성계가 이자춘(李子春)이 아닌 성주 이씨 李仁任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고려 왕씨 네 王을 차례로 시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 오명을 벗기려는 종계변무 문제로 전후 10여 명의 사신이 명나라에 갔다 왔으나,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200여 년이 지나도록 종계변무가 해결을 보지 못하다, 宣祖가 분노하여 교지를 내리기를 " 이것은 역관의 죄이로다. 이번에 가서 또 청을 허락받지 못하면 마땅히 수석 통역관 한사람을 목 베리라 " 라고 하명하였다.
이에 모든 역관들이 감히 가고자 하지 않았는데, 역관들이, " 홍순언은 살아서 獄門 밖으로 나올 희망이 없으니 우리가 빚진 돈을 갚아주고 풀려나오게 하여 그를 중국에 보내자. 만일 그가 허락을 받고 돌아오면 그에게 행복이 될 것이고,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진실로 恨이 될 바는 없을 것이다 "라고 의논하고 모두 함께 가서 그 뜻을 알리니 홍순언이 개연히 승낙하였다.
죽음의 길 ... 그리고 反轉
이리하여 1584년에 홍순언은 주청사(奏請使) 황정욱(黃廷彧. 1532~1607. 황희정승의 후손)을 수행하여 북경 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使行 길은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었다. 홍순언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았다. 홍순언은 이미 10년 전인 1574년에도 종계변무의 임무로 북경에 다년 온 적이 있었다. 당연히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홍순언은 난감하였다. 10년 전에도 불가능하였던 일이 이제와서 성사될 가능성은 희박하였다.
어쨋든 종계변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북경으로 향한 홍순언은 동악묘(동악묘)에 들러 제례를 지냈다. 동악묘는 원나라 때 세워진 도교 사원으로 북경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조양문의 2리 밖에 있다. 명나라 때 조선의 사신들은 조양문(朝陽門)으로 가기 전에 먼저 동악묘에 들러 자신의 여정이 평안하도록 제사를 지냈다. 역관 홍순언도 동악묘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염원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홍순언이 동악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다음 날 조양문에 도착하였을 때 생각하지도 못한 놀라운 반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홍순언이 조양문 쪽을 바라보니 조양문 밖에 비단장막이 구름처럼 펼쳐져 있었다. 애초에 종계변무사인 홍순언 일행을 반가워할 사람이 있을 리 만무이었다. 그런데 애타게 그를 찾는 이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던 것이었다. 한 기병(騎兵)이 쏜살같이 달려와 홍 판사(判事)가 누구시냐고 묻고는, " 예부(禮部.. 외교부)의 석 시랑(石 侍郞)께서 公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부인과 함께 마중나왔습니다. 그동안 홍역관이 오는지 계속 찾았습니다 "
홍순언 일행을 맞이한 사람은 다름아니라 명나라의 예부시랑 (외무부 차관) 석성(石星)과 그의 부인이었다. 당시에는 명나라 예부 안에 있는 주객청리사(主客淸吏司)의 말단직원에 해당하는 통사판관(通事辦官)이 조양문으로 나아가 조선의 사신을 맞이하는 것이 관례이었으므로, 예부시랑이 직접 나왔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계집종 10여 명이 부인을 옹위하고 장막에서 나왔다. 石星이 홍순언에게 말했다.
당신은 통주(通州)에서 은혜를 베푼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내가 내 아내의 말을 들으니 당신은 참으로 천하의 의사(義士) 입니다. 이어 부인이 무릎을 꿇고 홍순언에게 절을 하므로 홍순언은 크게 당황하면서 사양하려 했다. 예부시랑의 아내는 홍순언이 지난날 통주에서 만났던 바로 그 柳氏 여인이었다. 당황하는 홍순언에게 류씨는 이렇게 말했다. 은혜에 보답하여 절하는 것이니 받으셔야 합니다. 군의 높은 은혜를 입어 부모님 장례를 지낼 수 있었으므로 감회가 마음에 맺혔습니다. 그러니 은혜를 어는 날인들 잊겠습니까
홍순언은 까마득히 잊고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홍순언 덕분에 부모님 장례를 무치르고 무사히 몸을 보전할 수 있었던 여인은 그 은혜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石星은 홍순언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리고 이번 使行의 목적을 전해 듣자, 곧바로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종계변무는 마침 석성이 侍郞으로 있는 禮部의 소관이었다.
200여 년만에 해결된 종계변무
홍순언 일행은 북경에 머무르면서 答을 기다렸다. 石星은 홍순언을 돕기 위해 특명까지 내리면서 애를 썼지만, 아무런 성과 없이 시간은 한 달이 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홍순언이 사신들의 숙소인 회동관에 머무른지 두 달이 거의 되었을 때 드디어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大明會典의 내용이 조선의 요구대로 바뀐 것이었다. 수정본인 大明會典 만력본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이성계는 전주의 혈통을 물려 받았고, 선조는 이한(李翰)이며, 신라의 사공(司空)이라는 벼슬을 하였다. 6대손 긍휴(兢休)는 고려로 왔다.
수정 전후를 비교해 보면, 만력본에는 이자춘(李子春)의 이름이 바르게 표기되어 있고, 정덕본에는 이성계의 숙적이었던 李仁任의 이름이 있다. 李仁入及子李成桂. 이성계는 이인임의 아들이다 (대명회전 정덕본. 1510년.... 子春是爲成桂之沒. 이성게는 이자춘의 아들이다. 대명회전 만력본. 1587년.
홍순언이 조선의 200여 년 숙원 사업을 해결하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가에 이르렀을 때, 그를 뒤쫓아 오는 이가 있었다. 石星의 부인이 선물을 보낸 것이다. 나전함 10개, 그 안에는 그녀가 직접 짠 비단이 10필씩 들어 있었다. 100필의 비단에 새겨진 보은(報恩)이라는 글자는 모두 부인이 직접 수놓은 것이었다.
후일 귀국한 후, 宣祖는 홍순언에게 땅과 노비도 하사하였는데, 홍순언이 받았다는 땅은 지금도 그 이름으로 남아있다 (현재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 이곳의 이름을 당시 사람들은 보은단동 또는 보은골이라고 불렀다. 당시 은혜를 입은 여인이 報恩이라고 새긴 비단을 홍순언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
홍순언, 光國功臣이 되다
사실 조선 조정은 역관 홍순언에게 그다지 큰 기대를 걸지 않았었다. 그러니 홍순언 일행이 돌아왔을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종계변무의 성공을 축하하며, 후에 숙종 때 펴낸 시집 " 광국지경록 (光國志慶錄) " 을 보면 宣祖가 얼마나 감격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금수의 나라를 예의의 나라로 돌아가게 하니 나라가 다시 만들어졌다. 종계변무의 성공은 대내외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상당히 큰 성과물이자 왕실의 경사이었다. 하나는 왕실이 계보를 바로잡고 외교적 자신감을 회복하였다는 것 그리고 사대부와 백성들에게 떳떳하게 王家의 정통성을 내보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종계변무의 성공으로 홍순언은 나라를 빛낸 공신이 된다. 선조는 종계변무를 성공시킨 신료들에게 광국공신(光國功臣)의 칭호를 내리게 되었는데, 19명의 광국공신 가운데 역관은 홍순언 단 한 명이었다. 그중에서도 홍순언은 2等으로 올라가 있어서, 정철(鄭澈)이나 유성룡(柳成龍)보다 높은 功을 인정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선조 24년 종계변무의 해결에 따른 공로자 19명에게 공신책록을 하였는데, 공신명(功臣名)은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 (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이며 보통 생략하여 광국공신(光國功臣)이라고 한다.
그 후 홍순언은 곧바로 우림위장(羽林衛將)으로 임명되었다. 우림위장이란 임금을 경호하는 군대의 사령관으로 종2품에 해당하는데, 원래는 역관이 오를 수 없는 자리이었다. 이때 사간원에서는 두어 차례 탄핵을하였다. " 출신이 한미한 서얼이라서 남에게 천대 받는다 "는 것이 이유이었는데, 선조는 이를 물리친다.
또 선조는 홍순언에게 당릉군(唐陵君)이라는 군호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君號를 받는다는 것은 임금의 친족과 같다는 뜻으로 신하로서는 최고의 영예이었다. 宣祖는 홍순언에게 땅과 노비도 하사하였는데, 홍순언이 받았다는 땅은 지금도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지금의 을지로 입구 롯데호텔 자리가 조선의 숙원이었던 종계변무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온 홍순언에게 왕이 노비와 집을 하사해 주어 그가 살았던 역사의 현장이다. 당시 조선은 보은단동이라는 이름으로 홍순언을 기억했다. 당시 은혜를 입은 여인이 報恩이라고 새긴 비단을 홍순언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곳을 보은단동(報恩緞洞) 또는 보은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살던 동네에는 지금 롯데호텔이 자리하고 있고, 그 앞에 "고운담골"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보은(報恩) 두 글자가 수놓인 비단을 기념하여 동네 이름이 보은단골인데, 고운담골, 곤담골로 바뀌었다. 고운담골을 한자로 표기하면 미장동(美墻洞)이다.
역관 홍순언의 능력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다시 발휘된다.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러 사신이 가면, 홍순언도 따라 갔고, 선조와 고관들은 그에게서 반가운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그를 믿고 조선 정세를 파악하였으며, 선조가 이여송을 만날 때에도 홍순언이 통역하였다.
석성이 과연 홍순언이 구해준 여인과 혼인한덕분에 조선에 원군을 보냈는지, 역사 자료만 가지고 확인할 수는 없다. 야담이나 야사에서는 여인이 몸을 팔게 된 이유도 달리 나오고, 석성의 벼슬도 달라지며, 그가 해결해 준 현안도 달라진다. " 청구야담 "에서는 홍순언이 1586~1587년 사이에 북경에 갔다가 청루 문위에 " 은 천냥이 없으면 들어오지 못한다 "고 쓴 것을 보고는 중국의 탕아들도 값이 비싸서 들어갈 생각을 못하는데, 그는 " 부르는 값이 그만큼 비싸다면 반드시 뛰어난 미인일 것이다 " 라고 생각하고, 수 천냥을 털어 그 여자를 샀다고 한다.
이미 종계변무가 해결된 뒤이니, 이 책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 원군 요청의 임무를 띠고 홍순언이 파견되었으며, 병부상서 石星이 해결해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종계변무는 외교적 사안이니 예부에서 담당하고, 원군 파견은 군사적 사안이니 병부에서 담당한다. 석성의 벼슬은 그에 따라 달라진다. 홍순언은 공금을 횡령하여 청루의 여자를 산 협객인데, 결과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의 이야기에 살이 덧붙어 야담과 소설이 39종이나 되고, 박치복이라는 시인은 5언 264구의 장편서사시 보은금(報恩錦)을 지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라이 발발하였다. 왜군이 상륙한지 하루 만에 부산 동래성이 함락되고, 20일 후에는 서울까지 빼앗긴다. 宣祖가 치욕스러운 피난길에 올라야 할 만큼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조선으로서는 명나라의 도움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처지이었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조선 파병에 주저할 뿐이었다.
망설이는 明나라 그리고 石星
선조 때 학자 유성룡(柳成龍)의 시문집인 " 서애집(西涯集) "에는 당시 머뭇거리며 조선 파병에 반대하던 명나라 신하들의 목소리가 잘 나와 있다. 외국끼리 싸우는데 중국이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압록강을 굳게 수비하면서 형세나 살펴 봅시다. 조선이 갑자기 새처럼 숨는 것은 분명 자초한 재앙입니다. 우리가 멀리 외국까지 가서 돕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 와중에 조선을 돕자고 주장하는 이는 오직 兵部尙書(국방부 장관) 인 석성(石星) 한 사람뿐이었다.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조선은 외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조선의 사정은 우리의 사정입니다. 만일 왜적이 조선에 살게 되면 요동을 침범할 것이고, 또 나아가 산해관에 이르면 북경이 위태로워집니다. 조선은 다른 나라와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위와 같이 석성은 가도입명(假道入明)으로 설명하고 있다. 일본의 豊臣守吉의 목적은 조선의 길을 빌려 明으로 넘어 가는 것, 다시 말하면 최종 공격목표는 명나라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다면 명나라가 조선에 들어가서 미리 왜군을 막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결국 석성은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는 점을 들어 명나라의 전략적 결단을 서두르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석성의 주장은 입술이 망하면 이가 시리다는, 이른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논리이었다. 일본이 조선 땅을 점령하면 그 다음은 명나라로 향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명나라가 조선을 돕는 데 주저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명나라에서는 이미 왜군의 움직임을 주목하는 동시에, 조선도 더불어 의심하였다. 조선이 왜와 함께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소문이 요동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산해관에 홍순언이 도착하였을 때 명나라 백성들은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욕을 퍼부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불과 보름 여 만에 宣祖가 평양까지 피난하자 명나라 조정의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임금이 피난을 가장하고 왜군의 길잡이가 되어 북상한다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부터 명종 대까지 역대 野史를 기술한 " 기재잡기. 奇齋雜記"에는 명나라가 송국신이라는 관리를 보내 직접 확인까지 했다고 나온다.
그대 나라가 모반을 도모한다는 말이 있소.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떻게 8道 관찰사 중 누구 한 사람도 한마디 말 하는 이가 없고, 8道에서도 누구 하나 義兵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소. 이것은 분명히 명나라에 대한 음흉한 반역이 분명하오. 내가 일찍이 국왕을 뵌 일이 있기 때문에 국왕이 실제로 피난 온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러 온 것이오..
石星, 홍순언을 부르다
명나라로부터 援軍이 오기를 기다리는 宣祖로서는 암담한 일이었다. 명나라가 조선을 믿게 하려면 조선에서도 무언가 움직임을 보여야 하였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명나라의 병부상서 (兵部尙書, 국방부장관) 석성은 다른 고위 사신이 아닌 역관 홍순언을 급히 불러 사태를 설명하였다. 석성 혼자서 다른 대신들의 마음을 돌리기는 힘들기 때문에 조선이 직접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이었다.
홍순언은 石星의 말을 조선에 급히 전하였고, 결국 명나라는 원군을 파병하게 되었다. 결국 홍순언과 석성의 개인적인 인연에 더하여 홍순언의 외교 역량이 조선의 운명을 구한 것이다. 석성을 만나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에 홍순언은 경비를 털어 무기 재료를 구입한다. 명나라에서 반출이 금지된 품목이지만, 石星의 허락을 받아 활을 만드는 궁각(물소 뿔) 1308편과 화약 재료인 염초 200근을 구할 수 있었다.
홍순언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선으로 돌아온 홍순언은 명나라 장군 이여송의 통역관이되어 함께 전장을 누볐다. 가장 시급한 일은 평양성을 재탈환하는 것이었다. 1593년 1월,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와 조선의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드디어 전세는 반전되었다. 이후 전란은 7년간 계속되었고, 명나라는 총21만 명의 군사와 882만의 은화를 지원하였다. 마침내 1598년 9월, 왜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星湖 李瀷이 말하는 석성과 홍순언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개입이 없었다면, 조선은 참으로 난처한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5월 3일 서울에 무혈입성하였고,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달아났다. 그리고 호시탐탐 明나라로의 亡命을 노리고 있었다. 이즈음에 명나라의 원군이 없었다면, 그 결과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명나라의 원군이야말로 조선이 왜군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역할을했던 것이다.
조선이 이후 명나라의 도움을 "재조지은 (再造之恩) .... 다시 살려준 은혜"라고 표현했던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만 명나라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파병을 고려했던 것은 아니었다. 남의 나라 전쟁에 무었 때문에 돈을 들이며 군사를 보낸단 말인가.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파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사람은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이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은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 壬辰再造에서 임진왜란의 최대의 공로자로 石星을 꼽았다. 이순신(李舜臣)은 그 다음이고, 이여송(李如松)과 심유경(沈惟敬)이 또 그 다음이다.
왜 石星 .....이 첫째인가? 성호 이익에 의하면, " 석성이 아니었으면 명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을 것인바,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의 일을 힘써 주장한 사람이 바로 석성이었다는 것 "이라고 한다. 두 번째 공로자, 李舜臣.....은 해전에서 왜군의 수군을 꺾는다. 이에 왜군은 보급이 어려워졌고, 주춤하여 평양성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곧 이순신의 승전은 宣祖가 불과 이틀거리의 義州로 왜군이 진격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李如松.......은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왜군을 밀어냈으니 세 번째 공로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沈惟敬......은 혈혈단신 평양성으로 들어가 왜군과 담판을 짓는다. 그 결과 자신이 황제에게 보고하여 결과를 얻어올 때까지 50일 동안 평양성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 틈에 이여송의 부대가 도착하여 왜군을 평양성에서 밀어낸다. 그 뒤 三南이 여전히 왜군의 손에 있을 때, 심유경은 다시 명나라가 군대를 동원하여 서해를 거쳐 충청도로 들어와 왜군의 귀환로를 끊을 것이라고 小西行長을 속인다. 이로 인하여 왜군은 삼남에서 철수하여 남쪽 바닷가로 물러간다. 곧 삼남이 병화를 면한 것은 모두 심유경의 힘이 컷다는 것이다. 요컨데 심유경 또한 적지 않은 공을 세운 사람이다.
한데 애당초 심유경이 왜국 사정에 밝은 사람이라 하여 명나라 황제 神宗에게 추천한 사람 역시 석성이었으니, 이순신을 제외한다면 심유경과 이여송의 공 또한 석성에게서 유래한 것이라 하겠다. 성호 이익은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했다. 당시 중국 조정에서는 " 외번(外藩)을 위해 재력을 쏟아 부을 수는 없으니 조선을 둘로 나누고, 왜적을 막을 만한 사람을 찾아서 그에게 맡기면 충분하다 "는 의견이 있었다. 즉 왜군의 점령지는 그대로 두고, 왜군을 막을 적임자를 골라서 그에게 비점령지를 맡기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의견을 극력 반대, 배제하였던 사람이 바로 석성이다. 만약 석성이 아니었다면 조선은 그 계획대로 半分되고 말았을 것이다. 또 조선이 왜군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략하려는 것 ..이라는 주장도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었지만, 석성이 그렇지 않음을 역설하여 명나라의 군대가 조선에 출병할 수 있었다는것이다.
성호 이익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명나라는 절(浙), 섬(峽), 호(湖), 천(川), 운(雲), 귀(貴), 면(緬) 등 남북지방의 군사 21만 명을 동원하였고, 883만 냥이 넘는 은(銀)을 전쟁비용으로 썼다고 한다. 이 때문에 중국 남부지방의 재력이 바닥이 초래되었고, 명나라는 이로 인해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성호 이익은 이 거대한 출병은 조선의 한 두 신하가 하소연한 결과가 아니라, 모두 石星의 힘이라고 말한다. 석성은 왜 원군을 극력 주장하였던가? 왜적의 조선 침략과 점령 그리고 예상되는 북경 공략은 명나라로서는 참으로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고, 석성은 그 점을 가장 설득력있게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공식적 해석 뒤에는 비공식적인 해석이 따라 붙는다. 성호 이익은 바로 홍순언을 언급하고 있다. 석성과 홍순언의 인연을 !!!!!
석성의 獄死와 조선의 外面
석성은 일본과의 강화를 추진했던바, 정유재란이 일어나 전쟁이 재연되자 강화 실패와 조선 출병의 필요성을 고장하여 막대한 전비를 소모케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고, 마침내 옥사한다. 조선의 조야(朝野)는 그의 투옥과 죽음을 동정해마지 않았지만, 끝내 석성을 구원하는 구체적인 행동은 없었다.
이항복(李恒福)이 북경에 갔을 때, 석성의 문인(門人) 양씨(楊氏)라는 사람이 찾아와 " 귀국에서 말 한 마디라도 올려 구원해 주기를 바란다 "고 간청하였지만, 조선은 " 웃으면서 방관했을 뿐이고, 사신 한 사람 보내어 그의 원통함을 변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는 것이다. 성호 이익은 이 점을 비판하고 있다.
석성의 죄란 봉공(封貢 .. 왜의 명에 대한 조공) 문제를 성사시키지 못한 것에 지니지 않았고, 조선이 석성을 허물한 것은 또 뒤에 그가 강화를 주장하였다는 데 지나지 않았다. 전쟁에서 대승을 거둘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일본이 봉공을 청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빨리 강화하고 전쟁을 끝내는 것이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다행히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은 성호 이익의 판단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선조를 비롯하여 조정의 신하들은 석성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위하여 글을 올리려고도 했다. 다만 실행하지 못했을 뿐이니, 그 결과는 성호 이익이 말한 바와 같았던 것이다. 어쨋거나 조선은 배은망덕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위 사진은 석성의 초상화이다. 홍순언은 임진왜란이 끝난 해인 1598년 자신의 임무를 다한 듯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조선에 원군의 파병을 주장하였던 明나라 병부상서 石星은 심유경의 탄핵으로 막대한 군비 소모의 책임을 지고 투옥되었다가 1599년 결국 옥사(獄死)하고 말았다.
조선, 석성의 도움 요청을 묵살하다
석성은 자신의 사정을 조선의 국왕인 선조에게 알려 명나라 황제, 신종에게 자신을 석방하도록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당시의 조선조정은 국내의 피폐한 상황도 그렇고, 자칫 명나라 황제의 분노를 살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석성의 하소연을 묵살하고 만다.
石星의 가족들, 조선에 귀화하다
이때 석성은 죽기 직전에 부인 류씨와 자녀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명나라를 떠나 조선으로 가라고 유언하였다. 자신때문에 가족들이 위험해질 것을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석성의 부인과 두 아들은 조선으로 넘어와 황해도 해주(海州)에 정착하였다. 그러자 선조는 석성의 아들 석담(石潭)을 수양군(首陽君)에 봉하고 토지를 하사하였으며, 후손들은 본관을 해주로 삼았다. 이 아들 석담이 해주 석씨의 시조이며, 자손들은 고위 관리를 역임하고 가문을 빛냈다. 현재의 집성촌은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와 산청군 영서면 일원이다.
하지만 곧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해주 석씨 일가는다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청나라 군사들이 명나라 유민들을 잡아들이기 위하여 조선 땅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 것이다. 결국 석성의 후손들은 청나라 군사를 피해 황해도 해주 땅을 등지고, 지금의 지리산 자락에 들어와 터전을 잡았다.